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25
25 章>
조휘가 한설현과 함께 객잔 밖으로 나와 운차를 타려던 그때.
한눈에 봐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제갈운이, 황급히 다가와 조휘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 조금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 어떤?”
제갈운이 자신의 뒤편을 눈짓했다.
“저번에 저도 상회에 투자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본가에 연통했는데…… 형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어요.”
“형님?”
조휘가 제갈운이 눈짓한 곳을 바라보자 고아한 자태로 섭선을 펄럭이고 있는 한 학창의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조휘의 시선을 느꼈는지 섭선을 접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제갈세가의 내원주 제갈영(諸葛英)이라고 하오.”
제갈영의 첫인상은 특이했다.
제갈세가 특유의 고고한 성정과 완고한 고집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로 마주 웃음이 나오는 호남형 얼굴이었다.
또한 제갈운과는 다르게 사내다운 호방함이 느껴졌고 무공도 제법 경지에 이른 듯 보였다.
하지만 조휘는 이내 기꺼운 마음을 걷어 냈다.
뭔 쫄보도 아니고 고작(?) 이만 금 투자하는 것도 쫄려서 무려 내원주씩이나 되는 인사를 보내오다니.
조휘는 굳이 보지 않아도 제갈세가 가주란 자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었다.
곧 조휘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제갈영을 흘깃 바라보았다.
“형님께 이곳저곳 다 구경시켜 드리세요. 저는 오늘 많이 바빠서.”
“네. 알겠어요.”
오늘은 조가대상회의 모든 사업장이 일괄 개점하는 날이다.
간부들의 숙박 문제로 조가객잔이 미리 개업하긴 했지만 냉차는 개시되지 않았다. 포양호 사람들은 오늘에야말로 진정한 조가대상회의 문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
조휘가 천상운차에 올라타려는 그때 제갈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휘 소협!”
조휘가 뒤로 돌아보며 조금은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할 일이 많아서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갈영이 다시 정중히 포권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사업장이 아니라 조가대상회의 회장인 당신이오.”
“…….”
제법 성가신 인사다.
“오늘은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내일 다시 만나시지요.”
제갈영이 천상운차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어떤 방해도 안 하겠소. 그저 동행만 하게 해 주시오.”
조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타시죠.”
조휘와 함께 천상운차에 오른 제갈영이 내부를 둘러보더니 내심 감탄했다.
‘대단하다. 그리고 뭔가 기묘하군.’
내부 장식의 양식, 그리고 각종 편의 장치들이 처음 보는 문물로 가득했다.
특히 각 자리마다 접이식으로 예상되는 탁자가 달려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탁자에는 그릇이나 찻잔 따위를 꽂아 두는 홈이 있었다.
그럼 자리마다 접어 둔 저 탁자가 개인 식탁(食卓)이란 소린가?
미칠 듯이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끼니를 때운다고?
또한 여타의 마차와는 달리, 각 의자들이 독립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도 특이했고 푹신한 가죽으로 감싼 모습도 고급스러웠다.
각 창문별로 달려 있는 차양막, 유려한 난(蘭)이 담겨 있는 화분, 신을 벗어 놓을 수 있는 신발장까지.
가히 마차 안인지 객방 내부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다.
“출발해 주세요.”
조휘가 쪽창으로 마부에게 출발을 지시하자 천상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육성으로 튀어나온 당혹감.
동그랗게 변한 제갈영의 두 눈이 곧바로 조휘에게 향했다.
“……어떻게 이런?”
아무리 포양호 변 대로(大路)라 하나 자갈과 돌부리가 수두룩한 흙길이다.
창밖을 보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마차 동체(動體)의 덜컹거림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구름을 거니는 듯한 극도의 이질감.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마차와는 궤가 달랐다.
그때, 조휘가 접이식 탁자를 펼치며 품 안의 장부를 꺼내 그 위로 펼친다.
이어 목탄을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하는 조휘.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제갈영.
지독히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집무를 본다는 것은 평소에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그였다.
“뭣 때문에 그러시죠?”
제갈영이 탄복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사의 마차가 아니구려.”
조휘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저희 안휘철방의 발명품인 천상운차라고 합니다.”
“천상운차(天上雲車)라!”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하는 제갈영. 과연 그 이름이 어울리는 마차였다.
이어 그는 조휘의 옆에 앉아 있는 면사 여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인이 면사를 착용했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싫다는 뜻.
애초에 이들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기에 굳이 먼저 말을 걸어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약 이각 여의 시간이 흐르자, 쪽창으로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조휘가 장부를 덮어 다시 품 안에 넣더니 한설현에게 말했다.
“내리시죠.”
“네.”
포양호의 조가성심당(曹家聖心堂) 앞은 마치 난전을 방불케 했다.
벌써부터 인산인해(人山人海).
그도 그럴 것이 안휘 조가성심당의 엄청난 명성은 이미 이곳 포양호까지 자자했다.
모두가 천하의 진미라는 육겹면포(肉裌面包)와 흑청수(黑淸水)를 맛보기 위해 기다랗게 줄을 서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갈영을 놀라게 하는 것은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흑천련의 고수들도 함께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시종, 값비싼 비단으로 몸을 감싼 부자들, 관부의 인물들 그 모두가 함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미식(美食)과 탐식(貪食)에는 지휘고하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는 건가.
운차에서 내린 조휘는 한설현을 조가성심당 내부로 안내해 주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한설현이 나왔다.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제법 탈력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조휘는 한설현의 몸이 상할세라 급히 미리 챙겨 온 당과와 보약을 그녀에게 건넸다.
“몸 상하시면 안 됩니다. 쭉 드세요 쭉.”
“……고마워요.”
뛰어난 빙공 실력과는 별개로 그녀의 내공은 너무 미약했다.
조휘는 반드시 그녀에게 천빙령(天氷靈)을 구해 주리라 다짐했다.
막상 빙공을 몰아치고 온 후 탈력감으로 고통받는 한설현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
아무리 사업이 좋기로서니 타인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제 이득만 챙길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은 이와 같은 감정이, 그녀의 엄청난 미모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얼음이 완비되었으니 조가성심당의 영업이 곧 시작되었다.
조가성심당이 개점하자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연신 목청을 높이며 주문을 해 댔다.
“흑청수! 흑청수를 맛보고 싶소!”
“나도 흑청수!”
“육겹면포와 흑청수를 주시오!”
그야말로 문전성시!
사람들이 주문했던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탄성과 비명, 경악의 외침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흡!”
“세, 세상에! 이런 맛이!”
그 열광적인 광경에 제갈영은 내심 자신도 육겹면포와 흑청수의 맛이 궁금해졌다.
때마침 조가성심당의 당주가 육겹면포와 흑청수를 손에 들고 헐레벌떡 조휘에게로 뛰어왔다.
“여기 가져왔습니다요 회장님!”
성심당주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휘의 시식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오늘은 조가성심당이 포양호로 진출한 첫날이다. 오늘을 통과하지 못하고 깨진다면 당분간 영업이 중지될지도 몰랐다.
단숨에 육겹면포를 한입 베어 물고 눈을 감으며 음미하는 조휘.
천천히 씹던 그가 이번에는 흑청수를 한 모금 들이켠다.
“음…….”
침을 꿀꺽 삼키며 조휘의 시식평을 기다리고 있는 성심당주.
조휘가 감았던 눈을 뜨며 흡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군요. 맛이 변하지 않았어요.”
아직은 흑청수가 현대의 콜라에 비해 미덥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딘가?
곧 조휘가 성심당주에게 일러 여분의 흑청수와 육겹면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성심당주가 정성스레 포장한 육겹면포와 흑청수를 다시 가져오자 조휘는 곧바로 운차에 몸을 실었다.
“가시죠. 점심은 이동하면서 해결합시다.”
다시 운차에 올라탄 제갈영이 성심당의 음식에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혹 먼저 맛볼 수 있겠소?”
조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육겹면포와 흑청수를 그에게 건넸다.
곧 제갈영이 육겹면포를 한입 베어 물고 씹어 본다.
급격하게 확장되는 동공!
대체 어떻게 이런 맛이?
가히 미각의 환상이다.
알싸하게 도는 매운 불향.
혀를 감아 도는 달짝지근한 맛.
감칠맛으로 가득한 미친 풍미.
하나하나를 따지면 자극적이었지만 달고 맵고 짠 그 어우러짐이 실로 미친 조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꿀꺽!
마치 입안에 ‘맛의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그 환상의 맛은 제갈영에게도 새로운 세계!
허나, 그 쾌감은 흑청수를 빨아들였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쭈웁!
가느다란 어린 대나무 대롱으로 흑청수를 깊게 빨아들이자마자 정수리까지 시원해지는 격렬한 소화의 쾌감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꺼어어어억!”
이런 시원한 트림은 세상 처음!
그렇게 제갈영이 한참이고 흑청수를 음미하다 문득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체통을 차렸다.
“시, 실례했소.”
그러나 인간은 한번 맛본 쾌감을 결코 잊지 못한다.
격렬한 쾌감이 잦아들기가 무섭게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본능적으로 다시 대나무 대롱을 덥석 무는 제갈영.
쭈웁!
“키야아아!”
탄성! 또 탄성!
세상에 이런 음료(飮料)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저녁까지 이어진 조가대상회 투어.
결국 그는 조가객잔의 냉차, 그 청량함에 몸을 떨었고 조가양조장의 한빙주에 정신줄을 놔 버렸다. 특히 설화신주를 맛본 후에는 눈물까지 글썽일 지경!
그것뿐인가.
오와 열을 맞춰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는 조가통운의 라이더들, 그 엄청난 수의 자전거들을 바라보며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달통운업(配達通運業)이라는 기상천외한 사업 수단을 처음으로 접한 그에게는 또 한 번의 신세계!
저 엄청난 음식들을 집 안까지 가져다준다니!
실로 엄청난 그 발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
허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객잔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리나케 동생의 객방에 달려가 감탄을 늘어놓으려던 그때.
탁자 위에서 십 층 전각의 설계도해(設計圖解)를 발견해 버렸다.
이어 동생의 설명을 모두 들은 제갈영.
곧바로 제갈영은 한 통의 편지를 작성했다.
-아버지.
소자 영(英)입니다.
일단 가용할 수 있는 가문의 모든 금자를 보내 주십시오.
아니, 투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조휘라는 자는 실로 무서운 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저는 당분간 운이와 함께 이곳에 남아 그와 교류하여 친분을 다지겠습니다.
내원은 잠시 아버지께서 운영해 주십시오.
제가 살펴본 바로 이 조가대상회라는 곳은 첫째…….
제갈영이 포양호에서 겪은 모든 견문을 상세하게 적어 놓은 이 보고서.
그로서도 이 보고서가 무림맹주의 회탁 위에까지 올라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비로소 조가대상회의 진면목이 안휘와 강서를 넘어 강호의 전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 * *
다음 날.
조휘가 사천당가를 다녀오겠다는 뜻을 동료들에게 내비치자 모두 하나같이 기함했다.
“사천당가요?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요! 천빙령은커녕 말도 꺼내 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만 당하고 올 겁니다!”
“맞소. 그 어떤 성과도 없을 것이오. 그 냉혈한들은 설득이나 협상, 거래가 통하지 않는 작자들이오. 분명 헛걸음이 될 것이오.”
연신 조휘를 뜯어말리는 제갈운과 남궁장호.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으로서 사천당가, 그 특유의 폐쇄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다.
당가에는 객첩이나 빈객과 같은 제도도 없었다.
당가 일족을 제외한다면 당가타(唐家陀)의 담을 넘은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들은 모든 용무와 업무를 오직 서찰로만 접수했으며, 맹(盟)에서 온 사자라고 해도 기별 없이 방문한다면 되돌려 보내는 인사들이었다.
대충 동료들의 설명을 들은 조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면 그런 자들이 왜 오대세가에 속해 있는 겁니까? 평소 저도 궁금했습니다. 애초에 왜 그들이 정파인지도 모호했거든요. 독과 암기는 엄연히 살수(殺手)들의 수법이잖습니까?”
그렇게 폐쇄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고, 하물며 독과 암기를 쓰는 문파라면 정파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제갈운이 말했다.
“그들은 필요악이에요.”
“필요악?”
남궁장호가 침중하게 굳어진 얼굴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일기당가(一己唐家). 그들은 홀로 정파무림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소.”
“최전선?”
“그들은 오랜 세월 천마(天魔)의 후인들과 마주하고 있소.”
천마성.
홀로 천마성과 접경을 마주하고 있는 가문.
그 하나만으로 그들은 정파(正派)였다.
얼음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 않고서는 조가대상회를 제대로 굴릴 수 없다는 것이 조휘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한설현의 미진한 내공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강서성 조가대상회의 사활이 걸린 일이 된 것이다.
천빙령(天氷靈).
북해의 광활한 만년한설 속에서 빙정(氷精)을 찾는다는 것은 육지의 심마니가 산삼을 찾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빙정 중에서도 천 년 이상 오래 묵은 것들은 엄청난 압력에 의해 결정화되어 정(精)의 기운이 영기(靈氣)를 머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천빙령이었다.
북해인에게는 대환단이요, 자소단인 그 이름.
빙백신공(氷白神功)을 익히는 자에게 있어서 가히 무가지보나 다름없는 영약인 것이다.
북해빙궁의 직계혈족인 설풍 한씨들은 북해의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그들은 열두 살이 되기 전에 반드시 빙령지체(氷靈之體)를 이뤄 내야 했고, 북해 사람들은 아무리 곤궁한 상황이더라도 설풍 한씨들에게만큼은 기필코 천빙령을 가져다 바쳤다. 그들은 북해를 지키는 수호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전통도 한씨 남매의 대(代)에 이르러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북해의 상황이 열악해질 대로 열악해져 빙정을 탐사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
그런 빙정 중에서도 극상품이라 할 수 있는 천빙령은 이제 북해의 전설로 남아 버렸다.
목 놓아 울부짖어 봤자 과거의 영광이요 망령일 뿐.
단 하나 남은 천빙령을 한설현의 오라비인 한설백이 복용해 버렸으니 더 이상 북해에 천빙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설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찻잔을 매만지고 있는 조휘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북해의 꿈, 설풍 한씨의 비원을 이 눈앞의 사내가 이뤄 준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천빙령을 어떻게 알아보냐고요?”
끄덕끄덕.
조휘가 품속에서 예의 장부를 꺼내며 다시 말했다.
“소저께서는 소빙고 때문에 포양호를 벗어나지 못하시니 결국 저 혼자 사천당가로 갈 수밖에 없지요. 문제는 제가 천빙령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 음습한 당가 놈들이 속이려 든다면 눈탱이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한설현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천빙령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도 몰라요. 천빙령을 본 사람은 오라버니가 유일해요.”
“음.”
하루하루가 소중한 마당에 다시 안휘에 들러 한설백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
그때, 한설현이 별안간 뭔가 떠오른 얼굴을 했다.
“아! 천빙령이 빙공의 빙기(氷氣)에 반응한다고 했어요!”
“반응이요?”
“네!”
그럼 문제가 없었다. 초보적이지만 빙기의 발현 정도는 조휘도 충분히 흉내 낼 수 있었다.
조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분간 사업장을 열 개 정도로 축소 운영할 것입니다. 이미 장 부장에게 지시해 놓았으니, 장 부장이 안내하는 소빙고만 운용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호에 엄청난 파랑을 일으킬 조휘의 단독 사천행(四川行)이 결국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촉(蜀)의 개는 마른하늘만 보면 짖는다는 속담이 있다.
파촉은 촉산(蜀山)이라 불릴 정도로 산지가 많아 기후가 변화무쌍하고 비가 잦았다.
사시사철 짙은 운무로 뒤덮인 산지의 개들은 마른하늘을 볼 일이 없으니 해가 쨍쨍 뜨기만 하면 신기하여 미칠 듯이 짖어 대는 것이다.
구름 사이에서 드러나며 강렬히 내리쬐는 일광(日光).
항시 후덥지근한 습기로 고통받던 조휘가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어휴, 썩을.”
그동안은 마치 몸에서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았다.
햇볕이 이렇게도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조휘.
조휘는 풀숲의 한복판에서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은 후 얼른 신을 벗어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부르틀 대로 부르튼 발도 일광을 받자 마치 소독되는 기분이 들었다.
왈왈왈왈!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개가 숨어 있었는지 별안간 사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들은 떠오른 해가 신기한지 미친 듯이 짓고 있었다.
과연 속담은 리얼이었다.
한 달여를 걷고 걸어 겨우 도착한 사천성의 초입.
천상운차를 몰고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촉산의 좁디좁은 험로는 결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노폭(路幅) 자체가 너무 좁아 마차가 통과할 수 없는 곳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듯한 천애의 절벽 그 중심에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소로를 기똥차게도 뚫어 놓았다.
지금의 기술로 어떻게 그런 길을 뚫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참 중원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현대의 문명에 비해 엄청나게 낙후된 세계가 분명한데 어떤 측면에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
‘혹시 무공을 익힌 자들이?’
그런 엄청난 촉산의 험로들을 무공을 익힌 자들이 개설했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절벽을 올라탈 수 있는 벽호공(壁虎功)을 익힌 절정의 고수들이라면 위험천만하게 밧줄에 매달려 절벽을 조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 가만?’
그러고 보니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하는 데 무공을 익힌 강호인을 노가다꾼으로 고용할 수만 있다면 준공 기일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릴없이 밥만 축내는 무공 고수들이라면 흑천련에 남아돈다.
그놈들을 동원하는 것쯤이야 문제될 것도 없다. 어차피 해약(?)으로 흑천련 고위 간부들의 생사여탈권을 모두 쥐고 있는 마당이니 몇 마디 협박으로 해결될 터.
염상록이 가져다주는 해약이 끊겨 버리면 당장 두 왕(王)부터 벼락같이 달려와 애걸복걸할 것이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또 하나의 계획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조휘.
그때 소로 어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음?”
선두의 기수부터 눈에 들어왔다.
펄럭이는 깃발에는 ‘촉상(蜀商)’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어 등장한 노새(騾) 무리.
조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말과 당나귀의 교배종인 노새의 작은 몸집과 민첩함이라면 촉산의 좁은 소로를 통과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터.
호기심이 생긴 조휘가 상단의 행렬에 다가갔다.
정중히 포권하는 조휘.
“안녕하십니까.”
싱긋.
조휘가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시큰둥했다.
선두의 기수가 조휘의 위아래를 훑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시오.”
조휘가 예의 미소로 대답했다.
“제가 촉 땅은 처음이라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마침 상단의 호걸들이 지나가시는 터라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객으로 동행이 가능하겠습니까?”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이 머나먼 타지에서 현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여정에 엄청난 도움이 될 터.
수백 리를 되돌아갈 길도 현지인의 한마디에 수십 리로 단축될 수 있는 것이다.
촉상의 기수는 이런 일이 흔한 듯 여전히 퉁명한 얼굴로 가격을 제시했다.
“상단의 객이 되고 싶으면 은자 열 냥을 내고 참여하시면 되오.”
“은자 열 냥이요?”
와 씨 이런 날도둑놈들을 봤나.
누가 장사치 아니랄까 봐!
조휘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그때, 기수는 깎으려는 시도 자체를 없애 버렸다.
“열 냥이 아니면 우린 받아 줄 수 없소.”
“으음.”
은자 열 냥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조휘에게는 아니었다.
곧 조휘가 소매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기수에게 내밀었다.
상대가 금화를 꺼내 들자 기수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평범한 양민이 금화를 소지하고 다닐 리는 없는 터.
그제야 기수는 조휘가 허리에 차고 있는 조가철검을 발견하더니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 촉(蜀)의 첩첩산중에서 당당히 금화를 소지하고 또 내미는 자. 적어도 제 한 몸은 지킬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강호인이셨군. 실례가 많았소. 금화는 받은 것으로 하고 객으로 받아 주겠소.”
다시 금화를 조휘에게 내미는 기수.
과연 이들은 노련한 상인이었다. 상인으로서 강호인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 좋을 일이 없었다.
더구나 곧 철혈곡을 지나야 하는 상황.
한 사람의 무인이 아쉬운 판에 강호인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 철혈곡이오. 소협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소?”
“철혈곡? 거기가 어딥니까?”
“철혈장(鐵血莊)을 모르신단 말이오?”
“철혈장?”
그들 스스로가 철혈장이라고 칭할 뿐 사실상 철혈채(鐵血寨)였다.
그들은 촉산의 초입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산채로서 그 악명이 자자했다.
뻔히 정해진 통행료를 전해 받고도 물건이 탐이 나면 곧바로 안면몰수도 마다하지 않는 양아치들.
수틀리면 여인을 납치하기도 하고 상단을 몰살시키기도 하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스스로를 철혈마도(鐵血魔刀)라 칭하며 철혈곡을 지배하는 사내, 용응창.
기수에게 전해 들은 그의 무위는 놀랍게도 초절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기수의 설명을 모두 들은 조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천은 당가의 권속 아닙니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지 않았나요?”
기수는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당가는 우리 같은 상인들을 상대하지도 않소.”
“음? 당가는 상업 활동도 하지 않는 겁니까?”
“당가인들은 상인들의 물건을 매입할 때도 대리인을 보내 처리하오. 당가혈족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극소수요.”
“하!”
함께 사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도 직접 교류하지 않는다니?
폐쇄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좀 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당가는 사업장도 운용하지 않습니까? 가문이 유지가 안 될 텐데?”
“그들이 가문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오. 괜히 당가의 일에 휘말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기 십상이라.”
“죽는다고요?”
“당가의 일을 떠벌리고 다니는 자들의 태반은 실종되오. 물증은 없으나 심증이 그러한데 어쩌겠소.”
들어 보니 이건 공포로 군중을 지배하는 집단의 전형적인 특성이었다.
이를테면 북한의 절대 권력자들의 수법.
조휘는 사천당가라는 곳의 진면목을 대하면 대할수록 기분이 더러워지고 또 실망스러웠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자들이군요. 그래도 명색이 정파의 오대세가라는 작자들이 어찌 그렇게 양인들의 삶에 무관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협의를 모르는 자들에게 왜 정도(正道)라는 이름을 허락한단 말입니까.”
“헉! 이 사람이!”
“그 입 조심하시오!”
기겁을 하며 조휘를 말리는 상단 사람들.
무슨 당가(唐家)가 해리포터의 볼드모트냐!
조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아니, 제가 무슨 틀린 말을 했습니까? 감히 세가(世家)라 자처하는 자들이 지역 상인들의 곤경을 외면하고 제 안락만 누리려 한다면 협의를 말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정파라 불리면 안 되는 거예요.”
“허허!”
당가를 이렇게 함부로 언급하고 힐난하다니!
역시 외지인이라는 건가.
이와 같은 언사는 사천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쐐애애애애애액!
파팟!
조휘는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날아온 비도(飛刀)를 부드럽게 낚아채며 그 방향을 가늠했다.
저 멀리서 마치 한 마리의 독사 같은 날카로운 기세의 노인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과연 예사 입심이 아니라 여겼거늘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었구나.”
기수를 비롯한 모든 상인들이 일제히 경악의 얼굴로 털썩 엎드렸다.
“다, 당가!”
“당가의 귀인을 뵙습니다!”
짙은 흑의 사이사이로 수십 마리의 독룡(毒龍)과 독사(毒蛇)들이 진한 핏빛 수실로 수놓여 있었다.
그 신분이 가히 상상도 되지 않는 당가인(唐家人)이었다.
조휘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출발하기 전 분명 제갈운에게 당가의 사전 정보를 미리 들은 상태.
외원의 무사들은 그 직급별로 독사 한 마리에서 일곱 마리를 무복에 새겼고, 내원의 무사들부터 독룡(毒龍)을 두르게 되는데 그 역시 한 마리에서 일곱 마리였다.
독룡 일곱 마리가 바로 당가의 세가주(世家主).
한데 눈앞의 이 노인이 걸치고 있는 무복에는 그런 독룡이 몇 마리인지 세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이 노인네 이거 짝퉁 아니야?’
강호에는 반호(半豪)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 어설프게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으로 고수 행세를 하는 자들.
간혹 합비에도 남궁세가의 무인 행세를 하는 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어 하소연하는 자들이 세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의 노인을 그런 반호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기묘했다.
일단 손아귀의 통증.
웬만한 물리력으로는 타격조차 힘든 검천전능지체다. 한데 비도에 담긴 예기와 파괴력이 실로 상당했다.
더욱이 기세.
한 마리의 독사와 같은 예기가 온몸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전형적인 당가 무인의 특성.
저 날카로운 투기와 독기는 일반인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기세다.
한데, 정말 당가인이라면 저 수십 마리의 독사와 독룡은 뭐란 말인가?
당가의 세가주보다도 윗줄의 직급이란 말인가?
이렇듯 내심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조휘는 그저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상대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쨌든 자신에게 살수(殺手)를 펼친 자.
순간 조휘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흡!”
흑의 노인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상대가 마치 점멸하듯 깜빡이는 그 순간 자신의 옆구리 쪽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진 것이다.
츠캉!
“크헉!”
콰콰쾅!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날아가 저만치 나뭇등걸에 처박혀 버린 흑의 노인.
곧 그가 요독비(妖毒匕)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처참하게 찢겨져 있는 자신의 손.
단 일 검을 막았을 뿐인데 내부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어 또다시 짓쳐 오고 있는 삼검(三劒).
일견 단순해 보이는 삼검이었지만 흑의 노인은 상대의 검에 담긴 지고의 경지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놈!”
순간 노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뒤로 흐르더니, 곧 그의 신형이 팽이처럼 휘돌며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촤촤촤촤촤!
맹렬한 속도로 휘돌며 그 원심력을 이용한 암기들이 사방천지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 광경에 촉상의 기수가 대경하며 소리쳤다.
“모두 노새 뒤로 숨어!”
한데.
콰쾅!
엄청난 진각을 밟으며 조휘가 튀어 나가자 사방에 돌풍이 휘몰아쳤다.
남궁비전 천풍보(南宮秘傳 天風步).
제이식(第二式) 회령풍(回靈風).
엄청난 와류, 용권풍과도 같은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휘몰아친다.
적의 눈을 혼란케 하여 몸을 내빼기 위한 남궁세가 전통의 회피 보법이 비도를 막는 방어 보법이 된 것이다.
조휘는 격렬하게 움직여 보법을 일으키면서도 적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의 삼검(三劒)이 그대로 노인의 몸을 짓이긴다.
기다란 검상이 그려진 노인의 옆구리.
무복에 수놓인 몇 마리 독룡이 허리가 잘린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조휘가 조가철검을 회수하며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악랄한 노인네일세. 그 잘난 당가를 욕한 건 나 하나잖아? 그런데 왜 전부 몰살시키려 들어?”
노인은 자신의 옆구리가 쩍 벌어져 피가 꿀렁꿀렁 미친 듯이 쏟아지는 데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저 독기 어린 얼굴로 지혈하며 두 눈으로 분노의 광망만 쏟아 낼 뿐이었다.
“당가 일족임을 드러냈는데도 감히 대적하는 자가 있다니. 그 간담 한번 쓸 만하구나.”
조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노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노인이 문득 품에서 폭통(爆桶) 하나를 꺼내더니 입으로 물어 그 심지를 뽑자 하늘 위로 신호탄이 솟구쳤다.
삐이익!
노인이 묵묵히 폭통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네놈에게 일어날 일을 말해 주겠다. 먼저 본가의 독아십이수(毒牙十二手)가 네놈을 추적할 것이다. 독룡각(毒龍閣)은 후방에 천라지망을 펼쳐 지원하겠지. 물론 당가의 권역, 촉산의 모든 곡(谷)이 틀어 막힐 것이다.”
사천당가가 유명한 이유는 원한이 생기면 수백 배로 복수하는 그 강렬한 투쟁심에 있었다.
한데 그때 조휘의 머릿속에 검신 어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파문당한 자로구나.
‘네? 그게 무슨?’
저리도 온몸에 ‘나는 당가요!’라고 그득그득 티를 내고 다니는 인간이 당가인이 아니라고?
그럼 저 별난 흑의 무복과 품에서 꺼낸 폭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자의 손목을 자세히 봐라.
검신 어른의 말에 조휘가 노인의 손목을 살펴보았다.
참혹한 상처.
흔히 맥을 짚는 부분에 불로 지진 듯한 상처가 두툼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열결(列缺)과 경거(涇渠) 혈을 지나는 자리를 불(火)로 봉했다면 독혈(毒血) 경지에 이르렀다는 방증일 터. 거의 독인의 경지에 근접했던 자로구나.
독인(毒人).
독을 다루는 자라면 꿈에서라도 바라 마지않는 경지.
강호의 일반적인 경지라면 화경의 경지와 비슷한 경지일 것이고, 마인이라면 극마(極魔), 북해라면 빙인(氷人)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리라.
곧 조휘가 의문을 표시했다.
‘그런 경지로 보이진 않습니다. 이 정도라면 장 부장이나 장호 형님과 비슷한 경지입니다.’
-미욱한 놈. 저자는 단 한 올의 내공도 없느니.
‘예? 설마요?’
-저자의 움직임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느냐?
하긴 이상하긴 했다.
보법을 펼치고는 있었는데 마치 강시처럼 통통 튀어 다니는 듯한 모습이었다.
-독혈은 불(火)로 봉해졌으며 사지의 근맥 또한 잘렸구나. 당가(唐家)가 그의 무공을 회수한 것이다. 저런 몸으로 이만한 움직임이라니 실로 대단한 근성을 지닌 아이로다.
“사지근맥이 잘렸다고요?”
조휘가 육성으로 당혹감을 내비치자 흑의 노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저놈의 모든 움직임에는 당가(唐家)의 무리(武理)가 단 한 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문제자의 전형적인 특성이지. 평생을 닦아 온 기예를 지워 내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수반하는 터. 그 집념과 절제력이 실로 남다른 후배다. 그의 사연을 위로하고 보듬어 주도록 하거라.
‘아니 어르신…….’
-저 아이의 독심(毒心)은 그저 겉모습일 뿐. 저놈의 내면, 그 상처받은 진의(眞意)를 살펴보고 싶구나.
‘…….’
지금껏 검신 어른은 본인의 염원을 자신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흑의 노인의 처지가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
하는 수 없이 조휘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허리에 찼다.
“당가의 파문제자시죠?”
“노, 놈!”
지극히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흑의 노인.
“열결과 경거 혈을 지나는 자리를 불로 봉했다면 그 피가 독혈이었다는 뜻. 당가도 미친놈들이네요. 독인의 경지에 근접한 자를 파문하다니.”
“그, 그걸 어떻게?”
독혈(毒血).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면 당가로서는 큰일이었다.
끊임없이 독을 주입하여 인체의 모든 피를 독수로 만드는 이 연공법은 강호에서 금기시되는 사공(邪功).
정파를 자처하는 이상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는 당가가 지극히 폐쇄적인 이유와 맞닿아 있는 부분.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집안 식구끼리 사지근맥을 자릅니까? 게다가 노인장은 그런 가문이 뭐가 좋아서 이렇게 비호해 주는 거죠?”
갑자기 조휘가 하늘을 가리켰다.
“맹의 신호탄도 삼 개월마다 표식이 바뀐다고 들었는데 그 폭통도 허세죠?”
“…….”
조휘의 연이은 팩트 폭력에 흑의 노인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아니 당가에 의해 사지근맥까지 잘린 마당에 그 방향으로 오줌도 싸지 말아야죠. 뭐가 좋다고 사천도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사십니까.”
“그만! 그만 말소리를 줄이게.”
“이미 기막을 펼쳐 놓았습니다만?”
“허!”
기막(氣幕)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화경에 이르렀다는 소리다.
저 나이에?
아무리 많게 보아도 이십 대 중반을 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강호란 왕왕 상식을 뒤집는 자들이 출현하지 않은가.
“거 술 한잔합시다.”
“……술?”
조휘가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의 봇짐을 뒤적이더니 한빙주 한 병을 꺼내 오다 촉상(蜀商)의 기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호의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 알겠소.”
황급히 포권하는 기수.
조휘의 엄청난 무위를 직접 견식한 그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조휘는 흑의 노인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부우우우웅!
두 손에 새하얀 한기(寒氣)를 일으키더니 그대로 한빙주를 감쌌다.
“비, 빙공?”
이 젊은 놈의 고절한 검초를 온몸으로 체험한 마당이었다.
한데 검수(劒手)가 빙공이라?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한참 일렀다.
무뚝뚝한 얼굴로 술을 건네고 있는 조휘.
술병을 받아 든 흑의 노인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곧 술병을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축축한 날씨 탓에 술 한 모금이 간절했던 것.
“크윽! 허! 허억!”
그윽하고도 청량한 주향이 차가운 한기를 만나자 그 맛이 천하의 일품이었다.
흑의 노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술맛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런 맛있고 시원한 술은 생전 처음!
“아니! 이 어른이! 그걸 혼자 다 먹으려고요?”
“아, 미안하네.”
“거 죄송하긴 저도 마찬가지라. 한번 봅시다.”
조휘가 흑의 노인의 상처를 살피려 하자.
“아닐세. 괜찮네. 이 정도는 상처라 할 수도 없지.”
조휘는 사양하는데 계속 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 약이라도 바르시죠. 제법 좋은 겁니다.”
이 총관이 챙겨 준 봇짐 속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조휘가 내민 금창약을 받아 든 흑의 노인이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
곧 그가 묵묵히 상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당가를 잘 아는가?”
조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잘 모릅니다.”
그 말에 흑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인의 존재도 아는 놈이 당가를 모른다?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긴 하죠.”
“……부탁?”
조휘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네. 전 천빙령이 필요하거든요.”
“천빙령?”
흑의 노인도 천빙령의 존재는 잘 알고 있었다.
천빙령은 당가삼신기(唐家三神器) 중에서도 그 유명한 멸혼독(滅魂毒)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재료였다.
흑의 노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네.”
“왜죠?”
흑의 노인이 더욱 착잡해진 눈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옛날 함부로 독벽(毒壁)에 도전했다고 삼남(三男)의 사지근맥과 거근을 자르고 독혈까지 봉한 자가 현 세가주의 할아비라네.”
“허……!”
문파의 비술을 회수한다는 명분이라면 독혈과 사지근맥까지는 이해가 된다.
한데 거근을 자르다니?
그것은 밖에서 씨도 뿌리지 말라는 소리다.
그 살벌한 처사에 조휘는 당장 욕이 튀어나왔다.
“와 씨 진짜 개새끼들이네.”
“갈!”
그런 험한 일을 당한 마당에 가문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당가를 욕만 하면 저리도 화를 내는 건지.
“어쨌든 포기하게. 차라리 북해를 직접 방문하는 것이 더 빠를 걸세.”
조휘가 묘한 웃음과 함께 봇짐 속에서 한빙주 한 병을 더 꺼내며 입을 열었다.
“한 병 더 드리죠.”
“고, 고맙네.”
조휘는 한빙주를 건넨 후 쉬지 않고 흑의 노인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 댔다.
당가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 불리며 독벽(毒壁)에까지 도전했던 절대독인(絶大毒人)의 후보 당인상(唐人上)은 그렇게 조휘에게 모든 정보를 탈탈 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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