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26
26 章>
나이가 지천명(知天命)쯤에 이르면 누구나 스스로의 삶을 기구하다 여기게 된다.
연세 꽤나 잡수신 어른들이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된다느니 하는 소리는 조휘 역시 현대에서 흔히 듣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 흑의 노인, 당인상(唐人上)의 인생은 진정으로 기구했다.
강호에서 독과 암기를 쓰는 자들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롭고 위험한 자들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는 명확했는데, 그것은 바로 소지할 수 있는 독과 암기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대일 생사결전의 경우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허나 집단 난전에서 고군분투하다 더 이상 뿌릴 암기와 독이 없다면?
비참하게 죽거나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가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결국 그들이 찾은 것은 체내의 피를 독화(毒化)시켜 독인(毒人)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로 간단치 않았다.
오랜 세월 극독을 음용하며 중독을 버틴다는 것은 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엄청난 고열.
온몸의 장기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고통.
최소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를 버틴다는 것은 탈인간급의 체력과 극한의 정신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돈(金).
독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재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희귀했다.
당연히 그런 독을 매일매일 공급해야 하는 당가 입장으로서는 독인의 후보를 선정하고 양성하는 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가는 한 대(代)에서 독인의 후보를 두 명 이내로 제한했다.
안타깝게도 당인상은 그 후보에 끼지 못했다.
독인의 후보에 선정된 자들은 다름 아닌 그의 배다른 두 형인 당천상과 당지상.
당가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는 찬사와 기대를 받고도 모종의 정치적인 이유로 독인의 후보에서 배제된 것이다.
하지만 기연은 하늘이 점지한다고 했던가.
당가의 대표적인 극독인 여당홍(麗唐紅)의 재료 독지주.
과거 당인상은 그런 독지주를 얻기 위해 남만의 개암묘굴로 출정했었다.
한데, 당인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독지주가 아니라 인면지주(人面蜘蛛)였다.
독지주가 홀로 수천 년 묵으면 인격이 형성되어 영성(靈性)을 띠게 되는데, 그 얼굴이 마치 사람의 생김새와 비슷하다 하여 인면지주라 불렸다.
장장 사흘이 넘게 이어진 엄청난 사투.
함께 출정한 당가의 고수들이 모두 죽고 당인상 역시 회복 불가의 상처를 입어 틀림없이 죽었다고 여긴 그때, 마침내 인면지주가 쓰러졌다.
죽음의 이르러 본능적으로 베어 문 인면지주의 목덜미.
수천 년 묵은 인면지주의 내단과 독액이 그대로 당인상의 체내에 쏟아졌다.
장장 삼 개월 동안 이어진 융해.
그동안 그는 독인을 넘어 절대독인 직전의 경지인 독벽(毒壁)을 돌파하기에 이르러 있었다.
한데 그때, 선발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당가의 고수들이 개암묘굴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처음으로 본 것은 인면지주의 독액에 의해 본래의 형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식된 당가 고수들의 시체와 동굴의 중심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당인상이었다.
이로 빚어진 오해.
당인상의 배다른 형들은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로써 당인상은 인면지주를 가문으로 회수하지 않고 독식한 자, 그 파렴치한 일을 숨기기 위해 가문의 혈족들을 모두 죽여 입막음한 폐륜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당인상은 모든 일을 사실대로 고하고 자신의 경지가 독벽에 이른 것은 기연이었다며 수차례 항변했지만 철저하게 묵살되었다.
결국 당가는 자신들의 최고 기재에게 파문이라는 극형을 선고했다.
욕망에 눈이 멀어 혈족을 모두 죽이고 가문의 재산을 홀로 독식한 자.
그렇게 절대독인이 되어 본들 그 어떤 당가인이 그를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배다른 형인 당천상은 손수 절대독인의 상징인 절대독룡포를 지어, 사지근맥이 잘린 채 기어서 가문을 나가는 당인상에게 입혀 주며 낄낄거렸다.
“와 인성 무엇…… 사람 새끼 맞나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 양 조휘는 열불을 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술이 다 깰 지경.
아니 아무리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기로서니 독벽에 이른 가문의 초고수를 축하해 주지는 못할망정 사지를 찢어 쫓아내다니!
허나 당인상의 얼굴은 한없이 담담했다.
골수에 치민 그 한(恨)조차 오랜 세월 앞에서는 희미하고 무력했기 때문.
조휘는 그의 문드러진 양 손목을 바라보며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절대독인을 목전에 두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상실감을 그 어떤 말로 위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도대체 그 옷은 왜 계속 입고 다니는 겁니까?”
절대독룡포(絶大毒龍袍).
수십 마리의 독사와 독룡이 휘감긴 절대독인을 상징하는 무복.
허나 당인상에게는 그저 모략과 비웃음, 간교함과 배신의 상징일 터였다.
“이 옷은 내게 허락된 유일한 당가(唐家)일세. 이 옷마저 벗는다면 그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처연하게 웃고 있는 당인상.
그 진지한 얼굴, 그 처절한 삶의 몸부림에 조휘는 진정으로 가슴이 시려 왔다.
누군가의 삶을 반추하면서 이토록 가슴이 아팠던 것은 조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죠. 당가로.”
“허허…….”
조휘가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나는데도 그저 허허로운 웃음만 흘리고 있는 당인상.
“소용없다지 않았는가.”
“뭘요? 뭐가 소용없는데요?”
당인상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난 보다시피 파문제자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으이.”
조휘가 씨익 웃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잔악한 독수(毒手)도 마다하지 않는 자, 뭐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충분히 소문의 그 ‘당가’입니다.”
“…….”
“어르신은 아직도 여전한 당가라고요.”
순간 조휘의 그 말에 당인상은 얼굴이 붉어지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평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굳이 없었다.
허나 상대는 화경에 이른 강호인.
그런 고절한 무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감회이자 격동이었다.
“이 늙은이를 더 한심하게 만들 참인가.”
조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치며 말했다.
“하! 그냥 저들에게 보여 주세요.”
“뭘 말인가?”
조휘의 두 눈에 새하얀 백광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다.
“파문(破門)으로도 결코 무인의 혼(魂)과 긍지(矜持)를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란 말입니다.”
우두커니 서서 석상처럼 굳어져 버린 당인상.
조휘의 그 한마디.
그 말에 지옥과도 같았던 자신의 지난 세월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다.
그것은 그의 처절한 인생에 있어서 위로 이상의 깊이 있는 울림이었다.
* * *
당가타(唐家陀).
첨탑처럼 무수히 솟아오른 전각 무리를 조휘는 기이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햐, 지독하네.”
구릉에 서서 한눈에 바라본 당가타는 마치 요새와도 같았다.
마치 성벽처럼 거대한 담벼락이 당가타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위를 날카로운 기도의 무사들이 물샐틈없는 체계로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살벌한 모습은 ‘철권왕의 장원’이나 ‘제왕의 남궁세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봤자지.”
피식 웃다가 그대로 가부좌를 트는 조휘.
그렇게 갑자기 조휘가 운기행공을 하려 하자 당인상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가득 물들었다.
“설마 홀로 당가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조휘의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이건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된 방법이거든요. 지켜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곧바로 두 눈을 반개하는 조휘.
점점 그의 몸 주위로 새하얀 기의 포말이 너울거리기 시작하자 당인상이 경악했다.
“진무화(眞武花)!”
신비로운 백색의 아지랑이.
피어올라 흩날리는 그 경이의 포말들은, 당인상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감동이었다.
이 젊은이의 경지는 진실로 화경이었다.
전신혈맥이 단전화되어 공단이 되는 경지.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룩할 수 없다는 깨달음의 극한 화경이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어떻게?
지닌바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길래?
그러나 그의 놀람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부서지면 당가주가 가장 열받아 할 만한 곳이 어딜까요?”
어느새 일주천을 마친 조휘가 구릉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저기 저 많은 전각들 중에 뭐 독이나 암기를 가득 쌓아 놓은 창고나 가문의 보물을 모아 둔 그런 곳 없습니까?”
한껏 의문이 떠오른 눈으로 대답하는 당인상.
“당가의 구중심처라면 독룡장이 으뜸이긴 하네만…….”
“독룡장(毒龍莊)?”
“당가의 모든 독과 암기를 제조하는 곳이라네.”
조휘는 곧바로 안력을 돋워 당가타를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오호! 저기군요!”
동서남북 사방(四方)의 첨각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독룡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하면서도 칙칙한 한 전각을 바라보며 조휘는 그곳이 독룡장이란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맞네. 한데?”
그때였다.
쿠쿠쿠쿠쿠쿠쿠.
거칠게 진동하는 대지.
그렇게, 막대한 기파(氣波)가 조휘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아!”
강력한 충격파에 당인상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마치 천재지변처럼 구릉 전체를 휘몰아치는 엄청난 기의 파동!
이런 존재감은 당인상의 인생,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였다.
한 인간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어찌 이토록 광대무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설마?’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절대의 무혼(武魂)?
그의 짐작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 반개하고 있던 조휘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시리토록 투명한, 소름 끼치도록 새하얀 백안(白眼).
“허억!”
한 인간의 무혼이 눈빛에 아로새겨지는 경지.
그 명백한 절대(絶大)의 증거 앞에서 당인상은 기함하고 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조차 소원해 마지않았던 경지, 절대독인!
그와 동등한 경지를 이 청년이?
순간, 눈부신 광휘와 함께 조가철검이 휘영청 떠오른다.
쐐애애애애액!
곧 검(劒)은, 엄청난 거리를 좁히며 빛살처럼 나아가더니 광대무변한 기운을 꿀렁꿀렁 쏟아 냈다.
의형지도(意形之道).
이기어검술(以氣馭劒術).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劒) 후이식(後二式).
창궁용조검절(蒼穹龍爪劒絶).
새하얀 섬광을 일으키며 나타난 거대한 발톱!
세상에 현신한 제왕의 발톱은 그대로 독룡장 전체를 짓이겼다.
콰콰콰콰콰쾅!
창궁용조검절의 막강한 검력, 그 제왕의 힘은 마치 피조물을 짓이기는 파괴의 신처럼 잔학하기 그지없었다.
단 일검(一劒).
저 거대한 독룡장이 단 일검에 의해 참혹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풍진강호를 살아오며 더 이상 겪을 경험이 없다고 생각한 당인상이었다.
한데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와르르르르!
통째로 무너지고 있는 독룡장.
한데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이 열꽃과도 같은 쾌감은 또 뭐란 말인가.
텁!
어느새 조가철검을 회수한 조휘가 차가운 얼굴로 구릉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독룡장 말고는요. 그다음은 어디죠?”
갑작스런 급습에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적을 찾는 당가의 무사들.
그러나 그들은 적이 이토록 멀리 있다는 것을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당인상은 이 모든 것이 한 인간의 신위라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이 절대.
그 위대한 이름의 실체였단 말인가.
“그다음은 아마도 영비각(永秘閣)이겠지. 당가의 모든 역사와 비술이 그곳에 있네.”
조휘는 묵묵히 당인상의 시선을 쫓아 따라갔다.
“음. 어딘 줄 알겠습니다.”
조휘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름보 하나 제대로 구해 버렸다.
영비각을 향해 검을 곧추세우던 조휘가 별안간 검을 다시 회수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에야 기습적인 일격이라 자신의 이기어검에 담긴 검식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두 번째부터는 다르다.
당가 역시 강호의 무파(武派)이자 오대세가의 일원.
이제부터는 공격에 대비할 것이고, 이는 조가철검에 담긴 제왕의 검력을 결국 알아본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불필요한 분란을 자초하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천검류의 검식을 쓸 수는 없었다.
강서성에서 흑천련을 공격할 때 이기어검에 천검류의 검식을 담았다가 그 탈력감에 기절할 뻔했던 마당이었다.
천검류는 강호의 검식과는 궤를 달리했다. 소모되는 내공과 정신력, 의념의 총량 자체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기어검 뒤치기(?) 후 협상 전략은 가장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미 강서에서 그 강력한 효과가 입증된 마당.
천빙령을 내놓지 않는다면 계속 전각을 부수겠다고 협박하면 지들이 버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흑천련의 때와는 다르다.
같은 오대세가를 공격하면서 남궁세가의 무공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
아쉽지만 이 방법은 더 이상 사천에서 쓸 수가 없었다.
검식을 출수하다 말고 생각에 골몰하는 조휘가 의아했던 당인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가?”
“아, 별거 아닙니다. 이 근처에 괜찮은 객잔 하나 소개시켜 주시죠.”
“객잔?”
옷을 툴툴 털던 조휘가 먼저 앞서 걸어가며 손을 휘휘 저었다.
“생각 좀 정리하려고요.”
* * *
무림맹 총군사 제갈찬휘는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업무량이 많고 골머리를 썩는 일이 생기더라도 늘 군사부(軍師部) 부하들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맹주와 그 휘하의 수뇌부들과 거칠게 의견 충돌을 하면서도 인상 하나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끝까지 자신과 충돌했던 자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또 한 번 설득하고 때론 사과하는 그 모습은 마치 불자(佛者)를 방불케 했다.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본 부하들은 그를 지극히 존경했다.
언제 어디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지혜로 맹을 이끄는 자.
한데, 그런 그가 이처럼 당혹해하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놈!”
그의 입에서 이처럼 거친 욕설이 흘러나온 적이 언제 또 있었단 말인가.
내려 읽어 가는 서찰, 그 보고서 속 내용은 너무도 황당했다.
‘내 당장 영(英)이 이 녀석을!’
제갈영은 뛰어난 학식과 무공으로 최연소 내원주의 자리에 오른 녀석이다.
그래서 너무 오냐오냐했을까?
운(雲)이 놈의 객기를 말리러 간 녀석이 오히려 함께 동조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원주라는 막중한 직무를 내팽개치고 강서에서 돌아오지도 않겠단다.
게다가 뭐?
가문의 모든 금화를 강서로 보내라?
그래 봐야 한낱 상단에 불과한데 거기에 가문의 모든 재화를 쏟아붓겠다고?
그러나 곧 제갈찬휘는 서찰을 내려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강서성에서 펼쳐지고 있는 조가대상회의 활약.
제갈영은 그 활약상을 꼼꼼하게 설명해 놓았고 이는 제갈찬휘에게도 점점 놀라움으로 다가갔다.
‘그 흑천련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가 포양호의 절반 이상이나 차지했단 말인가?’
흑천련이 어떤 놈들인가?
그야말로 돈에 환장한 금귀(金鬼) 같은 놈들이다. 그런 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아무 마찰 없이 곱게 나눠 줄 리가 없었다.
그 말인즉 조가대상회의 회장이라는 작자에게 남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
그것이 실력 행사가 됐든 협상이 됐든, 흑천련의 수뇌부들을 움직일 만한 강력한 동기가 없었으면 결코 그런 수완을 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남궁…….’
분명 조가대상회는 남궁의 권역 안에 있는 상단이라고 했다.
이 서찰의 내용이 진정으로 사실이라면 남궁세가가 일개 가문의 힘으로 안휘를 넘어 강서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소리지 않은가?
이 일이 고착화된다면 더 이상 남궁은 세가(世家)가 아니었다.
남궁회(會)나 남궁맹(盟)쯤으로 불러야겠지.
이는 맹의 통제를 벗어난 심각한 사안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다 함께 모여 맹(盟)을 이룰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도(正道)라는 강력한 연대감과 동시에 철저한 균형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가 이를 무시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두 개의 성(省)을 차지한다면 이 균형이 무너진다.
소림과 무당, 화산이 힘이 없어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
맹의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가주이신 형님께서 왜 이 서찰을 굳이 자신에게도 보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서의 은봉령주도 더 이상 소식을 전해 오지 않고 있다.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불길했다.
제갈찬휘가 서찰을 손에 쥐고 맹주전으로 향했다.
* * *
때 아닌 천마성(?)의 급습을 맞이한 당가타는 분주했다.
무너져 내린 독룡각을 쳐다보고 있던 당가의 수뇌부들은 한결같이 당혹해하고 있었다.
“……폭약인가?”
목격담에 따르면 새하얀 빛살과 엄청난 폭음이 들려오며 독룡각이 으깨졌다고 한다.
아무리 이들이 강호의 무인이라고 하나 그와 같은 현상을 일으킨 것이 무공(武功)이라고는 단번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태상가주(太上家主) 당천상의 물음에 현 당가주인 당무호가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폭약이었다면 폭흔이 남아 있었을 겁니다. 폭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태상가주 당천상의 날카로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폭약이 아니다?”
한껏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무너져 내린 독룡각을 다시금 훑어보는 당천상.
단 일격에 저만한 파괴력을 낼 수 있는 힘이 폭약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단 하나, 강기(罡氣)다.
오직 강기만이 눈앞에 펼쳐진 이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천마성의 주교급 마두가 쳐들어왔다는 뜻인데 어떻게 적을 발견한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무리 고절한 마공을 지닌 마두라고 해도 이토록 철저하게 방비하고 있는 곳을 제집 드나들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부의 적인가?’
간자를 의심해 보려고 해도 마뜩치가 않았다.
당가는 철저한 폐쇄성으로 유명한 곳. 당가의 역사 이래 간자(間者)는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만약 간자가 존재한다고 해도 강기를 발현할 수 있는 화경의 고수라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특히나 당문의 고수라면 반년마다 열리는 독룡회(毒龍會)를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때 수뇌부들은 제자들의 성취를 가늠하기 위해 독공으로 내부를 살펴본다.
당가는 그런 독룡회를 통해 제자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위계를 정하며 내부를 결속시켰다.
“피해는 얼마나 되느냐.”
“경미합니다. 어차피 완성된 모든 독(毒)은 은강병(銀鋼甁)에 보관하지 않습니까. 여당홍을 제조하기 위해 담아 둔 독수(毒水) 몇 독 깨진 것이 전부입니다. 독룡각이야 다시 세우면 그만입니다.”
큰아들의 그런 설명에도 당천상은 마음이 개운해지지가 않았다.
피해가 경미하다고 해도 이것은 기본의 문제였다.
천마성의 급습에 아무런 대비도 못 했다는 점과 적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은 차후에 크나큰 위기로 닥칠 수 있는 문제.
“일단 가문의 모든 독수(毒手)들을 모아라.”
아버지의 그런 명령에 당가주 당무호가 강렬한 눈빛을 빛냈다.
“간자가 있다면 은밀히 처리할 일입니다.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당천상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감히 애비의 명을 거역할 셈이냐?”
허리를 숙이고 있던 당무호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원로원의 결정에 의해 태상가주로 물러난 아버지였지만 거의 수렴청정을 하다시피 가주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었다.
덕(德)이 없는 자.
소싯적 아버지는 당가타의 모든 고수들이 보는 앞에서 기어가는 자신의 동생에게 절대독룡포를 입혀 주며 낄낄거렸다.
그 후 가주의 위(位)에 올라 보여 준 그의 행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독한 편협함과 철저한 자기 사람 챙기기.
더구나 원로원의 눈치도 보지 않고 축첩(畜妾)을 일삼았고 가문의 재산을 쓰는 것도 독단적으로 행사했다.
결국 당천상은 원로원에 의해 반강제로 가주 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당가 역사상 최단 기록의 가주라는 불명예였다.
그런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사실상 명예직인 태상가주였지만 그는 진실로 태상(太上), 상왕처럼 굴었다.
“가문을 이끄는 자가 어찌 함부로 혈족과 수하들을 공개적으로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가문을 따르는 이들의 충심과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못난 놈! 백주대낮에 모든 방비가 뚫리고 가문의 심처가 타격을 당한 마당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언제고 이와 같은 일은 또다시 일어날 터! 혈족들의 평판과 원로원의 후환이 두려워 일을 그르친다면 그 어찌 가주라 할 수 있겠느냐!”
마침내 당무호는 결심했다.
더 이상 가주의 권위를 향한 아버지의 수렴청정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무호가 품에서 오독령인(五毒令印)을 꺼내 들었다.
당가비전의 절대오독(絶大五毒)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는 자는 당가주가 유일하다.
“불허(不許)! 독수들의 소집을 오독령으로 불허하겠소!”
가주의 권위를 앞세우는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
그것은 당천상의 열등감에 더욱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이, 이런 오만방자한 놈! 감히 애비에게 그 알량한 오독령으로 반기를 든단 말이냐?”
알량한 오독령?
태상가주의 그 말에, 곁에 있던 혈족들은 한결같이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당가의 독룡포를 입고 있는 자가 오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당씨(唐氏)임을 부정하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당무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상가주를 뫼셔라!”
“충!”
자신의 곁으로 독수들이 다가오자 당천상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이 불효막심한 놈이 감히!”
그때, 외원의 독수 하나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신법을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충! 가주께 보고드립니다!”
당무호가 신색을 바로하고 엄정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외원의 독수는 연신 태상가주인 당천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서 말하라!”
뭔가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이었다.
“독조 어른…… 아, 아니 당인상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당천상의 얼굴이 야차처럼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독조(毒祖)?”
아직도 당인상을 사사로이 흠모하며 감히 파문제자를 독조 운운하는 놈이 있다고 들었다.
그 옛날 절대독인에 근접했던 그는 많은 독수들의 우상이었던 것.
당천상이 외원의 독수를 마치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감히 파문당한 놈을 독조 운운하다니! 네놈은 당가의 위계와 법도가 우스운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죽여 주십시오!”
“오냐! 내 네놈에게 손수 당가의 법도를 일러주겠다!”
“…….”
그렇게 당천상이 외원의 독수에게 출수하려고 하자 당무호는 다시금 수하들을 재촉했다.
“어서 모셔 가지 못할까!”
“존명!”
“충!”
가주 직속의 독수들이 자신의 두 팔을 구속하자 당천상이 눈빛에 점점 독기가 흘러나왔다.
“이 새끼들이! 감히 본 좌를! 이 태상가주를 욕보인단 말이냐! 네놈들이 지금 당장 할 일은 당가타에서 파문제자를 쫓아내는 일이다! 이것 놔라! 놓으란 말이다!”
그때, 당무호가 외원의 독수에게 명령했다.
“숙부님을 만나겠다.”
“뭐, 뭣이!”
기절할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당천상.
갑자기 그의 태도가 일변했다.
“가주!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오! 어찌 파문제자를 다시 가문의 안뜰로 들인단 말이오!”
가주를 향한 갑작스러운 공대(恭待).
사사로이는 아들이지만 염연한 가주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아들이 내민 오독령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반개한 당무호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자신의 숙부가 처참하게 사지가 찢겨 기어가는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당무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어서 숙부를 뫼셔라!”
“충!”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저 멀리서 두 인영(人影)이 눈에 들어왔다.
당당히 당가의 절대독룡포를 걸치고 있는 노인.
그러나 세월의 풍상 앞에서 그는 힘없는 노인네에 불과했다.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당인상.
당무호가 눈시울을 붉히며 예를 표하고 있었다.
“숙…… 부님…….”
당인상이 감회 어린 눈으로 당가타를 둘러보고 있었다.
산의 비탈면을 깎아 독초를 재배하고 있는 암초전(暗草田).
독공의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독수들이 연기로 몸을 소독하는 목연터(木煙場).
담벼락 응달에 낀 정겨운 이끼들과 그 아래에 소담스럽게 핀 초아홍까지.
기십 년이 지났지만 가문의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곳.
그렇게 당인상은 뜨거운 감흥이 밀려왔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으며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이, 저 당천상이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꼴은 뭐냐?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온 게야!”
충혈된 눈으로 발악하듯 외치고 있는 당천상.
당인상은 그런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님께서 손수 지어 주신 옷이지 않소. 그런 형제의 우애를 어찌 벗을 수 있겠소이까.”
“…….”
당인상이 당가의 당대 가주, 옛 조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오늘 당가(唐家) 일족의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오 형님.”
“……그럼 무슨?”
조휘가 빙그레 웃으며 당무호에게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조가대상회의 조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무호는 조휘의 인사에 마주 포권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거리낌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조가대상회?
당가주가 한낱 상인을 마주한 것은 당가의 특성상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당무호는 조휘를 향한 시선을 거두며 자신의 숙부를 쳐다보았다.
“숙부님. 그간 어디에 계셨단 말입니까. 천독령의 제자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숙부님을 찾아다닌 줄 알고는 계십니까?”
“뭣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당천상.
당가의 최고 정예라 할 수 있는 천독령(天毒鈴)의 제자들이다. 그놈들조차 당인상을 흠모해 왔단 말인가!
부들부들.
저 빌어먹을 놈의 그림자는 아무리 지우려고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열등감의 그림자가 또다시 당천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 이것 놔라! 날 잡을 것이 아니라 당장 저 파문제자를 구속하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이자 가문의 법도다!”
“거참. 당가의 일원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래두 그러시네.”
갑작스런 조휘의 음성에 당천상은 더욱 발광했다.
“당가타의 담은 장사치 따위가 넘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썩 꺼지거라!”
“뭐래. 가주도 아니면서.”
조휘가 피식 웃으며 당천상을 무시하더니 다시 당가주 당무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가의 철광원석을 사고 싶습니다.”
“……철광원석?”
풍부한 철의 대지 사천(四川).
사천에는 질 좋은 철광석을 캘 수 있는 노천광산이 널려 있었다.
본디 광산은 제국에서 관리하는 것이 황법이나 사천의 험한 지형적 특성과 성도에서 멀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광산을 당가 일족이 위임 운영하고 있었다.
말이 위임 운영이지 사실상 사천의 광산 대부분이 당가의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바로 사천당가가 별다른 사업을 하지 않고도 폐쇄적으로 가문을 운영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불가(不可). 철광원석이나 주괴를 상인에게 판 예는 지금까지 없소. 전량 황실과 장군부에 납품하는 것이 우리의 오랜 원칙이니 돌아가시오.”
조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하군요.”
갑자기 품에서 책자를 꺼내는 조휘.
곧 조휘가 책자를 줄줄 읽어 내려가자 당무호의 안색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진다.
“작년 중양절 전후로 무림맹에 철검 완성품 이천 자루, 강철주괴 칠만 근 운반하셨네요. 음? 소림에 철주(鐵珠) 구천 근은 또 뭡니까? 어? 상단과의 거래도 있는데요?”
“…….”
“도강언(都江堰)의 적호상단에게 강철주괴 이만육천칠십 근!”
맹과 소림에 납품한 철이야 양이 양이니만큼 소란스럽게 운반할 수밖에 없었으니 알고 있는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강호방파에게 철과 병장기를 보내는 것은 관에서도 눈감아 주는 편.
하지만 민간과의 거래만큼은 관에서 확실히 제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호상단과의 거래는 지극히 은밀하게 진행한 터였다.
그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정확한 거래량까지 파악하고 있었으니 당무호로서는 기함할 일이었다.
그러나 세가를 이끄는 가주답게 그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일 없소.”
당가주가 태연자약하게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지만 조휘는 음흉하게 웃을 뿐이었다.
텃새 오졌던 사천의 정보상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정보다.
정보상의 생명은 정보의 신뢰성.
이 정보가 틀릴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조휘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안휘철방에서 소모되는 모든 철광원석은 곽구현의 철광을 소유하고 서주자사로부터 공급받고 있었다.
한데 강서로 진출한 조휘가 점점 막대한 양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서주자사 방불여로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철방을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 원석 공급선의 다변화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뭔가 수틀려서 방불여가 원석의 공급을 중지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철방의 운영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순간, 조휘가 무너져 내린 독룡당을 응시했다.
“저거 누가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뭐라?”
묘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조휘.
“거래를 약속해 주신다면 흉수의 정체를 알려 드릴 수도 있는데.”
순간 이를 지켜보던 당인상은 소름이 돋았다.
조휘의 엄청난 이기어검이 독룡각을 부수는 모든 광경을 지켜본 마당이다.
어찌 사람이 저리도 뻔뻔할 수가!
조휘는 그 깨달음의 극한, 피륙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강의 경지라는 절대경을 이룩한 무인이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와 같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 힘들 지경.
하지만 실력과 인성은 별개란 건가.
그때, 당가주 당무호가 눈짓하자 주변에 있던 모든 독수(毒手)들이 조휘를 에워쌌다.
“이건 또 무슨 뜻입니까?”
당가주 당무호의 두 눈에는 은은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자신과 독대하여 거래하기 위해 오래전에 실종됐던 숙부를 데려온 것만 봐도 보통 약은 놈이 아니었다.
한낱 상인으로 치부될 인사가 아닌 것이다.
“무너져 내린 독룡각을 한 번 본 것만으로 흉수를 운운한다는 것은 네놈도 한통속이나 진배없다는 뜻. 감히 당가타의 안뜰에서 그런 흰소리를 늘어놓다니 진정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구나.”
그때 당인상이 나섰다.
“가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당무호가 진득한 살기를 내려놓았다.
“말씀하시지요. 숙부님.”
당인상이 당가타의 서쪽 담을 넘어 멀리 시진(市塵)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조가대상회가 원하는 것은 정기적으로 달포에 오십만 근 이상의 철광원석을 당가와 거래하는 것이오. 물론 값도 후하게 쳐주겠소. 시세의 두 배에 매입하지.”
달포에 오십만 근?
그것도 정기적으로?
일 년으로 따지면 당가의 가장 큰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장군부에 납품하는 규모의 수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 엄청난 양을 시세의 두 배로 모조리 매입한다?
가문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꿀처럼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그런 엄청난 양의 거래를 관(官)의 이목을 피해 유지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했다.
엄청난 수레의 행렬이 매일매일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한데 그다음 말이 더더욱 놀라웠다.
“가진헌 장군을 설득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책임지겠소.”
“예?”
명화대장군 가진헌.
사천성 군부의 절대 권력자인 그를 일개 상단이 책임지고 설득하겠다고?
무슨 본인들의 수완이 중원제일을 다투는 천화상단(天華商團)이나 만금상단(萬金商團) 정도쯤 된단 말인가?
“그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소.”
사흘 전 조휘와 함께 사천장군부에 이미 다녀온 마당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간의 언변과 화술이 어느 정도까지 능수능란해질 수 있는지 그 모두를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덧 조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당인상.
저 젊은이는 괴물이었다.
그 고고하고 당당한 명화대장군을 단 이각여의 대화 만에 ‘형님’으로 만들어 버린 자.
조휘는 가진헌 장군에게 상고시대의 고문서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화제를 거기에 집중했다.
상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깊이 있게 늘어놓는 조휘의 지적 수준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가진헌 장군은 한림원의 학사들보다 더 대단한 안목과 식견이라고 연신 침을 튀어 가며 조휘를 칭찬했다.
곧 조휘는 결코 가진헌 장군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 그에게 전표 다발을 쥐여 주기에 이르렀다.
밀도 있는 아첨과 사탕발림, 그 끝에 나오는 적절한 요구사항,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하는 그의 엄청난 화술은 가히 신기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전표 다발을 손에 쥔 채 ‘껄껄! 역시 아우는 통도 한번 시원하구나!’라며 호탕하게 웃고 있던 가진헌 장군.
사람이 사람에게 홀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리라.
조휘가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래가 성사된다면 그 우애의 증표로 소량의 천빙령을 선물받고 싶습니다.”
“……천빙령?”
천빙령은 천고의 보물이다.
당가의 입장에서도 그 양이 희소하여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귀한 독의 재료.
그런 천빙령을 내놓는 명분이 고작 ‘우애의 증표’라!
가주 당무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무림맹의 창고에서 천빙령을 빼내 오기 위해 당가가 내놓은 패가 무엇인 줄 안다면 과연 저런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당무호는 한편으로 호기심이 치밀었다.
“그럼 당신이 보여 줄 ‘우애의 증표’는 무엇이오?”
대답은 당인상이 했다.
“사천당가의 사백 년 비원(悲願).”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는 숙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당무호는 한껏 의문을 드러냈다.
“그 무슨! 숙부님……?”
곧이어 당인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주변에 있던 모든 독수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천마성 사천지부의 멸(滅). 우리 조가대상회가 당가에게 건넬 우애의 증표요.”
천마성 사천지부의 멸망을 약속한다?
그것이 한낱 상단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미친 소리!”
상대가 숙부라는 것도 잊고 거칠게 고함치고 있는 당무호.
그것이 장사치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사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당가가 흘린 피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런 당무호를 바라보는 조휘의 눈은 한층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군집된 인간은 반드시 명분과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법이죠.”
“…….”
조휘의 시선이 저 멀리 서쪽을 향했다.
“여기 사천지부에 모여 있는 성교…… 아니 마교도들의 명분과 신념은 뭘까요?”
천마성 사천지부는 어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세력권만 유지하고 있었다.
신강(新疆)이 본거지인 그들이 아무런 이득도 생기지 않는 이 머나먼 사천 땅에서 사백 년 동안이나 막대한 힘을 소모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조휘의 말에 당무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당인상이 씁쓸한 얼굴로 서쪽의 석양을 바라본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림(再臨)이지. 언제고 다시 저 서천의 석양을 등에 지고 천마(天魔)가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 그들에게 사천은 그런 재림천마에게 바칠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교두보. 그것이 그들이 흘린 피의 신념일세.”
그 순간 모든 당가인의 두 눈에 독기가 흘러나왔다.
사백 년 피의 숙적, 그 빌어먹을 마교도 놈의 신념을 왜 우리가 알아줘야 하는가?
그저 마교도는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는 패악의 무리일 뿐이다.
한데, 조휘의 다음 말은 모두의 가슴에 더한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한데, 왜 그들의 교두보가 청해(靑海)가 아니라 사천(四川)일까요? 중원으로 진출하기는 협곡과 악산이 사방으로 널린 사천이 아니라 감숙과 맞닿아 있는 청해가 훨씬 유리한데?”
조휘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마교도 놈들이 서장 무림인들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머나먼 서장을 돌아와 이 사천을 교두보로 삼냐 그 말입니다!”
당인상이 입을 열었다.
“사천당가가 청해의 곤륜(崑崙)보다 약하기 때문이지.”
“숙부!”
당무호의 회한에 찬 외침!
조휘의 두 눈이 매처럼 빛났다.
“아니죠. 정확하게 말씀하셔야죠. 구파(九派)가 오대세가(五大世家)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마교도들이 곤륜을 친다면 함께 천도(天道)와 선도(仙道)를 숭앙하는 도교의 문파들, 즉 무당, 아미, 화산 등이 모두 나서 줄 테니까요. 반면!”
별안간 조휘가 동쪽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오대세가의 그 누가 당가를 도와주던가요?”
“…….”
당가인이 편협해진 것은 사백 년 역사 속에서 그 어떤 도움도 없이 홀로 전선을 지켜 온 독심(毒心) 때문이었다.
“다시 소개하죠.”
어느덧 장사치의 태를 벗고 무인의 기세로 돌아온 조휘.
“대남궁세가의 봉공(奉公) 조휘. 가주께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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