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55
54 章>
조휘가 침소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 한설현이 차를 달이고 있었다.
“오셨어요.”
자신과의 혼사가 확약(確約)된 이후로 한설현은 완전히 다른 여인이 되어 버렸다.
현숙하고 고아한 품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녀의 자태는, 과연 명가의 가르침이란 남다른 것임을 조휘에게 일깨워 주었다.
“하하, 저녁밥은 먹었습니까?”
조휘의 정감 어린 질문에 한설현이 그 어여쁜 얼굴에 발그레 홍조를 그렸다.
“먹었어요 가가.”
크으. 가가라니.
그야말로 심장에 큐피트의 화살이 꽂히는 것마냥 가슴이 아려 온다.
조휘가 싱긋 웃으며 뭐라 말하려는 그때 한설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가께서 다망(多忙)하신 건 알아요. 하지만 아주버님과 아가씨께 신경 좀 쓰셔야겠어요.”
“형은 그렇다 치고 연이는 왜? 연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한설현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소검주님께 방심(芳心)이 흔들리신 것 같아요.”
“남궁 형을?”
금세 묘한 표정이 되는 조휘.
평소 남자라고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동생 조연이 남궁장호에게 반했다고?
“그가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매일매일 바라보고 있어요.”
“으음…….”
하기야 시기가 딱 사춘기다.
뜨거운 땀으로 번들거리는 건장한 사내의 몸에 시선이 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알겠습니다. 제가 조만간 연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죠.”
“어쩌실 작정이세요?”
조휘가 슬며시 웃었다.
“일단 철없는 호기심인지 진심 어린 감정인지 구분하는 법을 가르쳐야죠.”
“만약 아가씨께서 진심이라면요?”
“뭐 별수 있겠습니까? 남궁 형의 모가지라도 잡는 수밖에.”
“가가도 참…….”
으으.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그 자태가 너무 어여쁘다.
순간 멍해진 조휘가 애써 정신을 차리며 화제를 돌렸다.
“형은 또 왜요?”
“아! 아주버님께서는…….”
금방 침울한 신색이 된 한설현.
“일전에 조가천무대원들과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파의 무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셨어요.”
“수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조휘.
그도 그럴 것이 조가대상회에 속한 자가 어찌 감히 소검신의 가족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소검신의 가족에게 해코지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섶을 쥐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
“아주버님께서 이곳에서 생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가천무대원들이 잘 몰랐던 모양이에요. 아주버님께서도 자존심 때문에 가가의 위명을 내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이구요.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비무를 빙자한 구타라고 들었어요.”
“하…….”
조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제정신인가?
아니, 아직 일류에도 이르지 못한 경지로 음험한 사파의 세계에서 있는 대로 굴러먹은 고수들과 비무를 벌였다고?
정 안 되면 동생의 이름을 팔면 그만이지 그게 뭐가 그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형에게 소홀했던 것이 물론 미안하긴 했지만 그 무모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무공을 가르쳐야 하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공을 가르친다?
조휘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무인을 길러 낸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
자신부터가 무공의 기초적인 수법들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창천검협 남궁수와 상의하는 것이 옳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신경 쓰도록 하지요.”
“네. 가가.”
어느덧 찻주전자가 모락모락 김을 뿜고 있었다.
한설현이 고아한 자태로 찻잔에 차를 따르려다 갑자기 황급히 손을 뗐다.
“앗 뜨거!”
“괜찮습니까!”
조휘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한설현의 손을 확인했다.
한껏 붉어진 그녀의 손바닥을 호호 불어 주는 조휘.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조휘가 멍하니 한설현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때.
“흡!”
그녀가 본능적으로 조휘에게 입을 포갰다.
조휘는 나릇해지면서도 내심 그녀의 작전이 훌륭하다 생각했다.
화경에 이른 빙공의 고수가 찻주전자에 손을 덴다?
훗. 귀엽다.
키스를 하고 싶었다면 그냥 말로 할 것이지.
그런데.
그녀의 혀가 뱀처럼 영활하게 자신의 입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내 자신의 입속을 능숙하게 유린하는 그녀의 혀.
그런 농밀한 그녀의 혀놀림은 예사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 아니 이 무슨…….’
분명 남자 경험은 일절 없을 텐데?
순간 조휘의 등줄기로 서늘한 소름이 몰아쳤다.
그녀의 혀가 빨판처럼 흡입하며 농락하다 이내 펄떡인다.
마치 장난치듯 자신의 입안을 유린하고 있는 엄청난 혀 놀림.
이내 그녀의 능수능란한 손길이 자신의 장삼을 풀어 헤치고 바지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니 미친!
눈을 감고 입을 맞추고 있는 도중에 꽉 동여매 놓은 장삼의 옷고름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풀어 재낀다?
더욱이 세 개의 매듭으로 묶어 놓은 끈을 한 손으로 유유히 풀고 바지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손놀림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와! 도대체 얼마나 남자랑 뒹굴었으면 이런 엄청난 손놀림이?
그야말로 프로 중의 프로!
불길한 예감에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던 조휘가 애써 그녀를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와 나! 설마?”
한설현(?)이 입가에 침이 그득한 채로 천연덕스럽게 두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무슨 소리세요 가가?”
조휘의 두 눈은 이미 새하얀 무혼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무혼으로 그녀를 살피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청아한 빙기(氷氣)의 기운은커녕 시뻘겋게 너울거리는 핏빛 귀화(鬼火)가 그녀의 몸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서려 있었다.
핏빛(血)이라!
천변(千變)이라는 단어 뒤에 따라붙는 그녀의 또 다른 면모인 혈후(血后)!
“와 씨 이 무서운 년! 감히 한 소저를 연기해?”
정체가 탄로 난 천변혈후 백화린이 입술을 삐죽이다 다리를 쩍 벌리며 바닥에 침을 찍 뱉었다.
“제길 들켰네. 다 된 밥이었는데. 먹을 수 있었는데, 썅!”
몹시 아쉬운 듯 조휘를 위아래로 훑으며 입맛을 다시는 백화린.
조휘는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마다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머, 먹긴 뭘 먹어 이 미친년아! 와 진짜 개소름이네. 하마터면 내 동정을 잃을 뻔했어!”
“호오…… 동정(童貞)?”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눈알 뽑아 버린다.”
욕정으로 그득한 그녀의 눈빛은 가히 짐승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런 백화린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조휘.
“하.”
진가희를 능가하는 사파 최고의 미친년이라는 염상록의 말은 참으로 옳았다.
어떻게 강호의 세력을 천명한 조가대상회의, 그것도 회장의 침소를 무려 약혼녀로 위장해서 침투하다니!
“아니 어떻게 여기를 이리도 쉽게?”
천변혈후 백화린이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이 천변혈후가 천마신교고 무림맹이고 침투하지 못할 곳이 있을 것 같아? 게다가 여긴 너무 허술해.”
“……허술하다고?”
조휘는 외부의 적에 대한 방비를 결코 허투루 하지 않았다.
제갈세가의 고명한 진법이 외원 곳곳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동, 서, 남 세 개의 철문에는 초절정급 고수를 둘씩이나 배치해 두었고, 주요 길목마다 첨탑을 두어 조가천무대원들이 이중 삼중 감시의 눈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천변혈후의 역체변용술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데 그녀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생각을 해 봐. 여긴 강호의 세력이기 이전에 상회(商會)야. 물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다구. 세작을 심기에는 최고의 환경이지. 아마 여기보다 침투하기 쉬운 곳은 없을걸?”
“으음…….”
짙은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조휘.
그것은 조휘로서는 뼈아픈 지적.
대상회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조휘도 인지하고는 있었다.
허나 그 점을 백화린이 정확하게 집어 주자 더 이상 그냥 넘어가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세작을 심기가 이처럼 쉽다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으음…….”
비공일맥의 암상들이 조가대상회의 절수(絶手)들을 그 짧은 시간 안에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
뭔가 시스템적인 보완이 필요했다.
비밀스러운 음어(陰語)나 패(牌) 따위를 생각해 보았으나, 주요 간부 중 한 사람만 적에게 회유당하면 모두 들통나기 때문에 일단 배제.
무슨 조직도 아니고 몸에 새기는 비밀스러운 문신 따위도 그리 마뜩치 않았다.
게다가 수법을 들키면 문신보다 뚫리기 쉬운 보안책은 없을 터.
조휘가 그렇게 골몰하자 백화린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뭘 그리 고민해. 간단하잖아?”
“간단하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백화린.
“모두의 몸에 고독(蠱毒)을 심어. 그럼 간단히 해결돼. 값이 좀 비싸긴 해도 당신에게 남는 것이 돈인데 뭘.”
“…….”
사람의 생살을 뚫어 벌레를 심자는 말이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다니.
참으로 지극히 사파인스러운 발상이다.
그런 강압으로 통제하는 세력의 일원들이 충심으로 주군을 받든다?
그런 건 사천회도 하지 않는 일이다.
그 옛날 혈교면 몰라도.
“어휴, 말을 말자.”
한데 그때, 침소밖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박 사박.
조휘의 청력에 감지된 가벼운 발걸음소리.
사내의 그것이 아닌 틀림없는 여인의 발걸음이다.
“야 숨어!”
기겁하는 조휘에게로 백화린이 배시시 웃었다.
“네 약혼녀 아니야. 잠에 든 걸 확인하고 왔다구.”
“그럼 누가? 으악! 깜짝이야!”
도대체 저년은 왜 허구한 날 창문틀을 부여잡고 해돋이마냥 스르르 올라오는 거냐!
“씨발, 야 넌 벌써부터 안주인 노릇하고 있는 거야? 어? 오빠는 왜 옷고름을 다 풀고 있어? 이년이 설마!”
휘릭!
사뿐하게 창문을 넘고 침소로 들어선 진가희가 백화린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와, 이 요망한 것 보소? 얌전한 척하더니 보통내기가 아니네? 혼사도 치르기도 전에 거사를 치러 보시겠다?”
“뭐래 밀가루 같은 년이. 분가루를 얼마나 처발라야 그런 얼굴이 되냐? 그거 요즘 유행 지났거든? 어휴, 시대에 뒤떨어진 년.”
“뭐, 뭐야?”
육두문자만 아니었지 보통 날 선 입담이 아니었다.
늘 나긋나긋하고 고아한 자태, 그렇게 지독히 재수 없는 년에게 어찌 저런 걸걸한 입담이?
“와! 겁나 발랑 까졌어! 오빠 저년 좀 봐! 혼약하자마자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거라니까? 그럼 그렇지. 북방(北方) 년들이 얼마나 발랑 까졌는데 그렇게 내숭 떨 때부터 알아봤어!”
조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방(南方)의 여인들이 더 개방적인 거 아닌가?”
동서고금, 어떤 대륙을 막론하고 습하고 더운 남방의 여인들이 북방보다 더욱 개방적이다.
진가희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저 창백한 얼굴로 눈까지 뒤집으니 일순 침소 전체가 스산한 기운에 휩싸인다.
“아니거든? 북방 년들이 얼마나 더러운데? 겉으로만 깨끗한 척하지 속은 겁나 썩었다니까? 오빠가 그 음흉한 속을 몰라서 그래!”
“그건 인정.”
“뭐, 뭐라고?”
옳다구나 맞장구를 치고 있는 백화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진가희.
“북방 년들 음흉하기야 말하면 입 아프지. 추운 겨우내 골방에만 처박혀 내내 사내들만 생각하는 년들인데. 그년들 허벅지에 장침 자국이 그득할걸?”
“어……?”
이게 아닌데.
그렇게 당혹스런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진가희.
북해(北海)에서 살다온 년이 북방 년들을 저리도 잔인하게 깐다?
“남방 여인들이 진국이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확실하게 온몸으로 표현하잖아? 그러다 눈 맞으면 화끈하게 들이대는 거구.”
“그, 그렇지?”
어느새 맞장구를 치고 있는 진가희.
문득 백화린이 조휘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만발했다.
“이 대 일도 괜찮은데. 가능하겠어?”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혀를 날름거리며 시선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훑는 백화린.
백화린이 저리도 천연덕스럽게 더블 플레이를 하자고 설치자 조휘는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사파에서 가장 유명한 광녀(狂女) 둘이 어우러지니 철혈(?)의 조휘조차도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가희가 그런 조휘를 묘한 얼굴로 살피고 있었다.
그가 한설현을 미친년이라 부른다고?
그의 입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호칭이었다.
“설마 당신은……?”
백화린이 피식 웃었다.
“안녕, 후배야?”
“천변혈후!”
같은 희대의 광녀로서 묘한 경쟁심이 발동했을까.
진가희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천변혈후는 진가희가 소싯적부터 들어온 별호.
그녀의 나이는 아무도 추측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립(而立:30세)이 넘은 것은 확실했다.
혹자는 그녀가 불혹(不惑:40세)을 넘었다며 떠벌리고 다닐 정도.
“이 늙은 년이 지금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설마 우리 오빠를? 그 나이에 양심도 없어?”
“야 이년아. 사랑에 나이와 국경을 왜 따져.”
별안간 조휘가 백화린을 쳐다본다.
“몇 살이길래?”
“아직 마흔?”
조휘가 소름이 돋은 얼굴로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이런 싯팔…….”
불혹의 아줌마와 그리도 농밀한 입맞춤을 했다니.
그렇게 조휘가 퉤퉤 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년들끼리 내 침소에서 뒹굴든 알아서 해. 아무튼 난 간다.”
순간 백화린이 진가희와 눈짓을 주고받더니 그대로 조휘를 덮쳐 갔다.
“야 덮쳐!”
“네, 네! 언니!”
백화린이 눈짓으로 같이 먹자(?)고 호의를 베푸니 금세 늙은 년에서 언니로 호칭을 바꾼 진가희.
조휘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무혼을 드러냈을 그때.
-저기 무슨 일 있으세요? 가가?
밖에서 들려온 고아한 여인의 음성은 분명 한설현의 그것이었다.
또다시 식은땀을 비 오듯 쏟아 내고 있는 조휘.
자신의 침소를 바라보라!
입가가 침 자국으로 그득한 채 앞섶을 풀어 헤쳐 젖가슴을 절반이나 드러내고 있는 백화린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고.
진가희 역시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며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모습을 보라!
흐트러진 머리칼에 다 풀어 헤쳐져 있는 장삼, 미처 묶지 못한 바지고름까지.
누가 봐도 이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광경이다.
아아, 이 무시무시한 난관을 도대체 어떻게 극복해야 한단 말인가.
일단 조휘는 없는 척하기로 했다.
그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백화린과 진가희를 번갈아 향했다.
-소리 내면 둘 다 진짜 죽는다.
조휘의 살벌한 전음입밀.
눈빛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눈빛이다.
감히 그런 소검신의 신위를 경시하지 못하고 백화린과 진가희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어 조휘가 곧바로 침소 전체에 의념의 장막을 둘렀다.
혹시라도 이년들이 기척을 낸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
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완벽히 역효과를 불러왔다.
-안에 계신 거죠? 가가?
아뿔싸!
한설현은 다름 아닌 화경의 고수.
그녀가 의념지도를 느낄 수 있는 무공의 고수라는 것을 깜빡 놓치고 있던 것이다.
조휘가 의념을 풀며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려는 그때.
-들어갈게요.
아아!
그 찰나가 조휘는 천년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지략과 심계를 전력으로 발휘했다.
그야말로 두뇌 풀가동!
“어?”
침소로 들어온 한설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침소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맛! 이게 무슨!”
너무나도 망측한 광경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한설현.
곧 그녀가 고개를 돌린 채 의문을 드러냈다.
“도대체 지금 소검주께서는 가가의 침소에서 뭐 하는 짓이죠?”
남궁장호(?)가 예의 정중한 포권을 하며 굵은 목소리를 냈다.
“한 소저를 뵙소이다.”
* * *
“도대체 한 소저는 요 며칠 왜 날 벌레 보듯 하는 거지?”
황당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남궁장호를 향해 조휘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글쎄?”
“……혼인을 앞두고 마음이 싱숭생숭하신가 보군.”
“그럴지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드는 조휘였지만, 그렇다고 혼인도 치르기 전 약혼자의 손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저 남궁장호가 운이 없었던 것.
하필 그가 조휘와 체형이 비슷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리 역체변용술이 대단한 수법이나 장일룡의 근육, 제갈운의 호리호리한 몸까지 만들어 주진 않았다.
‘후우…….’
그날 밤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그녀가 너무나도 망측한 광경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길 망정이지, 만약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백화린을 발견했다면 당장 빙하지옥(氷河地獄)이 현세에 벌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한설현은 남궁장호(?)를 발견하자마자 뒤도 안 보고 나가 버렸다.
안도의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조휘가 문득 남궁장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늙은이는 마음이 좀 바뀐 것 같아?”
“…….”
조휘에게 제반 설명을 듣긴 했지만 맹(盟)의 일원인 남궁장호로서는 무려 개방의 방주를 안가에 가두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개방의 방주를 구금하고 있다는 것이 무림맹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 분명했다.
당장 무림맹이 동맹이고 뭐고 무력대를 끌고 와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
구파일방의 끈끈한 유대와 의리는 상상을 불허한다.
“정말 괜찮겠냐? 취선개는 정파의 명숙 중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걸물이다. 혹시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그럼 뭐 개방의 방주라는 자가 비공일맥의 암상이라고 강호에 까발리는 수밖에.”
“아직 증좌가 없지 않냐? 결국은 그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태연하게 오리발을 내밀어 버리면 방법이 없다.”
“으음.”
하기야 그가 무림맹의 영웅들 앞에서 스스로 지하상계의 거물이라고 밝힐 리 만무했다.
조가대상회 측에서 특별한 증거를 내밀지 않는 이상 취선개를 암상이라고 몰아붙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일단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그것보다 우리 내부의 동태는?”
“이상 없다. 특별히 의심되는 자들도 없고 음어나 표식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한 것이 불안할 정도다.”
비공일맥 같은 엄청난 세력이라면, 그 무한한 수완으로 쉴 새 없이 압박해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조용했다.
“그럴 리가? 하다못해 우리 상단 쪽도 건들지 않았다고?”
오랫동안 중원의 상계를 암중으로 지배해 온 자들이라면 그 수법이야 불 보듯 뻔했다.
조휘는 그들이 조가대상회의 계열사들이 필요로 하는 원재료의 수급을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완성품의 유통을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전혀. 오히려 모든 계열사들이 큰 무리 없이 잘 성장하고 있다. 납품 물량도 우리의 예상대로 점점 늘어나고 있고. 최근에는 보타암의 비구니들까지 왔다 갈 지경이다.”
“남해의 보타암(普陀庵)이? 그 섬의 여승들이 이곳까지 왔다고?”
“그래.”
보타암이 터를 잡고 있는 곳은 무려 남해의 주산열도(舟山列島)다.
그 외딴섬에서 대륙으로 나오는 것은 보통 험한 여정이 아니었다.
“도대체 보타암의 비구니들이 우리 조가대상회의 무슨 물건을?”
“그것이 좀 의외더군. 그녀들이 요구한 것은 강철주괴다.”
“강철주괴?”
“그래. 그것도 아주 대량으로.”
암암리에, 혹은 묵인하에 유통되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제국에서 거래를 금하고 있는 강철주괴를 보타암의 비구니들이?
“장 부장, 아니 장 전무는 어떻게 대응했지?”
“비구니들의 꿍꿍이를 알 수 없어 일단 거절했다는군.”
“휴, 잘했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강철주괴 같은 민감한 품목을 함부로 거래할 수는 없다.
괜히 거래했다가는 관부에 참견의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될 수도 있는 일.
역시 장일룡이다.
원래도 두뇌 회전이 보통내기가 아니었지만 과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가.
“어쨌든 이제 하루가 남은 건가.”
취선개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제 하루.
그 전에라도 마음을 정했으면 하는 것이 조휘의 바람이었지만 애써 닦달하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는 그야말로 인생을 거는 일.
그때 조휘에게로 시비의 공손한 음성이 들려 왔다.
“회장님. 장 전무님의 긴급한 요청이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이길래?”
취선개의 포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휘는 출타를 거둬들였다.
개방도의 눈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개봉에서는 자취를 숨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휘는 조가대상회의 총단에 돌아오고 나서도 굳이 회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장일룡의 성장을 앞당겨 주려면 좀 더 회장 대리를 맡으며 조가대상회의 이런저런 대소사를 겪어 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 자신의 뜻을 장일룡에게도 이미 전했기에, 그가 웬만한 일로는 굳이 긴급히 자신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뭔가 일이 생긴 것 같군. 남궁 형, 가자.”
“알았다.”
그렇게 조휘가 남궁장호와 함께 회장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도 익숙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대장군님 아니십니까?”
“대장군을 뵙습니다!”
조휘가 황급히 다가가 집무실의 상석(上席)에 앉아 있는 장일룡에게 얼굴을 구기며 호된 눈짓으로 비키라는 뜻을 전했다.
천호대장군(天虎大將軍) 육의문(陸儀文).
그는 강서 전체를 통할하는 절대적인 군부의 지존으로, 황상(皇上)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천하의 맹장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조휘가 그런 육의문에게 허리를 숙이다 의아한 마음을 품었다.
그가 육중한 갑주와 장검, 투구까지 그야말로 모든 무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육의문이 예의 부리부리한 호목을 빛내며 조휘를 응시했다.
“오셨는가.”
어딘가 모르게 냉랭한 음성.
뭔가 이상했다.
자신의 뇌물에 그야말로 절여 있는 육의문 대장군은 언제나 호의로 가득한, 자애로운 미소로 자신을 대했거늘.
왠지 불안한 마음에 조휘가 조심스럽게 숙인 허리를 일으켰다.
“기별도 하지 않으시고 어인 일이십니까? 방문의 뜻을 미리 전해 주셨다면 미리 주연(酒筵)을 준비할…….”
“일없네.”
육의문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대로 장일룡이 비켜 준 상석에 앉았다.
쿵!
곧 그가 한 차례 장검을 바닥에 찧더니 강렬한 눈빛으로 조휘를 응시했다.
“좀 전에 저 무식한 덩치가 내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더군. 저자의 뜻이 회장을 대리한다던데 그것이 사실인가?”
조휘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떤 청이 있으신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장일룡과 같은 호탕한 사내가 단칼에 거절할 정도라면 틀림없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늘어놓았을 터.
“조가대상회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곡류(穀類), 마소(馬牛), 견포(絹布), 강철주괴를 포함한 모든 철기(鐵器) 등에 관해 대장군부에게 전매권을 주게.”
“……예?”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지?
하루에도 설화신주를 몇 동이씩 처마신다더니 드디어 술에 절어 미쳐 버린 건가?
아니 ‘모든’ 곡류라니?
흑천련이 차지하고 있던 대곳간을 정비하고 그런 대곳간을 활용하기 위해 조가대상회가 매입한 곡류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장군부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해도, 그런 장군부만으로도 결코 소화할 수 없는 양이었다.
더욱이 모든 마소와 견포?
강철주괴를 포함한 모든 철기?
조가대상회가 보유하고 있는 그 모든 재고의 값을 치른다?
육의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할 금화가 소요될 것이다.
강서장군부가 그런 엄청난 금을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대장군님. 일단 저희가 팔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을 떠나서 그런 엄청난 양의 전매권을 저희에게 제안하신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결정?”
비릿한 조소를 뿜고 있는 육의문.
그의 눈에서 이내 강렬한 안광이 쏟아졌다.
“자네가 강호의 고수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네. 그 경지가 절대경이라던가? 하나 그 경지로 십이만(十二萬) 정병까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조휘의 얼굴이 야차처럼 구겨진다.
“아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낱 상회를 상대하려고 십이만 병력을 동원한다니요?”
이 미친놈이 장군부의 병력까지 들먹이다니? 진짜 제정신인가?
“애초에 자네에게는 결정권이 없네.”
“예?”
순간 육의문이 불같은 노성으로 일갈했다.
“중원의 모든 상단과 상회를 각 성(省)을 맡고 있는 장군부의 예속하에 통할하라는 것이 천자(天子)의 지엄한 황명(皇命)이니라!”
아니 미친!
중원의 모든 상단이 장군부에 예속된다고?
게다가 그게 황명?
자신이 알고 있는 중원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전란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헉 설마?
조휘의 경악한 얼굴이 육의문을 향했다.
“설마……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까?”
어쩐지 육중한 갑주를 걸치고 있더라니!
군인이 평상시에도 무장을 갖추고 있는 경우는 단 하나, 전시(戰時)를 의미한다.
육의문의 진득한 눈빛이 창밖의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초원의 오랑캐들이 난(亂)을 일으켰네.”
“허!”
조휘는 한껏 놀라는 척하면서도 두 눈에 기광을 머금고 있었다.
전쟁(戰爭).
민초들에게는 참으로 불운한 일이겠으나 상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기회의 시대다.
안휘철방에 따로 부서를 두어 남몰래 용린갑을 생산하여 재고로 쌓아 둔 것은 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다.
조휘의 눈이 매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값은 어떻게 치르실 작정입니까?”
그렇게 냉정한 장사치로 돌아온 조휘.
한데, 육의문의 얼굴에는 황당함을 넘어 분노까지 서려 있었다.
“한낱 상인의 재주가 황제께 쓰이는 것은 수대의 영광이거늘, 감히 나라의 난을 기회로 삼아 이문을 챙기려는 것인가!”
“아니 대장군님?”
저 말인즉 ‘우리 장군부 돈 없다.’를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값을 치를 생각조차 없었던 것.
그럼 뭐 강제로 빼앗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럼 그 많은 물건들을 강제로 가져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는 육의문.
“전란이 회복되면 황상께서 그 공을 공의롭게 치하하실 것이네.”
조휘의 얼굴이 점점 야차처럼 구겨졌다.
상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뜬구름 잡는 듯한 약속이다.
‘공의롭게.’, ‘그 공을 치하하실.’ 따위의 문장은 말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그 값을 얼마나 쳐줄 건지, 또 언제 지급할 건지에 대한 그 어떤 확답도 없다.
조휘는 그런 화려한 수사나 현학적인 언변에 결코 휘둘릴 위인이 아니었다.
졸지에 금화 수십만 냥을 뜯길 판국에 더 이상 예의도 나오지 않았다.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그 엄청난 재물들을 꽁으로 먹겠다고? 아니 무슨 나라가 도둑입니까?”
“뭐라?”
조휘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거 대장군님도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만큼 처자셨으면 적당히 의리도 지킬 줄 알아야지 내가 헌상장부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한번 이판사판 해보자는 겁니까 뭡니까?”
마치 그런 조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육의문이 장검을 고쳐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로군.”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대로 집무실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는 육의문.
아니 만상조 어르신의 글씨 하나에 온갖 극찬을 늘어놓으며 제발 한 점만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철혈의 대장군 행세를?
순간 조휘의 얼굴 표정에 엄청난 한기가 몰아쳤다.
‘설마……?’
국가 간의 전쟁마저 조장할 수 있는 존재들.
일개 성(省)의 대장군부 정도는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자들.
그럼 이 모든 것이 바로?
조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와 설마 당신도 비공일맥의 수족이야?”
어느새 새하얀 무혼을 드러낸 조휘의 두 눈이, 대장군 육의문을 찢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과연 암중으로 중원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방식이란 이토록 엄청나단 말인가.
이건 조휘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있는 방식이었다.
원재료의 수급을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유통을 방해하는 따위의 예상은 너무나 순진했던 생각.
설마하니 조가대상회를 강서장군부에 예속시키기 위해 전란을 조장할 줄이야!
조휘로서는 그야말로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비공일맥? 대관절 그게 무엇이냐? 한데 감히 이 육의문의 앞에서 그 잘난 강호인의 무공을 드러내?”
무공에 대한 강호인과 장군부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문제는 무림과 황실이 서로 상대의 무(武)를 가볍고 하찮게 여긴다는 것.
하지만 조휘는 황실 무공에 대한 견문이 황무지에 가까웠다.
-황실의 무공은 철저한 집단성과 실전성에 기반을 두는 무공이다. 일견 변칙적이고 난잡해 보일 것이나 결코 강호의 시선으로 판단하지 말거라.
검신 어른의 진중한 설명에 조휘는 더욱 궁금증이 일어났다.
제국의 천호대장군이라 불리는 자라면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
단기필마로 수천의 병력을 헤집으며 단숨에 적장의 수급을 베는 자라면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닐 터.
순간, 조휘의 검이 가볍게 흔들린다.
조휘의 첫 검초는 일체의 변식도 허초도 없는 정직한 직선 참격.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 가볍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한데 이를 막아 내는 육의문의 대응 방식에 조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츠캉! 콰앙!
보통의 강호인이라면 검으로 막아 내거나 비껴 흘렸을 것이다.
한데 육의문은 등에 메고 있던 육중한 방패를 꺼내 가볍게 막아 냈다.
‘호오?’
와, 방패는 반칙 아닌가?
그러고 보니 왜 강호인들은 방패를 쓰지 않는 거지?
중원의 검종들은 대부분 한손 검을 구사한다.
다른 한 손으로 방패를 활용한다면 실전성이 더욱 배가될 것이 분명할 터.
곧이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그대로 조휘를 향해 몸을 구르는 육의문!
까아아앙-!
그의 장검을 막아 내며 한 걸음 물러난 조휘의 얼굴에는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강호 문파들의 초식에는 바닥에 몸을 구르며 기습적으로 검초를 구사하는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닥을 구르는 움직임은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 하여 치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지 않고서야 결코 할 수 없는 행동.
한데 이어진 육의문의 움직임은 조휘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꽈득-!
검초를 비껴 내던 조휘의 철검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으로 물어 버린 육의문!
당황한 것도 있었지만 조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검을 놓칠 뻔했다.
아니 전투 중에 상대의 검을 깨물어?
자칫 목이 꿰뚫릴 수도 있는 상황!
진짜 미친놈인가?
조휘가 그렇게 황당해하고 있을 때 육중한 강철 방패가 그대로 조휘의 안면으로 쏘아졌다.
콰아앙!
하지만 소리만 무식하게 울려 퍼질 뿐,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막힌 듯 방패는 조휘의 얼굴을 한 치도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이게 그 강호인들의 호신강기(護身罡氣)라는 건가?”
조휘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에 또다시 육의문의 기습적인 살초가 펼쳐졌다.
쐐애애애액!
그의 장검이 맹렬히 쏘아져 조휘의 목을 노렸다.
조휘가 가볍게 물러나며 철검으로 막아서려는 그때.
갑자기 육의문의 육중한 몸집이 버들가지처럼 흔들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장검을 던져 버리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비수로 조휘의 심장을 찔러 갔다.
까아앙!
또 호신강기의 벽에 부딪혀 공격이 무위에 그치자 육의문이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도대체 그놈의 호신강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군. 내가 이래서 무림의 무공이 싫어.”
육의문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조휘가 본인의 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음을.
백전노장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가만히 서서 호신강기로만 막아 내는 괴물이다.
그런 놈이 진정한 살초를 꺼내기 시작한다면?
허나 육의문의 강렬한 눈빛은 결코 기죽은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장담하지.”
조휘가 되물었다.
“장담?”
“장수(將帥)의 진가는 통솔력을 발휘할 때다. 지금 이 자리에 일천의 천호군(天虎軍)만 있었어도 그대를 가볍게 참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장일룡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대장군, 일천이 아니라 일만의 병력으로도 그건 무리우.”
“일만(一萬)?”
일만이라는 숫자는 결코 가벼운 숫자가 아니었다.
일만의 정병을 유지하고 훈련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천(千)대의 병력은 지방 군벌로도 꾸리는 것이 가능한 규모였지만, 만(萬)이라는 수는 국가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코 동원할 수 없는 것이다.
한데 그런 엄청난 병력으로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한다?
육의문의 입장에서는 가히 미친 소리였다.
“만인지적(萬人之敵) 만부부당(萬夫不當)은 모두 상상과 허구가 만들어 낸 산물! 피륙을 지닌 인간인 이상 단기로는 결코 만 명의 용력을 당해 낼 수는 없다! 이 천호대장군이라 불리는 나조차도 백 명의 장정을 막아 내는 것은 천운이 닿아야 가능한 일!”
그때 남궁장호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부가 무림강호의 일을 어찌하여 함부로 참견하지 않는지 대장군께서는 아직 그 이유를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흥! 제아무리 강호인 행세를 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녀 봤자 모두가 천자의 신하요 제국의 신민인 것을!”
금세 장일룡이 으르렁거렸다.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상호 간의 불가침(不可侵)을 깬다면 장군께서는 꽤나 골치 아파지실 것이우!”
“이 우매한 놈들이! 감히 이 천호대장군을 겁박하려는 것이냐!”
그런 육의문의 반응에 남궁장호는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장군께서는 절대경, 아니 화경의 경지라도 목도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강호인들조차도 화경의 경지부터는 인외지경(人外之境)이라 부르며 경외한다.
이 무식한 천호대장군은 강호의 절대고수를 만난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음이 분명했다.
하기야 칠무좌급의 고수를 한 번 만나는 것은 강호를 제집 삼아 풍진노숙하는 자들에게도 하늘의 기연이라 할 수 있는 터.
그때.
육의문의 시야에 한 줄기 청량한 푸른 섬광이 잠깐 아른거리다 사라진다.
츠캉!
쿵!
육의문이 왼손에 들고 있던 육중한 강철 방패가 정확히 세로로 갈라져 두 동강이 나 버린 것이다.
“뭐, 뭐냐!”
지극히 당황해하고 있는 육의문.
웬만한 병기의 예기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 강철의 호병순(護兵盾)이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공격 궤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조용히 창천검을 다시 허리에 갈무리하던 남궁장호가 예의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로소 화경에 이른 검수만이 다룰 수 있는 검기성강(劒氣成罡)라고 합니다. 이제 막 화경에 이른 저조차도 대장군을 단 일 합(一合)에 제압하는 것이 가능하지요.”
“…….”
황망하게 굳어 있는 육의문에게로 다시 남궁장호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이런 제가 다섯…… 아니 오십이 있더라도 저 소검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겁니다.”
“오, 오십?”
“그렇습니다. 제국의 그 비밀스런 동창 전체가 동원된다고 해도 절대경의 무인을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칠무좌…… 아니 팔무좌(八武座)를 절대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동창(東廠)은 강호의 무공을 익힌 비밀 무인 집단으로 오직 황명만을 따르는 황제 직속의 정보기관이었다.
그런 동창의 무시무시한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육의문은 내심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조휘가 씨익 웃었다.
“장군부에 드나드는 강호인들이 죄다 굽실굽실하기만 하니 그들의 진면목을 알 턱이 없지.”
그렇게 조휘가 비아냥거리고 있었지만 육의문은 애써 결연한 얼굴을 했다.
“흥! 네놈이 비록 만부부당의 일대종사라 해도 이 천호대장군이 지엄 지존한 황명을 받든 이상 이곳은 이제 주춧돌 하나 남지 못할 것이다!”
조휘의 얼굴이 야차처럼 살벌하게 구겨진다.
“조가대상회의 멸문을 운운해 놓고 제 발로 몸성히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육의문이 홱 하니 돌아봤다.
“황실의 대장군을 구금해 보시겠다? 네놈은 감히 천자(天子)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순간 조휘의 두 눈이 눈부신 백안으로 화하더니 곧 그가 말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육의문이 그의 검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본다.
저 멀리 보이는 대전각(大殿閣)의 용마루 상공에 떠오른 칙칙한 검은 빛의 점(點).
츠츠츠츠츠츠-
괴기스런 소음을 내며 허공을 부유하던 점이 그대로 대전각의 중심을 향한다.
꽈직! 꽈직!
우르르르릉!
그 불길한 점(點)은 금방 대전각의 기둥과 서까래를 집어삼키더니 이내 흙먼지를 후드득 쏟아 냈다.
“저, 저럴 수가!”
저 육중한 대전각 전체가 작은 점 하나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차라리 기괴할 지경이었다.
저런 게 한낱 검(劒)으로 부린 조화라고?
그런 무한한 의념의 세계, 그 일면을 맛본 육의문은 무인의 정체성마저 무너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끝이겠는가.
어느새 검을 타고 총단의 상공에 날아오른 조휘가 오연한 얼굴로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츠츠츠츠츠-
츠츠츠츠츠츠-
그의 반경 백 장 주위로 의념의 포말들이 어리기 시작한다.
까마득한 상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무수히 많은 점들.
대낮의 밝은 태양빛이 일순 어두워질 정도로 그 수는 족히 수백이 넘어 보였다.
육의문은 그야말로 선 채로 오줌을 쌀 것만 같았다.
인간이 검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만으로도 기절초풍할 판국인데 저 무수한 점(點)들은 도대체?
방금 전에 그런 점의 위력을 혹독히 경험했기에 육의문은 가히 정신이 붕괴될 정도의 충격으로 인해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허어……! 이, 이 무슨……!”
그때 조휘의 무심하고도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소검신(小劒神)이 고작 만 명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고?
순간 육의문은 머릿속에 하나의 상상을 떠올렸다.
오행합수진(五行合守陣), 대돌격진(大突擊陣) 등 수십 가지의 진용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그 어떤 진용도 무용지물이었다.
대관절 천공을 날아다니며 저런 기괴한 점들을 뿌리고 다니는데 무슨 진용인들 소용이 있겠는가?
저런 엄청난 존재가 적진에 있다면 모든 전략과 전술이 무의미하다.
제갈세가가 괜히 절대경을 경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당신이 그 말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난 지금 그대로 강서장군부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당신의 십이만 병력?
육의문이 절망으로 굳어진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신위 앞에 병력의 수(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황명? 응 안 믿어. 지랄하지 마. 강서장군부가 초토화되는 꼴을 보기 싫다면 그런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내린 윗선을 불어. 그것을 실토하는 것만이 당신이 살길이다.
조휘가 무려 제국의 천호대장군을 겁박하고 있었지만 남궁장호와 장일룡은 걱정은커녕 오히려 속이 다 시원했다.
황명을 명분으로 조가대상회의 멸문을 운운한 마당에 계속 체면을 차린다?
그것은 강호의 세력임을 천명한 조가대상회를 무시하는 처사다.
장일룡이 육의문을 향해 이죽거렸다.
“대장군. 거 판단 잘하셔야 될 것 같수. 우리 형님께서는 한다면 정말로 하는 사람이우.”
육의문은 오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날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해야만 했다.
강호의 전설적인 고수들이 산을 가르고 물 위를 걷는다는 등의 휘황한 풍문을 육의문 역시 들어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풍문은 도인들이 열심히 도를 닦으면 신의 반열에 올라 마침내 신선이 된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풍문이라 여겼다.
‘절대경’이라는 강호인들의 경지 역시 말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과장된 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본디 민초들의 풍문이라는 것은 왕왕 와전되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설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것도, 다 그런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려는 민초들의 속성 때문이 아니던가?
한데, 그런 육의문의 지극히 타당한 상식이 지금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허어……!’
피륙을 지닌 사람의 몸으로 검을 타고 하늘을 노니는 존재.
더욱이 거대한 전각 하나를 송두리째 흡수하며 파괴해 버리던 엄청난 위력의 점(點)들이, 그의 주위로 새까맣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틀림없는 신(神).
육의문의 눈에 비친 조휘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때.
육의문을 수행하던 장수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와 물끄러미 창공의 조휘를 올려다본다.
그는 접객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육의문의 부장(副將) 단리웅(段理雄)이라는 자.
“대장군. 피하라.”
장일룡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대장군을 호위하며 수행하는 부장의 말투가 하대(下待)라니?
분명 상식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육의문의 성정으로는 불같이 화를 내거나 당장이라도 칼을 빼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그는 두려움에 찌든 눈치였다.
“괘, 괜찮겠소?”
“돌아가 명을 대기하라.”
“아, 알겠소.”
그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조휘가 천하공공도(天下空空道)의 검세를 거둬들이며 지상으로 착지했다.
조휘가 의혹의 눈초리로 그런 부장을 살폈다.
그는 어느새 총단의 정문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는 육의문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장군부의 장수는 아닌 것 같네. 당신은 누구지?”
단리웅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변수에 대비된 자.”
“변수……?”
“아무리 간담이 대단한 자라 하나 설마하니 천자의 황명(皇命)을 거절할 줄이야. 역시 중원인이 아니란 건가.”
중원에 속한 자라면 적어도 천자를 경원하는 마음은 있을 터.
하지만 지엄한 황명을 저리도 쉬이 여기는 자라면 천자(天子)를 향한 존경이 눈곱만큼도 없는 자라 봐도 무방한 것이다.
조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며 상대의 기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음…….’
상대는 단출한 흑의 무복 하나만을 걸친 채 아무런 무기도 없이 무덤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의념의 기운은커녕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모르는 자 같았다.
사람에게 어떤 기세(氣勢)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극렬한 기세를 뿜어내는 것보다 훨씬 기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조휘는 그렇게 그를 관찰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움에 빠져들었다.
상대의 기세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리라.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특유의 기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평생토록 창칼을 휘두르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어 온 장수에게는 엄정한 기개(氣槪)가.
이문을 좇아 중원 전역을 누벼 온 장사치에게는 그 나름의 처세(處世)가.
한 자루의 검을 등에 이고 강호를 가로지르는 협객에게는 비정한 우수(憂愁)가.
장수들을 호령하며 중원을 평정한 군주에게는 올곧은 정의(正意)가 존재하는 법.
허나 상대는 왕후장상처럼 고고해 보이기도 상인처럼 얄팍해 보이기도 했다.
또 산전수전을 겪어 온 강호인처럼 노련해 보이면서 동시에 전장을 누벼 온 장수처럼 비장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중원이라는 세상에 떨어진 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런 조휘로서도 이와 같이 복잡한 분위기를 지닌 인간을 만난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아니, 저런 걸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단리웅이 조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가대상회의 흔적, 아니 너의 흔적을 이 중원에서 모두 지워라. 그렇지 않으면 칠천이백육십육 명의 목숨을 이 세계에서 도려낼 것이다.”
칠천이백육십육 명?
순간 조휘는 머릿속에 불똥이 튀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조가대상회의 직원들과 남궁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조휘의 동료들, 거기에 자신의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완벽히 일치하는 숫자다.
상대의 의중이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죽여 없앤다는 뜻.
무엇보다 소름이 돋는 것은, 외부인인 그가 어찌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의 수를 한 명의 오차도 없이 알고 있느냐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비공일맥의 수뇌?”
허나 그런 자신의 질문에 상대는 답을 하지 않았다.
“석 달의 시간을 주지. 그 후에도 이 총단에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진다면 내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단리웅이 저벅저벅 걸어가 총단의 철문 밖으로 나가는 데도 조휘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자 남궁장호가 의문을 드러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것이냐? 저자 역시 감히 조가대상회의 멸문을 운운한 자가 아니냐?”
조휘가 불길한, 어쩌면 공포가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살의를 드러냈다면 이곳에 지옥이 펼쳐졌을 거야.”
“뭐라고?”
“그, 그게 무슨 말이우 형님?”
멀어져 가는 단리웅의 뒷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조휘의 시선은 그에게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읽히지 않아.”
조휘의 진중한 대답에 남궁장호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최 그게 무슨 소리냐? 보다시피 그냥 평범한 장정이다. 그가 장수라는 것도 믿기 힘들 지경이야.”
“잠깐! 잠깐만!”
조휘의 얼굴이 온갖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남궁 형! 도대체 저게 뭐지? 저럴 수가 있나?”
남궁장호가 조휘의 시선을 좇아 단리웅을 응시한다.
일정한 보폭으로 차분히 걸어가고 있는 단리웅.
그런 단순하고 간결한 움직임이, 사람의 보폭치고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특별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걸음걸이가 묘하군. 그런데 왜?”
“보폭 말고 그림자!”
“그림자?”
다시 모두의 고개가 단리웅 쪽으로 돌아갔다.
“음?”
남궁장호가 묘한 얼굴로 굳어 있을 때, 장일룡이 자신의 발밑과 단리웅을 번갈아 쳐다보다 경악의 얼굴을 했다.
“헉?”
그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지금은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정오(正午)도 아니었다.
분명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해.
틀림없이 자신들에게는 동편 사선에 각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궁장호의 표정도 점점 경악으로 얼룩졌다.
“그, 그림자가!”
사람이라면, 아니 물체라면 당연히 빛을 가리게 되니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다.
허면 자연계의 빛이 그대로 저자의 몸을 투과한다는 의미?
-영체(靈體)다.
그것은, 살아생전 반신(半神)의 경지에 이르렀던 천우자의 확언이었다.
‘예? 영체라니요?’
대답은 검신 어른이 해 주었다.
-영체의 몸으로 혼세일계(混世日界: 인간계를 높여 부르는 말)에 현신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단 하나만을 의미하지.
‘……무슨?’
-신좌(神座)의 오롯한 힘을 나눠 받은 여섯 존재, 추종자들은 그들을 육존신이라 불렀다.
‘육존신(六尊神)이요?’
-그렇다. 그들이 바로 인간의 문명(文明)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존재들. 육존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실제로 보는 것은 나로서도 처음이구나.
그렇다면 방금 그자가 그 무서운 신좌의 적전제자급 인물이란 말인가?
조휘가 여전히 소름이 돋은 얼굴로 검신에게 다시 물었다.
‘육존신의 무위는요? 어느 정도나 됩니까?’
-글쎄. 아무도 모르지. 그들이 혼세일계에 힘을 발휘한 적이 없으니까. 이 내가 상대했던 것도 신좌의 추종자들 중에서도 소동(小童)들뿐이었다.
과거 금천종과 소동들을 만났을 때는 마치 어떤 위대한 의지에 의해 가공된 듯한, 그런 인위적인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한데 저자는 오롯하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고귀한 느낌이 들 정도.
검총의 수련 이후, 좀처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산 조휘로서도 목구멍까지 치미는 공포를 겨우 삼킬 수밖에 없었던 자다.
절대경?
자연경?
그것은 사람의 경지다.
진실로 신적인 존재에게 그런 경지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조휘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우울해졌다.
강호의 전설적인 무공의 신, 삼신의 신(神)이라면 차라리 현실적이다.
발버둥을 치면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존재하니까.
조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진짜 신(神)이다.
자신과 같은 경지의 절대경이 백 명이 있다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이건 좀 반칙 같은 상황이 아닌가?
“미치겠네…….”
석 달 내에 조가대상회의 모든 흔적을 지우라니?
그렇지 않으면 육존신(尊神)이라 불리는 자가 손수 칠천여 명의 생명을 모두 취해 가겠다고 한다.
이래선 비공일맥이고 장군부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deus ex machina!
빌어먹을 신적인 의지의 개입이 자신의 모든 몸부림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허허, 우습구나.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검신에게로 조휘가 한껏 의문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오십니까?’
-다른 이면 몰라도 네 녀석이 신력(神力)의 개입을 원망하다니 당연히 우스울 수밖에.
마신이 함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아. 너는 여기에 모인 무수한 존자(尊者)들을 감히 무시하는 것이냐?
조맹덕도 기분이 상한 듯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 영계에 있는 어떤 이가 세상에 나가더라도 천하가 뒤집어질 일. 일세를 풍미한 자들의 온갖 지혜와 가공할 경험을 네놈은 감히 하찮게 여기는 것이냐?
천우자도 비아냥거렸다.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저놈의 신세 한탄이오. 신적인 존재의 의지를 온몸에 덕지덕지 처바르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제 놈이지 않소? 그 대단한 금천종과 소동을 눈빛만으로 쫓아낸 녀석이 허허!
만상조와 조강도 번갈아 짜증 어린 투로 말했다.
-여기 모인 존자들의 경험이란 그야말로 중원 문명의 총아(寵兒)라 할 수 있는 터. 이 모든 것의 공동전인이라 할 수 있는 네놈에게 우리가 거는 희망이란 지대하고 지대하다. 너는 반드시 이점을 대오각성(大悟覺醒)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비공일맥이 신좌의 곁다리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비록 곁다리에 불과하다 하나 이왕 시작한 이상 침투하는 것을 멈추지 말거라!
검신이 어느새 존자들을 중재하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천세. 그대가 나설 차례다.
조휘가 의혹의 얼굴을 하다 표정이 밝아졌다.
‘설마……!’
지금까지 그의 자존감을 생각해 억지로 요구하지 않았지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사마천세가 말했다.
-본 좌의 무공을 전할 것이니라. 허나 네 궁극의 목표는 삼신(三神)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마천세가 무신(武神)의 무공을 언급하자 조휘의 가슴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림의 전설인 삼신(三神) 중에서도 무신(武神)의 위치는 각별했다.
사마세가라는 무신의 후예들이 지금도 엄연히 천하제일가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에, 검신이나 마신에 비해서 강호인들에게 좀 더 피부로 와닿는 신(神)이었던 것.
또한 새외대전이 할퀴고 간 전란의 기억이 아직도 강호인들의 뇌리 속에 선연했기에, 새외대전을 종식시킨 무신의 위치는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무신의 무공은 다른 삼신과 마찬가지로 그 무(武)의 연원을 추측하기 힘들었다.
삼신의 무공은 하나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을 강호인들에게 심어 주었다.
무림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형태의 무공.
그런 무신의 무공은, 산중의 한 노인이 한 묶음의 양피지(羊皮紙)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양피지요?’
-그렇다. 난 그 양피지를 천무도해록(天武圖解錄)이라 이름 붙였지.
하늘에 이를 무예라.
과연 하늘에 이른 검이라는 천검류만큼이나 오만한 무공명이다.
‘어디에 있습니까?’
무신이 지금까지 자신의 무공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본 세가의 비처에 있다.
삽시간에 구겨진 조휘의 얼굴.
사마세가의 비처에 있다고?
개파대전 당시 사마강(司馬强)과의 껄끄러웠던 첫 대면을 생각하니 조휘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아니 그자가 그 귀한 걸 제게 보여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아니 이 어르신이 그건 그렇지라니?
그럼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마세가라는 그 뜨거운 용담호혈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겠단 소린가?
천하제일가라는 사마라면 필시 원로원에 엄청난 괴물들로 득실득실할 것이다.
더욱이 그 사마강만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절대경의 초극고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조휘가 미간을 구기며 천우자를 불렀다.
‘그냥 제가 직접 무신 어르신께 사사(師事)하겠습니다. 천우자 어른. 법술로 저를 영계로 소환해 주십시오.’
하지만 무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될 소리. 생령(生靈)의 몸으로 영력을 자주 소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진즉에 널 불렀을 터. 게다가 너는 신좌의 유물을 반드시 직접 보고 경험해야 할 이유가 있지 않느냐?
‘음…….’
하기야 검신의 검총과 마신의 석판처럼 천무도해록 역시 고대의 현대인, 즉 신좌가 남긴 유물이라면 반드시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한글과 영어, 수학적인 낙서로 가득할 것이 분명하니 무신이 보지 못한 것을 자신이 올곧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조휘가 의문을 품었다.
‘그 양피지 속에도 기원을 알 수 없는 문자와 도식들로 가득했습니까?’
-그렇다. 본 좌 역시 네 기억을 살펴보았느니. 그것은 네 세계의 문자 체계가 확실하다.
‘호오……!’
그럼 말이 달라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무도해록을 직접 봐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혹, 제가 사마세가에 잠입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본 좌는 기백 년 동안 세가에 기별도 없었느니라.
아득한 심정에 금세 침울한 표정이 되고 마는 조휘.
이미 한 번 사마강을 겪어 본 조휘로서는 그와 실랑이를 벌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아집으로 꽉 막힌 인간은 벽(壁)에 다름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천무도해록만 몰래 취하고 나오고 싶은 것이 조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때 검신 어른의 잔잔한 음성이 조휘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자타공인 네 녀석의 요설(妖舌)은 이미 자연경에 이르지 않았느냐? 세 치 혀로 흑천련의 간부들과 무림맹의 명숙들을 그리도 쉽게 농락한 녀석이 무어가 걱정이란 말이냐? 사마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니 부딪쳐 보거라!
묘하다.
분명 칭찬은 칭찬인데 왠지 기분이 상한다.
사부님, 사부님께만큼은 검(劒)으로 칭찬을 받고 싶다고요.
자연경에 이른 요설이라니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시끄럽다.
가늘게 한숨을 내쉬던 조휘가 장일룡과 남궁장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갈 데가 생겼어. 그동안 개방의 거지들을 잘 구슬려 줘.”
이윽고 조휘가 검에 올라타며 자세를 잡자 장일룡이 다급하게 외쳤다.
“또 어디를 간단 말이우 형님!”
조휘가 어검비행의 공부를 일으키며 북편의 하늘을 향해 멀어져 갔다.
장일룡의 귓가로 날아든, 한 줄기 전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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