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24
24 章>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우우으…….”
무림맹은 흑천련에 세작을 심기 위해 십 년 이상을 준비해 왔다.
철저하게 가장된 인연과 목숨을 담보한 모험 끝에 간신히 ‘암흑천살’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탄생시켰고, 마침내 흑천대살의 마음을 얻고 그를 속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야말로 강호 최대의 비밀.
암흑천살이 은봉령주라는 것이 외부에 알려졌다가는 은봉령주 개인의 위기를 떠나 맹의 명성과 위신이 땅에 떨어짐은 물론이요, 은봉령이라는 조직 자체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은봉령주는 도저히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이 내공법은 옛 상고시대의 무공이다.
선주일계(선계를 높여 부르는 말)와 대척점에 서 있는 마도천(魔道天)의 여덟 마도가, 그중에서도 적마선가(赤魔仙家)의 비공.
당대의 강호에서 이 무공을 알아보는 자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대체 눈앞의 조휘라는 자가 누구길래 이 무공을 알아본단 말인가.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적마선가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다.
자신이 이 고대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이유는 마기가 거의 외부에서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타락한 마선(魔仙)들의 무공이라 해도, 애초에 본질은 선도(仙道)의 공부.
정심한 정파무공을 익힌 자라고 해도, 그 혼탁해진 선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완성도도 꽤 높네? 이거 중원무림의 내공심법이 맞아?”
은봉령주가 내뿜고 있는 기파.
그 물리학적 도식들의 완성도는 참으로 놀라웠다.
조휘가 지금까지 겪어 온 그 어떤 무공보다도 수학적 완성도가 높았던 것.
허나 조휘는 상대의 무공 따위는 아무래도 관심이 없었다.
“가만? 암흑천살인 당신이 은봉령주라면 사·녹연합의 계획을 무림맹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갑자기 열이 확 올라오네?”
그런 조휘의 말에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제갈운이 입을 열었다.
“암흑천살이 누구죠?”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는 조휘.
“거 그런 거 있잖아요. 무림맹주가 비밀리에 키운 최고의 고수 같은 거. 가장 믿는 수하. 저놈이 흑천련에서 그런 놈입니다.”
무림맹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
소문만 무성한 ‘비천(秘天)’이라는 존재.
한데 저자가, 저 은봉령주가 흑천련의 비천이라고?
분노로 한껏 데워진 제갈운의 강렬한 눈빛이 은봉령주에게 향했다.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은봉령주?”
“…….”
침묵은 때론 긍정.
제갈운은 조휘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맹이 흑천련의 일거수일투족, 그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날 남궁세가로 보냈다고?’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정파무림은 방대하다.
때문에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맹이 사마외도의 삼패천(三覇天)과 같이 욕망의 화신처럼 구는 집단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무림맹도 때로는 이(利)를 앞세우기도 한다.
하나 맹은 될 수 있는 한 모든 행사에 명분과 정도를 지키려 노력했다.
견고한 논리와 차가운 이성.
협의(俠義)를 벗어나지 않는 명분.
이와 같은 중심이 무너진다면 그 개성 강한 수많은 문파들이 화합하고 단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림맹이 흑천련의 합비 침공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오히려 ‘조가대상회’를 맹의 품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이런 위기를 활용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맹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이 남달랐던 제갈운으로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 원죄는 틀림없이 제갈세가에 있을 터.
맹의 중추적인 전략전술은 모두 총군사 제갈찬휘(諸葛燦輝)와 그 휘하의 군사부(軍師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숙부님……!’
이 모든 것이 정말 숙부님의 뜻이란 말인가?
제갈운은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남궁장호의 분노 섞인 외침이 또다시 울려 퍼졌다.
“정도의 화신이라는 맹(盟)이! 감히 난(亂)을 이용해서 본 세가를 핍박하려 들었다는 건가!”
꾸르르릉!
분노가 얼마나 지극한지 지금까지 남궁장호에게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기세가 폭사되고 있었다.
저 엄청난 제왕기(帝王氣)는, 가주와 그 후계들만 익히고 있는 창천대연신공 특유의 강렬한 기세.
조휘마저 깜짝 놀라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시만…… 잠시만요.”
조휘가 기묘하게 일그러뜨린 얼굴로 은봉령주를 응시한다.
“가만 보니 이제 당신 좆 된 거 같은데? 당신이…… 아니 맹이 한 짓은 첩보 활동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이건 정도가 지나쳤잖아? ‘암흑천살’이라는 위장명이 들통이 난다면 안 그래도 그놈들 지금 나 때문에 한창 열이 받아 있을 텐데 아마 전쟁까지 불사하지 않을까?”
“…….”
“와 씨. 입장을 바꿔 생각하니 정말 개소름이 돋는구만. 남궁 형이나 제갈 과장이 맹의 은봉령주라 생각하니 나라도 당장 맹주의 모가지를 따고 싶다고.”
그때였다.
스스스스스스.
어둡고도 칙칙한 기운이 사위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은봉령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소름 돋는 마기(魔氣).
그 엄청난 살기의 농밀함에 조휘마저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의념!’
조휘가 한껏 긴장하며 조가철검을 치켜들었다.
강력한 의념이 느껴지는 마기.
틀림없는 절대의 무혼(武魂)이다.
문제는 검신 어른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그 누구보다도 진한 강자의 기세가 느껴진다는 것.
분명 눈앞의 이 사내는, 칠무좌의 ‘창천검협’보다도, 흑천련의 절대자 ‘흑천대살’보다도 강하다.
놀라웠다.
은봉령주(銀奉令主).
이 베일에 싸인 인물은 강호에 그 성명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강호의 절대자들을 능가하는 무공을 지녔다는 것은 조휘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조휘는 이 강렬한 마기의 파장에 담긴 힘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흑천련 대전에서 만났던 암흑천살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천하절대검령을 시전했을 때 그 역시 누워 있었던 터.
그의 모든 것이 위장(僞裝)이자 기만(欺瞞)이었던 것이다.
“모두 회의실 밖으로 나가요!”
어느덧 다시 새하얗게 변한 조휘의 백안!
은봉령주가 내뿜는 살의는 극도로 지독했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하더라도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모두 죽이려는 필살의 의지.
금세 조휘의 철검과 은봉령주의 쇄검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가각! 카카캉!
퍼퍼펑!
단지 몇 번 부딪힌 것뿐임에도 그 충격파와 압력에 의해 회의실의 지붕이 날아가 버렸다.
몇 번 더 새파란 불꽃이 사방으로 번질 때쯤 조휘의 철검에서 강력한 검강(劒罡) 줄기가 솟구쳤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백색의 검강 줄기.
은봉령주도 묵묵히 쇄검에 자신의 무혼을 생성했다.
소름 돋는 핏빛 강기(罡氣).
남궁장호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쳐 완성할 전설의 경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조휘는 곧 무심한 눈으로 예의 삼검(三劒)을 출수했다.
저 느릿한 삼검의 엄청난 위력은 지켜보는 남궁장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 줄기 백색 검강에 담긴 뛰어난 묘용을 곧바로 알아차린 은봉령주가 천주(天主)에 몸을 우뚝 세웠다.
츠캉! 깡!
검과 쇄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또다시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충격파의 범위 안에 있던 제갈운과 남궁장호의 피부가 쩍쩍 갈라질 정도.
남궁장호가 칠공(七孔)에 흐르는 핏물을 느끼며 악에 받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 우린 방해물이다! 우리 때문에 조 봉공이 천검류를 발휘할 수가 없어!”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운이 남궁장호와 함께 경공을 시전해서 장내를 빠져나가려고 하자.
츠츠츠츠츠츠.
거대한 악(惡)의 파장이 물살처럼 은봉령주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끈적한 어둠의 물결이 그대로 짓쳐 회의실 전체를 휘감는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그 엄청난 위용에 남궁장호는 발을 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 저게 뭐죠?”
이런 것이 무공?
황당하기는 제갈운도 마찬가지.
백안으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조휘도 내심 기겁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 온 그 모든 무공들은 반드시 어떤 물리학적인 오류가 존재했다.
하지만 저 어둠의 마기에 담긴 초절한 물리학적 도식들.
뇌리 속을 파고드는 그 모든 정보들이 완전무결(完全無缺)이었다.
검총의 무공 외에 이런 완벽(完璧)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쿠쿠쿠쿠쿠쿠!
순간, 조휘의 백안 속에 어려 있던 눈부신 백색 광휘가 그의 몸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검총오의(劒塚悟意) 천검류(天劒流).
제팔식(第八式).
천하공공도(天下空空道).
과거 검신 어른이 펼쳤던 자연경의 검초 ‘천하공공허무검’의 열화판 초식으로서 현재 조휘가 발휘할 수 있는 천검류 최강의 검초였다.
츠츠츠츠츠.
은봉령주가 눈을 크게 떴다.
상대가 철검을 곧추세우자마자 새하얀 파동이 짓쳐 옴과 동시에 공간이 한 움큼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공간이 사라진다?
그것도 자신이 서 있는 이곳?
푸콱!
은봉령주가 멍하니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지와 엄지의 둘째 마디 부근부터 아예 손가락이 사라지고 없었다.
급속도로 한 점으로 모이는 공간압착(空間壓搾).
그 소름 돋는 느낌에 전광석화처럼 몸을 내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은봉령주가 묵묵히 지혈을 하며 조휘를 응시한다.
“검신(劒神)?”
그가 그렇게 물으면서도 핏빛 안광을 서서히 갈무리하고 있었다.
절대경의 고수가 안광을 갈무리하는 의미는 단 하나, 전투 의지를 거둔다는 뜻.
이에 조휘가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아본다고?’
검총지검(劒塚之劒), 즉 검신 어른의 검공은 기백 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무공이다.
더욱이 검신 어른의 무공 자체가 당시의 강호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비.
한데, 은봉령주는 단 일 초의 검초만을 대하고도 검신 어른의 무공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때, 머릿속에서 검신 어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몸을 잠시 쓰겠다.
‘예? 제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나와 할 말이 있는가 보구나.
하긴 상대는 자신의 무공이 검신의 무공이라는 것을 알아보자마자 전투 의지를 거두었다.
화아아악!
어느덧 조휘의 몸에 빙의한 검신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은봉령주를 응시했다.
“그래, 적마일가(赤魔一家)로구나.”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떠는 은봉령주.
그는 암흑천살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보다 더 동요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검신의 은은한 미소.
“적마선가의 적룡일원공(赤龍一元功)의 기운을 그렇게 줄기줄기 뿜어내면서 어찌 몰라보길 기대하느냐.”
“…….”
검신이 손에 들고 있는 조가철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흡족한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좋은 검이로군.”
드르르륵.
곧 그가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더니 눈짓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너도 앉거라. 그 가면도 벗는 게 좋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은봉령주는 갑자시 상대방이 자신을 아이 다루듯 하는 데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한 인간의 기질이 이토록 일순간에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은봉령주가 묵묵히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생김새였다.
드르륵.
결국 기이한 본능에 의해 검신의 맞은편에 앉아 버린 은봉령주.
그때 통째로 날아갔던 회의실의 지붕이 서서히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고 있었다.
회의실 안에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우자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천천히 회의실을 덮어 가는 거대한 지붕.
그 엄청난 광경에 모두가 당혹해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슬며시 웃고 있는 자는 조휘.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의 신위(神位)라는 것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쿠쿵!
“볕이 따가웠는데 이제야 살 만하군. 그래 이제 말해 보게.”
은봉령주가 의혹의 눈초리를 빛냈다.
“……무슨?”
검신이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럼 내가 먼저 묻지.”
검신의 두 눈에 칠채서기의 자연광이 일렁인다.
“그대들은 아직도 천중좌(天中座), 신좌(神座)를 모시고 있는가?”
신좌(神座)!
그 단어가 검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순간, 갑자기 은봉령주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의자를 내팽개치며 바닥에 부복했다.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는 것이, 그 눈빛 또한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극도로 경원(敬遠)하는 태가 역력하다.
검신과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조휘는 은봉령주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두렵길래 단지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몸을 엎드릴 수 있단 말인가?
검신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겠군.”
신좌(神座).
무림 역사에 신의 휘호로 추앙받던 삼신(三神)의 위대함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그 이름.
그에게 있어서 강호무림이란 혼세일계(混世日界, 인간계를 높이 칭하는 말)의 일부분일 뿐.
인간 중에서 신좌의 의중을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시하는 자, 혹은 유람하는 자, 유희하는 자, 결정하는 자, 이끄는 자, 파괴하는 자.
신좌를 형용하는 문장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그 실체가 한없이 모호했다.
검신으로서도 그 희미한 흔적을 간접적으로만 접해 봤을 뿐, 신좌와 그 추종자들의 진정한 실체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확실한 것은 타락한 선인 무리인 마도천이 신좌를 추종하는 세력이라는 것.
“어떻게 검신의 후인(後人)이?”
고개를 치켜들어 검신을 바라보는 은봉령주.
그의 두 눈에는 온갖 혼란스러운 의문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검신.
감히 홀로 존귀하고 오롯하신 신좌를 대적한 유일무이한 인간.
마도천의 역사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처참하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역사서에서 본 검신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선도(仙道)의 공부를 몸에 담지 않은 인간이 자연경을 이룩한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그 엄청난 무위로 마도천 전력의 절반을 홀로 분쇄한 자.
역사상 선인(仙人)과 맞서 싸운 유일무이한 인간.
신좌의 귀동(貴童)들과도 동수를 이뤘던 자.
허나 그는 용마가(龍魔家)의 역천해일(逆天海日)의 비술에 의해 육신이 산산조각 분해되어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그 후로 마도천은 검신의 존재 자체를 무림에서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가 평생을 일궈 온 무공, 그가 남긴 인연들, 강호에 남겨진 그의 발자취 등을 철저하게 세상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신좌를 반하는 것은 역천(逆天).
다시는 그처럼 신좌를 부정하는 인간이 출현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검신의 위대한 검공은 마도천 내에서도 신화처럼 남아 있었다.
때문에 용마가를 비롯한 몇몇 마가들이 그의 검공을 수백 년 동안 분석하고 재해석했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검신의 검공에 파고들고도 파훼식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검신의 검공에 담긴 공공력(空空力)은 도무지 그 묘용을 파악할 수 없는 미지(未知)이자 불가해(不可解)의 영역.
한데 그 두려운 검신의 공공력이 눈앞에 현신한 것이다.
공간을 소멸시키는 검.
자신이 속한 적마선가의 역사서에서도 검신의 검에 담긴 공공력에 대한 경외심은 지극했다.
“놀랍지 않느냐. 하늘이 정한 인과율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네놈들이 지우려 들어도 하늘의 뜻은 막을 수가 없겠지. 신좌라…….”
검신의 두 눈 속에 담긴 지고의 현기가 순간 아득해졌다.
“이번에는 또 무엇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것이냐? 유희? 그것도 아니라면 또 알량한 주시(注視)인 것이냐?”
“…….”
은봉령주가 침묵하자 검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전하구나. 우리 사이에 그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인과(因果)의 소용돌이가 돌고 돌아 이렇게 너와 내가 만난 것은 단 하나의 업(業)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검신의 두 눈에서 칠채서기가 흘러나오자 그의 조가철검이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이내 공간의 한 점(點)으로 모였다.
“살계를 용서하게.”
푸슛!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은봉령주가 자리하고 있던 공간이 사라졌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남궁장호와 제갈운.
음파를 차단했는지 조휘가 은봉령주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저 회의실 바닥에 생겨난 반원 모양의 구덩이만 멍하니 쳐다볼 뿐.
엄청난 기도를 뿜어내던 절대경의 고수, 그 은봉령주가 구덩이 속 핏물이 되어 있었다.
두 눈으로 빠짐없이 지켜보았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강호의 기사(奇事)는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들에게 이런 건 강호(江湖)가 아니었다.
* * *
조휘는 일행에게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 모든 일들을 그저 강호의 숨겨진 이면(異面)이라 일축했다.
사실 조휘로서도 일전에 한 번 조조 어른에게 ‘그들’이라는 언질을 받긴 했지만 그 실체를 직접적으로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확실한 것은 조휘가 ‘그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조휘는 그들의 역량이 맹(盟)과 련(聯)을 암중으로 조종할 정도라는 것이 놀라웠다.
현대의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처럼 세계를 암중으로 지배하는 자들이 있다는 음모론을 그다지 신봉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직접 겪고 나니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다.
신좌(神座)는 누구일까?
과연 신일까?
정말로 신이 존재한단 말인가?
온갖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조휘는 금세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어차피 답도 없는 문제에 매달려 봐야 머리만 복잡할 뿐이었다.
장사꾼에 불과한 자신이 어째서 ‘그들’의 관심을 받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차피 모난 정이 되었다면 맞아 주면 그만이다.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냉철한 조조 어른이 있고, 현명함 그 자체인 만상조 어른이 있다. 무엇보다 위대한 검신 어른과 함께한다.
그리고 나 조휘.
이 강호에서 현대인의 이성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지난 수년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들’이나 ‘사마’도 언젠가는 맞부딪칠 테지만 결코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을 것이다.
우선 강서를 먹어 치워 조가대상회의 덩치를 키운다.
상회(商會)라는 이름으로 본래의 실력을 감추고, 그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을 일궈 낼 것이다.
자신은 역사 속의 위인들과 현대의 실력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먹어 치우는지 모두 배워 알고 있었다.
조휘의 그런 강렬한 다짐과 기세를 느꼈는지 남궁장호의 눈빛은 더욱 침잠하고 있었다.
이제는 저 조휘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감히 추측할 수도 없는 무공도 물론이거니와 그 심계와 전략이 나날이 깊어 가고 있었다.
삼패천의 일천인 흑천련이 조휘 단 한 명에게 분쇄되는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빠짐없이 지켜본 마당.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이 사내와 적이 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궁세가가 조가대상회와 맞잡은 손을 놓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남궁장호는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치밀었다.
그때, 염상록을 선두로 장일룡과 진가희, 한설현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염상록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음?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천장은 왜 저런 거요?”
은봉령주와의 공방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회의실.
그때 장일룡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으악!”
조각이라도 한 듯 반듯하게 반원 모양으로 파인 바닥 안에 소름 돋는 핏물이 그득하다.
장일룡이 신발에 묻은 피를 연신 털며 소리친다.
“싯펄! 이 핏물은 또 뭐여?”
갑자기 진가희가 상기된 얼굴로 쪼그려 앉는다.
이내 손가락에 피를 찍어 맛을 음미(?)하는 진가희.
“피(血)에 양기가 실하네? 사십 대를 넘은 사내죠? 죽었나요?”
뼈가 보일 듯한 창백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칠한 채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소름 돋기 그지없었다.
염상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와 씨 이 창백하고 탐욕스러운 년. 이 와중에 또 그걸 욕심 내냐?”
독편살왕의 심법인 혈사심천공(血蛇心泉功)은 흡정과 흡혈을 기반으로 하는 내공심법이다.
“아니 딱 봐도 사람 피잖아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하니 당연히 맛보고 싶은 게 정상 아니에요? 그런데 시체는 어디에?”
초롱초롱.
저 커다란 눈망울이 마치 순정만화의 여주인공 같다.
조휘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어휴 저 드라큘라 같은 년.
자신에게 받은 금화로 그 비싼 웅혈(熊血)을 모조리 살 때부터 알아봤다.
진가희는 지붕 위에서 정찰(?)하는 시간 외에는 무조건 자신의 방에서 웅혈을 섭식(攝食)하고 운기조식하는 데 몰두했다.
조휘는 월음(月陰)이 차오를 때까지 철저하게 계획된 시간표대로 피를 마시고 운기조식을 반복하는 그녀를 보면서 내공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 보통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데 그때, 진가희가 눈을 새하얗게 뒤집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전신이 천장을 향해 활대처럼 휘어졌다.
염상록이 기겁을 했다.
“으악! 저 소름 돋는 년! 피 맛 좀 보더니 갑자기 부들부들 쾌감 느끼는 거 좀 보소? 뭔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아직도 열락이 그치지 않은 듯 연신 황홀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서 번들거렸다.
점점 ‘그 느낌’에서 헤어 나오는 진가희.
그녀의 떨리는 음성이 이내 조휘에게 향한다.
“이, 이런 강력한 정기가 담긴 피는 처음이야! 이 피 누구의 것이죠? 이자의 경지는 설마 화경?”
바로 저거다!
이래서 그 사악한 흑천련조차 독편살왕과 진가희에게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혈사심천공을 익힌 자들은 고수의 피에 지독히도 환장했다.
경지가 높은 무인의 피일수록 그 피에 담긴 정기와 기력이 남달랐기 때문.
조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마 절대경일 건데.”
“저, 저, 절대경!”
경악의 얼굴로 굳어 버린 진가희!
어쩐지 손가락으로 한 번 찍어 맛본 것만으로도 내부가 후끈하더라니!
진가희가 곧바로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찰박!
“에이 씨.”
“우웩!”
못 볼 걸 봤다는 듯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장면을 외면하자 조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드르르륵.
“어차피 점심도 먹어야 하니 객잔으로 자리를 옮기죠.”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구역질하며 비틀거리던 제갈운이 말했다.
“우웩! 빠, 빨리 가시죠!”
진가희를 제외한 일행들 모두 근처의 조가객잔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휘를 발견한 객잔의 점주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했지만 그런 호들갑은 조휘가 바라는 영업 태도가 아니었다.
“영업시간 내에는 객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손님의 예우만 하시면 됩니다. 저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감사하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회장…… 아니 손님!”
이어 장일룡이 이것저것 맛있는 요리를 주문하려다 단숨에 조휘에게 제지당했다.
“소면 여섯 그릇! 한빙주 세 병! 끝!”
대식가인 장일룡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소면을 향한 조휘의 집착에 의해 언젠가부터 점심은 늘 소면으로 통일이었다.
그나마 한빙주를 시켜 준 것이 어딘가.
조휘가 그렇게 주문을 하고서는 곧바로 한설현을 응시했다.
“새로 산 면사가 마음에 드는군요. 절대로 벗지 마시길 당부드립니다.”
“알겠어요.”
“그래요. 제가 생각한 동선을 확인해 보셨나요?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한설현의 빙공 실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출중했지만 그녀에게도 한계란 것이 있을 터.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포양호 전체를 두루 돌며 각 사업장의 소빙고(小氷庫)에 얼음을 채워 넣어야 되는데, 그녀의 내공이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조휘로서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장 과장님과 서른두 곳 모두 방문하고 오는 길이에요. 무리예요. 절반도 못할 거예요.”
“……절반?”
이러면 계획이 틀어진다.
대석빙고를 다시 계획에 포함시킬 수는 없었다.
이미 한설현만 철석같이 믿고 모든 자금을 빡빡하게 배치한 상태.
결국 남은 방법은 조휘가 어설프게 배운 빙공으로 그녀의 보조를 맞추는 것뿐이었다.
“참으로 아쉽군요.”
조가대상회의 회장인 자신이 반드시 이틀에 한 번씩 얼음의 생산을 도와야 하는 상황.
이렇게 되면 많은 계획들의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저는 오라버니처럼 천빙령을 복용하지 못했어요.”
제갈운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천빙령(天氷靈)? 천빙령이라. 천빙령…….”
기억이 날 듯 말 듯 간지러워 연신 답답해하던 그가 곧 눈을 크게 떴다.
“생각났다! 그거 당가에 많습니다!”
조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가(唐家)? 사천당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새외대전 당시 북해의 많은 기물들이 무림맹의 전리품으로 들어왔죠. 그중 천빙령이 있었죠.”
“그런데 왜 당가에?”
“독의 연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맹은 천빙령의 전량을 당가에 반출해 주었죠. 아마 맹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거예요.”
“음…….”
한 차례 깊게 생각하던 조휘가 다시 한설현을 응시했다.
“천빙령만 복용하면 포양호의 사업장들을 홀로 다 돌 수 있는 겁니까?”
“충분히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조휘.
“일단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연신 쾌락에 부르르 몸을 떨며 비틀비틀 걸어오는 진가희.
그녀가 피칠갑을 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후아…… 시체는 어딨죠?”
* * *
드디어 운용되고 있는 남창의 주괴공방 현장.
조휘는 흙으로 빚어낸 수십 개의 거대한 화로(火爐)들을 바라보며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시대의 기술이란 것은 너무도 조잡했다.
강철(鋼鐵)을 얻기 위한 저 험난한 공정을 보라.
사람의 키만큼 진흙으로 높게 쌓아 올린 화로.
그 내부에 숯과 함께 철광 원석을 섞어 넣어 하루 종일 쉼 없이 발풍차로 발을 굴려야 고작 다섯 냥의 강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넓은 공방터에 그런 화로들이 약 칠십여 개.
그 엄청난 노가다를 하고도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강철의 양은 고작 이십 근(12kg).
부피로 따지면 정말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한 서너 주먹?
이 넓은 공방터를 활용하고, 약 이백오십 명의 일꾼들이 교대로 발풍차를 굴려서 얻은 양이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조휘의 마음이 착잡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거대한 용광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일상처럼 TV에서 본 마당에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이 중원에서는 철로 만들어진 무기, 농기구, 장신구 등이 아직도 고가(高價)에 거래되는 것이다.
그것도 중원 일꾼들의 품삯이 비상식적으로 저렴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싼 가격이었다.
만약 이와 같은 공정에 현대의 인건비를 적용한다?
조휘는 주괴의 가격이 얼마나 치솟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때, 주괴공방의 일꾼들이 주섬주섬 망치를 들자 조휘는 보기도 싫다는 듯 그 모습을 외면해 버렸다.
“제길.”
주괴공방의 공정을 지켜볼 때 가장 화가 나는 장면.
일꾼들은 매일매일 아침마다 저 칠십여 개의 화로들을 모두 부쉈다.
천 도 이상의 고온으로 밤새도록 가열된 점토 화로들은 이미 도자기화되어 다시 쓸 수가 없었다.
일꾼들은 또다시 소하천의 점토를 공방까지 퍼 날라야 했고, 그 점토를 또 사람의 키만큼 높게 쌓아 올린 후 그 속에 숯과 철광석을 채우고 발풍차로 불을 지핀다.
이 과정만 반나절이 소요된다.
조휘는 그 비효율적인 장면에 정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속도라면 주상 복합 아파트 단지를 하나 완성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일주일 동안 강철주괴를 생산해 봐야 H빔 하나 만들면 끝이었다.
현대의 용광로를 운용할 수는 없을까?
숯을 열원(熱源)으로 하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석탄이라도 캐야 하나?’
가격이 비싸 모조리 부자와 귀족들의 아궁이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지만 간혹 저자에 석탄(石炭)이 출몰하긴 했다.
아직 채광·채탄 기술이 형편없는 중원의 기술로는 지표면에 광맥이 거의 드러나 있는 노천 광산을 제외하고는 석탄을 캘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곡괭이질을 하다가 약한 암반층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그 탄광은 폐광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광산을 개발하려면 폭약은 필수.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한데 그때.
‘아?’
조휘의 머릿속에 전광석화처럼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굳이 폭약이 필요하나?’
이 중원 강호에는 일권일장(一拳一掌)으로 바위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고수가 부지기수로 많지 않은가?
소림사 비전이라는 백보신권(百步神拳)이나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의 위용,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폭탄은 필요도 없었다.
그 무식한 땡중들을 고용만 할 수 있다면 광맥 하나 뒤집어엎는 것은 일도 아닐 터.
대표적인 화석 연료인 석탄을 대량으로 채광할 수 있다면 용광로(鎔鑛爐)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한데 무슨 수로?
고고하기가 남궁세가를 능가하는 소림사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란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검신 어른 역시 소림의 숨겨진 실력은 드러난 것의 수배 이상이라 했다.
그렇게 강호에 이름 높은 무승들을 고작 광산의 인부로 내 달라고 한다?
그 말을 꺼내는 즉시 은거하고 있던 활불(活佛)들이 뛰쳐나와 선장(禪杖)으로 자신의 뚝배기를 깨 버릴 수도 있었다.
당장 공공대사(空空大師)만 해도 무림맹의 무황 청운진인(淸雲眞人), 화산의 자하검성(紫霞劒聖)과 더불어 칠무좌의 최정상.
검신 어른은 아직 자신의 경지가 칠무좌의 최상위권 고수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흠…….”
또다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조휘에게로 장일룡이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그 근육 놈이 또 왔수!”
지금 누가 누구보고 근육 놈이라 하는 거지?
조휘가 한 차례 인상을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거 일전에 나와 팔씨름을 했던 하북 놈 있잖수? 이번에도 또 합빈관에서 퇴짜를 맞은 일로 따지려고 온 것 같은데.”
“아…….”
무극도왕의 맏아들 신도왕 팽각.
그는 합빈관의 엄격한 물관리로 인해 이미 몇 번이나 퇴짜를 맞은 상태다.
그 대사건(?)이 이미 강호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
그때마다 그는 꼭지가 돌아서 조가대상회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호구는 입장시키는 것이 관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너무 못생겼다. 현대에서도 그 정도로 빻은 놈은 정말이지 드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합빈관의 엄격한 물관리로 인해 고관대작의 자제들까지 원성이 자자한 마당.
팽각과 같이 눈에 띌 정도로 못생긴 놈을 입장시켜 버리면 개나 소나 다 입장시켜 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이 틀림없었다.
“아 그 새끼 거참. 머리 아프게 하네.”
하북에서 안휘까지 거리가 얼만가?
평범한 장정이 걸어오려면 한 달은 걸리는 거리다.
게다가 따지려고 이곳 포양호까지 찾아오다니.
실로 그 열정만큼은 인정하는 바지만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 오대세가의 소가주란 놈에게 면박을 줄 수는 없는 노릇.
“그놈 지금 어디 있는데요?”
“조가객잔에 있수.”
조가객잔?
지금 그곳에는 각 점포별 소빙고에 얼음을 채워 넣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한설현이 있지 않은가?
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조휘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가 보죠.”
* * *
아니나 다를까.
한설현의 고아한 자태에 눈이 하트로 변한 팽각이 연신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커험! 흠! 험!”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고는 연신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팽각.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우는 듯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사내다움을 뽐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역시 강남은 강남이라 이건가? 커흠!”
장강 이남 포양호의 습하고도 더운 날씨는 물론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웃통을 깔 정도는 아니지 않나?
훌러덩!
꿈틀꿈틀.
엄청나게 발달된 근육과 뱀처럼 꿈틀거리는 핏줄로 가득한 팽각의 상체가 드러나자 한설현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맛!”
그제야 흡족한 듯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팽각.
조휘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휴 진짜 개 더럽다.
웃으니까 더 못생겨지네.
그렇게 싯누런 이를 드러낸 팽각이 이제 무복 하의마저 걷어 올려 허벅지를 드러낼 그때.
“그쯤하시죠?”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잡던 팽각이 조휘가 허리에 차고 있는 조가철검을 발견하더니 와락 인상을 구겼다.
“흥! 결국 네놈도 별수 없는 검(劒)이로군!”
곧 팽각이 등에 차고 있는 거대한 묵도(墨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이쑤시개가 아니라 이것이 남자의 무기다.”
이번에도 그는 연신 한설현을 힐긋거리며 자신의 사내다움을 어필하고 있었다.
가늘게 한숨을 쉬는 조휘.
“후…… 근육과 무기 자랑하려고 그 먼 길을 온 겁니까.”
팽각의 아차! 하는 얼굴.
그가 마침내 본래의 목적을 떠올려 냈다.
“감히 대하북팽가의 소가주인 이 팽각님을 계속 거부할 것이냐! 당장 나의 출입을 허하라! 거부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합빈관을 날려 버리겠다!”
분명 잡아먹을 듯한 말투, 사내다움 그 자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두 눈에는 물기가 그득 어려 있었다.
제발 나도 들어가고 싶다고!
나도 여인들이랑 놀고 싶다고!
‘아니, 이 새끼가? 눈이 말을 하네?’
그런 아싸의 한(恨)을 느꼈을까.
조휘가 오싹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일룡이 끼어들며 말했다.
“안 돼. 돌아가.”
“왜! 난 왜 안 되는 건데!”
장일룡의 기세가 합빈관의 문지기로 완벽히 돌아와 있었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무의미만을 그리고 있는 장일룡의 표정.
“못생겼으니까.”
아아!
이렇게 대놓고는 처음 듣는다.
내 어머님도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남자답게‘는’ 생겼다며 슬픈 눈을 하시건만!
감히 네까짓 게!
지도 근육뿐인 놈이!
아 시발 갑자기 왜 눈앞에 물안개가.
팽각이 갑자기 진각을 후려 밟았다.
콰쾅!
“놈! 승부다!”
조휘가 점소이를 부른다.
“청아(靑兒)야.”
“예! 예 회장님! 갑니다요!”
청아가 와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자 조휘가 객잔의 바닥을 눈짓했다.
“자활목(自活木) 세 개 부러졌다. 앞으로도 뭔가 더 부서질지 모르니 빠짐없이 저분에게 청구하도록 해라.”
“예! 회장님!”
부들부들.
팽각이 거칠게 달려가 조휘의 멱살을 잡으려는 찰나.
“그만하세요. 다른 분들께서 식사하시잖아요.”
밥을 먹다 말고 기겁을 하며 객잔의 바깥으로 나가려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설현을 쳐다봤다.
객잔의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식기들을 정갈한 몸짓으로 줍고 있는 한설현.
앞으로 계속 쏠려서 불편했는지 그녀가 잠시 면사 자락을 어깨 위로 걸치자 대번에 객잔이 후끈해졌다.
“아아아아! 저럴 수가!”
“가, 가인! 절세가인(絶世佳人)!”
“세상에!”
모두가 그녀의 파천의 미모 앞에 무릎을 꿇을 지경이 됐다.
그것은 팔팔한 청춘, 피 끓는 사내 팽각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 소저……!”
팽각은 도(刀)를 휘두를 때를 제외하고도 자신이 이렇게 가슴이 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부끄러워 눈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여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아. 면사 관리 좀 제대로 해 달라고 그만큼 부탁했잖습니까.”
“아아, 죄송해요.”
조휘의 나무람에 황급히 다시 제대로 면사를 고쳐 쓰는 한설현.
순간 승부도 잊고서 벼락같이 다가온 팽각이 정중하게 한설현을 향해 포권했다.
“오대세가의 북천(北天), 팽가의 현무소공자(玄武小公子) 이 팽 모가 정중하게 인사 올리겠소!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 수 있겠소?”
조휘의 두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평소에는 허술하고 장난스럽기 짝이 없는 사내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명가라고 제법 예법이 튼실했던 것.
그때 장일룡도 번개처럼 다가와 팽각과 한설현의 사이를 막았다.
“아앗! 비켜라 놈!”
팽각은 조금이라도 한설현을 보겠다는 듯 연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 보고 있었지만 워낙에 장일룡의 덩치가 큰 탓에 쉽지가 않았다.
“어허! 이 시꺼먼 놈이 어디 우리 한 소저를 넘보는 게냐! 썩 꺼지거라!”
장일룡이 코웃음 쳤다.
“흥!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거라. 감히 방명이라니!”
그런데.
“북해 설풍 한씨(雪風寒氏) 십칠 대손, 제 빙가지명(氷家之名)은 설현(雪賢)이에요.”
서, 설풍 한씨?
이 강호에 설풍 한씨라고는 무림의 숙적, 북해의 빙궁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 빙궁?”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지니 마치 야차 같다.
팽각이 도저히 현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거칠게 고개를 도리질하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크으흑! 사랑은 잔인하다더니!”
곧 모든 원망이 장일룡에게 향했다.
“놈! 승부다! 사나이라면 싸움을 피하진 않겠지!”
“오냐! 어디 한번 죽어 봐라!”
“내가 할 소릴! 너 따위 놈에게는 도(刀)도 필요 없다! 장법으로 상대해 주마!”
“이 새끼가!”
장일룡이 호쾌하게 주먹을 내지르려는 그때 조휘가 이를 제지했다.
“잠깐, 잠깐만요.”
호기심으로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휘를 향해 팽각이 이를 깨물었다.
“뭐냐!”
“장법? 팽가에 권장법도 있습니까?”
팽각이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 조휘를 쳐다본다.
“감히 강호인을 자처하는 놈이 본 가의 혼원벽력장도 들어 보지 못했단 거냐?”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
그 엄청난 초식명에 조휘의 얼굴에 더욱 호기심이 어렸다.
“백보신권이나 아라한신권보다도 셉니까?”
팽각의 이마에 거칠게 힘줄이 돋아나며 꿈틀거렸다.
“흥! 소림의 권장법이 아무리 뛰어난 절기라고 해도 본 가의 혼원벽력장 역시 그 못지않다!”
조휘의 얼굴에 띤 미소가 점점 음흉하게 변해 갔다.
“혹, 저와 승부하시겠습니까?”
“승부?”
“아아, 내기 승부라고 해 두죠.”
팽각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꼴에 검 하나 찼다고 저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지금 이 팽각을 물로 보는 건가?
“종목은?”
조휘가 팔을 돌리며 씨익 웃었다.
“팔씨름이요.”
“팔씨름?”
저 연약한 팔로 감히 팔씨름?
“제가 지면 합빈관 무제한 입장권을 드리죠.”
“뭐, 뭣이!”
“반대로 제가 이기면.”
조휘가 씨익 웃었다.
“저와 근로계약서 하나 쓰시면 됩니다.”
팽각의 머릿속에 조휘의 이미지는 ‘학사’였다.
소룡대연회 문예지론의 우승자.
저 연약한 몸으로 보나 사내답지 못한 말투로 보나 서생 나부랭이가 확실했다.
꼴에 남궁세가의 빈객이랍시고 검을 차고는 있었지만 제깟 놈이 무공을 익혀 봐야 얼마나 익혔겠는가?
저런 비실비실한 놈과의 승부?
상대하기조차 수치스럽다.
하지만 ‘합빈관 무제한 입장권’이라니?
그것만은 결코 놓칠 수가 없다.
팽각의 얼굴이 서서히 탐욕의 빛으로 번들거린다.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겠지?”
“오히려 내 쪽에서 당부하고 싶은 말이군요. 근로계약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흥! 남아일언(男兒一言)!”
“중천금(重千金)!”
코웃음을 치던 팽각이 탁자에 앉아 자세를 잡자 조휘도 슬며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는 법.
갑작스런 팔씨름 승부에 객잔 손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뜨거운 혈색이 돌았다.
“내공 없이?”
조휘가 탁자 위로 팔을 올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편한 대로 하시죠.”
팽각의 얼굴에 쾌재가 어렸다.
자신이 질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기가 걸린 승부다.
승기를 확실하게 가져가려면 모든 변수를 없애야 하는 법.
“그래? 그럼 내공은 없이!”
이제야 팽각은 승리를 확신했다.
내 팔뚝의 삼분지 일도 안 되는 얇디얇은 저 팔로 무슨! 낄낄낄!
팔씨름은 힘도 힘이지만 일단 기세 싸움이 중요하다.
팽각이 죽일 듯이 부릅뜬 눈으로 매섭게 조휘를 노려보며 그의 팔을 맞잡는다.
어?
단지 손을 마주 잡았을 뿐인데 뭔 차돌을 만지는 것같이 단단하다.
그런 기이하고도 불길한 감각에 팽각의 등줄기가 점점 축축하게 젖어 갔다.
“내, 내공을 안 쓴 것이 맞나?”
“알면서 왜 그러실까요?”
무인이 조금이라도 내공을 일으키면 안구(眼球)에 기광(氣光)부터 발현된다.
분명 조휘의 눈에는 그 어떤 기광도 일렁이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팽각.
조휘는 애써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자, 시작할까요?”
왠지 모를 심상치 않은 느낌에 팽각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조휘의 팔을 재낀다.
허나.
모든 물리학적 벡터값을 시전할 수 있는 검천전능지체.
조휘는 곧바로 벡터값의 마찰계수(摩擦係數)를 무한대에 가깝게 맞추었다.
“……흡!”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팽각은 천년거암처럼 굳건해진 조휘의 팔을 단 한 치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힘을 줬으면 시야가 노래질 정도.
한편 조휘는 가해져 오는 힘의 중량에 가볍게 놀라고 있었다.
과연 팽가의 외공이 소림과 비견된다더니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허나 검천전능지체를 넘을 수는 없는 터.
이어 조휘가 가볍게 팔을 비틀자.
“으악!”
팔과 함께 팽각의 몸 전체가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쓰러진 채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팽각.
그의 동공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공허했다.
조휘가 무심한 얼굴로 품속에서 예의 ‘근로계약서’와 목탄을 함께 꺼냈다.
“근로 조건은 서로 맞춰 가면 되는 거고 일단 초안부터 작성하고 있겠습니다.”
장일룡이 배를 잡았다.
“낄낄낄! 꼴좋다!”
한편 객잔의 점소이들과 손님들은 경악의 얼굴로 굳어 있었다.
하북팽가가 어떤 곳인가?
그들의 무식한 외공 사랑은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 어떤 문파보다 힘을 숭앙하는 도객(刀客)들의 처소.
소림외공과 비견되는 하북팽가의 패왕공(覇王功)은 모든 외문무가(外門武家)들이 꿈에 그리는 절기다.
저 근육 인간은 그 무식한 하북의 소가주.
저 엄청난 덩치의 ‘팽가 인간’이 조휘에게 압도적으로 당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누가 봐도 팽각 쪽이 더 우세.
만약 이곳에 내기 판이 벌어졌다면 대부분이 돈을 잃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리라.
팽각이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 이건 사술(邪術)이다! 무슨 속임수를 쓴 것이 틀림없다!”
조휘가 마치 예상이나 한 듯 계약서의 초안을 작성하면서 왼손을 팽각에게 내밀었다. 물론 시선은 그대로 계약서에 향한 채로.
“넘길 수 있으면 넘겨 봐요.”
엄청난 도발!
감히 팽가의 긍지를 산산조각 내다니!
우악스럽게 조휘의 왼손을 마주 잡은 팽각이 또다시 전력으로 힘을 주었다.
점점 붉어지는 팽각의 얼굴.
“이! 이익!”
도대체 왜!
저 대나무같이 얇은 손모가지가 왜 안 넘어가는 거지?
더 큰 충격은 조휘가 오른손으로는 사각사각거리며 글을 적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연신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주고 있는 팽각에게로 예의 근로계약서가 쭉 내밀어졌다.
“직위와 품삯, 성과 수당, 임무 등 대충 초안을 잡아 봤습니다. 읽어 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아, 물론 초안이니 불만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어느 정도는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
멍한 얼굴로 손을 푸는 팽각.
허물어지는 자존심, 그 분노와 열패감이 정수리까지 치민다.
팽각이 등에 찬 묵도(墨刀)를 꺼내 살기등등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남아일언중천금 운운했던 놈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도 놀라운데 감히 무기를 꼬나 잡아?”
쿠쿠쿠쿠쿠쿠.
미세한 진동이 객잔을 휘감는다.
조휘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백색 아지랑이.
그렇게 너울거리는 새하얀 기(氣)의 포말들을 바라보는 팽각의 얼굴은 경악하다 못해 기절할 지경이었다.
틀림없이 내공이 유형화되는 경지, 진무화(眞武花)다.
공단(空丹)을 이룩하여 전신혈맥이 단전화된 경지. 화경의 문턱을 돌파한 무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화경이라고?’
이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어떻게 화경을 이룩한 무인일 수가 있단 말인가?
‘북천의 천재’라 불린 자신조차도 아직 이룩하지 못한 경지이거늘!
이런 엄청난 고수였다니!
그저 학사인 줄로만 알았던 조휘의 진면목을 대하자 팽각은 의기소침해졌다.
“아니 그게…… 무인인지는 몰랐지.”
화경에 이른 고수라면 그 외공 또한 상승의 경지일 터. 자신의 패배가 더 이상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요…….”
마치 나라 잃은 표정.
조휘가 그제야 검천대신공의 운용을 멈추며 다시 근로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채탐(採探)하는 자들과 함께 광맥을 찾는 겁니다. 광맥을 찾은 후에는 그들과 함께 석탄(石炭)을 채광해 주세요.”
“채광?”
명가의 자제로 태어나 평생토록 무공만을 닦아 온 자신에게 채, 채광?
지금 자신더러 광산의 광부가 되어 달란 말인가?
이런 병신 같은 요구를 할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팽각.
“아니 도대체 무인을 뭘로 보는 거요? 광부라니? 내가 광부라니?”
“남아일언?”
“주, 중천금.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소!”
허나 조휘는 한 치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근로계약서만 들이밀고 있었다.
녹림대왕의 대제자도 합빈관의 문지기로 고용하고, 북해의 고수들도 냉장고로 영입하는 판에, 하북의 근육 돼지 새끼 하나 광부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한데 도무지 자존심이 상해서 서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조휘가 양념을 치기 시작했다.
“채탐에 성공하거나 석탄을 천 근(斤) 이상 생산할 때마다 성과금과 함께 합빈관의 일 회 입장권을 드리죠.”
“하, 합빈관!”
조휘의 그 말에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근육 인간의 이성이 저만치 날아갔다.
어느새 서명을 하고 있는 팽각.
한데 그때.
“아악!”
등짝을 파고드는 소름 돋는 통증에 팽각이 기겁을 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한쪽 손에는 소도(小刀), 다른 한쪽에는 핏물이 가득 밴 헝겊을 손에 들고 있는 진가희!
“대박! 엄청난 사내의 피야!”
진가희가 이내 헝겊에 고개를 파묻었다.
장일룡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 이런 미친년이! 다짜고짜 사람을 찔러?”
조휘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절대경의 피를 한번 맛보더니, 이제는 월봉을 자신의 피로 지급해 달라고 하는 또라이년이다.
이 중원 세계, 아니 지구의 역사를 모두 두루 살펴본다 해도 저년의 똘끼를 능가하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흐응! 굉장해! 이 엄청난 양기! 흡!”
피 맛을 음미하며 몸을 이리저리 꼬고 있는 진가희를, 팽각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허……!”
창백하고 음습한 게 문제긴 하지만 원판은 꽤나 미인에 속하는 진가희다.
모태솔로인 팽각으로서는 동요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팽각이 패왕공을 일으켜 단번에 등판을 지혈시키더니 진가희에게 다가가 정중히 포권했다.
“오대세가의 북천(北天), 팽가의 현무소공자(玄武小公子) 이 팽 모가 정중하게 인사 올리겠소.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 수 있겠소?”
조휘와 장일룡이 동시에 묘한 얼굴을 했다.
한설현에게 했던 인사와 어떻게 저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수가?
분명 동경을 보며 저 멘트를 수백, 수천 번 연습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제 몸에 칼을 찌른 자에게 어떻게 저렇게 친절할 수 있느냐다. 참 어지간히 고픈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나? 난 진가희인데?”
“진가희!”
통성명에 성공한 팽각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앞서 한설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여인의 방명을 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 소질이 있는 건가?
“혹시 경지가 초절정?”
“핫핫핫! 제법 눈썰미가 있으신 소저였구려!”
진가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팽각의 탄탄한 몸을 더듬기 시작하자, 팽각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우와! 이거 외공이죠? 금종조(金鐘罩) 이상 같은데?”
“금종조라니! 본가의 패왕공은 그따위 허접한 외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소!”
“아아! 그럼 상처가 나도 금방 회복이 되겠네요? 어맛! 벌써 등이 다 아물었어!”
진가희가 호들갑을 떨다 조심스럽게 소도를 꺼냈다.
“또 찔러 봐도 될까요?”
흠칫.
무슨 여자가 칼로 찌른다는 소리를 저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나.
“무, 물론이오! 사내에게 그따위 생채기 하나가 무어가 그리 대수겠소.”
“꺅! 고마워요!”
곧 진가희가 팽각의 팔뚝에 거침없이 소도를 찔러 상처를 내더니 그대로 그의 팔을 베어 물었다.
쪽쪽.
“아아아!”
점점 묘한 표정이 되어 가는 팽각.
조휘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빨리 일하러 갑시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정신병 걸릴 거 같네요.”
“동감이우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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