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430)
430. 부대원, 약혼자, 마법사
손에 든 검이 무겁게 느껴진 것도 얼마 만인지.
처음 검을 쥐고 한 일 년은 검이 무겁게 느껴지곤 했다. 묵직한 쇳덩이를 몇 번 휘두르면 팔 근육이 후들거렸고, 엄지와 검지 사이 손아귀에 찌릿한 통증이 종일 가시지 않곤 했었다.
목검조차 무겁게 느껴지던 시절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무겁다.’
쇠로 만든 추 수십 개를 칼날에 매단 것 같았다.
조금만 힘을 빼면 칼날이 밑으로 뚝 떨어져 땅에 박힐 듯했다. 양팔 근육이 바들바들 떨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우딘의 훈련과 더불어 근력 하나만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드물었으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오롯이 검의 무게를 견디느라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끼어들지 않았다.
‘무거워.’
금방이라도 검을 놓쳐 버릴 듯했다. 칼끝을 위로 조금 드는 것조차 맨몸으로 한겨울의 산을 넘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졌다.
잠깐 내려 몸을 적신 비는 싸우며 뿜어지는 열기에 증발했으나 이후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기에, 엔크리드의 전신은 금세 다시 젖어 버렸다.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턱 끝을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쉴 틈 없이 바닥을 향해 뛰어내렸다.
‘많이 무겁다.’
이대로라면 자연히 검을 놓칠 것이다. 이런 무거운 걸 들고 용케 싸운 거다.
아까부터 차오른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쉬지도 않고 종일 뛴 것처럼 호흡이 벅찼다.
흐르는 땀은 점점 늘어 전신을 푹 적셨다.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제일 힘든 건 역시 손에 든 쇳덩이다. 명검 아케르, 처음 쥐었을 때는 손에 착 달라붙던 것이 이제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발악하는 뱀 같았다.
‘왜 무겁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저 상대의 창날을 쳐 냈을 뿐이었다.
받아 내며 체력과 심력을 소비한 엔크리드의 곁으로 아누가 다가와 속삭인 건 이때쯤이었다.
검을 들고 버틴 시간이 엔크리드가 체감하기에는 꽤 길었으나, 실제로는 잠시였단 거다.
고작 말 몇 마디 나누는 사이였으니까.
“무게를 이겨 낼 수 있겠나? 황소는 짐을 떠넘기는 걸 좋아하는 놈이다.”
엔크리드는 상대의 말에 담긴 모든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놓치면 그게 네 한계일 것이다. 그럼 죽어도 네가 바라는 건 못 할 것이고.”
죽어야 한다는 말은, 죽음을 곁에 두고 달려야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왕의 말을 듣지 않아도 엔크리드는 이미 느꼈다.
지금 손에 든 걸 놓아선 안 된다는 것.
명확한 사실은 하나뿐이다.
엔크리드는 손에 든 검을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역으로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무겁다고 해서 놓을 거라면.’
말도 안 되는 꿈을 향해 걸음을 내딛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사가 되고자 했나? 그럼 많은 걸 보고 경험하고 쌓아라. 그 모든 것이 너의 길에 도움이 될 것이다.”
왕은 마저 말했다. 모호한 말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엔크리드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하지만 아누의 말투에는 호의만 가득했다.
“네 검에 실린 걸 잊지 않으면 길은 열릴 것이다.”
짧은 몇 마디 말이 엔크리드의 뇌리에 남았다. 땀이 줄줄 흐르고 칼끝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러했다.
“신세 졌다.”
마지막으로 어깨를 한 번 두드린 왕이 가고.
엔크리드는 제 시선에서 검 끝이 밑으로 조금 내려온 걸 보았다.
거절의 윌도, 괴력의 심장도, 야수의 심장과 한 점의 집중, 감각 기예,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한 몸뚱이까지.
모든 것을 끄집어내도 당장 이 검을 들고 버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왕의 황소는 상대의 손에 든 무기를 전에 없이 무겁게 느끼게 했다.
그건 윌로 부린 신비였다.
엔크리드는 그걸 인지하면서도 끝내 검 끝을 들었다.
배운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 안에 세운 의지가 꺾이진 않는 법이니까.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다.
검 끝이 서서히 위로 들린다. 끝내 검을 제대로 들어 올린 엔크리드는 순간 검의 무게를 잊었다.
왕의 황소가 얹어 둔 추가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그제야 아주 오랜만에 제 손아귀가 찢어졌다는 걸 알았다. 검을 든 손에서 빨간 액체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아케르의 손잡이를 감은 가죽이 피에 젖어 칙칙하게 색이 변했다.
처음 황소의 뿔이 아케르의 칼날을 잡아서 비틀곤 제 손에서 빼내려 했고, 그걸 견뎌 낼 때 생긴 상처였다.
기사의 무기 빼앗기를 견뎌 낸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걸 인지하며 엔크리드는 휘청하며 쓰러졌다.
“바보 같군.”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받아 내며 하는 말이다. 에스터의 목소리였다.
엔크리드는 그걸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엔크리드는 꿈을 꿨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사공이 나오는 꿈이 아닌 진짜 꿈이었다.
“칼밥을 먹고 살 생각이라고? 관둬라. 너 일찍 죽을 거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놈들도 쉰까지 살아남기 어려운 게 용병질이다.”
자신의 꿈을 제대로 말하기도 전이었다. 꿈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나룻배부터 버리라고 했던 이들이 남긴 말이었다.
그 나룻배는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나아갈 수 없다.
너의 노는 부서지고 썩었다.
또한 나아갈 수 없다.
네가 탄 배는 낙엽으로 만든 거다. 그런 거로 바다에 나가겠다고? 호수나 강 위에서도 가라앉을 거다.
그러니 나아갈 수 없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엔크리드는 제 부대원을 제외하곤 딱 둘만이 제 꿈을 진지하게 듣고 반응하는 걸 보았다.
프록 루아가르네도 아니었다.
그녀는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으나 이뤄 내는 엔크리드를 보고 신비를 느꼈을 뿐.
‘크랑.’
하나는 나우릴리아의 왕좌에 앉은 친구였다.
그는 엔크리드가 말한 꿈을 듣고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동부의 왕이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와 대련을 통해 가진 걸 다듬을 수 있었다.
이상한 건, 대련을 하며 재능이 없단 소리를 수없이 들으리라 생각했으나 동부의 왕은 그런 말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상대를 압도할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꿈을 듣고 찾아온 사람 중 태반이 자신의 재능을 논했다.
지금이야 그러지 못하는 건, 이제는 엔크리드의 검술이 그들의 위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은 능히 재능이 없다 말할 만한 위치와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재능이 없다고 한탄할 수 있었고 놀랄 수도 있었으나 그는 태연했다.
오히려 떠나기 전, 그가 말했다.
“검에 실은 걸 잊지 말고 나아가라. 길은 열린다.”
그건 응원이고 믿음이었다.
엔크리드는 장막 너머에서 얼굴조차 나오지 않던 이들의 말을 전부 무시했다.
낙엽으로 만든 나룻배와 썩은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노는 어느새 물이 먹지 않도록 잘 처리된 참나무로 만든 캐러벨이 되었고, 썩은 나무줄기로 엮어 만든 노는 튼튼한 판자를 정성스레 대패질해 만든 노가 되었다.
배와 노를 지닌 엔크리드는 이정표와 길을 보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주변 모든 것이 흐려지며 아즈펜의 기사가 나타났다.
“한 번만 막으면 살려 준다.”
저렇게 말했던가?
그러진 않았던 것 같으나 지금은 꿈이다. 상대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가 중요했다.
한 번만 막으면 된다는 것.
아즈펜의 기사는 검을 휘둘렀다.
오롯이 빠르며 강한 검이다.
받아치는 건 불가능했기에 도리어 먼저 쳤다.
기사는 제 명예를 위해 물러났다.
엔크리드는 그의 일격을 기준으로 삼아 내려 벴고 찔렀으며 검을 휘두르는 등 갖가지 기술을 연마했다.
이후 엔크리드는 아누의 황소가 보인 갖가지 기술 또한 보았다.
동부의 왕은 윌을 쓰는 기교를 보여 주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 따윈 금세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끝내 반항하기에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죽으면 다시 반복되는 오늘은 어느새 잊은 채였다.
그러자.
“이놈이.”
사공이 꿈 한쪽을 찢고 난입했다.
그 또한 꿈의 일부였다.
엔크리드는 사공을 무시한 채로 생각에 잠겼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건 어렴풋하게나마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였다.
‘달라.’
동부의 왕은 아즈펜의 기사와 걸어온 길이 다르고, 사용하는 기술의 궤가 달랐다.
둘은 확연히 달랐다. 너무도 달랐다.
생각을 끝으로 엔크리드는 눈을 떴다.
전신에서 아련히 통증이 느껴졌고 손아귀가 욱신거렸다.
손을 들어 보니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어둑한 바깥과 램프 불빛이 보였고, 침대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도 보였다.
“시나르?”
“이름을 불렀으니 이제 식만 올리면 되겠구나.”
요정식 농담이 귓가에 울렸다.
엔크리드는 웃음 대신 물었다. 요정의 농담에는 쉽게 웃어 주기 힘들었으니.
“뭐 하십니까?”
“감상.”
무엇을 감상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한쪽 다리를 꼰 채 다리 위로 팔꿈치를 올리곤 턱을 괴며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
“툭하면 싸워서 쓰러지는구나.”
시나르가 이어 말했다.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일어나면 재밌는 걸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뭘 말하는 겁니까?”
시나르는 앉은 자세에서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와 함께다. 어느새 꼰 다리를 풀고 팔을 내린 그녀는 검을 뽑아 찔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속도였고 각도였다.
나이들이 엔크리드의 인식 밖에서 심장을 찔렀다.
쿨럭 하고 피를 토해야 할 것 같았다. 전신 근육이 바짝 긴장하며 잠시간 근육통을 잊게 했다.
죽음이 코앞에 다다랐다.
이대로 눈을 감으며 죽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어떠냐?”
시나르의 말과 함께 심장을 찌른 검이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꼰 다리를 풀고 앉은 채로 팔을 적당히 늘어뜨린 게 전부였다.
전부 환상이었다. 아니, 상대의 기세가 보여 준, 일어날 수도 있는 현실이었다.
“이건?”
“괜히 네 옆을 그리 오래 비웠을까.”
요정의 농담에도 엔크리드는 몇 가지 사실을 단숨에 깨달았다.
두 번이나 기사의 무력을 경험했기에 지금은 오히려 쉬웠다.
조금 전 시나르가 보여 준 건 기사의 무력이었다.
한쪽에서 그걸 지켜보던 표범이 다가오더니 엔크리드의 품에 쏙 들어왔다.
시나르에게 이제 됐으니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회복되는 걸 기다리고 있겠다.”
시나르가 말했다.
엔크리드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신을 울리는 근육통 따위는 무시하고 일어나서 검을 쥐고 싶었다.
시나르가 휘두르는 진짜 검을 받아 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탁.
그런 엔크리드의 가슴을 에스터가 앞발로 때렸다.
참으라고 하는 듯했다.
“알아.”
엔크리드가 답했다. 그도 안다. 이런 몸으로는 제대로 다툴 수 없다. 대련도 불가하다.
그러니 참는 게 맞다.
대신 회복에 전념할 것이고, 벌떡 일어나 검을 바로 세우게 된다면 시나르를 붙들고 검을 휘두를 것이다.
“어떠냐? 너의 약혼자가.”
시나르는 어느새 미소를 지워 버린 채로 물었고 엔크리드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입니다.”
“알면 됐다.”
요정이 조용히 일어났다. 여전히 기척이 희미한 움직임과 함께 그녀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끼익- 하는 경첩의 비명이 그녀가 떠남을 알렸다.
“잠 안 자슈? 기절해서 깨어나자마자 아주 난리네.”
“으아, 오랜만에 막사에서 자는데 뭡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회복 또한 빠르게 될 것이니.”
“드르렁.”
렘, 크라이스, 아우딘이 말하고 마지막은 라그나의 코 고는 소리였다.
라그나는 어지간히 피곤하지 않으면 코를 골지 않는 놈인데도 무슨 일인지 자장가 대신 코골이를 들려줬다.
“나 얼마나 잔 거냐.”
“딱 반나절 됐수.”
“마저 주무시지요. 몸이 말하는 위험 신호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님. 그러니 주무시고 가라앉히시지요.”
렘이 말하고 아우딘이 거들었다.
에스터가 다시 한번 탁- 하고 가슴을 두드렸다.
쉬라는 의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금세 잘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 졸음이 밀려오는 가운데다.
한쪽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작센이 침대 옆으로 작은 연고통을 내려 두는 기척이 느껴졌다.
“약입니다.”
작센이 말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은 어쩐 일로 막사에 돌아왔구나 싶었다.
둔바켈과 테레사, 펠과 로포드는 숙소가 달랐으나 넷은 막사 앞에서 경계 근무를 서듯 서 있었다.
그것까진 알 수 없던 엔크리드는 그대로 다시 잠에 빠졌다.
* * *
에스터는 보더 가드에 들어온 후, 자주 막사를 비웠다.
엔크리드가 신경을 더 썼으면 알 수 있었겠으나, 그는 검을 휘두르는 것에 푹 빠진 채였다.
평소와 같다고 해야 할까.
에스터는 그렇게 펜-하닐 강과 주변 호수, 산, 숲을 거닐었다.
백작을 상대하며 손상된 주문 세계의 복구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이전에 얻은 본헤드 놈도 손 보고.
과거에 계약을 맺은 정령 몇을 불러내 보기도 했다.
“식인귀야, 내가 너의 먹이로 보이는 것이냐?”
그러다 무리를 지은 구울들을 몇 번 마주하기도 했다.
크라이스가 밀어붙여 만든 초소 설비와 지역 치안 방비책은 점점이 흩어져 있던 마물을 뭉치게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소수로 움직이던 마물 따위야 이제 살아남을 수 없으니, 개중 생존 본능이 남은 놈들끼리 뭉치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 구울 무리 중 하나였다.
이전에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마물이 이제는 겁도 없이 못생긴 송곳니를 드러냈다.
에스터는 네크로맨시를 익히진 않았어도 저런 구울 몇 마리를 권속으로 삼는 게 어렵지 않았으나 그럴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일에 가까웠다.
‘그건 수준을 높이는 게 아니라 낮추는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에스터는 손짓으로 불길을 불러내 구울 여섯 마리를 구웠다.
끄어어어.
전신이 타오르며 죽는 구울은 곧 탄내 나는 살덩어리가 됐다.
‘나도 참 열심히 하는구나.’
에스터는 자신이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았다.
곁에 선 놈이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의 곁에 서기 위해서는 어설픈 각오로는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런 거였다.
‘이전의 내 힘을 회복하는 것에 그쳐서야 싸우는 마녀란 이름이 울겠지.’
그러니 자신 또한 더 나아갈 것이다. 마침 좋은 기회도 있었다.
펜-하닐 산맥 안쪽에 숨은 유적지나 마물을 찾아 헤매며 가진 걸 갈고닦다 보면 깨달음이 있을 테니.
라그나가 검술의 천재라면.
에스터는 마법의 천재였다.
그녀는 자신이 갈 길을 알았고, 보는 순간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걸 구분할 수 있었다.
그걸로 더 나아갈 수 있음도 알았고.
‘아, 바보 같은 놈.’
동부의 왕이라는 놈에게 쓰러지는 엔크리드가 떠오른 에스터는 속으로 읊조렸다.
그는, 엔크리드는 더 나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어설픈 악마나 백작 같은 마법사와 엮일 게 뻔했다.
그가 걷는 길이 그러했으니까.
그 길 앞에서 마법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들을 치워 버릴 것이다.
에스터는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 제 자존심을 채우려 했다.
무려 싸우는 마녀가 몸을 의탁했는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
‘그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지.’
이건 존재 가치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며 에스터는 엔크리드가 바라던 걸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저 남자가 걷는 길은 어떠할까? 그 끝은 어디일 것인가?
동부의 왕을 보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렇게 에스터가 산맥을 오가며 마법을 단련하고, 어릴 때 탑에서 배운 여섯 개의 마법 계통 중 쓸 만한 걸 정리한 뒤였다.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병사 하나가 눈에 걸렸다.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그 병사는 주사위를 굴리며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움직였다.
마법 재능이었다.
에스터는 무심히 지나치려다가 마음이 바뀌어 그에게 다가갔다.
“넌 날 따라온다.”
관심? 아니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가르치며 배우는 것도 있다.’
스승의 말이 그러했고 자신의 경험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였다.
정작 그 대상이 된 보더 가드 제일의 도박꾼이란 병사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네?”
“오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을 줄 것이다.”
에스터는 하던 대로 했고, 병사는 상대가 엔크리드의 애인이란 별명을 지닌 마법사라는 걸 알았기에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았다.
병사 하나의 편제가 바뀌는 거야, 실제 보더 가드의 병력을 책임지는 그레이엄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다.
또한 그레이엄 대대장은 그렇게 처리하기도 했다.
“병사? 분대장인가? 하급 병사를 하나 데려갔다고? 놔둬, 알아서 하겠지.”
에스터인지 표범인지가 병사를 데려갔다는 말에 대대장이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