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89)
89. 과거를 곱씹되 후회를 남기지 않았기에
“진형 갖춰!”
지휘관은 외침이 울렸다.
다가오는 건 늑대 마수, 숫자는 여덟 마리다.
마수나 마물은 위협적인 존재다. 특히나 보더 가드는 상단과 행상이 뻔질나게 오가는 도시인지라, 주변 마물과 마수 소탕에 꽤 적극적인 편이었다.
“왜 겨울에 극성인지.”
병사 하나가 툴툴거리면서 장창을 세운다. 엔크리드의 귀에는 그게 긴장을 풀려고 일부러 뱉는 말처럼 들렸다.
명령에 따른 스물의 병사가 늑대 마수에 맞서 단단한 방진을 구축했다.
마수는 일 대 다수로 상대하는 게 기본이었다.
소대장은 기본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그게 불편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긴 한데.’
대련으로 채울 수 없는, 그러니까 실전을 원해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말하는 거다.
피를 보는 싸움, 그로 인해 얻은 것을 정리하는 시간, 그야말로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
그게 엔크리드가 바란 것들이다.
장창을 들고 찔끔찔끔 다가오는 마수의 가죽을 찌르는 게 아니라.
이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료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본래라면 마수를 보고, 오금이 저리는 게 정상이겠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얌전하게 말을 따른 렘이 옆에서 낄낄 웃었다.
“욕구 불만인 표정 같수다.”
본래라면 얼굴 볼 시간에 마수 눈깔이나 찌르라 하겠지만, 답답함에 절로 말이 나왔다.
“그게 보여?”
“이제 분대장도 모난 돌이 된 거요.”
렘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낄낄 웃었다. 그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범한 것과 미친 것은 한 끗 차이라는 거 몰랐수?”
몰랐다.
여기서 마수 여덟 마리 사이로 뛰어들면 어떻게 될까.
렘이 뒤를 받쳐 준다는 전제하에.
괜히 장창 스무 개로 찔러 대며 한 마리씩 죽이는 것보단 훨씬 빨리 끝날 것 같은데.
이렇게 상대해서 주변 마물과 마수는 언제 다 정리하지?
한참 걸리겠지. 시간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까지 방진 훈련 또한 단 한 번도 소홀히 받은 적 없기에. 몸은 자연스레 방진 구성의 일원으로서 병사의 의무를 다했으나.
답답함은 여전했다.
옆에서 렘이 자꾸 낄낄 웃는데 그게 제 등을 떠미는 기분도 들었다.
왜 따라와서 이러는 건지.
엔크리드는 장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힘이 실린 창끝이 마수의 앞발 가죽을 훑었다.
“크르릉!”
통증에 반응한 늑대 마수가 송곳니를 드러냈고, 그걸 본 소대장이 놈의 머리를 놀려 창을 푹 찔러 넣었으나, 영악한 마수는 뒤로 내빼며 그걸 피했다.
거기까지, 본 엔크리드는 일부러 잡생각을 떠올렸다. 그게 아니라면 당장 뛰쳐나가서 검을 뽑아 베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기 어려울 것 같다.
그의 머릿속에 우연히 기르게 된 표범이 떠올랐다.
‘에스터.’
하수도의 미친 마법사 새끼의 머리를 쪼개고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레이크 팬서가 힘이 다 빠져서 돌아왔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게 하수도에 돌아다니는 쥐라도 잡아먹은 듯했다.
도시 쥐 사냥에 너무 열중한 것이지, 기운이 다 빠져서는 바닥에 누워 숨만 쌕쌕 내쉬었다.
그게 안타까워 손수 육포를 물에 불려 찢어 먹였다.
에스터는 그걸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컹!
잡생각 사이다. 늑대 마수가 창이 닿는 거리에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머릿속 한쪽에 떠오른 에스터를 뒤로 미루며 다가온 늑대 머리통을 장창으로 찔렀다.
푹.
머리 가죽 일부가 찢기며 피가 튀었다.
“자리 뺏기지 마!”
소대장의 외침이 들렸다.
다가오려는 마수와 마수 주변을 위협하며 창날을 찔러 대며 거리를 유지하는 부대.
쉬이 끝날 싸움이 아니다.
달려들던 마수 무리가 창날에 몇 번 찔리곤 뒤로 물러났다.
이게 맞긴 하다.
이게 정석이긴 한데.
여전히 답답하다.
병사를 이끄는 소대장이 보였다.
전신이 탄탄해 보이는 멀끔한 인상이다.
저 작자가 2중대였던가, 3중대였던가.
답답함과 갑갑함을 품은 채, 엔크리드는 장창을 놀렸다.
고명한 솜씨라 보긴 어렵다. 그저 찌르고, 당기는 게 전부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창은 영 손에 익지 않으니.
만약 창을 주로 썼다면 검보다 더 못 쓰지 않았을까 싶다.
라그나가 말했었다.
“검이나 창, 다루는 무기에 따라 손에 익는 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
보통 기사는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걸 장려하긴 한다.
그래서 기본은 배우긴 했으나, 그중 검만이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을 줬다.
‘검.’
오롯이 검.
처음 쥐었을 때부터 오랜 시간 알아 온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의 희열. 기쁨. 기대감.
두근거리는 심장, 날이 선 쇠붙이의 온기.
‘아, 검 쓰고 싶다.’
마법사의 굴에서 얻은 경험을 되새기고 싶은데.
장창이 아니라 검을 휘두르고 싶은데.
“소원 성취해 드리지.”
옆에서 렘이 중얼거렸다. 엔크리드의 시선이 그에게 향할 때쯤, 렘은 이미 앞으로 튀어 나가는 중이었다.
“날 새겠네!”
렘이 신명 나게 외치며 나간다. 목소리에 쾌활함이 깃들었다. 땅을 박찰 때마다 바닥의 흙이 치솟는다. 역동적이었다. 달리는 모습이 늑대 마수보다 거칠어 보였다.
“저 미친 새끼가!”
기다렸다는 듯 소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방진을 지킴으로써 마수를 상대하는 게 기본이다. 방진이 흐트러지면 다른 병사의 목숨도 위험해지니.
튀어 나가는 건 잘못된 게 맞다. 엔크리드도 그걸 잘 알았다.
하지만.
‘아예 마수를 다 죽이면 되잖아.’
못 참겠다.
말 그대로 욕구 그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당장 나가서 검을 휘두르고 경험을 되새기고 싶은 그 욕망.
엔크리드는 내심 눈을 감았다. 잠시 이성적인 판단보다 육감에 의존했다.
감을 따라, 엔크리드도 장창을 던져 버리곤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었다.
“아니, 넌 또 왜!”
소대장의 외침이 뒤로 밀려난다.
렘의 돌발 행동은 소대장의 인지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아니다.
그러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신났수?”
뒤따라온 엔크리드를 인지한 렘이 말하며 도끼 두 자루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자루 도끼날이 허공에 궤적을 그린다. 궤적의 끝은 당연히 참살이었다.
첫 도끼질이 막 정면으로 다가온 늑대의 머리통을 쪼개고, 두 번째 횡으로 가른 도끼가 땅을 차며 옆으로 돌아서 팔을 물어뜯으려는 마수의 턱을 쪼갰다.
도끼 두 자루는 처형대의 칼날이었다.
“조금.”
인정할 건 인정하고.
엔크리드도 검을 뽑았다. 뽑으며 크게 수평으로 벤다. 마수 한 마리가 달려들다 말고 앞다리가 베였다.
“깽!”
마수라도 뱉는 신음은 개와 비슷했다.
엔크리드는 수평으로 뻗은 팔을 당겨 수직으로 내려쳤다.
늑대 마수의 머리가 걸려 쪼개지고.
퍽!
머리통을 쪼갠 검을 당겨 옆으로 달려오는 늑대의 머리통을 검을 쥔 주먹으로 후려쳤다.
뻑!
머리통을 맞은 놈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고작 여덟 마리.
‘언제부터 여덟 마리 마수를 고작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엔크리드가 느끼기에 이들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도끼가 머리를 쪼개고 검이 늑대를 가르고 벤다.
손에 쥔 아밍소드는 롱소드보다 베는 맛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썩 나쁘진 않았다.
라그나가 같이 오지 못해 아쉬워했는데.
여덟 마리 중 한 마리는 방진을 짠 병대의 장창에 죽었고.
나머지 일곱 중 넷이 렘의 도끼에.
셋은 엔크리드의 검에 쪼개졌다.
발군의 솜씨였다.
괜히 상급 병사라는 지위를 따낸 게 아니라는 방증과도 같기에.
“와 씨, 더럽게 잘 싸우네.”
병대를 구성한 병사 하나가 감탄성을 섞어 중얼거렸다.
소대장은 버럭 화를 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할 말이 없게 하는군.’
말 그대로 싸우긴 더럽게 잘 싸우네. 마수를 상대하는 데 있어 방진을 짜는 게 기본이라면.
비범한 전력을 지녔다면 그걸 쓰는 것도 지휘관의 소양이다.
소대장은 화를 내는 대신, 효율성을 따졌다.
이건 엔크리드와 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고지식하게 따지면 둘은 명령 불복종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소대장은 엔크리드의 존재 자체를 높게 샀다.
예전부터 몇 번 스치듯 봤었는데, 그때는 영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만한 실력을 키운 걸까.
소문대로 갑자기 실력이 늘어난 걸까.
모른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결과만 따질 뿐.
‘상급 이상이다.’
변방의 학살자라 불리는 수비대원 중 하나라고 해도 믿겠다.
실제 그들이 마수 토벌에 나서면 이런 방진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실력으로 맞서곤 하니까.
“너희 둘.”
소대장은 둘을 나무라는 대신 전장을 주기로 했다.
싸우고 싶다면 싸우게 해 주는 거다.
“골치 아픈 마수가 나온 곳이 있다. 거기로 가라.”
“그렇습니까?”
죽은 마수 사이, 주술파괴자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덤덤한 태도에 병사 중 일부가 환호 비슷한 걸 뱉었다.
어쨌든 마수를 쓸어버리지 않았나.
이거로 이쪽 의뢰는 끝나고 이쪽 부대는 다른 곳을 지원하러 갈 것이니, 잠깐은 쉴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마수와 목숨 걸고 맞서 싸우는 걸 즐기지 않는다.
비범하거나, 미치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돼야겠지.
“우리는 도시로 돌아가 재정비한다.”
소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물러나기로 하고.
엔크리드는 렘을 슬쩍 봤다. 도끼에 묻은 마수의 피를 대강 닦아 내던 렘이 씨익 웃는다.
“빚진 거요?”
“빚은 무슨.”
말은 그렇지만, 덕분에 속이 시원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구하는 마음이 더 컸다.
‘부족한데.’
늑대 마수 몇 마리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대련이 아닌 실전.
엔크리드의 가슴에 지펴진 불이 활활 타올랐다.
“갑시다. 다른 데로 가라잖아.”
렘이 말했다.
부대로 돌아가게 된 병사 중 몇이 다가와 엔크리드의 가슴을 툭 쳤다.
“덕분에 먼저 가오.”
실실 웃는 병사의 얼굴이 낯익었다.
엔크리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첫 번째 오늘을 반복할 때 주사위 노름판에 있던 병사다.
그가 엔크리드의 손에 깨끗한 천에 감싼 육포를 쥐여 줬다.
“드셔 봐. 끝내줄 테니.”
그가 말하고 돌아섰다.
그 병사뿐 아니라 몇몇이 눈으로 호감을 표했다.
잘 싸우는 병사, 아군은 언제나 우대받는 법이니.
엔크리드는 거기에 성격도 무난해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렘과는 달랐다.
다들 렘이랑은 적당히 거리를 뒀다.
야만인 출신인 것도 있지만, 성격이 거칠고 심심하면 아무나 붙들고 시비를 거는 취미가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같이 싸웠는데 대우가 다른 것 같수다. 이건 뭐, 차별인가?”
“업보겠지.”
엔크리드는 말하며 육포를 쭉 찢어서 나눠 줬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무는데.
‘다른데.’
맛있었다. 부드러운 육포 조각이 입 안을 휘돌다 꿀떡 넘어갔다.
간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무슨 양념을 발라 뒀는지,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뭐냐, 이거 왜 맛있수?”
“그러게, 나중에 더 달라고 해야겠는데.”
무슨 비법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엔크리드는 손에 낀 장갑을 당겼다.
두툼한 가죽으로 만든 밤샘 장갑은 그대로 손을 감싸 튼튼하게 지켜 줬다.
하수구에 살던 시신 애호가 마법사의 물건 중 하나였다.
특히나 늑대를 후려칠 때,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작은 충격이 돌아왔다.
이것도 괜찮은 물건이란 소리다.
마법사가 한 짓은 참 찝찝했지만, 물건이 무슨 죄인가.
장갑은 튼튼했다. 가죽을 몇 장이고 덧대 만든 것 같은데, 방어력은 물론이고 주먹질하기에도 좋아 건틀렛 대용으로 쓰기도 좋았다.
갬비슨 안에 두른 몸통 가죽 갑옷도 든든하긴 마찬가지다.
무려 마법사의 수작에 자신을 지켜 준 물건 아닌가.
크라이스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 했을 때는 그저 튼튼한 물건일 줄 알았는데.
든든한 장비와 새로이 깨달은 것까지.
엔크리드는 투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가자.”
소대장의 지시다. 엔크리드는 렘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반나절.
아군 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향했다.
“여긴가 본데.”
“그런 것 같수다.”
간단한 약도와 안내로만 찾은 곳이다.
도착한 곳은 아예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마수나 마물 토벌이 어지간히 본격적이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진지 구축을 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현재 한창 소란이 이는 중이기도 했다.
오기 전에 하늘에 뭔가 날아다니는 것 같더니만.
엔크리드가 중얼거리며 전장에 합류했다. 렘이 그 뒤를 폴짝폴짝 뛰어와 따라붙었다.
“끼아아악!”
머리 위로 울음이 터져 나온다. 끔찍한 마물이 제 존재를 알렸다.
그 아래로 눈알이 파였거나, 팔이나 다리 몸 여기저기가 할퀴고 파인 병사 몇이 나뒹구는 게 보였다.
“내 눈! 내 눈!”
“아아아악!”
“시발! 죽여! 죽여!”
쇠뇌병 몇이 하늘을 향해 볼트를 쏴 댔다.
투두두두둥!
볼트가 허공을 갈랐고, 목표는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까아아아!”
마물의 울음, 듣기에 끔찍한 소음이었다. 절로 귀를 막고 싶은.
이곳은 전장이었다.
상대는 마물과 마수였고.
날아다니는 마물의 바로 밑, 중갑으로 소대 단위로 뭉친 부대가 병진을 만든 게 보였다.
전원 사슬 갑옷을 두른 중갑보병이다. 그러니까 중갑보병으로 구성된 중대인 1중대다.
“전원 제자리이이!”
보병 중대 지휘관의 외침이 터졌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마물의 이름은 하피.
여성의 상체에 양팔 대신 날개, 하체는 독수리의 그것과 같은 마물이었다.
붉은 깃이 허공에 휘날리고 하피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여성의 그것과 같은 가슴이나, 그게 성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오히려 불쾌감을 줄 뿐이지.
하피를 본 엔크리드는 순간 몸이 굳었다.
과거, 한때 동료의 죽음을 두고 돌아서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피의 출현은 용병 몇의 발악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죽음과 죽음, 그리고 도주.
아픈 기억이다.
친구라 부를 순 없지만, 십수 명의 동료를 잃었으니.
끼이익!
하피의 울음은 사람의 정신을 흔드는 효과가 있었다.
떠오른 놈들만 해도 다섯 마리가 넘었는데.
쇠뇌병 다섯이 하늘을 향해 겨누고 있으나.
조금 전 봤듯이 맞춰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 전장에 들어선 직후다.
“어째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더니, 괜찮수?”
옆에서 렘이 물었고 그 순간 새로 들어온 둘을 향해 하피 한 마리가 쇄도했다.
쌕!
바람을 가르는 낙하다. 독수리를 닮은 발톱은 강철만큼 단단하기에 저기에 걸려 눈알만 파였다면 그건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머리통이 찢겨 터졌을 테니.
다가오는 하피 모습에 엔크리드는 과거의 기억을 곱씹었으나, 그건 잠시였다.
그는 지나간 일에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그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힘을 실었다. 엔크리드의 삶이 그러했기에.
치링.
검을 뽑는다.
순간 주변에 느려지는 착각, 동시에 점과 선을 잇는 동선을 그려 내고 육감이 경고성을 발했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대담함이 엔크리드는 전신에 힘을 실어 주니.
떨어지는 하피의 궤적에 맞춰, 홀로 느리게 느끼는 시간 속, 엔크리드의 검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