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30
30 章>
마교도들의 긴 행렬에 섞여 천산을 향하고 있는 조휘의 심정은 착잡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기다려 보았지만 의천혈옥이 청옥으로 변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선조 어른들의 목소리가 끝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이대로 선조 어른들과의 인연은 끝인 건가?’
도무지 믿고 싶지가 않았다.
검신 어른의 잔소리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가끔씩 꼬장꼬장하게 훈계질을 늘어놓던 조 맹덕 어르신도, 뛰어난 학식과 인품이 느껴지던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만상조 어르신도 그리웠다.
나머지는 어떤 분들일까.
아직 모든 선조 어른들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존…… 아니 오라버님. 드디어 도착했어요!”
사운향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
그곳에 거대한 성(城)이 있었다.
천마성(天魔城).
그 엄청난 위용 앞에 조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육중한 철문, 아니 저걸 과연 문(門)이라 부를 수 있을까?
도대체 저런 걸 어떻게 열고 닫고 하는 거지?
협곡을 통째로 틀어막고 있는 저 거대한 철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조휘는 중원인들이 왜 저곳을 천마교라 부르지 않고 천마성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천마성의 벌어진 철문 틈 사이로, 수천수만의 마교도들이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중얼중얼.
들뜬 얼굴로 연신 주문을 외며 입성하는 마교도들.
그 거대한 군중의 기세에 조휘는 압도되는 심정이었다.
십만 마교도?
아니, 그 평가는 모자란 것이다. 중원인들은 마교도들의 수를 명백히 잘못짚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나아가자 철문 틈으로 보이는 저 먼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제단(祭壇)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 위의 정상에서 오연히 교도들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들.
이 먼 거리에서도 그들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있는 자.
형형색색 빛나는 보석이 박힌 면류관(冕旒冠)을 머리에 쓴 자.
제사장 복식의 그 사내는 폭포수처럼 쏟아 낸 검은 머리칼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조휘는 본능적으로 그가 모든 마교인들 중에서 최상위 위계를 지닌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마?”
조휘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확인한 사운향이 배시시 웃었다.
“신녀(神女)님이세요.”
“신녀? 여자라고?”
얼굴에 온갖 문양의 칠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풍채는 분명 남자 같은데 여자라니.
조휘가 제단 위를 다시 한 번 차분히 응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철문을 뒤로하며 천마성 내부에 진입한 그 순간 조휘는 질식할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단순히 무인들의 기세나 마인들의 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군중, 그 인의 물결에서 전해 오는 순수한 압박감!
천마성의 중심에 치솟아 있는 거대한 제단, 그 전면에 펼쳐져 있는 놀라우리만치 너른 광장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군집하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드는 수십만의 인파들.
조휘 평생에 단 한 번도 이런 엄청난 인의 물결을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아직도 철문은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유미리합곡(柳迷理合谷)부터 이곳 천마성 입구까지는 삼십 리.
한데 그 긴 행렬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연 천년마도라더니…….’
마도는 사파와 달리 그 뿌리가 깊다.
한 집단이 무려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들만의 문화를 존속했다면 그 오랜 전통과 역사에서 오는 저력이 어느 정도일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마교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단 위를 향하고 있었다.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들.
그들은 각기 주문을 외웠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했으며, 몸을 찢어 피로써 참회했다.
그들의 그런 광기 어린 모습에 조휘는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거대한 집단의 맹목적인 믿음, 그 모든 사무치는 염원들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천마라는 존재가 마신이라 불리는 것은, 진정 이들의 모든 염원을 이뤄 줄 신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저 멀리 까마득한 계단 위에 서 있는 자들은 현재 그런 천마를 대리하는 위계의 인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신녀라는 여인을 조휘는 진득하게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살폈을 때는 안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아 마치 남성처럼 보였다.
큰 면류관과 펑퍼짐한 품의 제례복을 입고 있어서 몸집이 크게 보였던 모양.
가까이서 그 얼굴의 선을 제대로 살피니 과연 여인이 맞는 듯했다.
‘신녀(神女)라…….’
삼신의 경우만 살피더라도, 강호인들은 결코 신(神)의 휘호를 남발하지 않는다.
마교도들이 저 여인더러 신녀라 칭했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무언가가 그녀에게 있다는 뜻일 터.
무공을 익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절대의 경지를 돌파하여 의념으로 기도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검천전능지체의 감각권 내에 감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능력은 무엇일까?
조휘가 곁에 있던 사운향에게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으로 말했다. 세가주 남궁수에게 배운 후 처음으로 시전해 보는 수법이었다.
-아아, 들리나?
사운향이 깜짝 놀란 눈으로 조휘를 응시했다.
-네 들려요! 존성님!
조휘가 눈짓으로 신녀를 가리켰다.
-신녀의 능력은 무엇이지?
사운향은 마치 제 할 일을 찾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다가, 신녀를 보며 경외 어린 얼굴이 되었다.
-안가랍만뉴님의 목소리를 듣는 분이세요!
-안가랍만뉴(安哥拉曼纽)?
그 존재는 검신 어른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마교도들의 교리 속 최상위의 절대적인 마(魔)로서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
안가랍만뉴는 우주를 창세한 광명신(光明神)의 어두운 영적 자아이며 세상을 파괴하는 운명을 타고난 멸겁의 악신(惡神)이었다.
그런 악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고?
무엇보다 신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현대인 시절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조휘에게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인간이라…….’
현대에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이비 교주로 판명이 났다.
그렇게 허풍과 거짓을 속삭이는 자들이 천 년 동안 이 많은 마교도들을 지배했다고?
이 많은 사람들이 그 긴 세월 동안 거짓에 놀아난 것이라면 너무 서글프고 허탈한 일이지 않은가?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볼 일.
마음을 다잡은 조휘가 연신 주변을 살핀다.
본래의 목적은 천마의 출현을 확인하는 것.
이토록 거대하게 군집된 모든 염원들을 한데 모아, 그 힘으로 강호를 짓밟는 자가 마신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막아야 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조가대상회도 남궁세가도 강호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순간, 조휘를 경악하게 만드는 강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교의 교도들은 들으라.
마치 영혼이 진탕되는 듯한 느낌!
그것은 그야말로 무저갱 속 악마의 음성처럼 세상의 모든 악의를 담아 외친 듯한 목소리였다.
제단 위를 바라보자 그 ‘신녀’가 허공에 떠 있었다.
칠흑과도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천하를 향해 두 팔을 뻗고 있는 그녀.
도저히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 거대하고도 순수한 악의가 사방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의 맥동이 빨라진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혼백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격렬한 기시감!
그제야 조휘는 저 제단 위 여인의 칭호에 왜 신(神)의 휘호가 새겨졌는지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한 무녀(巫女)가 아니었다.
어떤 ‘신적인 의지’가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신녀의 목소리를 듣자 마교도들의 순수하며 맹목적인 염원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천마성의 제단을 덮쳤다.
조휘는 순간이나마 자신의 눈도 저들과 비슷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았다.
집단의, 군중의 마력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
-지금 이곳에, 그분께서 강림하시었다.
조휘의 동공이 극도로 확장되었다.
신녀가 말하는 ‘그분’이란 틀림없는 천마, 즉 마신일 터!
‘어디에?’
천마가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광대무변한 존재감을 드러냈을 것이다.
한데 어디를 둘러봐도 그만한 존재감을 뿜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을 벌하실 오롯한 이여, 만마전을 지배하는 존귀한 마신이여, 오백 년 예언의 월음(月陰)이 가득 찼나이다! 이 미천한 종의 외침에 답해 주소서!
그 순간 모든 마교도들이 일제히 제단을 향해 몸을 엎드렸다.
수십만 마교도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자, 거대한 인의 파도가 철문 밖까지 물결쳤다.
그야말로 장관!
이윽고 신녀의 몸이 여전히 허공에 부유한 채로 제단의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곧 그녀의 기다란 섬섬옥수가 한 교도를 가리켰다.
-그대, 성화의 품에서 불타오를 예비된 자여, 일어나 고개를 들어라.
모든 마교도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조휘 역시 의념의 장막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녀의 손짓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수십만의 마교도들, 그 모든 열기가 사운향을 향하고 있었다.
‘설마!’
사운향이 황홀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예언 속에 예비된 자라니!
이 수많은 교도 중에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그 영광에 그녀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성화의 품에 타오를 자.
그렇게 제물로 선택된 사운향은 천천히 제단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검신 어른으로부터 마교도들의 제례의식을 전해 들은 조휘는, 이제 저 제단 위에서 벌어질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물의 심장을 갈라 움켜 짜낸 피를 그들이 말하는 성화에 뿌리며 염령(念靈)한다.
‘…….’
제단 위로 천천히 멀어져 가는 사운향의 등을 바라보며 조휘는 의미 모를 분노를 느꼈다.
왜?
잠시 지나가는 인연, 그야말로 마교의 교도일 뿐이다. 그녀의 죽음에 굳이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열꽃이 핀 것처럼 온몸이 데워진다.
그렇게 그녀가 제단의 정상에 섰을 때, 마교의 주교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황홀한 표정, 미소가 만발한 얼굴로 스스로 제단 위에 몸을 누이는 사운향.
‘죽는 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미친, 저게 말이나 되는가?
이제 열세 살이나 됐을까 하는 소녀다.
한창 꽃다운 나이, 꿈을 키워가며 삶에 대한 열망을 피워나갈 저 작은 소녀가 죽음에 대해 뭘 안다고!
“저도 성화와 함께 타겠습니다!”
“제게도 영광을 주소서!”
지상으로 내려온 신녀를 향해 연신 부복하는 마교도들.
저들에게 성화와 함께 탄다는 의미는 영생의 약속이다.
신녀가 신실한 교도들을 고아하게 응시하며 흡족한 미소로 손짓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녀의 섬섬옥수에 선택된 이들도 제단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너른 제단에 모여 사운향과 함께 몸을 누이는 마교도들.
그때 신녀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제단 위로 날아갔다.
대제사장이 화려한 제례용 곡도를 신녀에게 바쳤다.
곡도를 보는 순간 하나같이 눈을 뒤집은 채 전신을 부르르 떠는 제물들.
그 미친 광기의 현장을 조휘는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천마고 뭐고 도저히 지켜볼 수 없어 몸을 돌린 그때.
샤르르륵.
제물의 살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조휘의 귀에 들려온다.
“끼야아아아악!”
고통에 찬 사운향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그 순간.
두근!
다시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
데워진 분노가 참을 수 없는 광기(狂氣)가 되어 마침내 조휘의 몸을 거칠게 휘감았다.
마신공(魔神功), 그 광대무변한 암자색 마기가 조휘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쿠구구구구구!
격렬한 진동이 천산을 휘감은 그 순간.
조휘의 신형이 점멸하듯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제단의 정상에 나타났다.
팍!
곡도로 사운향의 가슴을 헤치고 있던 신녀의 손이 단숨에 구속된다.
조휘의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이 신녀에게 향한다.
“신(神)이 한낱 인간의 목숨을 탐낸다고?”
신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대로 주저앉는다.
“그런 옹졸한 자가 신이라면 여기 모인 수십만 명 사람들의 삶이 너무 하찮아지지 않나?”
분노로 이글거리는 한 쌍의 자색 귀화.
신녀는 그런 조휘의 두 눈을 바라보다 그대로 눈물을 쏟으며 오체투지했다.
-신언(神言)을 받듭니다! 신교의 모든 것은 마신(魔神)의 뜻대로!
한 쌍의 분노의 광망이 소스라치도록 깊게 빛났다.
“난 네놈들의 마신이 아니야!”
신녀의 현현(玄玄)한 눈동자가 어느새 옷 새로 삐져나온 조휘의 청옥을 향했다.
-이 미천한 종(從)이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성화마옥(聖火魔玉)일진대 어찌 스스로 존귀함을 부정하시나이까.
조휘가 소스라치도록 놀라며 물었다.
“이게 성화마옥(聖火魔玉)이라고?”
검신 어른은 분명 성화마옥이 마신의 고유 신물이며 천마신교 그 자체를 상징하는 물건이라 했다.
오로지 마신만이 그 권능을 꺼내 쓸 수 있다는 그 전설적인 마교의 보물이 의천혈옥, 아니 이 청옥이라고?
-오롯한 성화는 오직 성화마옥에 의해 깨어나는 법. 이미 마신께서는 마신공의 신위를 드러내셨지 않사옵니까.
그 순간, 모든 마교도들이 엎드려 흐느끼며 마신을 부르짖었다.
-흑흑! 마신이시여!
-성화의 오롯한 주인이시여!
아니 미친! 말도 안 돼!
너무나도 당황한 조휘가 서둘러 제단을 벗어나려는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주교들이 눈물을 흘리며 함께 등에 메고 들고 오는 거대한 석판.
그들이 신실한 마음을 담아 조휘의 앞에 석판을 내려놓으며 그대로 오체투지했다.
‘설마?’
석판 속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도식들!
그런 도식과 함께 수없이 많은 한글이 각주로 첨언되어 있다!
그 필체!
조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검총을 만든 자의 것이라는 것을.
-신교의 종들이 예언의 마신께 천마삼검(天魔三劒)을 바치나이다!
천마삼검(天魔三劒)!
검신 어른조차 전설로만 접했을 뿐 실제로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던 마신의 독문 검식이다.
이는 엄청난 세월의 격차가 그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신은 검신으로부터 무려 삼백 년 전의 무인.
한데 저 석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철두철미한 성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마치 틀로 찍어 낸 듯한 필체.
그것은 틀림없이 조휘가 검총에서 본 현대인의 필체, 그 한글이었다.
조휘가 마신공을 풀고 검천전능지체의 공능을 일으켰다.
이어 백색으로 물든 그의 두 눈이 석판의 물리학적 도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석판을 살피던 조휘가 점점 경악의 얼굴로 변했다.
천검류와는 전혀 궤가 다른 검식!
‘이런 걸 인간의 몸으로 펼칠 수 있다고?’
화인(火印)처럼 조휘의 두 눈에 박히고 있는 천마삼검!
이건 마치 오로지 공격과 파괴만을 위한 광기 그 자체다.
순간적으로 단면만 살폈음에도 그 처절한 광기에 조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미, 미쳤어!’
어떻게 인간이 이런 생각을?
이건 무공이라는 범주를 벗어났다.
‘아!’
그제야 새삼 깨닫는 조휘.
마신공(魔神功)!
천마삼검은 그 영겁의 성화를 일신에 새긴 자만 펼칠 수 있는 검식이었다.
마신공의 무한에 이르는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기수식도 펼치기 전에 내부의 모든 기혈이 뒤엉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마치 데칼코마니의 합쳐진 면처럼, 마신공과 천마삼검은 완벽한 합(合)을 이루고 있었다.
순수한 파괴력만으로 평가한다면 천마삼검은 검신의 천검류를 능가했다.
하지만 이건 뒤를 생각지 않는 검초.
무한에 가까운 마신공의 공력으로도 저 천마삼검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을 정도다.
단 삼검(三劒) 만에 마신의 모든 것을 쏟아 내는 느낌.
그제야 조휘는, 신들 중 최강은 검신이라는 강호의 풍문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신은 뒤가 없다.
아무리 그의 삼검이 천하를 찢어발기는 검초라 해도 만약 검신이 견뎌 버린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마신공의 공능을 모두 쏟아 낸 이상 검신의 공공력을 막을 길이 없는 터.
하지만 검신 어른이 마신의 천마삼검을 견딜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화산에서의 신과 같았던 검신 어른의 무공을 모두 지켜본 마당인데도 말이다.
천마삼검의 위력은 그만큼 파천황(破天荒).
실제로 겨뤄 보지 않은 이상 모든 가정은 무의미했다.
‘동수(同手)다.’
검신 어른이 이 석판을 함께 봤다면 얼마나 놀라셨을까.
더욱 진득하게 석판을 살펴보는 조휘.
그렇게 석판을 살피면 살필수록 조휘는 확신이 더해졌다.
‘분명 이것은 검총 이후 그의 무공.’
그 말인즉 검총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유적이란 뜻.
이 현대인의 유물들을, 검신과 마신이 발견한 시대가 단지 달랐던 것뿐인가?
그럼 검신의 무공도 마신의 무공도 그 뿌리가 다 고대의 현대인이라고?
도대체 그 현대인은 무림의 역사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들의 무공을 무슨 운명의 주인공처럼 동시에 익히게 된 또 다른 현대인, 즉 나는 또 뭐고?
이내 조휘의 시선이 청옥, 아니 성화마옥을 향했다.
‘여기에 내 운명이 담겨 있다?’
조휘는 기분이 더러웠다.
이 머나먼 천마성까지 온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무슨 거창한 운명적 힘에 이끌려 왔다고?
고작 어린 소녀를 살리고자 한 일이, 어떤 신적인 존재에 의해 예비된 길이라고?
운명은 니미!
애초에 그런 게 있었다면 현대에서부터 재벌가의, 유력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났겠지.
자신의 전생은 오로지 좌절과 실패의 역사. 운(運)이라고는 단 한 점도 없는 삶이었다.
이제야 살 만하다 생각될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철이 들었다 여겼을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공사판, 배달 일을 전전하며 칠 년을 노력했지만 9급 공무원 시험 하나 붙질 못했다.
애인과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고, 남은 것은 오로지 삶의 고달픔, 가족을 향한 그리움뿐이었다.
무림에 환생하고서도 애초에 그리 거창하게 살고자 하지도 않았고, 그저 그 빌어먹을 돈만 벌 수 있다면 죽을힘을 다할 뿐이었다.
무슨 신이 점지한 자?
‘거부한다!’
그렇게 조휘는 이 모든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미지의 존재를 향해 맹렬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조휘가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는 주교들을 훑으며 짓씹듯 말했다.
“이 미치광이 광신도 마교 놈들아. 다시 한 번 말한다. 난 결코 네놈들이 기다려 온 마신이 아니야.”
신교의 고수들은 자신들을 ‘마교도’라 칭한 자들을 결코 살려 두지 않는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짓밟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들의 신이자 성화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마신의 입에서 ‘광신도’니 ‘마교’니 하는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주교들의 동공에 서려 있는 신실함은 여전했다.
“아아! 이 천한 종의 미욱함을 더욱 꾸짖으소서!”
“천마이시여! 이 천한 종들을 성화로 멸하소서!”
그야말로 절대복종의 뜻을 담은 오체투지.
조휘가 식겁한 얼굴을 했다.
“어휴 개소름. 겁나 광신도 같은 놈들.”
“아아, 천마이시……!”
“시끄러!”
그 시끄럽다는 단 한마디에 수십 만 인파가 모인 거대한 천마성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적막으로 휩싸였다.
조휘가 천천히 제단을 내려가며 신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경고 하나 하지. 앞으로 결코 날 찾지 마. 아니 아예 네놈들 모두 신강 땅을 벗어나지 마. 만약 네놈들이 중원에서 활동하는 걸 내가 본다면…….”
조휘가 히죽 웃었다.
“이 제단 아래에 너희들을 모두 모아 놓고, 내게 바친 그 천마삼검으로 모조리 죽여 주겠다.”
신녀가 공손이 머리를 조아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은 마신님의 뜻대로…… 그저 뜻대로 하소서. 미천한 종들은 그저 따를 뿐이옵나이다.”
곧 조휘의 두 눈이 암자색 귀화로 물들자 그의 조가철검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가볍게 철검에 올라탄 조휘가 다시 신녀를 응시했다.
“미친년.”
피식 웃던 조휘가 눈짓으로 제단 위의 사운향을 가리켰다.
“저 아이나 살려 놔라.”
그렇게, 신화 속의 여동빈과 삼신 중 오직 검신만이 그 신위를 보였다는 상상 속의 경지 어검비행(御劒飛行)이 삼백 년 만에 다시 강호에 드러났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멀어져 가는 조휘의 모습을 응시하던 신녀가 대제세장과 주교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부로 본 교는 신교(神敎)로 개명합니다.”
마신께서 지상에 강림하셨으니 이제부터 신교.
“그리고 모인 교도들을 모두 신교로 들이세요. 모두 들이지 못한다면 신교를 확장하세요.”
대제사장의 얼굴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교를 확장하는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신교의 바깥에서 살아가던 하교도들까지 모두 먹이고 재우는 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엄청난 재정이 소모되는 일입니다.”
순간 신녀의 두 눈에 처절한 광기가 일렁인다.
“천마님의 명을 거역하시는 겁니까? 대제사장께서는 성문으로 막지 않고도 하교도들까지 모두 통제할 방도가 있으신가요?”
“아……!”
신녀가 저 멀리 점으로 변해 가는 마신을 또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천마님의 신언입니다. 신교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은 신언이 있었나요? 정녕 저분의 의지가 실현되길 바라시는 겁니까?”
누가 신언의 위대함을 모르나?
하지만 그 의지가 신교의 멸망이라니!
그런 불경함을 읽었는지 신녀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분명 마신님은 지금의 신교를 증오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께서는 그 이유를 따지시렵니까?”
“아, 아니외다.”
또다시 신녀의 전신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모든 것은 성화의 뜻대로.”
“성화의 뜻대로.”
대제사장은 주문을 외며 엎드렸으나 그의 두 눈에 악독한 빛이 스치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 * *
조휘가 검에 올라탄 채 하늘을 날며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곧 그가 한껏 상쾌해진 얼굴로 지상을 바라봤다.
그 거대했던 사구의 물결들이 마치 조그마한 개울가의 파문처럼 보인다.
“하하하하!”
마신공을 익힌 후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기어검술로 몇 번 검초를 펼치고 나면 엄청난 탈력감이 몰아쳐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아무리 의념의 공부를 펼쳐도 내공과 정신력이 마르지가 않았다.
‘무협 작가님들! 정말 죄송합니다!’
환생 초기.
중원 지리의 광활함에 절망하며 무협지 속 주인공들이 사천성, 안휘성을 휙휙 날아다니는 거, 그거 다 개구라라며 작가님들을 깠었는데!
‘죄송합니다. 이렇게 제가 날고 있네요.’
이불킥 좀 하면 어떤가.
창공을 누비는 것이 이렇게 상쾌하고 편안한 것을.
‘아, 돌아가고 싶다.’
이 정도 속도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삼십 분이면 족할 것 같았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벤츠, BMW가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때 멀리 오아시스가 조휘의 눈에 들어왔다.
오아시스로 하강하여 사뿐하게 철검에서 내린 조휘가 가죽 부대에 물을 가득 담았다.
온갖 독충과 동물들이 몰려드는 오아시스의 물은 그야말로 세균과 대장균으로 가득한 독수(毒水).
현대인 시절 다큐충이었던 조휘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대로 삼매진화를 일으켜 가죽 부대를 매만지는 조휘.
부글부글.
한참이나 그렇게 끓이더니 곧 빙공을 일으켜 차갑게 식힌다.
아아!
정말 무공이 너무너무 좋다.
꿀꺽꿀꺽!
“크으으으!”
다시 날아오른 조휘!
그렇게 조휘가 신강을 가로질러 청해를 모두 횡단하는 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도착한 당가타 앞.
조휘는 사방에 그윽한 물내음, 이 습기, 이 안개가 너무 좋았다.
그래, 이게 중원이지.
촉산의 개야 짖지 마라.
이제 나는 이 축축함마저도 좋구나.
메마른 사막, 거친 신강 땅에서 거의 세 달 만에 돌아왔으니 조휘는 당가조차 반가웠다.
암왕이 인정한 조휘!
그의 인상착의는 이미 당가에서 유명했다.
그가 천마성 사천지부로 홀로 정찰을 나간 것이 벌써 석 달째. 그렇지 않아도 당가는 조휘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외원 순찰당주 당학수! 조 소협을 뵙소이다!”
조휘가 정중한 예로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당학수에게 마주 포권하며 물었다.
“가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어서 함께 가시지요.”
“예.”
그렇게 순찰당주의 안내를 받아 조휘가 도착한 곳은 다행히 어두컴컴한 암왕전이 아니라 내원의 별채였다.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정좌하고 있는 당무호.
그는 미세한 우모침(牛毛針)을 한가득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반대편을 바라보니 작은 과녁 속에 우모침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휴식 중에도 암기술을 연마하고 있다니!
조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런 당무호에게 다가갔다.
“가주님.”
그제야 번쩍 두 눈을 뜨는 당무호.
조휘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무호는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
이 정도 인기척을 냈으면 벌써 자신을 느껴야 정상이 아닌가?
조휘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당무호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거 조 소협에게 당가 비기의 약점을 또 하나 들키는구려.”
“약점이요?”
당무호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독과 암기를 다루는 당가비기는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무공이오. 상대는 물론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무공이라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오.”
조휘는 순간 만천화우를 떠올렸다.
도대체가 어떻게 쉰네 자루의 비도를 동시에 통제하며, 또 무슨 조화를 부렸길래 수백 수천 개의 환영으로 분화될 수 있는지 그 수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미친 비도술은 일반적인 인간의 연산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종류였다.
천검류에도 천하유성검이라는 비슷한 종류의 환검(幻劒)이 있었지만, 그런 천하유성검도 만천화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 당가의 비기 중에 두뇌의 연산력을 강화하는 비기가 있는 겁니까?”
조휘의 그 말에 당무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그것을?”
조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두뇌가 오묘한 것이, 하나를 지나치게 발달시키면 다른 하나가 죽는 법이지요.”
“호오…….”
시각에 장애를 입은 사람은 후각과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다리를 잃은 사람은 상체의 힘이 몇 배로 상승하게 된다.
집중력과 연산력에 몰빵한 두뇌는 이처럼 감각이 죽어 버린다. 그건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가 아닌가.
“일정 방위 안에서는 무적(無敵)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밖으로 벗어나면 초감각이 무뎌지게 되는 거죠?”
“이거 원 다 털린 기분이오.”
조휘가 예의 장부를 펼쳐 구석에 적었다.
“정말 의외로군요. 암기의 당가가 역설적이게도 살수들에게 가장 약하다라…….”
“그걸 왜 또 적으시오…….”
“아, 죄송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록하는 게 습관입니다.”
“…….”
당무호가 멋쩍은 표정을 하다가 별안간 진중한 얼굴로 되었다.
“그래, 진정 천마가 출현했소? 천마성의 동태는 어떠하더이까?”
조휘가 싱긋 웃었다.
“천마는 없고요. 그냥 멸문했다고 생각하세요.”
“며, 멸문? 천마성이?”
조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마성. 멸문이요.”
천마성이 멸문?
당무호는 너무나 황당해서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새 무림맹이 나서기라도 했단 말이오?”
질문하면서도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는 당무호.
그도 그럴 것이 천마성의 권역이 대체 어딘가?
그 험한 청해성을 가로질러 메마른 사막을 모두 건너야 신강.
신강 땅에 도착하고도 서쪽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천산, 기련이다.
그야말로 새외.
거리만 따진다면 그 오지라는 남만보다도 훨씬 멀었다.
천마성을 정벌하려면 최소 십만은 동원해야 할 텐데, 그런 엄청난 병력을 동원했다면 사천과 청해 일대에 반드시 소문이 나게 되어 있었다.
“아, 무슨 전쟁이 벌어진 게 아니라 사실상 멸문이나 봉문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조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니 당무호는 괜스레 움찔거렸다.
“아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시오. 너무 황당하지 않소이까. 사천지부의 마교 놈들, 그 독종들의 지독함을 수도 없이 겪은 나요. 그런 놈들이 멸문했다고? 천 년 동안 끄떡도 안 하던 놈들이?”
조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다 사천지부가 있는 서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좋아요. 그동안 사천지부를 정찰하고 계셨겠죠? 그곳에 개미 새끼 한 마리나 있습디까?”
“음…….”
“지금 당장 천마성의 사천지부를 허물고 그곳에 당가의 세가기를 꽂아 보시지요. 마교 놈들의 반응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닙니까.”
당무호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떠졌다.
“사천지부를 허물라……?”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해 본 일.
마교 놈들이 얼마나 음험하고 지독한 놈들인데!
“와! 천하의 독종 당가가 후환이 두려워 바들바들 떠시네요? 지금 쫄리시는 겁니까?”
조휘가 도발하듯 더욱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천지부를 허물어 버리시죠. 그놈들 몇 달째 아무런 동태도 없었을 텐데 뭘 그리 걱정을 하십니까.”
곤혹스러운 표정의 당무호.
세 달 동안 사라졌던 자가 어떻게 이토록 사천의 정세를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정말 그대를 믿어도 되겠소?”
“거참, 속고만 사셨나.”
“본인은 세가주요. 내 결정에 가문의 명운이 걸려 있단 말이오.”
조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품속에서 장부를 꺼냈다.
“뭐, 사천지부를 허물든 말든 가주께서 알아서 잘 하시고요. 일부터 합시다. 철광석은 언제부터 얼마나 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계약부터 하시죠.”
“그 문제라면 총관에게 일러두겠소. 그와 상의하도록 하시오.”
남궁세가의 남궁수처럼 이 사내도 어쩔 수 없는 고상한 무인이라는 건가.
마치 장사치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듯 시선을 외면하고 마는 당무호.
꽤나 자존심이 상할 법한데도 오히려 조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연간 금화 수천, 수만 냥이 걸린 거래를 총관에게 맡긴다?
상대가 가주가 아니라 총관이라면 오히려 땡큐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도 유분수지. 흐흐흐.
“알겠습니다. 그럼 그 문제는 총관님과 상의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천빙령은요?”
“이미 독룡각에 일러 준비해 두었소. 양은 다섯 냥이오. 그 이상은 불가하오. 천빙령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 쪽에서도 최대한 성의를 보였다는 것을 그대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조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당가불망은원! 누구보다 제가 잘 알지요. 저 역시 차후에 가주님께 선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당무호도 환하게 웃었다.
“기대하겠소.”
* * *
조가대상회 강서지부 내 회의실.
회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는 조가대상회의 수뇌들은 한결같이 고심하는 태가 역력했다.
이 총관은 제갈운이 내민 결재 서류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불가합니다! 합비의 재고를 더 빼 오다니요! 그렇지 않아도 합비의 계열상주들이 폭동을 일으킬 기세입니다!”
제갈운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그럼 강서장군부를 어떻게 달래라고요. 모든 위관들이 조가성심당의 음식들을 고집한다니까요? 병사들까지 먹겠다는 걸 겨우 잠재워 놨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일개 병사 놈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걸 매일 처먹습니까?”
이 총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흑청수나 육겹면포의 가격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웬만한 요리의 대여섯 배 가격.
장일룡의 미간이 와락 구겨진다.
“그게 다 그 미친 육의문 장군 때문이우. 한빙주 몇 동이를 거나하게 처드시더니 휘하의 병사들에게 한 달 동안 조가성심당의 요리를 마음껏 맛보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지 뭐유. 대장부라는 육 장군이 말을 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마 본인도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거요.”
제갈운이 화들짝 놀랬다.
“어쩐지 기껏해야 백 명도 안 되는 위관들이 먹는 양치고 너무 많더라니! 결국은 병사들의 몫까지 챙기려는 모양이네요!”
남궁장호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육의문 장군이 친히 친필 서신을 보내 요구해 온 마당. 이건 들어줄 수밖에 없다. 외통수야.”
한 차례 고심하던 제갈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결정했다.
“어쩔 수 없죠. 흑천련 몫을 삼 할 정도 돌리세요.”
쾅!
“불가! 불가하다!”
부술 듯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난 흑의 노인.
매번 어깃장을 놓는 저 죽일 놈의 노인은 흑천련이 파견한 무영왕이다.
이제는 욕지기를 참을 수 없을 지경.
장일룡이 얼굴을 험상궂게 구겼다.
“거 싯팔 진짜 해약 끊는 수가 있수다?”
무영왕이 의자를 물리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끊어라 이 잡놈들아! 독(毒)에 뒈지든 련주님께 뒈지든 어차피 매한가지!”
“저 노인장 또 시작이네.”
눈짓을 주고받던 장일룡과 염상록이 그대로 무영왕의 팔과 다리를 잡고는 회의장 바깥으로 옮긴다.
“놔라! 놔라 이 천하의 잡놈들아! 네놈들은 장유유서의 도도 모르느냐!”
장일룡이 피식거렸다.
“뭐래. 그림자 뒤에 숨어서 평생 동안 남의 모가지나 탐닉하던 노인네 주제에.”
“이, 이익!”
하지만 흑천련이 괜히 무영왕을 보낸 게 아니다.
무영왕의 신형이 한 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곧 유령 같은 보법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젠장, 또인가.”
“쳇!”
이내 장일룡과 염상록이 회의장 내부를 샅샅이 뒤진다. 천장, 창틀 뒤, 금고 뒤 등 그림자가 드리운 곳은 모조리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 무영왕을 물로 보는 것이냐? 눈을 씻고 찾아봐라. 찾을 수 있나. 낄낄!
저 변태 같은 노인네는 또 끝끝내 숨어서 회의를 지켜보다 지들 련주한테 보고하겠지.
그럼 또 팔왕과 수하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사업장을 훼방 놓겠다며 협박할 테고.
흑천련 이 새끼들은 도대체가 포기를 모른다.
그 순간.
이 총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 회장님!”
“어? 어!”
회의실로 들어서는 자는 틀림없는 자신들의 회장 조휘였다.
조휘가 간부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곧 천장의 한 구석을 바라보다 두 눈을 매섭게 빛냈다.
그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자색 귀화가 스치자.
“으아아악!”
마치 흡입되듯 조휘의 오른손을 향해 빨려 들어온 무영왕!
“겨, 격공섭물? 사람을?”
“저럴 수가!”
아니, 무영왕이 누군가?
그의 유령신보(幽靈神步)는 사도 제일의 보법.
신기에 가까운 유령신보와 은신술만으로 흑천팔왕의 위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견 그 처세가 가벼워 보이긴 하나 그래도 팔왕의 일인.
화경에 이른 무인답게 그의 쇄검술 역시 강호일절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 자의 모가지가 저렇게 조휘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니!
“노인장은 누구시죠? 왜 이곳에 숨어 있는 겁니까?”
제갈운이 황급히 다가와 반갑게 웃었다.
“흑천련에서 파견 온 자예요. 그다지 신경 쓸 것 없으니 놔 드리세요.”
“흑천련?”
가득 미간을 찌푸리는 조휘.
조가대상회의 회의실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흑천련의 고수라.
조휘는 무영왕의 멱살을 그대로 일으켜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댔다.
“죽고 싶단 건가.”
무영왕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한 조휘의 두 눈을 멍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부르르 떨며 옷만 남기고 사라졌다.
스팟!
조휘는 손에 들린 흑의장포를 피식 웃으며 바라보더니 이내 홱 하고 던져 버렸다.
“회의 재개하죠. 제갈 부회장님. 그간의 일을 간략히 보고해 주세요.”
“아, 알겠어요!”
제갈운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조휘가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전에는 또래의 친우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느껴지는 위압감의 결이 달랐다.
마치 무림맹 최정상부의 권력자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
그저 그의 눈만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손에 땀이 흠뻑 밸 지경이었다.
곧 제갈운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듣고 있는 조휘.
예전이었다면 보고 내용에 따라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며 감정을 드러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야말로 일말의 동요도 없는 얼굴.
제갈운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잘하고 계셨네요.”
그런 조휘의 음성이 들려온 그 순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제갈운.
그러나 말만 칭찬하는 투였지 그 얼굴은 아직도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깊게 가라앉아 있는 조휘의 음성에 제갈운은 더욱 긴장했다.
“분명 남궁 가주께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세가의 무사들을 보내 주셨을 텐데요? 한데 제갈 부회장님의 보고에서는 그들을 활용한 흔적을 찾을 수 없네요. 그랬다면 흑천련의 강짜는 몰라도 동네 왈패들에게 입은 피해는 꽤 줄일 수 있었을 텐데요.”
제갈운이 난감한 얼굴을 하다가 시선으로 남궁장호를 가리켰다.
조휘가 피식 웃었다.
“남궁 형님의 눈치를 보셨던 겁니까?”
“그런 것도 있었지만 흑천련은 늘 팔왕이 움직였어요. 회장님께서 부재중인 이상 저희 쪽에서는 대적할 만한 고수가 없었어요.”
“저는 흑천련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소한 시비들로 입은 피해를 왜 줄이지 못했냐는 거죠.”
“……죄송합니다.”
채찍을 줬으니 당근을 줄 차례.
조휘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반면 광맥의 개발을 완료하고 석탄을 생산하기 시작한 일은 굉장히 고무적이군요. 시기가 아주 적절합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팽 팀장이 꽤나 고생했겠군요.”
“감사…… 그런데 시기가 적절하다니요?”
조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시선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서둘러 다가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조휘 일행들.
“뭐, 뭐야 저게!”
“저, 저게 다 철광석이라고?”
끝도 없이 이어진 작은 수레들의 행렬!
한데 수레를 끄는 동물이 말(馬)이 아니라 노새(騾)다.
노새라면?
맹렬히 두뇌를 회전하던 제갈운이 신음성을 흘렸다.
“세상에! 사천의 철광석이군요!”
저토록 많은 노새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면 촉산의 험로를 지배하고 있는 가문, 사천당가밖에 없었다.
과연, 철의 사천이라더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양이지 않은가.
저 정도 양이라면 안휘에서 보내오는 양의 열 배는 되어 보였다.
“이 정도 행렬이 보름마다 한 번씩 올 겁니다. 이제 H빔, 아니 철골 만들어야죠.”
철방을 관리하고 있는 이 총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아니 저 많은 걸 다……!”
조휘의 매서운 눈초리가 이 총관을 향했다.
“소화하실 수 있겠죠? 제 기억으론 분명 주괴공방으로 오는 철광석이 너무 적다고 투덜거리셨는데.”
“그래도 저런 양은 너무…….”
“아 그래요?”
“하, 하겠습니다!”
그제야 흡족한 얼굴이 된 조휘가 별안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 끊으세요.”
“예? 뭘?”
조휘가 흑천련 총단 방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흑천련에 대한 조가대상회의 모든 공급을 중단합니다. 미친개처럼 굴어 대니 이제 길들여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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