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38
38 章>
조휘가 어둑해진 밤을 헤치며 침소에 도착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마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 좀 하자꾸나.
마신의 이야기는 자신도 기다렸던 마당. 조휘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튼 채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조휘가 대화에 응하자 한껏 상기된 마신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 검신(劒神)이란 자의 무공을 보다 자세히 보고 싶다.
사실 마신은 흑천련의 총단을 공격할 때 조휘가 선보인 검공, 천하공공도(天下空空道)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검신 어른의 천검류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천공의 별빛, 성하력(星河力)으로 구성된 전 삼 초식.
공간을 집어삼키는 공공력(空空力)으로 구성된 후 이 초식.
천하절대검벽으로 대표되는 두 초식의 방어 검초.
거기에 조휘의 현대적인 지식과 검신 어른의 경험이 결합되어 탄생된 궁극의 집단제어기 천하절대검령.
조휘는 이와 같은 천검류를 의념을 일으켜 천천히 펼쳐 보이고 있었다.
물론 검식의 묘리만 느낄 수 있게끔 그 위력을 수백분의 일로 축소하여 간단하게 시연하고 있었다.
환상처럼 흩날리는 별빛 무리들.
순식간에 공간을 압착하는 점.
모든 것을 막아 낼 것만 같은 검벽.
천하를 지배하는 검령(劒靈)의 향연.
그렇게, 조휘의 검초를 모두 살핀 마신이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으음…….
무림 최초의 신, 마신.
그는 검신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을 앞서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런 그로서는 또 다른 신의 무공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다.
-이제야 확신이 생기는구나. 검신이라는 후배의 검(劒)은 틀림없는 ‘그’의 흔적이다.
조휘는 마신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천마삼검의 무리(武理)가 새겨진 석판을 보았을 때 저도 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네 천마삼검(天魔三劒)은 평생토록 석판을 연구한 본 좌의 그것보다 훨씬 완벽에 가까웠다. 그건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무인의 경험으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런 현상은 조휘가 이미 한 번 검총에서 겪은 일이었다.
검신 어른이 검총의 벽면을 연구하며 칠 년 면벽 끝에 깨달은 성광(星光)을, 자신은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던 것.
-그래서 네 기억을 살펴보니 너는 이 중원의 사람이 아니더구나. 때문에 묻는다. 혹시 너는 ‘그’와…….
조휘가 단번에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저는 천마삼검의 석판을 남긴 사람의 세상에서 왔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 대단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해도 설명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신으로서는 석판에 새겨진 검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평생토록 연구했지만 검흔을 설명하고 있는 문자들은 도저히 근원을 밝힐 수 없었고 기이한 형태의 도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네 녀석도 환생(還生)의 겁(劫)을 경험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조휘는 그런 마신의 말을 단숨에 부정했다.
“아니요. 그는 환생자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허면 그가 어떻게 이 머나먼 과거로 올 수 있었단 말이냐?
한껏 진지해진 조휘의 음성.
“그자는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천마삼검의 석판이 만들어진 시기가 검신 어른의 검총보다 훨씬 후대이기 때문입니다.”
-뭐라……?
조휘의 말은 도저히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검신은 마신보다 후대의 인물.
한데 어떻게 석판이 검총의 후대에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조휘의 주장대로 이 사실이 성립되려면 ‘그’가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의 경지가 신(神)에 이르렀다고 한들 그것은 한낱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론 마신의 주장은 조휘도 충분히 동의하는 바였다.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차라리 신이라 불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 있지 않은가?
“천마삼검은 그가 검총에서 정립한 무공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발전시킨 무공이었습니다. 더욱이…….”
이어진 조휘의 음성은 마신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천마삼검의 석판은…… 언제고 검총을 겪은 사람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만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껏 상기된 마신의 음성.
-그게 사실이냐?
“네. 석판에 분명 그렇게 써져 있었으니까요.”
-무슨 말이 써져 있었단 말이냐?
조휘의 두 눈이 한없이 침잠했다.
“신좌(神座)로 오라.”
-신좌? 그 석판에 신좌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는 말이냐?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휘.
“네. 저더러 신좌로 오라던데요.”
마신은 극도로 놀라는 눈치였다.
-신좌(神座)가 ‘그’였다니…….
어렴풋이 추측만 해 보던 가정이 조휘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과거 소림사에서 만났던 신좌의 추종자, 금천종(金天宗).
최초의 신, 마신이라 불리며 천마라는 이름으로 강호에 군림했던 자신을 단 십 초 만에 패퇴시킨 신비인.
그자는 자신을 죽여 없애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약아빠지게도 자신의 혼세천옥에 업(業)과 겁(劫)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생령봉인술(生靈封印術)이라는 희대의 술법을 일으켜 자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신이 멀쩡한 몸으로 마신공을 일으킨 채 봉인되어 버렸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마신이 뭔가를 깨달은 듯 깊은 신음성을 흘렸다.
-음…… 그렇군. 분명 생령봉인술은 시간을 다루는 봉인술법. 그런 희대의 술법을 구사하는 자라면 시간을 거스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테지.
“생령봉인술요? 그게 뭡니까?”
조휘의 질문에 마신은 자신이 만났던 신좌의 추종자, ‘금천종(金天宗)’이라는 자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하…… 시간을 멈추게 하는 술법이라고요? 그게 제 의천혈옥과 만나면서 깨졌고?”
-그렇다. 그렇게 생령봉인술이 깨어지자마자 인과율에 의해 내 생명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아니 무슨 신좌도 아니고 그 수하라는 자의 능력이 그토록 대단하다고?
그렇다면 도대체 신좌라는 놈은 얼마나 강하다는 건지?
-하지만 네 말에도 오류가 있군. 본래부터 그…… 아니 신좌의 유물들이 중원의 여러 곳에 존재했고, 단지 본 좌와 검신이라는 후배가 발견한 시대가 달랐다면 ‘그’가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라는 논리는 깨어지지 않느냐?
조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조휘도 마신의 석판을 처음 봤을 때 그와 같은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신과 마신의 무공을 통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조휘는 생각이 달라졌다.
“……보십시오.”
조휘가 철검을 치켜세우며 의념을 집중시키자 허공에 자그마한 점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천하공공도(天下空空道)의 공간압착과는 의념의 결이 달랐다.
-이것은……?
지금 조휘가 펼치고 있는 의념공.
천하공공도와는 차원이 다른 이질감이 덧씌워져 있었다.
마신은 이 이질적인 현상, 이 느낌을 표현할 재주가 없을 뿐, 지금 조휘가 펼치고 있는 의념공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네놈이 전에 펼쳤던 천마멸겁무(天魔滅劫舞)가 아니더냐?
뭔가 대자연의 법칙을 훼손하고 있는 듯한 소름 돋는 이 느낌.
당시에도 마신이 소스라치게 놀랐던 점은 바로 이런 느낌 때문이었다.
“느껴지십니까?”
-뭐가 말이냐?
“공간만이 왜곡되고 있는 것 같겠지만, 아닙니다. 파장을 자세히 느껴 보십시오. 천하공공도와는 확실히 다를 겁니다.”
조휘는 천마멸겁무의 진의(眞意)를 마신이 느낄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천천히 시전해 보이고 있었다.
-설마!
조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마멸겁무의 무리가 담긴 점(點)을 침소의 구석에 있는 화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점에 빨려 들어가기도 전에 급속도로 시들어 버리는 난초!
천하공공도가 공간을 왜곡하고 압착하는 묘리라면 천마멸겁무는…….
“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천마멸겁무의 ‘멸겁(滅劫)’은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왜곡하는 묘리를 담고 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마신.
천마삼검의 석판은 자신의 일평생, 그 모든 고련의 총아였다.
하지만 그 천마삼검의 첫 번째 초식에 시간의 왜곡이라는 기상천외한 무리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천마멸겁무에 닿은 모든 물질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합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모두 부패되거나 풍화되어 버리거든요. 거기에 공간압착의 묘리가 더해지니 흔적이 남을 수가 없습니다.”
-사, 사술이다! 그런 건 사람의 무공이 아니다!
조휘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의념공이 인간의 무공일 리가 없죠. 자,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무슨……?
“현재 저의 무위는 선배님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한동안 침묵하던 마신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비록 네 무위가 절대경의 후반이라 할 수 있는 무극(無極)에 이르렀다 하나, 천지교태(天地交泰)를 이룩하고 자연의 섭리를 깨우친 자연지경(自然之境)에 비할 수는 없다.
조휘가 인정한다는 듯 슬며시 미소지었다.
“분명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자연경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거든요. 그런데…… 검신 어른과 선배님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
“네. ‘자연경’이란 자연의 법칙과 섭리를 깨우친 경지라 생각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무공이 강해져도 ‘자연경’에는 이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약관을 막 벗어난 나이에 절대의 무극에 이른 놈이었다.
길고긴 무림사를 눈 씻고 뒤져 봐도 같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
어쩌면 불혹도 전에 자연경을 이뤄 무림의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는 놈이었다.
“중원의 무학, 그 모든 뿌리는 불가와 도문입니다. 무욕(無慾)과 무위(無爲), 즉 모든 면에서 위대한 자연, 그 법칙에 순응하는 심상을 그리고 있지요. 이곳 중원인들 특유의 의식 체계라 할까요?”
위대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은 무공을 연마하는 구도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
그것을 ‘중원인 특유의 의식 체계’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조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자연경의 경지를 이룬 무인은 삼신(三神)이 유일하잖아요? 두 분 모두 ‘신좌’의 유산을 이었고요. 논리적으로 유추해 보면 무신 역시 신좌의 유산을 이었을 공산이 큽니다.”
이어진 조휘의 음성은 마신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삼신은 신좌의 유산을 통해 자연경, 즉 자연의 법칙을 깨달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중원인이기 때문이죠. 과학(科學)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조휘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세계에서 무욕과 무위는 ‘자연도태(自然淘汰)’나 ‘무능력(無能力)’과 동의어입니다.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것, 하늘의 달을 탐사하고 머나먼 우주마저 연구하고 도달하는 것, 그것이 현대인의 관념이요 의식 체계입니다.”
-다, 달을 탐사한다? 우주에 도달한다고?
“그래서…… 오직 저만이 신좌가 남긴 유산을 올곧게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그의 유산에는 자연을 이해하고 법칙을 깨우치는 순응(順應)의 무리가 아닌, 자연을 지배하고 법칙을 깨부수는 초월적인, 탐욕적인 의지가 담겨 있음을 읽을 수 있어요. 그래서 …….”
확신에 찬 조휘의 얼굴.
“제 무공이 극에 이르면 아마도 ‘자연경’이라는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신은 그런 선언적인 조휘의 말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 만물의 법칙을 왜곡하고 지배하며 정복하는 자!
그것이 신좌라는 자의 진정한 유산이며, 오직 같은 현대인인 자신만이 올곧게 이을 수 있다는 강력한 자신감의 피력이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신좌의 유산을 연구해 온 마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절대경의 무극에 이른 제 의념공으로도 이런 시간 왜곡이 가능합니다. 한데 신좌라 불리는 ‘그’라면요?”
마신이 침묵하자 조휘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검으로 시공간을 찢어발기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 놈이라고 해도 저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神)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조휘의 말.
“한데 제가 깨달은 천마삼검은 결코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뭐랄까? 영혼, 영력……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간의 육체가 품고 있는 힘이 아닌 영적인 능력, 그 총량이 조금 줄어 버린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 조휘의 말을 듣자마자 마신이 기겁을 했다.
-네 녀석이 벌써 인과(因果)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고?
아직 자연경에 이르지도 못한 놈이 벌써 인과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니!
그 말인즉 선주일계가 조휘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과의 제약? 그게 뭡니까?”
-인세(人世)에 허락된 기준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이 나타나면 선주일계는 혼주(魂珠)를 씌워 관리한다! 가만? 어?
마신이 존자의 영안(靈眼)으로 끊임없이 조휘의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혼주는 없었다.
-아니, 혼주가 덧씌워지지 않았는데도 영력을 잃는다고?
마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
잠시 생각하던 마신이 순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 경악성을 외쳤다.
-존자! 네놈의 영격은 이미 존자에 이른 상태! 그래서 선주일계는 네놈을 파악할 수가 없구나! 그들에게 너는 이미 인간이 아닐 테니 말이다! 하하하!
“존자(尊者)……?”
의천혈옥 속의 선조님들도 처음에 자신을 대할 때 존자에 이른 영격을 지녔다며 놀라셨다.
선계의 신선들조차 자신을 주시할 수 없게 만드는 영혼의 격.
그 존자라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단 말인가?
-당연하다! 그들도 존자의 영역에 이른 자들. 자신들과 동격의 영혼을 지닌 자를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게지.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구나. 네 영력의 소모를 설명할 길이 없다.
조휘로서는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그럼 천마삼검을 펼칠 때마다 영력이 감소되는 듯한 이 기묘한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 이유를 파악할 때까지 당분간 네 녀석의 천마삼검은 봉인하는 것이 좋겠구나. 영력의 소모는 결코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다른 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일전에 조휘에게 조화회생술의 비술을 가르쳐 준 천우자였다.
-존자에 이른 영격이라면 필시 영체로도 존재할 수 있을 터인데 왜 네놈은 선조들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냐?
영체(靈體)?
조휘가 비명을 지르듯이 질문한다.
“설마! 제가 그곳으로 가 선조님들을 뵐 수 있단 말입니까?”
-당연하다. 약간의 영력 소모를 각오해야 하지만 네놈의 기억을 보니 이자들을 꽤 각별하게 생각하는 듯한데.
하지만 선조님들은 알 수 없는 술법에 의해 봉인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조휘는 술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술법을 해제할 수 있는 술식을 모르는 이상 의천혈옥의 영계로 들어 가 봤자 애꿎은 영력만 낭비하는 꼴.
그런 조휘에게로 다시 천우자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본 도도 네놈의 검(劒)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 네놈이 익히고 있는 천마삼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직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게로구나.
“예? 그게 무슨? 갑자기 천마삼검이라뇨?”
-아무리 강력한 법술이라 해도 시공간마저 왜곡하는 힘에 파괴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느냐? 게다가 이 영계에서는 아무런 인과의 제약도 없는 마당.
“인과의 제약이 없는 공간!”
희열이 번지고 있는 조휘의 얼굴.
“어떻게? 혈옥 속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놈에게는 혈옥과의 끈이 없어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힘들다. 본 도가 도와주지. 한데, 네놈의 육체가 가사상태가 될 텐데 상관없느냐? 호법이라도 세워 둬야 할 텐데.
아직 시간은 유시(酉時).
아침까지 여섯 시진이나 남았다.
“괜찮습니다. 어서 그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급급여율령.
그렇게 천우자의 주문이 반각 정도 이어지자 조휘의 정신이 아득해지며 마침내 시야가 암전되었다.
힘겹게 정신을 차린 조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무량한 공허(空虛)와 같은 세계였다.
그 어떤 지형도 없이 끝 모를 지평선만 무한이 이어져 있는 세상.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건 모 만화에서 봤던 ‘시간과 정신의 방’과 거의 흡사하지 않은가?
“크으윽…….”
약간의 영력 소모는 개뿔.
머릿속을 쥐어짜는 듯 아파 오는 것이 필시 영력의 급격한 소모로 인한 후유증일 터.
천마멸겁무를 펼쳐 소모되는 영력의 최소 수십 배에 달하는 탈력감이었다.
‘어르신……!’
검신 어른께서 자신의 몸에 빙의할 때면 그 후유증 때문에 한참이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조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영력의 급격한 소모로 인해 정신에 전해져 오는 타격감과 고통은 실제로 경험해 보니 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허허!”
갑작스럽게 들려온 마신의 너털웃음 소리.
조휘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곳에는 독고 가문의 존자들로 추정되는 일곱 노인들이 서 있었다.
조휘는 그중에서도 마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림사의 불마동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조휘가 예를 차리며 엄정하게 포권했다.
“이렇게 실제로 뵈니 기분이 묘하네요. 반갑습니다, 어르신들.”
마신의 곁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던, 마치 선계의 도사와 같은 행색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그가 천우자라는 것을 조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너의 본 진면목이구나.”
“예?”
기이한 눈초리의 천우자.
그의 그런 눈빛에, 조휘가 허리에 패용하고 있던 철검을 빼어 들었다.
깨끗한 검면(劒面)에 비춰 드러난 자신의 얼굴.
“아아……!”
검면 속의 그 얼굴은 현대인이었던 자신, 즉 조영훈의 얼굴이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초라했던 과거, 병신같이 살던 그때가 생각나 조휘는 왠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조휘로 불리는 삶이 이미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립고 그리웠던 자신의 진정한 자아(自我)였다.
그렇게 감동하고 있던 조휘를 상념에서 깨운 것은 익살스러운 마신의 목소리.
“클클, 원래는 그렇게 못생겼구나.”
조휘가 두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선배님도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닙니다만.”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이래 봬도 소싯적 여자깨나 울린 몸이거늘.”
문득 조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저희 선조님들은 어디 계시죠?”
“급급여율령.”
천우자가 나직이 주문을 외자 조휘를 비롯한 일곱 존자들의 신형이 희뿌연 안개에 휘감겼다.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산산이 해체되는 느낌이 들자 조휘는 식겁하며 놀라고 있었다.
-당황해하지 마라. 공간전이술(空間轉移術)의 술법이다.
천우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안심하는 조휘.
잠시 후 자신의 몸이 천천히 재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조휘는 그런 기상천외한 경험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던 조휘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술법이라는 것도 실로 어마어마하군요.”
천우자가 고고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것이 진정한 축지성촌술(縮地成寸術)이지. 도가(道家)에 축지법이라 불리며 떠도는 비술들은 죄다 이 축지성촌술을 흉내 낸 아류에 불과하다.”
“오호…….”
이게 그 유명한 축지법의 진짜 버전이란 말인가.
그때, 그런 조휘의 시야에 조가(曹家)의 선조들이 들어왔다.
“아아!”
검신 어른과 조조 어른, 만상조 어른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조휘는 보자마자 그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조조 어른……!”
그것은 무공을 익혀 흘러나오는 기세 따위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파천황의 아우라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그 어떤 인간에게도 겪어 보지 못한 종류였다.
패왕(覇王)이라 불리며 수백만의 군중을 다스렸던 중원의 절대자는 가히 인중지룡(人中之龍)의 모습 그 자체.
마치 다른 격을 지닌 존재처럼 느껴질 정도다.
“검신 어른…….”
검신.
그는 가부좌를 튼 채 명상하는 듯이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모습임에도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불가해의 기도가 느껴졌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짐작했던 검신 어른의 경지가 얼마나 오판이었는지를.
신(神)이라는 이름의 위용, 하늘에 닿아 있는 그의 경지가 그야말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의 일초지적이라도 될 수 있을까?
생각이 그에 미치자 순간 조휘는 허탈한 웃음이 일어났다.
“만상조 어르신…….”
고아하게 웃고 있는 만상조.
세상의 지혜를 모두 담고 있는 듯한 만상조의 깊은 두 눈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단면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밖에 다른 선조님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일신에 쌓은 수양이나 업적이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한데 그런 선조들 모두가 마치 시간이 정지당한 듯한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조휘가 서둘러 의념을 일으켜 선조들을 살필 그때.
“……저게 모두 뭐죠?”
찢어질 듯 부릅떠진 조휘의 두 눈.
그것은 일종의 그물이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무량대수의 촘촘한 그물들이 조가 선조들의 전신을 물샐틈없이 옥죄고 있었다.
천우자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본 도가 아는 술법이었더라면 애초에 풀어 주었겠지. 저런 기오막측(奇奧莫測)한 술법은 본 도로서도 처음 보는 종류다.”
그때 마신이 조휘에게로 다가왔다.
“저 그물은 그들의 영체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물리력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조휘가 신음을 삼켰다.
“음…… 이미 실험해 보셨군요.”
“그렇다. 본 좌가 전력을 다해 펼친 마신공에도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자연경에 이른 마신의 무공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의 곁에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숨쉬기도 힘든 압박감이 몰아치고 있었다.
조휘로서는 그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천검류(天劒流).
제칠식(第七式).
천하중중패(天下重重覇).
조휘의 철검이 엄청난 속도로 떨리기 시작하자 눈부시게 일어난 백색 검강이 거대한 검처럼 화해 갔다.
천하중중패는 물리적인 파괴력만큼은 천검류의 초식 중에서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초식이었다.
콰콰콰콰쾅!
세상을 짓이기듯 쏘아진 거대한 검이었지만, 과연 마신의 호언대로 선조들을 감싸고 있는 그물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반탄력으로 인해 조휘는 검세를 회수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런 미친……!”
천검류 최강의 중검으로도 부서지지 않는다고?
술법이란 것이 이토록 대단한 것일 줄이야!
천우자가 황급히 조휘의 앞을 막아섰다.
“이런 무식한 무인 놈들! 본디 주박술(呪縛術)이란 물리적으로 파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강화될 뿐이다! 무진(武震)! 도대체 네놈은 술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마신 독고무진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헐!
단순히 조상이라서 예를 갖춘다는 느낌이기보다 힘에서 밀리는 모양새였다.
천우자란 도사가 마신보다 더 윗줄의 힘을 지녔단 말인가?
“술법을 물리력으로 파괴하려면 술법의 원동력인 핵(核)을 타격해야만 가능한 법! 아직 본 도조차도 저 술법의 핵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감히 네깟 놈들이!”
그런 천우자의 말을 듣자마자 조휘가 가볍게 깨닫는 바가 있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술법의 핵이라는 것이 저걸 말하는 겁니까?”
“뭐라……?”
검천전능지체로 바라본 술법의 그물.
조휘의 시야, 그 백색의 세계에서 수없이 드러난 물리학적 도식들 사이에 오연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단 하나의 기호.
그것은 무한을 나타내는 ‘∞’라는 기호였다.
모든 함수와 도식들이 그런 ‘∞’에서 무한한 동력을 공급받고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검천전능지체를 거두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설명해 봐라! 도대체 뭘 봤단 말이냐!”
“아니 그게…….”
수학을 모르는 자에게 이걸 어떻게 간단히 설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조휘는 일단 검천전능지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신좌의 유산인 검총을 겪었을 때…….”
반각 정도 이어진 조휘의 설명.
그런 조휘의 설명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천우자의 얼굴은 한껏 호기심으로 부풀었다.
“세상을 산법의 기호(記號)로 볼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허……!”
세상을 산법의 기호로 본다?
그 전에 세상이 수(數)로 이뤄졌다는 것 자체를 천우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네 녀석이 본 기호의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잠시 생각하던 조휘가 입을 열었다.
“무량대수입니다.”
무량대수(無量大數).
중원의 산법에서 존재하는 가장 큰 수이며 무한을 의미하는 단어.
‘∞’를 중원식으로 설명하려면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술법의 핵이 공급하는 힘이 무량대수라고?
인간이 구사한 이상 그런 술법의 핵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술법의 핵에 서린 힘은 시전자의 법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만약 초월자, 즉 신(神)과 같은 존재가 펼쳤다면 어쩌면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술법에 무량대수의 힘을 공급할 수 있는 법력을 가진 자가 인간일 수가 없는 것이다.
‘허면 저 술법이……!’
천우자는 전율하고 있었다.
지금 조휘의 말은, 자신이 보고 있는 저 주박술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구천현녀경(九天玄女經)이나 관자재보살도(觀自在菩薩圖)와 동급의 법력을 지닌 술법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황당한 것은 조휘도 매한가지.
지금까지 아무리 강력한 무공에도 수학적 ‘절댓값’은 존재했다.
검천전능지체로 바라본 세상에 ‘∞’이라는 기호가 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당연히 조휘는 저 주박술을 파괴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천마삼검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저 무량대수를 어떻게 부술 수 있단 말인가.
“제 검법으로도 가능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짙은 허탈함이 섞인 조휘의 음성에도, 천우자는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니다. 아무리 무량대수의 힘이라 하나 엄연히 세계의 법칙 내에 존재하는 수. 시공을 왜곡하는, 법칙을 부수는 네놈의 검이라면 반드시 술법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게다.”
“으음…….”
침중한 신음을 흘리던 조휘가 마음이 선 듯 천천히 철검을 곧추세웠다.
그러자 곁에 있던 마신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신의 휘호를 일신에 새긴 그에게도 조휘의 검은 마주할 때마다 놀라운 것이었다.
조휘의 두 눈에서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한 자색 귀화.
그렇게 그가 마신공을 극한으로 일으키기 시작하자 마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성화의 혼을 갈고닦아 하늘을 보는도다(煙魂天示)! 훌륭하다!”
단숨에 조휘의 경지를 꿰뚫어 보는 마신!
쿠쿠쿠쿠쿠쿠!
영계의 세상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극한까지 일으킨 조휘의 마신공은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하는 힘 그 자체였다.
거대한 진동이 마침내 잦아들었을 때 조휘의 신형이 천천히 움직였다.
세상을 파괴하는 천마멸제의 검무.
그것은 천마멸겁무의 시작을 알리는 기수식이었다.
우우우우웅-
가늘게 검명을 토해 내던 조휘의 철검에서 추측이 불가능한 힘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휘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지자 마치 세계를 지탱하는 무언가가 점멸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파악!
천지를 굉음하는 소리도, 그 어떤 빛살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없이 생겨나기 시작한 점(點).
마침내, 세상의 법칙을 파괴하는 그 모든 점들이 일제히 ‘∞’를 향해 날아들었다.
조휘가 천마삼검(天魔三劒)의 첫 번째 초식 천마멸겁무를 천검류의 천하공공도처럼 펼치자 이를 바라보는 마신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본래의 천마삼검은 조휘의 천마멸겁무처럼 정제되고 깔끔한 느낌이 아닌, 모든 무혼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파천황의 마검.
분명 검의(劒意)에 담긴 묘리는 천마멸겁무와 비슷했지만 의념의 체계, 심상을 구현해 내는 방식 등 다른 모든 점이 달랐다.
같은 석판을 보고 어찌 저리도 결이 다른 검식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마신이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기이한 광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휘의 천마혈겁무, 그 무한한 점(點)들이 집중하고 있는 어느 한 공간.
분명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한데 짙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균열하며 보랏빛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일곱 존자들의 안색이 동시에 핼쑥해졌다.
균열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기운.
그 가공할 힘을 대한 순간 영혼이 바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기운이……!”
창백해진 얼굴로 굳어 버린 천우자.
이런 걸 과연 법력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그제야 천우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주박술은 결코 인간의 법력으로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력이 아닌 신력(神力).
신이나 혹은 신의 반열에 이른 존재의 흔적이었다.
츠츠츠츠츠츠.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보랏빛 광채에 의해 이제는 시공간이 일렁이며 왜곡되는 현상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현상이 현저히 육안으로 보일 지경이 되자 별안간 조휘가 경악성을 내지르며 천마멸겁무를 거두었다.
“피해요!”
천검류(天劒流).
천하절대검벽(天下絶大劒壁).
천마멸겁무의 수많은 점이 거둬지자마자 광활한 검림(劒林)이 영계에 현신했다.
술법에 무량대수의 신력을 공급하고 있던 시공간이 붕괴되자 상상하기도 힘든 거력이 사방으로 분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콰콰콰콰콰!
보랏빛 광선에 닿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거검(巨劒)들!
‘……이렇게 쉽게 부서진다고?’
검술의 극한인 강기를 넘어 의념공까지 막아 내는 것이 천하절대검벽이다.
그런 천하절대검벽의 엄청난 물리 방호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조휘로서는 실로 기함할 일이었다.
그 말인즉 지금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광채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 담긴 것이 아니라는 뜻.
그렇게 조휘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그의 뒤편에서 마신과 천우자의 외침이 동시에 들려왔다.
“급급여율령! 호방현무도(護防玄武道)!”
“마환염천벽(魔環炎天壁)!”
조휘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신의 검에서 토해진 수많은 마화의 고리들.
검천전능지체의 감각권으로 전해 오는 그 고절한 도식들은 진정한 자연경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단숨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천우자의 전면에 등장한 거대한 거북이 모양의 환수(幻獸)!
놀랍게도 환수 현무(玄武)는 그 광활한 등짝으로 보랏빛 광채를 자신의 천하절대검벽보다 훨씬 잘 막아 내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보랏빛 광풍이 마침내 모두 잦아들었다.
그 광풍은 천하절대검벽과 마환염천벽, 호방현무도를 차례로 휩쓸어 갔지만 다행히도 조휘와 일곱 존자들에게는 닿지 못했다.
“네놈은 진정 괴물이로구나.”
탈력감 가득한 얼굴로 조휘를 쳐다보고 있는 천우자. 그로서도 막대한 법력을 소모한 듯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신력(神力)이 깃든 술법을 정말 순수한 무공으로만 파훼할 수 있을 줄이야…….”
깔끔하게 파괴된 술법의 핵.
조휘도 조가의 선조들을 바라보자 그들을 옥죄고 있던 그물들이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어쨌든 성공한 거죠?”
“그렇다.”
“오오!”
마침내 그물들이 모두 사라지자.
“으으음…….”
“허어어…….”
하나같이 신음성을 흘리며 깨어나고 있는 조가의 선조들!
조휘가 벼락같은 보법을 밟아 선조들에게 다가갔다.
“검신 어른! 만상조 어른!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갑자기 처음 보는 젊은 놈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들은 당혹해했다.
“……누구시오?”
“누구?”
검신과 만상조는 조영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조휘를 곧바로 알아보진 못했다.
허나 검신은 조휘의 내면, 그 본질을 이내 알아보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놈! 이 어리석은 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왔느냐!”
만상조도 깜짝 놀라는 눈치.
“허허, 휘아…… 너였단 말이냐.”
한데 이곳 영계에 조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고가의 일곱 존자들을 발견한 조조.
그가 경계의 빛이 가득한 눈으로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하나같이 존자(尊者)의 격을 지닌 자들이로군. 한데 어찌 조가의 의천혈옥 속 영계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이지?”
한편 마신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검신.
“허! 실로 광대무변하도다.”
마신 역시 검신에게 감탄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대단하다! 과연 검의 신이라 불려 마땅하다!”
중원 긴 역사 속에 기인 중의 기인으로 남은 위대한 자들이 한날한시에 만나게 된 것.
각자의 분야에서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자들이니만큼 서로를 바라보며 지극히 감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조가(曹家)와 독고가(獨孤家)의 존자들 사이에 조휘가 서 있었다.
조휘가 짤막하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선조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조가의 선조들에게서 각양각색의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갈! 조가의 비원을 성취할 자가 어찌 그리 함부로 영력을 소모한단 말이냐!”
“네놈은 인세의 겁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안배된 의천의 연자다! ‘사람’의 흥망이 네놈에게 달렸거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더냐!”
“영력의 소모가 무슨 장난인 줄 아느냐!”
그동안 목소리로만 듣던 선조들의 잔소리.
한데 그런 잔소리가 저렇게 살벌한 표정과 함께 어우러지자 그 위압감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조들의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조휘가 헤벌쭉 웃으며 자신의 선조들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헤헤, 선조님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선조들 앞에 서니 왠지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
조조가 콧방귀를 뀌며 그런 조휘를 외면했다.
“흥! 패왕의 자질을 타고난 놈이 정에 연연하다니! 그 꼴이 흡사 현덕(玄德) 놈 같구나! 미련하다!”
아니, 선조님?
삼국지의 등장인물 중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유비거든요?
그 우유부단의 상징, 무능력의 아이콘을 나와 비교하다니…….
제가 선조님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거 너무하잖소!
“진정이냐? 현덕 놈을 싫어한다는 것이?”
조휘가 화들짝 놀랬다.
“아니, 여기에서도 제 속마음이 들린단 말입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조조.
“여긴 존자들의 영(靈)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 즉 영계다. 오히려 더 크게 들린다 이놈아. 그 삼국지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니지. 본 왕이 찾아보면 될 것을.”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느낌이 드는 조휘.
“아니 갑자기 뜬금없이 제 기억은 왜 살펴봅니까?”
“이런 개 썅! 누구냐! 감히 어떤 놈이 이런 엉터리 상상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냐!”
조휘의 기억 속 삼국지는 실제의 역사로 기록된 정사삼국지가 아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당연히 저자인 나관중의 온갖 상상력과 취향이 반영된 그야말로 ‘소설’이다.
조조로서는 얼토당토않은 그의 상상력에 열 받는 점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적벽대전을 저따위 상상으로 묘사하다니 뭐 이런 미친 인사가 다 있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본 왕에게는 무엇보다 중하다!”
억울하다!
그 계집처럼 굴던 유비에게는 온갖 미사여구로 칭송해 마지않으면서 왜 본 왕에게는!
조조가 보기에 자신을 ‘비열한 인간’처럼 묘사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때, 독고가의 일곱 존자들을 대표해서 천우자가 조조의 앞에 섰다.
“본 도는 강호에서 천우자라 불렸던 사람이오. 독고가(獨孤家)를 대표해서 이렇게 인사드리오.”
“천우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조와는 달리 만상조의 표정은 경악으로 얼룩져 있었다.
“처, 천우자!”
천우자(天宇子).
머나먼 고대로부터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선주일계의 대표적인 도문이 있었다.
천선문(天仙門).
대부분의 강호인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세상의 신비였다.
하지만 만상조는 선주일계와 제법 인연이 있었고,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힘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천선문은 선주일계 역사상 가장 많은 대라신선을 배출해 낸 곳.
만상조의 일생, 그 시절의 천선문주가 바로 ‘천우자’였던 것이다.
만상조의 황망한 얼굴이 천우자를 향했다.
“허허, 천선문의 천우자께서는 그 도력과 법술이 끝내 하늘에 닿아 대라신선의 반열에 올랐다 들었소이다. 한데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천우자는 반개한 눈으로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역사 속의 패왕께서도, 신이라 불렸던 위대한 무인들도 이곳에 있거늘, 본 도가 무어가 그리 대단하다고…….”
허나 만상조는 그리 간단하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도 천우자는 인간과는 그 격이 다른 인외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천우자께서는 선주일계를 대표하는 대선(大仙)이셨소. 감히 혼세일계(인간계를 높이 칭하는 말)의 사람들과 어찌 비교가 될 수 있단 말이오.”
나직이 고개를 가로젓는 천우자.
“대라계(大羅界)에 들지 못하는 이상 대선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의 본질은 아직 사람이라 할 수 있소. 구분 짓지 마시오.”
사람임이 부정당했다는 것에 마치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천우자의 표정.
만상조가 황망하게 포권했다.
“제 말 속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소이다.”
그때, 조조가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며 입을 열었다.
“전생의 격(格)을 대우해 줘도 지랄이구나. 그리 허리 숙일 것 없다. 이곳 영계에 존재하는 이상 다 같은 존자에 불과하거늘, 여기서도 서열을 나눌 참이냐?”
조휘가 황당한 얼굴로 그런 조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선조님, 누가 봐도 지금 이곳에서 당신이 최상위 서열, 즉 일진처럼 보이는데…….
그때 조용히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신이 끼어들었다.
마신이 묵묵히 걸어와 털썩 주저앉아 좌정한 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의천혈옥의 옥주와 대담을 요청하오.”
“옥주(玉主)?”
옥주라면 의천혈옥의 주인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조가의 존자들에게 그런 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자신들은 의천혈옥의 은총을 받아 일생을 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 대가로 의천혈옥에 영혼이 종속된 입장인 것.
때문에 혈옥의 주인이라는 의식은 단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한 개념이었다.
조조의 이글거리는 안광이 마신에게 쏘아졌다.
“대관절 옥주가 무엇이오? 우리 조가들에게 그런 개념의 위계는 없소이다.”
한데 마신은 오히려 더 당황해했다.
“최초의 존자가 바로 옥주 아니오? 그럼 옥주의 권한과 능력도 모른단 말이오?”
“최초의 존자? 권한과 능력?”
일곱 조가 존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조에게로 향했다.
후손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조조가 정색하며 손사래를 친다.
“정말 모른다! 내가 그런 것을 알 턱이 있느냐?”
적어도 이 영계에서만큼은, 더욱이 가문이라는 울타리로 맺어진 이상, 서로에게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지론이었다.
조조가 마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옥주라는 것이 혈옥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존자를 뜻하는 거면 본 왕이 맞소. 한데 그 옥주라는 위계의 권한과 능력이 무엇이란 말이오?”
마신의 기이한 눈초리.
“허어, 그렇다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옥주로서의 자각이 없었단 말이오?”
“그렇소. 그런 위계를 듣는 것조차 처음인 마당이오.”
마신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자각하지 못했다면 옥주로서의 권한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당신은 이 구슬을 정상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구려. 옥주로서의 자각이 없었다는 말은 이걸 만든 존재로부터 직접 소유권을 이전받은 것이 아니란 소리니까.”
마신의 그다음 말에 조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누구의 것을 빼앗은 것이오?”
차가웠던 조조의 얼굴에 점점 복잡한 감정이 서리고 있었다.
슬픔, 고통, 분노, 아련 등 수많은 감정이 시시각각 교차하고 있는 조조의 얼굴.
그렇게 한참 동안 서서 겨우 마음을 다잡던 조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빼앗은 것이 아니오…….”
마신은 한껏 의문이 서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그 이상의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소유권을 이전받지 못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의천혈옥의 소유권이라.
쓴웃음을 머금는 조조.
이어 한이 서린 듯한 조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실로 금시초문이오.”
“으음.”
마신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심이 선 듯 천우자를 바라보았다.
“원래 혼세천옥의 옥주(玉主)는 사조님 아니십니까? 자꾸 저만 내세우지 마시고 직접 설명해 주시지요.”
천우자가 가득 찌푸린 미간으로 마신을 응시했다.
“허어, 웃기는 놈이로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옥주의 권한을 위임해 달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결단을 본 도에게 미룬단 말이냐?”
“어쨌든 혼세천옥을 만든 자를 직접적으로 본 것은 사조님이 유일하시지 않습니까.”
그 순간 천우자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들의 비밀을 언급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 너는 모른다…….”
조가의 선조들을 응시하는 천우자.
“저 존자들을 구속하고 있던 신력(神力)의 주박술이 바로 그 증거이지 않느냐.”
그런 그의 말에 조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선조님들을 구속하고 있던 주박술은 제가 마신공을 익혔을 때 갑자기 생긴 것입니다. 고작 한 사람이 무공을 익히는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세상의 법칙을 비트는 일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천우자의 두 눈에 더욱 깊은 현기가 어렸다.
“너는 삼신(三神)을 우습게 보는구나. 자연경의 경지란 천외천(天外天)이라는 선주일계에게도 위협이 되는 경지. 신의 경지라 불리는 그런 힘을 한 인간이 두 가지나 수습하는 인과율(因果律)이란 얼마나 티끌 같은 확률이겠느냐? 네놈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
“…….”
“그리고 그 인과율은 저놈이 조작했지. 내게 옥주의 권한을 빼앗듯이 가져가서 말이야.”
“예?”
황당함으로 굳어 버린 조휘.
자신이 검신 어른에게 마신공을 배우고 천마성에 이르러 천마삼검을 익힌 것이 모두 조작된 인과율의 결과라고?
아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자신을 포함한 검신 어른, 그 밖에 수많은 마교의 추종자들, 그들 모두의 정신과 의지를 조작할 수 있는 힘이라고?
조휘는 진심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고요! 그런 건 진정으로 신(神)의 힘이 아닙니까?”
“의천혈옥과 혼세천옥이 얼마나 불가해(不可解)한 힘을 담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한 얼굴이구나.”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천우자가 조조를 응시했다.
“의천혈옥에 대해서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소?”
순간 조조의 두 눈에 기광이 일렁였다.
“사람의 격(格)으로 만든 법보(法寶)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법보라는 것. 내가 아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이오.”
“추상적으로만 알고 계시군.”
이어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그렇게 고민하던 천우자의 입에서 점차 고대의 전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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