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32
32 章>
장일룡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파파파파파!
창처럼 뾰족하게 짓쳐 오다가, 때론 뱀처럼 영활하게 분화(分化)하더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 들어온다.
편(鞭)이 이토록 상대하기 어려운 병기였단 말인가!
푸슉!
“크아아악!”
마치 투석기에 맞은 듯한 강력한 충격이 어깨로부터 전해 왔다.
장일룡이 힐끔 자신의 어깨의 살펴보니 피멍이 회전하는 물결처럼 번져 있었다.
‘전사력(轉斜力)이라고?’
소름이 돋았다.
도검창(刀劒槍)이면 몰라도 저렇게 긴 채찍에 전사력을 싣는다?
강력한 회전력을 싣는 전사력의 무공은 단순히 무공의 경지가 높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병장기를 제 몸처럼 부릴 수 있는 천부적인 감각, 그런 엄청난 재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경지!
저 늙은 독편살왕은 그야말로 타고난 무공의 천재였다.
촤아아아악!
독편살왕이 채찍을 기다랗게 늘어뜨린 채 예의 음침한 미소를 빛냈다.
“꽤 단단한 몸뚱이군. 본 왕의 혈강편에 적중당하고도 팔이 떨어져 나가질 않다니.”
독편살왕은 그렇게 한마디만 늘어놓더니 곧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허투루 변수를 초래하지 않는 그의 철두철미한 심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쐐애애애애액!
파파파팟!
장일룡도 바보가 아니다.
채찍이란 무기는 공간을 장악하기 쉽고 신랄한 변초를 구사할 수 있는 극장점이 있었지만 이처럼 구속당하기 쉽다는 단점도 있다.
극도의 영세철갑신을 일으킨 채 온 힘을 다해 채찍을 부여잡고 있는 장일룡!
양 손바닥이 찢어지며 극통이 밀려왔으나 장일룡은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화경의 경지는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채찍을 통해 엄청난 기운이 몰려들자 결국 장일룡의 두 손이 터져 나갔다.
“크아아아악!”
덜덜덜.
외피의 대부분이 사라져 새하얀 뼈를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두 손.
그렇게 목내이의 그것처럼 변한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장일룡이 울컥 피를 쏟아 냈다.
화경에 이른 무인의 공격이란 도무지 막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영세철갑신으로 버텨 보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저 무시무시한 안광을 빛내고 있는 살수 놈들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은 상황.
공포(恐怖)!
강호에 출도한 이래 처음으로 접하는 두려운 감정, 그 더러운 기분이 뱃속으로부터 치밀고 있었다.
장일룡이 야차처럼 구겨진 얼굴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짰다.
“개새끼! 내가 네놈은 죽이고 간다!”
네놈이 아무리 화경의 무인이라고 하나 대산(大山)의 혼(魂)을 무시하진 마라!
장일룡이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자 독편살왕이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혈강편을 회수했다.
“조심!”
장일룡의 사정거리 내에 있던 모든 특살귀령대원들이 독편살왕의 뒤편에 섰다.
곧 장일룡의 전신이 번들거리며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진무역천권이 무서운 것은 바로 영세철갑신과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곧 맹렬한 투기가 그의 전신에 아로새겨졌다.
전 내공은 물론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린 최후 절초의 기수식답게, 장일룡은 순간적으로나마 화경에 이르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콰쾅!
진각을 밟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포탄처럼 짓쳐 든 장일룡이 뼈가 드러난 두 주먹을 출수했다.
강대한 기파가 일더니 기로 형상화된 거대한 주먹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불어났다.
진무역천권(眞武逆天拳).
제육권(第六拳).
패도무극멸황(覇道無極滅荒).
이 한 수의 권초로 녹림대왕은 대산을 지배했다.
콰콰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십 개의 구덩이가 생겨난다.
그야말로 파천황의 기세!
독편살왕의 혈강편이 무수한 그림자를 일으키며 자신에게 날아든 권풍과 맞부딪쳤다.
콰콰쾅!
자욱한 흙먼지로 사위가 어지럽게 변했을 때 독편살왕은 섬찟한 느낌이 들어 뒤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 짐승같이 짓쳐 든 장일룡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경한 특살귀령대원 몇몇이 그에게 잔악한 살초를 퍼부었으나 장일룡의 두 눈은 오직 독편살왕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등과 허리에 세 자루의 검이 꽂힌 채 그대로 독편살왕을 향해 짓쳐 드는 장일룡!
독편살왕이 기겁을 하며 채찍을 휘둘렀으나.
텁!
장일룡이 한 손으로 채찍을 부여잡은 채 그대로 머리를 들이받았다.
빠각!
“큭!”
그건 마치 쇠와 부딪힌 느낌!
진무역천권(眞武逆天拳).
제이권(第二拳).
귀갑칠련타(龜甲七連打).
녹림대왕의 대인전 최강 권초, 귀갑칠련타의 위력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퍼퍼퍼퍼퍽!
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독편살왕의 몸에서 퍼져 나간다.
물 흐르듯 이어진 일곱 연격!
독편살왕이 정신없이 물러나며 시뻘건 피를 울컥 토해 냈다.
“꽤애애애액!”
절로 꿇어진 무릎!
독편살왕이 놀라움보다는 황당함이 서린 얼굴로 서둘러 자신의 몸을 살폈다.
지독한 흉통!
갈비뼈가 최소 서너 대는 으스러진 것 같았다.
더욱이 발경(發勁)의 묘리가 내부를 휘저어 놓아 내상 역시 가볍지 않았다.
‘이 새파란 놈이……!’
이제 후기지수에 불과한 놈의 손속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이런 재능이라면 앞으로 반드시 후환이 될 놈!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했다.
모든 내가진력을 다 짜냈으니 이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한데, 놈이 웃고 있었다.
히죽.
갑자기 장내의 공기가 으슥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독편살왕이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어 허공을 바라본다.
서리처럼 일렁이기 시작한 새하얀 기운들!
장일룡이 누런 이를 더욱 드러냈다.
“얼음이다 이 새끼들아!”
장일룡의 살벌한 등치와 무식한 언변을 접한 이들은 대부분 착각을 한다.
머리가 둔할 거라는 착각.
-일각(一刻)만요.
일각 전 들려온 한설현의 전음.
전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녀의 운기행공이 막바지에 이른 터였다.
저 무식하게만 보였던 장일룡의 모든 초수들이, 사실은 어떻게 하면 반드시 일각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을지 철저한 계산하에 이루어진 초수였던 것.
결국 관도의 허공에 새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환상처럼 유려하게 한설현이 현신했다.
곧 그녀의 섬섬옥수에서 눈부신 백광이 흘러나왔다.
소름 끼치도록 냉랭한 한기가 사방에서 일어나자.
빙백신장(氷白神掌).
제오결(第五決).
설설백천하(雪雪白天下).
거칠게 일어난 북풍한설이 관도를 새하얗게 수놓는다.
쏴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천지가, 천하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방원 이십 장을 극음의 한기로 뒤덮어 버리는 빙백신장 최강의 광역절기가 기백 년의 세월을 격하고 마침내 강호에 드러난 것이다.
* * *
조휘로서 가장 불안한 곳은 한설현 쪽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애써 진출한 강서 조가대상회는 사실상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천상운차를 몰고 갔으니 틀림없이 관도 변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콰앙!
일보에 수십 장씩 나아가는 검천전능보의 공능은 과연 엄청났다.
예전에는 내공력의 소모가 너무 막심하여 펼칠 수 없었으나 마신공을 익힌 후로는 아무리 보법을 일으켜도 내공이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관도를 질주하면 할수록 사방이 거슬렸다.
자신의 감각권 내에 감지되는 살기가 한두 곳이 아닌 상황.
분명 그곳에는 조가대상회의 사원들이 목숨을 잃어 가고 있을 것이다.
쿵!
어느덧 관도의 중심에 우두커니 멈춰 선 조휘.
이건 마치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아닌가.
‘제길!’
잠시 고심하던 조휘가 다시 신법을 일으켰다.
콰앙!
이번에 날아간 방향은 포양호 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한설현이 귀한 인재이자 여인이긴 하나 그래 봐야 장일룡과 함께 둘이다.
더욱이 그들은 무공을 익힌 강호인. 거기에 한설현은 화경에 이른 고수이지 않은가.
반면 포양호 변 상권 쪽에는 간절히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회의 사원들이 수천 명.
구할 수 있는 인명의 수를 생각하면 사실 고민하는 것조차 죄일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한설현과 장일룡이 무사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그렇게 조휘가 간절한 마음으로 반각 정도 내달렸을 때, 드디어 골목어귀로 한 무리의 사원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회, 회장님!”
“흑흑! 회장님!”
조휘를 발견하고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 내는 사원들!
“아곡 사원! 연천기 사원! 문호원 사원!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까?”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에는 하나같이 핏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있는 회장의 세심함에 잠시 놀랐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저희들은 운이 좋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서 서둘러 상점들을 살펴 주십쇼! 흑흑! 동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조휘가 이를 꽈득 깨물었다.
“상회의 분타로 모두 이동하시죠! 그곳은 곧 제갈세가의 진법(陣法)으로 보호될 겁니다! 빨리! 서두르세요!”
콰아앙!
이내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나며 조휘가 귀신처럼 사라지자 사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희게 변했다.
“회장님께 저런 엄청난 무공이!”
“개새끼들! 다 죽여 주십쇼!”
그렇게 허공으로 솟구친 조휘가 단숨에 수많은 살기들을 하나하나 벼려 갔다.
살아남은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혼전(混戰)하고 있는 곳들은 모두 피했고, 상회의 사원들이 분주하게 도망가고 있는 곳도 모두 가렸다.
마침내 그의 두 눈에 숨 막힐 듯한 살기가 드리워졌다.
검극에서 미세한 떨림이 끝없이 피어난다.
갑자기 허공을 격하고 드러난 수많은 점들!
천하공공도의 공간압착점(空間壓搾點)이 거의 모든 흑천련 고수들의 전면에 동시에 등장하고 있었다.
기이한 기시감에 몸을 떨고 있던 흑천련의 고수들이 범위를 넓히기 시작한 공간압착점에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후두두두둑.
운이 좋아 살아남은 흑천련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칼질하던 동료들이 순식간에 허공의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며 곧 핏물로 변해 후드득 떨어진 것이다.
이런 게 무공이라고?
전장을 지휘하고 있던 천살, 사사살혼(邪邪殺魂) 악무린이 사방을 향해 소리쳤다.
“의념공(意念功)이다! 악귀탈 놈이 나타났다!”
오늘의 모든 임무들은 오직 조가대상회의 악귀탈을 끌어내기 위한 작전!
악무린이 소매에서 꺼낸 신호탄을 곧바로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피유유유유융!
악무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임무가 끝난 것이다.
아무리 사파에 몸을 담고 있긴 하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을 죽이는 것은 영 내키지가 않았던 것.
“악귀탈은 련주님과 팔왕님들이 처리할 것이다! 퇴각하며 잔당을 처리한다!”
순간.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든 그가 홱 하니 고개를 꺾었다.
그의 시야에 칙칙한 어둠이 순간적으로 차올랐다.
우우우우우웅.
정수리, 눈, 입, 목을 차례대로 잠식하며 확장하는 암흑공간의 물결.
“끄르르륵…….”
그의 성대는 아무런 소리도 피우지 못하고 피거품만 게워 내고 있었다.
후두두둑!
결국 한 줌의 핏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악무린!
콰아앙!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 장내에 도착한 조휘가 그대로 철검을 곧추세우며 폭급한 눈을 빛냈다.
장내가 얼어붙었다.
천살이라고 다 같은 천살의 위계가 아니다.
사사살혼 악무린은 대전(大殿)의 천살.
즉 련주님과 함께 대사를 논하는 천살, 화경의 고수였던 것이다.
그런 엄청난 화경의 고수가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한 줌의 혈수로 화(化)했다.
절대경의 경지, 의념의 무공을 실제로 접해 보니 이건 마치 다른 세상의 무공 같지 않은가?
하물며 저 두 눈에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암자색 귀화(鬼火)는 또 뭐란 말인가.
도저히 같은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대무변한 존재감.
흑천대살, 자신들의 련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털썩털썩.
무기를 버리며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는 흑천련의 고수들.
“방금 여기서 쏘아 올린 신호탄. 무슨 신호지?”
흑천련의 고수 하나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악귀탈이 나타났다는 신호입니다!”
“……악귀탈?”
점점 일그러지고 있는 조휘의 얼굴.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란 것이…… 고작 나를 끌어내기 위해?”
“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조휘의 검극이 또다시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부복하고 있던 흑천련의 모든 고수들의 시야에 암흑의 점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 안 돼!”
“씨발, 씨바아아아알!”
후두두두둑!
조휘가 공허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살심으로 들끓는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고 하나, 왜 이렇게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이건 마치 오랫동안 해 오던 것을 다시 깨운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꺼려졌는데.
‘마신공 때문인가.’
마(魔)의 종주라는 마신의 무공.
“뭐 나쁘지만은 않군.”
오히려 자신의 어떤 나약한 단면을 잘라 낸 듯한 기분이다.
곧 조휘가 사방에 불타오르는 상점들을 바라보며 더욱 진한 암자색 귀화로 타올랐다.
“개새끼들.”
콰아앙!
검천전능보를 일으켜 허공으로 도약한 그가 다시 살기를 감지하려는 그때.
그의 시야에 광란처럼 질주해 오는 여덟 고수가 들어왔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신호탄이 쏘아진 방향, 즉 방금 전 자신이 있던 곳.
쿠쿵!
다시 지면에 착지한 조휘가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샤샤샤샥!
어느새 도착해 여덟 방위를 포위하고 있는 흑천련의 고수들.
그중에서도 조휘는 자신의 정면에 서 있는 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흑천대살(黑天大殺) 이경진.
이 모든 일을 지휘한 장본인일 터.
조휘가 말없이 검을 치켜들었을 때, 흑천대살이 소매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철수를 멈추고 조가대상회의 모든 상점들을 향해 다시 공격을 재개하라는 신호탄이다.”
“…….”
조휘가 침묵하자 다시 흑천대살이 음침하게 웃었다.
“네놈의 몸이 수백 개가 아닌 이상 모두 막을 수는 없다.”
조휘가 검을 거두며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았다.
“련주와 팔왕이군. 그런데 한 놈은 어디에 있지?”
조휘는 팔왕을 이미 상대한 적이 있어 그들의 면면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데 독편살왕이 비어 있었다.
흑천대살이 비릿하게 웃었다.
“너희들의 동선은 이미 모두 파악한바, 일을 벌이려면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것이 전술의 정석이지.”
조휘는 그의 말에 곧바로 진의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동선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외부로의 공격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던 제갈운이나 남궁장호, 진가희는 아니라는 뜻.
그럼 관도를 지나고 있을 장일룡과 한설현, 혹은 홧김에 술을 마시러 나간 염상록 중에 하나인데 아무래도 한설현 쪽일 확률이 높았다.
팔왕급의 고수를 염상록에게 붙인다는 것은 인력의 낭비였으니까.
게다가 수없이 회의를 염탐해 온 무영왕은, 한설현이 조가대상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반드시 련주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참으로 놀랍군. 설마 악귀탈의 고수가 조가대상회의 회장 그 자신이었다니. 이토록 젊은 나이에 절대경이라? 강호사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군.”
씁쓸한 웃음을 짓던 흑천대살이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나도 남궁가의 봉공(奉公)인 그대를 죽이기는 싫네. 남궁 놈들과 큰일을 벌이기는 아직 시기상조지.”
천천히 걸어와 조휘에게 서류를 내미는 흑천대살.
“본 좌의 신호탄 한 방이면 다시 학살이 시작되지. 그대의 얼음 공주도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야. 이건 외통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지.”
한데 철권왕이 완강하게 거부의 의사를 내비쳤다.
“련주!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 하오! 크게 후환이 될 놈이란 말이오!”
철권왕은 조휘가 어떻게 강서를 집어삼키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제일지부의 대곳간과 팔왕들의 창고를 차례차례 급습하고, 황실 외척과의 관계를 미리 파악하여 련주를 압박하며, 거짓 무형지독으로 자신들을 수개월 동안 가지고 놀았다.
오 할의 전매권을 준다는 것도 함정.
그 말인즉 오 할 이상은 공급하지 않겠다는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그 오 할이라는 공급량은 흑천련의 팔천 고수들이 소비하는 양을 소름 돋으리만치 정확하게 예측한 양이었다.
애초에 저 사악한 놈은 흑천련과 함께 이익을 나눌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공급할 상품에 대해 무제한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수완이었다.
그것이 바로 저놈의 가장 무서운 점.
음험한 심기만큼이나 지닌 능력 역시 천하에 으뜸인 놈이었다.
게다가 그런 놈이 무공까지 절륜하며 그 경지가 무려 절대경?
지금 죽이지 않고서는 답이 없다.
저런 미친놈이 이십 년만 나이를 더 먹는다면 이 무림은 어떻게 될까?
저놈이 불혹(不惑)을 넘기는 날에는 강호는 무림이 아니라 상림(商林)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상림의 지배자는 저놈일 것이고.
흑천대살이 냉랭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놈을 죽이려면 우리들의 반은 죽어야 될 텐데 자신 있소?
전음을 들은 철권왕이 경악의 얼굴로 굳어졌다.
흑천대살이 누군가?
그의 절대살혼, 회회살천절예(灰灰殺天絶藝)는 사파의 전설이다.
단신으로 모산곡(茅山谷)을 멸문시킨 사파의 절대자, 그런 전설의 흑천대살이 지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놈이 그 정도라고?
사실 이곳에서 서늘한 가슴을 안고 가장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흑천대살이었다.
같은 절대경만이 그 신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
화경인 저들은 모른다.
지금 눈앞의 젊은 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지.
남궁(南宮)이 두렵다는 것은 다 핑계이자 헛소리였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사파가 된 인간들이 후일을 도모하는 혜안을 지녔다는 것은 어불성설.
조휘는 그런 흑천대살과 팔왕의 행동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두 눈이 겨울 하늘의 별처럼 차갑게 빛났다.
흑천련이 합의서로 내놓은 서찰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하는 조휘.
“금화 삼십만 냥의 즉시 상환. 황실 외척을 다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각서. 모든 사업장을 흑천련에 넘기고 합비로 다시 꺼질 것.”
조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차라리 웃어 버렸다.
“게다가 조가성심당과 조가양조장의 모든 조리법을 내놓으라. 그나마 철방은 언급이 없군. 마지막 양심이란 건가?”
화르르르르!
조휘의 삼매진화로 인해 서찰이 모조리 불태워졌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기운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흑천대살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진다.
“뭐? 뭐라고?”
지금까지 그 거대한 기운이 끝이 아니었다고?
조휘의 눈동자가 다시 암자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하자.
푸와아아악!
“크악!”
신호탄을 들고 있던 흑천대살의 손이 터져 나갔다.
* * *
강호의 오랜 역사 속에는 일반적인 무학의 상궤를 벗어난 무공들이 몇 가지가 있었다.
삼신(三神)의 무공은 워낙에 신화적인 경지라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에서는 단연코 북풍신기(北風神技)라 불리는 빙백신장이 압도적이었다.
이 하나의 장법만으로 그 옛날 새외오패는 중원 강호에 거센 피바람을 일으켰다.
쏴아아아아아아아!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물결들이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독편살왕은 정신없이 혈강편을 휘둘러 그런 한음빙기(寒陰氷氣)를 상쇄하려 하였으나, 떨쳐 내는 속도보다 얼음 결정이 달라붙어 채찍이 무거워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크윽!”
화아아아악!
끝내 한음빙기를 상쇄하지 못하고 전신을 허락해 버린 독편살왕.
한음빙기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편살왕의 몸을 한참 동안이나 더 휘감았다.
온몸에 얼음 결정이 덕지덕지 달라붙자 엄청난 한기가 독편살왕의 내부로 침투했다.
대경실색한 그가 정신없이 내공을 일으켜 한기와 맞섰으니, 이것이 바로 빙백신장의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북풍신기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해 볼 것이다.
빙백신장?
무공이 고강한 무인이라면 얼음 따위야 깨고 나오면 그만이지 않은가.
새외대전의 전설을 접한 강호인들은 하나같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얼음에 갇혀 미동도 하지 못했던 당시의 고수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빙백신공에 담긴 극한의 빙정(氷精)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오랜 세월 북해의 매서운 눈보라로 벼려 낸 빙인들의 내공력은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일단 적중된 그 순간부터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빙정의 기운이 내부로 침투해 온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전 내공을 일으켜 극한의 기운과 끝없이 맞서 싸우는 것.
그 후로는 그야말로 밀고 밀리는 절체절명의 연속 그 자체였다.
지금 독편살왕이 꼼짝할 수 없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
그가 힘겹게 동공을 움직여 수하들을 살펴본다.
‘이럴 수가! 모두……!’
운이 좋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얼음에 갇힌 채 한음빙기와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개중에는 이미 내부로 치미는 한음빙기를 도저히 상쇄할 수 없어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죽어 가는 수하들도 있었다.
‘크으으윽!’
독편살왕은 새외대전을 묘사했던 당시의 천허자(天虛子)를 부관참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묘사는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지 않은가!
탓.
가볍게 지상으로 착지한 한설현이 서둘러 장일룡의 상세를 살폈다.
“괜찮은가요?”
장일룡은 온몸이 찢어질 듯한 아픔보다도 마치 얼음 세상으로 변해 버린 듯한 광경에 더욱 황당해하고 있었다.
반짝반짝.
“와 씨.”
빙백신장의 손속에는 예외랄 것이 없었다.
관도 변 산천초목들과 대부분의 흑천련 새끼들이 모두 얼음 결정으로 화(化)해 있었다.
이게 무슨 무공이냐 재해(災害)지!
마치 위대한 자연의 분노를 일시에 처맞은 듯한 광경이었다.
한설현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장일룡.
저 가녀린 몸, 저 섬섬옥수, 저 어여쁜 얼굴로 저 많은 흑천련의 고수들을 일장(一掌)에 쳐 죽이다니!
죄송하오. 본인의 짝으로 그대는 너무 과분하신 것 같소.
잠시나마 흠모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
그때, 갑자기 야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샤샤샥!
매서운 눈을 빛내며 등장한 진가희와 염상록이 그대로 얼음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죽여!”
“응!”
쩌저적!
쩌저저적!
날렵한 몸놀림으로 얼음들을 파괴해 가는 진가희와 염상록의 움직임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합격술을 익힌 것마냥 그 합(合)이 실로 눈부셨다.
한데 미리 철저하게 계산한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저 새끼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장일룡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이미 이곳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팔왕 중에서 최상위 서열을 자랑하는 독편살왕과 련주 직속의 제일무력단체 특살귀령대.
도저히 맞서 싸울 각이 안 나왔을 테니 숨어서 기회만 노리고 있던 것이다.
“누가 사파 새끼들 아니랄까 봐.”
장일룡은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쨌든 그들이 반가웠다.
‘제길!’
얼음 속에 갇힌 채 핏발 선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독편살왕이 자신의 모든 무위를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낸 것이다.
“크아아아아!”
쩌저저저저적!
갑자기 독편살왕이 얼음을 깨고 나오자 한설현과 장일룡이 대경했다.
한설현이 다시 쌍 장에 북해의 한기를 일으켰을 때 독편살왕이 경공을 일으켜 풀숲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장일룡의 얼굴이 황당하게 굳어졌다.
“도망?”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신 같은 신위를 보이며 자신을 압박하던 흑천련의 팔왕.
그런 그가 한설현의 두 손에 한기가 맺히자마자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도망을 간다.
이 사파 놈들은 도무지 무인의 긍지란 걸 모른다.
남궁수 어른이셨다면 비록 목숨이 경각에 이를지라도 자신의 검에 모든 신념을 담아 적을 향해 짓쳐 들었을 것이다.
그립습니다 창천검협 어른.
“크윽!”
풀숲으로 거리를 벌린 독편살왕이 자신의 아래를 보며 신음을 삼켰다.
얼음 새로 삐져나온 마름쇠의 칼날이 자신의 신발 위로 삐죽 튀어나와있었다.
피한다고 했는데 다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
촤아아아악!
한 차례 채찍을 휘두르던 그가 사독칠절편의 수법으로 주위의 얼음들을 깨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으아아아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한기와 싸우느라 피가 마르도록 내공을 일으켰던 특살귀령대원들이 갑작스런 해방감을 맞이했다.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얇은 얼음막만 부수는 독편살왕의 편술은 과연 팔왕다운 재주!
그렇게 독편살왕이 일단 살릴 수 있는 놈들만 살린 다음, 사방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퇴각! 퇴각한다!”
독편살왕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는 고수로 유명하다.
한설현의 빙백신장이 저렇게 강력한 이상 전투를 지속할 생각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위험천만한 사파의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팔왕에 오른 자다. 그의 지독한 생존 본능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휘리리릭!
열 몇 남짓 남은 특살귀령대원들이 모두 신법을 일으켜 관도 변에서 사라졌다.
이 모두가 오직 한설현의 빙백신공이 지닌 위력 때문!
어느덧 그녀의 곁에 도착한 염상록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으로 가득했다.
“와…… 싯펄 이게 다 뭐여.”
관도 변에 펼쳐진 한 폭의 지옥도.
얼음 결정과 함께 온몸이 폭사되어 버린 시체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산전수전을 겪어 온 염상록으로서도 기가 질리는 광경.
“싯팔, 동료가 죽어 가는 데도 숨어서 지켜만 보던 놈이 기세등등한 것 좀 보소.”
장일룡의 힐난에 염상록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니미, 이 음험한 강호에서 허투루 몸을 움직였다간 어찌 되는지 몰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그래서 네놈이 얍삽한 사파라는 거야 이 새끼야. 끄으으응.”
장일룡이 영세철갑신을 풀며 등에 박힌 검들을 하나하나씩 뽑고 있었다.
“친구의 몸이 이렇게 걸레짝이 되어 가는데 안 기어 나왔다고 이 새끼야?”
“미, 미안.”
장일룡의 육중한 팔이 염상록의 어깨에 둘러졌다.
“네놈에게 정파의 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싯펄, 자기도 산적 출신이면서?”
“손 씻은 지 오래다 이 새끼야.”
그때 진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요. 당신들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다니까 먹던 술도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와 준 놈인데.”
장일룡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뭐 하슈?”
“와, 저 창백하고 피에 굶주린 년.”
얼음과 함께 폭사된 그 끔찍한 시체들 틈에서 조심스럽게 새하얀 헝겊으로 피를 수집하고 있는 진가희.
그녀가 곧 어색하게 웃었다.
“힛, 아깝잖아요.”
염상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절대경을 찍겠다 이년아.”
염상록이 장일룡을 부축한 채 앞장서며 한설현을 힐끗 쳐다봤다.
“포양호가 모두 불타고 있다. 빨리 가 봐야 할 듯한데.”
헝겊을 맛보던 진가희가 퉤퉤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잔챙이 놈들. 입만 버렸네. 어서 가요!”
최소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특살귀령대원들이 순식간에 잔챙이가 되었다.
화경의 무위를 이룬 진가희에게 그들의 피는 섭식해 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편이었다.
염상록이 장일룡을 부축하여 천상운차에 오르자, 한설현과 진가희가 눈부신 경공을 시전해 포양호 쪽으로 쏘아졌다.
어느덧 어둑함이 밀려나고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 * *
‘이 무슨……!’
흑천대살은 터져 나간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의념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갑작스럽게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
곧이어 엄청난 힘으로 수축되어 가는 한 점(點)이 자신의 오른손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황당한 나머지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곁에 있던 철권왕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 그게 뭐요!”
그런 일반적인 무공의 상리를 벗어난 장면은 나머지 팔왕에게도 충격 그 자체.
하지만 그들은 당황할 새도 없었다.
조휘의 검극이 엄청난 속도로 떨리기 시작하자 또다시 허공에 수많은 점들이 현신했다.
“저놈의 의념공이오! 피해!”
련주와 함께 삼패천을 일궈 낸 팔왕들은 결코 만만한 무인들이 아니었다.
감각권 내에 전해 오는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감각!
그렇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팔왕들이 전율하며 점의 반경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공이 약한 축에 속하는 약왕과 귀면왕은 끝내 조휘의 점을 피하지 못했다.
귀면왕의 상체가 급격하게 수축하는 점에 빨려 들어갔다.
화경에 이른 내공을 일으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은 갈비뼈가 우드득 부서지며 상체의 일부가 점에 흡수되고 말았다.
“끄아아아아아!”
약왕 쪽은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재빨리 경공을 시전해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는 좋았으나 바지 자락이 점에 닿고 만 것이다.
이내 그의 두 다리가 점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그대로 핏물이 되어 후드득 떨어졌다.
“흐아아아아아!”
창졸간에 두 다리를 잃은 약왕이 골반을 부여잡은 채 미친 듯이 비명을 토하고 있었다.
그때, 극한의 의념을 일으켜 장내를 벗어난 흑천대살의 뇌리 속으로 하나의 전설이 파고들었다.
‘공공지검(空空之劒)?’
공간을 지배하는 검!
검으로 펼친 무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듯한 신묘한 검의 경지.
강호는 그런 신(神)의 흔적을 공공지검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검신! 놈은 검신의 후예다!”
흑천대살의 경악에 찬 외침!
몸을 피한 채 숨을 고르던 팔왕들 역시 대경했다.
“뭣이!”
“그럴 수가!”
놈이 삼신 중 최강이라는 검신의 후예라고?
덜덜덜.
강호에서 신(神)이란 휘호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그 어떤 문파나 세력도 신이라는 이름 앞에는 위세를 내세울 수 없는 터!
그것은 흑천련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퇴각……!”
흑천대살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휘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점멸된다.
팟!
순식간에 팔왕들 사이로 파고든 조휘.
곧 그의 두 눈에 맺힌 자색 귀화가 활화산처럼 타오르자.
우우우웅!
허공에 또다시 점이 생겨났다.
한데 그 수가 자그마치 수백!
흑천대살과 팔왕들이 서 있는 곳의 삼십육방, 가히 모든 방위에서 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조휘가 그렇게 무수히 생겨나는 점들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죽어라.”
검신의 검공와 마신의 마화를 한 몸에 아로새긴 조휘는 그야말로 일인무적(一人無敵)이었다.
검패왕(劒覇王) 막사평이 죽을힘을 다해 보법을 일으켜 흑천대살의 전면을 막아섰다.
소싯적부터 그와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흑천대살은 그의 의중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시간을 벌어 주려는 것.
대가는 목숨이었다.
“크아아아아아!”
후두두둑!
두 개의 공간압착점에 의해 사지가 찢기며 이내 핏물로 후드득 떨어지고 마는 검패왕.
철권왕과 더불어 팔왕의 수좌를 다투던 초고수의 죽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망한 죽음이었다.
처절하게 꽉 문 흑천대살의 잇새 사이로 뿌드득 핏물이 흘러나왔다.
육 년 면벽의 끝자락에 겪었던 엄청난 심마(心魔) 이래, 이런 처절한 감정의 격통은 처음.
흑천대살의 두 눈으로 번지기 시작한 사이한 잿빛 기운이 곧 숨 막히는 살기로 화했다.
수없는 살업으로 벼려 낸 그의 무혼은 타다 만 재처럼 회색빛!
그 사도의 회안(灰眼)이, 조휘를 향해 엄청난 분노를 토해 냈다.
회회살천절예(灰灰殺天絶藝).
제구살(第九殺).
천사겁륜살(天邪劫輪殺).
천사겁륜살은 정파의 신비로운 은거기인, 모산곡주 단용성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 간 살초다.
정파의 팔무좌를 칠무좌로 만들어 버린 절대적인 사도의 살예가 또다시 강호에 현신한 것이다.
의형강기를 머금은 수십 자루의 쇄검이 두둥실 떠오르자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폭급하게 사위를 집어삼켰다.
쏴아아아아아아!
흑천대살이 수십 자루의 쇄검을 대동한 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조휘에게 쏘아졌다.
친우의 목숨으로 비집고 들어간 공간을, 흑천대살은 결코 허투루 낭비할 수가 없었다.
의형강이 덧씌워진 수십 자루의 쇄검들이 일거에 조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조휘의 두 눈에 번진 암자색 귀화가 더욱 진해졌다.
콰앙!
벽력과도 같은 굉음이 일어나자 간발의 차이로 쇄검들이 허공을 갈랐다.
흑천대살이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쐐애애애애!
후방으로부터 허공을 찢는 듯한 파공음이 들려오자.
흑천대살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꺾는다.
촤아아악!
자신의 뺨을 스치며 파고드는 철검!
순간적으로 스치는 철검의 검면에,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이 내가! 흑천대살이……!’
지독한 두려움에 빠진 저런 추레한 표정이라니!
어느새 조휘는 검(劒)을 미간 앞에 곧추세운 채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철검 주위로 드리워진 칠흑과도 같은 어둠, 공공력.
흑천대살은 철검의 좌우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을 보자마자 심장이 갈라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같은 절대경의 무인만이 저것을 볼 수 있었다.
상대의 주위로 갑옷처럼 둘러져 물결치고 있는 어마어마한 의념의 기운.
그 광대무변함은 같은 절대경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저런 엄청난 의념을 연속으로 발휘하면서, 어떻게 제정신과 내공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순간적으로는 자신도 저런 의념을 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순간’만 가능할 뿐, 저런 강대한 의념을 상시로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흑천대살이 찢겨져 나간 자신의 뺨을 부여잡은 채 힐끗 조휘의 신형 너머를 응시했다.
후드드득.
팔왕 중 이왕(二王)이 핏물로 산화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왕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철권왕은 한쪽 팔이 뜯겨져 파리한 얼굴로 지혈하고 있었고, 독안왕은 오른 어깻죽지가 모두 날아가고 없었다.
의외로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귀면왕과 약왕이 살아 있었다.
‘손속에 자비를 둔 것인가?’
그래도 검패왕과 귀왕을 잃었다.
마겸왕은 운이 좋았는지 저 멀리 경공을 시전에 달아나고 있었다.
사실상 팔왕들이 모두 전투 불능 상태.
자신 역시 저 광대무변한 의념을 뚫고 쇄검을 박아 넣을 수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졌다.”
사천회와 함께 사파를 삼분하고 있는 절대자 흑천대살이 쇄검을 늘어뜨리며 전투 의지를 거둔 것이다.
“강서에서 철수하겠다. 우리 사업장들도 모두 그대에게 헌납하지.”
흑천대살로서는 남은 왕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여기서 모두 개죽음을 당한다면 흑천련의 중추가 무너진다.
검 사이로 빛나는 조휘의 두 눈이 더없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절강으로 철수한 다음에는? 배 터지게 먹던 놈들이 갑자기 굶주리며 살 수 있을까?”
“…….”
“네놈들이 할 짓이라고는 뻔해. 전에 그랬듯 곧바로 사천회(邪天會)나 녹림으로 달려가 연합을 제의하겠지. 조가대상회를 걷어 내고 강서를 반씩 갈라 먹자.”
흑천대살이 쓴웃음을 머금다가 입을 열었다.
“흑천련주의 이름으로 강호에 천명하겠다.”
히죽 웃는 조휘.
“그런 공언 따위야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지. 더구나 우리 쪽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어.”
츠츠츠츠츠츠.
조휘의 검에서 다시금 의념의 기운이 맺히기 시작하자.
흑천대살의 두 눈이 다시 잿빛으로 타오르며 신형이 흐릿해졌다.
파파팟!
살아남은 팔왕들을 낚아채며 순식간에 장내에서 벗어나는 흑천대살.
조휘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지금은 적을 추적할 때가 아니라 먼저 조가대상회를 추슬러야 하는 상황.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에 겨워 죽어 가는 사원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조휘의 감각권 내에 익숙한 기운들이 감지되었다.
눈부신 경공을 펼쳐 도착하고 있는 한설현과 진가희!
진가희가 참혹한 현장을 발견하고서 놀란 눈을 했다.
처참하게 구겨진 사슬낫과 걸레짝처럼 찢어진 호투갑.
거기에 오직 팔왕만이 걸칠 수 있는 흑룡포의 찢겨진 조각들이 여기저기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진가희는 조휘가 상대했던 자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세상에! 팔왕이 모두 온 거예요? 어? 이건 련주를 상징하는 문양인데! 흑천대살까지?”
사방에 가득한 피 웅덩이에 진가희는 입술을 날름거리고 있었으나 조휘의 지독한 눈빛 때문에 섣불리 몸을 움직이진 못했다. 저렇게 진지한 조휘의 얼굴은 그녀로서도 처음이었다.
“장 부장은?”
“오, 오고 있어요. 다만 부상이 심해요.”
조휘가 한설현을 응시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전 괜찮아요.”
다시 시선을 진가희에게 시선을 옮긴 조휘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흡혈귀 놀음 할 생각 말고 상회부터 추슬러라. 난 포양호 동편의 상점들을 살핀다. 넌 북편. 한 소저께서는 서편의 부상자들을 살펴 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어요.”
콰아앙!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나며 조휘의 신형이 동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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