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57
56 章>
사마세가로부터 날아든 한 통의 전서구.
그렇게 무황은 사마세가의 가주인(家主印)이 선명하게 찍힌 서찰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리는 눈빛.
“허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맹주 직까지 요구해 오며 적극성을 드러내던 자들이 뜬금없이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보내온 것.
부맹주 직을 요구해 온 사마세가로 인해 이미 여러 차례 심도 깊은 회의가 이뤄졌었다.
그렇게 오랜 설득으로 겨우 만장일치의 의결을 이뤄 낸 마당.
한데 이제 와서 모든 일을 백지화하자니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경우란 말인가!
무황은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한심한지고. 그 긴 세월 동안 봉문을 하더니 세상살이를 모두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렇게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닙니다. 맹주님.”
무림맹 군사부를 통할하고 있는 정파의 지낭(智囊), 총군사 제갈찬휘가 진중한 음성을 보태고 있었다.
“비록 천하에 그 명성이 두텁다고는 하나 맹의 주기적인 배려로 겨우 봉문을 유지하는 자들이지 않은가!”
무황의 눈빛이 더욱 노기를 머금었다.
“그들이 봉문을 풀고 세상에 나선다 해도 사업장을 확보하고 설치하는 일에 오랜 세월이 걸릴 거라는 것은 다름 아닌 자네의 의견이었네. 밑천이 일천한 그들로서는 무조건 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 자네란 말일세. 한데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사마세가가 맹의 손을 뿌리칠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한 것은 확실히 자신이 맞았다.
하지만 제갈찬휘는 맹의 총군사로서 모든 경우의 수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예상 안에는 사마세가가 거절절하는 변수도 분명히 존재했다.
“예상되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황이 겨우 노기를 가라앉히며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말해 보시게.”
“첫 번째는 그들이 그동안 엄청난 재력(財力)을 숨겨 왔을 가능성입니다.”
무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들에게 재물이 있었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맹이 보내 주는 물자에만 의지하며 고되게 살았을 리가 있겠는가?”
“사정이야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요. 가법(家法)은 가문마다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무신의 봉문령이 해제되면서 가문의 보물들을 매각할 수 있는 권리를 가주가 되찾았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으음…….”
제갈찬휘가 예의 섭선을 펼쳐 들며 두 눈을 빛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야 조가대상회를 견제하는 맹의 대의(大義)에 동참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다시 세력을 떨칠 기반을 잡기 위함일 것입니다. 허나 가문에 숨겨 둔 재산이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요. 천하제일(天下第一). 충분히 스스로 일어날 역량이 있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오랜 봉문이 애초에 거짓이었을 경우입니다. 봉문으로 힘겨운 사마세가는 단지 그들의 외견(外見)일 뿐이며, 이미 그들이 강호의 은막에서 모종의 일들을 도모하고 있었다면 굳이 저희와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지요.”
만약 제갈찬휘의 두 번째 예상이 진실일 경우, 온 천하가 수백 년 동안 그들에게 속아 왔다는 말인 터.
무려 무신의 가문이 수백 년 동안 봉문으로 세상을 속이며 모종의 일을 꾸며 왔다?
그것은 진실로 무서운 예상이었다.
“세 번째는 또 뭔가?”
문득 제갈찬휘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 번째는 앞선 두 예보다 더욱 생각하기 싫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의문의 얼굴로 고개가 모로 꺾어지는 무황.
재물을 숨겨 왔다는 첫 번째 예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의 오랜 봉문이 거짓이었다는 예상보다 더욱 최악의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대관절 그 세 번째 예가 무엇이기에 가장 최악이란 말인가?”
“저희보다 앞선 포섭입니다. 소검신의 뛰어난 심계와 지략으로 미뤄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지요.”
“앞선 포섭? 그놈의?”
소검신 조휘.
그가 맹보다도 한발자국 앞서 사마세가를 포섭했다고?
“저희 맹(盟)과의 논의가 중간에서 틀어진 것으로 보아 그가 협상 도중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지요.”
사마세가와 조가대상회의 합심(合心)이라!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황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조가대상회가 검신과 무신의 명성을 모두 취한단 말인가!”
제갈찬휘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래서 가장 두려운 예상이라 말씀드린 겁니다. 만약 일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면 저희 맹(盟)은 갈수록 존재감을 잃고 세력의 누수가 가속화될 것입니다.”
“허어……!”
“결국 정파세력 전체가 조가대상회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야말로 최악은, 구파(九派) 중에서 맹을 탈맹하고 그들의 휘하로 자처하는 문파가 나타날 경우입니다. 검신과 무신의 전설이 강호의 구심점이 된다면 구파의 검종(劒宗)들로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무황이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 구파의 검종 중에 무당(武當)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런 치졸한……!”
한데 그런 그들의 음울한 예상이 현실로 이뤄지는 듯한 전조(前兆)가 나타났다.
“충! 긴급히 보고드리겠습니다!”
맹주의 집무실에 숨을 헐떡이며 들어선 이는 감찰교위 단백우!
무황이 놀란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 처참한 몰골은 또 무어란 말인가?”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그의 두 눈은 퀭하니 움푹 들어가 있었고 안색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몇 날 며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맹성으로 쉼 없이 달려온 행색이었다.
“후우…… 급보를 전하기 위해 수하들을 수습하여 오지 않고 먼저 홀로 돌아왔습니다.”
“말하게 어서!”
단백우가 그대로 바닥에 부복한다.
“소검신(小劒神)이 역체변용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여, 역체변용술(易體變容術)?”
검신의 적전제자란 놈이 그 사마외도의 비열한 수법을 어찌?
“그자가 눈앞에서 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진정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교한 역체변용술이었습니다.”
역체변용술이란 익히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마학(魔學)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런 사파의 놀라운 기예를 소검신이 익히고 있다고?
그 말인즉 이제 그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그래서요? 그자가 감찰교위님으로 역용하고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벌떡 일어나 단백우를 추궁하고 있는 제갈찬휘.
“그가 기이한 수법으로 제 육체를 구속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독(毒)이라고 생각했으나 시일이 흘러도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니 그의 고유한 무공인 듯 여겨집니다. 한데…….”
“한데?”
“그가 제 품의 명령서와 맹령이 담긴 서찰을 꺼내 그대로 사마세가에 잠입했습니다.”
“으아아아아!”
웬만한 일로는 좀처럼 동요를 보이지 않는 제갈찬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고 있었다.
맹이 그들과 동맹을 자처해 놓고 뒤로는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어코 알아내 버린 소검신.
그의 다음 행동 반경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가 맹의 행사를 도울 리 없었다. 분명 단백우 행세를 하며 온갖 방해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무황 역시 치부를 들킨 것마냥 그 얼굴을 수치스럽게 구겼다.
“그래서 일이 틀어진 거로군.”
“하…….”
무황과 제갈찬휘를 바라보는 단백우의 눈빛이 더욱 심상치 않았다.
“……보고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어서 고하라!”
무황의 다급한 외침에 단백우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무군의 마차가 조가대상회로 향한 듯 보입니다.”
“무군(武君)?”
무군 사마중(司馬中)이라면 사마세가의 미래를 짊어질 소가주가 아니던가?
“예. 한데 그의 마차에 사마세가의 세가기 대신 백기(白旗)가 걸려 있었습니다.”
“백기?”
백기가 의미하는 바는 단 두 가지, 항복하거나 사죄의 뜻을 나타낼 때다.
천하제일 사마세가가 백기를 세운 마차에 소가주를 전령으로 보낸다는 뜻이 뭐겠는가!
털썩.
생각하기도 싫었던 최악의 경우가 도래하자 결국 힘없이 주저앉고 마는 제갈찬휘.
무황도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이런 우라질!”
끝장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북의 검수들이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는 이 판국에 조가대상회가 사마세가의 백기를 받아들이고 이를 강호에 드러낸다?
더욱이 다른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처럼 무군 역시 터줏대감마냥 조가대상회의 품에 안착하기라도 한다면?
무엇보다 맹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소검신이 어떤 행동을 해 올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설마!’
순간 제갈찬휘는 전율했다.
조가대상회와의 동맹을 천명해 놓고 뒤로는 수많은 견제 방안을 늘어놓았던 그 서찰을 강호에 까기라도 한다면?
더욱이 이번 일은 맹령이었음에, 무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갈찬휘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소검신이 다른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무슨 묘책이 있겠는가?”
“조가대상회가 강호의 시선을 먼저 모으기 전에 무슨 짓이든 해야만 합니다! 무림대회를 개최하시죠! 비용이 얼마가 들든 무림 역사상 가장 성대한 무림대회를 열어서라도 모든 정파세력의 시선을 맹으로 모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안 된다면?”
“모든 명분과 시선이 맹(盟)으로 향하도록 사천회와 쟁(爭)이라도 벌여야 합니다!”
“허……!”
맹 내의 강경파들이 그토록 사마외도를 토벌하자고 주장해 왔지만, 맹원들의 피를 함부로 흘릴 수 없다며 한사코 반대하던 총군사였다.
그런 온건한 자가 서슴없이 전쟁을 말할 정도이니 무황은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큼 총군사가 지금의 사안을 무겁게 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
허나 무황은 더욱 진중한 어조로 뇌까렸다.
“난(亂)은 함부로 일으킬 수 없네. 강호무림의 혼란은 마교에게 발호(跋扈)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 여우를 잡으려다 호랑이를 깨울 수는 없지 않은가.”
허나 제갈찬휘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호랑이에게 물리기도 전에 집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마교보다도 조가대상회가 더욱 두렵습니다.”
강남의 거대한 상권과 검신의 명성, 거기에 무신의 영광이 합쳐진 조가대상회란 가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제는 조가대상회의 그 소검신이라는 자가 무인(武人)이라기보다 상인(商人)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무림 역사에 절대경의 무위를 이룬 자들 중에서 소검신과 같은 성향을 지닌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팔무좌의 고절한 경지에 이른 자가 이문으로 강호를 바라본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 제갈찬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약은 놈이 우리가 사천회를 치려 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사천회는 강서의 지척이지 않은가?”
“오롯한 맹의 싸움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공표해야 합니다. 사전에 조가대상회의 개입을 철저히 막아야겠지요.”
한데 그 순간.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단백우가 묘하게 입매를 비틀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묘한 표정을 발견한 제갈찬휘가 잠시 당황했다.
대나무처럼 곧은 성정을 지닌 단백우가 이 절체절명의 와중에 저런 묘한 비웃음을?
한데 이어진 단백우의 음성이, 제갈찬휘의 뇌를 새하얗게 불태우고 말았다.
“거, 지랄들 하고 자빠지셨네요.”
엎드려 부복하고 있던 그가 태연히 몸을 일으킨다.
“아무리 이해하려 들어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정파인들은 그 잘난 명예에 왜 그리 집착하지?”
멍하니 굳어 버린 무황과 제갈찬휘.
“아니 그렇잖아. 상대에게 해(害)를 끼칠 궁리를 하다 들키면 보통은 부끄러움이 먼저고 사죄가 당연한 것 아니야? 그런데 뭐 전쟁? 사람 목숨이 무슨 장난이야? 장난이냐고.”
“누, 누구?”
순간 단백우(?)의 얼굴이 물결치며 소검신(小劒神)의 용모로 화한다.
“누구긴. 당신들이 그토록 괴롭히고 싶어 하는 소검신이지.”
히죽.
눈앞에서 역체변용술이 현신하자 제갈찬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의 역체변용술!
수십 년간 단백우를 지켜본 자신들마저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는데 다른 자들의 눈을 속이는 건 얼마나 더 쉽겠는가?
조휘가 품 안의 서찰 뭉치들을 꺼내 그대로 무황과 제갈찬휘를 향해 뿌려 버렸다.
촤라라라락!
다시 조휘가 이죽거린다.
“보시다시피 맹령의 필사본이야. 맹성 바깥에 수천 장이 더 있다고. 그러니 수하들을 불러 날 어떻게 해볼 생각은 말아. 성도 전체에 방으로 붙여 버릴 테니까.”
“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제갈찬휘의 떨리는 음성이 조휘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조휘는 이미 생각해 온 요구를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멸마비각의 완벽한 공유를 원해.”
무황이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며, 멸마비각(滅魔秘閣)을?”
맹의 비밀 정보 조직인 멸마비각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
한데 그런 멸마비각의 정보를 공유해 달라고?
“말도 안 돼! 멸마비각은 천하의 정보가 모두 모이는 곳입니다! 조가대상회가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조휘의 퉁명한 눈이 흩뿌려진 맹의 서찰들을 향했다.
“자격이야 만들면 되지. 내 생각에는 그런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것 같은데.”
저 서찰이 강호에 공개된다면 맹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멸마비각을 내어 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만큼 무림맹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찾는 정보가 있다면 차라리 개방에 협조를 구하시게. 내 친히 개방의 방주께 서찰을 보내 주겠네.”
그 말에 조휘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 잘난 개방 방주는 우리 조가대상회에 붙잡혀 있는데?
“개방의 정보를 믿으라고?”
정파세력의 당당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는 개방을 믿지 그럼 도대체 누굴 믿나?
문득 제갈찬휘가 섭선을 접으며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서찰이 공개되건 말건 맹주께 더 이상의 하대(下待)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불손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시겠다면 결국 당신은 이 자리에서 무림맹 전체를 상대해야 할 거요.”
때 아닌 협박에 조휘가 이를 뿌득 갈았다.
개새끼들!
동맹의 뒤통수를 치려던 놈들이 이리도 뻔뻔하게 나오다니!
매섭게 눈을 빛내던 조휘는 하는 수 없이 분노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히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황께서야말로 정파의 거두(巨頭)이시니 제가 솔직하게 하나만 물어보죠.”
조휘가 짓궂은 태를 벗고 갑자기 진중해지자 무황도 자세를 바로 고치며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말해 보시게.”
이어진 조휘의 돌직구.
“혹시 신좌(神座)라는 존재를 들어 보셨습니까?”
제갈찬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으나 무황만큼은 지극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신좌를 어떻게?”
“오? 알고 계시다고요?”
역시 무황은 무황이다 이건가.
무황이 잠시 동안 진중한 얼굴로 골몰하더니 이내 제갈찬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총사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게.”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제갈찬휘가 나가자 조휘는 무황의 맞은편 자리에 착석한 후 조용히 두 눈을 빛냈다.
“맹이 신좌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건 정말 의외군요.”
하지만 무황은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맹(盟)이 아닐세. 본 맹주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래요?”
조휘가 조가철검을 회탁에 올려놓은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강호에 신좌가 출현할 시 그에 대한 대비책도 없겠군요.”
순간 무황이 허탈한 얼굴을 했다.
“신좌의 전설을 믿을 수조차도 없는 판국에 무슨 대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전설이요?”
무황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맹의 비고에서 고대의 맹주셨던 천조 대협(天照大俠) 일기를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몰랐던 전설일세. 게다가 그 내용이란 것도 너무나 터무니없어 수뇌들에게 공개도 할 수가 없었네.”
“그 천조 대협께서 남기신 일기의 내용을 말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으음…….”
무황이 게슴츠레 눈을 반개하며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소싯적 천조 대협께서는 잠시 소림에 몸담은 적이 있었네. 한데 어느 날 놀라운 신인(神人)이 찾아와 소림의 보물을 내놓으라고 겁박했다더군. 더욱이 그자의 무공은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네.”
“으음.”
왠지 자신이 아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조휘는 조금 무료한 표정을 했다.
“소림에게 ‘제석천의 법보’를 요구했던 놈을 말하는군요.”
“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고대 강호의 맹주셨던 천조 대협조차 함부로 떠벌릴 수 없어 평생의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이야기다.
그야말로 무림의 역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이야기라 해도 무방한 전설을 그가 알고 있다고?
새파랗게 젊은 놈의 견문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소검신이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란 말인가?
“그럼 말이 빠르겠군. 소림방장, 십팔나한, 그 전설적인 금강동인(金剛銅人)들, 심지어 속세와의 연을 완전히 끊은 무명의 고승들조차도 그에게는 역부족이었네. 모두 처참히 패퇴하고 말았지. 한데 그때 놀랍게도 소림의 심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신이 나섰죠.”
“그래 그 마신이, 그 천마(天魔)가…… 좀 가만히 있어 보게!”
무황은 자꾸만 조휘가 맥을 끊자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생략해서 말씀해 주시죠. 제가 궁금한 것은 마신마저 패퇴한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죠?”
아니 그 마신이, 무려 천마(天魔)가 아무런 명성도 없는 무명의 무인에게 패퇴한 것이 가장 흥미롭고 충격적인 이야기다.
그걸 빼고 나면 사실 전설이랄 것도 없었다.
“아니 놀랍지도 않단 말인가? 마신이 패퇴했다는 것이?”
조휘가 피식 웃었다.
“신좌를 추종하는 가장 말단의 소동들도 삼신과 동수(同手)를 이루는 마당에 뭐가 충격적입니까.”
일격에 무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신적인 법술마저 직접 경험한 조휘였다.
“소동(小童)?”
“신좌의 인형 같은 놈들이죠. 저도 한 번 보기는 했는데 그 새끼들 악질 중의 악질입니다. 세상을 무슨 장난처럼 여겨요.”
“시, 신좌와 연결된 존재들을 직접 보았다고?”
“네.”
“허어……!”
신좌의 무리들을 직접 목도한 일은 그 전설적인 명성을 떨친 천조 대협의 일생에서도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후 마침내 무림맹주에 오른 천조 대협은 비밀리에 신좌의 무리들을 추적해 왔고 그 일은 그가 평생토록 몰두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조휘가 결국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천조 대협 역시 별 수확은 없었네요.”
그렇게 천조 대협은 평생을 바쳐 무명고수의 정체를 밝히려 노력했지만, 그가 얻은 정보라고는 신좌(神座)라는 단어와 그의 추종자들이 강호에 암약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사실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그 후로 천조 대협께서는 맹의 비고에 손수 자신의 일기를 남겨 후대의 손에 당신의 숙제를 남기셨으나 사실 너무도 허황된 이야기라 역대 맹주들께서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지.”
“그래서 놀라셨군요.”
무황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네. 천조 대협의 일기를 본 후로 신좌라는 단어를 듣는 것은 자네에게서가 유일했으니까.”
무황이 솔직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모두 드러내 주자, 조휘도 그의 성의에 진솔하게 답해 주었다.
“개방이 신좌의 추종자들에게 잠식된 것 같습니다.”
“개, 개방이? 자, 잠식?”
개방은 구파일방.
그야말로 무림맹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한 축이었다.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고요. 어쨌든 개방의 방주가 지하상계를 일통한 비공일맥의 암상이었으니까요. 개방이 비공일맥의 외견일 확률은 십중팔구에 가깝습니다.”
“비공일맥(秘公一脈)!”
무황 역시 비공일맥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방주께서 비공일맥의 암상이라고? 그게 확실한 사실인가?”
비공일맥은 중원의 내로라하는 권력가들을 늘 괴롭혀 온 자들이다.
배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까이해서도 안 되는 그야말로 계륵과 같은 존재들.
역대 맹주들도 그런 지하상계와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것은 무황 역시 마찬가지.
한데 개방이 비공일맥의 외견이라니?
“허튼소리면 경을 치를 게야!”
조휘가 씁쓸하게 웃었다.
“비록 제가 좀 치사하고 이기적이기는 해도 사기를 치는 놈은 아니지 않습니까.”
때 아닌 조휘의 주제 파악에,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신중한 표정으로 되돌아온 무황.
“대체 개방이 왜…….”
대관절 개방이 어떤 문파인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이 뭉친 집단이라 하나, 협의와 정의를 향한 곧은 그들의 마음은 가히 의혈(義血)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협의지도 하나만큼은 그 어떤 문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여겼거늘!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네! 절대 그럴 위인들이 아니야!”
조휘가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세상은 대가리, 수뇌가 문제죠. 방도들의 마음에야 어디 마(魔)가 있겠습니까.”
“허…….”
무황은 조휘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
다수를 이끄는 자의 잘못된 선택과 변절.
그런 자들이 이 세상에 해악을 끼친 예는 수도 없이 많아, 굳이 책을 펼쳐 역사를 뒤질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개방으로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물경 십만 방도를 거느린 거대한 방파가 비공일맥의 외견이 될 수 있다면 다른 문파들이 깨끗하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위대한 불심(佛心)이, 그 고고한 태극(太極)이, 그 만개한 매화(梅花)가 모두 암상일 수도 있다니!
생각하기도 싫은 듯 무황이 정신없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과한 가정일세!”
“그저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허어……!”
무황이 잠시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의문을 드러냈다.
“한데, 그 비공일맥이 신좌의 무리들과는 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들이 현대의 문물…… 아니, 오직 신좌만이 알고 있는 문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좌만이 알고 있는 문물?”
“예.”
중원강호는 너무도 넓어 온갖 다양한 문물이 산재하는 곳.
전설의 신좌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고유의 문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구파(九派)만 해도 지역적 특색이나 색다른 문물로 인해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니까.
한데 이상한 것은 이 소검신이 ‘신좌의 문물’이라고 확정 지어 말하는 태도였다.
그가 신좌의 문물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소검신.
그가 이토록 신중하게 언급하고 있는 이상, 이제는 팔무좌에 이른 그의 주장을 아무리 무황이라 해도 허투루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무황이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다 별안간 눈을 빛냈다.
“내게 이런 황망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뭔가?”
“제가 이런 얘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으면 계속 절 괴롭히실 것 아닙니까?”
조휘가 지친 듯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다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번지수를 잘못…… 아니 적어도 무황님의 무림맹은 제 적(敵)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게 명성이 쏠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강북의 고수들이 동요하든 말든 전혀 제 관심 밖이니까.”
“…….”
조휘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뉘이며 축 늘어졌다.
“꼬장꼬장한 어르신들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이 짓을 하고 있긴 한데 저도 사람이라 조금 지쳐요. 애초에 그냥 잘 먹고 잘살고 싶은 것이 목표인 놈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휘가 조금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자 무황은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왠지 그런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전설의 신좌를 상대하는 것이 자네의 업(業)이란 말인가?”
“예. 빌어먹게도.”
“허어!”
저 젊은 나이에 자신으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목표를 필생의 업으로 삼은 소검신.
조휘는 어쩌면 간절한 마음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니 제발 저 좀 도와주십시오. 맹(盟)이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절 도와주겠습니까.”
무황은 왠지 그런 조휘의 처연한 얼굴을 바라본다.
마치 그 마음이 울부짖고 있는 듯한 모습.
순간 그는 지독히 부끄러웠다.
장강 이북의 절대자라는 자신으로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업을 짊어진 젊은이에게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 왔단 말인가.
“그동안 미안하고 미안하이.”
허허로운 얼굴로 조휘에게 손을 내미는 무황.
“그런 모습은 소검신에게 어울리지 않네. 어서 일어나게.”
조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조휘를 향해 푸근하게 미소를 건네는 무황.
“우린 동맹이지 않은가.”
* * *
이번에는 무신께서 몸져누우셨다.
돌아가며 병자 신세가 되는 것은 어쩌면 영계 존자들의 예정된 운명이었나 보다.
후손의 방을 뒤진 것도 그렇고 왠지 겁박한 모양새로 천무도해록을 빼앗듯 취한 마당이라 당연히 무신으로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한시라도 빨리 영계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잘못된 판단이 자신의 사마세가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대관절 천하제일가의 백기 투항이라니!
사마유기에게 무신의 신위를 드러내고 그대로 조휘에게 그 몸을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조휘가 그런 놀라운 심계를 발휘할 줄은 무신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
제 이득을 챙기는 일에는 보통의 수완을 지닌 놈이 아닌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조가의 존자들이 심심하면 곁으로 다가와 낄낄거리며 고소해하니 그야말로 속이 뒤집어질 지경.
사마의 후손들이 조가에 백기로 투항을 하였으니 그들로서는 그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하겠는가?
-제깟 사마 놈들이 아무리 천하제일이니 떠벌이고 다녀 봤자 우리 손(孫)에 비하면 달빛 아래 반딧불이라 할 수 있지! 낄낄!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패왕이니 해도 그래도 그 유명한 역사 속의 조 맹덕이다.
저리도 속이 좁은 자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진수(陳壽)의 위서(魏書)를 읽지도 않고 덮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신이 몸져눕든 말든, 조가대상회의 총단 침소로 돌아온 조휘는 서둘러 양피지를 품에서 꺼내 들고 있었다.
양피지 꾸러미를 살피던 조휘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린다.
천무도해록이라는 거창한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낡고 삭아 몇몇 장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양피지처럼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서책은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다.
적어도 반세기 동안은 사람의 체온과 땀에 노출되었으니 이 정도 형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차라리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가문의 보물이 소중해도 그렇지!
이런 양피지 묶음을 무식하게 평생 동안 맨살에 칭칭 동여매고 다니다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그런 사마유기의 무식하고 고지식한 성정에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조휘.
어쨌든 조휘는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조심스럽게 첫 장을 펼쳤다.
한데 그 첫 장부터가 그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양피지 속의 무수한 글귀는 틀림없는 ‘한글’.
한데 그 어투가 검총과 천마삼검의 석판 때와는 달리 진중하거나 자전적이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고고하고 오만한 느낌.
그것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글귀 같았다.
-전진교(全眞敎)의 도사들이 이 나를 천외(天外)로 인정하고 신(神)으로 모셨다. 이 내가 고작 삼청(三淸)의 현신(現身)이라…… 삼청은 애초에 실체가 없는 허상의 존재거늘, 감히 이 나를 그런 삼청에 비교하다니 어리석은 놈들.
어…….
고대의 무림인들이 검신 어른의 공(空)이나 마신 어른의 멸(滅)을 접했다면 충분히 신으로 여길 만하다.
그게 그리 욕할 일인가?
-하지만 제석천은 다르다. 그는 분명 실존하는 신격(神格). 예상하자면, 그는 이미 좌(座)들의 목소리를 듣고 끝내 부름을 받아 그들과 동격(同格)이 된 듯하다. 온 천하를 뒤져서라도 그의 법보들을 찾아내 연구해야 한다. 반드시 이 나도 신격에 이르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조휘의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름 모를 신비인이 소림을 찾아와 제석천의 보물을 요구했던 일.
고대의 현대인이 신좌(神座)라는 것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비로소 모든 인과가 명확해진 것이다.
-분명 그 당시 내 영혼을 관통했던 의식의 주체는 머나먼 우주에서 날아든 신격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후 다시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당시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그 무아(無我)의 끝자락에 펼쳤던 무공을 다시 펼칠 수가 없었다.
이 한 줄기 문장으로 조휘는 많은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가 어떤 특정 무공을 무아의 상태에서 펼쳐 보였을 때 머나먼 우주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고, 본능적으로 신좌는 그 목소리의 주체가 신격(神格)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
그 목소리가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가 평생을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그가 들었던 목소리는 바로 ‘신좌에 이르라’.
사실 천마삼검의 석판에 적혀 있던 ‘신좌에 이르라’라는 글귀는 고대의 현대인이 조휘에게 전하려던 것이 아닌 그가 들었던 신격의 오롯한 음성을 그저 기록해 둔 것이었다.
그 메시지는 인간에게 지극한 홀황(惚慌)을 선사하며 이내 강렬한 갈망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어진 그의 설명.
그 후로 더 이상은 글귀가 없었다.
그저 엄청난 점과 선, 도식으로 이뤄진, 그야말로 기하학적인 흩날림들.
그것은 그로서도 무아지경에서 우연히 펼칠 수 있었던 신의 경지를 다시금 되새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과연 그것은 무신 어른이 무해(無解)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무공의 도식이라면 일련의 규칙성과 법칙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데, 언뜻 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낙서처럼 허망했다.
하지만 조휘는 그 무한한 도식들을 끝까지 의지견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머나먼 우주의 신격들조차 찬탄할 수밖에 없었던 놀라운 무공의 파편.
어쩌면 자신은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조휘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갔다.
이 무해(無解)를 고유의 무공으로 인식하기를 포기한 어느 순간.
공(空)의 무수한 점과.
세상을 짓이기는 멸(滅)의 도식이.
그 무해의 무리(武理)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었다.
순간, 조휘의 두 눈!
화르르르르!
그것은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왼쪽 눈은 검신의 새하얀 백화.
오른쪽 눈은 마신의 암자색 자화.
검천(劒天)과 천마(天魔)가 조휘의 육체에 동시에 현신한 것이다.
온몸이 작열하는 듯한 극한의 고통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조휘는 피가 나도록 이를 깨물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로 비롯된 현상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천무동에서 눈에 담았던 무수한 점과 선, 도형들이 환상처럼 아스라이 시야로 나타나 양피지의 도식들과 어우러진다.
검천지경(劒天之境) 공공력(空空力).
천마지경(天魔之境) 마화멸(魔火滅).
무해지경(無解之境) 천무해(天武海).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무인의 오롯한 공능이 현신하여 이내 함께 춤사위를 벌인다.
조휘의 시야로 수없이 많은 도식이 별빛처럼 반짝이다 터지며 사그라져 갔다.
그러나 그 충격적이고 강렬한 고양감만큼은 그의 영혼에 화인처럼 각인되고 있었다.
순간 조휘는 천지(天地)를 관통하는 어떤 법칙을 느꼈다.
기기묘묘한 자연의 숨결이.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어떤 고결한 자아(自我)가.
그 무한한 정보들이 끊임없이 뇌리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것은 그 어떤 인세의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고 전율적인 전능감(全能感)이었다.
이어 그의 오롯한 의형지도(意形之道)가 해체되었다.
샅샅이 분해된 의념 조각들은 이내 전혀 다른 성질의 ‘무엇’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 전율적인 힘을, 이 초월적인 능력을 조휘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공할 힘이 발휘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시간만 좀 더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간신히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천 년 같은 ‘순간’.
조휘는 이내 환상을 마주한 것처럼 아스라한 느낌으로 허탈해했다.
그 순간.
-그대는 신좌(神座)에 이를 수 없는 자.
그것은 문자와 같은 체계적인 말의 형태가 아니었다.
마치 ‘어떤 의지’가 말이나 문자와 같은 체계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뇌 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기묘한 느낌.
이것이 고대 현대인이 언급했던 우주적 존재의 언령(言靈)이란 말인가!
한데 조금 이상하다.
그대는 신좌에 이를 수 없는 자?
아니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돼?
조휘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곧바로 질문하고 싶었지만 인간의 목소리가 우주적 존재에 닿을 수 있을 리 만무.
그렇게 그가 허탈한 심정으로 굳어져 있을 때 그의 몸에 현신했던 삼신의 고절한 기운이 점차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아련히 바스러지며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
조휘는 고대의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이 홀황의 순간을 평생토록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부질없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조휘가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나마 자신은 신(神)이었다.
자연경 그 너머의 초월적 경지를 순간적으로 경험한 것.
의지만 일으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방금 전의 전능감은 분명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내 무서워진다.
그토록 갈망하더니 고대의 현대인은 결국 이런 경지를 이뤄 내고야 말았단 말인가.
-그리 허탈해할 필요는 없느니.
그 마음에 경이(驚異)가 느껴지는 검신 어른의 목소리였다.
조휘는 아직도 자신의 존재력까지 빠져나가 버린 듯한 허망한 심정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련한 심정이란 사랑하는 여자와 이별을 했을 때의 한 백만 배, 천만 배쯤?
그렇게 아련히 사무치는 마음이 아직도 그 마음에 그득했기에 검신의 위로는 조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어진 조휘의 자조.
“왜 저는 좌(座)에 이를 자격이 없는 거죠?”
무엇보다 빡치는 것은 자신을 향한 우주적 존재의 저주.
고대의 현대인은 마치 신의 인정이라도 받은 듯 ‘신좌에 이르라’라는 우주적 언령에 열락과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우주적 존재가 왜 자신에게는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단 말인가?
검신 어른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신의 의지를 한낱 피륙의 인간이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느냐?
마신이 흥분한 듯 소리쳤다.
-나는 지금 자연경 너머의 경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를 드렸다! 방금 전의 네 경지는 우리 삼신(三神)을 아득히 능가하는 것! 그런 경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라 할 수 있거늘 왜 그리 의기소침한 것이냐!
무신 역시 탄복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엇보다 신적인 존재의 의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놀랍지 않소? 무공만으로 신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니 지금도 나는 믿어지지가 않소이다. 지금까지 그 신좌를 두려워하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거늘…….
검신 어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대오(大悟)를 경험한 무인이 그 이전과 같은 경지일 리가 없다. 너는 스스로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느냐?
“예? 제가 달라졌다구요?”
느낌은 평소와 그대로였다.
해체되었다가 다시 구성된 의념은 본래 자신의 의형지도가 분명했고, 그것은 방금 전의 전능감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확인해 보거라!
-의형지도를 일으켜 보라! 어서!
한동안 조휘는 툴툴거리더니 하는 수 없이 의념을 구동했다.
“음?”
그렇게 다시금 현신한 의형지도.
조휘는 익숙한 감각 속에서도 뭔가가 달라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화르르르르!
새하얗게 타오르는 좌안(左眼)!
암자색 귀화로 번들거리는 우안(右眼)!
의념을 구동하자 동시에 검천과 천마가 현신한 것이다.
전능감만큼은 방금 전과 같진 않았지만 분명 뭔가가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오로지 그에게 없는 것은 무해(無解).
그것은 고대의 현대인처럼 앞으로 그가 평생을 헤매일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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