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95)
95. 동안의 비결은 끝없는 훈련
“이 정도면 우린 전생에 부부였던 거 아닌가.”
일만 있으면 만나니, 하는 말일 것이다.
일전 마물 사냥 때도 본 얼굴이니.
“원수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토레스가 옛이야기를 빗대어 말했고, 그걸 엔크리드가 받아쳤다.
전생의 인연이 이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
만나야 할 인연이거나.
만나서는 좋을 게 없는 악연이거나.
“우리가 악연은 아니지 않냐?”
토레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두 남자가 툭 하고 주먹을 맞댔다.
앞에 뭐가 기다리든, 모르는 얼굴보다는 아는 얼굴이 나을 터였다.
그렇게 나선 길이다.
터벅터벅.
북쪽 성문을 나와 둘을 반긴 건 자갈길이다.
보더 가드에서 출발하는 건 달랑 둘이 전부였다.
“우리 둘만 가는 겁니까?”
“강 너머에서 아군 정찰대를 만나기로 했다.”
딱히 위험한 임무는 아닌 건가.
그래서 둘만 보내는 건가.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어쨌든 책임자는 토레스다.
그가 말하는 것만 알면 그만인 거다.
그렇게 새벽녘부터 나선 길이다.
아침 해가 뜰 때쯤 부지런히 걸은 엔크리드는 갑옷 안에 받쳐 입은 천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고 해도 전신에 무장을 걸치고 걸으면 땀이 흠뻑 날 법도 했다.
얇은 천으로 만든 소매 없는 속옷을 입고, 그 위로 그보다 두꺼운 소매까지 감싸는 겉옷을 입는다.
다시 그 위로 마법을 막아 준 가죽 갑옷에 휘슬 대거집을 착용.
갬비슨과 부츠, 가죽 건틀렛까지 차면 몸에 걸치는 건 끝이다.
상대적으로 바지는 얇게 입는데 두꺼우면 기동성을 해치기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 가드 소드라고 이름 붙은 날이 두꺼운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이번에 새로 장만한 롱소드를 왼쪽 허리에.
숏소드 하나를 오른쪽 허리에 나눠 찬다. 이게 끝도 아니었다.
비상시 무기는 많을수록 좋다. 양쪽 발목에 나이프 두 자루를 숨기고, 왼쪽 팔뚝에 던지는 나이프 두 개를 더 챙겨 넣었다.
말이 경장보병이지, 묵직한 무게감의 무장이다.
여기에 평소에 없던 무장이 하나 더 추가됐고.
“왼손이 놉니다. 그거 해결해야 합니다.”
라그나의 주문이다. 덕분에 버클러 하나를 챙겨 등에 짊어지고 오는 중이다.
‘이거 냄비 대용으로 쓸 수 있지 않으려나?’
급하면 그렇게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손잡이가 있는 쪽에 붙여 둔 가죽을 떼면 얇은 쇳덩이 아닌가.
그만큼 불필요한 짐이란 생각이 드는 거다.
‘어쩔 수 없지.’
하라고 하니, 일단 하는 수밖에.
방패로 써 보고, 이게 안 맞으면 다른 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검과 방패가 됐든 검 하나가 됐든,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때가 됐습니다. 그 전에 균형을 먼저 맞출 겁니다.”
라그나는 평소에는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면서 엔크리드를 가르칠 때만 되면 더없이 성실한 교관이 된다.
그래서 그게 거슬리는 거냐고 묻는다면.
‘전혀.’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엔크리드는 육감을 열고 사방을 훑으며, 머릿속으로는 라그나의 말을 되새기며 걸었다.
그걸 옆에서 보면 참 묘한 광경으로 보였다.
토레스는 왼쪽 허리에 겹쳐서 찬 짧은 숏소드 두 자루 외에는 겉보기에 무장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이다.
토레스가 힐끗 옆을 보며 생각했다.
‘잘 따라오네.’
저 무거운 짐을 들고도 잘도 쫓아왔다. 헉헉대지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초점이 안 맞는데 주변 기척에는 곧바로 반응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는 거냐.’
새삼 그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이런저런 작전을 나서 본 토레스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물어보니까 오히려 서운한데.’
이렇게 숨겨진 게 많은 일에 나서게 되면 보통은 무슨 일이냐, 목적이 뭐냐, 강을 건너면 뭘 하게 되냐 물을 것도 많을 텐데.
그렇게 물으면 토레스가 할 말도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군인이고 병사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전부라는 생각은 안 드나?’
따끔하게 한마디 할 기회인데.
정말 아무것도 안 물어본다.
“정면.”
그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토레스가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측에는 강을 끼고 북서쪽으로 한참 걷던 참이다.
푹 젖은 구울 두 마리가 보였다.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이 뭉쳐 하얀 머리통에 걸쳐 늘어진 게 꼭 해초 같았다.
커다란 바위를 끼고 숨어서 이쪽으로 노리는 중이었는데, 바위 색과 피부색이 비슷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법도 했다.
‘나보다 먼저 찾았네?’
생각보다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소문대로 운이 좋은 건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마물, 적이 나왔다.
“하나씩?”
“그러죠.”
토레스의 말에 엔크리드가 먼저 나서서 시선을 끌었다.
등에서 방패를 끌러 손에 쥐더니, 롱소드를 뽑는다.
스릉.
‘소리 좋은데.’
칼밥 먹는 이들이라면 무기에 민감한 법이다. 토레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토레스는 무기를 뽑는 대신 구울과 거리를 쟀다.
구울의 손톱에는 독이 있다.
굳이 가까이 갈 필요가 있을까.
먼저 나선 엔크리드를 향해 구울 두 마리가 땅을 박찰 때, 토레스가 손으로 허리춤을 훔친 뒤, 앞으로 뻗었다.
스텝 먼저, 오른발로 땅바닥을 콱 찍으며 탄력 있게 뻗친 팔꿈치에서 시작된 손끝.
손가락에 실렸던 무게감이 손을 떠난다. 나이프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구울의 머리통에 꽂혔다.
퍽하고 머리통이 반쯤 갈라지며 칼날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물가에 서성이는 구울의 몸은 반쯤 썩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고약한 냄새도 나는 거고.
썩은 살을 헤집고 두개골을 부수며 칼날이 튕겨 나갔다는 소리였다.
토레스는 단검을 던지고서 엔크리드를 살폈다.
그곳에 어설프게 방패를 들고 구울의 손톱을 튕겨 낸 엔크리드가 롱소드를 휘두르는 게 보였다.
적절하게 휘두른 검이 구울의 썩은 목을 뎅겅 잘랐다.
구울의 피는 검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푹하고 앞으로 무릎부터 꿇고 쓰러지더니, 검은 피를 울컥 쏟아 냈다.
“이쪽은 마물이 거의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같은 소대장이라고 해도 한쪽은 왕국 직할부대인 변방 수비대.
엔크리드도 소대장이 됐으나, 대우는 확실히 해 줬다.
“아예 없을 순 없지. 인면견 무리 때문에 최근에 이쪽에 돌릴 병력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많이는 안 나올 거야.”
엔크리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니 토레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어딜 가는지 궁금하진 않고?”
“강 건너 아닙니까?”
“일단 말은 편히 하고. 뭐 직할대 소대장이나 일반 부대 소대장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나이는 비슷한 것 같고.”
“서른입니다.”
“하물며 내가 어려.”
“그럼, 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니.
“동안의 비결은 뭐냐? 다 같이 전장을 구르면서 그 얼굴은, 나 조금 억울한데.”
겉만 보면 누가 봐도 토레스가 연상이다. 하물며 토레스는 생김새가 밋밋한 편이다.
어디 여관 급사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토레스가 말하며 떨어진 단검을 녹색과 파란색이 섞여 흔들리는 강물에 대강 닦아 내곤 소매로 물기를 훔쳐 품에 넣었다.
나이프가 품 안에서 쏙 사라졌다.
품에 따로 나이프집을 만들어 넣는 듯했으나, 한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 엔크리드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
“끝없는 훈련.”
엔크리드의 답을 들은 토레스는 헛웃음을 토했다.
말하는 재주가 있는 친구다.
역시나 제 부대에 들이면 좋았을걸.
생각하며 토레스가 본론을 꺼냈다.
“강만 건넌다고 끝날 일은 아닌 건 알지?”
끄덕.
“그런데 뭘 안 묻네?”
“물으면 알려는 주고?”
못 알려 주지, 토레스도 자세히는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
“마냥 재밌는 일은 아니겠지.”
엔크리드가 말하며 눈을 깜빡였는데, 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토레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그게 전에 마물과 더 싸우겠다고 말하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 새끼, 이거 기대하는 건가?’
강 건너는 마물과 마수의 땅이라는 곳이니까?
“묘하게 재밌네.”
토레스도 위험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이쪽도 그런 것 같지 않나.
“가자고.”
둘은 다시금 부지런히 걸었다.
나루터에 다 왔을 때쯤 토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시간이 좀 남겠어.”
강을 건너려면 사공이 있어야 한다.
나루터 근처에 대충 쌓아 둔 돌무더기 따위가 보였고, 어설프나마 가도도 보였다. 이제는 해가 위로 멀끔히 솟았다.
토레스가 적당한 그늘을 찾아 앉자, 엔크리드가 그 옆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안 쉬고?”
“이게 쉬는 거라.”
이러니 훈련에 미친 놈이란 소리를 듣지.
토레스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엔크리드를 지켜봤다.
스텝을 밟고 검을 휘두른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빈틈.’
이라고 생각한 순간, 검을 당기며 팔근육을 지렛대 삼아 칼날의 반대편, 폼멜을 무기 삼아 올려친다.
기본기의 응용이다.
‘깔끔해.’
저기에 턱주가리가 걸리면 최소한 며칠은 죽만 퍼먹고 지내야 할 것이고.
운이 나쁘면 평생 딱딱한 건 다 씹은 일이 될 터였다.
‘아오.’
상상하다 보니 제 턱이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엔크리드는 이후로도 계속 움직였다.
여기까지 온 것도 나름대로 강행군인데도.
‘체력은 죽여주게 좋네.’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지켜보던 토레스가 자기도 모르게 숏소드 손잡이를 쥐고 당겼다.
칭.
칼날이 반쯤 뽑히며 마찰음을 토해 냈다.
‘아.’
너무 몰입한 탓이다.
그 소리에 엔크리드가 휘두르던 칼질을 멈춰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한판?”
엔크리드가 제안했다.
이럴 때가 아니긴 한데.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는데, 엔크리드란 놈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호승심이 생겼다.
그렇다고 적의를 불태우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실력을 겨루고 싶게 만들었다.
즉, 이전 승급 결투에서 못다 한 승부도 내보고 싶었다.
‘제대로 해야겠지.’
일전에 하피와 인면견을 다루는 걸 봤다.
지금 검을 단련하는 모습도 봤고.
이제 무조건 밑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성장기야, 성장기.’
서른이라면서 이런 성장세라니.
“그래, 하자.”
토레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엔크리드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통째로 뽑아 들었다.
검집째로 맞아도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것이다. 엔크리드는 강격의 검술을 쓰니까.
“좋아. 좋다고.”
더없이 진지한 그 모습에 토레스도 괜한 말을 하며 팔을 늘어뜨렸다.
‘단검을 던져 볼까?’
아니, 어쭙잖은 수는 안 통할 테니.
그럼 어떻게?
계산하고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토레스의 머리를 관통했다.
‘일격에.’
툭 땅을 찬 순간, 토레스는 몸이 바닥을 스치듯 나아갔다.
낮고 빠르다.
아우딘의 태클이 떠오르는 속도에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히고 세웠다.
동시에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뭐가 됐든 다가오면 맞을 터.
그러자 토레스의 몸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엔크리드의 검이 그런 토레스의 흔적을 쫓았다.
눈으로도, 손으로도, 발로도.
전신 감각도 북돋는다. 놓치면 진다. 이전 결투에서 얻은 교훈이다.
동시에 거리를 주지 않는 거다.
장기전의 싸움이다. 그럼 이길 수 있을까?
장기전과 거리를 재며 싸운다면, 그리고 이게 진검 싸움이라면 죽일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하는 게 그런 싸움은 아니지 않나.
엔크리드는 일부러 거리를 좁혔다.
토레스는 당황하는 대신, 준비했던 걸 꺼내 보였다.
팔을 반만 뻗어도 닿을 거리까지 좁힌 채 상대의 목덜미 어림에서 손목을 한번 턴다. 그게 전부였다.
손에 무기도 없고 목을 쥔 것도, 때린 것도 아니다.
엔크리드는 오롯이 직감에 반응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픽.
거기서 승부가 났다.
토레스의 손에 어느새 한 뼘 길이의 칼날을 가진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다면, 토레스가 손목만 뒤틀어도 치명상이다.
“볼에 예쁘게 칼자국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뭐냐, 그건.”
엔크리드는 놀랐다.
그럴 만했다. 분명 빈손이었으니까.
“내 비기다. 물어본다고 알려 주겠냐?”
“안 알려 주겠지.”
안 알려 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토레스는 술술 입을 열었다.
“손재주가 필요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말하며 손목을 뒤집자, 어느새 손에 있던 나이프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손을 털자, 소매에서 툭 단검이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손잡이도 칼날도 상대적으로 얇다. 소매에 숨기는 용도로 만든 물건으로 보였다.
“하이드 나이프. 내 비기다.”
토레스가 말을 내뱉곤 한숨을 쉬더니 이어 말했다.
“씁, 이거 아무나 보여 주는 거 아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엔크리드는 다시 일어나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공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한 판 더?”
물으니, 토레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일어났다.
“그래, 하자.”
오랜만이었다. 마치 처음 검을 잡았을 때의 열정이 가슴에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은.
토레스는 그 기분에 휩쓸려 어울렸다.
그는 정말 아주 오랜만에 짧은 대련만으로 실력이 늘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감, 곧 목숨을 건 작전에 임해야 한다는 긴장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눈앞에 있었고.
‘묘해.’
이 모든 건 엔크리드 덕분이었으니까.
토레스는 그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니 묘하고 신기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약속된 시간에 사공이 도착했을 땐, 땀에 흠뻑 젖은 병사 둘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상비군 임무라고 들었는데, 임무가 아니라 훈련이었소?”
늙은 사공이 물었다.
할 말이 없는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