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3
3 章>
‘흠…… 갑자기 의관을 정제하라니…… 무슨 일이실까?’
소산각에서 아버지를 뵙고 인사를 했더니 뜬금없이 의관을 정제하고 처소에서 기다리란 말만 남기고서 사라지셨다.
기다린 지도 벌써 두 시진째.
조휘로서는 애써 졸음을 참으며 하릴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약 반각 정도가 지나자 드디어 인기척이 들려왔다. 대찬 걸음 소리로 보아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드르륵-
처소의 미닫이문을 열며 들어온 조순.
그의 두 손엔 궤짝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
아들이 자신을 맞이하며 일어서자 조순이 이를 제지했다.
“그대로 앉아 있거라.”
“예.”
묵묵히 걸어가 아들의 맞은편에 꿇어앉는 조순.
“갑자기 이 무슨? 왜 이러십니까?”
조휘가 황급히 마주 꿇어앉자 조순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엄숙함과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물건이 언제부터 우리 가문에 전해진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도 조맹덕 조사님의 신물이라 짐작은 하나 그것 역시 선조들의 추측일 뿐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문의 적자에게 이것을 전하라는 선조님들의 가언(家言)만 전해질 뿐이지. 그리고 오늘 나는 이것을 너에게 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두 손으로 공손히 궤짝을 내려놓는 조순.
“누가 뭐래도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운 것은 너다. 네가 우리 세대를 이끌 적임자다.”
“아, 아부지.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십니까? 모두 다 아버지가 계셔서…….”
조순이 조휘의 말을 딱 잘랐다.
“조씨 가문의 이십이 대손 조순이 전한다! 차남 휘(輝)는 가문의 대표자로 나서 의천혈옥(義天血玉)을 받들라!”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물론 저런 거창한 멘트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이미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한 번 경험한 장면이다.
서로 정장을 입고 마주 꿇어앉아 내게 홍옥 목걸이를 걸어 주던 아버지.
조휘가 엄숙한 표정으로 궤짝을 내미는 조순을 한 차례 슬쩍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궤짝을 열어 본다.
“앗!”
핏빛처럼 붉디붉은 홍옥.
비록 목걸이의 형태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차고 있었던 홍옥이 틀림없었다.
현대인 시절, 이십대 초부터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었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 가문의 적자에게 물려줄 때까지 항상 몸에 지니고 있거라. 그것이 의천혈옥을 받든 적자로서의 사명이니라.”
“…….”
조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의천혈옥이란 것이 조씨 일가의 보물과 같은 것이고…… 이게 우리 집 가보였다면…… 그럼 난 머나먼 선조의 몸에 들어온 거?’
그때였다.
-아니? 이 기운은? 이놈은 벌써 한번 의천겁(義天劫)을 겪은 후손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조부님?
-틀림없는 의천의 기운일세. 이 정도의 기운이라면 이미 존자(尊者)이지 않은가?
-맞아! 이놈은 존자네! 의심할 여지가 없어!
-허어! 이 무슨 조화로고!
-이게 가능한가? 존자가 어떻게 현생에 실제할 수 있단 말인가? 의천겁을 겪었다면 필시 혈옥에 갇혀야 하거늘!
갑자기 혈옥 쪽에서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려오자 조휘가 기겁을 했다.
“어, 엄마야!”
조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조휘가 홍옥을 가리키며 뒷걸음질 친다.
“호, 홍옥이 마, 말을……!”
-오잉? 우리의 말이 들린다고?
-우리가 느껴져?
-어찌 이런 일이! 허면 저 어린 후손과 대화가 가능하단 뜻입니까?
-허허! 선재로다. 선재야.
헛들은 것이 아니다.
음파로 전해지는 진짜 소리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마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나도 한때 홍옥을 바라보다 기묘한 꿈을 꾼 적이 있다. 보통 기물이 아니니 항시 마음을 정갈히 하거라.”
“예? 예.”
어느덧 처소에서 나가 버리신 아버지.
조휘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한참 동안 멍하니 홍옥을 바라만 보고 있자, 또다시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듣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용.
마치 영혼이 진탕되는 것 같은 강렬한 존재감!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건 환청도 뭣도 아니다.
기상천외한 일이었지만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저는 조휘라고 합니다.”
-…….
의천혈옥에서 한동안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계속 해 주길 바랐지만 계속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휘가 먼저 침묵을 깼다.
“저……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 주시지요.”
-…….
한참 동안 침묵하던 의천혈옥에서 마침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네놈이 지닌 영혼의 격(格)이 우리 존자들과 맞먹는다는 뜻. 한데 어째서 너에게는 끈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영혼의 격이니 존자니 하는 것은 조휘로서는 도무지 금시초문인 이야기들이었다.
“끈이요? 그게 무슨……?”
-의천혈옥의 선택과 은총을 받은 후인은 그에 합당한 대능력을 얻게 된 후, 그 대가로 반드시 혈옥과의 연(緣), 즉 끈으로 연결되는 법. 마침내 너의 모든 삶이 다하면 그 끈에 의해 혈옥의 품으로 영혼이 귀속된다. 한데 너에게는 그런 끈이 보이지 않아.
“……혈옥의 은총? 능력을 얻어요?”
-그렇다. 반드시 어떤 능력을 받았어야 정상이다. 그것 말고는 존자에 버금가는 네 영혼의 격을 설명할 길이 없다.
글쎄?
항시 목에 걸고 있었지만 무려 대능력이라고 칭할 만한 것을 받은 적이 있었나? 단연코 없었다.
“대능력이라면 어떤 능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을 원했느냐에 따라 달랐을 터. 네가 무재(武才)를 원했다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육체를 받았을 것이고, 붓깨나 굴렸다면 천뇌(天腦)를 얻어 상단전을 도모할 수 있었겠지. 제왕을 꿈꿨다면 심안(心眼)을 얻어 천하 모든 이들의 마음을 훔쳤을 것이며, 도를 구하는 수행자였다면 돈오(頓悟)의 벼락을 맞아 위대한 구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천뇌니 심안이니 돈오의 벼락이니.
죄다 고대 전설이나 서책에서나 등장하는 초능력들. 진즉에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힘겹게 살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한 조휘로서는 내심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저는 그런 은총을 결단코 받은 적이 없습니다.”
-뭐라?
능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딱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있었다.
과거로 와서 다른 이의 삶을 살게 된 것.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사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모르겠으나 말하기가 그냥 꺼림칙했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막연한 두려움일까?
아직 이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의천혈옥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갈(喝)! 숨기지 마라. 너는 의천혈옥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취했을 것이다! 그 이외에는 네 영혼의 격(格)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터!
“…….”
자신의 환생이 아버지가 주신 목걸이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냥 죽고 보니 조휘였다.
과연 그 일이 목걸이 때문이었나?
의심은 간다.
수많은 영혼이 들어 있는 목걸이라니?
그것만으로도 현실성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들의 말에서 일견 신빙성이 느껴졌으니까.
문제는 과연 이들에게 자신이 겪은 환생의 전말을 말해도 되느냐다.
조휘는 조금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이한 일을 겪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천혈옥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 일생의 비밀…… 전 그저 두렵습니다.”
슬쩍 떠보기.
의외로 의천혈옥이 빨리 반응한다.
-너는 나를,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로구나. 우리는 너의 머나먼 선조들이다. 너는 그저 우리에게 어여쁜 후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영혼으로만 존재할 뿐, 물질계에 힘을 행사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이런 우리가 네놈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느냐?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운 느낌의 언령(言靈).
조휘는 왠지 가슴 깊이 묻어 둔 설움이 욱하고 튀어나왔다.
“……정말 저의 선조님들이십니까?”
-그렇다. 오직 조가(曹家) 직계 가문에만 전해지는 것이 의천혈옥. 너는 네 시대의 조가를 책임지는 적자이지 않더냐? 한데 우리가 너에게 무슨 악의가 있겠는고…….
한참을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조휘가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환생을 했습니다…….”
-화, 환생?
-그럴 리가?
-조, 조사님……!
웅성웅성.
영혼들의 동요는 꽤나 심했다.
환생(還生).
혹은 회귀(回歸).
그것은 저 새까만 후손이 겪을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자신들이 영혼까지 바쳐 가며 의천혈옥에 갇힌 진정한 이유와 맞닿아 있는 비밀이다.
-어찌 네가……!
또다시 나타난 가장 강렬한 울림을 지닌 영혼.
-허허! 허허허허허허허……!
마치 모든 감정을 쥐어짜는 듯한 웃음소리다.
조휘는 그 모든 감정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가슴에 저며 들어 고통마저 느껴졌다.
당혹, 경악, 허탈, 분노!
-끝내 하늘은 내게 역천을 허락지 않았구나! 나는 세세토록 한낱 모리배로 남겠구나…… 허허허! 사마(司馬)여! 그대들의 승리로다! 허허허허허!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달되는 처절한 감정 때문에 조휘는 머리를 감싸 안고 한참 동안 고통을 견뎌야 했다.
이각쯤 지나 고통이 모두 가라앉을 무렵, 더 이상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기…… 조상님들?”
아무리 불러 봐도 침묵만 감돌자 조휘는 식은땀을 닦으며 의천혈옥을 품속에 넣었다.
“후……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조휘는 가끔식 간헐적으로 떠오르던 지식의 파편들이 저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왠지 오늘은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드르륵!
“나, 남궁세가에 간다고?”
한껏 상기된 얼굴로 조휘의 집무실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조혁!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서 심지어 맨발이기까지 했다.
조휘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응. 안 돼.”
“아우님!”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조휘에게 뛰어오는 조혁.
조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 나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조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한다.
“절대로 입을 열지 않으마! 네 옆에서 수행만 하겠다! 그냥 구경 한 번만 시켜 주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안 돼.”
“아우님! 아니 형님!”
가히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
결국 조휘는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께 부탁해서 진검(眞劒) 만들어 줄게.”
“뭐? 지, 진검을?”
조혁은 잠시 세차게 눈빛이 흔들리는 듯했으나, 금방 결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진검 열 자루를 준다고 해도 난 흔들리지 않는다! 제발! 남궁세가! 응? 으응?”
“안 된다니까.”
“아……!”
마치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조혁의 얼굴.
그때, 굵직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아야. 입 뻥긋하지 않고 수행원처럼 있겠다지 않느냐.”
“아니, 아버지까지 왜 그러십니까?”
이런 일에 좀처럼 나서지 않는 아버지다.
더구나 남궁세가와 연을 맺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몇 번이나 설명한 터.
“너희는 형제다. 모든 일을 너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거라. 그래도 혁이는 네 형이다.”
아니, 아부지.
저놈은 아직 노답이라고요.
사람 구실을 못하잖아요.
저 철부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왜 이러실까?
조순은 그런 조휘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누가 뭐래도 조씨 일가의 장남은 조혁이다.
그런데 어제 가문의 적자 자리와 비전보물을 차남에게 내줬다.
아버지로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내 다시는 이런 부탁을 하지 않으마. 이번만큼은 네가 양보하거라.”
“으…….”
남궁세가와 같은 용담호혈에 조혁을 데려간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못 미덥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다.
“정말 입 뻥긋 안 할 자신이 있어?”
조혁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물론! 무사의 기본은 우직함! 과묵하면 나다!”
“후…….”
조휘는 형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 * *
합비로 출발하기 전 잠시 작업장을 살피던 조휘를 향해, 소산각의 일꾼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방주님! 큰일 났습니다!”
조휘가 소산각 일꾼의 행색을 살피고서는 안색을 굳혔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작업복도 여기저기 찢어져 한눈에 봐도 해코지당한 듯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산각의 일꾼은 한참이나 숨을 더 헐떡이더니 두려운 눈으로 철문 쪽을 쳐다봤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몰려왔습니다! 무기도 들고 있어요!”
조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무기요?”
“아 그게…… 무기랄 것까진 아니고…….”
콰쾅!
굉음과 함께 강제로 철방의 철문이 열린다.
험상궂은 얼굴로 철방으로 진입하는 수십 명의 장정들!
그들은 하나같이 호미나 낫, 쇠스랑 등을 손에 꼬나들고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조가철방 놈들의 씨를 말려라!”
조휘는 간신히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서 그들을 훑어보았다.
걸치고 있는 작업복이나 상처투성이의 두툼한 손, 소지한 무기들의 면면으로 보나 저들은 틀림없는 철방 장인들이었다.
‘……올 것이 왔군.’
그제야 조휘는 차분하고 냉정한 눈을 했다.
오늘의 일은 염가로 철제 기구를 판 그 순간부터 이미 예정된 수순.
조휘가 오히려 그들의 앞으로 성큼 나서며 정중하게 포권했다.
“저는 조가철방의 방주 조휘라고 합니다!”
장인들의 얼굴이 더욱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다.
“오냐! 너 잘 만났다! 그 잘난 상판대기를 내가 찢어 주마!”
“네놈이냐? 이 상도(商道)도 모르는 놈아!”
“시팔! 이제 와서 예의를 차려?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
격분하며 온갖 욕설을 늘어놓는 철방의 장인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욕을 듣고 있던 조휘가 포권을 풀더니 짐짓 배를 쭉 내밀었다.
“내가 도대체 여러분들께 뭘 잘못했는데요?”
벌벌 떨며 그 광경을 바라보던 조순이 기겁을 했다.
“……휘, 휘아야!”
불난 집에 기름을 퍼붓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조휘는 그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아부지, 제가 뭐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뭔 죄를 지었는데요?”
너무나 어안이 벙벙해 오히려 화가 잦아들 지경!
철방 장인들 중 대표로 짐작되는 장정이 가장 먼저 나섰다.
“흥! 장사에도 상도가 있다!”
조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풋! 상도요?”
“이 새끼가!”
천천히 장인들 사이로 걸어가며 한 명 한 명 응시하는 조휘.
“한 가지만 묻죠! 저희 조가철방보다 싸게 팔아도! 그래도 이문이 남는다면! 어르신들은 그래도 가격을 내리지 않고 상도를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
“…….”
현재 조가철방은 병장기를 판매하지 않는다.
당연히 병장기를 주력으로 판매하는 철방의 장인들은 지금 이곳에 없을 것이다.
철방의 현판 밑에 걸려 있는 매병패(賣兵牌)는 잘나가는 철방의 상징과도 같은 것.
이곳 조가철방에 찾아온 자들의 대부분은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영세한 철방의 주인들이었다.
당장 끼닛거리가 없어 가족들이 굶어 죽는 마당에 물건을 싸게 팔 수만 있다면, 그래도 이문이 남는다면, 누구라도 가격을 낮춰서 팔 터.
그래서 철방의 장인들은 조휘의 말에 섣불리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저희 철방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조휘는 철방 장인들의 의사도 들어 보지 않고 퉁명한 얼굴로 앞서 걸어갔다.
이에 몇몇 장인들이 조심스럽게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휘의 걸음을 좇아 따라갔다.
선동에 휘말려 찾아오긴 했으나 막상 조가철방의 방주란 자가 저리도 호기롭게 철방의 내부를 보여 주겠다니 내심 궁금증이 일어난 것.
그렇게 물건을 싸게 팔고도 이만큼 거대한 규모의 철방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들에게 미지의 영역 그 자체였다.
잠시 후, 조휘를 따라 조가철방의 공방에 들어선 장인들이 한결같이 입을 벌리며 경악하고 있었다.
“세상에 모, 모루가 몇 개야?”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인이란 말이오?”
조휘는 그들이 모든 공정을 빠짐없이 지켜볼 수 있게 그저 팔짱을 낀 채 기다릴 뿐이었다.
처음 분업 시스템을 경험한 조순과 마찬가지로 장인들에게도 그것은 일종의 경이(驚異).
깡! 깡! 깡!
화악! 화악! 화악!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마치 톱니바퀴처럼 협업하는 공방의 일꾼들.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토록 완벽하게 무언가를 함께 생산하는 모습이라니!
그들로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쿵!
불과 한 시진도 안 되어 어느새 완성된 대형 쇠쟁기가 주조꾼들에 의해 진열대로 옮겨진다.
진열대에는 이미 백여 개의 쇠쟁기가 김을 뿜으며 열을 식히고 있었다.
한 장인이 실성한 듯 고개를 도리질했다.
“미, 미친! 말도 안 돼!”
쇳물이 주물이 되고 쇠쟁기가 될 때까지 그 모든 공정을 직접 보고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
자신이 저런 대형 쇠쟁기 하나를 만들려면 열흘은 꼬박 작업에 매진해야 했으니 그 충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를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졌다.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이 압도적인 광경을 보고도 멀쩡하게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장인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한 패배감!
그렇게 모든 장인들이 굳어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때, 때가 됐다는 듯이 조휘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여러분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사천에 눌려 사실 요량이십니까?”
풍부한 철광 산지를 바탕으로, 전 중원에서 생산되는 철제 기구의 칠 할을 생산하는 장인(匠人)의 대지 사천성(四川省)!
황실 장군부의 병사들이 쓰는 병장기는 거의 모두 사천에서 생산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안휘의 명장인 대화흑철방의 모수극님께서 천하제일장(天下第一匠)의 위에 오르시고도, 왜 우리 안휘는 늘 사천에 밀려 이인자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겁니까?”
슬슬 하나둘씩 맞장구가 튀어나온다.
“오, 옳소!”
“암!”
들불처럼 번지는 고향부심!
내부의 혼란과 불만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공통의 적을 앞세우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나치의 안티 유태인 정책은 고고한 독일 지식인들의 이성조차 마비시킨 힘! 게다가 독일민족을 더욱 똘똘 뭉치게 만든 원동력은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앞세운 민족 전체주의다.
조휘가 그 방법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백 년 내로 우리 안휘가 황실의 일감을 얻은 적이 있습니까? 황실은 그 엄혹한 전란 속에서도 우리 안휘의 아들들을 병사로만 차출해 갔을 뿐! 우리 안휘는 철저하게 외면만 당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연신 ‘우리 안휘’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조휘!
“더구나 우리 안휘에서 무엇이 나왔습니까? 천룡보도와 육맥신검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백 년 전, 오월의 전설적인 장인 구야자와 비견되는 위대한 장인이 안휘에서 태어났다.
천수장인(天手匠人) 목고월.
그가 만든 필생의 역작이 바로 천룡보도(天龍寶刀)와 육맥신검(六脈神劒)이었다.
“그렇고말고! 우리는 당당한 천수장인님의 후예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우리 안휘의 장인들이 훨씬 더 훌륭하지!”
“흥! 사천은 그저 무식하게 광산만 많을 뿐이야!”
“암! 폐하께서 너무하셨지!”
그렇게 장인들의 고향부심이 정점을 찍을 무렵, 조휘가 다시 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제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잠시간의 정적.
“……꿈을 도와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조휘가 더욱 목청에 힘을 줬다.
“안휘가 다시 사천을 이기려면 물량으로 압도해야 합니다! 안휘의 철제 기구들로 천하를 덮어 버리잔 말입니다! 각자 흩어져서 철방을 운영한다고 저희가 사천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두가 힘을 합쳐야 삽니다!”
이어 조휘의 손가락이 대산각과 소산각의 일꾼들을 가리켰다.
“저들을 지도해 주십시오! 어르신들의 경력을 높게 사 드리겠습니다! 궂은 철방 일은 이제 안 하셔도 됩니다! 아버지! 이리 오시죠!”
얼떨떨한 얼굴로 끌려오는 아버지, 조순.
“저희 조가철방의 철방대부님이십니다! 현재 홀로 저들의 모든 지도를 담당하고 계시지요! 저는 어르신들 모두를 철방대부로 모시고 싶습니다!”
조휘의 시선이 다시 장인들에게로 향했다.
“철방대부의 월봉은 은자 열 냥! 게다가 각종 수당까지! 당연히 어르신들 철방의 모든 재고와 도구들도 제가 고가에 인수하겠습니다!”
어느새 품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 들며 흔드는 조휘.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르신들!”
웅성웅성.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망치질해도 은자 열 냥의 이문을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한데 그런 힘든 철방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단지 후학을 지도하는 것만으로도 은자 열 냥의 월봉을 받을 수 있다니?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꺼림칙한 게 남아 있었다.
조휘가 마침내 선동의 정점을 찍는다.
결연한 얼굴로 현판을 응시하는 조휘!
“안휘철방(安徽鐵坊)! 어르신들이 들어오면 당연히 새롭게 태어날 이름입니다!”
그렇게 그날, 조휘는 스물일곱 명의 철방대부를 얻었다.
염가의 철제 상품을 앞세워 안휘의 모든 군소 철방을 적대적 인수합병(M&A)한 것이다.
* * *
갑작스런 이벤트로 합비행이 지연됐다.
스물일곱 명이나 새롭게 영입한 철방대부들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철방을 더욱 확장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휘는 가장 큰 규모의 대산각을 삼조(三組), 소산각은 이조(二組)로 나누었다.
대산각과 소산각에는 노련한 일꾼들이 제법 있어서 신입들과 골고루 섞으면 문제될 것이 없었기에 조 편성이 쉬웠다.
하지만 거의 초보로 구성된 기산각은 최대한 빨리 역량을 끌어올려야 했기에 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철방대부가 가장 많이 투입된 곳도 바로 기산각이었다.
기산각에서 가장 먼저 생산을 시작하고 싶은 상품은 바로 마차였다.
세 달 전 조휘는 마차를 구입했는데, 관도 외의 일반 흙길에서는 도저히 사람이 탈 것이 못 됐다.
이 세계의 마차에는 현가장치(서스펜션)가 없었다.
거친 노면의 진동이 고스란히 마차 내부에 전달되었고, 반각만 지나도 계속된 충격으로 인해 엉덩이가 그야말로 깨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휘는 판형 서스펜션의 개발을 기산각에 주문했다.
현대인 시절 자동차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판형 서스펜션.
처음에는 스프링 서스펜션을 개발해 보려고 했지만 아직 고난이도의 금형 기술이 없는 중원세계에서는 무리였다.
조휘는 스프링의 ‘형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주물을 길게 연성해 코일 형태로 감아 스프링을 만들어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위에 무거운 짐을 올리자마자 스프링이 바로 깨져 버렸다.
어떤 재질의 철로 만들어야 하는지 합금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던 조휘로서는 스프링 형태의 서스펜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판형 서스펜션을 만들기로 했다.
길이가 다른 철판을 여러 겹으로 붙여 고정시킨 형태의 판스프링은 현대에서도 버스나 덤프트럭, 밴 등의 대형 상용차에 쓰이는 기술.
무엇보다 만들기가 스프링보다 훨씬 쉬웠다.
비록 아직은 무거운 물건을 올리면 휘어 버리거나 깨지고 있었지만, 연철(軟鐵)의 비율을 계속 조절하는 등 계속된 실험으로 최근에는 꽤나 성과가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그럴싸한 서스펜션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하는 중이었다.
만약 판형 서스펜션의 개발을 완료하고 이를 적용한 마차를 시장에 내놓는다면 그것은 가히 혁명일 터.
철방의 매출이 얼마나 늘어날지 조휘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조가철방, 아니 안휘철방은 이제 총 삼백여 명의 일꾼으로 북적였다.
조휘가 그동안 모은 금자를 이번 개편에 아끼지 않고 모두 투자한 것이다.
이대로 몇 달이 지나면 매출이 얼마나 늘어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후후…….’
바삐 움직이는 일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조휘.
각종 수당제를 적용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일꾼들 대부분이 성과 수당과 시간외 수당을 받아 가려고 미친 듯이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물론 수당을 좀 과하게 주긴 했다.
하지만 현대에서 수년 동안 알바를 전전하며 열악한 노동 현실, 그 설움을 직접 마주해 온 조휘다.
이러한 통 큰 결정의 이면에는 일종의 대리만족이 있었던 것.
이제 남은 것은 철광 문제를 해결하여 전문적으로 주괴를 생산하는 공방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주괴공방을 신설할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수십 배 이상 이문이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가 조휘가 계획하고 목표로 잡은 일차적인 구상. 이제 슬슬 다음 단계를 구상할 때다.
‘무조건 합비로 진출해야 돼.’
웬만한 현(縣) 수십 개를 합쳐 놓은 인구.
합비는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자, 각종 거래처로 넘쳐나는 안휘성의 서울이다.
‘그리고 정보!’
강호방파들의 서열 관계, 주요 거물들의 신상 정보, 관청과 거대 상단들의 최근 동향 등 이 모두가 큰물에서 놀아야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정보다.
봉태현에서 듣는 정보는 속도가 느렸다. 이미 모든 일이 벌어져 무용지물이 된 정보를 접해 봐야 활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한계를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는 조휘였다.
만약 화룡상단의 삼공자 상관비가 제공해 준 정보가 아니었다면 이미 조가철방은 망해도 몇 번은 망했을 것이다.
합비에 진출하려면 후견인을 두는 것은 필수다.
이곳 봉태현이야 별로 먹을 것이 없는 곳이라 관리와 이권 단체들의 시선에서 그나마 자유로웠기에 일을 벌이기가 쉬웠지만 합비는 다르다.
바늘 한 개 꽂을 곳이 없을 정도로 이미 합비의 시장은 포화 상태.
그런 용담호혈을 뚫고 사업을 시작하는 순간, 반드시 각종 이권 단체들과의 갈등이 유발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두려운 것이 강호(江湖). 그들의 위력을 천예루 앞에서 몸소 체험한 조휘로서는 무섭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 총관님.”
일꾼들의 근태를 확인하고 있던 이 총관이 조휘의 부름을 듣고 다가왔다.
“예. 방주님.”
“합비로 출발할 것입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이 총관이 푸근하게 웃으며 마방을 응시했다.
“이미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에 조휘가 마방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말 두 필과 건량 스무 포, 물을 가득 담은 가죽부대, 갈아입을 옷가지와 여비를 담은 전낭 등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휘는 그 준비성에 새삼 놀라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가 계시긴 하지만 철을 다루는 것 이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철방의 운영은 전적으로 총관님께 위임하지요.”
“혹, 얼마나 걸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조휘가 고개를 흔들었다.
“날짜 다짐을 할 수 없겠습니다. 목적한 바를 달성하기 전까진 복귀할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기약 없는 여행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중대한 결정을 내릴 일이 생겨도 방주님이 오실 때까지 미룰 수가 없겠군요.”
조휘가 자신의 집무실을 쳐다봤다.
“예상되는 몇몇 일들을 적어 놓은 책자가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하명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조휘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를 영입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 * *
따깍 따깍.
말을 타는 것은 참 묘하다.
‘무언가를 탄다.’라고 생각하고 말을 타면 낙마하기 십상이다.
마치 율동과 같은 말의 움직임에 자신의 온몸이 동화되어야 했다.
이제는 말의 발걸음에 맞춰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며, 새삼 처음 말을 탔을 때를 떠올려 보는 조휘다.
‘크…… 참 많이도 떨어졌지.’
아직도 하체 곳곳에 깊은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 정강이의 상처는 돌부리에 찍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다친 곳이었다.
문득 조휘가 자신의 형 조혁을 쳐다봤다.
말을 타며 한 손으로 정신없이 책을 읽는 그 모습은 가히 신기에 가까울 지경.
집안 형편이 풀려,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운 형이 가장 먼저 구입한 서책은 그 비싼 강호풍운록(江湖風雲錄)이라는 시리즈다.
총 스물네 권에 달하는 엄청난 연작.
천 년에 이르는 무림사를 연대별로 기록해 놓은 그 유명한 만박자(萬博子) 제갈유운의 저서이며 그 계통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베스트셀러다.
하지만 전설을 과대하게 해석하거나 특정 인물들을 편향적으로 깎아내리는 등 논란도 많은 서책이었다.
저 서책으로 인해 문파 간의 분쟁도 잦다고 들었다.
그런 강호풍운록을 읽는 조혁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서책이 닳고 닳아 없어질 지경.
“……그렇게 재밌어?”
조휘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조혁.
“응.”
할 말을 잃은 조휘.
“하아…….”
신이시여.
저 무협충 좀 구제해 주소서.
문득 조혁이 책을 덮고 째진 눈으로 조휘를 응시한다.
“너 지금 마음속으로 나 욕했냐?”
뜨끔했던 조휘가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자 조혁이 굳은 얼굴을 했다.
“형이랍시고 너에게 해 준 것이 없는 거…… 나도 잘 안다. 그동안 형다운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것도 잘 안다.”
조혁의 눈빛이 일변했다.
“난 솔직히 아직도 네가 내 동생 조휘가 맞는지 믿기지 않아. 머리가 좋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
“나는 이번에 철방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네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괴물 같았다.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순간, 조혁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네가 뛰어나다고 해서 내 삶이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휘는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뭐지?
이 갑작스런 엄격, 근엄, 진지 모드는?
그제야 조휘는 자신의 형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얼마나 목검을 휘둘렀는지 손에 가득 잡힌 굳은 살.
드러난 피부마다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깊은 상처들.
헬스선수마냥 두터운 허벅지와 날렵하게 갈라진 온몸의 잔근육들.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형의 진정한 면모가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늘 휘파람을 불고서 장난처럼 목검을 휘두르며 집에 돌아오는 형의 그 모든 행동들이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하나의 제스처였을까?
누구에게나 진지한 구석 하나는 있음을, 더구나 사내라면 가슴에 열정을 품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잠시 망각했다. 조휘가 자신의 형에 대한 평가를 다시 했다.
“……무지막지하게 단련했구나.”
조혁이 피식 웃는다.
“검을 휘두르면 잊을 수 있는 것이 많아.”
조휘는 그제야 형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형이 집안 사정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처한 현실이 고통스러워 검만 미친 듯이 휘둘러 댄 것이다.
“가웅채…… 기억 나냐?”
형의 질문에 조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칠 년 전, 안휘에 대흉작이 몰아치자 관에서 구휼미를 나눠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인근 가웅산의 산적들이 그 구휼미를 노리고 대담하게 봉태현을 습격했다. 물론 지금은 모두 토벌되어 사라졌지만.
“가웅채 산적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냐?”
들어 보지 않아도 형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난 지키고 싶다. 아버지를…… 그리고 내 동생들을. 다시는 누구도 매 맞게 두지 않을 거야.”
조휘가 흐뭇하게 웃으며 조혁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어깨에 걸쳐진 손.
조혁이 소름 돋는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치, 치워! 인마!”
“하하!”
붉은 노을이 소담스럽게 송림(松林)에 걸쳐, 그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 * *
의천혈옥에서 재차 다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봉태현을 떠나 안휘로 향한 지 팔 일째 되는 날이었다.
-세 치 혀로 장강 물도 팔 놈이로세.
-끌끌…….
웃음소리가 왠지 비웃음 같기도 하여 조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들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남이 보면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꼴로 비춰질 것이 뻔하다. 바로 옆에 형이 있어 대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대한 조가의 후예가 고작 철방 하나 키운답시고 저리도 발버둥이니…… 에휴…… 지켜보는 것도 이제 지치는구나.
-그래도 지 애비보단 낫습니다. 그놈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밀어서 분이 안 풀립니다.
-하긴 그도 그렇구나.
-암. 그놈보단 백 배 천 배 낫소.
아무리 선조들이라지만 이리도 대놓고 부모 욕을 해 대니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조휘가 내심 뇌까린다.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라고는 달랑 보석 하나밖에 없으면서 생색은 오지네.’
-오지네? 그건 무슨 뜻이냐?
-생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욕 같습니다.
-허어! 요 깜찍한 놈 보소. 달랑 보석 하나? 이놈아! 의천혈옥이 얼마나 엄청난 기물인지 알기나 하느냐?
‘헉!’
등줄기에 좌르르 돋아난 소름.
조휘의 동공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린다.
‘내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고……?’
-당연한 소릴! 네 녀석의 영혼은 이미 존자의 영역. 비록 혈옥과 끈이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영혼은 분명 우리와 의천의 전륜(轉輪)으로 묶여 있음을 최근에 알아냈다. 그러니 심령(心靈)의 연결은 당연한 조화다.
“…….”
선조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어 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조휘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모두 여덟 분 같은데 맞습니까?’
-그놈 참…… 머리 하나는 실로 영특하구나. 그사이에 벌써 우리의 음성을 모두 가렸느냐?
아니, 이게 뭐라고 영특하다는 소리까지 듣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특색이 다른 목소리들인데 몇 번 듣다 보면 보통 바로 감이 오지 않나?
-네 녀석은 그 뛰어난 머리를 그다지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구나.
머리가 좋았나?
글쎄…….
말빨이 좋다거나 기억력이 좋다는 소리는 몇 번 들었어도 머리가 좋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머리가 좋았다면 공무원 시험 따윈 한 방에 붙었겠지.
아니 그 이전에 서울대부터 갔을 거다.
-영혼의 격이 올라갔다는 말이 우습게 들리는가 봅니다.
-허허…… 허나 저놈의 모든 지략을 영격(靈格)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네. 아마도 환생자만의 특성이겠지.
-맞습니다. 저놈이 철방에 적용시켜 놓은 분업(分業)만 해도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저도 그 점은 놀랍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가장 강력한 영혼의 울림을 지닌 선조가 드디어 침묵을 깼다.
-흥! 이 맹덕의 뒤를 이을 패왕(覇王)의 재목은 아니다.
맹덕?
지금 설마 삼국지의 그 유명한 조조를 말하는 건가?
우리 조가의 시조?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정말 조조라니!
-내가 시조라니 당치도 않다. 조가(曹家)는 훨씬 오래 전에 태동한 터. 단지 환관의 양자셨던 아버지께서 새롭게 나를 세웠을 뿐이다.
사실 조씨 일가들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조조를 시조로 모시고 있었으나, 실상은 훨씬 이전인 한제국의 창업공신 조참(曹參)이 조가의 시조다.
‘패왕이라…….’
조휘는 언감생심 왕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중원세계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 할 수 있는 관부와 강호인들로부터 가족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싶었다.
현대인 시절처럼 찌질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의 후손들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흥! 사람을 고작 은자로 부리는 놈이다. 그런 놈이 무슨 왕의 재목이란 말이냐?
아니 그럼 직원을 돈 주고 부리지 무슨 방법으로 부리냐 도대체?
노예로 부릴까? 아니면 뭐 최면술로 세뇌라도 시켜서?
-갈! 조사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아니,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시끄럽다!
-어허! 고얀!
꼬장꼬장한 선조들의 고함 소리.
별 도움도 안 되면서 허구한 날 훈계질만 늘어놓으니 괜스레 짜증이 난다.
그때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 진짜! 검신(劒神) 이 양반은 대체……!”
검신의 위대한 일생은 조휘도 잘 알고 있었다.
강호 역사상 자신의 별호에 신(神)의 휘호를 새긴 무인은 단 세 명밖에 없다.
혈혈단신 독보천하.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위대한 검의 전설.
중원을 살아가는 자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왜?”
“아니 미친……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고! 단신으로 암흑마교의 팔대주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교주의 모가지를 여섯 합 만에 잘랐단다.”
“암흑마교?”
“지금 천마성이 그들의 후예이지.”
“아…….”
정파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있다면 사파에는 삼패천(三覇天)이 있었다.
천마성(天魔城), 흑천련(黑天聯), 사천회(邪天會).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천마성이었다.
그런 엄청난 조직의 시조 격인 문파라면 장난이 아닐 터.
그런데 단신으로 작살냈다고?
그게 가능한가?
강호의 세계를 잘 모르는 조휘조차 고개가 갸웃거릴 정도였다.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이룬 무인인데도 기록이 너무 없어. 이름도 몰라. 그냥 검신이라는 별호밖에 남아 있지 않아. 가족이 있어 후사를 남겼는지, 말년은 어땠는지 모든 게 불분명해. 죄다 뜬구름 잡는 전설밖에 없어.”
조혁이 책의 낱장을 손가락으로 집어 펄럭였다.
“이거 봐. 무신(武神) 사마천세(司馬天世)는 자그마치 두 권이나 다루고 있으면서, 검신에 대한 기록은 단 세 장뿐이야. 이게 말이 돼?”
그때, 또다시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야. 너는 의문을 가진 적이 없느냐?
‘……어떤?’
-패왕이라 불렸던 이 맹덕의 후손들이 왜 촌무지렁이로 살아가는지 말이다.
글쎄…….
알부자도 삼대 이상을 못 간다는데 뭐 왕족이라고 다를 게 있겠나?
-이 맹덕이 평생 일군 과업을 무시하지 마라. 내가 남긴 재산만 해도 금 십만 관이다. 한데 이 맹덕 이후 조씨 일가의 역사가 세상에 얼마나 남아 있느냐?
‘시, 십만 관?’
실로 엄청난 양의 금!
십만 관이라면 현대의 무게 개념으로 375톤이다.
현대 미국의 금 보유량이 8,000톤이 넘으니 뭐 납득이 되지 않는 숫자는 아니다.
당시 삼국시대의 위나라는 세계 최강국들 중 하나였으니까.
-나와 거래를 하나 하겠느냐?
‘거래라니요? 갑자기 무슨?’
-그들은 아직도 강성할 것이다. 허나 우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한번 자웅을 겨뤄 볼 만할 터.
‘그들이라니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겁니까?’
-이 맹덕이 원하는 것은 사마(司馬)씨족의 패망.
가끔씩 사마라는 글귀가 뇌리에 떠오를 때면 강렬한 적대감이 일어나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나?
자신의 환생이 의천혈옥의 힘을 빌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은 이제 거의 확실해진 듯하다.
조휘의 얼굴이 금방 새파래졌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천하에 사마씨로 유명한 가문은 단 하나, 사마세가.
그들은 오대세가의 일원이다.
남궁세가가 대외적으로 정치력이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뛰어난 가문이라면, 사마세가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집단이었다.
제법 많은 강호인들이 그런 사마세가를 진정한 천하제일가문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무신 사마천세 사후 장장 이백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조휘가 몸서리 쳐진다는 듯 도리질했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무려 천하제일가문입니다. 무신의 후예들이란 말입니다. 한낱 철방의 방주인 제가 어떻게 그들을…….’
-천아(天兒)야.
-예, 조사님.
-이 아이에게 무공을 잇게 할 수 있겠느냐?
-조사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쓸 만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에? 누구……?’
-그가 바로 검신(劒神) 조천(曹天). 일인전승 검총(劒塚)의 전승자이니라.
‘…….’
너무 엄청난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린다.
뭐 영혼과 대능력을 맞바꾼 사람들이니 대단한 삶을 누리고 갔을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호 역사상 단 세 명밖에 없었다는 신(神), 그중 최강이라는 검신이라니……!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강아(鋼兒)야.
-예. 조사님.
-네 비공일맥(秘公一脈)을 이 아이로 하여금 잇게 할 수 있겠느냐?
-소인의 후예들이 암흑상인들에 의해 아직 망하지만 않았다면 가능합지요.
-좋다.
비공일맥? 암흑상인?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 엄청난 듯 보인다.
-가끔씩 네가 떠올리며 추억하는 그 세계를 나도 엿보았다. 그곳의 문물과 지식은 실로 놀라웠지. 그건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제길, 그것까지 엿봤다고?
이건 뭐 거의 스토커나 다름없지 않은가.
-네가 가진 그 신(新) 지식과 우리가 가진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겨뤄 볼 만할 터…… 이제 거래할 마음이 생기겠느냐?
뒤의 것은 아직 뭔지 잘 몰라도 일단은 무려 검신이다.
단신으로 암흑마교를 물리친 무공.
깊이 생각해 볼 문제도 아니다.
‘거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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