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412)
412. 내전은 끝이었다.
엔크리드는 떨어지는 빗줄기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비가 몸에 묻은 피를 씻어 냈다. 그게 피로한 몸을 감싸 주는 기분이 들었다.
에스터를 품에 안고 잘 때면 가끔 이런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때와 비슷했다.
‘에스터가 뭘 했나?’
그런 것 같았다. 백작의 반응, 악마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빗줄기는 굵어지는 대신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빗물이 땅에 고이고 핏물을 씻으며 가벼운 물줄기를 이뤘다.
일만 망령을 뚫고 들어와 백작을 벴다.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이걸 간단한 일이라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한 일이었다. 그만한 위업이었다.
엔크리드는 떨어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숨을 고른 뒤에 부러진 실버의 반쪽을 챙겼다.
그렇게 죽은 백작의 시신을 보며 삐걱대는 몸을 움직였다.
아우딘 또한 그제야 금제로 인한 마비가 풀려 움직이는 중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제님.”
“너도.”
담백한 대화다. 아우딘은 저벅저벅 걸어가 죽은 백작의 곁에 다가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건 사제의 의무이니.
그의 삶에 죄만 가득할지라도 주의 곁에 머물러 반성할 기회를 주길 원하노니.
“주의 곁에 머물러 가르침을 받길 원하나이다.”
아우딘이 믿는 신은 죄인을 징치하는 걸 즐긴다. 그의 가르침이란 친히 두들겨 패는 데 가까운 것이었다.
죄인의 반성은 주의 주먹과 발이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들렸다.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평안하겠냐?
엔크리드는 들으며 생각했다.
라그나가 일어나며 잠깐 비틀댔다. 신음 따위를 내뱉진 않았지만, 몸뚱이가 정상은 아니란 거다.
그조차도 무리했다.
검이 망가지고, 몸에 두른 보호대도 대부분 찢어지고 깨졌다.
다행히도 그런 라그나를 보고 놀릴 놈도 없었다.
작센 또한 배에 구멍이 난 채다. 그럼에도 담담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끝났군요.”
그러며 말하는데 뭔가 시원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드물게 감정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직접 찌르고 싶었나?
그럴지도 몰랐다.
비는 계속 내렸다. 엔크리드는 혼자 일어나지 않고 버티는 렘을 바라봤다.
렘 또한 그런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안 일어나고 뭐 하냐?
엔크리드가 눈으로 물었다. 렘은 아까부터 한참을 고심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대장.”
“뭐?”
“날 업을 수 있는 영광을 주겠수.”
제 발로 못 걷겠다는 소리였다.
“겨우 그걸로 못 걷는다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라그나가 말했다.
“허약 체질?”
작센 또한 한마디를 보태고.
“평소 단련이 부족하셨나 봅니다.”
아우딘의 걱정이 작렬했다.
“대장이 나한테 고마워할 테니까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물론 어떤 말도 렘의 단단한 얼굴 가죽에 손상을 줄 순 없었다.
엔크리드는 상황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렘이 가장 무리했다는 건 인지했다.
사실이 그랬다.
렘은 전투 대형을 이루기 전에도 주술을 썼는데 그건 타인의 주술을 임의로 가져다 쓴 거였다.
주술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하는 행위 중 하나였다.
타인의 기원을 훔쳐서 쓰는 격이었으니까.
렘이 한 건, 불노의 광인이 직접 사용하기 위해 만든 토템을 변용해서 억지로 쓴 거였다.
그걸 무리해서 썼으니 반동이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투 대형의 중심에서 중간 조율자를 맡기도 했다. 토대가 된 아우딘보다도 고된 일이었다.
몸이 비명을 질러 대는 게 당연했다.
몸이 망가지는 걸 견디면 일어나 걸을 수 있었지만, 렘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했으면 업혀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재밌을 것 같으니까.’
빨리 몸을 회복시키려는 욕심도 있었다. 마지막 엔크리드의 칼질을 보았다. 백작을 베던 순간이다.
‘빨리 회복하면 대련도 더 빨리할 수 있지.’
어느새 엔크리드에게 물든 렘 또한 그와 검을 나누고 싶었다.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 제대로 할 것이다. 그러니 업힐 거다.
담담한 말투와 달리 렘의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어떻게든 업혀서 가겠다는 의지가 빗줄기를 증발시키는 듯했다.
“내 몸은 멀쩡해 보이냐?”
엔크리드가 덤덤히 물었다.
“나보다는.”
렘은 당당했다.
과연 미친 새끼.
그럼에도 업으려 했다. 그 정도 일은 해 준 놈이니까.
다행히 직접 업을 일은 없었다.
“내가 업을게.”
언제 왔을까.
둔바켈과 테레사다. 호흡을 고르며 달려온 둘이 있었으니까.
그중 둔바켈이 나섰다.
“그래라.”
렘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사실 누가 업든 상관없었으니까.
둔바켈이 렘을 업고, 엔크리드가 대강 주변을 수습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엔크리드와 일행은 아군 막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망령을 뚫고 온 길이 생각보다 길진 않았다. 뚫고 들어갈 때는 꽤 많이 온 것 같았으나, 돌아갈 때 보니 짧은 길이다.
적군은 고요했고, 아군은 더 고요했다. 그 고요한 길을, 제 손으로 뚫었던 길을 돌아가는 이들이다.
모두가 그들을 바라봤다.
정작 엔크리드와 일행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앞으로 크랑이 다가왔다.
비에 쫄딱 젖었으나 비 맞은 생쥐 꼴은 아니었다.
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승리감에 도취한 것도 아니었다.
표정만 봐서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동공이 흔들리는 것만 보였다. 태도와 표정은 태연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감정은 숨겨지지 않은 채였다.
* * *
백작이 죽기 직전, 병사들은 망령 병사와 싸우며 제 몸을 차지하려는 망령과도 싸웠다.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고 버티고 또 버텼다.
‘언제 끝나지?’
체력의 한계.
‘그냥 죽는 게 나을지도.’
정신력의 한계.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망령 병사는 두려움 따위도 없는지 끝없이 몰려오고.
놈들은 왕국군이든 백작군이든 가리지 않고 덤볐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망령의 파도 앞에서 두 개로 나뉜 군대는 서로 섞이며 싸웠다.
활약한 이들이 견뎌 내는 것도 한계였다.
와중에 병사들은 끔찍한 악몽과 환영을 보았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그건 악몽도 환영도 아니었다. 몰센 백작과 싸우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에스터의 주문이 영향을 끼치고 백작의 주문과 엮이며 기묘한 일이 벌어진 거였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병사의 눈은 엔크리드의 싸움을 보았다.
마커스 또한 보았기에.
‘이겨라.’
응원을 보냈으며.
에이시아 또한 봤기에 주먹을 쥐었다.
‘나도 저기 있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당장 몸을 뺄 수도 없었다. 어디서 굴러온 양치기라는 놈이 활약하고 있긴 해도, 자신이 빠지면 왕자가 위험했다.
에이시아와 달리 둔바켈과 테레사는 상황을 보자마자 뛰었다. 고기 방패가 되든 불시에 뒤통수를 치든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 둘이었다.
앤드류는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에스터가 아직 일어나지 못했고, 이 자리를 지키는 게 제 일이라 판단했다.
그러니 그저 지켜봐야 했다.
병사들은 살았다고 외칠 힘도 없었다.
“흐헉.”
숨을 토해 내며 쓰러지는 병사가 태반이었다. 그나마 버티던 이들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승리의 환호를 내지를 힘도 없던 거다. 떨어지는 빗줄기에 몸이 젖어 갔다.
그나마 비가 떨어져서 더 다행이긴 했다.
왠지 몸에 묻은 망령의 기운 따위가 씻겨 나가는 것 같았으나.
그게 맞기도 했다. 에스터가 한 일이 그거니까.
현실에서 눈을 뜬 에스터는 일어난 현상을 이해한 뒤였다.
백작은 주문 세계를 이 땅에 불러내려 했으나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아니었다. 악마의 힘이 개입해서 생긴 일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론 멍청한 짓이었다.
아마 성공했다 하더라도 병신 같은 마법사는 제 몸을 빼앗기고 홀린 채 병신 같은 짓을 반복했을 것이다.
가령 키메라를 만든 것처럼 왕국민을 전부 실험체로 만드는 것 따위의 일을 했을 거다.
그보다 더한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악마의 속삭임이란 그런 것 아닌가.
악마의 힘을 빌려 만든 주문을 일일이 파훼할 수 없기에, 에스터는 가진 마력 중 태반을 사용해 비가 내리게 했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의식에 백작의 모습이 비쳤을 것이다.
에스터 또한 보았다.
백작을 베고 악마도 베려 했던 미친놈을.
에스터는 악마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이야기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크랑은 엔크리드의 싸움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손에 땀이 차진 않았다.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무력함을 느끼는가?
아니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무대가 있다.
지금의 무대는 제 친구가 나서 줘야 할 순간일 뿐이었다.
그러니 믿고 또 믿는 게 크랑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믿는다.’
믿음은 배반당하지 않았다.
신뢰는 보답받았다.
빗줄기가 쏟아지며 망령이 스러졌다. 살아난 병사들 사이로 크랑이 발을 뗐다. 크랑은 말없이 걸어 나갔다.
“주군?”
마커스가 그를 불렀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크랑은 돌아오는 엔크리드와 마주 선 뒤에야 멈추곤 잠깐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칭송하라, 우리를 구한 영웅을 위해.”
목소리는 작고 나직했다.
크랑의 뒤를 따르던 마커스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 혼자만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에이시아 또한 절뚝거리며 따라와선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으니.
엔크리드를 보며 크랑은 숨을 들이켜 배에 힘을 줬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칭송하라! 우리를 구한 영웅을 위해!”
목소리가 퍼졌다. 크랑의 특기 중 하나였다. 배에 잔뜩 힘을 줘 터트리는 외침이었다.
“우.”
병사 하나가 울면서 고개를 들었다. 빗줄기가 떨어져 얼굴을 적셨다.
“우어어어어!”
“살았다아아!”
“영웅을 위하여!”
“미치광이 중대를 위하여!”
서로의 외침이 섞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변했다.
빗줄기가 일순간 넓게 퍼질 것 같은 외침이다. 그만한 열기다.
그 열기의 중심에서, 늙은 지휘관 하나는 통일되지 않은 외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보지 않았던가.
백작이 악마로 변했고 그걸 베어 버린 우리의 영웅을.
지휘관은 마음을 담아 외쳤다.
“전부 따라 해라!”
그를 따르는 병사가 많았다. 망령이 몰려왔으나 끝내 버텨 낼 수 있었던 지휘를 보여 준 위인 아니던가.
그 또한 그들에게 영웅임이 분명하니.
“데몬 슬레이어!”
악마 살해자.
악마를 벤 자의 위엄을 널리 알려라!
지휘관의 말에 주변 병사들도 함께 외쳤다.
“데몬 슬레이어!”
그들의 외침은 금세 주변으로 전염됐다.
“데몬 슬레이어!”
“악마 살해자!”
비는 계속 내렸다. 처음에는 에스터의 마력에 반응했으나 이건 원래 내려야 할 비였다.
즉, 먹구름이 꼈기에 밝은 햇볕 따윈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는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악마를 죽였고 망령을 없앴으며 전쟁을 끝낸 사람이 빛나지 않으면 무엇이 빛난단 말인가.
“악마 살해자!”
정작 죽지 않은 악마가 들으면 억울해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박 갈 만한 칭호였다.
엔크리드는 멀뚱히 그걸 들으며 말했다.
“악마는 안 죽였는데.”
“정확히는 귀족 살해자가 맞는 말이긴 하지.”
렘이 사실을 기반으로 말했다.
“악마 하수인 살해자가 맞지요.”
아우딘 또한 말했다.
종교적 시선으로 봤을 때, 상대의 정체는 명확했다. 아우딘의 시선으로는 그랬다.
“알 바냐?”
라그나가 담담히 제 의견을 말함으로 개소리를 일축했으며.
작센은 평소와 같이 말이 없었다.
둔바켈은 제 등 뒤에 업힌 렘을 이대로 집어 던지면 나중에 보복이 얼마나 심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테레사는 내심 아우딘의 말에 동의했다.
크랑은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엔크리드를 포함해 하나같이 영웅이라 불리기 무방한 이들이었다.
또한 이들이 얼마나 미친 새끼들인지는 수도까지 오며 이미 알게 된 상태였다.
‘한결같이 미쳤군.’
웃으며 한 생각이다.
엔크리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랑의 생각을 읽은 건 아니지만, 자신이 가장 정상이라 생각했다.
“고맙다. 제일 미친놈아.”
그러하기에 크랑이 한 말에 엔크리드는 당황할 뻔했다. 백작이 죽고 악마가 나왔음에도 곧바로 덤비려 했던 엔크리드였으나 이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제일 미쳤다고?
“구국의 영웅이 된 거다.”
크랑은 이어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왕자가 보인 극진한 예다.
주변 병사가 다 보고 있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왕자고 뭐고 대우할 만한 정신이 없긴 했다.
“됐다.”
그래서 왕자의 어깨를 쥐고 일으켰다. 할 일을 했다. 칭송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으며, 크랑이 보인 태도도 나쁘지 않다.
다만, 하나는 넘겨짚어야 하니.
“왜 내가 제일 미쳤다는 거냐?”
렘 새끼가 있는데?
크랑은 친우가 한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가자. 먹고 마시고 쉬자. 왕궁의 살림을 거덜 내도 좋다!”
악마 살해자란 외침 사이로 살았네, 이겼네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백작군이었던 적병은 조용히 무기를 버렸다.
내전은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