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61
60 章>
이제 만금상단주라는 위장 외견을 버렸으니 구연천(具蓮天)의 하루는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도착한 밀지들을 훑어보기도 귀찮다는 듯 탁자의 한구석에 모두 던져 둔 그가 무료한 얼굴로 차(茶)를 호로록거렸다.
“흐음.”
차 맛도 가벼워진 일상도 모두 나쁘지 않았다.
만금상단주라는 위장은 애초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추장스러운 외견.
마음 같아선 한적한 시골해서 조용히 차기 비공(秘公)을 가르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실망스러웠단 말이지.’
두각을 나타내던 몇몇 아이들 중에서도 군계일학 같은 아이가 있었다.
여소강(呂小江).
몰락한 여가 집안의 후손인 그는 자신의 가문에 지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엄청난 지략과 심계로 정평이 나 있는 소검신을 상대하면서 대놓고 여가장이라는 본인의 소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부터가 문제.
‘아이는 아이일 뿐이란 건가.’
강호에 내보내자마자 아버지의 장원을 복원하려는 소년의 마음. 그것은 전형적인 치기에 불과했다.
더욱이 소검신의 입심에 단숨에 휘말려 모든 협상을 포기하고 쪼르르 달려와 자신을 동요시킨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만금상단주라는 비공의 외견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
물론 소검신이 비공일맥의 음어를 알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서도 뜻밖이었으나 여소강의 대처가 미흡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소검신은 초대 비공과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엮여 있는 자.
하지만 초대 비공의 유지를 이은 자 같지는 않았다.
단순히 초대 비공이 남긴 글귀 따위를 어디서 읽은 정도에 불과할 터.
허나 비공일맥의 음어를 알고 있는 자가 평범한 촌부였다면 큰일이라 할 수 없겠으나, 가공할 심계와 지략으로 정평이 난 소검신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그가 무슨 방식으로든 비공일맥의 음어를 활용할 것은 자명했다.
그것은 지하상계의 권위를 해치는 일.
비공일맥의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합리귀(合悧鬼)입니다.
구연천이 복잡한 심경을 다잡으며 자신의 신색을 바로 했다.
“들라.”
어쩌면 황제처럼 거만한 모습.
자신이 암중으로 중원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당대의 비공(秘公)이기에 자연스럽게 몸에 밴 권위이리라.
조심스럽게 비공의 집무실에 들어온 합리귀가 그대로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직접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말하라.”
합리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비공과 시선을 맞췄다.
“춘선이 돌아왔습니다.”
“춘선이?”
춘선의 성정은 누구보다도 구연천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결코 되돌아올 위인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쉽게 취선개를 움직였단 말이냐?”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방이 야접을 도모한다는 것은 무림맹과 오래도록 척을 진다는 의미.
당연히 취선개가 강력하게 반발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거늘 이렇게 빨리 그를 설득하다니?
‘혈고(血蠱) 때문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혈고로 그를 구속하고 있다고 해도, 십만 방도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면 그는 초개처럼 스스로 목숨을 내던질 위인이었다.
그런 의문으로 가득한 구연천의 시선이 다시 합리귀에게 향했다.
“그 취선개도 함께 왔단 말인가?”
“더 있습니다.”
“음?”
취선개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또 누굴?
“야접의 주인, 홍예도 함께 와 있습니다.”
“뭐, 뭐라?”
이번만큼은 도저히 동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린 구연천.
개방을 움직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야접을 포섭했다고?
“그 홍예가 본 비공에게 귀의(歸依)한다고?”
도도하기로 이를 데 없는 여인.
천하의 야접은 비공일맥으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한껏 궁금증이 치민 구연천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이라! 어서!”
“존명.”
그렇게 반각 정도가 지나자 합리귀가 춘선 일행을 데려왔다.
과연 틀림없는 취선개가 춘선과 함께 들어서고 있었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 나이와 외모를 단 한 번도 강호에 드러낸 바 없는, 그야말로 신비롭기 그지없는 여인.
구연천이 취선개 쪽은 쳐다보지도 으며 불처럼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홍예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일야만략화접(一夜萬略花蝶) 홍예란 말이오?”
단 하룻밤 만에 만 번의 지략을 드러내는 나비.
그 별호의 뜻만 살펴봐도 홍예의 명성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강호 동도들의 과람한 칭찬을 받고 있더군요. 감히 비공의 이름에 비할 바가 못 되니 그 말씀은 거두어 가세요.”
구연천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분명 내용은 겸양하며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으나 그 말투가 너무 교묘했다.
하대도 공대도 아닌 묘한 느낌을 주는 어투.
구연천이 이내 실소를 머금었다.
“과연 야접. 대단한 여인이군.”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몸을 숙이는 홍예.
흡족한 얼굴로 그녀의 예를 받던 구연천이 이내 의문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춘선을 응시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춘선이 취선개를 바라보았다.
“낭군께서 야접을 설득하셨나이다.”
“설득……?”
취선개가 이토록 빨리 야접을 설득했다고?
무엇보다 개방과 야접은 무림으로 치면 무림맹과 천마신교에 비할 수 있는 대립 관계이지 않은가?
당연히 구연천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타오르는 시선이 다시 홍예에게 향한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명백한 의심이었다.
“본 비공일맥은 지장혈고(地樟血蠱)라는 것을 번식시키고 있소. 고독(蠱毒)의 일종이지.”
“…….”
점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는 구연천.
“보통은 수컷을 심소. 이놈은 한번 맺어진 암컷의 냄새를 결코 잊지 않지.”
이윽고 구연천은 그 얼굴에 귀기(鬼氣)를 가득 드러내더니 품에서 옥병 하나를 꺼냈다.
이내 거칠게 옥병을 흔드는 구연천.
“끄으으윽!”
거품을 내뿜을 정도로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며 주저앉는 춘선!
“보시다시피 암컷이 느끼는 고통은 수컷에게도 그대로 이어지오. 거기에…….”
뽁-
구연천이 옥병의 마개를 열고 그 손가락에 진기를 일으키자, 춘선이 기겁을 하며 그를 향해 오체투지했다.
“비공이시여! 제발 이 미천한 종복을 사, 살려 주시옵소서!”
구연천이 내력을 거두며 희미하게 웃는다.
“암컷이 죽으면 수컷도 스스로 자진하지. 평생을 지니고 있던 혈독(血毒)을 남김없이 내뿜으면서 말이오. 한낱 곤충의 의리도 이토록 지극한데 인간들은 어찌 그리 서로를 속고 속이고 산단 말이오?”
당혹스럽게 굳어 있는 홍예에게로 그가 마지막 물음을 했다.
“당신은 어찌 생각하시오? 이런 곤충의 의리를 당신도 사람이라면 배워야 하지 않겠소?”
홍예는 약간은 창백해진 얼굴로 긴장하고 있었지만 준비해 온 대답을 천천히 읊어 가기 시작했다.
“배워야죠. 그러나 곤충에게는 곤충의 길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아요.”
이내 흥미를 드러내는 구연천.
“……사람의 길?”
홍예가 고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시선은 엎드려 오체투지하고 있는 춘선에게 향해 있었다.
“저건 솔직히 노예잖아요? 당신은 정말 저 모습으로 만족이 되시나요?”
“음…….”
“저 역시 인본(人本)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죽음이라는 지고의 형벌로 맺어진 의리란 너무 서글퍼지네요. 그걸 과연 사람들 간의 의리라 말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구연천의 고개가 침중하게 끄덕여졌다.
“인정하겠소. 솔직히 재미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
이를 지켜보던 취선개, 아니 조휘가 내심 이를 뿌드득 갈았다.
사람의 의지를 고독으로 제어하면서 ‘재미’란다. 미친 새끼.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의 길을 말해 보시오. 그것이 도대체 뭐란 말이오?”
순간 홍예의 얼굴이 더욱 화사해졌다.
그야말로 눈부신 미소였다.
“이 홍예. 당신의 처가 되겠어요.”
“뭐, 뭐라?”
지극히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구연천.
“인륜지대사. 이렇게 사람의 방식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데, 굳이 곤충 따위에 기댈 필요가 있겠어요?”
자신과 혼사를 치르겠다고?
구연천은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홍예가 누군가?
천하의 정보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그 유명한 야접의 주인이요, 지닌 재지(才智)가 하늘에 닿았다는 일야만략화접이다.
그녀의 외모와 나이, 활동 무대, 무공 수위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불투명했으며, 그런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인연을 쌓기 위해 몸부림치는 강호인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강호의 일대 재녀가 먼저 자신을 향해 혼사의 뜻을 내비쳤다?
당연히 구연천으로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홍예의 위아래를 훑는다.
그의 끈적한 시선에 내심 구역질이 치밀 것만 같았지만 홍예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인가요?”
“연모하는 감정에서 출발한 혼사가 아니라면 정략(政略)이라는 건데…… 사실 그대가 얻을 것은 그다지 없지 않소?”
홍예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를 바보로 보는 건 아니겠죠? 전 당신과 혼인하는 순간부터 비공일맥의 모든 역량을 당신에게 요구할 것이에요. 우리 야접이 지하상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죠.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수뇌들이 당신의 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겠죠?”
“당신의 말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소.”
“무엇이죠?”
“신뢰.”
점점 냉혹한 빛으로 물들어 가는 구연천의 두 눈.
“과연 그대와의 혼사란 것이, 지장혈고를 대체할 만큼의 신뢰를 이 비공(秘公)에게 선사할 수 있는가?”
홍예가 싱긋 웃는다.
이어진 그녀의 대답이 너무도 뜻밖이라 구연천은 일순 멍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낳겠어요. 최대한 빨리.”
“허?”
정략혼인에 있어서 자손을 낳는다는 것은 약속의 종착점이요, 신뢰의 상징이다.
“그대는 본 좌에게 이미 두 명의 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게 어떤 문제가 되나요?”
태연자약하게 되묻는 홍예를 구연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당돌하다.
구연천은 그녀가 천하제일 정보 조직 야접을 이끌 만한 여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과연 대단해.”
구연천이 기이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홍예를 끈질기게 응시하고 있었다.
“혹시 그대는 이 구연천이 오래도록 후사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알고?”
홍예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번졌다.
“파악한 지 오래되진 않았어요.”
“허!”
그의 본처와 후처 모두 수태를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이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구연천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일로, 그가 여소강에게 집착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야접을 취하게 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게 후사를 약속한다라…….”
구연천이 호기롭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좋아! 나 역시 약속하지. 후사를 이어 준다면, 게다가 만약 사내아이라면!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내어 주리다.”
“기대하겠어요.”
이윽고 수개월이 지나자.
홍예의 배가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구연천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 * *
“와, 진짜 효과 좋네? 그거 대량 생산할 방법은 없는 거야?”
이 와중에도 장사치의 장삿속을 드러내는 취선개, 아니 조휘가 그렇게 깐족거리자 홍예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독(毒)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런데 이걸 바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신은 알아요?”
홍예는 임신을 가장하기 위해 천변혈후 백화린의 묘약(?)을 건네받았다.
원래는 백화린이 가슴을 키우는 용도로 쓰던 독.
“다 청구할 거야.”
탐탁지 않은 얼굴로 연신 입술을 삐죽거리는 백화린의 머리를 조휘가 흐뭇한 표정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흐흐, 당연히 보상해 드려야지.”
조휘가 비공일맥에 잠입하기 위해 천변혈후 백화린을 데려온 것은 최고의 판단이었다.
혼사라는 묘안을 꺼낸 것도 그녀였고, 비공 구연천을 속일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독이 없었더라면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일!
“상황은 좀 어때?”
“완전히 믿기 시작한 것 같아요. 본 녀의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호오!”
구연천이 야접의 정보를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슬슬 조휘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뜻.
“하기야 저렇게 점점 배가 불러 오는데 안 믿을 수가 있나? 흐흐.”
홍예의 몸은 누가 봐도 수태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오랫동안 자식을 보지 못한 한(恨)으로 가득한 구연천으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너무 들뜨지 마세요. 보는 눈이 많으니 표정 관리를 잘해야 될 거예요.”
진중한 홍예의 표정에 조휘도 장난기를 지우고 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구연천의 장원.
놀랍게도 그의 또 다른 위장 직책은 감숙성주 지대인(智大人).
관부의 무사와 관원들로 온통 득실거리고 있는 이곳 지부장원은 가히 용담호혈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안 잤어? 정말 같이 안 잔 거야?”
백화린의 질문에 홍예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잤다고 했죠?”
“아니 왜 그랬는데? 왜 자진해서 의심거리를 만들어 줘? 난 그게 너무 찝찝해.”
“만취해서 모를 거예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니까?”
암흑귀랑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리 대취한들 여인과의 동침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내란 있을 수 없소이다.”
조휘가 실소를 머금었다.
“처음에야 의심을 가졌겠지만 이렇게 배가 점점 불러 오는데 지가 어쩔 거야? 너무 쫄지는 말자고. 그나저나…….”
홍예를 바라보는 조휘의 시선이 한껏 진중해져 있었다.
“그놈에게 역정보를 흘려줘.”
“역정보요?”
“이제 슬슬 사들여야지.”
“뭘요?”
조휘의 얼굴에 점차 음흉한 미소가 번져 갔다.
“만금상단.”
“네? 마, 만금상단을?”
암흑귀랑은 섣불리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비공일맥이 만금상단을 정리 중이긴 하나 곧바로 다른 외견으로 되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의 예측이 아니었소?”
“어 맞지.”
이내 미간을 찌푸리는 암흑귀랑.
“당연히 비공일맥이 만금상단을 다른 자들에게 매각할 리가 없지 않소?”
“부부 사이가 좋은 게 뭐야?”
“그, 그게 무슨 말이요?”
씨익 웃는 조휘.
“새로운 상단을 드러내 만금상단의 계열상들을 거둬들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아? 신생 상단의 이름으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
홍예도 동의를 보탰다.
“그렇죠. 관부라면 어떻게 요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민심(民心)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신생 상단은 결코 만금상단이라는 엄청난 명성을 대리할 수 없었다.
기존의 거래처들과 성도의 백성들이 뜬금없이 나타난 새로운 상단을 신뢰하기란 매우 요원한 일.
아마도 비공일맥이 만금상단의 수습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는 그런 고민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야접의 이름으로 만금상단의 모든 계열상들을 취한다면?”
“아!”
“물론 야접이 상회는 아니야. 하지만 그 명성만큼은 결코 만금상단 못지않지. 기존 거래처들에게 충분히 신뢰를 주는 이름이 될 수 있지.”
문득 조휘가 씨익 웃었다.
“게다가 이제 당신은 비공의 사랑스러운 처잖아? 오히려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셈일 텐데.”
“하…….”
이제 홍예는 놀라기보단 눈앞의 조휘가 진실로 무섭게 느껴졌다.
보나 마나 그는 그렇게 야접이 취한 만금상단의 수많은 계열상들을 조가대상회의 휘하로 편입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를 설득해 보겠어요. 한데 그에게 흘릴 역정보는 무엇이죠?”
“그건 차차 말해 주지. 일찍 떠벌여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한데 그때, 조휘의 감각권에 기이한 파장이 감지되었다.
“음?”
소스라치게 놀라는 조휘.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마교?’
틀림없었다.
천마성에 잠입했을 때 무수히 많은 신도들에게 느낄 수 있었던 마화(魔火)의 기운!
하지만 그 강대함의 결이 다르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마신공(魔神功)에 거의 필적하는 기운이었기에 그가 이토록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마화의 기운을 드러내며 장원을 방문한 자는 단 한 명에 불과했으나 그 존재감만큼은 가히 팔무좌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당신들은 나오지 마.”
갑자기 조휘가 긴장하는 얼굴로 안가를 나가려고 하자 암흑귀랑이 한껏 의문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조휘의 침중한 얼굴이 서쪽으로 향했다.
“이 장원에 마교가 온 것 같다.”
“마, 마교?”
수백 년 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들이 비공일맥을 찾아왔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지 않은가?
“설마 그들이……!”
“쉿. 그대로 있어.”
순간, 조휘의 신형이 유령처럼 미끄러져 안가 밖을 향했다.
은밀히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는 조휘.
아직도 강대한 마화의 기운이 장원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절대경의 고수라고 해도 보통은 이렇게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감이 대단한 자라는 뜻.
그렇게 감각으로 상대를 한 번 훑는 것만으로도 조휘는 상대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마교도들의 신실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조휘였다.
그들이 진정 자신을 천마로 믿고 있다면, 신강(新疆) 밖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
그 순간, 장원의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신형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마기를 뿌리는 자를 에워싸며 진득한 살기를 발하는 흑의인들!
마인, 암천마(暗天魔)는 장원의 중심에 우두커니 서서 호기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지극한 환대에 감사드리오!”
우르르릉!
그 강력한 일갈에 내심 조휘는 소름이 돋았다.
내공만큼은 거의 자신에 필적, 아니 그 이상!
암천마의 얼굴을 살핀 조휘가 그제야 그를 알아보았다.
저자에게 넉넉한 품의 제례복을 입히고, 복잡한 문양의 도식을 그 얼굴에 그리면!
마교의 제단에서 보았던 대제사장이 확실했다.
설마하니 그의 무공이 팔무좌에 필적하다니!
당시에는 몰랐으나 지금 그가 보여 주고 있는 무위는 결코 자하검성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팔무좌의 최상위권 고수는 아직 조휘로서도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으음.”
어느덧 장원의 중심에 나타난 구연천이 뒷짐을 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천하에 그토록 발이 무겁다는 암천마께서 본 장원을 방문해 주시다니 이거 영광이외다.”
암천마가 희미하게 웃다가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본 교는 중원을 도모할 것이오.”
구연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부디 그 뜻을 이루시길 바라겠소!”
“본 교가 그대의 협력 따위를 바라진 않겠소. 물론 그대가 맹(盟)의 편에 서겠다면 그 역시 말리지 않겠소. 단……!”
그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이내 엄청난 살기를 드러내는 암천마.
“명심하시오. 본교는 사상 최강이오.”
“하하하!”
한 차례 호쾌하게 웃던 구연천이 그 미소를 지워 내며 진득한 눈빛을 발했다.
“그대가 교도들이 마음으로부터 인정한 당대의 천마(天魔)인가?”
“…….”
“그대는 결코 천마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 별호에 잡스러운 암(暗) 따위를 붙이고서야 겨우 천마 흉내나 내는 것이 그대 아닌가?”
순간 질식할 것만 같은 광대무변한 마기가 사방으로 드리우기 시작했다.
“본 좌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을 텐데.”
그렇게 엄청난 살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던 암천마 혁련강이 갑자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쥐새끼가 있었군.”
‘걸렸다고?’
무혼을 이토록 철저하게 갈무리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고?
그건 자신, 아니 자타공인 천하제일인이라는 자하검성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절대경의 고수가 무서운 것은, 작정하고 무혼을 감춘다면 무인 특유의 강대한 기세를 모두 감출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자연경에 이른 삼신(三神)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암천마는 명백한 절대경의 고수가 아닌가?
조휘가 그런 의문으로 얼룩진 얼굴로 굳어 있을 때, 희미한 발소리 하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경쾌한 발걸음 소리.
마치 산보하듯 가볍게 장내에 나타난 사내는 놀랍게도 일전에 조가대상회에 나타난 천호대장군의 부장(副將) 단리웅(段理雄)이었다.
사방에 넘실거리는 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헤치며 장내에 나타난 그를 암천마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쥐새끼 수준이 아니라는 건가?”
뭐라는 거야 저 등신은?
그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를 지금 느끼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단리웅이 나타나자마자 구연천이 그대로 그를 향해 부복했다.
“존(尊)……!”
단리웅은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손을 휘휘 저으며 예를 물렸다.
이어 예의 무심한 얼굴로 암천마를 느긋하게 응시하는 단리웅.
“자신은 있는 건가?”
그 대단한 비공(秘公)이 무릎을 꿇으며 극진한 예를 보이는 상대였기에 암천마도 그제야 단리웅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지하상계의 숨은 권력가인가?”
“…….”
상대가 대답이 없자 진득한 마기로 일렁거리는 암천마의 눈빛이 더욱 음침하게 빛났다.
“허나 본 좌는 신교(神敎)를 대표하는 존성. 적어도 하대(下待)를 하려면 본인의 위계부터 밝혀야 함이 옳지 않겠소?”
“다시 묻지.”
너무도 무심한 단리웅의 표정.
“자신은 있냐고 물었다.”
“뭐 이런 자가!”
단리웅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암천마의 강렬한 마기가 또다시 흩어진다.
이내 강렬한 의문으로 굳어져 버린 암천마.
상대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가 자신의 뒤편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곧 좌(座)에 이를 내게 감히 그 알량한 마(魔)를 뽐낼 셈인가?”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을 수도 없었던 암천마는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다시 묻겠다. 자신은 있는가?”
처절한 패배감과 치욕스러움에 입을 악다물고 있는 암천마.
잇새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핏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그가 짓씹듯 입을 열었다.
“반드시 이 중원을 신교의 발아래에 조아리게 하겠소.”
단리웅이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목표를 정정해 주었다.
“그대가 가장 먼저 목표로 삼아야할 곳은 강남이다.”
“강남(江南)?”
마교의 생사대적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은 그 세력권이 강북(江北)에 있었다.
한데 사파의 권역인 강남을 먼저 치라니?
전통적으로 중원의 사파는 마교가 발호할 때면 표면적으로야 중립을 천명하나 기실 암암리에 힘을 보태 주는 편이었다.
“강남은……!”
“괴이한 상단 하나가 중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지.”
단리웅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 진의를 파악한 암천마.
“조가대상회?”
자신이 신녀를 참살하는 무리수를 뒀던 것은 모두가 조가대상회의 그 가짜 천마 때문이었다.
끝까지 신녀를 지지하던 신교의 존성들을 대거 솎아 낸 마당이라 내심 쓰린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던 터.
그렇지 않아도 반드시 징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곳이 바로 조가대상회였다.
하지만 암천마는 정체도 불분명한 자에게 압도된 상황에 곧바로 희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 대가는 무엇이오?”
“대가?”
순간, 단리웅에게서 엄청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츠츠츠츠츠-
어찌하여 인간의 몸에서 광채가 흘러나올 수 있단 말인가?
원시천존의 선광(仙光)!
천존여래의 불광(佛光)!
이런 현상은 도교나 불가에서 신화처럼 여겨지는 신(神)들의 신위가 아닌가?
그것은 무슨 거창한 살기나 압도적인 기운 따위가 아니었다.
피륙을 지닌 인간으로서 결코 내뿜을 수 없는 종류의 힘!
그야말로 신좌의 여섯 제자, 육존신(六尊神)의 진정한 신위가 마침내 강호에 드러난 것이다.
그런 엄청난 광휘로 인해 암천마는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대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가(代價)가 아니라 청(請)이다.”
부르르르르-
온몸이 떨려 오는 암천마.
평생토록 신도들의 우러름을 받으며 살아온 암천마였지만 이제는 분노나 패배감조차도 일지 않았다.
이건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상대는 종(種) 자체가 달랐다.
인간은 결코 저러한 신위를 내보일 수 없을 테니까.
그 순간.
예의 무심한 단리웅의 시선이 정확히 조휘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냐.”
그렇게 조휘가 긴장감으로 몸서리치고 있을 때, 천우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네놈의 역량으로 저자를 막는 것은 불가! 이 천우자가 현신할 것이다!
이윽고 단리웅이 조휘가 숨어 있던 처마 밑으로 손을 뻗자.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환운신신행(環雲申申行)!”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희뿌연 수증기가 이내 구름처럼 화하더니 그대로 천우자의 온몸을 감싸며 허공으로 솟구친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단리웅의 표정.
“아무런 매질(媒質)도 없이 법력을 구사한다라.”
이 너른 중원의 도사들 중에서 그러한 신위를 보인 자들은 단 한 부류밖에 없었다.
“천선(天仙)?”
단리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을 끝까지 귀찮게 했던 천선문은 이미 오래전에 멸문당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자신은 그런 천선문의 멸문을 빠짐없이 지켜본 당사자가 아닌가?
무심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단리웅.
새그물처럼 엉켜 있는 구름이 상대를 감싸고 있어 그 본질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러한 경지의 환변술(幻變術)은 그 옛날 천선문의 제자들 중에서도 구사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놀랍군. 그 천선문이 아직도 이 중원에 암약하고 있을 줄이야.”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중원을 운영해 온 방식을 모두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청열진진멸옥(靑熱眞眞滅獄)!
천우자를 감싸고 있던 구름이 모두 불(火)이 되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법력이 모두 불의 기운으로 치환되어 그대로 단리웅에게 쏘아진 것이다.
단리웅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오른손을 뻗었다.
화르르르르!
화아아아악!
그렇게 불(火)과 빛(光)이 어우러졌다.
희미한 달빛만 드리워져 있던 차가운 밤하늘에 갑자기 태양과 같은 빛살이 일어난 것이다.
엄청난 충격파가 하늘 전체를 진동시킨다.
그야말로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
쿠쿠쿠쿠쿵!
암천마는 온통 찢겨 벌겋게 핏물이 배어 나오는 자신의 몸을 살피며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파의 위력이 얼마나 지극한지 자신의 피부를 모두 뒤집어 놓은 것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자들이…….’
비공일맥이 대단하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모두 옛 존성들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라 쉽게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허나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의 엄청난 신위를 직접 경험하고 나니 절로 속으로 천마(天魔)를 부르짖게 되었다.
‘천마이시여!’
전설의 천마가 나타나지 않고서야 그 누가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한데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시퍼런 불꽃을 온몸에 두른 그 모습이 마치 신화 속의 염제(炎帝)를 보는 것 같았다.
엄청난 광휘를 뿌려 대는 저 비공의 신인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는 위용!
그렇게 한 차례 서로의 힘을 가늠해 본 천우자와 단리웅이 손속을 거두고 허공에서 대치했다.
단리웅의 차가운 얼굴에 한껏 흥미가 돌았다.
법력의 매질은 보패와 보구.
허나 상대는 그 흔한 영옥(靈玉)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보통 보패 없이 구동한 법력은 그 위력이 반감되기 마련인데, 상대가 떨친 불의 힘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매질도 없이 불의 법력을 이만큼이나 다루다니. 마치 당시의 천선문주를 보는 것 같군.”
천우자는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휘영자(輝靈子)?”
“뭐, 뭐라?”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드러낸 단리웅.
휘영자는 존귀하신 신좌를 모시기 전, 속세에서 불리던 자신의 도명(道名)이었다.
수백 년이 흘러 이제는 아무도 모를 그 도명을 이자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신을 참칭한 자에게 선인(仙人)의 고고한 영혼을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도 그 명을 다하지 못하고 혼세일계를 떠돌고 있단 말인가?”
휘영자, 아니 이제는 육존신의 일좌인 휘영존신(輝靈尊神)으로 불리는 이는, 그 얼굴에 분노보다는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도명을 알고 있는 자라면 당시의 천선문주와 그의 제자들밖에 없다. 그대는 설마 당시의 천선문도인가?”
천우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화염의 고리만 허공에 드리울 뿐이었다.
“아니지. 그 어떤 보패 없이 이만한 법력을 구사하는 이라면 오직 천선문주밖에 없는 터. 당신은 천우자(天宇子)로군.”
상대가 비로소 확신한 듯한 기색을 내비치자 천우자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도(道)를 궁구하는 이가 어찌 아직도 신(神)의 환영에 얽매여 있는가?”
휘영존신의 얼굴이 엄숙해진다.
“그대는 신좌의 존체를 한 번이라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
이어 울려 퍼진 경건함 가득한 휘영존신의 목소리.
“그는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신성(神聖)일세.”
“미친 소리!”
“그는 친히 신좌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도 알려 주셨지.”
우우우우웅-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천지사방에 광명이 드리워진다.
휘영존신의 육체가 더욱 밝게 타오른 것이다.
“보아라. 이것이 그가 나눠 준 신력(神力)의 일부다. 네놈이 감히 그의 파편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에게서 발현되고 있는 광휘는 그야말로 강렬히 타오르는 태양 그 자체였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절대의 신성!
그렇게 엄청난 광압(光壓)이 천우자에게 드리워지자 놀랍게도 그의 영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현신(現身)의 영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
이를 지켜보던 조휘가 서둘러 외쳤다.
-이대로면 어르신은 죽습니다! 빨리 현신을 거두십시오!
결국 하는 수 없이 천우자는 현신을 거두고 영계로 돌아갔다.
다시 몸을 차지한 조휘는 전 의념을 동원하여 장막을 쳐 보았으나 상대의 광압을 채 반 초도 막지 못했다.
“크으으윽!”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에서 요동쳤다.
이대로 수 초만 더 지난다면 자신의 육체는 재가 되어 흩날릴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 순간.
조휘의 동공에 거짓말처럼 하나의 상(象)이 맺혔다.
온갖 점과 선, 도형으로 어지럽게 맺힌 그것.
얼마 전 삼신마저 전율하게 만들었던 조휘의 무해(無解)였다.
스르르르르-
무수한 점이 덧칠되어 선이 되고, 선은 수많은 도형으로 화했다.
순간 조휘는 마치 자신의 뇌, 그 모든 잠재력이 일거에 개방되는 듯한 극렬한 쾌감을 맛보았다.
무해(無解), 그리고 무해(武海)!
비로소 조휘의 철검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간에게는 관념이란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불이란 뜨겁고 물은 흐르며 공기는 떠도는, 인간은 그런 모든 사물의 본질을 경험과 학습, 이성을 통해 통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지금 조휘의 두 눈에 비친 세상이, 그런 모든 관념들이 산산이 무너지며 해체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수한 자연 현상들이 물리학적으로 재배열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 일그러지며 전혀 다른 차원의 무언가로 변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마치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그 느낌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것이었고, 조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조휘는 이내 무아(無我)의 상태가 되어 천천히 철검을 움직여 갔다.
그런 그의 검은 범인의 시선으로도 쉽게 좇을 수 있을 만큼 느릿했으나, 이를 상대하는 휘영존신은 그의 검에 담긴 이질적인 기운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그, 그건……!”
참(斬).
단순히 사선으로 그어지는 동작에 불과하다.
한데 휘영존신은 조휘의 그 일검을 ‘벤다’라고 인식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인식’과 ‘관념’을 붕괴시키며 들어오는 공격.
인식할 수 없으니 대응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서걱.
목 언저리부터 흉곽까지 기다랗게 혈선이 그어진다.
스르르륵-
팔을 포함한 상체의 절반이 사선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간다.
그럼에도 휘영존신은 작열하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만큼 조휘의 일검이 더욱 충격적인 것이다.
언제나 천신과 같았던 위엄을 보이던 그가 지극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시, 신좌(神座)?”
조휘의 무심한 두 눈이 철검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일검.
그것은 공(空)도, 멸(滅)도, 무해(無解)도 아니었다.
무슨 거창하고 초월적인 힘이라도 느꼈으면 이해나 하겠지만 그저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힘.
“이게 신좌라고?”
“무, 무무지경(無無之境)까지! 대체 당신은 누구……!”
“어?”
잠깐만 이건 뭐지?
내 몸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세상 만물의 모든 존재력(存在力)과 합일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럴 수가! 이건 육체(肉體)도 영체(靈體)도 아니다!)
-허허…… 전설적인 도경 속에서만 묘사되던 것을 실제로 목도하게 될 줄이야…….
자신은 차갑게 흩날리는 바람이자 동시에 창공 아래 흐드러지게 맺힌 달빛이었다.
팔을 내뻗으면 울창한 녹음, 생령의 기운이 치솟았고, 두 다리를 내디디면 강렬한 지기(地氣)가 함께했다.
하지만 이 모든 법칙을 내가 비틀어 버린다면?
순간 조휘의 머릿속에 대재앙이 그려졌다.
‘마, 말도 안 돼…….’
상상할 수도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해선 안 되는 가공할 광경.
이게 한낱 인간이 펼쳐 낼 수 있는 힘이라고?
무해(無解)를 넘어서자마자 목도한 자신의 세상은 그야말로 신계(神界).
조휘가 그런 기묘한 심정으로 황망해하고 있을 때 서서히 그의 몸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의복은 이미 재가 되어 모두 떨어져 나가 있었고, 취선개로 분한 얼굴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방금까지의 전능한 힘 역시 허망하리만치 점차 잦아들어 갔다.
“너는……!”
소검신(小劒神)!
휘영존신은 그다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조휘가 자신의 전능력(全能力)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그를 향해 팔을 뻗었기 때문이다.
꽈드득!
휘영존신의 몸이 순식간에 압착되더니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후드득 떨어졌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을 선인으로 살아온 자.
신좌와의 인연으로 반신(半神)의 경지에 이른 절대자의 죽음은 그토록 허망하고 참혹한 것이었다.
이어 조휘는 참을 수 없는 수마(睡魔)가 밀려왔다.
아니 그것은 졸음이라기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무력한 느낌이었다.
마치 내면의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린 느낌.
마침내 그의 몸이 점점 추락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의 주변 어딘가의 공간이 일그러지다 이내 눈부신 광채가 작열한다.
촤아아아아!
공간을 찢고 나타난 이는 휘영존신과는 정반대로 온몸에 암흑(暗黑)을 드리운 자.
정신을 잃은 조휘를 두 손으로 받아 든 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신비인은, 이내 머나먼 창공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허…….”
허망한 심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암천마.
그는 마치 신화(神話) 속의 한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무공?
그들이 펼쳐 보인 모든 것들은 무공 따위의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온몸이 지르밟힌 듯한 지독한 패배감.
그제야 암천마는, 신교의 과거 존성들이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천마를 기다려 왔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전설속의 천마(天魔)가 살아 돌아오시지 않는 이상, 저런 괴물들로 득실거리는 중원을 결코 온전히 지배할 수 없는 터.
설사 요행으로 중원을 정벌해 본들 저런 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판국에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암천마는 아직도 두려움에 벌벌 떨며 바닥에 오체투지하고 있는 당대의 비공을 향해 냉담한 음성을 토해 냈다.
“방금 전의 그 말. 듣지 않은 것으로 해 주시오.”
자신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을 텐데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 비공 구연천.
문득 암천마는 암중으로 중원을 움켜쥐고 있다는 저 비공일맥조차도 그저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광소가 치밀었다.
“하하하하! 과연! 과연 중원(中原)! 실로 대단하구나!”
수백 년 동안 억눌러 온 신교의 광기조차도 잦아들게 만들 만큼, 이 중원에는 저토록 위대한 절대자들이 즐비하단 말인가!
저벅저벅.
결국 암천마 혁련강은 다시 신강(新疆)을 향해 발걸음을 되돌려야만 했다.
천마가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진정한 천마가 되기 위하여.
* * *
똑. 똑.
바위로 짓누르는 듯한 지독한 두통과 함께 깨어난 조휘.
그런 그의 귓가로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
“으음…….”
몸서리가 처질 만큼 뜨거운 공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스름한 공간.
조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더욱 감각을 끌어올렸으나 바람 한 점 일렁이지 않았다.
이토록 공기의 순환이 정체된 곳이라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동굴?’
과연 조휘의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온 것은 기다란 종유석(鐘乳石).
조휘는 굳이 보지 않아도 이곳이 천장이 모두 종유석으로 뒤덮인 종유석굴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깨어났는가.”
순간 조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철검을 미간의 중심으로 치켜세웠다.
철검의 좌우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그의 두 눈이 이내 목소리가 들려온 전방을 향했다.
“누구지?”
“기력을 많이 소모하지 마라. 말을 많이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정체부터 밝혀라! 그리고 여긴 어디…… 흐윽!”
조휘는 순간적으로 어지러워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머리가 띵한 것이 전형적인 산소 결핍의 현상!
“천 장 깊이의 지저(地底)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견디기 힘든 곳이지.”
순간 조휘는 소름이 돋았다.
일천 장(一千丈)이라고?
여기가 미터법으로는 삼천 미터, 즉 삼 킬로미터 깊이의 동굴이라니!
츠츠츠츠츠츠-
결국 조휘가 검강을 일으켰다.
“뭐, 뭐야 저게?”
자신이 어렴풋이 본 것은 종유석 따위가 아니었다.
사방 천지에 가득한 석영(石英)들!
육각 형태의 거대한 석영들이 그야말로 빼곡하게 동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누워 있던 곳도 쓰러진 석영의 위였다.
지금 중원 문명의 기술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지저의 세계.
조휘가 이내 새하얀 검강 빛무리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드리웠다.
한데 놀랍게도 검강의 빛이 그에게 닿자마자 마치 흡수되듯 빨려 들어가 이내 다시 암흑천지가 되어 버렸다.
그런 기상천외한 광경에 조휘는 본능적으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의 기질이 인간의 그것이 아닌 것이다.
“내공도 기력의 일부. 질식해 죽고 싶은 것인가?”
“동료의 복수를 하러 온 건가?”
“복수라.”
의문의 사내에게서 들려온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 점의 희로애락도 느껴지지 않는 무의미한 목소리.
마치 인간의 감정 자체를 망각한 존재 같았다.
“왜 그래야만 하지?”
조휘가 묘한 얼굴을 했다.
“당신은 그놈과 엇비슷한 경지. 육존신이 아닌가?”
“육존신?”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한 상대의 어투.
“신좌의 제자들이 아닌가?”
“제자?”
그에게서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 비슷한 것이 드러났다.
가늘게 웃고 있는 그의 음성은 마치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믿고 있는 멍청한 놈이 있었단 말인가?”
“뭐?”
피식 자조 어린 웃음을 터뜨리던 그에게서 다시 예의 무심하고 어눌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그의 제자씩이나 되는 몸이었다면, 굳이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지저까지 네놈을 데려왔을까?”
“…….”
이런 무식한 곳까지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신좌의 감각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무려 지하 일천 장 깊이의 동굴이라니!
“그가 우리에게 행했던 것은 실험이다. 변수를 없앨 실험.”
“실험?”
“우리를 통해 모든 불확실한 변수를 제거하고 마침내 그는 오롯한 존재가 되었지.”
이어 고요하게 침묵하던 그가 이윽고 참을 수 없는 의문을 드러냈다.
“한데…… 넌 뭐지?”
어둠으로 온몸을 감싼 존재의 음성은 놀랍게도 떨리고 있었다.
“아직 불완전해 보였지만 네게서 느껴졌던 것은 분명 그의 절대적인 신력(神力)이었다. 모든 법칙과 관념을 망가뜨리며 짓쳐 오는 오롯한 신력! 말하라!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다다랐지?”
“그곳?”
“좌(座)말이다!”
글쎄…….
과연 그 정도가 신좌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걸까?
분명 그때를 생각해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전능감으로 가득하긴 했지만 그 정도가 무려 신좌의 힘이라고?
자신이 상상했던 신의 능력이라면 창조(創造), 시간역행(時間逆行), 차원이동(次元移動), 영원불멸(永遠不滅)과 같은 고차원적인 능력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발휘할 수 있었던 힘은 고작 법칙과 관념의 파괴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것도 일회성.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발휘할 수도 없는 힘이었다.
“글쎄, 그게 과연 신좌의 힘일까?”
“말해 다오. 좌에 이를 비밀을 알려 준다면 내 모든 것을 걸고 너의 염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전에 당신의 정체부터나 밝히라고.”
어둠 속에서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스스로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본인의 이름을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귀암자(鬼暗子).”
“귀암자? 당신도 선인이었나?”
“도(道)는 이미 모두 잊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 귀암자가 자조적으로 뇌까릴 그때.
천우자가 조휘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몸에 현신해 버렸다.
귀암자는 바뀐 조휘의 기질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뭐지? 존재력의 기질이 바뀌었다? 당신은 또 누군가?”
천우자의 두 눈에서 그득그득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부…….”
그대로 엎드리며 오열하는 천우자.
“사부님…… 으흑흑……!”
귀암자(鬼暗子).
하지만 그의 원래 도호는 귀암자가 아니라 독암자(獨巖子)였다.
도사들과 쉬이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홀로 독보하며 한없이 수양에만 힘쓰던 자.
그의 성정은 별호처럼 바위와 같이 굳세고 단단해서 섣불리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으나, 의외로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많았다.
그는 후학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나눠 주는 것에 결코 인색함이 없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철혈의 성정 내면에는 온유함과 자애로움으로 그득했던 것이다.
그는 한없이 도(道)를 궁구하는 전형적인 도인.
지극히 개인적인 성정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는 천선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인이 되었을 터였다.
그는 현선(玄仙)과 진선(眞仙)을 넘어 영선(永仙)에 다다른 유일무이한 도인이었다.
그런 그의 지극한 궁구함에 혹시라도 하늘이 화답해 준다면 천선문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大仙) 혹은 신의 경지라 일컬어지는 천선(天仙)에 다다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지선(支仙)에 불과했던 천우자는 그런 독암자를 지극히 존경하고 흠모했다.
천선문 내에는 쟁쟁한 도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독암자에게만 향해 있었다.
드높은 경지를 떠나 추구하는 길(道)이 같았던 것.
독암자는 천도경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반박하는 자였다.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늘 변하며 한 가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가르침.
하지만 독암자는 그런 무상(無常) 속에서도 물질이 아닌 영혼만큼은 그 형질과 계급이 본래부터 정해져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는 도가의 상식을 뒤집는 발언으로 천선문 내에서도 많은 도사들의 반발을 샀다.
사람 본연의 영과 혼을 갈고닦아 끝끝내 존귀한 존재로 탈각(脫殼:인간의 껍질을 버림)한다는 도가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완전히 위배되는 말이었기 때문.
게다가 그가 그 근거로 든 예조차 너무나 터무니없는 망상과 같은 것이었다.
참선 끝에 다다른 환상의 비경.
그는 그런 환상 속에서 절대적인 신격과 조우했다고 주장했다.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격(格)의 차이를 마주한 그는 끝도 없는 절망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 존재는 자신이 하늘의 화답을 받아 천선의 경지에 다다른다 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신격이었다.
그 후로 그는 종적을 감추고야 말았다.
누군가는 그를 더러 사악한 마음에 물들어 마선(魔仙)이 되었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천우자는 결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라!
온몸에 칠흑과 같은 귀기를 두른 그 모습이 영락없는 마선이었다.
허나 그런 귀기 속에서 바위처럼 단단했던 독암자 고유의 강고한 존재력이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눈물범벅 처연한 얼굴의 천우자가 이내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귀기를 응시했다.
“사부, 그때 사부가 보았던 비경 속의 존재가 혹 신좌였습니까?”
“넌…….”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우(宇)란 말이냐?”
천우자를 저런 짧은 별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 역시 단 한 명뿐.
“정말 사부님이시군요…….”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 사부의 얼굴조차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제발 법력을 거두시고 제 앞에 나타나 주십시오. 대관절 그 불길한 귀기는 다 무엇입니까? 사부님을 직접 뵙고 싶습니다.”
이내 암흑 속에서 허탈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암운(暗雲)은 내 의지로 거둘 수가 없느니.”
구사한 법력을 시전자가 거둘 수가 없다?
도가의 상식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그의 대답에 천우자가 이내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법력을 회수하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이건 법력이 아니다.”
법력이 아니라고?
천우자가 보기에 그의 주변에서 너울거리는 귀기는 분명 흑암의 법력이었다.
게다가 그 위력은 또 얼마나 강력한지 주위의 빛조차도 빨아들일 지경.
잠시 멍하게 굳어 있던 천우자의 얼굴이 곧 흙빛으로 변한다.
“설마 사부님께서는!”
이어 들려온 귀암자의 자조적인 목소리.
“철저한 실험이었다. 인간이 왜곡된 법리를 탐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우리를 통해 모든 결과를 도출했지. 그 인과로 나는…… 내 세계에서 양(陽)을 잃었다.”
양(陽)을 잃었다고?
아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삼라만상의 태극(太極)이란 그야말로 모든 존재에게 두루 미치는 법.
각자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닐진대, 어찌 한 사람에게만 자연의 법칙이 왜곡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러한 현상을 좌(座)들의 저주라 부르고 있지. 삿된 방법으로 좌에 오르려 한 자를 향한 신들의 미움.”
“말도 안 돼…….”
자신이 아는 법술의 체계와 이론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것보다 어찌하여 그자의 육신에 네 혼이 함께하는 것이냐? 설마 너는 마선이 된 것이냐? 이혼(移魂)의 법력을 구사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짓이다.”
법칙을 비틀어 왜곡하는 마선들의 사악한 법술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류가 바로 영혼을 다루는 법술이었다.
영혼을 다루는 마선들의 법술은 강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배교라는 악랄한 집단이 생겨나 천하가 몇 번이고 혼란에 휩싸였던 것.
“이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혼이 아니다?”
곧 천우자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영옥(靈玉)들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달마와 세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해야만 했다.
“그런 엄청난 법보가……!”
달마옥의 상상할 수도 없는 위력을 모두 전해 들은 귀암자는 실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발상부터가 너무도 사악하다.
인간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그들을 타락시키고, 그 무수히 타락한 영혼들을 법보(法寶)에 귀속시켜 강화한다?
게다가 그 사악한 법보를 만든 존재가 선종의 위대한 시조 달마라고?
더욱이 타락한 영혼들을 모두 법력으로 치환시켜 자신의 마지막 유희인 환생을 완성시켰다니!
“달마는 어떤 존재로 환생하였느냐? 그 환생자를 찾긴 찾았느냐?”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의심은 하고 있지요.”
“의심?”
천우자가 생각을 정리하다 서서히 두 눈을 반개했다.
“신좌.”
“뭐, 뭐라고?”
“평생토록 도를 궁구한 도인이 마침내 선도(仙道)에 이르러 몇 번이고 수명을 초월한다고 해도 감히 닿을 수 없는 경지가 대선(大仙)입니다. 허나 그런 대선조차 신좌에 비한다면 그 격이 한참 모자라지요.”
천우자가 이를 깨물며 씹어뱉듯 입술을 달싹였다.
“사부님께서는 한낱 인간이 단 일생(一生)으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동의한다는 듯 귀암자의 목소리가 더욱 진중해졌다.
“그것이 인간의 일생으로 가능한 업(業)이었더라면 이 우주에는 무량대수의 신들이 탄생했을 터. 그렇지. 불가능하지.”
천우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생의 겁(劫)마저 성공시킨 자가 과연 모든 인과의 안배를 자신의 다음 생에 펼치지 못하겠습니까? 그가 만약 미리 펼쳐 놓은 안배를 통해 이전 생의 지식을 자각했다면? 인간문명 최초의 선각자(先覺者)라는 달마는 충분히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과연……!”
한데 갑자기, 천우자의 안색이 어둡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이 하나 더 존재합니다.”
“가능성? 다른 환생자를 발견한 것이냐?”
“신좌가 환생자라는 것은 애초에 추측이요 가설(假說)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환생자가 존재하지요.”
환생자가 또 있다고?
세계의 법칙을 부순 자가 그토록 많단 말인가?
한데 그다음 이어진 천우자의 말은 귀암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자는 바로 이 육체의 주인입니다.”
“뭣이!”
너무나도 뜻밖의 말.
얼마나 놀랐는지 귀암자의 강력한 법력으로 인해 동굴 내부의 공간이 일부분 일그러질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는 그자를 달마의 세 제자들에 의해 안배된 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세 영옥이 합일된 것도 그 인과 때문이 아니었느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천우자.
“달마는 인간의 영혼을 법력으로 치환하는 방법만큼은 결코 세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오랜 수양과 실험을 통해 영옥을 탄생시켰으나 그들이 구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확률(確率)입니다. 영옥에 무수한 영혼이 쌓이면 확률적으로 환생자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말 그대로 확률, 가설일 뿐이지요.”
“허어…….”
“무엇보다 이놈의 성장 속도가 인과율을 벗어나 있습니다. 신좌가 남긴 모든 유물들을 그야말로 ‘보자마자’ 깨우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재해석하여 전혀 새로운 경지에 진입합니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가능한 수준의 성장 속도가 아닙니다.”
“으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세상의 본질을 보는 이놈의 눈(目)입니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 능력만으로도 신좌의 추종자들을 일거에 물러나게 만들었지요.”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던 귀암자가 서서히 의문을 드러냈다.
“허면 너는…… 아니 영계 속의 모든 존자들이…… 달마를 돕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로구나.”
“…….”
그렇게 진실로 무서운 말을 들으며 이를 지켜보던 조휘는 억울한 마음에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내가 달마는 개뿔이!
길거리에서 파는 그 흔한 달마도(達磨圖)도 한 점 사지 않는 자신더러 그 미친 달마라니!
그제야 조휘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영계의 다른 존자들과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소극적이었던 천우자의 태도가 모두 이해되었다.
저런 의심과 꿍꿍이를 마음에 숨겨 왔던 것이다!
“이제 사부님도 말씀해 주십시오.”
천우자는 가슴속에서 치밀던 의문을 끝끝내 참아 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신좌는 어떤 자입니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 성정은 어떠합니까? 진실로 인간의 모든 욕망을 초월한 신이 확실합니까?”
또다시 한 차례 긴 침묵을 유지하는 귀암자.
오랜 세월을 격하고 만난 제자는 무슨 일생토록 지켜 온 비밀을 내놓으라는 것마냥 요구하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자신은 말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의 형상을 말하는 거라면 그는 무엇으로도 화(化)할 수 있다. 흔한 나무가 될 수도 있고 발에 채는 돌이 될 수도 있지.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은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를 물(水)로 대했으니까.”
“예?”
“그것은 둔갑술(遁甲術)과 같은 법력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물 그 자체였다. 오롯한 영음으로 내게 말을 건네 왔지. 그에게 형상이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조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럼 지금 이 자리, 이 동굴의 뜨거운 공기가 신좌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물과 빛이다. 특히나 빛을 좋아하지. 그래서 그 휘영존신이 그토록 신좌를 따랐나 보군.”
또다시 천우자가 의문을 드러냈다.
“육존신이라 불리는 이들은 서로 아무런 교류가 없습니까?”
“나로서는 육존신이란 그 호칭부터가 처음이었다. 교류? 다른 실험체들은 만나 본 적이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좌의 의지를 함께 이은 자들 중 누구는 자신을 실험체라 부르고 누구는 제자라 몸을 낮춘다.
이는 신좌의 의중에 일관성이 없다는 뜻.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건 언제입니까? 아직도 사람들의 세상에 그 의지를 투사하고 있습니까?”
천우자로서는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 비공일맥이 신좌의 의지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단체일까?
과연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그런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한단 말인가?
“나는 그의 실패작이다. 언제든 나를 소멸시키려 들 터. 세상에 드러내고 다닐 입장이 아니라 그를 만난 적은 없다. 그리고…….”
귀암자가 지극한 의문을 드러낸다.
“그가 자신의 의지를 이 중원에 투사하고 있다니…… 지나친 억측이다. 그에게 인간의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에게 인간의 탐욕이 의미가 있을 것 같은가?”
“예? 그럼 신좌의 추종자들은……!”
이어 들려온 귀암자의 비릿한 음성.
“그의 능력을 나눠 받은 자들 중에서라면 말이 달라지겠지. 특히나 통천주(通天主), 그놈이 그럴 놈이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천우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통천주! 통천문 그 빌어먹을 마선들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자는 여섯 실험체 중 가장 욕망이 강한 자였다. 게다가 그 경지도 가장 뛰어나지. 우리들 중 좌(座)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자다.”
“허어……!”
“사실 이 내가 지저(地底)를 전전하는 것은 신좌 때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자 때문이다.”
“왜입니까?”
“그 역시 나를 소멸시키기 위해 혈안이기 때문이다.”
무림에 떨어진 현대인 9
BUKDU NEO ORIENTAL FANTASY STORY
청루연 신무협 장편소설
지은이ㆍ청루연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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