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39
39 章>
언젠가부터 혼세일계의 인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껍질을 깰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도(道), 불(佛), 마(魔), 무(武), 법(法) 등.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간은 보리달마(菩提達磨).
그는 스스로 사람의 굴레를 탈피한 최초의 인간 그 자체였다.
그렇게 우주적 존재가 되어 버린 달마는 홀연히 중원의 선종(禪宗)과 이별하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그때 혜가와 같은 혼세일계의 제자가 아닌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세 명의 구도자(求道者)들이 그를 따르게 된다.
의천존자(義天尊子).
혼세마(混世魔).
무천도인(武天道人).
달마를 제외한다면 혼세일계에서 가장 고절한 경지를 이룩한 이 세 명의 구도자들은 그를 지극히 존경했다.
그들의 눈에는 달마가 진정한 신처럼 보였고 그를 따르기만 한다면 자신들도 달마와 같은 경지를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얼마 가지 않아 깨닫게 된다.
달마에게는 이미 인간성(人間性)이 없었다.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법을 설파하던 그의 ‘인간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의 마음속에는 끝없는 허무와 유희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달마옥(達磨玉).
그것은 달마가 자신의 법력으로 탄생시킨 최초의 영옥(靈玉)이었다.
그는 그런 달마옥을 혼세일계에 장난처럼 던져 놓았다.
달마옥은 인간의 탐욕, 그 욕망의 겁화를 실험하는 일종의 유희도구.
그는 달마옥으로 인간에게 이능력을 주는 대신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키며 이내 자신의 법력으로 흡수했다.
달마옥은 세상에 수많은 왕과 재상, 학자와 무인들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달마옥에 무량대수의 업(業)과 겁(劫)이 쌓이자 달마는 그 모든 힘을 자신의 법력으로 치환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달마를 따르던 세 명의 구도자들은 그의 법력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고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달마 그 자신의 마지막 유희, 불가에서 말하는 ‘환생(還生)’이었기 때문이다.
달마가 평생을 쌓아 올린 모든 법력과 깨달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는 모든 기억을 지운 채 환생의 겁(劫)을 일으킨 것이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조조가 신음성을 삼켰다.
“그럼 혹시 우리의 의천혈옥이란 것도?”
“그렇소. 달마의 가르침을 받은 세 명의 제자들도 각자의 법력으로 영옥(靈玉)을 창조했소. 하지만 달마의 경지에 미치지 못해 그들의 영옥은 불완전했지.”
검신이 끼어들었다.
“어떤 점이 불완전하다는 말이오?”
“본래 인간의 영혼, 즉 영력이란 오롯한 그 자신의 것이오. 한 인간의 영력을 다른 존재가 취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 하지만 달마옥은 그런 법칙마저 깨뜨리는 법보였소.”
“…….”
천우자의 말이 한껏 신중해졌다.
“허나 달마의 제자였던 세 구도자들은 탐욕을 통해 인간을 타락시켜 그들의 영혼을 구속하는 비술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쌓은 영력을 자신들의 법력으로 치환하는 비술까진 알지 못했소. 보리달마가 그 이치만큼은 제자들에게 끝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
“으으음……!”
그제야 조가의 선조들은 이해가 된 다는 듯 깊은 신음성을 삼키고 있었다.
그들도 의천혈옥에 영혼이 쌓이면 ‘환생의 겁’을 일으키는 법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마 씨를 향한 불타는 복수심 때문에 조 씨 일가가 의천혈옥을 취한 이유였다.
“짐작대로 세 구도자들은 환생할 수가 없었소.”
또다시 천우자의 긴 설명이 이어졌다.
영옥 속에 영혼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쌓이게 되면, 그렇게 쌓인 영력이 무한한 법력으로 치환되며 확률적으로 환생자가 탄생한다는 것.
그리고 그 확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
“대신 그들은 영옥을 최초로 취한 자들에게 강력한 염원을 남겼소이다. 나 역시 혼세마의 자아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오.”
조조가 깜짝 놀랐다.
“그럼 당신이 그 ‘혼세마’란 말이오?”
“아니오. 본 도의 본질은 천우자. 단지 그의 기억과 의지만 주입받았을 뿐이지.”
천우자의 그다음 말에 조가의 모든 존자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천혈옥과 혼세천옥의 본질은 ‘보리달마’의 ‘환생자’를 막기 위함이오. 존자들의 모든 경험과 능력으로 환생자를 조력하고 이를 통해 보리달마의 존재력 자체를 없애는 것이 세 영옥의 진정한 탄생 배경이오.”
검신이 궁금증을 토해냈다.
“이상하군. 분명 당신은 보리달마가 자신의 모든 기억을 지운 채 환생했다지 않았소? 그렇다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그의 본질이 사라졌다는 말일 텐데.”
갑자기 박장대소하는 천우자.
“크하하하하! 보리달마의 본질이 단순히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소?”
천우자의 두 눈이 처절한 광망을 토해 냈다.
“그에게 혼세일계는 자신의 거대한 실험장이오! 세상을 지탱하는 법칙을 왜곡하고 부수면서 머나먼 하늘에서 오는 어떤 의지들을 관찰하지!”
“…….”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초월적인 존재들의 의지가 깃든 세계의 법칙이오. 그런 오롯한 법칙들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그의 행동이 이 혼세일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소? 그대가 한번 말해 보시구려.”
검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그렇소. 초월적인 존재들에 의해 혼세일계라는 세상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오. 보리달마는 그만큼 무서운 자. 자신의 지적 호기심, 그 유희하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 억(億)에 달하는 사람들 모두의 목숨을 실험하는 미친 존재인 것이오.”
“허어……!”
“더욱이 세 구도자들은 보리달마의 무한한 법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소. 그가 끝까지 자신의 본질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언제고 깨달음을 얻어 인간의 알을 깰 자요.”
그의 말에 영계의 모든 존자들이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실로 무서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휘가 끝내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혹시…… 그게 나라고요? 저더러 보리달마의 환생자를 막으란 말입니까?”
천우자가 조휘를 지그시 응시했다.
“본 도도 모른다. 사람인 이상 무량대수의 확률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허나 내가 경험한 ‘영옥(靈玉)에 의해 탄생한 환생자’는 오직 너뿐이구나.”
조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천우자의 말을 모두 종합해 봤을 때 보리달마의 ‘환생자’로 가장 의심되는 후보는 분명하게도 ‘신좌(神座)’였다.
“혹시 신좌라는 존재가…….”
마신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 살아 있는 영혼과 육신에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법력, 그 생령봉인술은 대선(大仙)이라 불리셨던 천우자 사조께서도 막지 못한 불가해의 법력! 필시 보리달마의 비술일 것이다!”
마신이 만났던 신좌의 추종자 ‘금천종’이 펼쳤던 비술!
시간을 다루는 이상 그 비술은 반드시 인외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천우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저놈이 죽어 영계로 오면서 본 도에게 옥주의 권한을 위임해 달라고 떼를 썼지. 영옥의 능력은 바로 존자들의 영력을 일부 소모해서 나머지 영옥들을 인과율의 인력(引力)으로 끌어당기는 것. 혼세천옥이 봉인되는 마당에 우린 선택지가 없었다.”
“와 씨. 그게 제가 소림사로 가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요?”
“그렇다.”
조휘의 입장에서는 보리달마만큼이나 세 구도자들의 능력도 마찬가지로 미친 것이었다.
그 말인즉 장일룡이 손에 상처를 입었던 것도 혼세천옥의 능력인 ‘인과율 조작’의 결과라는 뜻이 된다.
아니 무슨 그게 말이 되나?
그렇다면 그런 장일룡을 안타까워하는 자신의 마음마저도 인과율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조휘가 그렇게 황당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영계가 진동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구.
마치 세계가 떨리는 듯한 거대한 진동.
“이, 이 진동은 뭐죠?”
극도로 당황해하고 있는 조휘에게로 천우자의 허탈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보리달마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 헉!”
머나먼 영계의 하늘 어느 한 부분이 그야말로 찢어지고 있었다.
곧이어 그 균열의 틈 사이로 엄청난 금광(金光)이 흘러나왔다.
핼쑥해진 마신의 얼굴.
“설마!”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광대무변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마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한 초월자의 존재감!
머나먼 과거, 소림사를 멸망시킬 뻔한 거대한 악귀가 영계를 찢고 진입하고 있었다.
“그, 금천종(金天宗)!”
햇볕보다도 따가운 저 금광(金光).
온몸을 짓이겨지는 듯한 이 파천황의 존재감.
그야말로 그 옛날 금천종의 신위 그대로였다.
마신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칠백 년 전.
피륙을 뒤집어쓴 인간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 긴 세월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균열하며 진동하던 영계가 점점 잦아들더니 마침내 일노이동(一老二童)의 모습이 영계에 현신했다.
온몸에 눈부신 금광을 드리운 노인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두 명의 소동.
순간, 검신이 짙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신좌의 소동(小童)들이구나.”
그 옛날 자신과 동수를 이루었던 소동들.
지금 저 아이들이 당시에 만났던 소동들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죽거리고 있는, 마치 세상을 비웃는 듯한 기괴하며 익살스러운 그 표정들만큼은 분명 ‘소동’들 고유의 특징이었다.
그런 검신의 소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과 거의 비슷한 경지의 마신조차도 긴장감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 자.
우우우우웅.
그렇게 온몸으로 금광을 뿜고 있는 ‘금천종’은 그 얼굴에 인간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표정한 얼굴이라도 사람인 이상 일말의 감정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는 그야말로 밀랍인형 같은 자였다.
마치 무생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
그런 금천종이 무감각한 얼굴로 천우자를 응시했다.
[감당하지 못할 짓을 저지른 자여.]그것은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영력의 파동, 즉 영언(靈言)이었다.
조휘가 그런 금천종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아닌 것 같은, 이질적인 존재감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결같이 경악의 표정으로 굳어져 있는 존자들과는 달리, 이상하게도 자신은 그렇게까지 두려운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뭐랄까, 조금 비현실적인?
분명 그의 일초지적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그의 그런 모습을 왠지 스크린으로 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예를 들자면 영화 ‘어벤져스’의 타노스가 우주의 절반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무한한 존재, 신에 가까운 존재지만 그를 두려워하는 관객은 없지 않은가?
그것은 타노스가 영화 속 ‘가상’의 존재라는 것을 관객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 조휘에게 금천종은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넌 오늘부터 ‘금노스’다.
“금노스! 하하!”
그런 장난스럽고 유쾌한 상상이 입으로 터져 나와 버린 조휘.
세상이 무너져도 끝까지 무감각할 것 같았던 금천종의 얼굴에 점차 감정이란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로구나.]“내가 뭐?”
피식하며 이죽거리는 조휘.
마신이 그렇게 겁대가리를 상실한 조휘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저 눈앞의 금천종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존자들의 능력을 합한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자.
무극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런 금천종의 엄청난 존재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터인데 저런 어이없는 여유라니!
[좌(座)에 오르지 않고도 좌의 영격(靈格)을 지닌 자. 그렇지 않아도 너는 우리 사이에서 화제의 존재.]금천종의 곁에 있는 소동들이 더욱 익살스러운 얼굴을 했다.
[맞아. 쟤는 특이해.] [벌써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먼저 먹어 보면 안 될까?] [닥쳐! 내기에 졌잖아!]조휘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뭐? 날 먹어? 이 새끼들이!
“식인종이라도 된다는 거냐? 애새끼들이 어른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검신이 그런 조휘를 엄정하게 꾸짖었다.
“예전에 본 좌가 말했던 신좌의 소동들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예? 이 새끼들이요?”
이놈들이 자연경에 이른 검신 어른과 동수를 이룬 무공의 고수라고?
조휘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천종은 몰라도 이 소동들에게서는 그다지 대단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백안(白眼)으로 한참이나 소동들을 살피던 조휘가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아닌 애들 같은데요.”
황당하게 굳어 버린 검신.
조휘의 검천전능지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검신으로서는 황당할 노릇이었다.
자연경에 이른 저 소동들의 무위를 느끼지 못한다고?
절대경의 무극에 이른 자의 감각으로, 어찌 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단 말인가?
조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분명 검천전능지체로 전해져 오는 무공의 깊이는 자연경이다.
한데 그들도 금천종과 마찬가지로 영화나 만화 속의 캐릭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드래곤볼 속의 손오공이 우주를 날려 버리는 신에 근접한 존재지만 그렇다고 무섭지는 않지 않은가.
그 역시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비현실의,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 이상하네.”
조휘의 곁에 있던 검신이 물었다.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아니, 왜들 그렇게 두려워하시죠? 제 눈에 저들은 그저 가공의 인물처럼만 느껴지는데.”
“가공의 인물?”
순간, 영원히 무감각할 것 같은 금천종의 얼굴이 수많은 동요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과연 좌(座)에 이른 격을 지닌 자, 실로 무서운 존재로구나.]금천종은 결심했다.
저자가 자신들의 허망한 존재력을 인식하기 전에 베어야 한다.
금천종이 거대한 금검(金劒)을 일으켜 그대로 조휘를 향해 횡으로 그었다.
검신과 마신이 경악하며 금천종의 금검에 맞섰다.
천하절대검벽(天下絶大劒壁)!
마환염천벽(魔環炎天壁)!
무림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호신검공이 두 개나 현신했음에도, 금천종의 금검에 닿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카카카카카캉!
화르르르르르!
한데 조휘는 무공으로 맞서지 않고 검천전능지체만 일으킨 채 끈질기게 그런 금검을 관찰하고 있었다.
무량(無量)한 힘은 분명하다.
한데…….
‘저게 뭐지?’
조휘의 감각권 내에 전해져 오는 수학적 원리는 ‘가상변위(假想變位).’
저 금검의 엄청난 물리값에 대항, 평행하고 있는 힘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 때문에 가상변위가 일어나 값이 늘 0이란 뜻이었다.
조휘가 황당해하는 것은, 그렇게 가상변위(무한소)가 일어나면 힘의 작용이 생길 수가 없는데, 즉 0인 벡터값으로 어떻게 자연계에 힘을 행사할 수 있냐는 근본적인 의문 때문이었다.
한데, 조휘가 그런 의문을 가진 순간 갑자기 금검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금검을 펼치다 말고 멍하니 굳어 버린 금천종.
[……인식했다고?]극도로 당황하고 있는 금천종.
자신들을 허무로 인식한,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상대에게는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을 ‘허무(虛無)’로 인식할 수 있는 오롯한 존재는 지금까지 오직 신좌(神座)님뿐이었다.
[무서워. 우릴 알아.]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애.] [도망가자.] [응.]소동들의 신형이 마치 CG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머리로부터 아래로 사라져 갔다.
금천종 역시 조휘에 의해 존재력을 잃기 전에 천천히 자신을 지워 가고 있었다.
멍하게 굳어져 버린 영계의 존자들.
분명 저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한 천우자를 징벌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한데, 이곳 영계까지 침범해 와서 그 목적도 이루지도 않고 줄행랑이라니!
“……어떻게 한 것이냐?”
검신의 질문에 조휘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뭐랄까…… 저들의 힘이 ‘가상’이라는 것을 인식했다고나 할까요?”
그런 조휘의 말에 검신과 마신의 얼굴이 동시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현대와는 달리 ‘가상’이라는 단어는 중원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
“허허, 가상(假像)이란 말은 실제처럼 보이는 거짓의 형상이란 뜻이냐?”
“네. 정확합니다.”
“허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자연경에 이른 두 신(神)의 천하절대검벽과 마환염천벽을 부순 금검은 뭐란 말인가?
그런 것이 가상일 리가 없었다.
침중한 얼굴로 고심하던 천우자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허상(虛像)이라…….”
모든 존자들이 천우자를 바라보았다. 도력과 법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천우자의 안목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는 허수아비들이란 말인가.”
조휘가 의문을 드러냈다.
“영혼이 없는 허수아비라뇨?”
“강신영환술(降神靈幻術)이라는 법술이 있다. 가공의 인격을 지닌 법체(法體)를 시전자의 의지로 빚어내는 술법이지.”
조휘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가공의 인간을 창조해 낸다고?
도대체 법술이라는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런 강신영환술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그 법술은 가공의 존재를 실체의 존재로 인식하게끔 하는 현혹의 법술. 하지만 상대가 가짜라고 인식하는 순간 모든 존재력을 상실하지.”
그런 천우자의 말에 마신이 가장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그럼 법술로 빚어낸 존재에게 죽임을 당했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하늘에 이른 무공으로 강호에서 신이라고 불린 자신이 가공의 존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
더욱이 무인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네놈은 강신영환술이 얼마나 대단한 술법인지 모르니 하는 소리다.”
“예? 그게 무슨……?”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경외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천우자.
“강신영환의 법술을 현세에 실체화환 도인은 내가 아는 한 선도의 역사에서 전무하다.”
“…….”
선계에서 대선(大仙)이라 불렸던 자의 공언.
“보리달마조차 그 정도의 경지는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
이번에는 조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사람의 알을 깨고 우주적 존재가 되었다는 보리달마조차 도달하지 못한 법술의 경지라고?
“강신영환술은 가벼운 법술이 아니다. 비록 ‘가상의 존재’이긴 하나,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그야말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 이는 ‘존재’를 창조하는 신의 창조력에 근접한 법술의 경지. 그야말로 신의 경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가상이긴 하나 현세에 한 ‘사람’을 구현해 내는 법술.
그제야 비로소 조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네? 제가 뭘요?”
천우자의 강한 의구심.
“신의 경지에 이른 법술로 탄생한 존재들을 곧바로 ‘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네놈의 능력 말이다. 네놈은 도대체…….”
천우자의 표정이 의구심을 넘어 서서히 두려움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법술의 시전자와 동격에 이른 영격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조휘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요. 이게 저의 검천전능지체라는 것이…….”
이어 장황하게 이어진 조휘의 설명이 오히려 천우자의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자체가 신에 근접한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본 도는 그 능력을 너의 자력으로 이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사람의 눈으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단 말이냐!”
문득 조휘는 짜증이 났다.
이 영계로 오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는 느낌.
갑자기 무슨 신좌니,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법술이니, 온갖 해괴한 말들을 듣고 나니 정신이 사나워서 모든 것이 혼미할 지경이다.
“아, 어쨌든 달마의 환생자니 그딴 것들 저는 하나도 관심 없고요. 저는 그저 사업이나 열심히 해서 잘 먹고 잘살기만 하면 되는 인간이니까 괜히 저에게 뭔가를 시키려 들지 마세요.”
그때 갑자기 조조가 조휘를 불러 세웠다.
“부탁이 있다.”
“하!”
아니 내 삶에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 지 일 초도 지나지 않아 부탁을 늘어놓다니!
그래도 저 빌어먹을 독고의 존자들이 아닌 조가의 선조이기 때문에 조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내게 관우(關羽)의 후손을 찾아 줄 수 있겠느냐.”
“관우의 후손이요?”
“그렇다. 제발 그의 후손들을 찾아 다오.”
조조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다.
왠지 그의 절실한 마음이 느껴지는 조휘.
“찾아서 무슨 일을 하면 되죠?”
“내 말을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너를 통해 그들을 돕고 싶구나.”
조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조휘는 천우자의 법술을 빌어 마침내 현실의 몸으로 돌아갔다.
* * *
조가대회장(曹家大會莊)에 모인 조휘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일룡이 염상록을 힐끗 쳐다봤다.
“일찍도 출근했네? 그런데 왜 이렇게 죽을상이냐?”
“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피곤한 법이지.”
“음?”
자신이 알고 있는 명언하고는 괴리가 있었지만 굳이 틀린 말은 아니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장일룡.
“그래,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다. 허구한 날 술이나 빨고 여자나 끼고 노는 사파 놈이 언제 이런 열정을 느껴 보겠냐?”
“충신 납셨네. 너 그러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낙이 오겠지 이 새끼야.”
염상록이 음침한 눈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휘, 그 인간 너무 믿지 마라. 그렇게 헌신하다가는 결국 헌신짝 되는 겨.”
“이 새끼, 어디 가서 실없는 농담만 잔뜩 배워 왔네?”
빠각!
어느새 나타난 조휘가 그런 염상록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갈긴다.
“틈만 나면 뒤에서 날 욕하네?”
“뭐 싯펄! 내가 틀린 말 했냐! 이 악덕업자 놈아!”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아침 댓바람부터 욕질이야?”
“후후,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보이는 법이지.”
“…….”
과연 사파 놈이다.
온갖 명언을 죄다 비트는 것을 보니 보통 심사가 꼬인 놈이 아니었다.
그때 진가희와 한설현이 대회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진가희는 화경에 이른 후로 나름 혈색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귀신 같은 얼굴은 여전했다.
“호호, 지각해서 미안해요.”
“죄송해요.”
한설현 역시 화경에 이른 후로 미모가 더욱 물이 올라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의 절색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하니 장일룡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장일룡이 붉어진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설현을 쳐다보고 있자, 곁에 있던 남궁소소가 그의 굵은 허벅지를 가차 없이 꼬집었다.
“악!”
“시선 처리 똑바로 못 하죠? 가슴 본 거 같은데?”
“아, 아닌데?”
“호호! 일룡 오빠? 제가 호구처럼 보여요?”
이미 한 시진 전부터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을 하고 있던 남궁장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만 한 처녀가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당장 한 소저께 사과드리지 못하겠느냐?”
조휘가 동의한다는 듯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면전에서 상대방 가슴을 운운했으니 결례도 그만한 결례가 없었다.
“흥, 미안해요.”
아니, 그건 어떻게 봐도 사과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공동의 적(?)을 둔 진가희가 남궁소소에게 다가가 팔짱을 낀다.
“우리 남궁 동생이 무슨 잘못했다고 그래요? 저 여우 같은 계집년이 동네방네 꼬리를 치고 다니는 게 잘못이지.”
“가희 언니!”
와락 끌어안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그 꼴이 정말 가관이다.
아무리 한설현이 미워도 정(正)과 사(邪)가 저리도 친해질 수가 있나?
조휘가 눈살을 찌푸리다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회장님은 왜 이렇게 늦으시나.”
언제나 가장 먼저 도착해서 전날의 결산 자료를 살펴보던 제갈운이다.
이렇게 늦을 리가?
한데 그때, 제갈운이 어느 한 중년인과 함께 대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휘와는 달리, 다른 동료들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있었다.
“감찰교위님을 뵙습니다!”
재빨리 일어서서 예를 갖추는 남궁장호. 장일룡 역시 익살스런 태를 벗고 정중하게 포권하고 있었다.
‘감찰교위?’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조휘.
과거 제갈운의 직명이 감찰소교위였다. 그렇다면 무림맹의 인사란 말인가?
‘가만?’
그러고 보니 자신이 부재중일 때 무황과 함께 조가대상회를 방문했던 자가 감찰교위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조휘도 뒷짐을 풀며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휘라고 합니다.”
단백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조휘의 동료들을 한 차례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
“허허, 가만 보니 정말 굉장한 조합이로군.”
조휘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조합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백우가 쓴웃음을 머금는다.
“정파의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소검주와 소제갈, 거기에 사파 흑천팔왕의 제자들, 더욱이 새외오패를 대표하는 북해의 후기지수까지…….”
흠칫 놀라는 조휘.
저자가 진작부터 한설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기야 상점들을 오가며 그만큼 얼음을 생산해 왔으니 그녀의 빙공을 본 사람이 너무 많았다.
무림맹 감찰원의 정보력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거기에 조가대상회의 회장…… 아니지, 이제 소검신이라 칭해야 마땅할 터. 어쨌든 자네는 또 정사중간(正邪中間)이지 않은가?”
소검신(小劒神)이라…….
조휘 역시 강호에 회자되고 있는 자신의 별호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강호의 역사 이래, 이처럼 성향이 다른 후기지수들이 모여 회(會)를 이룬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네. 돌고 도는 은원으로 얽힌, 물과 기름과 같은 정, 사의 특성상 당연한 일이지. 한데 자네들을 보게.”
“…….”
“수백 년을 싸워 온 무림(武林)이 이곳에서만큼은 평화를 이루었군.”
단백우가 다시 조휘를 진득하게 응시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감정이네만, 강호에 자네를 향한 부정적인 평가가 판을 친다 해도 나 단백우만큼은 자네에게서 강호의 희망을 본다네.”
조휘를 향한 단백우의 낯 뜨거운 고백에 제갈운이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단백우는 칭찬에 매우 인색한 인물이었다. 저렇게 살가운 말을 하는 인사가 아닌 것이다.
‘조 소협의 호감을 사려는 것이군.’
단백우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물.
소검신의 무위와 조가대상회의 실력에 대한 판단을 이미 마쳤을 터.
해서 맹령(盟令)이라는 수단으로는 결코 조휘를 길들일 수 없다는 결론이 섰을 것이다.
하지만 피식 웃어 버리고 마는 제갈운.
판단은 좋았지만 단백우는 조휘라는 사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여타의 다른 후기지수들이라면 무려 맹(盟)의 감찰교위씩이나 되는 인사의 낯 뜨거운 칭찬에 한껏 들뜨겠지만 조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조휘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단백우를 응시하는 조휘의 두 눈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제갈운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기분 좋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앗, 내가 왜…….’
이건 마치 주군의 뛰어난 면모를 대하고 감탄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미 이 소제갈이 조휘를 주군으로 여기고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긴 그저 조가대상회의 냉차나 한 잔 마시러 온 것뿐일세.”
빙긋이 웃고 있는 단백우를 응시하며 내심 코웃음 치는 조휘.
포양호가 무슨 산서의 앞마당쯤 되나?
무림맹의 감찰교위라는 자가 이 먼 강서까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왔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라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맹령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허허, 사람 참! 차 한 잔 마시러 왔다니까?”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단백우에게 짜증이 난 듯, 조휘가 얼굴을 찌푸리며 청소하고 있던 시비를 불렀다.
“여기 냉차 한 잔 주세요.”
“예. 회장님.”
시비가 공손히 물러나자 조휘가 다시 단백우를 바라봤다.
“그럼 냉차를 내오면 드시고 일 보시지요. 저희는 회의 때문에 이만.”
조휘가 동료들을 훑어보며 목청을 높였다.
“자자, 다들 회탁으로! 회의 시작하자고!”
조휘의 동료들은 그래도 명색이 무림맹의 감찰교위씩이나 되는 인물을 저렇게 장승처럼 내버려 둬도 되나 싶었지만 일단 조휘의 명에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요.”
“아, 알겠수 형님.”
모두 자리에 앉자 조휘가 제갈운을 쳐다봤다.
“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제갈운이 한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저 요즘 두 시진조차도 못 자는 건 알고 계시죠?”
“두 시진?”
두 시진이면 현대의 개념으로 약 네 시간.
조휘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 정도 업무량은 아닐 텐데?”
“장난하세요?”
제갈운은 어이가 없었다.
조가대상회로 밀려오는 수많은 청탁과 소원 수리를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걸까?
이제 조가대상회는 두 개의 성(省)을 차지한 대(大)세력이었다. 웬만한 소규모 국가 정도의 상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흑천련이라는 세력이 무너지며 수많은 기득권이 교체되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조가대상회와 인연을 맺기 위해 수많은 관부, 강호문파, 권문세족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아무리 조가대상회가 거대한 세력으로 변모했다지만 그런 쟁쟁한 권력자들의 소원 수리를 모두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가려서 받는다고 해도 하루에도 손님을 맞이하는 횟수가 최소 삼십 건 이상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대부분 조가대상회와 거래를 트고 싶다는 제안.
역시나 가장 황당한 자들은 관부였다.
일방적으로 물건을 납품하라고 통보를 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달래고 설명하느라 제갈운은 늘 진땀을 빼야만 했다.
제갈운의 긴 설명을 들은 조휘가 꽈득 이를 깨물었다.
“뭐라고? 이 새끼들이!”
무식한 장군부 출신의 권문세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먹물깨나 먹은 유자(儒者)들의 가문도 그런 깡패 짓을 한다고?
조휘가 버럭 괴성을 질렀다.
“거 좋은 본보기가 있잖아! 우리 조가대상회도 오늘부터 금은동홍청(金銀銅洪淸)으로 손님 받죠!”
제갈운의 황망한 음성이 이어졌다.
“아니, 그건 정파에서 압도적인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남궁세가라 가능한 거죠. 어쨌든 우리가 외견을 상회(商會)로 두고 있는 이상 그건 불가능해요. 귀족이나 강호인들이 상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잖아요? 아직 우리에게 그 정도 명망은 없어요.”
안휘의 수많은 권력가들이 남궁세가의 금은동홍청의 배첩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백 년 전통의 명망, 그런 남궁세가의 위상과 헌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한데 조휘가 펄쩍 뛰고 나섰다.
“아니 그 간악한 흑천련의 마수에서 이 포양호를 해방시켜 준 게 누군데?”
제갈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한 번씩 무식하네요.”
“뭐라고!”
결국 터져 버린 제갈운.
“아 거참 흑천련이 무슨 바보 집단인 줄 아세요? 그놈들이 오십 년 이상 강서를 먹고 있었는데 그게 아무런 수완 없이 가능한 일이냐고요.”
조휘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무공으로 협박이나 했겠지.”
“와 진짜 무식해! 그들은 오히려 정파세력보다 고관대작들을 더욱 철저하게 대접하고 관리해요! 오히려 고관대작들은 자신들의 권역 내에 정파보다는 사파가 자리 잡는 것을 훨씬 좋아할걸요?”
“음?”
“그들은 정파인들처럼 체면을 차리거나 말을 빙빙 돌리지도 않아요! 잡다한 일에 눈을 감아 주는 만큼 확실하게 이득을 보장해 주죠! 그야말로 사파다운 화끈함이죠!”
제갈운은 그간 수많은 일처리를 해 오면서 귀족들을 주물렀던 흑천련의 수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자들 중에서 고관대작들을 가장 잘 다루는 자들이었다.
“혹시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뒷짐을 지고 있는 단백우.
제갈운이 화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 결코 아닙니다! 그저 사파 쪽의 수완이 좀 더 교활하고 능수능란하다는 그런 뜻입니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조휘가 별안간 남궁장호를 쳐다보았다.
그런 조휘의 뜨거운 시선에 왠지 흠칫하는 남궁장호.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남궁 형!”
조휘가 갑자기 자신의 손을 부여잡자 남궁장호가 식겁하며 뿌리쳤다.
이제는 제법 조휘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는 남궁장호는 벌써부터 불길한 기운을 가득 느끼고 있었다.
“회의에 별다른 안건이 없다면 이만 물러나겠다.”
조휘의 표정이 묘해진다.
뭔가 당근을 주고 싶은데 저 공명정대한 포권충은 도무지 좋아하는 것이 없다.
장일룡이 대회장을 벗어나려는 남궁장호에게 말했다.
“요즘 뭐가 그리 바쁘시우?”
“가전무공을 다듬고 있다.”
“호오.”
그 순간, 조휘의 두 눈이 매처럼 빛났다.
“흠, 무공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대회장의 문고리를 잡으려다 흠칫 멈춰 서는 남궁장호.
“……내 무공을 봐준다고?”
사실 조휘는 남궁장호의 입장에서 최고의 무공 사부다.
우선 세가의 어른인 봉공이니 외인이 아니라 가전무공을 토론하는 데 자유로웠고, 무엇보다 그의 경지는 절대경의 무극!
“대신 조건이 있는데.”
눈살을 찌푸리는 남궁장호.
“조건?”
“응! 가주님을 설득해 줘!”
“아버지를?”
조휘의 다음 말에 남궁장호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남궁세가의 이전! 어차피 포양호에 더욱 먹을 게 많아졌는데 합비는 분타로도 되지 않을까?”
조가대상회의 명망으로 안 된다면, 남궁세가의 명망을 빌리면 그만이었다.
단지 손님을 받기 귀찮다는 이유로 수백 년 남궁세가의 터를 옮기려는 조휘의 얄팍한 심보에 제갈운의 턱이 쩍 하고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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