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441)
441. 도시라는 이름의 병영
자초지종을 들은 에이시아가 잠시 피로를 잊고 미소를 보였다.
보급품이 줄어 짜증이 잔뜩 났었는데.
상인 몇 명을 데려오려고 준기사가 직접 나서는 것만 봐도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 처리 방식인가.
사우전드 브릭 자체가 그런 도시였다. 준기사라고 해서 거드름 같은 걸 피울 순 없는 곳이었다.
에이시아도 이곳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오아라 경이 숏소드의 검면으로 못을 박는 걸 봤을 때의 기분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건 뭐랄까, 성검으로 밭을 가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오아라 경은 웃었다.
밝게 웃는 오아라.
미소의 오아라.
웃는 검 오아라.
햇살 미소의 오아라.
기사 오아라를 부르는 별칭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그녀는 잘 웃었다.
에이시아는 오아라의 미소를 보았고, 당장 편지에 장인을 몇 보내 달라고 써서 왕궁으로 비둘기를 날렸었다.
“네가 최고다. 잘생겼어. 역시.”
에이시아는 상념을 지우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게 칭찬이냐?”
“오아라 경 식 칭찬.”
에이시아도 농담이 많이 는 듯했다. 엔크리드는 칼잡이 잭 외의 나머지,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도 들었다.
탈영병 중 한 놈이 사교도와 결탁해 새로운 종교를 창설, 즉 사이비가 되었단다.
에이시아는 이놈이 자리 잡은 게 벌써 두 해쯤 됐다고 하며, 이제는 규모가 꽤 되는 게 사교도가 관여한 것 같다는 말도 보탰다.
“당장 쫓아가서 죽여 버리고 싶긴 한데, 오아라 경이 자리를 비운 채로 웨이브가 일어나면 끝장이니까.”
같은 이유로 에이시아도 쉬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툭하면 하피 새끼나 마물이 툭툭 도시를 찔러 보는 탓에, 자리를 비우면 당장 아찔한 수준의 습격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럴 때 엔크리드가 온 것이니 여러모로 반길 만했다.
하지만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추적해서 쫓아서 몰아내야 하는 싸움이었기에 에이시아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 새로운 사교 집단의 교주란 놈이 어찌나 잽싸게 도망을 다니는지, 그게 아니었다면 어금니 꽉 깨물고 시간을 쪼개서라도 벌써 죽여 버렸을 것이다.
솔직히 엔크리드가 오지 않았다면 자신이 기회를 봐서 조지고 올 셈이었다.
사교도 주교도 아니고 어설픈 새끼들이 교주니 신이니 떠드는 이들 따위야 자신이 혼자 가서 슥삭 멱을 따고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엔크리드는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콜로니의 위치 따위와 규모, 종교 집단이라던 놈들의 특징 따위였다.
에이시아는 아는 대로 답해 줬다.
“마을 술집 봤지? 나보단 그 주인이 잘 알 거야.”
“금주령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던데?”
“사람 좋기로 소문 난 친구야. 적당히 가서 음식이라도 몇 개 시키고 말 걸어봐. 아, 그 사이비 집단 놈들한테서 조심해야 할 것도 있다. 마법을 부리는 칼잡이가 있다고 들었어.”
“무슨 마법?”
주문을 쓴다면 주의가 필요했다.
손에서 불을 뿜어낸다든지, 아니면 몸에 거미줄 같은 걸 엉키게 할 수도 있었다.
에스터와 대련하며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 본 엔크리드였다.
마법사와의 대련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은 익숙해졌다.
그래서 물은 거였는데.
“손도 안 댔는데 배에 구멍이 났다고 하더라.”
에이시아가 손날을 세워 허공을 쑤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병사 중 몇이 당한 적이 있다고 말하며, 그 사이비 새끼들은 걸리기만 하면 다 아구창에 구멍을 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엔크리드는 들을 걸 다 들었지만, 당장 나가서 찾는다고 보일 놈들이 아니었다.
최근에 생긴 콜로니도 셋이다.
괜히 마경 접경지가 아니었다. 한동안 손을 쓰지 않으면 미친 마물 새끼들이 모여서 둥지도 짓고 염병도 떨었다.
“어서 와. 마경 접경지 사우전드 브릭에.”
에이시아는 새삼 말했고, 엔크리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다른 곳보다 마물이 조금 많다는 건데, 그건 보더 가드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에이시아는 바쁜 몸이었으며, 당장은 쉬는 게 먼저로 보였다. 눈 밑에 생긴 검은 그림자에서 곧 악령이 태어날지도 몰랐다.
준기사이니 체력은 자신 있을 테지만, 근래 너무 피곤한 일이 겹치긴 했다.
“이틀 밤을 새웠어. 하피 새끼들 때문에.”
차라리 한 번에 쳐들어오면 병력을 이끌고 맞서 싸울 텐데, 찔끔찔끔 몇 마리만 와선 멀리서 보다가 찔러 볼 만하면 건드리고 아니면 도망갔다.
아무리 준기사라도 주문까지 쓰면서 도망가는 하피를 잡는 건 어려웠다.
작정하면 못 잡을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멀리서 찝쩍댔다.
이 새끼들이 망루 근처에라도 와 주면 모르겠는데, 사우전드 브릭 외부 망루나 성벽 근처로는 잘 오지도 않았다.
상인 무리를 데려올 때야 그걸 본 하피들이 신나서 습격하는 걸 에이시아가 뒤늦게 달려와서 상대한 거였고.
그조차도 에이시아는 오히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 씹어먹을 새끼를 몇 마리라도 잡아 죽일 기회였으니까.
“밀리오. 안내해. 숙소랑 식당이랑.”
“알겠습니다.”
에이시아는 쉬러 가며, 성문 앞에서 봤던 밀리오라는 병사에게 안내를 맡겼다.
엔크리드는 도시 내에 혹 욕설이나 싸움 등으로 소란이 있는지 슬쩍 훑었다. 렘을 찾기 위해서였다. 딱히 소란스러운 곳은 없었다.
여전히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냄새나는 도시일 뿐이었다.
그 냄새 중 태반은 땀 냄새였다.
땀에 절어 버린 옷가지에서 나는 쉰내가 축축한 공기와 만나서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뤘다.
여기저기서 근육을 단련하거나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이 흔히 보였다.
“하나에 마물의 대가리를.”
“둘에 깨자!”
“웃으면서 죽자!”
“오아!”
구호도 들려왔다.
여섯 명이서 통나무 따위를 들고 몸을 단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다란 활을 정비하며 화살을 만드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그들도 땀을 줄줄 흘렸다. 그런 날씨였다.
가만히만 있어도 진득한 땀이 흐르는.
풀풀 풍기는 냄새는 썩은 내까진 아니지만, 불쾌함이 가득 담겨 코를 찔렀다.
처음부터 후각 때문에 미간을 몇 번이고 찌푸리던 둔바켈이 결국 코를 감싸 쥐었다.
“냄새가 고약해, 얘들 안 씻나?”
“넌 양심이 없냐?”
엔크리드는 그런 둔바켈을 나무랐다.
“내가 왜? 나 열흘 전에 씻었어.”
엔크리드는 오늘 숙소에 욕조가 있다면 둔바켈을 머리부터 집어넣어 주리라 결심했다.
열흘 전이라면, 여기로 오는 길이었다.
둔바켈은 개울가에 다다라 손끝에 물을 묻혔고, 얼굴에 몇 방울 슥슥 문질렀다.
그걸 씻었다고 말한 거였다.
“욕조가 튼튼해야 할 텐데.”
엔크리드의 말에 불길함을 느낀 둔바켈은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변하진 않을 테지만.
루아가르네는 프록이기에 축축한 공기가 익숙했다. 아니, 좋아했다.
냄새도 참을 만했다. 본래 프록은 사지가 절단돼도 새로 자라나곤 하다 보니, 감각적으로는 좀 둔한 편이었다.
습한 환경이야 오히려 반겼고.
가끔 휴양이라고 호숫물에 반쯤 몸을 담그는 게 취미인 게 프록이란 종족이었다.
그들은 개구리가 아니지만, 개구리가 좋아할 만한 건 다 좋아했다.
벌레를 혀로 튕겨 잡아먹고, 물가 근처의 늪지에서 진흙으로 몸을 닦는 걸 최고의 휴양 중 하나로 쳤다.
가끔 왕궁에서 그녀를 위한 배려로 받았던 것들, 루아가르네는 그걸 떠올렸다.
“진흙이 가득한 욕조는 없으려나.”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그런 게 없었다.
“진흙 말입니까?”
밀리오가 루아가르네의 말을 듣고는 반응했다. 묵직한 저음을 가진 병사는 여전히 엔크리드와 맞붙어 보고 싶었으나 일단은 주어진 일에 충실했다.
그는 의무를 다하는 군인이었다.
“서쪽 성문 너머로 회색 숲을 끼고 돌면 늪지가 있긴 한데, 가면 안 됩니다. 그쪽 늪지에는 언제나 독 안개가 낍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 같은데.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까도 봤지만, 독특한 모습이었다.
집은 듬성듬성 자리를 잡았고, 도시를 관통하는 흙길은 두 개의 성문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건물은 반듯한 벽돌을 쌓아서 지반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집을 짓는 형태였다.
왜인가 했더니, 비가 오면 물이 차기 쉬운 지반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피하려고 곳곳에 배수로를 파 둔 것도 보였다.
대부분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려 가는 지대를 염두에 두고 판 배수로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중앙에 큼직하게 파 둔, 천장 없는 작은 동굴과 같은 배수로였다.
이 정도면 비가 왔을 때 작은 개울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거인이라도 와서 판 건가?
“오아라 경의 작품입니다.”
밀리오가 엔크리드의 눈길을 보며 말했다. 여러모로 눈치가 빠른 병사였다.
말투는 투박하나 친절한 마음씨가 엿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의 말을 따르자면 기사가 삽질까지 했다는 소리였다.
놀라야 할까? 잘 모르겠으니 무시했다.
어쨌든 중앙으로 무식하게 파 둔 배수로 덕에, 비가 온다고 해서 침수 피해가 있을 만한 집은 없어 보였다.
엔크리드는 다른 것들도 관찰했다.
잡화점, 식료품점, 술집, 빈집 몇 채, 대장간, 도축한 육류를 늘어놓은 가게, 딱히 장사하는 것 같진 않은 상점도 있고, 덩그러니 세워진 건물과 그사이에 반쯤 부서진 목각 허수아비, 장작을 쌓아 두고 파는 가게 등.
“외부에서 온 상인은 물건을 건네주고 크로나를 받아 가지만, 여기서는 대부분 기여도로 물건을 삽니다.”
밀리오는 필요한 말을 골라서 했다. 도시가 돌아가는 방식이 특이했다.
“기여도?”
둔바켈이 코를 막은 채로 물어 맹맹한 목소리가 났다.
밀리오는 그녀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설명했다.
“네, 기여도입니다. 마물을 해치우고 마수를 죽이면 쌓입니다. 아니면 도시에 도움이 되는, 가령 성문을 복원하는 일 같은 걸 하면 되고 한 방 큰 걸 원하면 오아라 경이 싸울 때 거들기도 하면 됩니다. 아까 하피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주문 쓰는 하피는 특이종이니까, 그 정도면 열흘은 식사나 잠자리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특이한 방식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던지는데, 눈에 보이는 이들 중 무기가 없는 이들이 드물었다.
활은 전부 하나씩 갖고 다녔다.
하나같이 어깨 쪽에 작대기 문양을 달고 있기도 했다.
“아, 저건 각 부대를 상징하는 게 아니고 계급 같은 겁니다. 대강 나우릴리아의 병사 등급제를 기조로 잡아 둔 겁니다. 달에 한 번씩 기사단의 스콰이어 한 분이 가르침을 주기도 하고요.”
작대기 하나는 하급, 두 개는 중급, 세 개는 상급.
작대기를 꺾기 시작하면 지휘관이었다.
왕궁에서 쓰는 방식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는데, 한눈에 알아보도록 어깨에 문양을 새긴다는 건 좋은 생각이었다.
‘보더 가드에도 적용하면 편하겠네.’
엔크리드는 도시를 쭉 둘러보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냄새는 고약하긴 하지만 편안했다.
고향에 온 듯한 그런 기분.
실제 고향은 아니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런 공기다.
불쾌하고 찝찝한 날씨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끈적끈적한 땀이 흐른 채였다. 당장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런 날씨에도 안 씻는 둔바켈의 머리통을 잡아 욕조에 메다꽂아 줄 정도의 날씨였다.
엔크리드의 눈에 병사 둘이 작은 공터에서 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들고 다투는 게 보였다.
‘대련.’
다투는 게 아니라 서로 실력을 가늠하는 거였다.
웃옷을 벗고 바지만 입은 채로 둘은 기다란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도시가 아니었다.
‘도시가 아니라 병영이다.’
사우전드 브릭은 이름만 도시였다.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병영 같은 곳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끝없이 습격하는 마물과 마수를 물리치기 위해서다.
농사를 지을 땅도 따로 없고, 상업적 요충지도 아니다. 그런 사람을 제하면 누가 이 도시를 채울까?
모두 전투원이었다.
‘도시 전체를 병영으로 바꿨다.’
그걸 또 누가 했겠나.
기사 오아라.
그녀의 작품이었다.
“자, 여기서 머무시고 식사는 1층에서 해결하시면 됩니다. 악마 살해자라고 하면 유명하니까 다들 알아볼 겁니다.”
꽤 넓은 벽돌 건물이었다. 오아라 경이 머무는 곳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기도 했다.
낙서가 가득한 문이 보였다.
날카로운 물건, 나이프 같은 거로 이런저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다들 도망가. 늦지 않았다.
영원하여라, 기사 오아라를 위하여.
마물의 대가리를 터트릴 것이다. 나는, 평생.
오아!
웃으면서 죽자!
이런 말들이었다.
엔크리드는 문을 밀었다.
이곳이 병영이라면, 실상 도시의 주민은 전부 전사라고 봐야 했다.
엔크리드는 건물로 들어갔고 거기서 아까 다투던 병사와 창부를 보았다. 둘 다 차림이 달랐다.
병사는 후줄근한 린넨 옷을 입고 음식을 날랐고.
여자는 무장을 갖췄다. 숏보우를 등에 비스듬히 메고 얇은 가죽 갑옷을 입은 경장 무장 차림이었다.
당장 전투 또는 임무에 나갈 것처럼 보였다.
“어서 오쇼.”
남자 병사가 말하고, 여자가 힐끗 엔크리드를 보았다.
“악마 살해자라고 하더니 되게 잘생겼네.”
부대의 기조가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오아라 경 덕에 기조가 이렇게 변한 걸까.
여자는 제 속내를 숨김없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야.”
음식을 나르던 병사가 말했고.
루아가르네는 참지 못하고 나서서 말했다.
“얼굴뿐 아니라 다른 것도 훌륭하다.”
헛소리였다.
엔크리드는 묵살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로웨나라고 해요. 십장입니다.”
십장, 열 명을 지휘하는 사람이었다.
“아까 골목길에서 봤는데.”
엔크리드가 호기심이 생겨 말하니.
“아, 그건 부업이요.”
이 도시는 사는 모두가 병사인 곳이었다.
“일 있으면 찾아 주세요.”
그녀의 말은 중의적인 의미로 들렸다. 낮의 일인지, 밤의 일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럴 일 없을걸. 없을지도 모르거든.”
둔바켈이 주먹을 밑으로 늘어뜨리곤 상스러운 손짓과 함께 중얼거리듯 말했고, 엔크리드는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서 씻을 수도 있나?”
“에? 네. 욕조가 있습죠.”
주인은 대답했고, 둔바켈은 도망가려다가 엔크리드에게 뒷덜미를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