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47
46 章>
광기 어린 개파대전의 첫날은 인시(寅時)가 거의 끝날 때쯤에서야 모든 소란이 잦아들었다.
조휘는 어지럽게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는 근육 팽가들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온갖 은원으로 얽힌 강호를 누군가는 비정한 세상이라 손가락질하겠지만 이렇듯 한편으로는 평범한 사내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절차탁마 무공을 익히고 서로 명성을 경쟁한들 우리네 사람살이가 어디 다를 수 있겠는가.
조휘는 왠지 그렇게 초연한 마음이 되어 조가별원의 후원으로 길을 나섰다.
강호명숙들이 건네는 축하주를 모두 마다 않고 마셨더니 그 마음에 약간의 감상적인 기분이 일어난 것.
후원에 도착한 조휘가 교교한 월광 아래에 오연히 서서 천천히 조가철검을 뽑아 들었다.
또다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는 조휘.
‘이런 엄청난 진검(眞劒)이라니…….’
현대인들이 평생을 살아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예리한 장검이다.
무림이라는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온갖 우여곡절 끝에 검신과 마신의 진전을 이은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이 흔한 철검조차 아직 낯설기만 했다.
조휘는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야공(夜空)을 올려다보았다.
현대의 도시에서 바라본 밤하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도시의 불야성 아래에서는 아무리 별빛을 살피려 해 봤자 그 광활한 은하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데 이곳 중원의 별빛.
그야말로 모든 별이 자신에게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저 광활한 우주, 저 위대한 자연 아래 사람이란 한낱 미물과도 같은 것.
아무리 아등바등 날뛰어 봐야 술에 잔뜩 취해 얽히고설켜 잠들어 있는 저치들과 자신은 똑같이 사람인 것을.
-네놈답지 않게 웬 청승이냐? 안 어울리느니라.
무뚝뚝한 검신 어른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나와 있었다.
조휘가 피식 웃으며 다시 야공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그렇게 좋습니까?”
-흰소리 그만하고 어서 잠이나 자거라.
심마(心魔)라는 것은, 꼭 악독한 마음이나 지독한 살심같이 거창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자기모순, 단순한 허무감으로 시작되는 자기파괴가 더욱 무서운 법.
그러므로 무인, 아니 검수에게 있어서 맑은 정신과 올곧은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공허한 마음은 심력을 허투루 소모하는 지름길.
자신에게 육신이라도 있었으면 부드럽게 수혈(睡穴)을 짚어 주고 싶었으나 검신은 그럴 수 없는 현실이 한스러웠다.
한데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르르르르.
미끄러지는 듯한 저 음유한 보법은 화산의 암향표(暗香飄).
특히나 의념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 그 보법 속에 지극한 현묘함을 품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자하검성이 유일할 것이다.
그렇게 그윽한 암향을 품은 채 표표히 흩날리는 매화처럼 다가온 자하검성 단천양이 지그시 반개한 눈으로 조휘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조이시여.”
순간 조휘는 크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도조(道祖)는 무슨.
난 그냥 칠 년 낙방 공시생일 뿐이라구.
“흐, 제가 좀 많이 취했네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단천양이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량수불, 방원 이백 장을 의념으로 모두 살펴 그 어떤 기척도 없음을 미리 살폈습니다. 도조께서도 분명 이를 알고 계실 텐데 어찌 저를 이리도 황망하게 만드십니까.”
아직도 단천양은 자신의 영혼마저 정화되는 듯한 도조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 줄기 옥수(玉水)와 같았던 그의 가르침, 그 진면목을 다시금 대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량수불, 지금까지 도조께서 아무리 세속적인 행동을 보이셔도 저는 감히 헤아리려 들지 않고 궁금증을 참아 왔습니다. 한데 제가 살펴본바 도조님의 조가대상회는 강호에, 아니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칠 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어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단천양.
“도조께서는 이 미욱한 자를 도우(道友)로 여기시고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으니, 이번에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저를 납득시켜 주소서.”
그의 진솔하고 기특한 마음, 사심 없는 그런 행동에 이를 지켜보던 검신의 마음이 끝내 움직이고야 말았다.
“아, 안 돼! 검신 어른……!”
화아아아악!
그렇게 조휘의 육체에 현신한 검신이 고아하게 웃으며 단천양을 바라본다.
그 순간 단천양이 전율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뀐 기질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아아, 도조이시여!”
검신은 이내 아련한 표정이 되어 단천양에게 다가가 마주 앉았다.
“……아이야.”
그런 검신의 자애로운 한마디에 단천양의 온 마음이 불에 닿은 듯한 격정으로 치달았다.
화산의 종주, 그 엄청난 삶의 무게 속에서 끝끝내 감출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 모조리 드러나는 기분.
그런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그의 뺨으로 목으로 흘러 이내 앞섶을 적셨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인과(因果)란 쉴 새 없이 돌고 돌아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정(正)이라 하였다. 무엇이 그리 조급했더냐?”
“무량수불…… 저는…… 저는…….”
검신은 그런 단천양의 얼굴에서 어떤 아련한 감정, 그리움을 발견했다.
“정이 많은 아이로구나. 화산의 사존들이 그리웠더냐?”
천하제일좌, 혹은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며 뭇 강호인들의 오롯한 존경을 받고 있는 자하검성이었지만, 사실 그의 본 모습은 평생토록 화산의 너른 품에서 수양만을 힘써 온 일개 도사였다.
화산검종의 종주라는 허울만 없었다면 언제나 사부님만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화산의 제자일 뿐.
“허허! 내게서 과거를 느꼈구나. 그래, 천하의 화산검종이란 자가 다시금 응석받이 수련 도사가 되고 싶은 것이냐?”
“그, 그런 것이…….”
단천양은 부정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천명(知天命:50세)에 이르렀을 때 자신은 화산 최고의 매화검수가 되었다.
당시에는 사부님이 살아 계셨지만 그 어떤 가르침도 내려 주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제자의 경지가 제 사부를 초월했기에 가르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단천양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홀로 외로이 일로정진(一路精進)했다.
고독한 검도(劒道).
그런 지독한 외로움이 이제는 무뎌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그때 도조께서 나타났다.
기운만으로 자신의 전 내공을 무력화시키며 단 일 검으로 화산을 지워 버렸던 검의 신.
그런 그가 자신의 수십 년 자하의 적공(積功)을 포기하라 꾸짖더니, 한 수의 초절한 환상을 통해 단숨에 진정한 암향매화를 깨닫게 해 주었다.
단천양이 가득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허허…….”
검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저 자하검성이란 천고의 도사가, 한없이 몸을 낮추고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검신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으며 두 눈을 반개한다.
“그래 한 번 펼쳐 보거라. 나도 네 검을 보고 싶구나.”
그 한마디에 단천양의 얼굴이 금방 상기됐다.
차아아아앙-
적막한 후원의 한복판에 울려 퍼지는 자하검성의 발검 소리.
기수식도 아닌 단지 가벼운 발검이었지만 그 한 수만으로도 그의 고절한 경지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사르르르르-
그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 올의 내공도 의념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로(劒路) 그 자체였다.
기이하게도 그런 단천양이 펼쳐 내고 있는 검초는 화산파가 자랑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아니라 육합검.
육합검은 삼재검보다는 좀 더 수준이 높았지만 흔히 배울 수 있는 강호의 일반적인 검법이었다.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공간을 이해하고 선점하며 먼저 장악하는 검법.
느릿하게 나아가며 앞(前)을 헤집다가, 돌아서서 후방(後)을 정교히 방비한다.
호쾌하게 뻗은 궤적으로 좌변(左)을 파고들다가 동시에 우변(右)으로 짓쳐 나아가며 하늘(乾)과 대지(坤) 아래 굳건하게 자리 잡는다.
이것이 육합(六合).
이 여섯 방위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만 있다면 천하의 그 어떤 공격도 두렵지 않다.
이 육방을 잘게 쪼개 삼십육방으로 나누고, 그 속에 더욱 현묘한 묘리를 담아낸 검이 종남의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劒).
비록 육합검이 흔한 검법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내포된 극의(極意)만큼은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었다.
한데 이것은 화산검종의 검의가 아니었다.
“그만. 그만하거라.”
모든 초식을 펼쳐 내기도 전에 그만하라고 하자 단천양이 의아한 얼굴로 검신을 바라보았다.
허나 검신은 두 눈을 감은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
결국 검을 거둔 단천양이 공손하게 그의 앞에 다가가 마주 앉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검신이 마침내 다문 입을 열었다.
“……화산의 검종이 어찌 내 검이나 흉내 내고 있느냐?”
“…….”
그런 검신의 한마디에 마치 폐부가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단천양.
하지만 자신의 결의를 어찌 그리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가.
“무량수불, 화산의 검종이라는 신분을 떠나 저는 검수입니다. 검수로서 신(神)의 공부를 좇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런 검수의 의지를 어찌 그릇된 것이라 말하십니까?”
“갈(喝)!”
검신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목청을 터뜨렸다.
“너는 중원검종을 대표하는 검수다! 어찌 이방인의 검이나 좇으려 하느냐! 그렇게 경지에 오른다 한들 감히 스스로 떳떳할 수 있겠느냐!”
단천양이 황망해했다.
“무량수불, 이방인의 검이라니요?”
검신은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허망한 심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감히 후배에게 부탁하노니 삼신(三神)의 허망한 길을 좇지 말고 부디 중원의 무공을 꽃피워 주길 바라네.”
아니 무려 삼신의 무공이 허망한 것이라니 이 무슨 천하가 비웃을 소린가!
“본 좌의 공(空)은 화산검종의 그것과 어울리지 않아.”
이미 단천양은 알고 있었다.
육방과 삼십육방을 넘어 그 모든 공간의 장악을 무색하게 만드는 진정한 공간검의 최고 경지는 공(空)이라는 것을.
그것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검신의 검공.
단 일 검에 화산을 지워 버린 절대적인 자연검이었다.
“화산의 검은 겨우내 홀로 견디며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내는 매화요, 만물이 창생하는 봄이다. 또한 천하에 흐드러진 암향의 생령(生靈)이자 삼라만상을 소생시키는 활인검이다.”
지그시 두 눈을 반개하는 단천양.
“이 모자란 녀석아. 네가 공부하고 정진해야 하는 검은 본 좌의 공(空)이 아니라 활(活)과 생(生)이거늘 그 단순한 이치를 아직도 깨우치지 못했단 말이냐?”
“…….”
커다란 대못이 정수리로부터 꽂혀 드는 그야말로 정문일침과 같은 꾸짖음이었다.
우우우우우웅-
포양호에 드리워진 생령의 기운이 급속도로 단천양에게 모여들기 시작하자.
암향매화의 향기가 더욱 만개하여 온 후원을 휘감았다.
그제야 얼굴이 환해진 검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아직 모른다네. 이 아이의 운명 속에 어떤 천명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검신이 교교한 달빛을 응시했다.
“한 인간이 어찌 모든 겁난을 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조휘가 고금의 기재요, 그 행보에 숙명적인 인과율이 함께한다고 하나 그의 말대로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다.
신좌라는 엄청난 존재가 본격적으로 핍박한다면 홀로 대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때가 차면 이 아이를 도와주시게. 중원의 검종으로서 화산의 검수로서 내게 약속해 줄 수 있겠는가?”
암향매화의 생령이 그득히 피어난 그 자리에서 단천양이 검신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칠채서기로 반짝이는 그의 두 눈이 검신의 시선을 좇아 교교한 달을 향했다.
“도조이시여. 이 단 모의 매화신검을 걸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단천양은 일신에 아로새겨진 육신통(六神通)으로 인해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검신이 혈옥의 영계로 돌아가자 조휘가 술기운이 확 달아난 얼굴로 거칠게 인상을 구겼다.
“아니, 이 노인네가 더 이상 무슨 힘이 남아 있다고 또 강신(降神)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검신에게는 정말이지 남은 영력이 얼마 없었다.
영계에서 존자들의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들 중에서 검신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잦아든 채 들리는 것이 이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
눈물이 그득 고이기 시작한 조휘가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발악하듯 다시 외쳤다.
“아니 그렇게 뒈지고 싶으세요? 영력을 모두 잃어 존재력이 사라지면 다시는 환생도 못 한다며! 에잇 싯팔!”
그때, 더욱 잦아들어 희미해진 검신의 목소리가 조휘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와 대무(對武)하거라.
아니, 이 와중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조휘가 황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또다시 뭐라 항변하려는 찰나.
-그의 자연경은 이제 화영(化永)에 이르렀다. 그만한 자연경의 고수를 만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더냐?
무혼, 무령, 무극, 무량으로 나뉘는 절대경과 비슷하게 자연경 역시 세 단계의 경지로 구분된다.
화오(化悟), 화영(化永), 화신(化神).
진정한 신의 경지를 단 한 단계만 남겨 둔 단천양을 상대하는 것은 조휘에게 있어서 엄청난 기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겁난이 다가올 때까지 네 녀석은 반드시 자연경을 이루어야 한다. 그와의 대무는 네게 큰 깨달음을 줄 것이니 속히 그에게 대무를 청하거라.
조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본인이 존재력을 다 잃어 가고 있는 이 처참한 와중에도 제자를 먼저 걱정한단 말인가.
조휘가 금방 음울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삼신(三神)마저도 당해 내지 못한 신좌의 무리들을 제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조휘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짓누르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그들의 엄청난 무공과 법력을 직접 경험하기까지 했으니 무력감에 휩싸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놈은 우리와 다르다!
강건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마신이었다.
그 엄청난 금천종(金天宗)과 소동들을 단지 내뿜는 기세만으로 쫓아내 버리는 조휘를 똑똑히 지켜본 마당이었다.
그런 조휘의 능력은 무공이나 법력, 도술 등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힘.
그들 영혼의 본질, 그 허실을 구분할 수 있는 조휘의 신안(神眼)은 지금까지 그 어떤 기인도 구사하지 못한 기이한 능력이었다.
“무량수불, 허허…… 그랬군. 그랬어. 그 목걸이 속에 수많은 영령들이 깃들어 있었구려. 참으로 엄청난 기물이로고.”
화영의 경지를 이루어 그 영격 또한 존자에 근접한 단천양은 이제 초보적인 육신통(六神通)을 구사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조휘와 존자들의 대화를 희미하게나마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량수불, 설마하니 삼신(三神)의 영령이 그대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소?”
“…….”
그렇게 단천양이 육신통으로 혈옥 속 존자들의 영격을 하나하나 살피더니 더욱 기경한 얼굴을 했다.
“허어! 다른 영령들의 기질과 기운, 그 격(格) 역시 삼신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이구려. 구전되는 강호의 전설 속에 수많은 기연들이 존재했지만 이런 광세의 기연은 도무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소.”
그제야 단천양은 왜 그토록 조휘가 검신의 적전제자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조휘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검신 어른께서 저더러 검성님과 붙어 보라는데요.”
단번에 검신의 뜻을 살핀 단천양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자신 역시 위대한 검신의 무기명제자라 할 수 있었다.
사제지간으로서 서로 동문수학하는 것은 당연한 일.
“무량수불, 좋소.”
조휘가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는 철검을 꺼내 들며 두 눈을 빛냈다.
“전력을 다해도 되겠습니까?”
단천양이 이내 푸근하게 웃으며 매화신검을 천지간에 굳건하게 세웠다.
“무량수불, 가진 모든 것을 토해 내도 괜찮소이다.”
그런 단천양의 선언에 조휘는 호승심이 치밀었다.
대무(對武)로써 무인의 모든 것을 토해 낼 기회는 결코 흔치 않은 일.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순간.
조휘의 두 눈이 눈부신 백안으로 물들자 그 기질이 일변했다.
무극에 이른 절대의 무혼을 한 올도 남김없이 모두 끌어올린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의념의 폭풍이 몰아쳤다.
용권풍과도 같은 조휘의 거대한 무혼이 순식간에 총단 전체를 휘감자.
누구보다도 기운에 민감한 무인들이 파리한 안색으로 하나둘씩 깨어났다.
감히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광대무변한 기운!
곧이어 무황을 비롯한 구파의 명숙들, 오대세가의 가주들, 조휘의 동료들 등 수많은 고수들이 조휘와 단천양이 대무하는 후원으로 경공을 펼치며 나타났다.
“……회장님!”
기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갈운을 향해 조휘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화답해 주었다.
“걱정 마세요. 대무일 뿐입니다.”
제갈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굳어졌다.
지금까지 조휘의 무혼을 수차례 경험해 보았지만 단연코 오늘이 최강이었다.
그야말로 총단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아득한 위력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현기증이 치미는데 이게 고작 대무라고?
“……허!”
한껏 수척해진 얼굴로 장탄식을 터뜨리며 장내에 등장한 인물은 놀랍게도 흑천대살.
조휘의 동료들을 제외한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조휘의 진실된 경지를 경험한 유일한 무인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지금 조휘의 무혼은 놀라운 것이었다.
피가 나도록 가득 이를 깨무는 흑천대살.
저 사내의 이런 엄청난 경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흑천련은 결코 그를 향해 먼저 도발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그때, 조휘가 여전히 자신의 광대무변한 무혼을 사방에 드리운 채로 오연히 말했다.
“가겠습니다.”
우우우우우웅-
조휘의 철검에서 엄청난 의념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천검류(天劒流) 제팔식(第八式).
천하공공도(天下空空道).
공(空)의 검으로 대표되는 검신의 검초가 드디어 전 강호가 보는 앞에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츠츠츠츠츠츠-
단천양의 전면 허공에서 수없이 많은 칙칙한 점들이 나타났다.
그 수많은 점들이 이내 공간을 집어삼키며 세(勢)를 불려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무황이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허어……!”
무황은 그 고절하고도 놀라운 위력을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의념으로 공간을 집어삼키다니!
저런 식이라면 상대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한순간에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하검성은 과연 화산 그 자체.
단천양의 검이 가볍게 흔들거린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윽한 향이 일어나 천지를 적셨다.
그 순간 무황은 화산의 오랜 전설이 재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화의 그윽한 향이 천지를 뒤덮나니(梅香密密).
비로소 화산 혼의 재림이요, 생령의 암향이로다(華魂暗香).
암향매화검(暗香梅花劒).
제일식(第一式).
암향천망하(暗香天網霞).
그것은 천하를 집어삼킬 듯한 강맹한 기운이 아니었다.
그저 부드럽고 음유했으며 한없이 자연스러운 검.
그윽한 암향과 함께 일어난 단천양의 검력은, 마치 삼라만상을 치유할 것처럼 부드럽게 나아가더니 조휘의 천하공공도와 한 몸처럼 어울렸다.
스으으으으.
공(空)의 검에 의해 찢겨 상처 입은 모든 공간이 서서히 아문다.
그렇게 천하공공도의 점(點)들이 모두 사그라지자 조휘의 얼굴이 전에 없는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천하공공도는 신좌의 법력이 서려 있던 술법의 핵까지 파괴한 절대적인 검초.
비록 마신공(魔神功)의 공능을 일으키지 않았다곤 하나 이런 식으로 파훼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제야 조휘는 천검류의 공공력이 화산의 활생력(活生力)과 상극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보았느냐? 저것이 중원의 검종(劒宗)이니라.
뿌듯한 감정이 그득 느껴지는 검신 어른의 목소리.
아니, 이 노인네는 도대체 누구 편이야?
이건 분명 자신의 경지가 모자라서다!
자연경에 이른 검신 어른의 공공력이라면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렀을 터!
그렇게 뿌득 이를 깨물던 조휘는 조용히 검을 거둔 채 장고에 시달렸다.
지금 수준의 공공력으로는 결코 암향매화의 활생력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최강의 패를 꺼내 들고 싶었지만 정파의 명숙들이 모두 보고 있는 앞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때 조휘의 귓가에 단천양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마신(魔神)의 공부를 펼칠 요량이라면 소란은 본 도가 잠재워 드리겠소이다.˃
호오?
무려 천하제일인의 호언장담이니 조휘는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순간.
조휘의 두 눈에서 처절한 암자색의 귀화(鬼火)가 타올랐다.
화르르르르르.
그렇게 조휘의 몸에서 마신공의 마화가 피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전 내공을 일으켜 조휘의 기운에 겨우 맞서며 구경하던 강호의 명숙들이 기겁하며 후원의 바깥으로 물러났다.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일신에 두를 수 있는 화경의 고수들조차도 감히 서 있을 수 없을 지경!
“허어! 이건 대체!”
무황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무극을 넘어 무량의 경지에 이른 무황조차도 무혼을 몸에 두르지 않는다면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광대무변한 기운!
조휘의 마신공은 본래 마신의 그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신공이었다.
검천대신공의 무리(武理)와 합일하여 그 위력이 몇 배나 상승된 지고의 신공.
“무량수불, 과연 검신의 제자답게 그 경지가 고절하기 그지없소이다. 화산의 자하를 이리 자유자재로 구사하다니.”
자하(紫霞)?
순간 조휘는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이내 단천양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조휘의 철검에서 칠흑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온 천하를 집어삼킬 만큼의 흉포한 마(魔)의 기운이었다.
조휘가 자신의 능력으로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검초를 심상으로 떠올렸다.
그것은 구유에서 피어오른 멸망의 기운.
그렇게 조휘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암흑(暗黑)으로 인해 천하를 너르게 비추던 달빛이 일순간에 그 빛을 잃었다.
검신의 무공이 공(空)이라면 마신의 무공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滅).
화산의 활생과는 그야말로 절대상극이라 할 수 있는 공능이었다.
조휘의 철검이 구유의 어둠 속에서 억겁을 거니는 천마의 신위를 드러냈다.
쿠구구구구구-
조가대상회의 총단을 넘어 포양호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한 진동에 휩싸인다.
천마삼검(天魔三劒).
제이식(第二式).
천마파멸혼(天魔破滅魂).
그 순간.
그 흔한 파공음도 충격파도 없이 단천양이 서 있던 자리가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졌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를 지켜보던 자들은 하나같이 놀라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
한데 단천양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 풍광까지도 함께 사라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럴 수가!”
무황의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
풍광이란 것은 엄연히 원근(遠近)이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저런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지?
무슨 도술이나 법력도 아니고 저게 정말 인간이 펼친 무공이 맞는 건가?
그렇게 모두가 얼이 빠져 멍하게 굳어 있을 때.
츠츠츠츠츠츠.
모든 원근의 풍광이 사라져 오로지 암흑만이 그득한 그 자리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음?”
무황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칙칙한 어둠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툭 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매화신검!”
그것이 단천양의 검이란 것을 확인하고는 무황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가가각!
엄청난 불꽃이 일어나며 정확히 세로로 찢어지고 있는 공간!
이내 어둠을 모조리 찢어 버린 단천양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런 암흑의 공간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허허, 그야말로 재밌는 검이로군.”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천양.
조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천마파멸혼(天魔破滅魂).
그런 조휘의 검을 보자마자 마신은 크게 감탄했다.
오로지 광기와 파멸만이 전부였던 자신의 그것과는 전혀 궤가 다른 조휘의 검혼.
그것은 검신의 공(空)이 완벽히 융합되어 있는 또 다른 차원의 파멸이었다.
그제야 깨닫는 바가 있는 마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신 역시 현대인이 남긴 흔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터였다.
자신은 현대인의 석판 속에서 ‘멸(滅)’을 깨우쳤으나 검신은 검총의 검흔을 통해 ‘공(空)’을 깨달은 것.
같은 것을 보고도 해석에 따라 깨달은 바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두 깨달음 속에서 오직 조휘만이 그 동질성과 연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검총과 석판을 남긴 현대인처럼 그 역시 같은 현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현대인이 지향했던 본래의 오롯한 무리(武理)가 지금 저 조휘의 천마파멸혼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마신은 묘하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때, 단천향이 매화신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엄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무혼(武魂)은 잘 보았소.”
같은 검수로서 조휘를 향해 정중히 예를 다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더는 볼 것이 없다는 자하검성의 선언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오만한 행동처럼 느껴졌겠지만 그는 다름 아닌 천하제일인.
이에 조휘 역시 철검을 거둔 채 진득한 눈을 빛냈다.
방금 전의 천마파멸혼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혼이라는 것을 이미 단천양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더 이상 볼 가치도 없다는 의미였기에 조휘는 묘하게 오기가 치밀었다.
무극의 경지에 이른 후로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
허나 천마파멸혼이 막힌 마당에 무슨 수로?
‘하…….’
어떻게 시공간마저 비틀어 왜곡시켜 놓은 파멸의 공간을 한낱 검으로 찢고 나올 수가 있는 거지?
천마파멸혼은 천마멸겁무를 압축한 버전.
수백 장에 미치던 파멸의 기운을 초절한 의념의 통제를 통해 한 사람에게만 미치도록 압축시켜 놓았으니 순간적인 파괴력만 따진다면 시간을 왜곡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 물리적인 압력, 그 밀도는 상상을 불허하는 것.
한데 단천양은 그런 마신의 파멸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양단했다.
아무리 자연경이 대단한 경지라지만 너무 가벼운 한 수로 막아 내 버리니 조휘는 그저 허탈한 마음만 일어날 뿐이었다.
한데 이어지는 단천양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무량수불, 그대는 앞으로 결코 자연경에 이르지 못할 것이오.”
그런 단천양의 선언에 이를 지켜보던 무황이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조휘는 아직 이립(而立:30세)에도 이르지 않은 연배로 무극의 경지를 아로새긴, 그야말로 무림의 길고 긴 역사 속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검수다.
위대한 삼신(三神)조차도 대부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 신위를 드러낸 마당.
때문에 조휘는 가장 높은 확률로 자연경의 경지를 이룰 다음 세대의 후보일 것이다.
틀림없이 단천양도 조휘가 이룬 신위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저런 단정적인 선언이라니?
하지만 조휘와 검을 섞은 것은 그였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황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
무엇보다 당사자인 조휘가 가장 놀라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자신에게도 자연경을 이룩하는 것은 삶의 거대한 목표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검신 어른의 뜻.
아니 아마도 모든 존자들이 바라고 있는 비원(悲願)일 것이다.
한데 ‘아마도’도 아니고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라니?
조휘는 전에 없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황망한 마음을 토해 냈다.
“아니 창창한 젊은이의 앞길을 막아도 유분수지 무슨 근거로 그런 단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한눈에 봐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가득한 조휘의 표정.
하지만 단천양의 얼굴은 얄미우리만치 평화로웠다.
“허허…… 무량수불, 분명 그대의 무혼은 길고 긴 무림사에 전무후무한 강력한 의념절공일 것이오. 하지만 반대로 그 무혼 외에는 무엇이 있소이까?”
“음?”
무혼(武魂).
혹은 의념지도(意念之道).
이들 단어만큼 절대경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을 오롯이 나타내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절대경 무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무혼.
절대경의 무인에게 무혼 말고 무엇이 더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조휘에게로 또다시 단천양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무량수불, 그대의 몸에는 투로(鬪路)가 존재하지 않소. 자신만의 투로를 새기지 못한 무인이란 본디 존재할 수가 없는 법. 이는 심각한 것으로 후일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소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모순된 무인이 절대경에 이르렀다는 자체가 신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무인이란 본디 고된 육체 수련과 정신 수양, 처절한 실전 등 그런 모든 경험을 겪으며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본질을 갖게 된다.
누군가는 이런 숙련적인 무인의 삶을 구도(求道)라고 말할 정도로,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경지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야말로 무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무인의 본질을 단천양은 ‘투로(鬪路)’라고 뭉뚱그려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수많은 단어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말이었다.
‘투로라…….’
조휘는 한껏 진지해져 있었다.
한글로는 싸움 길.
고상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전투 동선(?) 정도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투로란 조휘에게 있어서 오로지 검천전능지체의 백안(白眼)을 통해 전해져 오는 물리학적 정보일 뿐이었다.
최적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가상화시키고 이를 육체나 심상, 혹은 의념으로 구현해 내는 것.
“그대의 무혼은 한 무인의 일생을 통해 오연히 드러난 자아(自我)라기보단 뭐랄까. 그래, 기술(技術)에 가깝소이다.”
그제야 조휘는 왜 단천양이 그런 느낌의 감상을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자신이 검총에서 깨달은 검천전능지체의 특성이 원래 그랬기 때문이다.
현대의 수학, 즉 물리학의 연산 능력을 중원 무공에 접목시켰기 때문에, 자연히 인공적인 혹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휘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물리학의 연산 능력이 가미된 자신의 무공이 중원인들에게 낯선 것은 그들이 수학을 모르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조휘가 단천양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발했다.
“이 소검신이 투로조차 없는 무인이라…… 왜 그렇게 느끼셨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런 확언은 조금 아니 많이 이르셨습니다.”
단천양의 얼굴에도 점점 노한 기색이 서렸다.
“무량수불, 허허…… 본 도가 비록 한 사람의 범부라 하나, 이 너른 강호에서 검성(劒聖)이라 불리는 자외다. 본 도의 안목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오.”
조휘가 다시 철검을 치켜세웠다.
“아무런 의념과 내공력 없이 순수한 초식만으로 다시 저와 대무해 보시겠습니까?”
조휘의 도발.
이에 천하제일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감히 화산을 대표하는 검종(劒宗)에게 순수한 초수를 겨루자니?
화산파가 어떤 문파인가?
그야말로 중원제일의 환검(幻劒)을 구사하는 검파다.
매화검수가 되기 위한 입문 시험만 하더라도, 현천궁의 용마루 끄트머리에서 한 아름 퍼부어 떨어뜨리는 매화꽃잎들을 단 일 초(一初) 만에 모두 잘라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최후 초식 천화만개(千華滿開)를 최소 팔 성 이상 익혀야만 가능한 경지.
그렇게 화산의 검수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초식을 구사하기 위해 그야말로 평생토록 눈물겹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그런 매화검수의 정점에 서 있는 자에게 순수하게 초수를 겨루자?
화산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망발.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다.
저 무황조차도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도발일 터!
“무량수불, 좋소이다.”
차아아앙.
단천양의 매화신검이 또다시 눈부신 검신(劒身)을 드러내자.
조휘의 신형이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전방으로 쏘아졌다.
차아아악!
조휘의 철검이 길게 뻗어 호선을 그리자.
단천양이 한 호흡 만에 가볍게 물러나며 매화분분(梅花芬芬)으로 받아쳤다.
분명 한 올의 내공도 없이 펼친 검초였으나, 그의 매화신검은 눈부신 환영을 일으키다 종내에는 화려한 매화의 파도가 되어 조휘의 전신을 압박해 갔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채채채채채채챙!
단천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투로를 따라 모든 검극으로부터 조휘의 철검이 부딪혀 왔기 때문이다.
매화분분의 초식이 순간적으로 펼쳐 내는 방위는 백이십팔 방(方).
그 엄청난 속도의 환검에 일일이 검극을 맞댄다는 것,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휘의 철검을 걷어 낸 단천양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매화신검을 거뒀다.
“그대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어찌……?”
조휘는 입만 아프다는 듯 침묵하며 피식 웃고 있었다.
남궁의 제왕검도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따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검천전능지체의 공능이다.
화산의 환검이라고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화려한 환검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물리학적인 정보가 더욱 많이 쏟아져 나와 대응이 더 쉬울 지경이었다.
최고점으로 치달으려 하는 움직임은 사잇각으로 비틀고.
연직(鉛直)하는 방위는 변위 거리를 넓혀 힘을 잃게 만들며.
가변적인 속도(速度)는 날카롭게 파고들어 가속을 방해한다.
그렇게 자신의 뇌리에 끊임없이 전달되는 매화분분의 벡터값들을 모두 0으로 만들어 버리게끔 교차되는 식으로 맞대응하면 그만인 것이다.
한데 이런 검천전능지체의 능력이 중원인들에게는 소위 말하는 파해식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한 문파의 검식에 대한 파해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문파의 검식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법이다.
그렇게 의문 가득한 얼굴로 굳어진 단천양을 향해 조휘가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감히 사부이신 검신의 위명을 빌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검성님의 검초를 단연코 처음 접했습니다.”
그런 조휘의 말에 더욱 석상처럼 굳어져 버리는 단천양.
소검신(小劒神)이라는 자가 감히 검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거짓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저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뜻인데, 그럼 방금 전의 그와 같은 파해식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문답무용(問答無用).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검수에게 해명이란 오로지 그 검초뿐인 것을.
이번에는 단천양이 먼저 선공을 펼쳤다.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劒).
낙매난홍(落梅亂紅).
낙매난홍은 화산의 검초 중 가장 흉흉한 검초로, 그 사이함 때문에 간혹 사파의 검초로 오해받을 정도로 위력적인 검초였다.
내공 없이 펼쳐 내고 있는 낙매난홍이었지만 이를 지켜보고 있던 무황의 얼굴은 더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환상처럼 일어난 수십 자루의 매화신검이 동시에 바람을 가르며 조휘에게 짓쳐 드는 그 모습에는 검성으로 불리는 자의 평생 적공(積功)이 녹아 있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
하지만 이어지는 조휘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깔끔하고 또 가벼웠다.
창창창창!
이번에도 검날이 아닌 검극이었다.
쏟아지는 모든 공세를 검날이 아닌 검극으로 일일이 맞대응한다는 것은 그 동선과 움직임을 예측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
다분히 의도적인 그런 조휘의 행동에 단천양의 얼굴이 극도로 붉어졌다.
“감히!”
이어진 천향밀밀(千香密密)과 난화부영(亂花浮英)!
칠매단심(七梅斷心)로부터 천화만개(千化滿開)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사즉필생의 각오로 펼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정수였다.
하지만 조휘는 단천양의 그 모든 초수를 모두 검극으로 맞서 깔끔하게 막아 버렸다.
미간의 중심에 철검을 치켜세운 채 양쪽으로 투명한 눈을 빛내고 있는 조휘를 바라보며, 단천양은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도대체…… 이게…….”
그 옛날 화산을 배신하고 천마교에 투신한 화산마검(華山魔劒)조차도 화산검식을 파해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그 악랄한 일념의 파해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조휘가 철검을 내려 허리춤에 패용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래도 제게 무인의 투로가 없습니까?”
“…….”
단천양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투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했다는 것을.
두 눈을 깊게 감은 채 조휘의 모든 검초를 다시금 되새겨 보는 단천양.
매화분분(梅花芬芬).
천향밀밀(千香密密)
난화부영(亂花浮英).
낙매난홍(落梅亂紅).
칠매단심(七梅斷心).
부운적하(浮雲赤霞).
자혼일로(紫魂一路).
천화만개(天華滿開).
단천양이 펼친 초식은 이십사수매화검법상의 여덟 검초였다.
조휘는 이 초식들을 모두 검극으로 맞받아쳤다.
이는 단순히 화산의 검초를 어찌 미리 알고 있었는지 조휘를 추궁할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난화부영을 펼치더라도 매화검수마다 그 검로가 모두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
인간의 팔다리는 모두 그 길이가 다르다.
다리가 짧은 자와 긴 자가 서로 보법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
더욱이 팔의 길이에 따라 미세한 버릇의 차이는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며, 이는 화산의 일천 검수가 모두 다른 검로(劒路)를 지녔다는 방증이었다.
더욱이 같은 검법 속에서도 얻는 심득이 저마다 다른 법이기에, 각자의 변초 운용 역시 개성적일 수밖에 없는 터.
그래서 무림은, 일신의 무위가 고절한 경지에 이르러 천하에 위명을 떨치는 무인이 나타나면 그를 일컬어 종사라 칭한다.
종사(宗師).
스스로 뿌리가 될 만한 무인이란 뜻.
당연히 화산의 검종(劒宗)이라 불리는 단천양은 종사라 불리는 자였고, 이는 그의 이십사수매화검법 또한 그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검초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데 이를 모두 검극으로 되받아쳤다는 것.
이는 단순히 매화검법을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설마 본 도의 모든 검초를 즉흥적으로 되받아쳤다는 말인가?’
화산의 검은 극도의 환검(幻劒).
내공 없이 펼친 초식이라고 해도 수없는 잔상을 남기며 검화를 피우는 검이다.
그런 화려함의 극치라 할 수 있는 화산의 환검을 어찌 그 긴박한 대무 속에서 일일이 검극으로 되받아칠 수 있단 말인가?
엄연히 인간의 시계(視界)와 두뇌의 연산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거늘!
이런 투로가 진정 가능하다면 눈앞의 조휘는 중원 검종의 모든 파해식을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인간의 무재(武才)로 어찌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단천양에게 이것은 조휘가 이립에 이르지 않은 나이로 절대경에 이룬 것보다 더욱 기함할 일이었다.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소검신의 무혼은 불가해(不可解)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자신조차도 읽을 수 없는 재능.
무심한 조휘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제 놀랍기보다는 두려움이 치밀 정도였다.
그때 단천양이 조휘를 향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읍을 했다.
“무량수불, 도조이시여. 저는 그에게 가르침을 내릴 자격이 없사옵니다.”
그런 그의 공손한 예는 조휘가 아닌 그 내면의 검신을 향한 것.
-그래…… 수고하였다.
왠지 모를 씁쓸한 뒷맛이 감도는 검신의 음성.
삼신처럼 이방인의 흔적을 좇아 경지를 이룬 것이 아닌 순수한 중원의 실력으로 자연경에 이른 단천양에게 희망을 걸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현대인이 남긴 불가해적인 무리(武理)를 이해하거나 넘어서지 못했다.
같은 중원인으로서의 신좌를 향한 짙은 패배감.
이를 지켜보던 마신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영계의 구석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천양은 복잡한 심경을 그 얼굴에 그득 나타내다가 이내 조휘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무량수불, 본 도는 이만 물러가겠소.”
정중하게 포권하는 조휘.
“고생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다 발길을 옮기려던 단천양이 문득 멈춰 섰다.
“스스로 살필 수 없다 하여 감히 상대의 경지를 부정하는 우(愚)를 범했소. 화산의 무례를 용서하시게.”
처음은 같은 검수로서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고, 마지막은 화산 검종으로서의 그릇된 처신을 후배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것이었다.
조휘의 두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강호의 노고수들은 대부분 옹골차다.
저렇게 곧바로 자신의 잘잘못을 스스로 비평하며 되새기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
그런 단천양의 담백한 사과에는 일파의 종주다운 품위가 그득했다.
검성(劒聖)이라 불리는 그의 명성이, 단순히 그의 무공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조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천검협 이후 한 사람의 무인에게 존경의 마음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조휘가 전에 없는 예(禮)로 정중하게 몸을 낮췄다.
“화산검종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무량수불…….”
그제야 단천양의 얼굴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드높은 경지 때문에 사람들이 잠시 잊고 있을 뿐, 어쨌든 그의 본질은 강호의 후기지수다.
그런 후배의 호협한 기개를, 어찌 선배 된 자로서 기껍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무량수불, 언제고 화산(華山)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단천양을 향해 조휘도 마주 미소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제가 제안드린 거래제의를 수락하신 것으로 알아들으면 되겠습니까? 조만간 계약서를 들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순간 멍하게 굳어 버리는 단천양.
대무의 흥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저놈은 사부의 심처를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는, 그야말로 장사치의 화신 같은 놈이라는 것을.
그렇게 자하검성이 씁쓸한 얼굴로 장내를 벗어나자 조휘의 동료들과 무황, 구파의 명숙들,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다가와 하나같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하하하하! 회장님!”
뿌듯한 얼굴의 제갈운.
강호는 명성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자하검성과의 대등(?)한 대무 소식은 이제 전 강호로 퍼질 것이고, 이에 소검신의 위명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허허…….”
검극으로 화산의 매화검법을 모두 맞받아치는 괴물 같은 조휘의 초수를 무황이라고 충격적이지 않겠는가.
그런 조휘의 무공에 대해 무황이 온갖 궁금증을 토해 내려는 찰나.
조휘가 대뜸 품 안의 서류를 꺼내며 눈을 번뜩였다.
“이제 저희 조가대상회와의 동맹수결(同盟手決)을 끝내고, 또 방금 전에 말씀드린 섬서 감천현의 사업허가서(事業許可書)를 작성하시죠.”
무림맹주의 얄팍한(?) 성정을 파악한 조휘는 이제 더는 서류 공증을 미룰 수 없었다.
구두로 아무리 협상해 본들 제대로 증거를 남겨 놓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을 위인.
“동맹은 그렇다 치고, 감천현의 ‘그 일’을 정말로 진행할 참인가?”
조휘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니 제가 무슨 실없는 농담이나 해 대는 방구석 한량입니까? 저 조가대상회의 회장입니다.”
“허어. 이 모진 인사가 정말로!”
“아니, 제게 개천운차를 받기로 한 시점부터 합의는 끝난 것 아닙니까? 거참 무림맹주라는 분이 허구한 날 말을 뒤집는 고약한 취미가 있으시네요.”
“허어!”
“아미타불!”
이를 지켜보던 중인들이 한결같이 마른기침을 해 댔다.
무려 무림맹주 무황이다.
새파랗기 그지없는 놈이 그런 무황의 면전에다 대놓고 거침없이 욕을 해 대다니!
조휘는 사람들의 비난 섞인 탄식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예의 목탄을 슥슥 휘갈겼다.
“자, 읽어 보시고 수결해 주십쇼.”
멍한 얼굴로 조휘가 내민 동맹체결서와 사업계약서를 확인하던 무황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뭔 뜬금없는 내용인가?”
“어딜 말씀하시는지?”
“사업계약서의 제오 항 말일세!”
제오 항(第五項)
무림맹(武林盟)은 북해의 후예인 한설현(寒雪賢)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다시는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이를 어길 시, 무림맹은 조가대상회에게 황금 일만 관(一萬貫), 혹은 그에 준하는 재물을 헌상(獻上)한다.
섬서 감천현의 관광 단지 개발(?)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항이 계약서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
“거 눈도 밝으시네.”
씁쓸하게 웃으며 음습한 눈을 빛내고 있는 조휘를 향해 무황이 버럭 소리쳤다.
“이 일은 이미 이곳에 모인 모든 강호 명숙들이 보는 앞에서 이 무황이 확언해 주지 않았는가? 자네는 무림맹주의 권위마저 부정할 요량인가?”
“뭐든 확실히 하는 것이 좋죠. 특히 무황님과는 더욱 그래야 하고요.”
“…….”
무황과는 더욱 그래야 한다?
그것은 충분히 욕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무황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못 믿겠다는 뜻이었기 때문!
이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무황이 이를 악다물며 사사건건 시비를 가리고 나섰다.
“무림맹이 조가대상회에게 헌상? 이 내가 헌상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 테지?”
헌상(獻上).
물건을 삼가 올린다는 뜻이다.
보통은 낮은 자리에 있는 자가 높은 자리의 귀인에게 선물을 바칠 때나 쓰이는 단어.
“아니 무림맹과 저희는 동맹이잖아요? 당연히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하는 것이 동맹이고, 그런 동등한 위치에서는 서로 존경하는 의미로 모든 서류에 존어(尊語)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뭐라 반박은 못 하겠고 다만 인상을 구기며 다시 시비를 가리고 나선 무황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세. 도대체 황금 일만 관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고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조항을 집어넣은 겐가?”
조휘가 오히려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오히려 되묻고 싶네요. 애초에 그 고절한 사자후로 선언하신 말씀만 뒤집지 않으신다면 황금 일만 관은커녕 한 냥도 저희한테 줄 이유가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지금 그 말씀은 무황께서 한 입으로 두말하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지 않습니까?”
“뭐, 뭣이!”
무황이 뒷목을 잡고 뒤로 나자빠지자 수하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부축하고 나섰다.
“맹주님!”
이를 지켜보던 제갈운이 혀를 내둘렀다.
조휘가 무서운 점은 어쩌면 그 가공할 무위보다 저 세 치 혀 때문일 것이다.
장강 이북의 절대자인 저 무황을 저리도 들었다 놨다 하다니!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노기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무황이 거칠게 노성을 내질렀다.
“놔라! 이거 놓으시게!”
맹의 간부들을 뿌리치며 다시 조휘에게 다가온 무황이 진득한 눈을 빛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꾸나!”
슥슥.
무황이 서명을 마치자 금세 흡족한 얼굴이 된 조휘.
그런 조휘가 혹시라도 상대가 무를세라 서둘러 계약서들을 품에 넣으며 시시덕거렸다.
“헤헤, 좋은 결정 하셨습니다.”
“커험!”
무황이 한 차례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거칠게 미간을 구겼다.
“분명 수익금의 이 할이라고 했네! 내 주기적으로 조사관을 파견할 테니 모든 장부를 낱낱이 공개토록 하게! 감찰교위!”
감찰교위 단백우가 엄정히 예를 갖췄다.
“충!”
“조가대상회의 장부는 감찰원에서 파악토록 하라!”
“맹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조휘가 단백우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우리 자주 보겠네요?”
하지만 그런 호기로운 무황의 경고에도 조휘는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이미 조가대상회의 주요 산법수(算法手)들은 조휘에게 현대의 아라비아 숫자를 배운 마당.
죄다 한문투성이인 장부를 보기가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워, 한 달 전부터 모든 장부에 아라비아 숫자로 기입할 것을 명한 것이다.
감찰원의 조사관들이 아무리 살피려 들어 봤자 죄다 읽지 못하는 꼬부랑글씨만 그득할 것이었다.
무황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씨익 웃고 있는 조휘를 바라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터져 나왔다.
“가세!”
감찰교위 단백우가 곤혹스런 얼굴로 조심스럽게 묻는다.
“맹주님, 혹시 어디를 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
“어디긴! 맹이지!”
“예?”
아니, 으슬으슬한 야밤에 그 먼 길을 나서자니?
“매, 맹주님.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곯아떨어져 있는 수하들도 많습니다.”
“그럼 나중에 오시게! 난 먼저 가 볼 테니 말이야!”
내일도 저 조휘의 희멀건 낯짝을 보는 것은 무황에게 고역 중의 고역.
조휘가 푸근하게 웃으며 저 멀리 장일룡을 향해 소리쳤다.
“장 부장! 손님 살펴 가신단다! 개천운차 한 대 내어 드려라!”
“알겠수 형님!”
조휘가 예의 얄미운 미소를 풀지 않은 채 무황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살펴 가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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