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424)
424. 손님
렘이 결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 또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하!”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끈적한 날씨가 되거나 말거나.
미친놈처럼 검을 휘두르는 놈을 보고 있으면 절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마련 아니던가.
렘이 어떤 계기로 결심을 다졌다면.
라그나는 새삼 자신의 재능을 되새겼다.
관조의 자세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 거다.
‘내가 가진 건 무엇인가.’
가장 우선은, 지름길을 찾는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탁월한 수준이니.
길을 찾는 건 타인의 인정이 중요한 재능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길잡이 생활을 할 건 아니지만.’
실제 라그나는 길잡이 생활도 했었으나, 한 번이라도 그를 고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학을 뗐다.
싸움은 더럽게 잘하지만, 동서남북도 구분 못 하는 미친 길잡이.
일부러 마물이나 마수가 나오는 곳을 찾아간다는 오해도 있었다.
길잡이 길드는 한때 라그나란 이름만 들어도 기겁하곤 했었다.
길잡이의 재능은 그렇게 넘어간다 치고.
‘다음은?’
검이다. 검술이다. 타고난 재능이 어디 가진 않으며,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다.
가령 길잡이의 재능처럼 검에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것처럼.
‘그럼 부족한 건 무엇인가?’
잘하는 부분을 아는 건 충분했다.
길잡이로서는 손색이 없다고 해도 검술은 아니었다.
손색이 없고 막힘이 없었다면 이미 기사의 수준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아니다. 막혔다. 검술의 흐름이 끊기는 기분까지 든다.
부족한 게 있다는 거였다.
최근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게으름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라그나의 실상은 내면을 관조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뒤에 움직였다.
‘기본기.’
휘두르고 베고 찌르는 모든 동작을 말함이다.
라그나는 기초적인 체력 훈련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밟아 온 길을 역순으로 도로 걸었다.
길 찾는 재주가 형편없어도, 제가 꾹꾹 눌러 밟은 발자국을 보며 돌아가는 건 라그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안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기사는 왜 되려고 하는데?”
예전이었다면 그 질문에 답을 못 하고 멈췄을 테지만.
“기사가 되어야만 다음을 볼 수 있다.”
라그나는 이제 다음을 기다렸다. 가장 가까운 목표도 있었다. 아즈펜에서 왔던 기사다.
그를 꺾는 것이다.
렘의 결심만큼이나 라그나도 변한 셈이었다.
작센은 따로 심경의 변화를 겪을 일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바가 있지 않던가.
대신 몸이 바빴다. 그는 쉼 없이 돌아다녀야 했다. 제 길드원 설득에 실패하면 당장 엔크리드의 식사에 독을 탈 놈들이 즐비했으니까.
엔크리드는 그 사이에서 여전히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의 궤적을 본 프록이 감탄과 함께 말했다.
“깔끔하군.”
다년간 수천 번이 넘게 반복한 듯한 그런 기본기다.
루아가르네가 보기에 기본기만 따지자면 엔크리드만 한 놈은 처음이었다.
‘너무 당연한 말인가?’
루아가르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말 같기도 했다.
천재는 재능을 타고나기에 같은 동작이라도 몇 번 해 보면 금세 그 이치를 깨닫고 해석해서 개조하곤 했다.
‘그럼 그걸 완벽히 체득했다고 할 수 있을까?’
번뜩이는 재능은 지름길을 보여 주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리라.
노력이 없다면 천재 또한 자신의 재능에 잡아먹힐 뿐이니.
루아가르네는 그런 불운한 이들 또한 여럿 보았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무엇인가.
끈기다. 끈기가 없는 재능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새의 지저귐과 같았다.
저 지독할 정도의 끈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루함, 지겨움 따위를 생각지도 못하도록 반복하게 하는 요소는?’
“후.”
폐부 깊숙한 곳의 공기를 내뱉으며 엔크리드가 검을 내리쳤다.
조금 전과 완벽히 똑같은 궤적을 그린 동작이다.
머릿속으로 가상의 대련 상대를 그리고 휘두르는 검이 아니다.
지루할 정도로 매일 하는 내려치기일 뿐이다. 루아가르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나, 엔크리드의 몸에선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루함 따위로는 나올 수 없는 열의다.
즐거움에 취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열정이다.
‘신기하고 또 신기한 놈이다.’
이전에는 세밀히 살피지 않아 볼 수 없었던 부분들이 이제는 보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즐겁기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검을 휘두르는 걸 오롯이 즐길 뿐.
가히 미친놈이었다.
추모왕이란 별명이 서서히 퍼져 나가는 크랑이 말하길.
“인간 같지 않은 새끼지.”
라고 했다.
루아가르네도 내심 동의했다.
그녀의 눈은 엔크리드의 하루를 종일 따라다녔다.
눈앞의 남자가 하는 모든 행동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그게 그녀가 하는 일이었다.
루아가르네는 그로 인해 변하는 이들 또한 보았다.
‘제 부족함을 알아서 찾는 건 재능이 아니다.’
그건 계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자극이 함께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란 이름의 자극제는 모두에게 공평했다.
그건 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펠은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루아가르네만큼이나 모두를 눈에 담고 관찰했다.
특히나 엔크리드를 눈여겨봤다.
‘미친 새끼군.’
쉬는 시간 따윈 없다. 아니, 쉰다고 쉬는 걸 보긴 했지만 그게 쉬는 건가 싶었다.
매일 반복하는 훈련에 지루함을 보이지 않으며 하는 것도 대단한데, 이 새끼는 무슨 훈련 하나에 목숨을 걸고 하는 듯했다.
“난 최선을 다한다.”
그리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저런 미친 새끼는 처음이다.’
말뿐만 아니라 정말 그런 오늘을 매일 반복했다.
영혼이란 초를 태워 주변을 밝히듯 그렇게 하루를 산다. 펠 자신도 훈련에 소홀한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매일?
침을 꼴깍 삼키며 펠도 결심했다.
‘그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괜히 양치기 어르신들에게 욕을 처먹으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펠은 관찰과 함께 몰래몰래 훈련에 매진했다.
비슷한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로포드는 완전히 반대로 행동했다.
“한판 붙으시죠!”
예전의 로포드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래라면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제 뜻보다 타인의 의견에만 움직이던 놈이, 이젠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상큼하게 무시하며 행동을 우선했다.
“정말 죽고 싶냐?”
라그나는 자신에게 말하는 로포드를 향해 진중하게 물었다. 이건 정말 진지했다.
“죽이지 마.”
옆에서 검을 휘두르던 엔크리드가 말했다.
로포드는 알을 깨고 나와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작은 새였다.
‘진심이 아닐 거야.’
그는 라그나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제까지는 멋대로 다른 사람의 속내를 짐작하느라 오해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둘의 농담에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결심은 곧 의지가 되니.
“죽도록 겨뤄 보고 싶습니다!”
“이래도?”
그걸 들은 라그나가 무심히 묻고.
“죽이지 마.”
엔크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포드는 둘의 만담에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농담을 참 좋아하는 둘이었다.
그리 덤벼서 쥐어 터지는 건 당연히 자신의 몫이었다.
로포드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며칠 끙끙 앓다가도 금세 일어났다.
“테레사 님 한판 붙으시죠!”
로포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볐다.
“주께 보내진 않겠습니다.”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근래 몇몇 대련 상대가 엔크리드를 찾아온 걸 본 뒤다. 정말 별의별 놈이 다 있었다.
용병 나부랭이부터 소문을 못 믿겠다는 무슨 귀족의 호위 무사, 타국의 전사, 동부 출신의 유랑 검사 등등.
도시에 프록 메엘룬이 있어 어지간한 놈들을 쳐 내긴 했지만, 그중 병영까지 오는 놈들도 몇몇 있었다.
메엘룬이란 프록도 몸이 두 개는 아니니.
엔크리드는 친히 그들을 상대했고, 테레사는 그걸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했다.
엔크리드는 그 누구를 상대할 때도 대충하지 않았다.
아케르를 뽑고 신속의 윌을 발동했다. 그 빛살과 같은 찌르기는 한줄기 뇌전과도 같았다.
그녀는 엔크리드처럼 행동했다.
덤비는 로포드를 방패로 후려쳤다. 혼혈 거인의 힘이 실린 방패 후리기였다.
뻑!
“끄억!”
목이 옆으로 휘어지며 날아간 로포드가 땅을 세 바퀴를 구른 뒤에 멈췄다. 실신이었다. 테레사가 조금만 더 힘을 썼다면 천국의 문에 노크할 뻔했다.
“죽일 거냐?”
그걸 본 엔크리드가 물었다.
“대련에 임했으니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혼혈 거인 테레사는 말하며 열기를 드러냈다. 그녀의 눈이 싸우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
대련을 마다할 인간이 아니기에.
“덤벼.”
엔크리드도 굳이 피하진 않았다.
누군가가 와서 본다면 이만한 개판도 없을 터였다.
장군이라 불리며 이 일대를 지배하는 영주 아닌 영주는 툭하면 죽어라 싸우고.
“한판 붙으시죠!”
최약체로 보이는 놈은 눈에 보이는 아무한테나 덤볐다.
대련하려고 찾아온 이들 중 일부는 엔크리드를 비롯한 이들의 실력에 감복해서 부대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악마 살해자의 밑에 남고 싶소.”
아무도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런 이들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정신을 차렸다.
“보더 가드 상비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렘 님의 휘하로 들어가라 이겁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보려고 합니다. 상비군이라니요. 전 농부가 되어 보겠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정상인은 아무리 발악해도 광기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괜히 이들이 미치광이 부대인 게 아니었다.
“대련!”
로포드가 외치고.
펠이 은근한 시선으로 구경하고.
렘은 언제 서부에 갈까 생각하고.
작센은 쉼 없이 밖을 오가고.
라그나는 전에 없이 기본기 훈련에 매진했고.
아우딘 또한 제 금제에 관한 생각에 미치기도 했다.
‘주여, 제가 금제를 풀어도 되나이까?’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었다. 아우딘은 신께서 또 계시를 주시리라 믿을 뿐이었다.
둔바켈은 제 약점을 인지한 뒤였다.
과도한 수준의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게 바로 약점이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뒤를 돌아보며 도망갈 생각을 하는 게 먼저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수인의 생존 본능은 다른 종보다 더 특출난 편인데, 둔바켈은 제 무리에서 쫓겨나는 동안 그게 더 심해졌다.
죽음을 각오한 뒤에도 금세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인가.
그건 진짜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걸 넘어야 해.’
엔크리드란 존재는 참 특이했다. 지켜보기만 해도 둔바켈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했으니.
그리 평범한 오늘의 연무장이었다.
펠은 연무장 입구 쪽 세 그루 나무 사이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봤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경비병의 복장도 아니었고.
천으로 만든 조끼, 흉터가 가득한 두 팔과 주먹, 각진 턱과 두드러진 광대뼈, 몸에는 군살 하나 없는 근육이 돋보였다.
펠의 시선은 한순간 상대의 전신을 훑었다.
“나도 같이 놀자.”
그의 입술이 우물거리는 게 보인 순간이다. 말소리가 들렸고,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확대됐다.
“헛!”
놀란 펠은 우상 살해자를 뽑아 올려 쳤다.
왜 아니겠나.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던 놈이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그의 본능은 우상 살해자를 휘두르게 했고, 상대는 검날을 손바닥으로 쳤다.
핏- 하고 손바닥이 살짝 베였으나.
“잘 드는 칼이네.”
혀로 제 상처를 날름하고 한 번 핥는 게 끝이었다.
우상 살해자의 마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거다.
“넌 좀 재미없어 보이고.”
갑자기 들이친 놈이 말하며 연무장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다.
엔크리드를 중심으로 좌우로 렘, 라그나, 아우딘, 테레사, 둔바켈이 섰다.
본래는 눈치가 탁월했으나 이제는 눈치가 증발한 로포드가 물었다.
“누구신지?”
딱 봐도 일반 병사는 아니지 않나.
“지나가던 사람.”
그가 답했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나 압박을 느꼈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건 본능의 영역이 불러온 기억이었다.
그 상대는 아즈펜에서 왔으며 천막을 찢고 들어와 검을 날린 자였다.
기사, 일격을 막는 것조차 버거웠던 상대였다.
“소문이 과장됐다고 하더니.”
그는 말하며 두 손을 늘어뜨렸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며 윌도 일으키지 않았으나 빈틈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밀려야 할까.
엔크리드는 마음의 검을 세웠다.
의지란 곧 각오라는 숫돌로 세운 칼날이니.
마음을 다잡아 허리를 펴고 검 그립에 손을 올렸다.
엔크리드뿐만이 아니었다.
렘, 라그나, 아우딘, 둔바켈, 테레사까지 같다.
모두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름의 열기가 공기를 덥혔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만큼 더운 날씨였다.
후덥지근한 열기 덕에 땀을 줄줄 흘리던 중이기도 했으나 긴장감이 그 열기를 싸늘하게 식혔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시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새로 나타난 남자의 뒤쪽이었다.
“장난 좀 그만 치십시오.”
그가 다가와 말을 했으나 긴장감은 깨지지 않았다. 처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건 조끼의 남자가 의도 한 거였으나, 지금은 좀 달랐다.
‘이것 봐라?’
조끼의 남자는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이 분위기를 유지하는 건 저 자식이었다.
소문의 주인공, 악마 살해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