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457)
457. 춤도 추시든지
“활 들어!”
수없이 들었던 명령이 떨어졌다. 똑같이 고양감에 취했음에도 지휘관은 할 일을 했다.
밀리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숲 한쪽에서 마물 무리가 덩어리처럼 따로 뚝 떨어져 나왔다.
성벽 위 병사들은 그걸 보고 도리어 반가움을 느꼈다.
밀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이 뜨거운 심장을, 전신을 태울 듯한 열기를 뿜어낼 상대가 나왔으니.
“조준!”
지휘관의 외침이 성벽 위를 달렸다. 각 부대 지휘관이 복창했다.
“조준!”
시위에 화살을 재고 각도를 조절해 겨눈다. 마수와 마물, 짐승의 뼈로 만든 각궁에 힘줄을 꼬아 만든 시위가 당겨졌다.
끼이이잉.
팽팽히 당겨진 시위를 쥔 채로 밀리오는 명령을 기다렸다.
모든 병사가 제 위치를 고수했다.
지휘관은 달려드는 마물의 규모, 숫자를 보기 바빴다.
밤이라 완벽하게 파악하긴 어려웠다.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함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하가 불화살 한 발을 쐈다.
퉁 하고 날아간 불화살이 적 무리 사이로 떨어졌다.
마물은 불화살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실제로 불화살은 어떤 타격을 줄 수도 없었다.
검은 흙은 불길을 집어삼켰다.
불꽃은 금세 꺼졌다.
한 발로 시야 확보가 될 리도 없었다.
“적당하다. 지금 바라보는 그쪽이 딱 중간쯤이고. 감당 못 할 숫자는 아니야. 그리 많지 않아.”
쌍적월치고는.
뒷말을 삼킨 오아라의 말이다. 팔짱을 끼고 성벽 위에 우두커니 선 기사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쏜 불화살이 모두의 표적이 되어 줄 터였다.
어림잡아 위치를 기억할 테니.
“발사!”
그의 말을 따라 깃발이 내려왔다.
파라락!
바람, 붉은 달빛, 횃불, 늘어진 그림자가 엉킨다. 시위를 당긴 궁수 곁에서 깃발이 떨어지는 것만 지켜보던 지휘관의 입이 열렸다.
“쏴!”
훌륭한 궁수란 잘 맞추는 사람일 것이다.
다만, 훌륭한 궁병은 훌륭한 궁수와는 다른 종이었다.
그들은 잘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곳으로 잘 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훌륭한, 잘 단련된 군인이었다. 활을 든 궁병대였다.
화살이 허공을 갈라 달려드는 마물 무리를 향해 쏟아졌다.
거미의 머리 위로 불에 달궈 두드린 화살촉이 꽂히고 땅에도 박혔다.
* * *
피비비비비빙!
엔크리드는 머리 위에서 날아드는 파공음을 들었다.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지는 적지가 아니라 아군 쪽이었다.
지금 상황이 말해 주는 건 무엇인가.
렘과 둔바켈이 제 할 일을 똑바로 했다는 거다.
밀리오를 비롯한 병사들만 자극을 받은 게 아니었기에 로먼과 에이시아, 짧은 금발, 스콰이어 넷도 금세 움직였다.
“여기서 막는다.”
로먼도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넷, 나를 중심으로 뭉친다.”
짧은 금발의 준기사가 스콰이어 넷 사이로 들어가 지휘관을 자처했다. 그녀의 무기는 단검과 독이다.
적절한 위치였다.
로먼과 에이시아는 손발을 맞췄다.
로먼은 크게 한 방을 내지르는 과감한 창날이 되었고, 에이시아는 그 사이로 짓쳐오는 거미의 다리를 쳐 낼 방패가 되었다.
퍽 잘 어울리는 둘이었다.
마물의 숫자가 많고 쌍적월이 떴고.
“다 죽인다.”
로먼은 솟구치는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횃불 하나를 등지며 검을 내리쳤다.
휙, 꽝!
몽둥이 대검이 거미 여섯 마리를 한 번에 으깼다.
그 전에 에이시아가 짧게 치고 빠지며 마물을 몰아세운 과정이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죽이고 때리는 사이다. 엔크리드는 제 인지 밖에서 쑥 하고 들어오는 뭔가를 느꼈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뾰족한 무언가다. 아랫배가 아릿했다. 복부를 노린 거였다.
엔크리드는 그걸 가까스로 포착했고, 반사적으로 글라디우스를 뽑아 쳐 냈다.
왼손목을 꺾으며 받아 내고 흘리는 기술을 섞은 쳐 내기였다.
땅, 치리리릭!
받아 내고 흘리는 건 실패했다. 찔러 들어오는 한줄기 선에 실린 힘이 거인의 그것처럼 묵직했다.
엔크리드는 옆구리를 틀었다.
투드드득.
간신히 살은 찢기지 않았고 갑옷의 겉면이 갈리는 선에서 끝났다.
아니, 붕대 갑옷을 두르지 않았다면 최소한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들어온 건 칼날처럼 변한 마물의 팔뚝이었고 그 끝에는 독이 묻은 손톱이 있었다.
구울이었다.
이름은.
“제릭스!”
성벽 위에서 오아라의 외침이 들렸다.
놔두면 오아라가 다가와서 싸울 것이다. 그럼 여느 오늘과 다르지 않은 반복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긴다.’
고집을 부린다. 길 찾는 라그나가 되면 그만이었다.
즉, 엔크리드는 이 싸움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로먼! 내기다!”
엔크리드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마침 로먼의 앞에도 이와 비슷한 마물 새끼가 튀어나온 참이었다.
거미 검사다. 여덟 개의 팔을 칼처럼 쓰는 괴물.
모두가 놀란다. 적에게서 기사의 그것처럼 막강한 기세가 엿보였으니까.
그리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스콰이어 무리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어났다. 아울베어였다.
엔크리드는 모든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이런 판을 깔면 올빼미곰 새끼는 항상 취약한 부분부터 노린다는 걸 알았다.
가령 성벽 앞에 부대가 나와 있었다면 언제나 그들이 먼저였다.
그러니 지금은 스콰이어를 노린 거고.
그림자가 일어나기도 전에 예측한 부분이었으니, 엔크리드는 로먼에게 외치며 몸을 반쯤 뒤로 기울였다.
엔크리드의 눈에 스콰이어 넷이 보였다.
횃불, 그림자, 붉은 달빛, 짧은 금발, 스콰이어 넷의 위치.
모든 걸 동시에 눈에 담고서 올리버의 뒤에서 어른거리는 무언가도 포착했다.
올리버는 아까부터 지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지구력이 약했다.
아울베어는 그걸 노렸다.
엔크리드는 뒤로 시선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발을 바깥으로 뻗어 디뎠고, 반원을 그리듯 허리를 틀었다. 그와 함께 왼손을 앞으로 뻗는다. 손에 들렸던 검이 땅과 수직이 되어 붉은 달빛을 가르는 원반으로 화해 대기를 갈랐다.
후우우웅!
엔크리드는 검을 던지자마자 틀어진 균형을 맞추기보다 아예 몸을 한 바퀴 더 돌렸다. 그러며 아케르를 수평으로 그었다.
챙! 퍽!
두 번의 소리가 동시에 귀를 때렸다.
하나는 아울베어 쪽, 다른 하나는 엔크리드의 코 앞이었다.
아케르가 빈틈을 노리던 구울의 손톱을 때렸고, 아울베어는 내려치던 손을 들어 제 가슴 앞에서 교차해 막았다.
놈의 깃털이 조금 찢기고 검은 피가 흘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글라디우스는 옆으로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째 요새 글라디우스로 뭔가를 쪼갠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저 칼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었다.
엔크리드는 아케르를 수평으로 들어 얼굴 위까지 올렸다.
파란 눈빛이 칼날을 넘어 붉은 달빛 사이에서 빛났다.
구울은 제 손톱이 막히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공격이 막힌 게 당황스러웠을까?
그런 지능은 없을 것이다.
오롯이 본능의 영역에서 살육 기술을 터득한 괴물일 테니.
그래, 신기하긴 했다.
이 새끼에겐 제릭스란 이름이 붙을 만했다.
“미쳤군.”
한 타이밍 늦게 루아가르네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앞에 기사급의 마물을 두고 뒤로 몸을 돌려 아군을 구한 셈이니.
가히 미친 짓이다.
그러하기에 즐거웠다.
‘아, 개신나네.’
엔크리드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 마물 새끼들이 원하는 걸 하나하나 깨부수는 중이다.
그게 못내 즐거웠다. 더욱이 이런 싸움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보상이니.
엔크리드는 웃었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 됐다.
하지만 전부 마음먹은 대로 될까?
그럴 확률은 낮을 것이다.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모든 게 예상대로 흐르진 않는다. 당연했다.
오늘은 반복되지만, 항상 같은 오늘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구울, 아울베어, 거미 검사.’
세 가지 형태의 마물, 개 같은 마물, 기사 사냥을 위한 제물은 그대로다.
그 이후에 나오는 발록의 파편이란 놈이 짠 판이다.
그럼 자신이 할 일은 무엇인가?
이미 정했다.
“네 어미는 정말 구울이겠구나.”
엔크리드가 의미 없는 말을 뱉는다. 구울은 그르륵 하며 숨을 토해 냈다.
그 숨결에서 독기 같은 게 느껴졌다.
손톱에 독이 있고, 주둥이에도 독이 있다.
“양치 좀 하고 다녀라.”
엔크리드가 재차 미친 소리를 뱉었다.
“괜찮은 거 맞냐?”
루아가르네가 물었다.
괜찮은 거 맞았다. 이건 그러니까, 운동하기 전에 몸을 데우는 것과 같았다.
제사를 치르기 전에 하는 의식 같은 거였다.
말로 하는 도발이 먹히지 않는 상대라지만, 행동으로 하는 도발은 먹힌 듯했다.
자, 봐라. 너 같은 놈이야 앞에 있든 말든 저 뒤에서 까부는 아울베어 새끼에게 한칼 먹이고도 너 따위에겐 당하지 않는다는 도발이다.
그르륵.
구울이 재차 숨결을 토한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물의 짜증이 느껴지기에 엔크리드는 한껏 웃었다.
“웃는 엔크리드란 별명이라도 얻고 싶은 거냐?”
루아가르네까지 긴장했다.
그만한 마물이었다.
엔크리드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제 목표를 떠올렸다.
팔다리 멀쩡하고 지치지 않은 오아라를 내보내는 거다.
웃는 오아라를 내보내는 거다.
적이 원하는 게 웃지 않은 오아라라면, 의지를 박탈당한 껍데기를 원한다면.
엔크리드는 알맹이가 가득한 오아라를 보여 주리라.
“무슨 내기?”
그제야 로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앞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엔크리드는 뒤로 다가오는 오아라의 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제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예의 그 압박이다. 위압이 방사형으로 퍼지며 앞을 짓누른다. 이번에 그 대상이 된 건 전부 마물 쪽이었다.
근처에 있던 거미 마물 일부가 오아라를 보고 뒤로 튕겨 나듯 물러났다.
그녀는 검도 뽑지 않은 채였다.
“그거 내 건데.”
그녀가 말한다. 목소리에 어린 의지가 선연했다.
엔크리드는 그 선연한 의지를 거절했다.
“순서를 지키시죠.”
짧은 침묵이 어깨를 누른다. 말 없는 압박이다. 엔크리드는 그 또한 거절했다.
오아라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고?”
“응원이나 해 주시면 됩니다.”
엔크리드는 숨도 안 쉬고 답했다. 이미 정해진 길이라는 의지다.
여기까지 자신의 싸움이라는 의지다.
우기는 거다. 고집이다. 오기다. 집념이다.
당신이 노린 사냥감이 제릭스라고?
이제는 내 것이다. 내 사냥감이다.
아집에 가까운 의지가 피어올라 기세를 이룬다.
붉은 망토 따위는 없지만, 기사단의 일원이 되기 충분한 자의 등이 오아라의 눈에 보였다.
“신기한 새끼.”
오아라가 말했다. 극찬으로 들렸다.
자신의 말에 오아라가 웃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구울의 기세가 느껴졌다. 이제 눈알 하나 잘못 돌리면 예의 아즈펜 쪽 기사의 일격과 비슷한 게 날아들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엔크리드는 가슴을 열고 몸으로 말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주사위는 던졌고, 그 눈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첫 번째 반복한 오늘, 그때 절대 변하지 않는 상수가 주사위 눈이었던 것처럼, 이 전장에도 그러한 게 있다.
그럼 벽을 넘는 조건은 무엇일까?
단순했다.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사공도 말하지 않았던가.
도망가라고.
호의라 말하지만, 엔크리드에게는 호의가 될 수 없는 말이다.
그냥 살아남기만을 바랐다면.
“꿈 같은 건 꾸지도 않았다.”
엔크리드가 재차 중얼거렸다. 그 말과 함께 의지는 더 빛난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아집이 오아라를 멈춰 세웠다.
구울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엔크리드의 혼잣말을 듣고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호흡을 고르고 집중했다.
기사의 일격을 따라 할 순 있다.
하지만 상대가 그걸 얌전히 맞아 줄까?
긴장하면 어깨가 굳는다. 그러니 힘을 좀 빼는 게 좋으리라.
엔크리드는 시선을 구울에게 고정하곤, 무슨 내기냐고 물은 로먼에게 그제야 답을 던졌다.
“로먼, 나보다 마물을 먼저 죽이면 네 얼굴이 나보다 낫다고 인정해 주겠다.”
이런 순간에 농담 따위를 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리라.
그렇지만 이런 순간을 즐기지 못한다면 준기사라는 위치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사란 만 명에 하나의 재능.
준기사 또한 비슷한 재능을 갖지 못하고서는 닿지 못할 곳이다.
반복된 오늘이 없었다면.
절대 닿지 못할 곳에서 내기를 논하고 아집을 논한다.
엔크리드는 전신 솜털이 곤두섬을 느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지금이 자신이 바라던 그런 순간임은 분명했으니.
등 뒤에 사람을 두고 지키는 삶이다.
음유시인의 노랫말에서 나온 기사의 삶이다.
“기사가 되고 싶다.”
그 한마디는 꿈이 되었고, 찢긴 채로 빛이 바랬으나.
이제는 새로이 기웠으며 빛을 머금었다.
“접수.”
로먼의 답이 들렸다.
때론 남자는 경쟁 상대의 인정이 필요한 법이다.
“응원만 하라고?”
뒤에서 오아라가 말한다. 아까와 같은 의지가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어느 때고 끼어들 것이다. 그런 기세가 충만했다.
엔크리드는 오아라의 약점을 안다. 그녀는 독에 당해서 오래 싸울 수 없다.
지구력이 기사답지 않다는 거다.
그러니 지금 전장에서 춤을 출 사람은 오아라가 아니다. 오아라란 검이 뽑히는 건 지금이 아니다.
“춤도 추시든지.”
엔크리드는 답하며 검을 휘둘렀다.
Lionmon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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