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19
19 章>
포양호 대흑객잔의 이 층.
염상록이 남궁장호와 장일룡을 번갈아 흘깃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시 반로환동?”
남궁장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염상록에게 의문을 표했다.
“……나 말인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염상록.
남궁장호가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많이 잡아도 당신은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사십대 중년인에게 형님 소리를 듣고 다니면 뻔한 거 아닌가? 주안술(朱顔術)을 익힌 게 아니라면 반로환동(返老還童)이겠지.”
장일룡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했다.
“중년인? 여기에 중년인이 어디에 있는데?”
염상록이 오히려 되물었다.
“당연히 당신이지. 주종 관계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새파랗게 어린 저자에게 형님이라고 하는 거지?”
“…….”
장일룡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중년인’과 ‘대협’이다. 지금 염상록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싯팔 새끼가!”
제갈운이 서둘러 장일룡의 두 팔을 잡으며 외쳤다.
“장 부장은 이제 스물셋이에요!”
염상록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에이 농담이겠지?”
“크아아아아아악!”
장일룡이 발광하자 염상록이 기겁하며 물러선다.
배분과 연배에 지독히 집착하는 정파 놈들이다. 굳이 처음 보는 자신에게 나이를 속일 리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나보다 네 살이 어리다고?”
아니 무슨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해야 저 나이에 저런 얼굴이 될 수 있을까.
분명 지옥 같은 사선의 삶을 넘나들며 견뎌 왔을 것이다.
다시 보니 저 근육들도 보통 근육이 아니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가희. 귀신처럼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이 더욱 희게 변했다.
“진짜 소름이 다 돋네요. 정말 저 얼굴이 스물셋이라구? 호호!”
장일룡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팔에 돋아난 닭살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싯팔 내가 더 소름이다. 인간임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귀신 년아.”
“뭐래. 겉만 겁나 늙은 주제에.”
“미친. 얼굴에 피는 통함?”
그렇게 소란스러운 그때 조휘가 등장했다.
“조 봉공!”
자신에게 예를 표하는 남궁장호를 가늘게 노려보는 조휘.
“거 포권 푸시죠? 아니 저걸 왜 저렇게 못 참는 거지? 하루라도 포권을 안 하면 막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시나?”
“…….”
남궁장호가 씁쓸한 얼굴로 삿갓을 내려 여미자 제갈운이 의문의 얼굴을 했다.
“그게 다 뭐예요?”
제갈운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조휘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 뭉치.
이에 조휘가 퉁명한 얼굴로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툭 던져 놓았다.
몇 장 살펴보던 제갈운이 기겁을 했다.
“이, 이건!”
수백 개의 땅 문서!
게다가 필지를 살펴보니 소유주가 모두 흑천련이다.
그런데.
“가만……? 저에게 모든 전표를 주고 가셨잖아요?”
그가 상인들의 땅을 매입하라고 준 전표 다발이 모두 자신에게 있었던 것.
그 말인즉.
“흑천련은 자신들의 모든 땅을 무상으로 내놓기로 했습니다.”
제갈운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 조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결정이다.
그야말로 강호 최대의 호구가 걸려든 것이다.
* * *
남궁세가의 집무실 안.
세가주 남궁수는 내원주가 들고 온 보고서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런 개 같은……!”
부들부들.
절대의 무혼을 일신에 담은 후로, 가주의 위(位)에 오른 이후로, 이런 거친 상욕을 입에 올린 적이 과연 있었던가.
보고서에는 강서성에서의 창천검협의 영웅적인(?) 일대기가 적혀 있었다.
세가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 판국에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흑천련에 심대한 타격을 준 것은 물론 기꺼운 일이다.
허나 그 방식이 문제.
보고서 속의 무용담을 들여다보라!
전설의 이기어검술과 의형검강.
전설의 일위도강과 능공천상제.
그 전설적인 무위들이 오로지 상대의 재산을 파괴하는 목적으로만 쓰였다.
그것도 오연히 무위를 드러낸 것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철저하게 숨어서 급습, 즉 뒤통수만 쳤다고 한다.
흑천련의 모든 창고를 불태웠다.
물론 뛰어난 전공이다.
하지만 이런 걸 과연 무용담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창천검협(蒼天劒俠).
세가를 대표하는 청명(淸名)이자, 칠무좌(七武座)의 고고한 상징이다.
이런 짓은 그런 명예로운 이름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가주 남궁수가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서찰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찰의 맨 마지막 줄.
-죄송합니다. 가주님.
지독히 떨리는 필체.
소제갈의 고뇌와 송구함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필체다.
“허…….”
물론 조휘 일행의 전공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단 네 명의 정파 후기지수들이 이룩한 성과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
무림맹에서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던 사·녹연합, 그 실체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해체를 시켜 버렸다고 한다.
자그마치 일만(一萬)!
그 거대한 병력이 그대로 안휘로 쳐들어왔다면 남궁세가의 존망조차 위태로웠을 것이다.
분명 무림맹주가 직접 영웅의 칭호를 하사하고 상을 내려도 모자람이 없는 성과다.
하지만…….
“크흑!”
순간 세가주 남궁수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린다.
갑자기 도진 심통(心痛)!
“가주님!”
내원주 남궁백이 기경하며 다가가 남궁수를 부축한다.
“괜찮소…….”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정파무림의 명숙들이 겉으로 내색이야 하겠냐마는, 분명 내심으로는 자신의 강서영웅담(?)을 경멸할 것이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의형검강의 무위로 펼친 남궁세가의 검초라.
그런 무위가 가능한 자는 남궁세가에 단 세 명. 자신과 백부님, 그리고 봉공의 위(位)에 오른 조휘다.
백부님인 남궁성찬은 담로원에서 두문불출하였고, 자신도 정무가 바빠 세가에서 외출한 적이 없으니 틀림없이 이 모든 사태는 조휘가 벌인 일일 터.
더욱이 세가의 무공을 전수한 것은 자신이지 않은가.
흑천련에서 손을 썼는지 자신의 화려한 무용담은 이미 강서를 넘어 호북과 호남, 안휘까지 퍼지고 있었다.
결국 창천검협(?)의 이 모든 기행은 온 강호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후…….”
심통에 이어 두통까지 함께 밀려온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것이 조휘를 세가의 휘하에 두겠다는 자신의 욕심 때문인 것을.
“서찰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주.”
남궁수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무슨 소식이오?”
남궁수가 난감해하는 남궁백의 표정을 살피더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오히려 얼굴이 편안해졌다.
“괜찮소. 어서 보여 주시오. 한꺼번에 갑시다.”
남궁백인 연신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그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장호가 보낸 서찰입니다.”
“음…….”
건네받은 서찰을 펼치는 세가주 남궁수.
그렇게 서찰을 내려 읽던 그의 두 동공이 점점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린다.
남궁수가 가주의 체통도 잊고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이, 이! 이런 개썅……!”
“가, 가주님!”
조가대상회가 남궁세가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강호인은 없다.
조휘가 조가대상회의 이름으로 벌인 모든 행사에 창천검패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 조가대상회의 조휘에게 봉공의 위(位)를 하사했다는 성명을 세가의 직인을 찍어 공표한 마당이었다.
그런데 그 조가대상회의 이름으로 강서의 땅을 모두 사들였다?
그것도 모자라 또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흑천련의 수백만 평 땅을 무상으로 증여받았다고 한다.
광활한 포양호의 주위로 펼쳐진 상권, 그 절반 이상의 영역을 모조리 잡수셨단다.
조휘가 그 땅을 확보한 뒤 할 짓이라고는 뻔하다.
포양호의 남창을 이 합비처럼 만들려는 것이다!
흙빛으로 변한 남궁수의 얼굴.
정파무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오대세가의 남궁세가가, 상회를 동원하여 흑도사파의 세력권 안에서 장사를 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흑천련과 이익을 나눌 수밖에 없다.
이건 무림맹에서 축출될 수도 있는 엄청난 사안이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소자가 불민하여…….
서찰의 마지막 줄을 채 읽지도 않고 거칠게 움켜쥐고 마는 남궁수.
“아, 안 돼! 지금 당장 남창으로 가겠소! 준비해 주시오!”
“가주! 고정하시지요!”
“이 판국에 무슨 고정이란 말이요! 세가가 망하는 걸 지켜만 보란 말이오?”
마치 곧바로 경공술이라도 펼칠 듯한 기세다.
그런 가주를 바라보던 남궁백은 오히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남궁백이 곁에 시립해 있던 총관을 불렀다.
“총관. 밀행(密行)을 준비해 주시오. 무력대는 필요 없소이다. 가주님과 단둘이 갈 것이오.”
“분부대로 준비하겠습니다.”
* * *
아침 일찍부터 오후가 될 때까지 한 차례의 미동도 없이 포양호만 바라보고 있는 조휘.
그렇게 광활한 포향호의 수변을 침참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조휘에게 제갈운이 다가간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조휘가 슬며시 웃었다.
“중원인들이 과연 다닥다닥 붙어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산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조휘가 돌연 다른 주제를 들고 나왔다.
“제갈 과장님의 토목기관지술(土木機關之術), 그 고견을 한번 들어 봅시다. 현재 중원의 기술로 최대로 높이 올릴 수 있는 전각의 층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뜬금없는 주제의 질문에 제갈운이 짐짓 당황하다 입을 열었다.
“동원할 수 있는 재원이 얼마나 되죠?”
“무제한입니다.”
제갈운이 소름 돋은 얼굴로 다시 되물었다.
“사람이 거(居)해야 하나요?”
무제한의 재원에 단순한 조형물 성격의 탑이라면 십 층이고 이십 층이고 쌓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객잔처럼 사람이 주거해야 한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물론입니다.”
“음…… 대략 오륙 층 정도가 한계이겠군요. 정말 무리해서 설계를 한다면 칠 층까지는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무제한의 재원이 동원된다 할지라도 현 중원 건축 수준의 한계는 명확했다.
강호에 가장 높은 층수로 명성 높은 항주의 천상황홀루(天上恍惚樓), 그 거대한 전각의 층수도 육 층이었다.
목재라는 원자재의 물리적 한계.
그 특유의 하부 구조상 상층으로 가면 갈수록 용적률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목골(木骨)이 아니라 철골(鐵骨)이라면 어떻습니까? 물론 강철입니다.”
제갈운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철골?
그 엄청난 기둥들과 기본 뼈대들을 모두 강철로 바꾼다?
소에 매다는 쇠쟁기 하나의 시세가 평균적으로 은자 사십 냥이다. 철은 목재처럼 그런 흔한 재료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지 가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한데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좀 더 정확히 계산을 해 봐야하겠지만 목골의 두 배는 넘을 것 같은데요? 강철이라면 하중을 견디는 장력 자체가 다르니까요.”
“그럼 철골이라면 십 층은 무리 없이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네. 충분히요.”
그제야 조휘가 희게 웃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철골의 십층전각(十層殿閣). 오늘부터 그 설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차라리 그 돈으로 이삼 층짜리 전각 수십 채를 짓는 편이 훨씬 효율이 높을 텐데요? 너무 비효율적이잖아요.”
철골의 전각이라!
그런 전각이라면 한 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은자가 소모될지 제갈운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문득 조휘의 시선이 저 너른 포양호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저는 저기 호수 변 끝자락에 그런 전각을 스무 개 이상 지어 올릴 겁니다.”
“뭐, 뭐라고요?”
아니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천문학적인 은자가 소요되는 점은 둘째로 치더라도, 호수 변 한 자락을 모조리 십 층짜리 전각으로 채운다는 그 미친 발상 자체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십 층의 전각 하나만 해도 이 포양호의 상징적인 건물이 될 터였다.
조휘가 씨익 웃었다.
“언제든지 창밖을 열면 호수의 정취를 흠뻑 마실 수 있는 삶. 드높은 곳에서 한눈에 바라보는 대자연. 집 밖으로 나가면 늘 화사하게 반겨 주는 수변 정원의 기화이초.”
“네? 그 무슨…….”
지금 조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주거(住居)다.
땅을 매입했으니 이제 상권을 조성할 줄로만 알았는데 전혀 다른 뭔가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니 그럼 그 십 층짜리 전각이 사람이 사는 집이란 말인가요?”
그 엄청나게 큰 전각을 한 가족이 쓴다고?
하지만 조휘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제갈 과장님이 완성한 설계도 초안을 봐야 정확한 용적률이 나오겠지만, 일단은 층(層) 하나당 두 채의 집을 생각하고 있지요.”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제갈운.
층당 두 가구라면 그럼 십 층짜리 전각 하나당 이십 개의 가문이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 아니 조 소협 그건……!”
가문(家門)이 뭔가?
자고로 한 울타리다. 일가(一家)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수많은 가문이 전각 한 채에 몽땅 살 수 있단 말인가?
전혀 생소하고도 엉뚱한 개념.
애초에 사람들이 살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제갈운의 황당한 속내를 읽었는지 조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일 층에는 조가객잔과 조가성심당이 들어설 겁니다. 이 층에는 조가상단에서 유통되는 물건을 판매하는 조가상점이 들어설 예정이지요.”
조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십 층 전각에 사는 사람들은 굳이 냉차나 흑청수, 육겹면포를 사러 먼 길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직접 양조장에 가서 한빙주를 사 올 필요도 없지요. 계단을 타고 단 몇 층만 내려오면 조가대상회가 펼쳐져 있으니까요.”
“아!”
제갈운은 마치 정수리를 관통당하는 듯한 격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조휘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의(眞意)를 곧바로 깨달은 것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주거의 개념!
그 혁명적인 조휘의 발상 앞에서 제갈운은 또 한 번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집이라면 분명 수요가! 아니 서로 살려고 들겠군요?”
“후후. 철골로 만든 전각이라 꽤 비쌀 겁니다. 창문을 열면 포양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점 또한 높은 가격 형성에 일조하겠지요. 인간은 고대로부터 강가에 살아왔습니다.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물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뭐 한 채당 가격은 그때 가서 정하면 되고…… 문제는 용적률을 잘 뽑아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
어느덧 말을 끝낸 조휘가 열기 어린 눈으로 호수 변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멍하니 좇던 제갈운.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상계(商界)의 신(神)이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자.
그 전무후무한 자가 이번에는 주상복합(住商複合)이라는 천상의 개념을 들고 온 것이다.
* * *
-허허……!
강렬하지만 언제나 음울하기만 했던 조맹덕의 음성이 지금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지난 칠 년간 지켜본 조휘의 업적은 단순히 말 몇 마디로 정리될 수준이 아니었다.
빛 더미의 철방 한구석에 시작하여 뛰어난 언변과 수완으로 봉태현을 주무르더니, 이내 남궁세가의 후견을 얻고 합비의 상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갔다.
소룡대연회에서의 뛰어난 임기응변을 통해 만년빙정을 얻고, 얼음을 활용한 음료와 술 등 상상치도 못할 기막힌 물건들을 찍어 내더니 합비를 아예 다른 차원의 도시로 변모시켜 버렸다.
사업 수완은 또 어떤가.
때로는 푸근한 미소로 때로는 협박을 일삼으며 야금야금 합비의 상계를 먹어 치우더니, 이제는 합비를 넘어 안휘성 전체를 지배하는 상계의 절대자가 되었다.
그뿐인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조휘가 강서성을 먹어 치우는 과정을 치졸하다 욕하겠지만 조맹덕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강서에서의 행적은 가히 소름이 돋을 지경!
냉철한 지성과 흔들림 없는 판단, 철저한 계획 수립과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행동력.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과정 중에서도, 예견되는 모든 위험성(risk)과 시선(aggro)을 철저하게 남궁세가로 돌려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남궁세가의 봉공이라는 직책을 철저하게 활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도래될 이문은 모두 자신과 조가대상회가 취하고, 무림맹과 흑천련의 후폭풍은 오로지 남궁세가로 막는다!
철저한 실리주의!
실리를 위해서라면 명예든 뭐든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이런 냉철함은 틀림없는 군주(君主)의 재능이다.
검신의 무공을 익혔으니 강호(江湖)가 주는 마력에 심취할 만도 한데, 조휘는 결코 강호인처럼 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조휘의 곁에 인재가 들끓고 있다는 점이다.
남궁세가의 소검주 남궁장호.
제갈세가의 소제갈 제갈운.
녹림대왕의 대제자 장일룡.
흑천련의 흑살 소마겸 염상록.
흑천련의 귀살 독매홍 진가희.
물과 기름일 수밖에 없는 정사(正邪)의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오로지 조휘라는 구심점을 통해 묶여 있었다.
그의 압도적인 무위를 동경하거나 두려워하든, 뛰어난 상업적 감각에 매료되거나 엄청난 지식에 감탄하든, 모두 조휘라는 인간 그 자체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간웅, 냉혹, 비열…….
자신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수식어들은 모두 부정적인 단어 투성이였지만, 결국 휘하에 가장 많은 인재를 보유했던 천하의 군왕은 자신이었다.
당연히 조맹덕은 조휘가 너무도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 같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닮은 것 같다.
-껄껄! 네놈은 이 조맹덕의 현신(現身)이다!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조맹덕 어르신의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흑청수를 마시던 조휘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엄습하는 불안한 예감.
역시 그런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 녀석아. 군사를 일으켜 볼 생각은 없느냐?
조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갑자기 군사라니요?”
-네 녀석의 너른 그릇을 강호 따위로 채울 수 있겠느냐? 강호에서 네 녀석이 바라는 모든 업적을 다 이룬다 해도 감히 창세일계(創世一界)의 위업에 비하겠느냐.
아니 지금 이 어르신이 나보고 왕(王)이 되라는 건가?
그런 엄청난 건 절대로 생각이 없다.
-네 녀석의 무학적 성취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재산이 늘면 늘수록 모난 정처럼 ‘그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터. 이를 그나마 대비하는 방법은 오로지 천하의 정점에 서는 것뿐이다.
조휘는 흥미가 돋았다.
“그들이라면 사마(司馬)를 말하는 겁니까?”
-흥! 사마씨족도 놀이패에 불과한 것을. 어찌 보면 인간의 굴레를 이고 있는 이상 측은한 것은 우리 조가씨족과 마찬가지. 사마의 봉문(封門)은 반드시 ‘그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폭발할 지경.
“그럼 도대체 ‘그들’이 누굽니까?”
-본 왕도 모른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 인세(人世)를 주시하는 자 혹은 유람하는 자, 유희하는 자, 결정하는 자……. 그들을 형용하는 문장은 너무 많아서 그 실체가 한없이 모호하다.
“…….”
-이 의천혈옥 또한 그들의 유산. 네 녀석 역시 그들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미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조맹덕 어르신의 말은 너무 모호했다.
이 세상에 무슨 엄청난 자들이 존재한다는 뜻 같은데, 자신의 경험으로는 의천혈옥 속에 존재하는 검신이나 만상조 같은 어르신들이 더욱더 괴물 같았다.
-자연지경(自然之境)에 이른 본좌의 무위로도 ‘그들’을 수행하는 소동(小童)과 동수(同手)였느니.
너무나도 엄청난 검신 어르신의 증언에 조휘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결코 인세의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되느니, 절대경의 네놈으로서는 절대로 대적하지 말고 무조건 도망쳐야 하느니라.
조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일검(一劒)에 무려 화산파를 지워 버릴 수 있었던 무위였다.
그 소름 돋는 검신 어르신의 무공을 지켜보며 인간들의 세상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힘이라고 여겼었다.
한데 그런 검신 어르신의 무위와 동수? 아니 능가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투를 보아하니 그런 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 같은데 이는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런 자들이 수두룩하다면 이 땅에 과연 제국이나 무림방파가 존속될 수는 있는 건가?
그때, 제갈운이 객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한아름 서류 더미를 들고 있었다.
“일단 설계도의 초안을 짜 보려고요. 좀 도와주시죠?”
조휘가 서류 더미들을 받아 주며 물었다.
“저는 기관지학 쪽은 문외한입니다만?”
제갈운이 피식 웃었다.
“수(數)는 저보다 훨씬 잘 다루잖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계산은 물론 자신이 빠르다.
조휘가 서류 더미를 펼치자 밑그림이 꽤 정밀했다.
“일단 강철이라는 재료의 강력한 장력을 감안해서 직사각(直四角)의 형태로 전각의 초안을 잡아 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용적률을 높이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중원에서 고층 전각을 짓는 양식은 다각형 원뿔 형태다. 약한 목골(木骨)의 특성상 상층의 하중을 견디려면 원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철골(鐵骨)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면 말이 달라졌다.
“제가 봤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물이에요. 최상층부에 사는 사람들은 물을 길어 오기가 너무 힘들거든요.”
“아 맞다!”
조휘가 놓치고 있었던 것.
현대의 고층 아파트는 그냥 형태만 짓는다고 끝이 아니다.
상하수도, 전기, 엘리베이터, 조경, 내부 인테리어 등 수많은 시공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아파트 단지를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전기와 엘리베이터는 이 세계에 없는 것이니 시공할 수 없었지만, 상하수도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난관.
“가죽을 덧대어 만든 거대한 물주머니를 최상층에 설치하고 가느다란 관을 통해 각 세대에 공급하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하수(下水)인데…….”
조휘는 이번에 지을 십 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꼭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싶었다.
중원에 아직 전해지지 않은 용변 문화.
그 청결하고도 위생적인 혁신을 경험하게 해 준다면 중원인들로서는 놀라 자빠질 것이다.
‘음…….’
물을 내려 주는 물 부레의 원리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그 정도는 조휘도 몇 번의 시행착오만 겪는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중원의 도자기 공(工)들이 좌식 변기 형태의 도자기를 성형할 수 있느냐다.
뭐 기술적으로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철방의 경영을 경험해 본 조휘로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칠 수 없었다.
초보적인 현대의 기술이라 당연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는데도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자전거 체인과 스프링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음…….”
찬찬히 생각을 해 보니 난방도 문제였다.
각 세대별로 벽난로를 설치하려니 굴뚝의 부피 때문에 용적률이 문제가 될 것 같았고, 현대의 온돌을 적용하려고 해도 또 뜨거운 물을 내려보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약한 상층부에 너무 많은 하중이 몰리게 된다.
자신이 떠올린 모든 것을 적용하려면 최상층부에 거대한 식수탱크, 온수탱크, 커다란 화로가 들어서게 된다.
이십 세대의 온돌에 온수를 공급하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가 문득 조휘가 멍한 얼굴을 했다.
‘아니, 고무파이프도 없잖아?’
온돌방에 설치할 고무파이프가 없다.
또 철제의 원형 관을 설치해야 되는데 이는 가장 최악의 수다.
철(鐵)의 상극은 물(水)이다.
최상층부에서 내려오는 수도관의 경우 전각 외벽으로 관을 빼면 주기적으로 교체가 가능하지만 온돌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정기적으로 방바닥을 깨거나 뒤집으며 관을 교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철을 다루면 다룰수록 현대의 합금, 그 야금학 기술이 너무나 고팠다.
‘공대를 나왔어야 했나…….’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던 조휘가 서류 더미들을 덮었다.
“설계는 좀 나중에 하죠. 대체할 수 있는 여러 재료들도 좀 알아봐야 하고 생각을 좀 더 정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높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계통의 좀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그때, 염상록과 진가희가 조휘의 객방에 들어왔다.
“우린 이제 뭘 하면 되죠?”
한껏 호기심으로 물든 진가희의 얼굴.
조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네놈들은 필요가 없는데? 흑천련으로 돌아가.”
“뭣!”
“뭐예요!”
시한폭탄과 같은 조휘 일행의 입을 막지 않고서 어찌 흑천련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흑천련이 배신자를 처단하는 규정은 지독히 엄격하다.
단전의 폐쇄는 물론이고 사지근맥마저 잘려 산야에 버려질 것이다.
염상록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약속해라! 사·녹 연합과 당천포(當千浦)의 숙영지를 우리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조휘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겠다.”
부들부들.
가늘게 몸을 떨던 염상록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싯펄! 전혀 믿음이 생기지 않아! 두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이다! 좀 진지하게 대답해 보란 말이다!”
조휘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어이 소마겸이. 네가 네 입으로 대가리 쪼갠 고수가 수십이 넘는다고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나? 그런 놈이 뭐? 사람의 목숨?”
“에잇 싯펄! 그 새끼들은 죽어도 싼 놈들이었다고!”
“네놈들도 죽어도 싸.”
“그아아악!”
염상록이 또다시 발작하려 들자 조휘가 내공을 끌어올리며 음습하게 말했다.
“앉아 시발아.”
“네 형님.”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며 공손히 두 손을 포개어 앉아 있는 것이 꼭 여인을 보는 듯하다.
조휘의 음습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살고 싶어?”
“네 형님. 당연히 살고 싶습니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염상록.
조휘가 예의 근로계약서를 품에서 꺼냈다.
“작성해.”
한 차례 근로계약서를 살피던 염상록의 두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직급 사원? 이건 뭡니까?”
“네놈들의 귀살, 흑살 같은 우리 대상회의 위계다.”
“사원이면 높은 겁니까?”
“아니 가장 낮아.”
“…….”
얼굴을 불만스럽게 구기던 염상록이 계속 근로계약서를 살피다 기겁을 했다.
“월봉이 철전 칠십 문? 에잇 싯펄! 장난하나? 점소이도 이거보단 많이 받겠다!”
조휘가 능청스럽게 근로계약서의 하단부를 가리켰다.
“제사 조항 잘 봐. 추가 수당도 있다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죽엽청 두 병 먹으면 없겠네 싯펄!”
“그래서 살 거야 죽을 거야?”
“이런 썅……!”
염상록이 결국 어쩔 수 없이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마치자 조휘가 낚아채듯 품에 넣었다.
“이 시간부로 염 사원은 남창 일대에 유명한 목공(木工), 석공(石工), 도공(陶工) 등 건축에 관련된 이름 높은 기술자들을 모조리 수배해서 데려와. 그들에게 제시할 월봉은 기존의 다섯 배. 알아들었나?”
“싯펄! 알겠다고!”
이미 조휘에게 금자 백 냥을 받은 진가희로서는 월봉에 그다지 목매지 않았다.
“저는요? 전 계약 없나요?”
조휘가 한 차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진가희를 쳐다봤다.
“넌 뭘 잘할 수 있는데?”
촤아아아악!
한 차례 바닥에 채찍을 내려찍던 진가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람 죽이는 거?”
답이 없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조휘가 뭔가 생각난 듯 두 눈에 기광이 스쳤다.
“너 허구한 날 지붕 위에 올라가서 호수만 보더라?”
염상록이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저 미친년의 취미이자 특기요.”
사람은 다 쓸 곳이 있는 법.
조휘가 눈짓으로 창밖의 북쪽 제일지부를 가리켰다.
“잘됐다. 넌 매일매일 지붕 위에 올라가서 제일지부 쪽의 동태를 살펴라. 수상한 점을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고. 할 수 있겠지?”
진가희가 두 눈을 반짝였다.
“호호호! 그것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네요!”
* * *
흑천련 총단.
부서진 전각들의 잔해를 모두 치우고 나니 흑천대살은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렇게 묵묵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총사 서유(徐儒)에게 물었다.
“그 악귀탈 놈의 행적은 파악되었는가?”
창천검협과의 합의가 끝난 후 그 이튿날 찾아온 악귀탈 사내.
처음에는 당연히 창천검협인 줄 알았지만 영락없는 청년의 목소리였다.
문제는 협상 과정에서 악귀탈의 청년에게 무혼(武魂)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 절대경의 무위로 흑천련을 괴롭혔던 자가 창천검협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
흑천련의 정보에 포착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남궁세가의 고수라!
동시대에 한 명도 나오기 힘든 절대경을 둘씩이나 보유하고 있는 문파는 화산과 소림이 유일한 터.
이는 남궁세가가 천하제일의 화산이나 소림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다.
만약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사·녹연합이나 안휘 출정 같은 무리한 계획은 애초에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절대경 무인 한 명의 파괴력은 웬만한 문파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절대경의 후보라 할 수 있는 화경의 고수들은 모두 창천담로원에 있습니다. 일단 강호에 알려진 무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흑천대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의 전대 고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창천담로원의 원로들 중 화경의 무위로 이름 높은 자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에서도 화경에 극에 이른 창천검선(蒼天劒仙)이 가장 유명했다.
한데 모두 원로들이다. 악귀탈의 사내와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다.
“남궁의 소검주라는 아이의 무공은 어떠한가?”
총사 서유가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룡대연회에서 소검주 놈의 무위는 절정의 극(極)이었습니다. 이제 육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천고의 기연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초절정 이상의 무위는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남궁세가에 그런 엄청난 신진 고수가 있었다면 이미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후보가 없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하나 있습니다.”
“뭔가?”
“이번에 남궁세가가 봉공(奉公)으로 세운 인물입니다. 조가대상회의 회장이라는 자입니다.”
“봉공?”
기백 년 오랜 역사를 지닌 남궁세가가 봉공으로 세운 사람은 극소수였다. 더욱이 강호의 무인이 아니라 상인을 봉공으로 내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공을 익힌 자인가?”
“그 조가대상회의 회장 조휘라는 자가 무위를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전형적인 상인입니다.”
“음…….”
총사 서유가 창문 밖의 포양호를 응시했다.
“포양호 주변의 땅을 엄청나게 사들인 상인도 그 조휘라는 자입니다. 저희에게 찾아온 악귀탈의 사내와 반드시 어떤 접점이 있을 테지요. 그쪽을 한번 파 보겠습니다.”
흑천대살의 두 눈이 또다시 무료해졌다.
“그리하도록 하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흑천대살이 총사 서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대가 본좌에게 질문을 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군. 말하라.”
총사 서유의 얼굴에는 의문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련의 땅을 무상 증여한 것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흑천대살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전음으로 전매권(專賣權)을 제시하더군.”
흑천련도 조가대상회의 엄청난 물건들을 잘 알고 있다.
조휘는 강서에서 유통될 모든 조가대상회의 상품들 중 오 할의 전매권을 흑천대살에게 제시한 것이다.
“전매권이라면 기간을 얼마로 협의하셨습니까?”
“삼 년을 제시하더군.”
“삼 년!”
조가대상회의 그 엄청난 물건들을 삼 년 동안 독점적으로 유통할 수 있다면 그 이문을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참으로 대범한 자로군요.”
흑천대살이 피식 웃었다.
“삼 년 후를 내다보는 거겠지. 감히 이 흑천련을 길들여 보겠다는 수작. 전매권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분명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올 것이다.”
총사 서유의 두 눈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개수작이 뻔한 데도 왜 그 모든 땅을 무상으로 증여했단 말인가?
“필시 수틀리면 본 련의 창고들을 다시 털려고 할 텐데 운송비가 좀 들더라도 절강으로 총단을 옮기면 그만이지 않은가? 현물로 보관하던 현재의 체계 역시 바꿀 것이다. 모두 화폐화하여 절강으로 옮기면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상대가 지닌 최고의 패를 무효로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무리 절대경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혼자.
숨어서 창고만 부수는 방법의 한계는 명확했다. 창고를 없애 버리면 끝인 것이다.
“과연 그때는 무엇으로 협상하려고 들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흑천대살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땅을 받아 갔으니 놈은 그 땅에 원 없이 돈을 쏟아부을 터. 그렇게 놈이 발전시킨 상권을 고스란히 련의 품에 귀속시킬 것이다. 본 련의 창고를 모두 절강으로 옮기는 그날, 놈에게는 최악의 지옥이 펼쳐지겠지.”
자신감으로 가득한 흑천대살.
하지만 총사 서유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련주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어디 그리 만만했던가.
* * *
조휘는 일행에게 이것저것 할 일을 지시해 놓고 곧바로 천상운차에 몸을 실었다.
포양호의 상권을 발전시키려면 조가대상회의 노련한 간부들을 차출해서 데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합비의 상권을 별천지로 만들었던 그들의 경험은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렇게 지루한 마차행이 이십여 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평범한 마차였더라면 여독이 상당히 쌓였을 테지만 판스프링이 적용된 천상운차의 뛰어난 승차감으로 인해 조휘는 늘 적당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덧 도착한 합비.
합비는 여느 때처럼 온갖 행색의 여행자들과 장사치들로 붐볐다. 두 달 전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늘어난 듯 보였다. 조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슴 한편에 차올랐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조가대상회에 도착하자마자 문지기 오앙(吳央)이 발 빠르게 나와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조휘의 질문에 오앙이 별원 쪽을 가리켰다.
“북해로 출정하셨던 무사님들이 사흘 전부터 도착해 계십니다.”
“호오?”
일반인이라면 왕복으로만 반년은 넘게 걸릴 여정이었다.
과연 녹림 제일의 무력대라 이건가.
세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북해행을 마무리하고 오다니!
“그들과 함께 온 북해인(北海人)들도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저희 상회가 많이 시끄럽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순간, 문지기 오앙의 두 눈이 몽롱해진다.
“무사님들이 한 쌍의 남녀 북해인들을 데려왔습니다. 한데, 그들의 용모가 가히 천상(天上)의 선남선녀라 별원 쪽을 훔쳐보는 사람들이 늘 바글바글할 정도입니다.”
“……천상의 선남선녀?”
“예.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정도입니다.”
조휘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별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원의 대문을 열자마자 많은 인파가 조휘의 눈에 들어왔다.
합빈관의 인연생들과 조가통운의 라이더 무리들 사이로, 수석공 남천일과 조가성심당의 벽호상 당주, 조가양조장의 여영소 장주와 조가통운의 소팽심 등 여럿 간부들의 모습도 보였다. 심지어 총관 이여송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조휘는 일과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간부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렇게 조휘가 꾸짖음의 운을 떼려는 찰나, 그의 시야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아니……!’
조휘는 그대로 우두커니 멈춰 선 채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평소 중원(中原)의 미남미녀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 여겼다. 현대 첨단의 성형술과 화장술, 세계적인 톱스타들을 이미 눈에 담아 버린 자신에게 중원의 미인상은 그다지 와닿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한 쌍의 남녀는 그런 조휘의 선입견을 완벽하게 깨부수고 있었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눈처럼 희고 깨끗한 머리칼은 신비롭기 짝이 없었고, 마력적인 커다란 눈동자들은 마치 별빛을 담은 듯했다.
유려하게 뻗은 콧날과 선홍빛 입술, 미의 극치를 달리는 고아한 얼굴 선(線), 그 모든 균형미들은 굳이 백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완벽(完璧)하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쌍둥이처럼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그제야 조휘를 발견했는지 적웅질풍대주 강만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셨소이까.”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강만호 대주의 음성.
그간의 고생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의 두 눈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인사하시오. 이쪽은 설백(雪白) 공자, 이쪽은 설현(雪賢) 소저요.”
조휘가 정중하게 포권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휘라고 합니다.”
조휘가 정중히 예를 표하고 있었지만 설 씨 일행은 냉정한 표정을 한사코 풀지 않았다.
“그대가 만년빙정의 주인인가요?”
조휘가 내심 감탄을 했다. 설현이라 불린 여인의 목소리가 그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만년빙정 운운하는 걸 보니 이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빙공(氷功)의 연성.
애써 냉정한 척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초초함을 조휘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네. 제가 만년빙정의 주인입니다. 우리 직원을 통해 무슨 일을 해 주셔야 하는지는 들으셨겠지요?”
그때, 말없이 지켜보던 백발의 사내 설백이 나섰다.
“만년빙정을 보기 전에는 그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소.”
조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조휘가 설백과 설현을 안내하며 길을 나서자 대주 강만호가 다급히 조휘의 옷깃을 잡았다.
“우리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진정 풀어 주는 것이오?”
“내가 삼류 파락호냐? 한 입으로 두말하게? 그 좋아하는 대산(大山)인지 거기로 돌아가라고.”
파파파팟!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적웅질풍대원들 모두가 전광석화와 같은 경공을 일으켜 장내를 빠져나갔다.
조휘가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그런 그들을 응시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대석빙고는 조가대상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보로 일각이면 도착하는 수준.
합비의 지도를 펼치면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석빙고였다.
“이곳입니다.”
설백은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 맞는 건지 의심마저 들 지경. 북해에서는 이런 커다란 규모의 건축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드르르르륵-
조휘가 내공을 일으켜 석문을 열자 설백이 더욱더 놀랐다.
석문에서도 압도될 지경이었는데 내실의 규모는 더욱 상상 이상이었던 것.
끝도 없이 뻗어 있는 계단, 그 지하세계에 수많은 얼음들이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었다.
마치 북해의 전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북해빙궁의 성벽을 보는 듯하다.
“내려가시죠.”
“아? 예.”
잠시 주춤거리던 설현이 오라버니인 설백이 앞장서자 그제야 발길을 옮겼다.
차가운 척해도 유약한 본래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휘의 입매가 슬며시 올라간다.
설백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대석빙고의 중앙.
그곳에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빙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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