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23
23 章>
흑천팔왕의 귀환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넓게 울려 퍼지자, 삼엄하게 경비하던 총단 외원의 무사들이 일제히 기합성을 내질렀다.
-련의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마겸왕과 독편살왕은 대충 손을 휘휘 저어 흑천련 무사들의 예를 물린 후 곧바로 보법을 일으켜 약왕당(藥王堂)으로 몸을 날렸다.
휘리리릭.
마겸왕이 약왕당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약왕(藥王)! 안에 있나!”
덜컥.
쪽문을 열고 얼굴을 쏙 내민 백발 미염(美髥)의 노인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쯧쯧쯧. 또 어디 가서 밤새 진탕 굴러먹고 정기(精氣)가 상했나? 혈보단(血寶丹)의 완성은 멀었으니 다음에 와라! 내 먼저 기별한다 하지 않았나!”
마겸왕이 전광석화처럼 약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우리는 무형지독에 당했다.”
“무, 무형지독?”
독중독(毒中毒) 무형지독(無形之毒).
이미 그 비전이 강호에서 사라졌다고 전해지는 그런 엄청난 독에 당했다고?
“착각한 것이 아니냐? 무형지독은 이미 수백 년간 자취를 감춘 독이다.”
마겸왕이 처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우리 둘 다 전형적인 무형지독의 증세를 경험했다! 이미 보름짜리 해약도 먹은 상태야!”
“이런 상병신! 목줄이 채워졌구나!”
“빠, 빨리 해약을 만들어 다오!”
“아니 이런 미친놈을 봤나? 무슨 무형지독의 해독이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약방문 같은 줄 아나?”
그럼에도 한없이 진지한 마겸왕과 독편살왕의 얼굴.
흑천련 입장에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려 흑천팔왕의 둘이 해약으로 목줄이 채워졌다.
“일단 맥문(脈門)부터!”
서둘러 팔을 내미는 마겸왕.
그의 맥문을 잡고 한참이나 눈을 반개하고 있던 약왕이 고개를 슬그머니 갸웃거렸다.
“기경팔맥(奇經八脈)과 십이경락(十二經絡)이 너무도 정상이다. 내공도 오히려 좀 늘어난 것 같은데? 활력도 증진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군. 최근에 무슨 보약이라도 먹었나?”
마겸왕이 기가 찬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멍청한 돌팔이 놈! 무형(無形)의 뜻이 뭐냐? 무색무취에 당하고 무증상으로 말라 가는 독이다! 명색이 약왕이라는 놈이 그것도 모르나?”
“하기야…….”
물론 일리는 있는 말이다.
하지만 천하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독도 완전한 무증상을 보일 수는 없었다.
독력(毒力)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을 훼손하는 힘.
아무리 은밀한 독이라 할지라도 기경팔맥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독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틀림없이 무형지독에 하독당해 병신같이 누워만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단 말이다!”
아직 절대경에 이르지 못해 그 고절한 의념의 세계를 모르는 마겸왕으로서는 무조건 독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 장 내의 모든 움직임(動)의 결을 의념으로 비트는 무공?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독편살왕이 거들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독이었네. 백 장 내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쓰러졌었지. 그 귀신같은 하독(下毒) 실력만큼이나 지극히 잔악무도한 놈일세.”
평소 언행을 신중히 하는 독편살왕까지 저렇게 나오니 약왕으로서도 일을 가볍게 치부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보름을 버티는 해약을 먹었다고 했나?”
“그렇다!”
“어쩌면 해약이 아닐 수도 있다.”
“뭐, 뭣이?”
“만약 당신들의 증언이 틀림없다면, 무형지독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 독력이 기경팔맥, 십이경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 않는다면?”
약왕이 더없이 신중한 얼굴을 한다.
“답은 뇌(腦)다. 무형지독은 뇌를 마비시키는 독이야.”
약왕은 마치 확신하는 눈치였다.
“네놈의 이유 모를 활력…… 아직도 모르겠나?”
“도, 도대체 뭘 말이냐!”
곧이어 들려온 약왕의 진단은 마겸왕과 독편살왕에게 청천병력과도 같았다.
“자네들이 먹은 해약은, 사실 강제로 회광반조를 일으키는 이중의 독이란 말일세!”
쨍그랑!
태어나서 처음으로 낫을 떨어뜨린 마겸왕!
“회, 회, 회광반조(回光返照)……!”
죽음 직전, 모든 잠력이 폭발하여 일시적으로 활력이 돌아오는 현상을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팔팔한데 회광반조라니!”
발악과도 같은 마겸왕의 외침에, 약왕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본디 뇌를 상하게 하는 독은 해약이 없다. 엄청난 양강(陽剛)의 내가고수가 진기도인술(眞氣導引術)로 골수에 치민 독을 태워서 치료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백치가 될 뿐. 목숨을 연명한들 실혼(失魂)한 자를 어찌 사람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약왕이 안타깝다는 듯 측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마겸왕이 버럭 화를 냈다.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말라고! 빨리 해결책을 내놔라!”
독력이 뇌수까지 치밀었다면 약왕으로서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본 왕이 해 줄 말은 하나뿐이네. 그대들이 복용한 것은 해약이 아니라 체내의 잠력을 일시적으로 폭발시켜 주는 또 다른 독. 희망이 있다면 하독한 자의 자비뿐이겠지.”
“자비?”
약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인(毒人)의 기본은 스스로 다루는 모든 독의 해약을 함께 상비하는 것이 원칙이네. 자칫 실수했다가는 스스로를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 옛날 천멸(天滅)이라 불렸던 무형지독을 다루는 자라면 틀림없이 해약을 지니고 있을 것이네. 해약이 없더라도 반드시 해독 방안을 알고 있겠지.”
“이런 씨발……!”
결국은 그 재수 없는 놈이 여전히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소리다.
마겸왕은 팔왕(八王)의 위(位)에 오른 후로 이렇게 스스로에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한낱 독(毒)에 의해 좌지우지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나저나 누구였나? 무형지독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혹 당가(唐家)의 고수였나? 아니면 독곡(毒谷)?”
마겸왕이 짜증스런 얼굴로 홱 하니 몸을 돌렸다.
“모른다 이 돌팔이 놈아. 이 일을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지?”
약왕의 핏 하고 웃었다.
“몸이 고장 난 게 아니라면 나 같은 골방 늙은이에게 어디 찾아올 놈이 있던가?”
“흥!”
마겸왕이 홱 하니 몸을 돌려 약왕당 밖으로 사라지자 독편살왕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 * *
신기제갈(神機諸葛).
중원지낭(中原智囊).
자고현량(刺股懸梁).
강호에서 제갈세가를 상징하는 단어들.
그들의 가언(家言)인 ‘때를 대비하라.’ 역시 유명하다.
이 제갈량의 후손들은 강호의 모든 위난과 함께했다.
그들의 뛰어난 지혜로 무림은 몇 번이나 구원받았으며 이에 제갈세가를 향한 강호의 존경은 지극했다.
그런 영향력이 현 무림맹에도 짙게 남아 있어 ‘신기제갈의 무림맹’이라 불릴 정도.
제갈명현(諸葛明賢).
그 유명한 만박자 제갈유운의 장남으로 현 제갈세가의 가주인 자.
그가 제갈세가를 상징하는 봉황기(鳳凰旗)를 조심스럽게 헝겊으로 닦고 있었다.
“가주님. 내원주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제갈명현이 조심스레 봉황기를 내려놓더니 고아한 몸짓으로 학창의를 여몄다.
“들라 하라.”
시비와 함께 가주전으로 들어선 제갈영은 내원(內院)의 주인이자 가주 제갈명현의 장남이기도 했다.
“아버님.”
제갈세가의 고절한 학풍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예법으로 정중하게 예를 올리는 제갈영.
장자의 훌륭한 몸가짐에 흡족할 법도 하건만 제갈명현은 담백한 표정으로 예를 받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제갈영이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운(雲)이의 소식입니다.”
“운이가?”
반가운 얼굴을 하다가 이내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는 제갈명현.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막내아들 제갈운은 감찰소교위에 임관하자마자 갑자기 맹의 명령을 무시하고 단독 행동을 통보해 왔다.
그 때문에 제갈세가로서는 난처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맹의 감찰원 감찰소교위는 그 위치에 비해 권력이 상당한 자리다.
자신의 작은아들이 감찰소교위에 배치되고 난 후, 각 문파들은 축하사절을 통해 엄청난 예물들을 보내왔다.
감찰소교위는 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들의 재산을 감시하는 자리. 괜히 밉보였다가는 문파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런 엄청난 직책을 거머쥔 놈이 뜬금없이 임무를 저버리고 단독 행동을 하겠다고 소식을 전해 오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이내 제갈명현이 서찰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늘 기복이 없는 표정 때문에 지암(智巖)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제갈명현이다.
한데 그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불안한 듯 거칠어지는 호흡.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
“이, 이게 무슨……!”
죄송하다며 빨리 복귀하겠다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맹에 감찰소교위의 사임을 통보했단다.
그것만으로도 열불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뜬금없이 금화 이만 냥을 융통해 달라니?
금화 이만 냥은 제갈세가의 한 해 수입과 맞먹는다.
자금의 용처를 살펴보니 조가대상회에 투자를 하겠다고 한다.
물론 조가대상회는 알고 있었다.
맹에서도 유의 깊게 주시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상회.
제갈과 남궁은 물과 기름이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그 빌어먹을 남궁 놈들에게 왜 투자를 하겠다는 건가?
“아버님. 소자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제갈영으로서도 아버지가 저토록 흥분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이었다.
서찰의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
제갈명현이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장자에게 내밀었다.
서찰을 내리 읽어 가는 제갈영의 반응도 제갈명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뛰어난 학식과 엄정한 품위로 명성 높은 제갈영의 입에서도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이런 미친놈!”
오히려 육두문자를 참은 것이 스스로 대견할 지경.
아니 무슨 감찰소교위가 저리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자리인가.
감찰소교위의 자리만 보장된다면 만금을 싸 들고 맹에 가고 싶은 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제갈영이 서찰을 구기며 벌떡 일어났다.
“이놈의 자식이! 당장 제가 안휘로 가서 운이를 끌고 오겠습니다 아버님!”
부들부들.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연신 몸을 떨고 있는 제갈영.
장자는 그 대(代)를 책임지는 자리. 동생의 일탈은 자신의 책임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앉거라.”
제갈명현은 어느덧 고요한 신색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학문과 진법, 기관토목지술 이외에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막내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장사치처럼 투자를 운운한다면 남궁세가에서 남다른 뭔가를 살폈다는 뜻이다.
총명하기로 이름 높은 소제갈이 맹의 감찰소교위까지 포기해 가며 하고 싶은 것이 그 남궁의 조가대상회에 있다는 소리.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 온 막내아들은 결코 허투루 일을 그르칠 아이가 아니었다.
“혹 예전에 소룡대연회를 마치고 돌아온 운이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잠시 머뭇거리던 제갈영이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의 빈객, 조휘라는 자 말입니까?”
“그래. 운이가 말했던 그 잠룡(潛龍) 말이지.”
안휘의 잠룡.
막내아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 온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자라고 말했다.
무공이면 무공, 학문이면 학문, 예술이면 예술.
거의 모든 분야에 대가(大家)의 경지를 이룩한 약관의 청년.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 나이 때는 뭐든 새롭고 설레는 법이지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지닌 자에게 매료당하는 감정 역시 처음일 것입니다. 과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명현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그자를 만나러 간다지 않았느냐. 냉정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이만한 사고를 칠 때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터.”
“음…….”
제갈명현이 섭선을 펼쳐 펄럭이며 두 눈을 지그시 반개했다.
“네가 그 조휘라는 자를 살펴보고 오너라.”
“예 아버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에게 일러둘 테니 금화도 가져가도록 해라.”
“아니 아버님?”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 제갈영.
자그마치 금화 이만 냥이다.
막내의 몇 마디 말에 동원될 수 있는 금액이 아닌 것이다.
“그 조휘라는 청년은 단 몇 년 만에 합비의 상계를 통째로 거머쥔 상인이라 들었다. 네가 직접 그자의 가치를 살피거라. 투자의 결정은 운이가 아니라 네게 일임하겠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제갈영이 공손히 물러나자 제갈명현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일과는 별개로 무림맹의 일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되면 감찰소교위 자리는 또 화산(華山)으로 갈 확률이 높다.
화산파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있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신호였다.
* * *
흑천련주 흑천대살이 벌떡 일어났다.
“그 악귀탈 놈이 또 왔다고?”
엎드려 부복하고 있던 전령귀살이 고개를 들며 눈을 빛냈다.
“틀림없습니다! 저번처럼 단독으로 흑왕당을 방문했습니다!”
“허…….”
그 기개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놈이다. 무슨 흑천련을 제집처럼 드나들다니!
“이번에도 흑문(黑門)의 위령귀살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련주님.”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전령귀살.
이번에도 그 악귀탈 놈은 련의 방비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느닷없이 흑왕당에 나타난 것이다.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놈이었다.
“데리고 와라.”
“존명!”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전령귀살이 악귀탈 사내를 데려왔다.
그는 물론 조휘였다.
“잘 지냈습니까.”
여전하다.
저 비꼬는 듯한 목소리.
흑천대살이 끈덕진 눈빛으로 조휘를 쳐다보았다.
“어이없는 놈이로군. 이런 식으로 본 좌를 계속 자극하다가는 그 목이 무사하지 못할 텐데?”
“동업자끼리 그 무슨 살벌한 언사십니까. 이제 곧 저희 상회의 물건들이 쏟아질 텐데 한몫 단단히 챙기셔야죠.”
“다음부터는 반드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본 련을 방문하도록. 정식으로 흑문의 위령귀살들에게 방문을 통보하고 객첩을 받아 본 좌를 찾아오라.”
조휘가 피식 웃었다.
“에이. 그건 안 되죠. 그러면 신분을 드러내야 하는데 전 이 악귀탈을 벗을 생각이 없습니다만.”
흑천대살이 기묘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본 좌가 그 하찮은 가면 하나 벗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늘 이곳을 방문할 때 황궁으로 소식을 전할 파발을 준비해 놓습니다. 두 시진 이내에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곧바로 황궁에 소식이 전해지죠.”
“…….”
감히 흑천련의 련주를 앞에 두고 일상적으로 협박을 일삼는 자.
흑천대살이 필사적으로 살의(殺意)를 참으며 관자놀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용건은.”
짓씹듯 내뱉은 음성.
조휘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십만 금 정도만 융통해 주시죠. 아시다시피 이리저리 땅을 많이 사서 돈이 좀 부족합니다. 이자는 알아서 챙겨 드리죠.”
흑천대살 곁에 시립해 있던 련의 간부들이 한 몸처럼 대노했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조휘가 그런 간부들의 반응을 깡그리 무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왜들 난리십니까. 어차피 곧 저희 상회의 물건으로 떼돈을 버실 텐데요. 물품의 대금을 미리 지급하는 거라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통 크게 선심을 베풀어 주신다면 이자 몫으로 물건을 확실히 더 챙겨 드리죠.”
마치 생색을 내는 듯한 조휘의 태도에 흑천대살은 결국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겨 버렸다.
흑천대살이 조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암흑천살.”
그의 부름에 짙은 어둠의 그림자를 온몸에 두른 외눈의 살수가 허공에서 음산하게 나타났다.
-충(忠).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귀곡성.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듯한 기묘한 목소리였다.
암흑천살(暗黑天殺).
련주의 그림자로만 알려진 자.
아무도 그의 진실된 실력을 몰랐다.
허나 팔왕(八王)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철권왕조차 그를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돌 만큼 그 진실된 위계는 련주 바로 아래였다.
“특살귀령대(特殺鬼靈隊)를 이끌고 모든 포구를 장악하라. 북(北)으로 향하는 모든 파발을 막아라.”
-존명(尊命).
조휘의 표정이 일변한다.
흑천대살이 결의를 다졌다.
그의 의도는 명확하다.
“지금 날 죽이려는 겁니까?”
흑천대살이 침묵으로 쇄검을 들어 올리자.
조휘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는다.
“이거 참.”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쿠쿠쿠쿠쿠쿠.
거칠게 진동하는 대전.
“부술 수 있는 자가 빼앗을 수도 있다는 건 왜 생각 못 하지?”
천검류(天劒流).
천하절대검령(天下絶大劒靈).
또다시 검총의 위대한 검공이 현신한다.
크게 눈을 뜨는 흑천대살.
그는 이제야 비로소 확신했다.
흉수는 남궁(南宮)이 아니라 눈앞의 이 악귀탈이었음을.
조휘는 짜증이 났다.
객잔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자꾸만 무력을 드러낼 상황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분명 파발로 협박하면 먹혀들 거라고 생각했건만.
불문곡직 포구를 막으라고 지시하며 자신에게 살의를 드러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냥 좀 입 터는 대로 들어주면 안 되나?
흑천대살은 그런 악귀탈 사내(?)를 경악의 얼굴로 쳐다보며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다.
칠무좌의 남궁수조차 몸을 가누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는데 흑천대살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이 무슨!’
도대체 이걸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의념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
이게 무공이라고?
이런 수법은 서역 배교의 사술(邪術)이나 천마성의 섭혼술(攝魂術)밖에 없다.
이 두 수법은 정신에 최면이나 착란을 일으키는 사술.
허나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고 마음이 날뛰지도 않았다. 사술이 아니라는 뜻.
그렇다고 내가진기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근력을 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動) 그 순간 귀신같이 어떤 힘이 작용해 모든 것이 상쇄된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유일하게 의념(意念)을 곧추세울 때만이 그 힘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 말인즉 이 대전에서 ‘의념의 무혼’을 지닌 절대경의 자신만이 서 있기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이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 때문에 누워 있는지도 모른다는 소리.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가 지금 수하들의 반응이다.
“하독(下毒)이다!”
“극독……!”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일단 독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다! 이건 독이……!”
그렇게 흑천대살이 부하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독이 아니라고 고함치려는 그때.
쐐애애애액!
번개처럼 날아든 해약(?)이 그의 벌어진 입 속으로 그대로 파고들었다.
“……커헉!”
꿀꺽.
목이 찢기는 듯한 통증과 함께 얼떨결에 삼켜 버린 흑천대살.
그는 목을 움켜잡은 채 연신 비틀거리며 황망한 얼굴로 악귀탈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해약이다. 부하들에게도 해약을 먹이고 싶다면 순순히 내 말에 따라야 할 거야.”
흑천대살이 기함하며 소리쳤다.
“도, 동요하지 마라! 독이 아니다! 이건 독이 아니란 말이다!”
쓰러져 있는 수하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련주(聯主)는 만 명의 부하들이 독에 당할지언정 적을 향해 사즉필생을 명령할 사내다.
평소 그의 잔악한 위명에 몸을 떨지 않는 부하들이 없었다.
혼자 해약을 독차지했으니 이제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을 터.
수하들이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흑천대살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것들이!’
조휘는 이런 대전의 분위기에 흡족한 듯 내심 조소를 머금었다.
만약 이곳이 남궁세가였다면 가주의 한마디 외침에 모든 무인들의 눈빛에 결기가 어렸을 터.
이것이 사파(邪派)의 한계다.
이익으로 뭉친 자들, 강력한 힘의 위계로만 휘하를 통제하는 조직 흑천련.
이런 집단의 가장 취약한 고리는 ‘신의’다.
이들에게 믿음(信)이란, 전통과 존경, 정(情)과 의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돈(金)에서 나온다.
그런 ‘이익’이 무너졌을 때 이들은 가장 취약해진다.
“아직도 내가 흑천련의 창고를 털지 못할 것이라 보나? 당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데?”
하나같이 몸을 부르르 떠는 대전의 흑천련 간부들.
대전에 있는 흑천련 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천살 대흑랑(大黑狼) 염천귀.
천살 탈명수라(奪命修羅) 파진사.
천살 사사살혼(邪邪殺魂) 악무린.
천살 혈우독비(血雨毒匕) 추룡.
천살들 중에서 가장 강한 무공을 지녔다는 사천살(四天殺)을 필두로, 각 무력대를 이끄는 살대주들, 원로원의 육지노와 독심파파, 부련주 팔황검노, 총사 서유, 심지어 방금 전 인상 깊게 등장했던 암흑천살까지!
팔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흑천련 총단의 고수들이 지금 이 자리에 중독당해 있었다. 저 무서운 련주조차도 저토록 동요하고 당혹해하는 마당.
련의 최고수들도 이렇게 무력한데 한낱 창고 앞의 문지기들이라면 저자에게는 식후 소일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악귀탈 사내의 해약.
그는 현재 여기에 있는 모든 고수들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다.
그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며 협박하는데 무슨 묘수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흑천련의 간부들 모두가 독기 섞인 진득한 눈으로 련주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이판사판이 될 수밖에 없다.
수하들의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 흑천련주는 싸늘하게 마음이 식어 갔다.
‘간악한 놈!’
아무리 살펴봐도 놈의 기도와 의념 속에는 진중하고 묵직한 그리고 고아한 정기가 녹아 있었다.
정도무공 특유의 정갈한 기운.
한데 놈의 계략이나 심계는 마치 천마성의 주교 이상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절대의 경지로 미뤄 보아 틀림없는 칠무좌(七武座)급의 정파 고수.
남궁세가에 창천검협 남궁수 이외에 또 다른 절대의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부하들을 모두 죽이겠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뭐. 이만 간다.”
홱 하니 몸을 돌려 대전의 바깥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조휘.
독이 아니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그랬다간 부하들의 신임이 또다시 나락으로 처박힐 터.
“멈춰라!”
“응? 왜?”
흑천대살이 이 악물고 소리쳤다.
“금화 십만 금은 너무 많다.”
조휘가 그 무슨 개소리냐는 듯 얼굴을 구기며 품속에서 예의 장부를 꺼냈다.
“뭔 소리야? 네놈들이 포양호 상권에서 뜯어내는 자릿세만 해도 일 년에 삼만 금인데? 거기에 각 상단과 표국의 뒤를 봐주며 챙기는 상납급만 오만 금, 매번 춘궁기에 작물을 되팔아 버는 시세 차익만 십삼만 금, 어시장 중계 수입 십만 금, 포양호의 뱃길을 장악하고 거둬들이는 통행세 칠만 금, 게다가 직접 운영하는 기루, 매음굴, 도박장 등에서…… 와! 사십만 금? 이거 순 개새끼들이네?”
막상 나열하고 보니 조가대상회의 일 년 수입보다 더 많았던 것.
문제는 수입 대부분이 착취의 성향을 띠고 있어 그 악랄함에 조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보상이 파악하고 있는 대략적인 수입만 팔십만 금이다 이 새끼야. 뭐? 십만 금이 없어? 진짜로?”
마치 ‘뒤져서 나오면 백 원에 한 대’라도 시전할 기세.
갑작스런 반말과 막말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흑천대살은 오히려 냉정하게 소리쳤다.
“그걸 다 네놈이 부수고 불태웠지 않느냐! 다 사라졌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
“그런데 이 새끼가?”
조휘가 눈을 부라리며 장부의 다음 장을 펼쳤다.
촥! 촥!
“대륙전장에 삼십만 금, 금와전장에 삼십만 금, 명일전장에 삼십만 금? 뭔 삼삼삼 분산 투자 전략이냐? 아주 공평하게도 맡겨 놨네?”
“아니 그건……!”
“흑천련의 재산이 창고에만 있냐? 누굴 바보로 아나. 잘도 고이 모셔 놨구만 뭘. 더 이야기해 줘? 황숙(皇叔) 주경……!”
“안 돼!”
흑천대살이 조휘의 입에서 황숙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기함하며 조휘 주변의 음파를 차단했다.
이 대전에 있는 자들이 아무리 수뇌부들이라 해도 결코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다.
허나 상대도 의념의 무혼을 발휘할 수 있는 절대경.
조휘가 흑천대살이 펼친 기막(氣幕)을 같은 의념으로 찢으려 하자.
“주, 주겠다! 그 십만 금!”
한데, 악귀탈의 사내에게서 반응이 없었다.
흑천대살이 혹시 하는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새끼가 설마……!’
조휘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에이 그건 최초의 협상 조건이지. 해약에 황숙…… 아, 안 할게. 아무튼 사람은 원래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구.”
조휘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삼십만 금.”
흑천대살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삼십만 금이라면 흑천련의 일 년 총 수입의 절반.
그렇지 않아도 창고가 모두 날아간 터라 출혈이 엄청난데 금화 삼십만 금까지 추가로 뜯긴다고 생각하니 흑천대살은 울화가 치밀다 못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하……!”
일찍이 강호에 저런 미친놈이 있었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뚝 하고 떨어졌단 말인가.
저런 놈이 남궁세가?
어림도 없다.
예(禮)와 명예를 향한 정도명가의 집착은 토가 나올 정도다.
저런 미친놈이 정파라면 흑천련은 천마신교다.
장사치?
대체 어떤 상인이 흑천련 영역을 제 맘대로 활보하고 수뇌부들을 일거에 제압하나?
저런 놈이 상인이라면 무림맹이 아니라 상회맹(商會盟)이 세워졌겠지.
‘……일단 황숙 운운하는 저 빌어먹을 입부터 막는 게 급선무다.’
흑천대살이 참혹한 심정으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수락하겠다.”
거금 삼십만 금을 뜯길 수밖에 없는 현실.
“……그 빌어먹을 해약도 내놓아라.”
뻔히 하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하들의 동요를 더 이상 좌시할 수는 없는 터.
조휘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이쿠! 거금 삼십만 금을 주시는데 당연히 드려야죠.”
파파파팟!
엎드려 쓰러져 있는 수뇌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들의 앞에 떨어져 있는 해약(?)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다가가는 간부들.
조휘가 음습하게 웃으며 헐겁게 의념을 조종해 주었다.
결국 저마다 해약을 복용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간부들.
조휘는 마지막 경고도 잊지 않았다.
“보름짜리 해약입니다. 알아서들 처신하시죠.”
어느새 존댓말로 돌아온 조휘였지만 오히려 반말할 때보다 기분이 더 좋지 않은 간부들.
해약으로 명줄을 저당잡는 것은 전통적인 사마외도의 수법이다.
이제 흑천련은 통째로 저 악귀탈 놈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흑천대살이 무표정한 얼굴로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흑표(黑彪).
짙은 흑색의 표범 장식.
흑천련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다.
“총사.”
총사 서유가 허리를 숙였다.
“하교하십시오.”
“삼십만 냥의 출금을 허(許)한다.”
“존명.”
그 말을 끝으로 흑천대살이 죽일 것처럼 조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조휘로서는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삼십만 냥어치의 조가대상회 물건은?”
“아아, 당연히 드려야지.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흑천대살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일단 금화 오만 금은 조가철방의 병장기로 받겠다.”
“그건 곤란한데.”
금화 오만 금어치의 병장기라면 안휘 장군부의 일 년 납품량과 맞먹는다.
그런 어마어마한 양의 병장기라면 흑천련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
게다가 조가철방의 장인들을 대거 포양호로 빼 온 상황이라 그럴 여력도 없었다.
“대신 조가성심당의 삼 년 운영권을 넘겨 드리지. 먹는 장사가 얼마나 엄청난 건지 몸소 체험해 보시죠.”
“……운영권?”
조휘가 혀를 끌끌 찼다.
“또 잔머리 굴리신다? 그냥 주면 넙죽 받는 거요. 당신이 통 큰 결정을 내려 준 만큼 내 쪽도 꽤 성의를 보인 거라고.”
흑천대살이 결국 꼭지가 돌아 버렸다.
“반말을 할 거면 반말로 쭉 하든가 이 새끼야!”
조휘가 총사 서유의 옷깃을 당기며 길을 재촉했다.
“싫은데?”
이렇게 조가대상회는 삼십만 금의 현금을 얻었다.
흑천련의 몰락.
오늘이 그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 * *
그동안 여러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고 포양호의 상인들이 꽤 보수적이라 이런저런 충돌도 있었지만 흑천련의 방문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삼십만 금이라는 거금을 확보한 후 일단 조휘는 철광석을 운반할 배부터 구입했다.
서주자사가 관리하고 있는 철광산은 안휘의 곽구현에 있었고 합비까지는 육로로 수송이 가능했지만 포양호의 남창까지는 무조건 수상 운반이 유리했던 것.
허나 배의 확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뛰어난 뱃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해약(?)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었던 조휘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철권왕의 묵룡선단, 그 휘하의 수하들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
조휘는 철권왕의 수하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 것이다.
안정적인 철로가 확보되자 드디어 포양호의 남창에도 거대한 주괴공방(鑄塊工房)이 신설되었다.
그 대단한 규모에 놀라 강서성주가 식겁하며 군사까지 대동해 찾아왔지만 조휘가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 관(官)의 어깃장을 말끔히 해결해 버렸다.
포양호 사람들은 마치 귀신을 본 것마냥 창백한 강서성주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새삼 조가대상회의 위력을 실감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부렸기에 흑천련에 이어 강서성주마저 저렇게 쉽게 구워삶을 수 있단 말인가.
염철(鹽鐵, 소금과 철)을 나라에서 관리하던 과거의 잔상이 아직 짙게 남아 있었다.
모든 반란은 쌀(米)과 철(鐵)로부터 시작하기에, 특히나 강철의 생산은 관에서 매우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강철을 생산하는 주괴공방은 대부분 나라에서 독점하고 있는 터.
장인의 땅이라는 사천성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일개 상단이 대규모로 주괴공방을 운영하는 것은 중원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물론 합비의 안휘철방도 주괴공방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엄연히 안휘철방의 담벼락 안이었다. 관리들도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대규모의 주괴공방을 짓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그러니 성주가 몸소 행차할 수밖에.
한데 조휘는 자칫하다간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이 엄청난 행위를, 으슥한 골목으로 성주를 끌고 가 말 몇 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해결해 버렸으니, 포양호 사람들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조가대상회가 매입한 땅에 일사천리로 각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원래 자리 잡고 있던 거의 모든 전각들이 허물어졌다. 기존의 전각을 활용한다고 해도 외벽이 뜯기거나 지붕을 개조하는 등 완전히 다른 전각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조가대상회의 명성은 이미 포양호에도 자자했다.
조가객잔은 달달함과 담백한 맛이 일품인 냉차(冷茶)와 독특한 해물 육수의 소면이 유명했고.
그 청량감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쾌감으로 쭈뼛 선다는 조가성심당의 흑청수와 도저히 이 세상의 맛이 아닌 것 같은 육겹면포.
그윽한 주향이 백 리를 간다는 청량하고 차가운 조가양조장의 한빙주 역시 그 명성이 대단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조가철방의 운차(雲車).
돌부리에라도 걸릴 때면 엉덩이가 깨질 것 같은 일반 마차와는 달리,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노릇인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마차는 관도가 아니라면 탈 것이 못 됐다. 그냥 차(車)를 떼어 내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할 정도.
철방은커녕 이제 막 주괴공방을 세운 마당에 벌써부터 수많은 관인들과 상단의 행수, 무관의 관주 등 비교적 여유 있는 자들이라면 대부분 운차의 구매를 문의해 왔다.
그렇게, 이 포양호 일대도 서서히 합비화되고 있었다.
떼돈을 버는 일만 남았으니 매일매일 즐겁게 웃고 있던 조휘.
불길한 소식이 날아든 것은 그맘때쯤이었다.
* * *
“은봉령주가 나타났다고요?”
조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찾으려고 난리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모든 일이 정리된 이 마당에 뜬금없이 이곳 조가대상회의 분타에 나타난 것이다.
무림맹 비밀 첩보 조직 은봉령.
무엇보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기찰(譏察, 감시하거나 체포하는 일)의 권한도 있었기에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드는 조휘였다.
이 총관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조휘의 의중을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무시할까요?”
조휘가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들여보내세요.”
조휘의 뻔뻔한 태도에 곁에 있던 제갈운이 혀를 내둘렀다.
흑천련의 영역에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고 이익을 나누고서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은봉령을 맞이한다고?
아직 조휘는 은봉령의 무서움을 모른다. 무림맹 내에서 은봉령의 위상은 감찰원 이상이다.
“알겠습니다.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이 총관이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칙칙한 암적색 적포를 몸에 두른 채 입을 제외한 얼굴의 대부분을 복면으로 가린 사내도 함께.
곧 그가 품에서 은봉령을 상징하는 은봉잠(銀奉簪)을 꺼내 가슴에 달았다.
밀행의 임무를 벗어던지고 은봉령주로서의 권위를 드러낸 것이다.
제갈운이 가장 먼저 예를 표했다.
“맹의 감찰소교…… 아니, 제갈세가의 제갈 모가 인사드립니다.”
이미 사임을 통보한 마당에 무슨 감찰소교위란 말인가.
제갈운은 그 씁쓸함에 왠지 더 입맛이 썼다.
“은봉령주요.”
조휘는 그런 은봉령주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위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의념으로 살펴본 결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 완벽한 무공의 백치이거나 자신과 같은 절대경이란 뜻이다.
기이한 긴장감이 조휘의 가슴 어름에서 번지고 있었다.
“당신이 조가대상회를 대표하는 자, 조휘요?”
다소 오만하게 느껴지는 은봉령주 말투에 조휘는 살짝 언짢았다.
“그렇습니다만.”
곧 은봉령주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온다.
“맹의 은봉령주로서 기찰의 임무를 시행하겠소. 조가대상회를 대표하는 자 조휘는 맹의 오라를 받으라!”
쐐애애액!
파파파팟!
기다란 밧줄이 자신에게 쇄도해 오자 전광석화처럼 밧줄을 낚아채며 특유의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휘.
곧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했다.
점점 붉게 물들고 있는 손.
상대의 밧줄은 보통 밧줄이 아니었다.
연철과 천잠사로 꼬아 만든 은봉강책(銀奉綱策)을 맨손으로?
은봉령주의 입가에 잠시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금세 본래의 신색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무슨 사파 새끼들인가?”
비틀린 입매로 은봉령주를 응시하는 조휘.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죠?”
은봉령주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흑천련의 간부들이 조가대상회의 지부인 조가성심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오. 이는 명백히 맹의 원칙인 ‘정사불교’를 어긴바, 반드시 협조하는 게 좋을 게요.”
“정사불교?”
정과 사는 함께 교우하지 않는다(正邪不交), 즉 서로 깊게 사귀지 말라는 소리다.
곧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는 조휘.
“아니 일개 상단에게 왜 맹의 잣대를 들이미는 겁니까?”
은봉령주의 입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 냈다.
“재밌구려. 남궁세가의 봉공(奉公)이 정파인임을 부정하는 것이오?”
“…….”
하.
조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와 어이가 없네? 몇 달 전만 해도 위기에 빠진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별의별 짓을 다 하고 다녔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뒤통수를 쳐?”
조휘 일행이 은봉령을 추적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 은봉령주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갈운이 남긴 맹의 표식을 보고도 무시하고 지나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당신이 그들에게 삼 년 동안의 전매권을 줬다는 사실도 알고 왔소.”
보다 못한 제갈운이 나섰다.
“령주께서는 아직 우리 회장님의 진의를 모르세요. 그것은 저희가 흑천련에게 내민 독(毒)입니다. 저희들의 진정한 목표는……!”
은봉령주가 제갈운의 말을 잘랐다.
“당신들의 의중이 무엇인지 난 관심 없소. 단지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들이 그들과 이익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지.”
남궁장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궁세가의 남궁장호요. 맹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여러 오해가 있는 듯하오.”
“오해?”
“조가대상회는 흑천련의 모든 창고를 부숴 엄청난 타격을 주었소. 거기에 금화 삼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그들에게 갈취하다시피 조달해 왔소. 이것이 맹의 입장에서 해가 될 일이오? 오히려 이득이지 않소?”
은봉령주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남궁세가의 명예로운 소검주께서 금화니 이득이니 운운하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장사치가 다 되었군.”
그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한 남궁장호가 별안간 강렬한 안광을 빛냈다.
“당신이 아무리 맹령을 대리하는 자라고 하나, 본 세가의 명예를 계속 손가락질한다면 내 결코 참지 않을 것이다.”
“흥! 남궁세가가 맹령을 무시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인가!”
꾸르르릉!
은봉령주의 내공 섞인 강력한 일갈에 남궁장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신보다 윗줄에 이른 무인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조휘가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은봉령주님?”
“말하시오.”
조휘가 눈짓으로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
“장사치에게 정사(正邪)의 잣대를 들이미는 괴상한 짓거리 그만하시고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세요. 저는 맹의 일원도 아니고 앞으로 일원이 될 생각도 없습니다.”
은봉령주가 가면을 고쳐 쓰다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내게는 당신의 그 말이 남궁(南宮)이 오대세가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들리는군.”
조휘는 짜증이 났다.
“조가대상회는 엄연히 독립된 하나의 상회라고요. 뭔 말만 하면 남궁 남궁 지겹지도 않습니까?”
“아직 철부지로군. 맹령을 거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겠나?”
정파 세력을 자처하는 이상 무림맹의 맹령은 절대적이다.
자칫하다가는 남궁세가와 조가대상회가 이 강호에서 지워질 수도 있었다.
“맹령을 거부하는 그 순간 그대와 남궁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적이 된다. 그들과의 모든 교류와 지원이 끊길 것이고 명예는 바닥으로 추락하겠지. 만약 맹주께서 결심하신다면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을 수도 있을 터.”
그 무서운 말에 조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 한 번 안 들었다고 멸문? 사람을 죽인다고?”
막강한 기세가 조휘의 전신에서 피어오르자 은봉령주가 기함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어디 한번 해 봐. 조가대상회의 모든 금력(金力)을 쏟아부어 대적해 주지. 나는 강호 방파가 아니라 철저히 상단의 입장만 취할 거야. 적어도 두 개의 장군부(將軍部)가 나와 함께할 거라고 내 확언(確言)하지. 잘하면 황실도 움직일지 몰라. 안 믿기지?”
“…….”
“안휘성의 관(官), 군(軍)이 조가대상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잘 알아봐. 그리고 이미 강서성에서의 입지도 꽤 다졌다고. 아니 이미 알고 있나? 그 잘난 은봉령의 정보력이라면 나에 대해 꽤 많이 파악했을 거 아니야?”
남궁장호와 제갈운이 입을 쩍 하고 벌리고 있었다.
그 대단한 은봉령주에게 저런 협박을 일삼다니!
한편 은봉령주는 조휘의 겁박보다도 그 무공에 더욱 긴장했다.
‘이건!’
분명 느껴지는 것은 의념이다.
이 의념은 절대의 무혼(武魂)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혹시?’
흑천련을 방문했던 그 악귀탈 사내가 설마 조가대상회의 회장이라는 조휘, 본인이란 말인가?
그 순간 조휘의 검천전능지체, 그 감각권 내에 기이한 파장이 감지되었다.
“……어?”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느꼈던 고유의 파장이다.
어느덧 조휘의 두 눈이 눈부신 백안으로 물든다.
서서히 주변의 모든 물리학적 정보가 입체감 있게 그의 두 눈 속에 담기기 시작한다.
끈덕지게 은봉령주를 응시하는 조휘.
조휘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와…… 대박이네?”
틀림없다.
저 특이한 내공의 파동, 이 물리학적 벡터값은 분명 조휘가 경험한 것이었다.
“그게 당신이었어?”
당황한 듯 흘러나오는 은봉령주의 목소리.
“갑자기 무슨……?”
조휘가 천천히 백안을 풀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와, 무림맹 대단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들통나면 어떡하려고? 아주 그냥 수하를 지옥으로 보내 버렸어. 하하! 맹주가 원망스럽지도 않으세요? 암흑천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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