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9)
9. 하루하루가 다른 남자
전투 명령 하달이라고 해서 크게 전략을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게 전부지.
엔크리드는 명령 하달을 듣자마자, 뒤쪽 막사로 향했다.
지금쯤 아프다는 핑계로 분대장 소집에 분대원을 대신 보낸 바느질의 귀재가 물건을 다 만들었을 터였다.
“너 실 안 줬어.”
과연 그랬다.
단단한 가죽을 엮어서 만든 손과 무릎, 팔꿈치 보호대가 그럴듯한 모습으로 엔크리드를 반겼다.
“실?”
시치미를 떼자, 술 좋아하는 분대장이 콧김을 뿜었다.
“가죽만 주고 가면 어쩌란 거냐?”
어쩌긴.
‘네가 알아서 모포 실을 풀고 잘 꼬아서 만들겠지.’
이것도 몇 번 해 본 일이다.
실 따위를 안 줘도, 꿈틀거리는 선물을 받은 이 친구는 알아서 잘해 줬다.
“깜빡했네.”
“전혀 깜빡한 눈치가 아닌데?”
숙취가 남아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눈치는 있었다.
“아니야. 진짜 잊었다.”
“씁.”
안 믿는 눈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엔크리드는 주섬주섬 가죽 보호대를 챙겼다.
꼼꼼한 바느질 솜씨다. 엔크리드가 직접 만든 적도 있지만, 확실히 이 친구가 만드는 게 질이 좋았다.
흡족했다.
“속는 기분이야.”
“고생했다.”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고 막사로 돌아왔다.
엔크리드는 돌아오자마자 오후에 전투라는 말만 남기곤 제자리에 앉아 바삐 손을 놀렸다.
스릉.
엔크리드는 검을 꺼내 사슴 가죽 장갑을 양손에 쥐고 슥슥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잘랐다.
그렇게 반쯤 찢다시피 자른 가죽을 길게 늘어뜨린 뒤, 뚝딱뚝딱 쓰로잉 나이프의 검집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죽의 끝을 검으로 여러 갈래로 길게 잘라 매듭을 만들곤 허리띠처럼 찼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었다.
엔크리드에게는 수십 번 반복한 일이니, 익숙했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그걸 본 렘이 고개를 어깨너머로 쑥 빼서 물었다.
“뭐하슈? 작은 칼 있구만, 왜 그거로 그러는 거유?”
“칼날이 잘 드는지 시험 삼아서.”
“손재주도 좋네. 칼 솜씨도 그만큼 좋아야 할 텐데 말이유.”
이 새끼는 꼭 한마디씩 말로 사람을 찔렀다.
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다.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할 때도 대수롭지 않았던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기껏 구해다 줬더니, 그걸 찢어서 겨우 칼집을 만들어요?”
반대쪽 어깨 너머에서 크라이스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을까?’
머리통이 고장 나서 자신을 진짜 엄마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끔찍하네.’
“다 썼으니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어디서 뭐 잘못 주워 먹은 거 아니죠?”
“그러고 보니, 오늘 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더니만. 무슨 일 있수?”
“일은 무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검날을 다시 한번 더 닦고 엔크리드는 조용히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곤 그동안 수없이 겪었던 전장을 떠올렸다.
일어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백스물다섯 번을 반복한 전장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되뇌었다.
잡다한 준비는 살아남기 위한 것이지.
검술 향상을 위한 게 아니다.
‘전장은 검술 훈련소가 아니니까.’
검술 실력이 떨어져도, 긴 시간 살아남은 경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엔크리드를 살려 준 게 과연 검이었을까?
아니었다.
상황, 운, 준비, 침착함.
모든 걸 버무려서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찬가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엔크리드는 오늘을 벗어나기로 했다.
* * *
“돌격!”
아군의 외침이 들린다.
엔크리드는 곧 전장의 한복판으로 내몰렸다.
당황하진 않았다.
흥분해서 뛰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어 눈으로는 전장을 보고 입으로는 호흡을 고른다.
후우.
짧지만, 차분한 호흡의 끝.
적군이 보였다. 아군도 보였다.
내달리는 적군, 흘러가는 아군.
스릉.
검을 뽑는다.
그리고 날아드는 칼날.
엔크리드는 왼손에 든 방패로 창날을 쳐 냈다.
퉁!
몇 번이고 반복한 작업이다. 실수는 없었다.
창날을 쳐 내고 한 걸음 앞으로.
“으잇!”
당황한 적군의 뒤꿈치 안으로 오른발을 쑤셔 넣고 무릎을 굽히며 충격에 대비한다.
모든 게 한 호흡이었다.
약속 대련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발이 걸린 상대가 뒤로 자빠졌다.
쿵!
뒤통수부터 떨어진 놈이 눈을 깜빡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겠지.
창을 찌르고 물러나려고 했는데 발이 턱- 하고 걸려 넘어진 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넘어진 상대의 곁을 지나며 발끝으로 턱을 찍어 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에서 치아 조각과 핏물이 흘러나온다.
기절이다.
죽일 필요조차 못 느꼈다.
나아가며 왼팔을 들었다.
땅-! 까가가각!
방패를 후린 몽둥이가 비켜나며 엔크리드의 팔꿈치를 훑었다.
드드득!
가시를 박아 둔 몽둥이였다.
부상은 없다. 팔꿈치에 감아 둔 가죽 방어구가 제 역할을 했으니.
“이익!”
적군이 이를 악문다. 얼굴의 반만 가리는 투구 밑으로 턱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보였다.
이놈은 제대로 상대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지난 오늘 중에서 이 녀석에게 왼팔을 당한 날이 많았다.
손잡이를 쥐고 왼발을 앞으로.
발렌 식 발검술이다.
상대와 눈이 마주친다. 검을 뽑으면 한바탕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상대도 알고 엔크리드도 안다.
둘의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다.
검과 몽둥이를 맞대고 싸우기로.
상대의 눈이 엔크리드의 오른손을 주시했다.
스릉.
검이 채 한 마디가 뽑히기도 전, 엔크리드의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
허리춤에 꽂아 둔 투척 단검이 허공을 날았다.
몽둥이를 든 상대가 당황해서 팔을 들었다.
푹- 하고 칼날이 적군의 팔에 꽂혔다.
갬비슨(천 갑옷)을 입었다곤 해도 팔 쪽에는 천을 두껍게 두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럼 움직임에 제약을 주니까.
고로 칼날은 충분히 살가죽에 도달해 찔렀을 것이다.
“이 비겁한 놈!”
적군이 말했다.
싸움에 비겁하고 치사한 게 어디 있나.
엔크리드는 말없이 도로 검을 착- 하고 집어넣었다.
발렌 식 발검술이란 본래 검을 뽑는 척하며 단검이나 돌을 던지는 것.
“이-노옴!”
분노한 가시 몽둥이 적군이 이마에 핏대를 세운다.
그럼 약효가 더 빨리 퍼질 뿐이었다.
놈이 달려들다 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비 독이 제대로 발동했다.
쿵 하고 코부터 땅에 꼬라박았다.
그러곤 꺽꺽거리며 숨을 거칠게 뱉었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유유히 지나쳤다.
다음 상대는 불알을 걷어찬 뒤, 옆으로 밀어 버렸고.
그다음은 조용히 걸어가 뒤에서 등을 떠밀었다.
밀려서 당황한 적군의 머리를 아군의 망치가 후려쳤다.
빡!
투구를 써도 둔기에 당하면 머리는 터진다.
하물며 철제 투구도 아니고 가죽 투구다.
엔크리드가 딱히 대단한 활약을 보인 건 아니었다.
그저 순간순간 필요한 움직임과 행동을 보였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주변 아군의 자잘한 승리로 돌아왔다.
“덕분에 살았다.”
얼굴도 모르는 놈이 말했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친다.
딱히 대수로울 일도 아니었으니까.
“신세를 졌군.”
“사사사분대장? 운이야, 실력이야? 하여간 나중에 술 한잔 사지.”
“시발, 죽을 뻔했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 죽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장.
그 중심에 야수의 심장이 있다는 건 당연했다.
‘고요하게.’
그리고 또 차분하게.
야수의 심장은 함부로 요동치지 않는다.
야성을 품었기에 모든 걸 태연히 바라볼 수 있다.
전장 한복판에서 엔크리드는 심장의 울림을 느끼며 다시 걸었다.
수십 번을 넘게 반복한 전장.
그렇다고 긴장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익숙해질수록 변수에 당한다.’
오늘이 반복된다고 해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건 아니었다.
엔크리드가 어떻게 대응하냐에 따라 상대의 행동도 변한다.
그러므로 천천히 걷고, 주변 상황을 눈에 담는 걸 우선으로 삼는다.
‘이쯤에서.’
슥.
밑에서 누군가 단검을 긋는다.
싸우다 넘어진 참에 다리를 노린 참신한 공격이다.
‘이거에도 당했었지.’
몇 번은 피하려고도 했다.
그러다 더 쉬운 방법을 찾았다.
화살을 막는 것과 같다.
피할 수 없다면 막으면 된다.
턱.
가죽 각반을 때린 단검은 엔크리드의 정강이를 베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
멍청한 적군의 외마디 말이 그의 유언 대신이었다.
엔크리드가 방패를 두른 쇠테로 바닥에 엎드린 놈의 등판을 찍었다.
콱!
“꺽!”
비명은 짧고 작다.
“우아아아!”
그 대신 전장의 함성이 귀를 울릴 뿐.
엔크리드의 분전이 전장의 향방을 바꿀 순 없었다.
오롯이 그 주변에 놓인 이들만 조금 편해졌을 뿐.
‘전부를 구할 순 없다.’
이곳은 전장, 죽어 나가는 숫자가 수십 또는 백이 넘어가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전부를 살리겠다고 덤비는 건 아둔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후아, 다 덤벼! 이 새끼들아!”
외침의 주인은 다른 분대의 창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엔크리드가 걸으며 잡은 적군 숫자가 다섯이 넘는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저놈은 사실 수십 번 죽었다.
엔크리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오늘도 죽었을 거다.
정강이를 베이고 바닥을 구르다가 뒈지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허리를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게 첫 번째.’
수십 번을 반복한 전투다.
엔크리드는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다.
다치지 않고 전방에 합류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으며.
‘다친 데 없고.’
조금 전 막 목표를 달성했다.
두 번째는.
‘난전 속에서 아는 얼굴을 찾는 것.’
물론 난전에서도 부상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 그 변태 찌르기 적병과 제대로 붙어 볼 만할 것이다.
백 번이 넘게 전장을 구르며 생각한 건 딱 하나였다.
‘만전의 상태로 싸워 보고 싶다.’
과연 자신이 오늘을 반복해서 익히고 배우고 훈련한 건, 통할 것인가.
자비를 선호하는 변태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의 노력으로 오늘은 넘길 수 있을 것인가.
두근.
심장이 뛴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담대함과는 별개로.
‘오늘을 넘긴다.’
목표를 오롯이 세웠기에, 목적이 분명하기에.
엔크리드의 심장은 뛰었다.
다시 전장, 걷는다. 때로는 뛴다.
“우아아!”
“시발, 살려 줘.”
“여어어엄벼어어엉!”
“개자식들아!”
욕설과 함성의 이중주 속.
엔크리드는 사방으로 고개를 휙휙 돌렸다.
‘몸을 숙이고 눈치 보는 놈.’
찾는 놈이다. 어렵지 않게 보였다.
적군 사이로 슬그머니 숨어다니는 덩치가 보였다.
‘일단 하나.’
찌르기 적병과 마주하기 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보였다.
‘뒤통수 몽둥이.’
나름대로 애칭까지 지워 준 놈이다.
살려 두면 번번이 싸움에서 엔크리드의 뒤통수를 후리는 자식이다.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물론, 엔크리드는 운명 따윈 믿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다 개소리지.’
검이 부러졌다면 부러진 검날로라도.
무기가 없다면 주먹으로라도.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라도.
재능으로 안 된다면.
‘이렇게라도 기어 올라가 보겠다.’
과연 기사란 어떤 자들인가.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무력이란 무엇인가.
이룰 수 없는 소망은 망상이 된다.
다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건 곧 꿈이 되는 법이다.
엔크리드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후.”
숨을 내뱉고.
툭.
단검 하나를 꺼내 팔을 뒤로 힘껏 당긴다.
혼탁한 전장의 한가운데.
단검의 무게를 손끝으로 느낀다. 표적을 눈에 담고 일직선으로 가상의 선을 그린다.
어느 날 술집에서 벌어진 단검 던지기 대회 우승자 놈이 가르쳐 준 투척술이다.
이것도 오늘을 반복하며 수십 번을 연습했다.
그대로 왼발을 살짝 들었다가 떼며 허리를 돌려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다.
마지막은 손끝 감각에 집중하며 손목 스냅을 넣는다.
쌕!
단검이 엔크리드가 그린 가상의 선을 따라 날았다.
“윽!”
날아간 단검이 몽둥이 놈의 어깨쯤에 꽂혔다.
갑옷이 허술했기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떤 개자식이.”
놈이 욕설을 뱉는다. 사방을 둘러본다. 굳이 눈을 마주쳐 줄 필요는 없었다.
신관도 없고 해독제도 없다면 얌전히 드러누워야 할 테니.
곧 놈은 쓰러졌고,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유유히 두 번째 놈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투척 도끼를 잘 던지는 놈이다.
이 자식도 번번이 도끼를 던져 훼방을 놨다.
미리 조져야 결투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신이시여!”
독실한 아군 병사의 외침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살기 어린 말이 들린다.
엔크리드는 주변을 살피면서도 정확히 원하는 것을 찾아 걸었다.
자잘한 공격은 방패로 막고.
빈틈이 보이면 발을 걸어 준다.
검면으로 머리를 때린다. 멍청하게 투구를 눌러 쓴 놈은 머리 위에서 검을 내리친다.
그것만으로도 엔크리드의 주변에 선 아군들은 한결 편해졌다.
‘남은 단검은 세 자루.’
투척 도끼를 던지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매번 있는 곳이 바뀐단 말이지.’
그래도 대강 이 일대는 맞다.
‘일단 벨부터.’
매의 눈깔인지 하는 놈한테 머리통이 뚫릴 아군을 구할 차례다.
‘여기서 우측으로.’
아군의 움직임을 보며 걷는다.
걸으며 몇 번의 공격을 막다가 망가진 방패를 버렸다.
이건 몇 번이고 반복했는데도 항상 망가졌다.
‘이쯤에.’
백 번을 넘게 반복한 전장, 매번 바뀐다고 해도 어느 정도 눈에 익고 몸에 익은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방패다.
엔크리드가 방패 모서리를 발로 밟았다.
박힌 돌 위에 있던 방패가 퉁- 하고 허공으로 솟았다.
그걸 턱하고 잡아챈다. 묘기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허리를 굽혀 줍는 것보다 편했다.
“……거, 재주 좋네.”
우연히 이걸 본 아군 병사의 목소리였다.
“뒤에 적.”
몇 번의 오늘에서 자신을 넋 놓고 보다가 뒈지는 친구다.
죽지 말라고 말해 주니.
휙 하고 몸을 돌린다. 그러자 창을 들고 오던 적군과 마주쳤다.
“시벌, 쥐새끼 같은 놈이.”
곧 둘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아군이 이긴다.
한 스무 번은 지켜본 싸움이다.
그러므로 볼 필요도 없다.
눈에 익다 못해 익숙한 전장 위.
엔크리드는 머릿속으로 구역을 나누며 지도를 그렸다.
‘벨부터 가자.’
걸음을 옮긴다.
“억!”
넘어지는 벨.
탁.
화살을 막는 방패.
“으어, 뭐야, 나 살았네?”
“대가리 들지 말고 기어서 돌아가라. 화살 날아온다.”
내 조언을 벨은 충실히 따랐다.
반복된 오늘 중에서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벨의 머리를 뚫은 게 수십 번이다.
그러니 기어서 가는 게 맞다.
“……뭐요? 행운의 여신이랑 몰래 연애라도 하기로 한 거요?”
렘이다.
하여간 야만인 새끼.
독실한 여신의 신자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생채기 하나 없네?”
최상의 컨디션으로 찌르기 놈과 마주치기.
그게 오늘 엔크리드의 최종 목표다.
“가서 할 일이나 하지?”
“그럴 거요. 그럴 건데, 오늘 뭔가 달라 보이는데?”
“난 하루하루가 다른 남자다.”
반복된 오늘 중 같은 날은 없었다. 매일 성장하는 날이었기에.
“……약을 처먹어야 할 것 같수, 분대장은.”
그 말을 끝으로 렘이 떠났다.
‘조금 전에는 너무 재수가 없었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나, 진실이 그러한 걸.
마침 엔크리드의 눈에 투척 도끼를 즐겨 던지는 놈이 보였다.
허리에 덜렁거리는 도끼를 찬 적군이다.
기다려서 뭐 하나.
엔크리드는 독이 묻은 단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