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16
16 章>
하늘과의 경계조차 희미한 광활한 수평선.
동정호와 더불어 중원의 양대 담수호인 포양호를 바라보고 있자면 가히 바다를 보는 것 같은 경이로움에 휩싸인다.
그런 포양호를 응시하는 독매홍(毒魅紅) 진가희(秦佳喜)의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아침을 알리는 햇살로 반짝이는 포양호의 파랑들.
수면 위로 흩날리는 물안개의 그윽한 물내음.
그 아름다움, 이 상쾌함에 더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새벽녘 바라보는 포양호.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자면…….
호호호! 이게 바로 강호의 낭만이지.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 그녀의 소소한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싯펄년. 매일매일 아침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머리 풀고 분위기 잡는 건 여전하네. 야 그거 겁나 귀신 같거든?”
곧바로 진가희의 살기가 처마 아래를 향한다.
한 자루의 거대한 쇄겸(鎖鎌)을 등에 맨 채 다리를 탈탈 털고 있는 흑의 사내.
그는 소마겸(少魔鎌) 염상록(廉常綠)이었다.
촤르르르.
진가희가 독기 가득한 눈으로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핏빛 채찍을 꺼내들었다.
그녀의 독문병기인 혈강편(血剛鞭)이다.
“그래 이 싸늘한 년아. 네년은 그게 어울려. 나라고 네년이랑 말 섞는 게 좋을 리가 있겠냐? 분위기 잡지 말고 빨리 내려와라.”
탓!
신법을 일으켜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진가희가 빼어 든 채찍으로 지면을 후려쳤다.
촤아악!
“다시 읊어 봐요.”
염상록이 주춤 물러났다.
“으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맺힐 저 창백한 낯짝 좀 보소. 겁나 강시 같은 년. 개소름 돋는 년.”
촤아아악!
진가희가 내가진기를 일으키자 채찍이 영활한 뱀처럼 너울거렸다.
“다시 읊어 봐. 짝불알 병신아.”
“이런 싯펄년이?”
염상록도 살기 그득한 눈으로 쇄겸을 빼어 길게 늘어뜨린다.
잊을 만하면 ‘그 사건’을 언급하는 저년과는 도저히 친해질래야 친해질 수가 없다.
“또 어떤 기생 년이 줄 듯 말 듯 약이라도 올렸나? 아침부터 왜 나한테 지랄이세요?”
“하! 시집도 안 간 년이 음탕한 혀 놀림 좀 보소. 그래서 네년이 인기가 없는 거야!”
진가희가 채찍에 주입했던 공력을 거둬들이며 표독하게 쏘아붙였다.
“됐고. 용건만 간단히 해요. 시답잖은 용건이면 나머지 한쪽도 터뜨려 줄라니까.”
“헛!”
자신의 하체에 닿아 있는 그녀의 끈적거리는 시선에 주춤 뒤로 물러나는 염상록.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한 남자의 인생, 그 전부를 저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겠다니!
저년의 사부인 독편살왕(毒鞭殺王)조차 저년을 멀리 한다 들었다. 과연 보통 사갈 같은 년이 아니었다.
곧 염상록도 빼어 든 사슬낫을 거둬들인다.
“이 포양호 일대에 금귀(金鬼)가 나타났다.”
“금귀?”
살귀(殺鬼)나 악귀(惡鬼)면 몰라도 금귀는 또 처음 들어 본다.
진가희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물을 흐리는 놈들이 나타났다는 건가요?”
“몰라 싯펄! 위에서 그렇게 부르길래 나도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다. 아무튼 그놈이 포양호 일대의 땅을 무지막지하게 사고 있어.”
“땅?”
돈만 많은 초보 상단의 전형적인 병신 짓이다.
아무리 땅을 매입해서 객잔과 기루, 도박장을 열어 본들 이 포양호의 지배자인 흑천련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사업장도 운영이 불가능한 터.
“또 죄다 털리고 떨어져 나가겠죠 뭐. 그런 병신들이 한두 번 나타난 것도 아닌데 굳이 우리까지 신경 쓸 것 있나요?”
“그 병신 짓이 이백만 평(坪)인데?”
“뭐라고요? 이백 만?”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진가희.
이백만 평이면 포양호 전체 상권의 사분지 일이다.
“또 황실 출신 관인(官人) 같은데?”
간혹 황실에서 엄청난 위세를 누리던 관인들 중에 평생 모은 재화로 사업을 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관인 출신과 부딪히는 것이 좀 껄끄럽긴 해도, 그렇다고 흑천련이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편은 아니었다.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그 대단한 단우명조차도 그렇게 개털리고 쫓겨났는데 또 누가 오겠냐?”
아무리 성대하게 장사를 열어 본들 흑천련이 대놓고 협잡하면 버틸 수가 없었다.
공부시랑의 객잔에서 밥 먹는 놈들을 흑천련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마당에 누가 팔자 좋게 그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웃기는 놈들이네. 설사 이백만 평의 땅을 사 본들 거기서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몰라. 암튼 위에서 우리보고 그놈을 만나 보래.”
“네? 왜죠?”
마겸왕의 제자 소마겸 염상록.
독편살왕의 제자 독매홍 진가희.
이들은 흑천련이 자랑하는 팔대고수, 즉 흑천팔왕(黑天八王)의 제자들이었다.
흑천련에서 이들의 위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우리 땅도 사고 싶다네?”
“우리 땅?”
진가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천련 소속인 자신들이 땅을 가질 수는 없다. 모두가 련(聯)의 재산일 뿐.
“설마 그놈들이 흑천련의 땅을 사기 위해 협상을 해 온다 그 말인가요?”
“그렇다네?”
“와! 뇌수가 터져 버린 놈들일까요?”
염상록이 소름 돋는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으 천하에 잔인한 년. 넌 왜 말을 해도 항상 표현이 그따구냐?”
입술을 삐죽거리는 진가희.
“머리는 지가 훨씬 많이 터뜨린 주제에.”
무기의 특성상 훨씬 피를 많이 보는 쪽은 채찍보다는 사슬낫이다.
이 허술해 보이는 사내의 쇄겸술은 시시껄렁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극도로 잔인하다.
“됐고. 빨리 준비해라. 그놈들이 곧 오기로 했으니까.”
“여기로? 흑천련 제일지부(黑天聯 第一支部)인데요?”
“그렇다니까?”
진가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이따가 그 낫 좀 빌려줘요. 배를 갈라 그놈들 간 크기 좀 재 볼라니까.”
“으 냉혹한 년.”
진가희가 차갑게 눈을 흘긴다.
“소마겸과 독매홍 중에 누가 더 냉혹하고 잔인한지 애들에게 인기투서 해 볼래요?”
염상록은 정말로 소름이 돋은 얼굴을 했다.
“야 이 창백한 년아! 그걸 ‘인기’투서라고 말할 수 있는 자체로 이미 정상이 아닌 거야!”
“됐고, 그래서 그 새끼들 어디로 온데요?”
염상록의 시선이 거대한 호수 변 끝자락을 향했다.
“어향루(漁香樓).”
* * *
상단의 귀공자로 행세하고 있는 조휘와 총관 역할의 제갈운.
짐꾼으로 변장한 장일룡과 호위무사 역의 남궁장호.
조휘 일행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두 달 동안 강서성의 온갖 난다 긴다 하는 거상(巨商)들을 만나 봤지만 그 긴장감만큼은 단연 오늘이 최고였다.
흑천련의 본단인 제일지부.
그곳의 간부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지난 두 달간은 정말로 전쟁이었다.
이곳 남창의 사람들은 정파의 영역인 합비와는 그 성향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실컷 웃는 얼굴로 땅을 팔기로 해 놓고 살수들을 동원해 뒤통수를 치지를 않나, 협상하는 자리에서 차에 독(毒)을 타질 않나,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칼을 들이대질 않나.
저자거리에서는 심심하면 칼이 휭휭 날아다니며 싸움이 일어났고, 여기저기서 여인들의 뾰족한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으며, 훔친 전낭을 손에 들고 미친놈처럼 달아나는 놈이 심심치 않게 눈에 보였다.
그냥 모두 다 미친놈 같았다.
오직 힘의 논리만이 지배할 뿐, 기본적으로 협상을 한다거나 명분에 따른 구분이 없었다.
과연 흑도사파(黑道邪派)라더니 그 사악한 민심에 남궁장호와 제갈운은 그야말로 정신이 붕괴될 지경이었다.
‘무림맹이 어떻게 이런 곳을 방치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만이 내내 뇌리를 지배했던 것.
하지만 무림맹도 삼패천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한데, 그런 미친놈들 중에서도 가장 미친놈들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을 오늘 만나기로 한 것.
오히려 긴장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저놈인 것 같아요.”
제갈운의 나지막한 목소리.
어향루의 주렴을 걷으며 들어서는 흑의 사내를 향해 주변의 모두가 눈을 깔며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거대한 사슬낫(鎖鎌)을 등에 맨 채로 오만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던 흑의 사내가 문득 이층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에 조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를 드러낸 채 씨익 웃던 흑의 사내.
곧 그가 이층으로 올라오더니 사슬낫을 휙휙 돌리며 거칠게 짓쳐 온다.
콰쾅!
덜덜덜!
조휘 일행의 탁자에 꽂힌 거대한 사슬낫!
얼마나 세게 후려 박았는지 한참이나 덜덜 떨리며 잔인한 칼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냐? 우리 땅 사고 싶다는 놈이?”
비릿한 미소로 조휘를 바라보고 있는 염상록.
“일단 앉으시죠.”
드르륵.
의자를 꺼내 눈짓하는 조휘를 염상록이 끈질기게 바라본다. 그의 두 눈에 가득 물든 것은 호기심.
“와, 겁나 강인한 새끼 보소? 내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쫄지를 않네?”
이 빌어먹을 사파 새끼들은 하나같이 일단 기선 제압부터 하려고 든다.
조휘는 지금까지 이런 놈들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이제는 좀 식상할 지경.
그렇게 조휘 일행을 살피는 염상록의 매서운 두 눈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스친다.
“호오? 쫄지 않는 이유가 있었네?”
어느덧 강렬한 투기를 내뿜고 있는 호위무사.
깊게 눌러쓴 삿갓.
예리한 기도.
과연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일단 이곳까지 오셨다는 건 제 말을 한번 들어는 보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염상록.
곧 그가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다리를 올리며 침을 찍 뱉었다.
“어디 한번 읊어 봐.”
제갈운이 난감하다는 듯한 얼굴로 탁자 위에 박혀 있는 거대한 쇄겸을 눈짓했다.
“지도를 펼쳐야 하는데 이것 좀 치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염상록이 피식 웃으며 쇄겸 끝에 달려 있는 쇠사슬을 당기자.
촤르르르르!
그 무거워 보이는 낫과 쇠사슬 뭉치가 질서정연하게 감기며 곧 그의 등에 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됐지?”
이에 제갈운이 포양호가 그려진 커다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펼친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던 염상록의 두 눈에 황당함이 서렸다.
“설마 저기 표시된 부분. 지금 저걸 다 사겠다는 거냐?”
제갈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뭐야 미친!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들 아냐?”
지도에 표시된 영역은 흑천련의 제일지부가 지니고 있는 땅이 포함된 포양호 상권의 절반 이상이었다.
“호호!”
어디선가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이를 살피던 짐꾼 장일룡이 기겁을 했다.
“으악! 시발 깜짝이야!”
창틀 밖에 매달린 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
새하얗다 못해 뼛속까지 보일 듯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저 여자는?’
조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
분명 예쁘다고 할 수도 있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는 여자였다.
시리도록 투명하고 창백한 피부.
마치 과거에 봤던 공포영화, 여고괴담에 나오는 처녀귀신 같은 모습인 것이다.
“하…… 등장도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하냐? 아주 그냥 숨이 멎겠다 이 싸늘한 년아. 도대체 지붕 위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
휘리릭.
진가희가 사뿐한 몸놀림으로 들어오더니 삿갓무사 남궁장호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다 염상록을 쳐다본다.
“저 삿갓만 재끼면 요놈들 돈 전부 우리 거잖아요? 저 혼자는 안 될 것 같은데…… 합공하실래요?”
“으 지독한 년. 넌 어떻게 사람 면전에서 죽일 계획을 세우냐?”
진가희가 오른손에 휘감겨 있던 기다란 채찍을 휘리릭 풀며 눈을 희번덕 뒤집었다.
“닥쳐 짝불알 새끼야. 합공할 건지 말 건지 결정이나 해.”
촤아아아악!
쩌저적!
채찍질로 이층의 바닥이 갈라지자 염상록이 기겁하며 의자를 내팽개치더니 몸을 추슬렀다.
“이런 썅!”
곧 그가 퉤 하고 침을 뱉더니 눈을 부라렸다.
“야 이 개념 없는 년아. 그놈의 채찍은 왜 늘 적아(敵我)를 구분 못해?”
촤르르르르!
“이렇게 어! 딱 어! 조준 못하냐고!”
곧 그의 길게 늘어뜨린 쇄겸이 남궁장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다.
“호호호호!”
촤아아아아!
진가희의 채찍도 영활한 뱀처럼 남궁장호를 휘감으려는 그때.
텁! 탓!
양손으로 가볍게 채찍과 사슬낫을 막아 낸 조휘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이건 뭐 사람 새끼들이 아니구만.”
“이, 이제 보니 진정한 형님은 따로 계셨네.”
애써 씨익 웃으며 평정심을 꾸며 내지만 염상록은 내심 기절할 듯 놀라고 있었다.
하마터면 쇄겸의 쇠사슬을 놓을 뻔했을 정도.
흑도의 사내로 살아오며 별별 일을 다 겪었지만, 자신의 수라살마겸(修羅殺魔鎌)을 한 손으로 막아 내는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게 끝인가?
저 싸늘한 년의 사독칠절편(邪毒七絶鞭) 역시 자신과 엇비슷한 경지.
지금 눈앞의 상대는 그걸 동시에 막아 낸 것이다.
뭐 막아 낼 수 있다 쳐도 어떤 충격이라도 있었으면 이해하겠는데, 자신의 칠 성 공력이 깃든 쇄겸을 무슨 젓가락 잡듯 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유리알처럼 투명한 상대의 차가운 두 눈을 보고 있자니 등줄기마저 축축하게 젖어 왔다.
짐작할 수 없는 그 무위만큼이나 두려운 눈빛. 그야말로 보통 사내가 아닌 것이다.
“앉아 시발아.”
“네.”
착!
날랜 몸놀림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염상록.
그를 응시하는 조휘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이 얄팍한 사파 새끼들에게는 절대 빈틈을 보여 줘서는 안 된다.
힘을 드러낸 이상 철저하게 밟아야 뒤탈이 없었다.
그것은 지난 이 개월 동안 뼈저리게 느낀 조휘의 경험이었다.
“그 낫 창밖으로 던져.”
“좀, 아니 많이 비싼 건데요?”
“던져.”
“네.”
휘이이익!
쿵!
이를 지켜보던 남궁장호가 혀를 내둘렀다.
무인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독문병기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라고 명령하는 조휘나.
버리랬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사파 놈이나 도무지 정상인들이 아니었다.
“처녀귀신. 너도 앉아.”
조휘의 차가운 음성에 진가희가 발그레 홍조를 그렸다.
“힛! 처녀래!”
처녀 뒤에 따라붙은 ‘귀신’이라는 단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인가?
이 와중에도 저렇게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걸 보면 보통 미친년이 아니었다.
곧 조휘가 내력을 일으켜 움켜쥐고 있던 진가희의 채찍을 단숨에 빼앗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지들이 나중에 회수를 하건 말건 일단 이 자리에서는 무조건 무기를 다 빼앗아야 했다.
이 빌어먹을 사파 새끼들은 허술해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도 쉴 틈 없이 눈알만 굴린다.
“잔대가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이 새끼야. 내가 너 같은 놈들 한두 번 상대하는 줄 아냐?”
“싯펄! 내가 뭐!”
눈치를 보던 염상록이 뜬금없이 일층의 점소이를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싯펄! 내가 뭐! 내가 언제 부순 물건 배상 안 해 준 적 있냐!”
조휘의 두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 입 다물어라.”
“네. 형.”
“형님 이 새끼야.”
“네. 형님.”
이렇게 싸움이 일단락되자 어향루 내부가 다시 웅성웅성 인기척으로 북적였다.
그제야 점소이가 종종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헤헤! 주문은 무엇으로 도와 드릴깝쇼?”
조휘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요리는 금린어탕, 어향장육, 팔선채. 안주는 어전, 육전 섞어서 서너 개. 술은 칠매주와 구화모태주로 가져와.”
빠각!
조휘가 염상록의 뒤통수를 찰지게 후려갈기더니 점소이를 향해 예의 차가운 눈을 빛냈다.
“다 취소. 죽엽청 두 병 끝.”
“아, 아니 그렇게 부자면서?”
포양호 상권의 반을 사겠다는 인간이 달랑 죽엽청 두 병?
“야 이 새끼야. 너 같으면 보자마자 죽이려고 칼부터 들이밀던 인간들에게 비싼 거 사 주고 싶겠냐? 그리고 귀신. 넌 왜 계속 서 있냐?”
“의자가 없잖아요.”
염상록이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면서 진가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가 다 부숴 놓고 자랑이다 이 차디찬 년아. 어휴 싯펄 저년만 보고 있으면 한여름인데도 겁나게 추워요.”
탁!
장일룡이 탁자를 치는 소리다.
“거 싯팔 새끼 말 존나게 많네. 형님 그냥 혈도 짚어 버리쇼.”
“엇? 이건 또 뭐여? 너도 그냥 짐꾼이 아닌 거여?”
상체가 숙여지며 축 늘어진 장삼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이 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풍성한 장삼을 입고 있어 그냥 돼지 새낀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다 근육이었다고?
염상록은 상대가 엄청난 외공을 익힌 몸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조휘가 자신의 의자를 밀며 진가희를 향해 말했다.
“시선 끌지 말고 좀 앉아라.”
진가희가 귀신처럼 창백하게 서 있으니 어향루 내의 모든 사람들이 오한이 치민 얼굴로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맞는지 계속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호호! 고마워요.”
소란이 잦아들자 조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로서는 포양호의 부지 매입 문제보다 더 빨리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흑천련에서 외부로 빠진 전력.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조휘 일행은 지난 두 달간 정신없이 땅을 매입하면서도 은밀하고 끈질기게 은봉령을 추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은봉령 고유의 표식이 새겨진 곳들을 모두 살폈지만 죄다 끄나풀을 엮기 위한 역추적의 함정이었다.
물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상단들을 돌며 흑천련에 유입되는 식자재를 살피던 제갈운이 흑천련의 병력 상황을 정확하게 유추해 낸 것이다.
그로 인해 흑천련 본단에서 빠져나간 전력의 규모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흑천련의 삼천(三千) 병력이 어디에 숨었냐고 이 새끼야.”
순간, 염상록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이 새끼들 혹시 정파 놈들 아니야?”
흠칫!
남궁장호는 하마터면 검을 뽑을 뻔했다.
그의 거친 목소리로 인해 어향루의 모든 시선이 또다시 집중된 상황!
그때 장일룡이 자신의 장삼을 거칠게 벗어재꼈다.
곧 그의 광활한 등판에 수놓아진 붉은 곰 문신이 드러난다.
“싯팔! 뭔 개 눈깔도 아니고 이래도 우리가 정파로 보이우?”
남궁장호와 제갈운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감각적인 임기응변!
“적웅(赤熊)! 하하! 녹림이었구나!”
붉은 곰을 몸에 새길 수 있는 자는 녹림대왕의 최측근밖에 없는 터.
염상록이 만면에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장일룡은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포양호의 상류, 장강(長江)의 영역을 두고 오랜 세월 녹림과 반목해 온 것이 흑천련.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호감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갑게 미소 짓던 염상록이 곧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던 것.
“가만 싯펄? 그런데 왜 녹림도가 우리의 병력을 물어보는 거지? 게다가 곧 물이 불어나는데 지금 당신들이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않나? 우리 땅은 또 왜 사는 거고?”
장일룡의 얼굴이 굳어졌다.
녹림도가 여름 장마철에 불어나는 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산적(山賊)이 수적(水賊)으로 변할 때다.
포양호의 상류를 비껴 관통하는 곳은?
‘안휘?’
녹림이 불어나는 장강을 타고 안휘의 남궁세가를 친다고?
유구한 녹림의 역사에 몇 번 없었던 일이었다.
흑도사파에서 녹림의 위상이 가장 강성할 때나 가능했던 도전.
삼패천의 위세에 눌려 약해진 지금의 녹림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장일룡이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거 당신이나 나나 위에서 까라면 까는 것이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수?”
“그건 그렇지. 지들 멋대로 싸우고 화해하고…… 하여튼 싯펄 애새끼들보다 더 변덕스러워요.”
화해?
오히려 정파보다 흑천련을 더 싫어했던 것이 자신의 사부였다. 황당했지만 장일룡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하하! 이(利)만 맞는다면 은원쯤은 잠시 접을 수 있어야 흑도의 사나이라 할 수 있지 않겠수!”
염상록이 묘하게 웃다가 그도 그렇다는 듯 호쾌하게 탁자를 쳤다.
탁!
“그렇군! 그랬어! 그래서 당신들이 땅을 매입하는군!”
확신에 찬 얼굴.
드디어 알아냈다는 득의의 미소.
“그럴 만도 하지. 우리에게 그 아끼던 당천포(當千浦)를 숙영지로 내어 주고 녹림의 장정도 칠천이나 동원했는데 함께 안휘만 도모할 수 있다면 충분히 우리 련주께서 우의(友義)를 베풀 만하지.”
한데 염상록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계속 찝찝함이 남아 있는 눈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욕심 많은 우리 련주께서 포양호의 상권, 그 절반을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검집을 잡고 있던 남궁장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간헐적 천재, 장일룡의 뛰어난 임기응변을 통해 드디어 모든 일의 전모를 알아낸 것이다.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진가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녹림도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 개새…… 아니 저 오빠는 왜 다짜고짜 우리에게 흑천련의 병력을 추궁했던 거죠?”
조휘가 씨익 웃었다.
“잠시 시험해 본 것뿐이다. 흑천련이 보낸 간부라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아?”
“아항?”
과연 그도 그렇다는 듯 염상록과 진가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처럼 긴밀한 말들을 주고받으려면 사전 탐색은 필수 아니겠는가?
‘큰일이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제갈운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녹림의 병력 칠천.
흑패천의 병력 삼천.
정확히 일만(一萬)의 병력이다.
이들이 불어난 장강의 물길을 타고 일거에 안휘를 친다면?
소름이 돋았다.
무림사에 대전(大戰)으로 남을 만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안휘에 무림맹의 병력이 없다는 것.
남궁세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오백을 넘지 못했다. 그것이 일가(一家)의 한계.
지금이라도 당장 맹으로 뛰어가 이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자, 그럼 탐색전도 끝났으니 일 얘기를 시작해 볼까?”
비릿한 조휘의 미소.
언제 출정할 계획인지, 첫 번째로 점령할 포구는 어디인지, 묻고 싶은 것이야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민감한 질문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또 다른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놈들이 흑천련 제일지부의 모든 전권을 쥐고 온 건가?”
그런 조휘의 질문에 염상록이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부장이 직접 우릴 보냈으니 아마 그럴 거요.”
조휘의 두 눈이 차갑게 침잠했다.
“아까 지도는 다 봤을 것이고. 모두 얼마면 팔래?”
“아니, 팔라는 말은 없었는데?”
“이 새끼가?”
조휘가 손을 들자 염상록이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다.
“진짠데요. 그냥 어떤 놈들인지 보고 오라고만 했지 땅을 팔고 오라는 말은 없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흑천팔왕의 제자들을 보낸 마당이었다.
흑천련 고수를 둘씩이나 보냈는데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개 상인이 이들의 합공을 간단하게 막을 것이라고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의 광경이 벌어질 걸 알았다면 아마 제일지부장 본인이 직접 왔을 것이다.
“전권을 쥐고 왔다는 놈들이 땅을 팔지 말지 결정도 못 해? 이 새끼들 그냥 애기들 아니야?”
“뭣이!”
“힛! 애기래!”
마침내 염상록이 폭발하며 참았던 속내를 드러냈다.
“이런 싯펄! 녹림의 곤궁함을 내가 모를 줄 아냐! 비루한 니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포양호를 절반이나 사냐고 이 미친 새끼들아!”
회까닥 뒤집어진 그의 두 눈이 장일룡을 향한다.
“어디 말해 봐 이 근육 녹림 새끼야! 위로는 무림맹 아래는 삼패천! 니들의 쪼그라든 그 영역으로 그 많은 녹림도들을 어떻게 다 먹여 살리냐? 벌써부터 피죽도 못 먹는 거 다 알고 있거든? 그래서 이번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이판사판 정파 한번 쳐 보는 거 아니야?”
그의 고개가 다시 조휘를 향해 부서질 듯 꺾어졌다.
“게다가 너처럼 어린 녹림 새끼가 초절정 고수 둘의 합공을 간단하게 막아 낸다고? 싯펄 무슨 화경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런 놈이 녹림에 있다고? 나는 금시초문인데? 장단을 맞춰 주려고 해도 도무지 말이 돼야 말이지! 도대체 정체가 뭐냐! 정체가 뭐냐고 이새끼들아아아!”
“이 새끼가 실성을 했나?”
조휘가 다시 내공을 끌어올린 그때.
“여, 여기 죽엽청 가져왔습죠.”
소란스러운 조휘 쪽을 피해 남궁장호의 앞에 죽엽청 두 병을 내려놓은 점소이가 공손히 뒤로 물러나며 포권을 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쇼.”
삿갓 무사가 마주 포권했다.
“고맙소이다.”
순간 장내가 얼어붙는 듯한 정적으로 휩싸인다.
“…….”
“…….”
염상록이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발악하듯 소리쳤다.
“저, 저, 저, 정파 새끼들 맞잖아! 야 이년아! 일단 튀어 싯펄!”
* * *
문득 염상록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다 거하게 취해 버렸다.
‘크…… 그저 지렸지.’
약관의 나이로 출도하자마자 전광검노(戰狂劒老)의 모가지를 땄던 일.
수십 척의 배에 구멍을 내어 관의 대선단을 침몰시킨 일.
흑천팔왕의 제자들 중 가장 먼저 흑살(黑殺)의 칭호를 하사받은 일.
호기롭게 검패왕(劒覇王)의 제자 군패검(君覇劒)에게 도전했다가 불알이 터진 일.
이런 싯펄?
잘나가다가 그건 또 왜 떠오르냐?
장일룡이 그렇게 실실 웃다 인상쓰다가를 반복하는 염상록을 쳐다보다 혀를 내둘렀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새끼들은 진짜 미친 것 같수. 우리 대산(大山)에도 미친놈들은 많았지만 살다 살다 이 정도 또라이들은 또 처음이우.”
모가지만 달랑 내놓은 채 땅속 깊이 파묻혀 있는 염상록.
곧 그가 눈짓으로 맞은편의 진가희를 가리키며 발악했다.
“싯펄! 긍정적인 생각이라도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그런다 왜! 도대체 이년이랑 왜 마주 보고 파묻어 놓은 거냐! 인간이 해도 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따로 있지! 날 얼려 죽일 셈이냐?”
“닥쳐 짝불알 새끼야. 이게 사람 새끼 입 냄새야? 누군 좋은 줄 아나 보네. 아아아아앙!”
조휘가 혀를 차며 천근추(千斤錘)를 시전하고 있었다.
“쯧. 이년은 또 싸우는 척하면서 기어 나오려고 하네. 이제 지겨울 때도 되지 않았냐? 포기를 몰라?”
양어깨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진가희가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아아앙! 다시는 안 그럴게요! 천근추 좀 풀어 주세요!”
“어휴 이 처녀귀신 년. 다시 안 그런다는 소리가 도대체 몇 번째냐.”
“힛! 처녀!”
봉황금선을 펼친 채 심각하게 골몰하던 제갈운이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조 소협.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곧 우기(雨期)예요. 서둘러 맹에 가야 해요.”
“흠…….”
“자칫하다가는 남궁세가 단독으로 사파의 일만 병력을 맞이할 수가 있어요. 빨리 이자들을 처리하고 움직이시죠.”
장일룡이 의견을 보탰다.
“이놈들 흑천팔왕의 제자들이라는데 후환이 없겠수? 괜히 죽였다가 흑천련 놈들이 추적대라도 풀어 버리면 어떡할 작정이시우?”
남궁장호의 침중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것저것 생각할 계제가 아니다. 시간을 끌다가는 본 세가가 너무 위험해.”
안휘에는 남궁세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흑천련의 본래 목적은 조가대상회.
남궁세가는 먹음직스러운 조가대상회를 지키고 있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조휘의 얼굴은 한껏 굳어 있었다.
“와, 이 새끼들도 사람 아니네. 니들도 사람을 면전에다 두고 죽일까 말까 계획 세우는 거야 지금? 그냥 니들이 사파 해라?”
조휘가 품속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소마겸 염상록. 약관에 흑살(黑殺)의 칭호 획득. 흑천련 서열 이백 위권. 직책은 제일지부 흑천밀위(黑天密位). 허술한 입심과는 다르게 성정이 음험하고 지독히 잔인함.”
잠시 후 몇 장을 더 넘기던 조휘가 이번에는 진가희를 응시했다.
“독매홍 진가희. 귀살(鬼殺)의 칭호 획득, 흑천련 서열 이백오십 위권. 직책은 제일지부 특살부령(慝殺副鈴). 성격은 알 수 없음. 야 넌 왜 성격이 생략이냐?”
대답은 염상록이 했다.
“딱 보면 모르냐? 그냥 머리에 꽃 꽂은 년이지. 그런데 어떤 새끼한테 샀어? 감히 흑천련의 정보를 내다 팔다니, 완전 미친 새끼네?”
조휘가 대꾸도 하지 않고 장일룡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기껏 해 봐야 서열 이백 위 밖의 애들이에요. 과연 이런 놈들 구하겠다고 흑천련이 따로 병력을 풀겠습니까?”
장일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이가 어려서 명목상의 서열이 낮을 뿐, 실제 위상은 훨씬 높은 놈들이우. 련주를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다는 흑천팔왕의 제자들이니 반드시 찾으려 들 거요.”
조휘는 골치가 아팠다.
풀어 주면 자신들의 정체와 목적을 떠벌리고 다닐 것이고, 그렇다고 죽이자니 흑천련이 추적대를 보낼 것 같다.
남창에 흑천련의 추적대가 편성되면 자신들의 행동반경은 더욱 좁아질 터.
마냥 머뭇거릴 시간도 없었다.
곧 우기가 닥치면 흑천련과 녹림의 연합 병력이 불어난 물길을 타고 안휘로 북상한다.
조휘가 짜증 섞인 얼굴로 남궁장호를 쳐다봤다.
“아니 왜 포권을 못 참는데?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 어렵나?”
남궁장호가 말없이 삿갓만 더욱 깊게 눌러쓰며 무안함을 감췄다.
“이 새끼가!”
그 짧은 틈을 타 또다시 땅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염상록을 발견한 조휘가 재빨리 신형을 움직여 그의 양어깨를 밟으며 천근추를 시전했다.
“아아아악!”
상체가 으스러지는 듯한 그 가공할 압력에 염상록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까지의 천근추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
“악! 싯펄 알겠다! 도, 도망 안 가면 될 것 아냐! 크아아아아악!”
고소하다는 듯 히죽히죽 웃고 있던 진가희가 문득 조휘를 올려다보았다.
“저 오줌 마려운데요. 그냥 싸요?”
“하…….”
다 큰 처자를 속곳에 지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
조휘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일단 둘 다 나와라.”
파팟!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염상록과 진가희!
곧 조휘가 마치 군대에서 후임 다루듯 염상록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상록아. 이 새끼야.”
“싯펄 왜?”
“형님 형님 잘하더니 말이 짧구나.”
“이런 싯펄! 흑천련의 흑살인 내가 정파 놈들에게 존댓말 쓰리?”
갑자기 조휘가 내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백의무복이 미친 듯이 펄럭거린다.
“형님.”
“그래.”
염상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누군가?
흑도제일기재 군패검과 호각을 다투는 몸이다.
여섯 살 때부터 사파 최고의 겸술이라는 수라살마겸(修羅殺魔鎌)을 익혀 왔으며, 천(天)급 영약만 두 개를 복용하여 임독이맥을 타통, 끝내 이 갑자의 내공을 이루었다.
흑살(黑殺)들의 세계, 그 지독한 권력의 음모의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마침내 악랄한 묵호(墨虎)마저 재끼고 흑천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동년배라면 자신의 적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눈앞의 이 정파 새끼는 분명 자신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극성의 내공으로 일으킨 수라섬전풍(修羅閃電風).
경공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지만 결과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기절’이 말이 되나?
그냥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깨어나 보니 야산에 파묻혀 있었다. 무슨 수법에 당한 건지 알 수도 없었다.
참 세상 한번 더럽다.
흑천련, 그 지옥의 틈바구니 속에서 평생 피 흘리고 노력해서 겨우 초절정의 고수가 되었는데 이 빌어먹을 정파 샌님 하나 못 재끼다니!
가진 놈들이 이래서 무섭다.
명문이라는 작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지원을 했으면 이런 괴물 같은 놈을 길러 낼 수 있단 말인가?
“상록아.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무슨 제안이요?”
조휘가 인심 쓴다는 듯 희게 웃었다.
“일단 죽이지는 않으마.”
염상록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진짜?”
흐흐!
제깟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역시 흑천련은 무서운가 보지!
“당연히 조건이 있겠지?”
“조, 조건?”
조휘가 고개를 끄덕이다 품속의 지도를 펼쳤다.
“흑천련의 재산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을 빠짐없이 지도에 표기하도록. 금고, 영약고, 병기고, 곳간 등 재물 비슷한 것이 몰려 있는 곳이라면 다 적어라.”
이를 지켜보던 제갈운의 입이 점점 벌어진다.
“당신 설마!”
조휘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네. 맞습니다.”
후방교란(後方攪亂)!
흑천련의 고수들이 본진에서 대거 이탈한 지금,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전술이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아직 오천 이상의 고수들이 흑천련 본진에 건재하게 남아 있는 판국이다. 자신들 네 명으로 무슨 후방교란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조휘가 절대의 고수라고 해도, 오천이라는 숫자는 결코 간단히 넘을 수 있는 전력의 벽이 아니었다.
“사파 놈들의 재물에 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데 그런 곳들을 허술하게 방비할 리가 있겠수? 지키고 있는 고수들이 엄청날 거요.”
제갈운은 그런 장일룡의 의견에 십분 동의했다.
“맞아요. 제일지부만 해도 일천 이상이 지키고 있을 거예요.”
조휘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과연 어쩔 수 없는 강호인들.
발상의 전환이 이렇게나 힘들다.
어쩜 이리도 하나같이 꽉 막혀 있을까?
왜 꼭 상대방의 병력을 뚫어야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할까?
현대인 시절 온갖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두루 접해 온 조휘는 ‘빈집털이’의 정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강력한 한 타로 상대의 병력을 일거에 없애는 것도 물론 좋다.
그러나 고성능 유닛의 짤짤이로 상대의 자원에 조금씩 타격을 주고, 마침내 본진을 말리는 데 성공한다면 차후의 전장을 지배할 수가 있었다.
“제 목표는 흑천련의 병력이 아닙니다.”
제갈운이 묘한 얼굴로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럼요?”
조휘가 씨익 웃었다.
“병력은 철저히 무시하고 흑천련의 재산만 골라서 다 부술 겁니다.”
“……네?”
잠시 뇌가 정지된 제갈운.
이를 지켜보던 남궁장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음이 틀림없을 텐데 어떻게 그런 흑천련의 고수들을 무시하고 타격을 줄 수 있단 말이오?”
조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강의 유닛이 있잖습니까.”
“유닏? 그게 뭐란 말이오?”
조휘는 이번에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히면서 왜 남궁세가가 집단전의 스페셜리스트인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제왕검공.
그 모든 검식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광역(廣域)의 무공이었다.
사방을 짓누르는 강력한 압력!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엄청난 충격파!
광역의 범위를 타격하는 특성만 따진다면 오히려 천검류를 능가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
무공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파괴만이 목적이라면 엄청난 효율을 낼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그런 광역검공을 의형지도(意形之道)로 펼칠 수 있는 절대경의 자신이 펼친다면?
순간 조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의념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허공에 둥실 뜬 철검.
그런 조휘의 검이 전방을 향해 미끄러지듯 천천히 나아간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염상록이 찢어져라 입을 벌린다.
촤아아아아!
삼십육방, 자유자재로 허공을 휘돌던 검이 더욱 멀리 날아간다.
이제는 안력을 돋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검의 움직임을 좇기가 힘들 지경.
그 머나먼 하늘 끝에서 마침내 고절한 검무(劒舞)가 피어났다.
멍하니 검을 응시하던 남궁장호가 탄식하듯 읊조렸다.
“창궁무진천하(蒼穹武震天下)……!”
그 검무는 고절한 창궁무애검, 그 후삼초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휘이이이익!
텁!
섬전처럼 검을 회수한 조휘가 약간의 탈력감을 느낀 듯 안색이 희게 변했다.
“후…… 이 정도면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의념의 한계지점까지 몰아붙였던 것.
이 정도로 멀리 어검(馭劒)하려면 고작 세 초식 정도가 한계이리라.
장일룡이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참 정말 어이가 없수.”
도대체가 이게 말이나 되나?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에, 비슷한 나이에, 같은 무공을 익힌 사람인데 이렇게까지나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의형지도는커녕 아직 진무화(眞武花)도 피우지 못한 장일룡으로서는 그 허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검수로서 이런 지고의 검을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남궁장호의 얼굴에는 희열의 감동과 미지를 향한 경이가 가득했다.
“최소 삼백 장(丈)은 족히 넘는 거리 같았소. 이런 어검술이라니! 정말 대단하오!”
제갈운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뭐라 대꾸할 힘도 없었다.
지금 조휘가 보여 준 한 수에 담긴 의미는 실로 간단했다.
홀로 원거리에서 건물만 다 부수겠단 뜻이다.
강호의 모든 상식과 전략전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지.
제갈세가가 가진 천고의 지혜를 아무런 쓸모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자들.
절대지경(絶大之境)!
그 천고의 능력을 조휘가 오연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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