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56
55 章>
산동성(山東省) 무성현(武城縣).
현 내의 곳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 특별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열기 어린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가슴속을 자부심으로 가득 메워 주는 것은, 이곳이 무(武)의 성(城)이라 불리는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천하제일가.
이곳이 그 유명한 사마의 땅.
무신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성스러운 무가(武家)의 터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런 천하제일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사마세가의 전경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규모가 큰 장원이라고 해도 고개가 끄떡여질 정도.
그도 그럴 것이 기백 년 동안의 봉문으로 인해 세상과의 교류가 단절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명성을 떨친다고 해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 이상 세상에서 도태되는 것은 불변하는 진리.
하지만 그렇게 세력이 쪼그라들었다고는 하나 그 누구도 사마의 천하제일(天下第一)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그들이 세상에 남긴 발자취는 너무도 강렬했던 것이다.
‘제길.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거지?’
사마세가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는 조휘의 얼굴에는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
일반적인 세가라면 당연히 상단의 물자들이 드나들 텐데, 사흘 동안 관찰한 결과 사마세가에 드나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대외 활동도 일절 없었다.
조가대상회의 개파대전을 참가한 것 외에는, 사실상 계속 봉문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
조화면천변을 활용하고 싶어도 그럴 여지가 없는 것이다.
수소문을 해 본 결과, 그들은 석 달에 한 번 정도씩 긴 수레의 행렬을 이끌고 근처의 상단에 방문하여 모든 생필품을 일괄적으로 구매한다고 들었다.
그 말인즉 조화면천변을 활용하려면 최대 석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데, 자신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방문하여 천무도해록을 보고 싶다고 요구한다면?
필시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그들에게 쫓겨날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조휘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저 멀리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맹기(盟旗)다!”
“무림맹의 고수들이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길을 비키면서도, 맹의 기다란 행렬을 경외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백성들에게 맹(盟)의 행렬이란, 단지 엎드려야 하느냐 엎드리지 않아도 되느냐 그 차이일 뿐, 그들의 피부에 닿는 위력은 천자(天子)의 행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휘의 두 눈이 반짝인 것도 그때였다.
스스스스스-
신기(神技)에 이른 신법을 일으켜 신속히 무림맹의 행렬 속으로 파고드는 조휘.
이윽고 그는 행렬의 한 짐마차에 은밀히 몸을 숨겼다.
맹이 무성(武城)을 방문했다?
사마세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달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조휘의 예상대로, 굳게 닫혀 있던 사마세가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가솔들이 나와 맹의 행렬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순간, 조휘의 감각권 내에 익숙한 내력(內力)의 파장이 감지되었다.
‘어? 이자는?’
이 특이한 내력의 파장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행렬의 맨 선두 마차에서 느껴지는 내력의 파장!
분명 틀림없는 감찰교위 단백우의 그것이었다.
순간, 볏짐 속에서 조휘의 안광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
단백우 감찰교위라면 이미 자신이 신물이 나도록 겪어 본 인사가 아닌가!
스스스스스스-
극한의 의념을 일으켜 구동한 조휘의 신법은 그야말로 유령(幽靈)!
그렇게 조휘가 유령과 같은 몸놀림으로 창살을 베고 마차로 침투했지만 주변의 그 어떤 무인도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세가의 원로들을 상대하기 위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단백우가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다.
“허억!”
조휘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이 단백우에게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감찰교위님. 이렇게 또 뵙는군요.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 모양입니다.”
싱긋-
아, 대관절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저 쳐 죽일 면상을 또다시 바라보고 있자니, 단백우는 하늘을 원망할 지경이었다.
지난번 조휘와의 협상을 통해 맹에 큰 손해를 입힌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는 자다가 악몽을 꿀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맹주님의 잔소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거늘!
“내, 내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엄연히 소검신(小劒神)은 정파에 속한 자다.
한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맹의 간부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그렇게 단백우는 분노하면서도 두려움에 찌든 눈을 하고 있었다.
조휘가 태연자약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 행렬에 관련된 명령서, 맹령 그런 거 다 제게 내놓습니다.”
“대,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요!”
“맹이 무슨 일로 사마세가에 온 건지 저도 알아야 되잖아요?”
“아니, 그걸 조가대상회가 왜?”
지금 감히 조가대상회가 맹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뜻인가?
조휘가 더욱 얄밉게 웃고 있었다.
“아아, 우린 동맹이잖습니까? 동맹 좋은 게 뭡니까?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죠.”
사마세가의 가솔들이 행렬의 선두에 거의 다 도착해 간다.
조휘는 마음이 조급해져 더욱 단백우를 다그쳤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빨리 내놔!”
단백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자는 도대체 맹령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세력의 종주라는 자가 이 무슨 패악질이란 말이오! 허튼소리 그만하고 당장 이 마차에서 나가시오!”
“패악질은 시작도 안 했는데.”
순간 조휘의 두 눈에서 눈부신 백화(白火)가 피어올랐다.
이어 현신한 절대의 검령.
순식간에 축 늘어져 바닥에 널브러진 단백우가 당혹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이, 이게 무슨!”
“응, 독입니다. 하독(下毒).”
“헉!”
조휘가 무심한 얼굴로 그런 단백우의 의복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크윽! 이게 무슨 짓이오! 윽 거긴! 크힉!”
이 인간은 이 와중에도 간지러움을 못 참네.
이윽고 맹령이 담긴 명령서와 한 통의 서찰을 발견한 조휘가 환하게 웃었다.
“오호. 여깄구만. 참 깊숙이도 숨겨 놨네요.”
“도, 독이라니! 도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오!”
“원한은 없고요.”
음흉한 얼굴로 명령서와 서찰을 품에 갈무리한 조휘가 싱긋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단백우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뚫어져라 응시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요!”
“와 더러워.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입맞춤이라도 할까 봐?”
그 순간.
꿈틀꿈틀.
조휘의 얼굴이 파도치며 변화해 간다.
그렇게 눈앞에서 자신으로 변해 가는 조휘를 바라보며 단백우는 기절초풍할 것만 같은 충격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느덧 완벽히 단백우가 된 조휘.
조휘가 묵묵히 단백우의 옷을 홀딱 벗기다가 예의 화사한 미소를 그 얼굴에 만발했다.
“푹 자고 깨시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아, 아니 이보시오!”
그가 수혈을 짚자 견딜 수 없는 수마(睡魔)가 단백우를 덮쳐 갔다.
-감찰교위님? 사마세가 측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차의 바깥에서 무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휘가 황급히 단백우를 구석에 숨기고는 이불로 그를 덮은 후 태연하게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왔다.
단백우는 겉으로야 담백해 보였지만 감찰원의 권위가 온몸에 배어 있는 자.
조휘가 엄정한 표정으로 사마세가 측을 향해 포권했다.
“감찰교위 단백우입니다.”
걸걸하고 탁하기 짝이 없는 단백우의 음성은 흉내가 매우 까다로웠다.
물론 풍진강호를 살아가는 무인이라면 용구(龍口)라는 기본적인 변성 수법을 익히고 있을 것이나 이는 조악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조휘는, 영계 속 사마세가의 존자들 중 과거 황궁 최고의 예인, 당시의 황제로부터 예성(藝聖)이라는 찬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던 사마종악이라는 자의 변성술(變聲術)을 전수받았던 것.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대단한 사파의 재녀 천변혈후보다도 조휘의 역용술의 경지가 더욱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반갑네. 사마가의 유기(柳記)라 하네.”
사마유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
조휘가 그 머릿속에 강호풍운록을 떠올리다 금방 기함했다.
‘와, 설마 백 년 전에 무당과 함께 화산의 자하신공을 검증했던 그 사마세가의 가주란 말인가?’
그는 무당과 함께 화산의 자하신공을 함께 검증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과거 무당의 일양진자는 자신의 논조에 더욱 권위를 보태기 위해, 정파의 최고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사마세가에게 자하신공의 공동 검증을 의뢰했다.
물론 봉문 중인 사마세가는 이를 한사코 거부했었다.
허나 구파일방의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화산의 신공(神功)이 마공(魔功)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상황.
지고한 구파의 명성이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마세가도 검증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에서만 보던 과거의 인물이 갑자기 현실에 툭 하고 튀어나왔으니 조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마세가의 인간들에게 백 년 장수는 일도 아닌 것인가?
하기야 이백 년 전의 인물인 무신 사마천세도 당대까지 수명을 이어 온 마당이다.
그런 신(神)의 무공을 사사한 가솔들도 비록 무신에 비할 수는 없겠으나 천고의 경지에 이르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조휘가 감히 경시 여기지 못하고 무림의 대원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림말학 단 모가 무존을 뵙습니다.”
무존(武尊) 사마유기는 무신 다음가는 명성을 지닌 사마세가의 무인.
강호에 끼치는 영향력만 따진다면 오히려 무림맹주 무황보다도 더한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제야 사마유기가 흡족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네와 같은 훌륭한 젊은이들이 맹에서 힘을 써 주니 이처럼 강호가 평안한 게지. 다들 먼 길 고된 여독에 일신이 힘겨울 터. 안으로 드시게나.”
“감사합니다.”
사마세가의 장원 내부는 조휘의 예상대로 허름했다.
전각의 구석구석 손봐야 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이다.
그 정도만 살펴봐도 사마세가의 악화된 재정 상태를 조휘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조휘는 사마유기의 안내를 받으며 접객당으로 향하면서도 내심 생각에 골몰했다.
도대체 맹과 사마세가 간에 나눈 사안이 얼마나 엄중하기에 전설적인 무존이 손수 마중을 나올 정도란 말인가?
아직 서찰과 명령서를 확인하지 못한 조휘로서는 그런 의문이 치밀 수밖에 없는 노릇.
접객당에 도착한 사마유기가 조휘를 향해 자리를 권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일단 이번에도 맹의 물자들을 고맙게 받겠네. 매번 미안하구먼.”
조휘가 단백우의 마차를 뒤따르던 긴 수레의 행렬을 떠올리다 푸근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사마(司馬)가 강호에 세운 공덕에 비하면 이 정도야 조족지혈이지요. 오히려 보탬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맹이 매번 방문할 때마다 사마세가의 봉문을 지원하기 위해 물자들을 가져오는 것이 관례였던 모양.
“허허, 그렇게 본 가의 체면을 세워 주니 더욱 고맙구먼.”
얼굴에 한껏 흡족한 빛을 띠며 수염을 쓰다듬던 사마유기가 곧 엄중히 표정을 굳혔다.
“그래, 전서구를 통해 미리 맹의 뜻을 전달받긴 했다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본 사마세가의 터를 맹성(盟城) 주변으로 옮기라니?”
조휘가 이때다 싶어 맹령이 적힌 서찰과 명령서를 품에서 꺼냈다.
“맹주님의 뜻입니다. 읽어 보십시오.”
조휘는 맹주의 서찰을 사마유기에게 건네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명령서를 펼쳐 눈에 담았다.
‘음?’
뜻밖에도 명령서에는 ‘조가대상회’와 ‘소검신’이 수도 없이 언급되고 있었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언급이라는 것.
거칠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조휘가 금세 기분 나쁜 기색을 지워 내며 다시 사마유기를 응시했다.
그 역시 심각한 얼굴로 서찰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강호에 세력을 천명한 조가대상회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는 그 영역을 맹의 권역인 강북(江北)으로 뻗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검신(劒神)의 적전제자인 소검신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맹 내 검수들의 동요도 심각한 상황이며, 이러다 정파세력이 두 개로 갈라지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단백우를 연기하고 있었기에 스스로 조가대상회와 자신을 까야만 하는 상황.
어처구니가 없게도 명령서에는 자신의 조가대상회를 견제하는 방안이 빼곡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하기야 최근 강북 지방의 검수들이 대거 조가대상회에 찾아와 입회를 요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들 대부분이 검신의 전설을 동경하는 이들.
하지만 그런 강북의 검수들을 대거 영입한다면 곧바로 맹의 동요가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고 아쉽지만 조가대상회로서는 애써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강북의 검수들을 취한다는 것은 맹의 영향력을 빼앗는 일이며 이는 동맹으로서는 선을 넘는 행동.
“흐음. 무황의 뜻은 잘 알겠네.”
검신(劒神)의 위세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무신(武神)밖에 없었다.
무신의 가문인 사마세가를 무림맹의 맹성 내부로 편입하고, 이를 통해 맹원들의 동요를 다잡아 보겠다는 것이 무황의 뜻.
강북 검수들의 동요를, 그만큼 무림맹은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득권이란 것이 원래 지켜야 하는 것이며, 지킨다는 것은 오히려 빼앗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법.
“비록 본가의 봉문이 무색해졌다 하나 오랜 역사를 지닌 세가의 터를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 아쉽지만 이런 본 가의 어려운 사정을 무황께 잘 전달해 주시게.”
완곡하지만 완강한 거부의 뜻.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맹의 감찰교위가 만류나 설득 한 번 해 보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뜻을 무황에게 전하겠다고 나서니 오히려 당황해하는 것은 사마유기 쪽이었다.
이 먼 길을 와서 선물을 저만큼이나 바치고도 아무런 수확도 없이 되돌아간다?
맹이 아무리 정도세력의 협의를 자처하는 세력이기는 하나, 그런 맹의 행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슨 다른 속뜻이 있는 건가? 아니면 본 가를 시험하겠다는 것인가?”
잔뜩 경계하는 빛으로 물든 사마유기의 얼굴을 향해 단백우(?)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아무리 맹의 권위가 대단하다지만 천하제일가의 터를 옮기는 일에 어찌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존의 판단이 그러하시다면 당연히 맹도 수긍할 수밖에 없겠지요.”
사마세가가 맹성에 편입되는 것은 조가대상회로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조휘는 무림맹에 득이 되는 일을 손수 도울 위인이 아니었다.
“내가 맹의 인사들을 수도 없이 겪어 봤지만 자네는 그중에서도 가히 군계일학일세. 허허!”
사마유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자신에게 호감을 드러내자 조휘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사마유기가 눈을 빛냈다.
“이 내가 그동안 살아오며 쟁쟁한 협상가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 봤을 거라 생각하는가?”
“네?”
“모름지기 먼저 제안한 쪽이 약자이지 않은가? 상대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면 당연히 다른 대안이나 대가를 제안하며 설득해 오기 마련이거늘, 오히려 자네는 이 무존을 을(乙)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으, 을이라니요?”
상황이 자신이 의도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자 지극히 당황해하는 조휘.
“맹이 적당한 대가와 성의를 좀 더 내놓는다면 마지못해 응하는 척하는 것이 이 무존의 협상 전략이었다 그 말일세.”
“…….”
와 이 늙은 너구리 같은 양반 좀 보소.
그럼 애초에 무황의 뜻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이번 협상에 나섰다는 뜻이지 않은가?
“후, 그럼 본 맹성으로 사마세가를 옮길 뜻을 애초에 결심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그것이 본 가 아이들의 공통된 뜻이지.”
“예?”
순간, 사마유기의 눈빛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그 소검신이라는 천방지축의 아해(兒孩)가 우리 강아(强兒)를 애송이 취급했다는군. 그를 지켜봤던 본 가의 많은 무인들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네.”
“아…….”
사마강.
그 거만과 오만의 화신인 자를 생각하니 또다시 조휘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만약 그때 자신이 사마세가를 내쫓지 않았다면 개파대전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한데 그때의 일이, 설마 무림맹과 사마세가의 결집을 만들어 낼 줄이야!
“그래서 말인데, 하나 더 내놓으시게.”
조휘가 황망한 눈을 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단호히 대답하는 사마유기.
“부맹주(副盟主)의 위(位). 우리 강아를 맹의 부맹주로 봉해 주게.”
“음…….”
강호의 고고한 전설이니 뭐니 해도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아비(父)인 건가.
조휘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 선을 벗어난 결정이군요. 일단 무존님의 뜻을 맹에 전달은 해 보겠습니다.”
빌어먹을 사마 놈들!
이미 부맹주 직을 요구할 것을 지들끼리 다 정해 놓고 이런 요식 행위를 하다니!
하지만 조휘가 알기로 구파(九派) 출신이 아닌 오대세가의 인물이 맹주와 부맹주의 직에 봉해진 예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오대세가보다 구파의 연합 세력이 열 배는 더 강성했기 때문이다.
분명 무림맹의 원로들도 난색을 표할 것이리라.
“허면 여독을 풀고 돌아가시게나. 보다시피 본 세가에는 저 많은 맹원들이 묵을 객당이 없네. 미리 객잔을 준비해 놓았으니 모두 그곳에서 여독을 푸시게.”
음?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갑자기 조휘가 엄정하게 포권하며 사마유기를 응시했다.
“평소 사마세가의 명성과 권위를 흠모해 왔던 터라 저만이라도 이곳에서 묵으면 안 되겠습니까? 귀 세가의 고아한 정취를 하루만이라도 느끼고 싶습니다.”
저토록 사마세가의 이름에 금칠을 해 주니 사마유기는 흡족한 마음이 절로 일어나 조휘의 청을 수락했다.
“허허, 그렇게 하시게. 시비에게 일러 자네가 묵을 객당을 준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 * *
날이 어둑해지자 객당에서 준비하고 있던 조휘가 품 안의 변장 도구를 은밀하게 꺼냈다.
이 변장 도구들은 조화면천변의 완성이다.
상대의 얼굴 생김새를 완벽히 구현해 냈다고 해도, 특유의 피부색이나 점(點), 수염 등을 추가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새 조화면천변으로 사마유기가 된 조휘가 이마에 점을 찍었고 눈썹과 수염을 붙였으며 분(粉)으로 낯빛을 어둡게 바꾸었다.
이내 동경을 쳐다보더니 흡족한 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조휘.
이건 그야말로 완벽이다.
낮에 접객당에서 마주친 사마유기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얼굴 그 자체!
이내 그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기감을 끌어올렸다.
사마세가는 그야말로 용담호혈.
초대 무신의 무공을 세대로 거듭하며 발전시킨 자들이다.
절대경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이 얼마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곳인 것이다.
감각권 내에 특별한 점이 포착되지 않자 그제야 조휘가 유령과 같은 신법으로 객당을 빠져나왔다.
한 전각의 용마루에 몸을 감춘 채 이내 무신 사마천세를 불러 보는 조휘.
‘자 이제 어디로 갑니까? 천무도해록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니까?
‘뭐라고요?’
아니 이 어르신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럼 이 넓은 장원을 모두 뒤지라고?
-일단 무원동(武元洞)부터 뒤져 보거라.
‘무원동? 거긴 어딥니까?’
-오직 사마의 가주만이 드나들 수 있는 동혈(洞穴)이다. 역대의 가주들은 모두 그곳에서 폐관했지.
순간, 조휘의 눈빛이 새하얗게 물들며, 이내 그의 신형이 무신이 알려 준 방향으로 빛살처럼 쏘아졌다.
사마세가의 가주 전용 폐관실이라 할 수 있는 무원동(武元洞)은 무슨 거창한 장소가 아니었다.
장원의 좌측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그저 허름한 자연 동굴.
그 흔한 경비 무사도 하나 없었고, 관리를 하는 이도 없어 박쥐가 우르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스산한 모습이었다.
그런 볼품없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조휘는 일순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저런 흔한 동굴 따위에 무원(武元)이라는 지극한 이름을 붙이기는 좀 애매하지 않나?
무려 천하제일 사마세가의 담장 내부에 있는, 그것도 가주 전용 폐관실이라는 이름에는 너무도 걸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런 추레한 곳에 천무도해록이 있다고?
아니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강호의 난다 하는 비적(飛賊)들에 의해 벌써 도둑맞고 없을 것이다.
-음? 무원동이 어쩌다 저 지경이?
무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원동은 그 주위로 아름다운 녹음과 기화이초가 만발하여 청아한 선향(仙香)이 그득하던 곳.
더욱이 무원동의 아래편에 흐르던 청량한 실개천의 물맛은 지금도 무신의 기억 속에 소담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추억이었다.
한데 그런 실개천은 통째로 사라져 있었고, 기화이초는커녕 푸석푸석 바스러지는 잡초들만 사방에 그득할 뿐이었다.
자연 본연의 아름다움도 지키지 못하는 가문의 수준이라니!
무신은 가문의 재정 상태가 설마 이 지경에 이르러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 많은 양생초(養生草)들을 다 따다 먹었단 말인가?
조휘가 한심한 눈을 했다.
‘어휴, 골방에 처박혀 달포만 죽쳐도 병신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수백 년 봉문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무신 사마천세.
설마하니 자신이 세운 봉문(封門)의 뜻이 이토록 후손들을 피폐하게 만들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문득 무신은 후손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당시의 결정은 가문의 생존을 위한 결단.
그때까지만 해도 정체를 알지 못했던 의문의 무리, 즉 신좌의 추종자들은 자신과 가문을 시시각각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일단 무원동 안으로 들어가 보거라.
조휘가 묵묵히 걸어갔다.
무슨 대단한 잠입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려 ‘사마세가주의 폐관실’을 이렇게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상황에 조금은 허탈한 심정이 된 조휘였다.
동굴에 들어선 그가 금세 철검을 꺼내 들었다.
츠츠츠츠츠-
그의 철검에서 솟구친 석 자가량의 새하얀 검강(劒罡).
화경에 이르러야만 겨우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검기성강을, 무슨 횃불처럼 꺼내 드는 그 모습에 지켜보던 여러 존자들도 혀를 내둘렀다.
그의 마신공과 융합된 검천대신공의 경지는 존자들로서도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종류.
그렇게 밝아진 동굴의 내부를 유심히 살피는 조휘였다.
‘음……?’
아무리 봐도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자연 동굴이었다.
동굴의 벽면, 바닥 어디에도 인간이 가공한 흔적이나 자취를 발견할 수 없는 순수한 자연 동굴.
가주의 폐관 수련실이라면 검총처럼 검흔과 같은 수련흔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흔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동굴의 벽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항아리 두 개와 요강 하나뿐.
그것들은 벽곡단을 채워 둔 항아리와 물 항아리였다.
“와 씨. 진짜 너무 무식한 거 아닙니까?”
가주의 폐관 수련실만 봐도 사마세가의 가풍(家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극히 무인스럽게 무식하다는 것!
비록 허술하긴 했으나 검총은 그래도 돌을 깎아 만든 침상과 서책을 읽을 수 있는 좌대(座臺)라도 있었다.
-폐관에 부산스러울 것이 있느냐? 명상 수련에 있어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만큼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감개무량한 듯 떨리고 있는 무신의 목소리.
허나 그가 추억에 잠기든 말든 조휘는 헛된 발걸음을 한 것 같아 짜증만 부리고 있었다.
“어쨌든 천무도해록은커녕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얼굴이 되고 마는 조휘.
“아니 여기에 있긴 뭐가 있습니까? 저 항아리요? 요강이요?”
-검기성강을 거두고 바닥에 몸을 뉘이거라.
그런 진중한 무신의 음성에 조휘가 내공을 거두고 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 순간.
“음?”
동굴의 천장과 벽면에 희미한 무언가가 수도 없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조휘의 안력으로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결코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빛들.
지구의 모든 무생물 중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은 야명주와 같은 야광석(夜光石)이 유일하다.
물론 현대인인 조휘는 그 야명주라는 것의 정체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
물체가 빛을 발하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은 방사능 에너지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음을 뜻한다.
강호인들은 그런 방사능 덩어리를 고가에 거래하며 보물처럼 여기고 있었지만, 조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동인지 퀴리 부인의 예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당연히 조휘는 찝찝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방사능 덩어리 동굴이구만.”
-방사능?
“저 빛을 내는 돌들은 지극히 위험한 물질입니다! 가까이 두면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물질이지요!”
-허! 과연 그래서였어! 어쩐지 야명주를 빻아 잘게 부수어 동굴의 곳곳에 설치한 후, 알 수 없는 음독(陰毒)과 사기(邪氣)가 몸 전체로 치밀어 오랫동안 지독히 고생했었다.
“저걸 어르신께서 직접 설치를 하셨다고요?”
-그렇다. 그래서 내 자세히 보라고 하지 않았더냐?
순간 조휘는 그 지독한 무신의 광기에 소름이 돋았다.
한눈에 봐도 수천, 아니 수만 개는 되어 보이는 저 수많은 야광점들이 진짜 인간의 노가다라고?
게다가 그런 야광점들이 인간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라 여길 수 없었던 이유!
그 수많은 점들에게 어떤 특유의 질서도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연적인 무질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 도식들은 평생토록 천무도해록을 해석하고 본 좌가 깨달은 천무무해공(天武無解功)의 진정한 총아(寵兒)다.
순간, 조휘는 검천전능지체의 백안을 일으켰다.
허나 아무리 살펴봐도 어떤 대단한 수학적 현상이 읽혀지지 않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야광점들은 너무나도 불규칙하여 수많은 가변성(可變性)으로 인해 오류만 나타낼 뿐, 물리적 도식을 이루는 기본적인 수학적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무한한 변수의 바다, 양자이론을 보는 것 같은 어지러운 느낌.
저런 것에 무슨 무학적인 진의(眞意)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림으로 친다면 술에 취한 이가 그저 막 휘갈겨 그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낙서와 같은 느낌이다.
-그것이 본 좌가 깨달은 무해(無解)다.
무해(無解)?
아무것도 깨달을 수도 풀이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미친, 그럼 그게 무슨 무공이야!
-그럼, 그런 무해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 무학(武學)의 신(神)에 이른 본 좌는 무엇이란 말이냐?
와, 잘난 척을 저렇게 뻔뻔하게 하는 것도 설마 무신의 재능에 포함되는 건가.
-흰소리 말고 계속 살펴보거라.
한껏 기대 어린 내색을 하는 무신.
역대 사마세가의 가주들 역시 이곳에서 수십 년을 폐관하며 무아지경으로 무신의 심득을 바라보고 연구했으나 결국 아무도 대성하는 이가 없었다.
하나 당대 최고의 기재이자, 무림 역사상 가장 빠른 무공의 성취로 이름 높은 소검신(小劒神)이라면 남다른 무언가가 있을 터.
결국 조휘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누워 천장과 벽면을 쉴 새 없이 살피는 그였지만,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몸서리쳐지는 한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냥 제멋대로 휘갈긴 낙서처럼 의미가 없어 보인다.
처음에는 불규칙적인 점과 점들을 심상으로 이어 보았다.
허나 그렇게 아무리 이어 봐도 거미줄처럼 얽히는 선(線)들만 난잡해질 뿐, 결국은 암기력의 한계를 느끼고 그 의지를 접어야만 했다.
그다음에 시도한 것은 각각의 점들을 굳이 객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군집된 의지로 인식하는 일이었다.
이는 조휘가 검총에서 성하력(星河力)을 깨달았을 때의 기이한 감각이었는데, 무신의 무공이 고대 현대인으로 비롯됐다면 비슷한 성질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수포로 되돌아갔다.
군집된 의지로 인식한 순간 무수히 많은 섬광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마치 두뇌의 연산력이 일거에 무력화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조휘는 이 무신의 천무무해공이 단기간에 깨달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무학의 천재로 우글거리는 사마세가조차도 그 오랜 세월 무신의 천무무해공을 올곧게 깨달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젠장할.’
조가대상회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육존신의 엄포를 떠올리자 조휘는 더욱 다급해졌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서 이렇게 바닥에 죽치고 누워, 언제 깨달을지 모르는 도해를 쳐다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가는 한숨을 토하던 조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죠.”
-우리의 무공을 합일하기도 전에 신좌의 추종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루 이틀로 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 수년 동안 죽치고 연구해도 될까 말까인데 그럴 시간이 없잖아요.”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
결국 결심이 선 듯 무신은 오롯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직접 느끼게 해 주겠다.
조휘가 기겁하며 발악의 뜻을 외쳐 보려 했지만 자신의 육체를 차지하려는 무신의 영압(靈壓)은 검신 어른을 오히려 능가할 지경.
화아아아악!
무신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조휘의 몸을 점검했다.
존자에 이른 후로 생령의 몸에 현신하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금세 적응한 무신이 조휘의 내부를 관조하다 이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놀랍구나. 절대경의 경지에 이만한 신공을 이룩하다니. 마신이여, 실로 놀라운 마공이로다.”
그가 조휘의 내부에 강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신공의 마화를 발견한 것.
곧 무신이 의지를 일으키자 지옥의 겁화처럼 피어난 암자색 마기가 불처럼 그의 주위로 타오르고 있었다.
화르르르르르!
그야말로 인세에 보기 드문 가공할 기운!
그렇게 무신의 춤(舞)이 시작되었다.
스르르르르-
천지(天地)가 무신의 의지에 동인(動引)한다.
덩실거리는 그 모습이 일견 유약해 보일 수 있었으나 이를 지켜보던 검신과 마신은 그야말로 전율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해(無解)가 아니라 무해(武海)!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유려한 동작 하나하나에 하늘이 동하고 땅이 화답한다.
신령(神靈)스럽다.
저건 자연경이란 경지로 가늠하기도 무색하다.
자연의 법칙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그는 자연을 지배하며 이끌고 있다.
그것은 마치 초월자.
그제야 검신과 마신은 무신 사마천세의 경지가 자신들보다 상위에 있음을 뼈저리게 인정해야만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하를 전율케 한 무신의 춤이 잦아들자, 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조휘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그때.
“아…… 아…… 아버님?”
갑자기 무원동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지자 한달음에 달려온 사마강(司馬强).
그가 전율에 물든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 사마유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완성하신 겁니까?”
어느덧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마강.
가문의 수백 년 비원이 눈앞에서 재현되자 솟구치는 뜨거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마유기(?)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천무도해록(天武圖解錄)을 가져오너라. 내 친히 네게 가르침을 내릴 것이다.”
“……천무도해록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사마강.
“그걸 왜 저에게 찾으십니까? 아버님께서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뿔싸!
가주인 사마강이 아니라 태상 가주인 사마유기가 천무도해록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무신 사마천세가 난처한 얼굴로 사마강의 시선을 외면했다.
“요즘 내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구나. 알겠다.”
사마강이 더욱 묘한 얼굴을 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세수에 걸맞지 않게 지극히 몸이 정정하시고 정신도 맑으셔서 아직도 손수 가문의 정무를 돌보고 계신다.
그렇게 매사에 철두철미한 일 처리로 이름 높으신 아버지께서, 세가의 보물인 천무도해록을 어디에 있는지 까먹으셨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아버지를 아는 자라면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점은 반각 전만 해도 자신과 함께 식사를 나눴던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무원동에 나타나신 것.
밥을 먹다 말고 깨달음이 몰아치셨나?
천무(天武)의 진리를 깨우치는 대오(大悟)라는 것이 그렇게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그야말로 인세를 초월한 듯한 아버지의 춤사위를 직접 목도한 마당에 무엇인들 부정할 수 있으랴!
“제게도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엎드려 가르침을 청하는 사마강을 무신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라본다.
저토록 무(武)를 궁구(窮究)하는 마음가짐은 무신가의 가주로서 부족함이 없다 하겠으나 자신의 무해(無解)는 가르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진즉에 사마세가의 후손들 중에서 수많은 무신이 탄생했을 터.
“독보정진(獨步精進)하거라.”
“아, 아버지!”
깨달음 한 자락 나눠 주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런 사마강의 얼굴에는 일그러진 마음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오랜 갈망이 욕망으로 변질되어 이제 그 성정마저 편협해진 것.
그가 매사에 불같고 옹골찬 것이 무공을 향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무신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이내 스스로 마(魔)에 이를 놈이구나.”
순간, 유수(流水)와 같은 청량한 바람이 일어나 사마강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무신이 자연지기를 끌어와 그의 피폐해진 심신을 어루만져 준 것이다.
“아아……!”
한 줄기 청아한 기운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휘몰아치자 이내 전율해 버린 사마강.
그것이 바로 무해의 기운이라는 것을 한 번도 겪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데 또 다른 기운이 밀려온다.
툭.
무신이 무해의 기운을 다시 일으켜 부드럽게 그의 수혈을 짚자 사마강의 몸이 스르르 허물어졌다.
그가 아무리 절대경의 무량에 이른 자라 하나 무신의 무해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할 수 있었다.
그런 후에, 무신이 가볍게 발을 굴렸다.
그러자 주위의 공간이 부드럽게 일렁거리며 곧 그의 신형이 사마세가의 장원 중심부에 나타났다.
이를 지켜보던 조휘가 경악했다.
저런 광경을 딱 한 번 영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천우자의 축지성촌술(縮地成寸術)!
도술의 극한, 그 고절한 경지를 무신 역시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류귀종이라더니, 과연 경지에 이르면 모두 하나로 귀일(歸一)된다는 건가?
저런 신과 같은 무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신좌의 추종자들은 도대체 얼마나 미친놈들일까?
한편 무신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마세가의 장원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의 후손들이 세가의 가장 큰 어른을 모실 만한 장소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중달대각(仲達大閣).
무신은 그곳이 태상가주 사마유기의 처소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덜컥.
곧 중달대각 내부로 들어온 그가 회탁 위에 있는 태상가주인(太上家主印)을 발견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곳이 바로 손자 사마유기의 처소였던 것이다.
“후우…….”
한 차례 가는 숨을 내쉬던 무신이 손자의 처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무려 무신이라는 존재가 후손의 처소를 뒤지다니 이 무슨 못난 짓이란 말인가!
존자들의 대의(大義)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
허나 그가 그렇게 온갖 서랍장과 모든 책 걸개를 살폈음에도, 천무도해록의 양피지는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기야 사마세가 최고의 보물을 그렇게 허술하게 보관할 리가 없는 터.
“허어.”
결국 탄식을 토하던 무신이 조용히 눈을 감고 좌정했다.
끝내 사마유기를, 자신의 손자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 시진이 흘렀을까.
“허억!”
씻어 몸을 정갈히 하고 잠을 청하려 처소에 들어온 사마유기가 자신(?)을 마주하며 경악의 얼굴로 굳어져 버렸다.
“누, 누구냐!”
자신의 의념, 그 민감한 감각권 내에 감지도 되지 않은 자다.
강호의 그 누가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처소까지 침투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무신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앉거라.”
앉거라?
감히 자신의 용모로 변장하고 천하제일가에 침투한 도적놈이 하대라니!
더욱이 당대의 강호에서 자신보다 더 높은 배분을 지닌 자는 소림의 전설적인 고승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간담 한번 그럴싸한 놈이구나! 내 친히 오늘 살계를 열어…… 허억?”
출수하려던 사마유기가 그대로 장승처럼 굳어졌다.
상대에게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기운이, 놀랍게도 오롯한 천무무해공의 공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토록 신령스러운 무해의 기운을 속세에 현신(現身)할 수 있는 자라면 자신이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자연을 지배하는 거대한 기운!
곧 사마유기가 전율하며 털썩 주저앉아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무조(武祖)이시여……!”
무조께서 어찌하여 자신의 용모로 화(化)해 계시는지 그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무신의 뜻이란 그야말로 신(神)의 뜻.
감히 범부로서 어찌 그의 뜻을 헤아리려 들겠는가.
이내 그의 가슴에 안도가 가득 차올랐다.
반드시 살아 계신다고 믿고 있었다.
조가대상회의 소검신이란 놈이 감히 무조님의 귀천을 운운했지만, 신령하신 무조께서 그렇게 쉽게 죽음을 맞이할 리가 없는 터.
“호들갑 떨지 말고 일어나라.”
이에 사마유기가 꿇은 무릎을 풀지 않은 채 공손한 표정으로 그대로 고개만 들었다.
“이 모자란 소손이 감히 무조의 말씀을 경청하겠나이다.”
“천무도해록을 내놓거라.”
“예, 그리하도록 하겠…… 예?”
이미 그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른 무조께서 갑자기 천무도해록에 관심을 가지다니?
“내 확인할 것이 있느니라.”
“아, 알겠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자신의 옷고름을 풀어 헤치는 사마유기.
곧 그가 상의를 모두 벗자 새하얀 천을 칭칭 동여맨 그의 상체가 한눈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가 천무도해록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저 두껍고 거칠기 짝이 없는, 오래되어 그 냄새마저도 고약한 양피지 묶음을, 저렇게 상체에 칭칭 감고 다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평생토록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냐?”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다시 깊게 엎드리는 사마유기.
“소손에게 맡겨진 업(業)이라 여기며 늘 소중히 품에 간직하고 있었나이다.”
“허어, 미련한지고.”
말이야 질책하고 있었으나 그 음성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무조께서 평생토록 짊어졌던 자신의 업을 알아주자, 사마유기는 왠지 눈시울이 붉어져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내 두 손으로 공손히 천무도해록을 바치는 사마유기.
하지만 무신은 천무도해록을 받아 들자마자 갑자기 조휘의 육체를 내팽개치듯 영계로 돌아가 버렸다.
천무도해록을 손에 받아 든 채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휘.
아니 이 어른이!
본인이 일을 저질렀으면 해결을 보고 가셔야지 지금 이 얄궂은 상황을 나보고 다 수습하라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갑자기 무신까지 연기해야 될 판국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천무도해록을 득템했으니 재빨리 품 안에 수습하는 조휘.
한데 갑자기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만?
생각을 달리해 보니 이거 완전 개꿀 같은 상황이 아닌가?
조휘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했다.
“내 묻고 싶은 것이 있느니.”
“하문하시옵소서. 소손 무엇이든 대답을 올리겠나이다.”
이내 분노 어린 기색으로 호통을 치는 조휘!
“내 오늘 친히 가문의 일을 살펴보았다! 한데 우리 사마가 맹(盟)의 하수인을 자처했더구나!”
순간 싯누렇게 뜬 얼굴로 장승처럼 굳어 버린 사마유기.
“평소에 우리 무신의 가문을 얼마나 알로 봤으면 감히 한낱 무림의 상회를 견제하는 일에 사마(司馬)를 쓰겠다는 흰소리를 늘어놓을 수가 있단 말이더냐!”
“무, 무조이시여! 그런 것이 아니오라……!”
“가알(喝)-!”
“무, 무조 어른!”
마치 오체투지라도 할 기세인 양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이내 사시나무 떨리듯 몸을 떨고 있는 사마유기.
그 모습이 가히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명하노니 당대의 가주를 이 사마천세의 앞에 대령하거라! 무원동에 있을 것이다!”
“존명!”
사마유기가 대경실색하며 유령과 같은 신법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곧 사마유기가 아들의 목덜미를 잡아 끈 채로 처소에 나타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사마유기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그 위대한 무조께서 사마(司馬)의 권위가 흠집이 난 것을 질책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들의 완강한 뜻에 의해 마지못해 허락하긴 했지만, 사실 자신도 마치 맹의 휘하에 들어가는 듯한 가문의 모양새가 마뜩치 않았던 상황.
평소에 그런 찝찝함이 있었기에 무조의 호통이 더욱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조휘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모가지 채 잡혀 온 사마강을 죽일 듯이 응시했다.
“네 녀석은 사마의 성을 갈고 싶은 것이냐?”
수마(睡魔)에서 아직 회복이 덜 된 사마강이 흐릿한 동공으로 두 명의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다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
눈치를 보던 사마유기가 그런 아들을 맹렬히 힐난했다.
“뭐 하는 것이냐!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아니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이놈이 그래도! 무조 어른이시다!”
“예?”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된 듯 사마강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튀었다.
허면 방금 전에 무원동에서 보았던 춤사위가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무조 어른의 오롯한 현신이었단 말인가!
곧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흑흑! 무조이시여!”
무조는 모든 사마세가 사람들의 우상이자 신화.
그런 무조를 경원하고 흠모하는 사마강의 마음은 사마유기 못지않았다.
일순 악독한 빛으로 물드는 사마강의 얼굴.
감히 우화등선도 아닌 무신(武神)의 귀천(歸天)이라니!
역시 그 건방진 놈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내 묻고 있느니, 너는 진정 성을 갈고 싶은 것이더냐?”
“무조이시여, 그게 무슨 말씀…….”
“닥쳐라 이놈! 감히 천하제일가의 가주 위(位)를 짊어진 자가 스스로 개처럼 기어가 맹을 주인 삼는단 말이더냐!”
사마유기가 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사마강 역시 노래진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 부복했다.
“게다가 그 이유란 것이 천마(天魔)도 아니고 절대빙인(絶對氷人)도 아닌, 고작 강호의 상회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허허! 천하제일? 거 개나 줘 버리거라!”
“무, 무조이시여!”
“아아! 소손 주,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조휘가 더욱 거칠게 고함친다.
“그래! 죽을죄지! 하여 네놈들의 사마(司馬)를 내 손수 취하겠다! 족보는 어딨느냐? 아니지! 선조의 명성을 갉아먹기만 하는 이 미련한 놈들에게 무슨 세가(世家) 따위가 필요하단 말이냐! 아예 가문을 없애라!”
사마강이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을 받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조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으아아아…… 소손이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죽으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진(自盡)하겠습니다! 하지만 제발 그 명만은 거둬 주십시오! 세가를 끝내라니요!”
사마유기도 다른 한쪽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무조이시여! 제가 이놈을 잘못 키웠습니다! 차라리 소손의 목숨을 거둬 주시고 진노를 가라앉히소서!”
호오.
이토록 서로 죽겠다고 나서니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 볼까?
“네놈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 손수 기회를 주겠다.”
금세 얼굴이 환해지는 사마강.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조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과하는 의미로 본 세가의 소가주를 조가대상회에 보내 서로 우의를 다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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