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58
57 章>
조휘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경지에 적응하며 무공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의 집무실로 남궁장호와 장일룡이 함께 찾아왔다.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조휘를 발견하며 잠시 당황했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인기척을 낼 수밖에 없었다.
“흠.”
“조휘 형님?”
조휘가 좌정한 채로 조용히 눈을 뜨며 장일룡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장일룡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방주께서 이레 전부터 형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수.”
“이레?”
이레면 자신이 사마세가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결국 취선개는 생각을 정리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오케이. 데려와.”
“오케이? 그게 무슨 말이우?”
“…….”
무림 세계로 떨어진 지 벌써 십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이 현대 어투는 도무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작정하고 의식하여 고칠 때가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그를 데려와.”
“알겠수 형님.”
장일룡이 취선개를 데려오기 위해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 남궁장호가 자리에 앉으며 침중하게 얼굴을 굳혔다.
“할 말이 있다.”
“음? 남궁 형은 또 왜?”
남궁장호의 얼굴은 치욕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조가대상회를 내사(內事)하던 중 혹시나 싶어 본가도 살펴보았다.”
남궁세가는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그야말로 무림의 명가.
가솔들을 단속하는 일이야 그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어, 평소 조휘는 남궁장호나 가주 남궁수에게 별다른 당부를 하지 않았었다.
“흠. 남궁세가의 소검주가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원로 몇몇이 종적을 감췄다.”
“뭐?”
남궁세가의 원로원이라면 조휘로서도 그 인연이 각별하다.
애초에 자신이 남궁세가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 자체부터가 창천담로원 어르신들과의 인연으로 비롯된 일.
“아니 당장 나부터 믿을 수 없겠는데? 담로원의 어르신들치고 청정(淸淨)하지 않은 분이 없으신데 내사가 착수되자마자 종적을 감추셨다고?”
“그래. 그 때문에 본가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세가가 내사에 돌입되자마자 종적을 감췄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야 뻔했다.
오랜 간자(間者)이거나 혹은 부패(腐敗)한 자이거나.
“남궁 형, 섣불리 가문의 어르신들을 간자로 단정 짓지는 마. 일단 담로원으로 드나들던 자금 흐름부터.”
“이미 담로원의 출납 기록 전체를 내사 중이다.”
허나 조휘는 참을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남궁성찬 어르신은……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남궁장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담로원주님과는 무관한 일로 보인다.”
조휘는 내심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천검선은 가주이신 남궁수와 더불어 자신이 남궁세가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
그렇게 존경하는 어른이 갑자기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조휘로서도 견디기가 힘들 것이다.
조휘가 푸근하게 웃었다.
“대(大)남궁(南宮)이잖아. 창천의 푸름을 이렇게 나도 믿고 있는데 소검주는 당연히 믿어야지.”
그런 조휘의 위로에 축 처져 있던 남궁장호의 어깨가 조금은 펴졌다.
그는 왠지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아 고개를 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사가 모두 마무리되면 다시 오겠다.”
“어. 믿어.”
가볍게 툭 하고 뱉는 듯한 조휘의 어조였으나, 그것은 남궁장호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갔다.
아! 이런 것이 바로 수하의 기쁨이란 건가?
그렇게 남궁장호가 상기된 얼굴로 집무실을 빠져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일룡과 취선개가 도착했다.
장일룡이 눈짓하자 취선개가 굳은 얼굴로 조휘의 맡은편 자리에 앉았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휘의 정중한 태도.
무림맹과 진정한 동맹으로 맺어진 이상 맹의 거두인 취선개를 더 이상 허투루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하시오.”
취선개 역시 조휘를 세력의 종주이자 검신의 적전제자로 인정한 듯 진중하게 예를 다하고 있었다.
“개방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이 뭉친 곳이라 하나, 그들이 세운 뜻만큼은 협의과 기개로 가득하다는 것을 온 천하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전과는 결이 다른 조휘의 태도에 취선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회한 서린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다음 이어질 조휘의 말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휘가 이내 품 안에서 서류를 빼어 들었다.
“이건 취선개의 삶을 모두 기록해 놓은 정보입니다. 야접에게 꽤 비싸게 사들인 정보죠.”
“…….”
“여기에 적혀 있는 취선개의 삶은 과연 그 별호에 선(仙)이 들어갈 만한 인생이었습니다. 행적 하나하나가 모두 올곧은 협의와 정의였죠. 저는 그 유명한 야접이 한 사람의 인생을 가공(加工)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조휘의 두 눈이 더욱 진중한 빛을 발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개방의 방주를 구금하고 있는 패자(覇者)로서가 아니라, 강호의 후배로서의 진심 어린 물음이었다.
조휘는 개방의 방주라는 고결한 자가 어찌하여 비공일맥의 개가 되길 자처했는지 그 동기가 너무도 궁금했던 것.
설마 물욕은 아니겠지?
개방의 거지(乞)들은 굶주림과 떠돌이의 삶 속에서 궁극의 진리를 구하는 자들.
어떤 측면에서는 도인과 비슷하다 할 수 있는 그들이, 한낱 재물에 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정보를 다루는 그들의 특성상, 만약 재물을 모으려 작정했다면 천하에서 가장 부자 집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개방이었다.
한데, 취선개의 대답은 조휘로서도 뜻밖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소.”
“예? 여인이요?”
“겨우내 홀로 외롭게 버티다 봄꽃처럼 다가온 그녀를 오랜 세월 사무치도록 그리워했었소. 하루라도 술에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조휘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별호에 왜 취할 취(醉) 자가 새겨져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술로 그리워하다 그녀를 다시 만났소. 그리고 그녀는 내 뜨거운 진심에 마침내 화답을 해 주었소. 그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소.”
명석한 조휘의 두뇌는 그 후로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가볍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 고작 미인계(美人計)에 당하신 거라고요?”
“……그대는 아직 연심을 모르는군.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연모하는 사람의 감정이란 그리 간단치 않소이다.”
취선개는 이내 두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다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내 영혼은 그녀에게 귀속되어 있었소. 결국 그렇게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암상들의 대회합(大會合) 자리에 나서고 말았지. 그 후로는…….”
차마 말을 잇기가 힘든 듯 그는 이내 굳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조휘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한참이나 기다려 주었다.
취조의 기본은 상대의 마음을 해체하는 것.
그가 격정적인 감정의 동요를 보인 이상,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협조할 것이 분명했다.
조휘의 그런 예상은 과연 적중했다.
“어쨌든 당신이 이 취선개로 살며 비공일맥에 잠입을 시도할 것이라면 한시라도 서둘러야 될 거요. 만약 그녀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니까.”
조휘가 의문을 드러냈다.
“왜죠?”
“그녀는…… 나와 동침하며 내 몸에 은밀히 고독(蠱毒)을 심었소.”
“하?”
와, 진짜 개 같은 년일세?
미인계야 상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래도 영혼 바쳐 자신을 사랑해 준 사내에게 고독을?
“물론 개방의 방주라는 위치의 암상(暗商)은 그들에게도 희소성이 남다른지라 함부로 죽이진 않을 것이오. 하나 변절이 확인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필시 내 몸속의 고독을 터뜨릴 것이 분명하오.”
그제야 조휘는 그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 고고한 취선개가 자신의 제자까지 암상으로 엮었다는 것이 가장 이상한 일이었는데, 그 미친년이 그의 몸속에 고독을 심어 협박했다면 말이 달라지는 것이다.
조휘가 침중한 기색으로 생각에 잠기다 문득 눈을 빛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녀를 죽여도 되겠습니까?”
그냥 두면 그 명이 다할 때까지 강호무림을 어지럽힐 여인이었다.
조휘는 반드시 그녀를 징치하고 싶었다.
한데 의외로 취선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디 고통 없이 죽여 주시오.”
그의 각오는 대단했다.
영혼을 바쳐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녀를 얼마나 저주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
“좋습니다. 내일부터 제가 선배님의 모든 것을 취할 것입니다. 모쪼록 잠을 많이 자 두시지요.”
“그리하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취선개를 조휘가 다시금 불러 세웠다.
“참, 그 여인의 이름이 뭐죠?”
“춘선이라는 밀명(密名)을 지닌 여인이오. 실제 이름이나 성은 아는 바가 없소.”
그 암호명이 춘선(春煽)이라…….
직역을 해 보니 ‘봄의 꼬드김’.
그야말로 노골적인 암호명에, 순간 조휘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평생 술에 취할 만하십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춘선이라는 암호명을 듣는 순간, 그는 얼마나 자괴감과 수치심에 몸을 떨었을까?
그 엿 같은 심정이 어느 정도일지 조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독(蠱毒)은 제가 지금 바로 없애 드리겠습니다.”
조휘가 의념을 일으켜 그의 체내를 탐색하려 하자 취선개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불가(不可)! 고독이 사라지면 그녀가 곧바로 감지할 수 있소! 이를 상부에 보고할 것이 분명한데 허면 당신의 잠입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오!”
“음…….”
조휘가 한 차례 신음을 흘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제거 해 드리도록 하죠.”
“고맙소…….”
그렇게 취선개가 자신의 처소에 돌아가자, 조휘가 금방 강력한 의념을 너르게 펼쳐 조가대상회 총단 전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흐릿한 미소를 머금던 그가 홀연히 사라졌다.
스팟!
빨래를 널고 있던 한설현(?)이 갑자기 눈앞에 조휘가 나타나자 황망한 얼굴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조휘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린다.
“야, 아직 포기를 못 했냐?”
“가가? 갑자기 웬 황망한 말씀이세요?”
“개수작 그만 부리고 한 소저 얼굴 풀어라.”
“가, 가가께서 이렇게 예의를 모르시는 분일 줄은 정말 모, 몰랐네요.”
순간, 조휘의 두 눈이 기이한 이채를 발하더니 광대무변한 의념, 그 무한한 힘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의념의 기운에 한설현(?)이 기겁을 하며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 아이씨! 알았어! 알겠다고!”
입술을 삐죽이며 본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천변혈후 백화린.
하지만 사실은 저게 본래의 얼굴인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는 조휘.
“너 때문에 내가 의념을 항시 구동하고 산다. 빙령(氷靈)을 몸에 두르기 전에는 어림도 없으니 이제 한 소저 행세는 포기하시지?”
“싯팔 알았다니까! 겁나 짜증나!”
갑자기 조휘가 진중한 얼굴이 되었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할래?”
“일? 무슨 일?”
토라졌던 것도 잠시, 금방 커다란 눈알을 반짝이고 있는 백화린.
“불쌍한 한 사내를 구제하는 일이지.”
“싯팔, 내 인생이 가장 불쌍한데 누가 누굴 구해?”
“그다지 불쌍해 보이진 않는데?”
백화린이 뾰족한 음성을 내질렀다.
“당신이 내 구질구질했던 과거를 알아?”
“구구절절 과거 없는 사람이 누가 있냐? 어쨌든 나랑 같이 일을 할 거야 말 거야?”
“무슨 일인데? 들어나 볼게.”
조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지하상계.”
“에에엑?”
사파를 자처하는 강호인들에게는 불문율처럼 지켜야만 하는 몸가짐이 있었다.
바로 지하상계와 은원을 맺지 말라는 것!
지하상계의 암상들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설마 지하상계에 같이 잠입하자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
“미친! 안 해! 절대 못 해!”
백화린은 마치 소금이라도 뿌릴 기세인 양 미친 듯이 고개를 도리질하고 있었다.
“사례라면 넉넉하게 하지.”
“야! 내가 돈 따위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해?”
미친년.
천변혈후에게 홀려 가산을 탕진한 사내들을 줄로 세우면 이 너른 포양호를 빙 두를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늘.
“그럼 원하는 게 뭔데?”
백화린이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조휘를 가리켰다.
“너?”
“쓰읍! 안 돼.”
조휘가 그렇게 한 차례 눈을 부라리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대신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남자를 소개시켜 주지.”
“지, 진짜?”
“그래. 아마 개안(開眼)을 경험할 거다. 지금까지 그 사내보다 잘생긴 사내를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야?”
“그냥 끝이야. 잘생김의 끝. 천상의 미남자라고 할까? 게다가 숫총각이지.”
“헉……!”
숫총각이라는 말에 결국 백화린은 눈이 돌아 버렸다.
“내가 연기해야 될 년이 누군데?”
“춘선(春煽).”
백화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별호 한번 좆같은 년이네?”
* * *
천마신교(天魔神敎).
신녀궁(神女宮).
신녀는 만마 위에 군림하는 마신상(魔神像)의 전면에서 지극한 종복의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능라의를 걸치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얇디얇아 결국은 속살이 다 비춰 드러난 모습이었다.
오히려 나신보다 더욱 뇌쇄적인 모습.
그런 신녀의 주위로 수많은 신녀궁의 여종(女從)들이 둘러싸 쉴 새 없이 주문을 외고 있었다.
오늘은 다름 아닌 월음의 마력이 가득 차올라 광명신의 신언(神言)이 강림하는 날.
신의 오롯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선택받은 신녀뿐이니, 그녀를 경배하며 축원하는 것은 신녀궁의 여종들에게는 당연히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경이(驚異)였다.
한데, 그런 위대한 신녀가 오늘은 조금 달랐다.
늘 경건한 표정으로 엄숙히 신언의 강림을 기다렸던 평소와는 달리, 그 표정에 지극한 당혹과 두려움이 쉼 없이 교차되고 있었다.
신녀궁의 여종들로서도 그런 신녀의 동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신녀의 강건하고 흔들림 없는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들이었기에, 일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을 뒤로하고 마침내 신녀가 고운 눈을 번쩍 떴다.
곧 그녀가 여종들의 우두머리인 이소여(李小麗)를 엄숙히 불렀다.
“너는 비록 신언을 받들 자질이 없어 신녀에 이를 수는 없겠으나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느니. 오늘부로 너는 본 녀의 자리를 잇거라. 네 너를 마후(魔后)에 봉할 것이다.”
이소여는 지극히 당혹한 얼굴을 했다.
“가, 감히 이 미천한 종복이 어찌 신녀님의 고귀한 책무를 이을 수 있겠나이까!”
신녀가 오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너는 미천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은 너만 한 아이조차 없으니.”
“신녀이시여! 외람되오나 갑자기 그런 명을 내리시는 연유를 알 수 있겠나이까?”
그 순간 엄혹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신녀.
“오늘 본 녀의 성화(聖火)는 승천한다. 이 미천한 종복의 혼을 광명께서 거둬 가시겠다는구나.”
“예?”
“신녀님!”
신교의 교도들에게 있어서 성화의 승천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
당연히 여종들의 동요는 엄청났다.
신녀의 죽음이라니!
그것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교의 교주인 천마 바로 아래의 권력과 위세를 지닌 존재가 바로 신녀이며, 교도들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천마와 대등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존재!
그야말로 신교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 순간, 신녀궁 전체가 엄청난 마기로 휩싸였다.
신녀궁의 회랑을 천천히 걸어오는 마의 노인.
그야말로 숨조차 쉴 수 없는 거대한 마기의 폭풍 그 자체였다.
그런 산악(山岳)의 무게만큼이나 강렬한 마기의 압박감에, 그의 발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여종들의 심장도 함께 거칠게 요동친다.
저벅저벅.
그는 신교의 제례를 담당하는 대제사장이요, 사실상 지금까지 천마의 위계를 대리해 온 혁련강.
정파의 팔무좌와 비견되는 사파의 사패황이며, 그들 중에서도 천하제일인 자하검성 단천양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마인으로 여겨지는 존재.
그가 바로 현 천마신교를 사실상 이끄는 절대마인 암천마(暗天魔)였다.
신녀궁의 여종들은 믿을 수 없었다.
신녀는 신교의 교도들에게 있어서 신성(神聖)이다.
한데 그런 신녀가 현신해 있는 신녀궁을 방문하면서 저런 악랄하고 가공한 마기를 일으키다니!
한데 놀랍게도 신녀궁을 방문한 자들은 그가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상의 부교주라 할 수 있는 마령주(魔令主)와 육대주교(六代主敎), 팔마좌사(八魔左士) 등 그야말로 신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존성들이 모두 신녀궁에 들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지독한 마기와 살기를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그제야 신녀는 암천마 혁련강이 신교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해야만 했다.
누구보다도 천마신교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 내자고 주창해 온 그 온건한 명존좌사마저 저들 무리에 끼어 있으니 그녀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끝끝내 그대들은 성화(聖火)를 부정하고 그 삿되고 더러운 욕망을 앞세울 생각이었나요?”
신녀의 질문에 암천마 혁련강이 무료한 얼굴로 대답했다.
“성화의 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
혁련강이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수많은 존성들을 시선으로 훑으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우리 위대한 신교가 한낱 여인의 세 치 혀에 놀아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여기 모인 존성들의 뜻이다.”
그런 그의 대답에 신녀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설마 그대는 이 신녀궁을……!”
혁련강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본 좌는 오늘부로 신녀궁을 신교에서 도려낼 것이다.”
“아아……!”
신녀는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애초에 이소여로 하여금 자신의 뜻과 책무를 잇게 하려는 의지조차 의미 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던 것.
지금 저 무도한 사내는 신녀궁 자체를 멸살하려는 것이었다.
“당신은 진정 광명(光明)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 건가요?”
혁련강이 이죽거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천하에 뻗어 있던 교도들을 가두어, 이 신강을 지옥으로 만든 네년이 감히 지금 분노를 운운하는가?”
“그것은 천마님의 뜻……!”
“하! 천마(天魔)?”
혁련강이 음침한 눈을 빛내며 성대를 긁는 듯한 거친 음성을 토해 냈다.
“마령주, 그대가 말해 보라.”
그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마령주가 극도의 살기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자는 흑천련을 쫓아내고 강서성을 차지한 조가대상회라는 상회의 우두머리이오. 최근 그들은 개파대전을 열어 세력을 천명했으며 또한 무림맹과 동맹을 선언했소.”
혁련강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다시 신녀에게 쏘아졌다.
“그놈은 무려 검신의 적전제자라는군. 그 별호 역시 소검신(小劒神). 그 잘난 신언이 깃든 입으로 다시 말해 보라. 그는 천마인가?”
검신은 그 옛날 암흑마교를 단신으로 무너뜨린 자다.
그런 암흑마교와 뿌리를 같이하는 신교였기에, 그야말로 검신은 마(魔)의 종주를 자처하는 신교에게 있어서 생사대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런 검신의 적전제자인 소검신은 신교 최대의 숙적이라 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 모두가 광명성화(光明聖火)의 뜻이에요.”
“뭐라?”
혁련강은 그 눈빛만으로 신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옛날 수없는 존성들을 주살한 검신의 후예를 천마로 모시는 것이 광명성화의 뜻이다? 신녀가 아니라 미친년이었군. 모두 보아라!”
혁련강이 신녀궁에 모인 존성들에게 거칠게 소리치고 있었다.
“저 요설(妖舌)이 본 신교를 수백 년간 유린해 온 신성이라는 이름의 실체다! 과연 저것이 만마 위에 군림하시는 마신의 광명이란 말인가!”
고오오오-
그의 전신에 서려 있던 마기가 폭풍과도 같은 기세를 일으켜 온 신녀궁을 덮쳐 가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본 신교를 농락해 온 이 간악한 계집들의 혼을 모두 불사를 것이다!”
신녀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대들에게 저주가 내려질 것이니.”
이내 허망한 동공으로 신녀궁의 천장을 응시하며 작게 읊조리는 신녀.
“신언의 언로(言路)를 닫아 버린 종들이여…… 결국 그대들의 영혼은 만마의 불꽃으로 억겁토록 불타리라…….”
이내 흉포한 마기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자.
그녀의 육체가 혈풍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허망하게 비산했다.
이어 신녀궁에 간살(姦殺)의 축제가 벌어진다.
마신을 경배해 온 신교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신녀(神女)가 살해된 날.
끼아아악!
여종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아득한 어둠이 밀려와 천마신교의 성채에 짙게 드리워졌다.
* * *
사천회(邪天會) 총단(總團).
집무실의 창밖으로 후원을 바라보고 있는 사황(邪皇)의 귓가로 은밀한 전음성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의 귓가로 날아든 전음성은 다름 아닌 사천회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밀사검주(密邪劒主)의 음성.
그를 보는 것은 일 년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폐관 수련에 미쳐 사는 순수한 무공광인 밀사검주였기에 사황의 두 눈이 가벼운 이채로 감돌았다.
“들어오라.”
사황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밀사검주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호오…….”
사황의 흥미가 더욱 확장된다.
마치 한 자루의 검과 같았던 그의 기도.
한데 이제 그 검마저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검(劒)에서만큼은 사도제일이라는 밀사검주가 이제는 사도를 넘어 천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검에 관한 그의 열정과 집착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
불과 이립을 갓 넘어선 나이로 화경의 끝에 다다른 그의 검공이란 사도 역사상 거의 전무했던 일이었다.
그런 그가 그 흔한 인사치례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 놓는다.
“출도를 허(許)해 주십시오.”
“출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사황.
“네놈은 본 회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는 있느냐?”
그 인생에 검밖에 없는 놈이다.
알 턱이 없는 것이다.
“후…… 언제 폐관을 마쳤느냐?”
“사흘 전입니다.”
아이구 머리야!
그대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마는 사황.
도대체 얼마나 검에 미쳐야 일 년 중에 삼백 일 이상을 폐관에 매진할 수 있단 말인가.
“흑천련이 강서에서 패퇴했다. 황당하게도 그 자리를 한 상인 놈이 꿰찼지. 한데 그놈이 놀랍게도…….”
“들었습니다. 검신의 적전제자라는 것을.”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는 밀사검주의 두 눈.
“그럼 네놈이 출도하고 싶다는 이유가?”
“예.”
지극히 진중한 태도였으나 그의 두 눈 속에 담겨 있는 지극히 광기 어린 열정에 사황은 그대로 질려 버렸다.
“빌어먹을 놈. 강서를 잃은 흑천련 때문에 사파 세력 전체가 쪼그라들고 있거늘! 그런 절체절명의 와중에 또 검을 향한 네놈의 이기심만 좇겠단 말이냐?”
사황이 눈을 부릅뜨며 시선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 멀리 사천회의 정문으로 허름한 차림의 무인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자 봐라! 본 회가 쌓아 놓은 모든 재물을 풀어 낭인들을 규합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북의 무림맹은 더욱 강성해지고 있단 말이다! 네놈은 도대체가……!”
“보내 주십시오.”
제 할 말만 끝내고 이내 다물어 버린 입.
결국 사황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싯팔 새끼.”
평생 산중에 처박혀 검만 익힐 놈이라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데려와 사천회에 입회시킨 것은 다름 아닌 자신.
자신의 눈이 썩었었다.
자유로운 강호를 겪는다면 조금은 그의 지독함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사황.
“그 별호에 신(神)을 새긴 놈이다. 절대란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럼 그가 대무에서 자하검성과 동수(同手)를 이룬 것도 알고 있느냐?”
“예?”
두 눈을 껌뻑이며 놀라고 있는 밀사검주.
정사(正邪)를 떠나 천하제일검으로 칭송받는 단천양을 소싯적부터 흠모해 온 밀사검주였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나이라는 소검신이, 그 천하의 고절한 매화검수와 동수를 이뤘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 와중에도 지독히 흥분하고 있는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자니, 사황은 비로소 해탈해 버렸다.
“그래 이 빌어먹을 놈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대지경,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이 사황조차 그놈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거늘 고작 네놈의 미약한 검(劒)이 통하기나 하겠느냐?”
격정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다 그대로 엎어지는 밀사검주.
“출도를 허해 주십시오!”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 어차피 요식 행위 아니냐! 허락하지 않으면 담벼락이라도 넘을 놈이 무슨 얼어 죽을!”
사천회의 밀사검주.
조휘를 지독하게 괴롭힐 그 이름은 바로 강비우(姜飛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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