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63
62 章>
긴 침묵.
취선개로서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이토록 오래도록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아마 오늘이 처음일 것이다.
“가가…….”
춘선이 차마 견디지 못하고 취선개를 어렵게 불러 보았으나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이 냉막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가가라.”
“미,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 언제나 당신에게 진심이었어요.”
“한 가지만 묻겠소.”
취선개의 무심한 얼굴에 소름이 돋은 듯 춘선이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취선개의 두 눈이 활화산처럼 불탄다.
“왜 웃었소?”
“네?”
취선개가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어루만졌다.
“당신이 날 혼미약으로 전신을 마취한 후 내 두개골을 도려내 고독을 심은 그때 말이오.”
“그건……!”
“내가 미약하나마 정신을 회복했을 때, 그대는 내게 보여 줬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화사하게 웃고 있었소. 난 지금도 가끔 당신의 그 미소가 꿈에서 아른거리지. 식은땀에 흠뻑 젖어서 말이오.”
춘선이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시다시피 천령개를 절제하는 건 위, 위험한 의술이에요. 무사히 시술을 마쳤으니 아, 안도했겠죠.”
취선개가 피식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이제는 거짓말이 자유롭지 못하군.”
“거, 거짓이 아니에요.”
천령개를 어루만지던 취선개가 손을 회수하더니 천천히 깍지를 꼈다.
“안도? 맞아. 그 웃음은 안도의 웃음이었소. 하지만 다른 의미의 안도였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취선개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린다.
“비로소 임무를 완수했다는 기꺼움. 가슴이 떨려 오는 성취감. 그로 인해 상부에게 받을 막대한 보상. 그때 당신의 머릿속에선 그렇게 아름다운 미래를, 그런 장밋빛 삶의 궤적을 상상했겠지. 그야말로 인생사 모든 즐거움이 어우러진 안도의 웃음이었소.”
“아, 아니야!”
이내 피식 웃고 마는 취선개.
“깨어난 내게 당신이 건넨 첫마디가 뭔 줄 아시오? 아니 기억할 리가 없지.”
“무슨!”
“쏟아지는 피로 온통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내게 당신이 건넨 첫마디는 놀랍게도 ‘역겨운 새끼.’였소. 내 두개골을 열고 혈고를 심어 임무를 완성하기까지 나와의 모든 세월이 당신에게는 역겨웠던 게요. 그게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도 못생긴 놈이 피 칠갑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역겨웠을 수도 있었겠지.”
그제야 춘선은 어렴풋이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 약에 취해 흐릿한 동공을 하고 있었던 그가 저토록 또렷하게 당시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녀였다.
드르륵-
취선개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밧줄에 묶여 있던 춘선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잊었어? 본 녀에게는 당신의 혈고가 있……!”
또다시 피식 웃고 마는 취선개.
“아쉽게도 내 머릿속의 지장혈고는 소검신의 의념에 의해 깔끔하게 태워졌소. 절대경의 무공이란 참으로 대단하더군.”
“살려…… 끄르르르륵!”
무심한 얼굴로 춘선의 목덜미를 옥죄던 취선개가 마지막 음성을 토해 냈다.
“누굴 탓하겠소. 어리석었던 것은 내 자신이지.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다시는 마주치지 맙시다.”
그의 두 눈에는 어느덧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조휘는 조가대상회를 훌쩍 떠나 보았지만 허탈하게도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창 업무에 지쳐 있을 남궁장호나 장일룡을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
막상 허심탄회하게 화주라도 걸칠 친우 하나 없다는 것이 그를 허탈하게 만든 것이다.
남궁이나 당가, 혹은 맹에 가 볼까도 싶었지만 모두가 거래 관계로 묶여 있을 뿐 사실 친하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무림에서 잘못 살았나?’
그렇게 잠시 우울한 얼굴로 자조하던 조휘는 하는 수 없이 포양호 변의 아무 객잔이나 들러 목이나 축이기로 결정했다.
오호객잔(五胡客棧).
이곳은 조가대상회의 계열 객잔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휘는 주변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조화면천변으로 가볍게 외모를 바꾸고서 주렴을 걷고 들어섰다.
“어서 옵쇼!”
강호에서 소검신이라 불리는 자신이 현대도 아니고 이 무림에서도 혼술이라니!
반갑게 조휘를 맞이하던 점소이가 조휘의 음울한 표정을 살피고는 금세 눈초리를 빛냈다.
“독주(毒酒)로 준비할깝쇼?”
역시 어느 객잔을 가도 점소이들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이 녀석도 필시 점소이로 눈칫밥을 먹어 온 세월이 최소 오 년은 넘었을 것이리라.
“가장 독한 걸로.”
“취선로(醉仙露)로 올리겠습니다요!”
취선로라.
한번 들이마시기 시작하면 삼 일 밤낮은 정신을 못 차린다는 포양호의 명물 독주다.
그 명성을 들어 보긴 했지만 실제로 마셔 보는 것은 조휘로서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져와. 안주는 필요 없어.”
“예! 손님!”
점소이가 부리나케 사라지자 조휘는 창가의 가장자리로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영계의 존자들이 쉴 새 없이 서로 드잡이 질을 하고 있었기에 조휘는 애써 듣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으으…… 썩을 영감탱이들.”
한데, 이번에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조휘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런 젠장! 이런 판국이면 차라리 옛날이 훨씬 낫지 않았소?”
“옳은 소리요! 흑천련 놈들이 비록 패악질은 심했어도 이토록 장사꾼들을 옭아매진 않았소!”
“휴…… 말도 마시오. 이제 시전의 손님들은 조가대상회에서 나온 물건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소이다. 내 살다 살다 그처럼 잔인무도한 장사 수완은 처음이오! 대관절 환불이라니? 아니 물건을 도로 바꿔 주거나 철전으로 다시 돌려준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요? 상인이 무슨 호구도 아니고!”
환불(還拂).
물건에 이상이 있거나 변심 등의 이유로 교환을 해 주거나 현금으로 돌려주는 정책은 현대의 발전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조가대상회는 포양호 변으로 진출할 때 이 환불 정책을 들고 나왔다.
사실 처음 중원의 상계를 훑어봤을 때 현대인인 조휘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직 별다른 냉장 기술이 없는 상단의 식자재들은 며칠이면 상하기 일쑤였고, 상인들은 이를 알고도 그럴싸하게 탈취 처리만 하여 팔기에 급급했다.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이를 발견한 손님들은 항의할 생각도 하지 않고서 그저 재수가 없었거니 여기는 데 그치는 그런 안일한 태도도 문제였다.
아직 이 중원에는 기업의 양심이나 소비자의 권익과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결국 조휘가 환불 정책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처음으로 제안했을 때 조가대상회의 계열상주들은 극도로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수익이 수직 하강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휘는 옹골찬 신념으로 끝까지 환불 정책을 밀어붙였다.
처음에야 물론 수익이 급격히 줄어들겠지만 소비자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후일 엄청난 이문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현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객잔의 풍경.
조휘가 비릿하게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한 고기와 야채를 탈후향(脫朽香) 뿌려서 팔고, 녹슬고 이 나간 칼도 돼지기름 발라 슥슥 문질러서 팔고, 평범한 욕목(縟木)도 자단목으로 속여서 팔고…… 그게 처음부터 옳은 건 아니었지 않나? 그렇게 지금까지 양심을 저버리고 해 온 장사가 비정상적이었던 것은 탓하지 않고 왜 모든 탓을 조가대상회로 돌리는 거지? 그만하면 지금까지 많이 해 먹지 않았나?”
조휘의 그 말은 상인들의 성화에 기름을 부은 격.
“새파랗게 젊은 놈이 상도(商道)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놈! 감히 모가상단의 행수들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상인들의 처세술은 특별하다.
보통의 상인들은 상대의 차림이나 신색을 살핀 후 가려 가며 화를 내는 게 일반적인데, 그들은 조휘를 보자마자 삿대질부터 하고 있었다. 그만큼 분노로 이성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얄팍하게 사람을 가리며 장사를 해 온 그들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법.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나서야 그들의 안색은 점점 파리하게 변해 갔다.
화려한 비단옷과 이런저런 패물을 걸친 조휘의 외견으로 인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끝내 알아차린 것이다.
“어, 어느 집안의 공자이신지 모르겠으나 그 말은 너무 무례한 것이었소! 철회해 주시오!”
조휘가 피식거렸다.
“싫은데요?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조가대상회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뭘 철회하란 소리죠? 이상이 있는 물건을 바꿔 주는 건 외려 물건을 산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잖습니까?”
모가상단의 행수들이 뭐라고 말할 찰나.
이 모든 광경을 창가 모퉁이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던 귀공자가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조휘 못지않은 화려한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지체 높은 집안의 귀공자라는 것이 한눈에 느껴질 정도였다.
“상품으로써 가치를 잃은 물건을 다시 옳은 물건으로 바꿔 주는 건 실로 상인의 도리에 합당하다 할 수 있소만.”
이어 귀공자가 조휘를 바라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물건을 다시 은자로 바꿔 주는 것은 다른 문제이오. 필시 포양호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겠지. 가히 상도(商道)를 지극히 벗어난 정책이라 할 수 있겠소.”
뜨끔했는지 조휘는 애써 그를 바라보며 마주 웃고 있었다.
“그런 경쟁이 바로 시장을 살찌우는 법이죠.”
귀공자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물건을 산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며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으나 실상 조가대상회가 노리는 것은 포양호 상권의 장악이오. 신생 상단인 그들로서는 단숨에 포양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일진대 일시적인 손해를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소? 그 조가대상회의 회장, 소검신이라는 자는 실로 무섭고 대단한 자요.”
“…….”
일견 칭찬 같지만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그가 매섭게 자신의 속내를 후벼 파고 들어오자 조휘는 상대를 흥미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경쟁이란 것이 본래 그렇잖습니까? 상대가 교환, 환불이라는 정책을 들고 나오면 같은 정책을 펼치거나 혹은 다른 수로 발 빠르게 대응해야죠. 값을 경쟁하는 것만큼 당연한 시전(市廛)의 논리인데 조가대상회만 탓하는 건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죠.”
허나 조휘의 그런 논리적인 주장에도 창가의 귀공자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당신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소.”
“무슨 모순이?”
씨익 웃는 귀공자.
“저들은 거대한 규모의 조가대상회와는 달리 ‘일시적인 손해’를 감수할 만한 여력이 없소. 교환? 환불? 아마 달포는커녕 칠 주야도 버틸 수 없겠지. 그게 바로 상도의 부재(不在)요. 조가대상회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대상단(大商團)의 무자비한 폭력이외다.”
“…….”
논리 정연한 그의 반박에 조휘는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그의 논리가 마치 현대 대기업의 폭력적인 경영 방식을 비판하는 논조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거대 상단들이 지금까지 상도를 지켜 온 것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함이오. 그들이 만약 이문만 따지기로 작정을 했다면 진즉에 조가대상회처럼 행동했을 것이외다. 지금의 상계에서 조가대상회는 분명한 거악이오.”
그의 논리가 거기까지 다다르자 조휘는 실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거악(巨惡)이라고?
결코 아니다!
물론 그의 말처럼 포양호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부정할 순 없었으나, 자신의 마음속에는 소비자의 권익을 보장해 주기 위한 명백한 선의도 존재했다.
“하. 대상(大商)들에게 과연 그런 양심이 있었을까요?”
“상인치고 상도를 마음에 새지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소?”
조휘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리며 비릿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상인이 이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건지 당신은 모릅니다. 그들이 지킨 것은 상도가 아니라 기득권이겠죠. 비정상적인 물건을 속여서 파는 휘하 행수들의 행동을 눈감아 주기만 하면 막대한 이익이 계속 보장되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어느덧 점소이가 취선로를 탁자 위에 내려놓자 조휘가 그대로 호리병을 잔에 따르며 한 잔 들이켰다.
“크으. 당장 눈앞의 이문에 급급한 자들이 무슨 물건을 산 사람들의 권리? 상인의 양심? 그런 자들이 대상이라니 우습군. 그렇게 막 갖다 붙여도 되는 건가. 클 대(大)는 어디 다 죽어 버렸나.”
“가, 감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귀공자!
대상단을 향한 조휘의 거침없는 힐난에 결국 그는 평정을 잃고 만 것이다.
“헉! 저 패(牌)는!”
그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며 드러난 작은 옥패.
그런 옥패에 수려하게 음각된 글귀는 바로 ‘천화(天華)’였다.
모가상단의 행수들이 곧바로 벌떡 일어나더니 그를 향해 깊숙이 예를 표했다.
“천화상단을 뵙습니다!”
“천하제일 상단을 뵙습니다!”
천화상단(天華商團).
만금상단과 더불어 천하제일의 상단을 다투는 거대한 상단이었다.
국가 대 국가 간의 중계 무역을 담당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지닌 상단!
허나 비공일맥의 만금상단이 철저히 금력(金力)을 추구하는 상단이라면, 천화상단은 그 협의(俠義)로 명망이 높았다.
가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면 무료로 의원을 급파하는 등 들려오는 그들의 선행과 미담은 끝도 없을 지경.
‘천화상단이라고?’
조휘의 두 눈이 금방 이채로 물들었다.
더욱이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천화옥패를 지닌 자라면 그 대단한 천화상단 내에서도 그 위치가 상당한 자일 것이다.
“혹, 소천화 공자십니까?”
행수들의 물음에 나직이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으로 보아, 그가 그 유명한 소천화(小天華) 담희(譚熙)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천화상단주의 첫째 아들!
그 수완과 상재가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상계의 대표적인 기재였다.
담희는 여전히 진득한 눈빛으로 조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감히 이 담희의 앞에서 대상(大商)의 위선 운운했으니 그 말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거요.”
하지만 조휘는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결국 끝까지 부정하겠다는 심보네.”
이 광활한 중원 대륙에서 소천화의 위명은 결코 강호나 관부의 명숙들 못지않았다.
그런 자신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여전히 하대(下待).
이제는 노기보다 흥미가 치밀 지경이다.
이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화(天華)의 위세가 가득 담긴 담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호인인가?”
“하하, 강호(江湖)?”
여전히 피식거리고 있는 조휘.
굳이 내공으로 통제하지 않았기에 어느새 후끈 취기가 달아오른 조휘가 흐트러진 시야를 바로하고 술병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오, 과연 명불허전 취선로네. 몇 병 가져가야겠군.”
조휘가 다소 흐트러진 채 일어나더니 취선로가 담긴 술병을 들고 담희의 자리로 다가갔다.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합석하자 담희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술에 취해 대담해진 조휘가 담희에게 술병을 들이밀었다.
“한잔할래? 내가 오늘 친구가 없거든.”
“무례하오! 계속 그렇게 하대할 참이요? 내 이를 반드시……!”
“하, 개도 제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야. 강서는 왜 왔어?”
“이자가!”
“그냥 한잔하자는데 뭐 그리 말이 많아? 거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냥 친구 먹으면 되잖아?”
“강 호위!”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담희가 자신의 호위를 부르자.
객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의 호위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이내 조휘를 감싸는 호위 무사들!
호위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자가 담희에게 다가가 깊숙이 예를 표했다.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조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술 한잔하자는 건데 이게 칼잡이까지 부를 일이야?”
“카, 칼잡이?”
웬 검을 들 힘도 없어 보이는 놈이 옆구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도 우스울 지경인데, 그런 비루해 보이는 놈이 무사의 면전에다 대고 칼잡이 운운하자 강 호위도 눈이 돌아 버렸다.
“정말 할 거야?”
거칠게 검을 뽑으려던 강 호위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상대의 눈빛이 방금 전과는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왠지 저자의 앞에서 검을 뽑으면 곧바로 죽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헉……!”
헛바람 섞인 강 호위의 외침.
느끼지도 못했으나 어느새 두둥실 떠 있는 상대의 철검이 자신의 미간을 조준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토록 칼밥을 먹어 온 자의 노련한 감각이 결국 그를 살린 셈.
조휘는 여전히 퉁명한 표정으로 담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한잔하자니까?”
강렬한 예기를 뿌리며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한 자루의 철검.
그것은 명백한 이기어검(以氣馭劒)이었다.
더욱이 철검에 담긴 막강한 경력이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
강 호위는 그런 전설적인 검의 경지가 아무렇게나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자니 도무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이기어검이 삼재검도 아니고!
그런 지극한 놀라움은 강 호위와 함께 조휘를 둘러싼 호위들도 마찬가지.
“칼 내려놔. 그러다 당신들 진짜로 피똥 싼다?”
술에 취해 흐트러진 눈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런 조휘를 바라보는 호위들은 결코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스르륵-
결국은 조용히 검을 내리는 호위들.
그 모습에 조휘가 피식 웃으며 담희를 응시했다.
“이거 봐. 무인을 돈으로 부리면 이렇다니까? 주인의 명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무기부터 거두잖아?”
“…….”
소천화 담희는 말없이 묵묵하게 눈빛으로만 그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은자로는 결코 무인의 목숨을 살 수 없지. 천화(天華)라 해도 당신 역시 어쩔 수 없는 상인이야.”
이기어검은 의념에 그 기반을 두지 않으면 결코 시전할 수 없는 극상승의 무리.
그야말로 절대경의 상징과도 같은 검공이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검수로서 절대경을 이뤘다?
당금의 강호에 그와 같은 명성을 지닌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 소검신이오?”
“어.”
‘어.’라니!
중원의 대표적인 여덟 고수, 팔무좌라 불리는 자치고 그 언사가 실로 경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물며 전설적인 검신의 적전제자라기에 평소 그를 동경하는 마음이었거늘!
“소천화라 불리는 자가 손수 강서를 찾아왔다면 절대로 나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내 생각이 틀린 건가?”
“틀리지 않았소. 조가대상회를 방문하기 위해 온 것이 맞으니까.”
조휘가 피식 거렸다.
“거봐. 그래서 내가 진즉에 술 한잔하자고 했잖아.”
이를 지켜보던 강 호위의 놀람은 방금 전보다 더욱 지극했다.
사파 세력의 패자, 흑천련을 거의 홀로 부순 자!
저 경박해 보이는 사내가 현 정파 무림의 검수들이 침을 튀겨 가며 칭송해 마지않는 소검신이었다니!
그는 벌써부터 수많은 젊은 검수들로 하여금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자하검성과 더불어 천하제일을 다투는 그야말로 중원 최고의 검수였다.
더욱이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자하검성을 능가하는 검수가 될 것이 자명한 일.
지금 자신은 가까운 미래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강 호위가 정중하게 포권한다.
“천화상단의 호위단주 강해(姜海)라고 하오. 평소 소검신의 위명을 실로 흠모해 왔소이다.”
조휘가 히죽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거 그런 정중한 포권은 남궁 형한테 가서 하시고. 아마 엄청 좋아할 테니까.”
“나, 남궁 형?”
“곧 만나게 될 테니 걱정 마시고. 그런데 당신들은 다시 좀 나가 주면 안 될까. 여기 밥 먹는 사람도 많은데 불편해서 말이지.”
갑작스럽게 칼 찬 무인들이 객잔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왔으니 객잔 내부의 분위기는 실로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알겠소이다.”
그렇게 천화상단의 호위들이 질서정연하게 물러가자, 조휘가 흡족해진 얼굴로 다시 취선로가 담긴 병을 담희에게 내밀었다.
“이제 한잔할 수 있겠지?”
담희는 한 차례 눈살을 찌푸리더니 결국 잔을 받았다.
“알았다. 따라 봐.”
그의 하대에 조휘의 두 눈이 이채를 드러냈다.
소검신의 외견을 드러냈음에도 자신에게 하대로 맞대응을 해 온다는 것에서 조휘는 지독히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정을 읽을 수 있었다.
허나 그의 그런 점이 오히려 조휘는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손은 왜 떨어?”
덜덜덜.
“내, 내가 떨긴 무슨! 고, 고뿔에 걸렸을 뿐이다!”
“아닌데? 쫀 거 같은데?”
“헛소리!”
“괜히 센 척하는 거 아닌가?”
“갈!”
속내를 들킨 것이 짜증스러웠는지, 담희는 취선로가 가득 담긴 술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커흑!”
“나눠 마셨어야지. 이거 강서의 명물 독주 취선로야.”
아아, 소천화의 위명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풍류면 풍류, 지혜면 지혜, 덕이면 덕, 무공이면 무공!
섬서 일대에서 십전(十全)의 기재라 불리는 그였으나,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소제갈이라 불리는 제갈운 조차도 조휘 앞에만 서면 바보 천치가 되어 버리니 담희의 그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자 담희의 얼굴에도 금세 취기가 떠올랐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복잡다단하게 말해도 돼.”
진득하게 입술을 깨무는 담희.
이 소검신이란 놈의 화법이란 실로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상대의 속을 뒤집어 놓는 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다.
이어 담희가 품안에서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쳐보였다.
“산서 태원(太原), 산동 태안(泰安), 하북 영청(永淸), 강소 단양(丹陽), 하남 신밀(新密), 호북 황강(黃岡).”
“음?”
“이 모든 곳에 우리 천화상단의 분점(分店)을 내려고 한다.”
조휘가 그가 펼친 지도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곳들이 만금상단의 영역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의도가 명백했다.
“혼란을 틈타 만금상단의 상권을 모두 흡수하시겠다?”
“이미 알고 왔다. 만금상단의 몰락이 소검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호오?”
조휘로서도 내심 깜짝 놀랄 만큼 놀라운 대답이었다.
자신의 행적은 조가대상회 수뇌부조차도 대부분 몰랐을 정도로 은밀했다.
조화면천변을 활용해 지극히 은밀하게 움직였던 자신의 행적을 어찌 천화상단이 알고 있단 말인가?
‘설마 그 여자가?’
순간 조휘는 돈만 많이 준다면야 정사(正邪), 관민(官民)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팔아 대는 야접의 주인 홍예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본인의 오롯한 수완.
조휘는 상대가 지닌 정보의 출처를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모든 사실 관계, 전후 맥락으로 보아 만금상단이 무너진 것은 조가대상회 때문이란 것이 확실하다. 부정할 요량인가?”
조휘가 희미하게 웃었다.
“계속해 봐.”
담희도 마주 웃었다.
“원래 소검신의 성향이라면 만금상단의 상권을 강력하고 빠르게 수습하고, 다른 자들이 이를 견제하기도 전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겠지. 강서에서는 분명 그러했으니까.”
조휘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담희는 흑천련을 몰락시키자마자 빠르게 포양호의 상권을 수습하고 개파대전이라는 강력한 행사를 개최하여 모두의 시선을 돌려 버린 자신의 지난 행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추진력을 보였던 소검신이 왜 먹음직한 만금상단의 상권은 도모만 해 놓고 먹질 않을까? 이 소천화의 판단은 실로 간결했지.”
조휘가 실실 웃었다.
“설마 덩어리가 너무 커서 못 먹고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할 셈인가?”
“하하, 계속해 봐.”
조휘는 그의 말을 좀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만금(萬金)이 지녔던 세력권은 우리 천화(天華)와 마찬가지로 광대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맺고 있었던 황실과 관부, 군부의 인맥들 역시 실로 방대하다 할 수 있지. 당연히 만금상단의 협력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 세력권을 온전히 수습하기란 불가능하다. 만금상단과 얽혀 있는 거미줄처럼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모두 파악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겠지.”
조휘의 입장에서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담희가 늘어놓은 말들은 비공 구연천의 장부만 확보할 수 있다면 대부분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조휘가 쉬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들 뒤에 있는 ‘통천존신’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 밖의 비밀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희에게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
조휘가 더욱 흥미롭게 웃었다.
“그래서 같이 먹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담희.
“천화(天華)의 힘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우리 천화는 만금과 닿아 있던 황실과 관부, 장군부의 인사들을 모조리 꿰고 있다. 약간의 시일만 담보된다면 그들의 기존 거래 조건, 이해관계, 약점 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적의 적은 동지이지 않은가?”
조휘가 묘한 미소로 다시 되물었다.
“등가 교환이야말로 상인의 덕목이지. 내게 요구할 것은?”
“만금(萬金)의 절반.”
와 이 도둑놈의 새끼!
사마세가의 무원동에서 깨달음을 얻어 가며, 찝찝한 수염을 수도 없이 붙여 가며, 신좌의 제자라는 휘영존신과 결전을 벌여 오며!
그렇게 죽도록 개고생한 게 다 누군데 이제 와서 숟가락을 얹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방대한 만금 상단의 상권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응, 안 돼. 돌아가. 거절.”
“사 할!”
“이 할도 많아 이 새끼야.”
“이, 이 할?”
담희가 거칠게 미간을 찌푸린다.
“아직 조가대상회는 천하(天下)를 담지 못한다! 합비나 강서에서나 왕 노릇이지 당신의 역량이 과연 천하에 어울릴 것 같은가?”
“글쎄.”
“황실에 인맥이 있나? 황제의 친인척을 다루는 일은 지방의 장군부를 구워삶는 것과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 조가대상회가 과연 천하를 아우르는 상단이 될 수 있을 성싶은가?”
“될 것 같은데.”
“흥! 꿈에도 불가능한 소리! 조가대상회의 권역은 천축(天竺)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돌꿀(石蜜)도 하나 못 구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왔다!”
“그럼 너는 설탕…… 아니 돌꿀을 대량으로 구할 수 있단 말이야?”
담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핫하! 이제야 네가 본 천화를 우러르게 되겠군! 본 상단의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바로 돌꿀이다!”
“오! 우리 조가대상회에게 좀 팔아 주면 안 돼? 값은 얼마든지 쳐주지.”
“싫다.”
“이 새끼가?”
약이 바짝 오른 조휘가 그제야 좀 신중한 표정을 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 조가대상회는 성(省) 단위에서 노는 상단이다.
국가와 국가 간의 중계 무역을 할 정도의 역량을 지닌 천화상단에는 아직 한참을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런 천화의 경험적 자산은 실로 방대하고 대단할 터.
“거래에 좀 더 다른 걸 얹어 봐. 방금 전에 말한 천축과의 교역로를 우리에게도 터 주든지. 혹은 비단길을 한 자리 내어 주든지. 그 정도는 되어야 만금의 절반을 가져가지 않겠어?”
“뭐 천축 교역로? 비, 비단길?”
그것은 그야말로 중원의 모든 상단이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비원(悲願)이다.
그 엄청난 이권을 저리도 태평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중원의 상단으로서 비단길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업적인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알지.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을 수 있는 천고의 기회가 아니겠어? 중원의 황제뿐만 아니라 서역의 대왕(大王)과 귀족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중원 상인으로서는 꿈의 종착역이지.”
“그걸 알고도 그런 소리를?”
피식 웃고 마는 조휘.
“만금의 절반이란 그 정도 가치는 될 테니까. 그 무거운 소천화(小天華)의 엉덩이가 이 강서로 향할 정도로. 하지만 한 가지 정말 궁금한 것은 말이야…….”
“또 뭐가?”
조휘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난다.
“과연 그 대단한 소천화에게 이 소검신과 담판을 지을 정도의 결정권이 있을까 하는 거지. 사실 네게 그만한 역량이 없다면 이 술자리가 뭔 의미가 있겠어?”
“뭐, 뭐라고!”
자존심이 상한 듯 벌떡 일어나며 두 눈을 부라리고 있는 담희.
순간 그는 자신의 실책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천화로 살아오며 수없는 협상, 칼날 같은 담판을 지어 오며 산전수전 다 겪어 왔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도발에 이토록 화가 치밀다니.
도대체 왜지?
왜 저놈의 웃는 낯짝만 보면 화부터 치미는 거지?
분명 지금의 이 술자리가 자신의 태도와 결정에 따라 수십, 수백만 금이 왔다 갔다 하는 자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도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잖아? 저울 위에 눈금 한 점 움직일 수 없는 애송이 새끼와 아무리 술을 몇 순배 어울려 본들 나한테 무슨 수확이 있겠냐고.”
“이 새끼가!”
그렇게 조휘가 천화상단의 소천화로서 살아오며 평생을 지켜 온 담희의 자존감과 우월 의식을 몇 번이고 자극하자.
결국 소천화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좋다! 비단길은 몰라도 천축 교역로는 내주도록 하지!”
“호오? 소천화에게 그런 결정권이?”
“장난하느냐! 난 소천화다! 만금의 절반!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라!”
조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아아, 중원의 사내들을 다루기란 너무나 쉽고도 쉽다.
* * *
소검신과 제반 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조가대상회로 향하고 있는 담희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무거워 보였다.
화를 삭이고 나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대의 입심에 휘말린 듯하여 마음이 찜찜했던 것.
허나 말이란 게 어디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협상 과정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어 조금이라도 만회해야만 했다.
한데, 조가대상회의 정문에 도착하자 엄청난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물론 조가대상회와의 거래를 트기 위한 상인들로 붐비는 일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그 규모가 달랐다.
“뭐야? 뭔 일이라도 터진 거야?”
큰 사달이라도 났나 싶어 서둘러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 조휘.
그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다란 깃대에 새하얀 천을 꽂아 매단 마차 한 대였다.
“음?”
마차를 보자마자 조휘는 어디서 온 마차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사마세가?”
그런데 왜 이제야 왔지?
자신의 공작(?)에 의해 사마세가의 소가주 사마중(司馬中)이 백기를 달고 가문을 떠난 지는 벌써 수개월 전이었다.
서서히 조휘의 입가에 얄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평생을 천하제일가의 소가주로 살아온 무군(武君).
그런 고고한 자존심을 지녔을 그가 치욕적인 백기를 단 마차를 차마 벌건 대낮에 움직일 수 없었을 터.
필시 인적이 없는 밤에만 이동을 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백기의 이유라는 것도 무인답게 적과 싸우다 패배한 것이 아니라 조가대상회에 단지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무신의 가문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을 천생 무인인 그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터.
가문 원로들의 지고한 명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 그가 겪고 있을 굴욕감이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었기에, 조휘는 더욱 흥미로운 표정으로 마차에 다가가고 있었다.
“소, 소검신!”
“조휘 회장이다!”
그제야 조휘를 발견한 인파들이 하나같이 화들짝 놀라며 경외의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이제 조가대상회가 없는 삶은 강서인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
그들에게 소검신은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인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러 이 강서에서 소검신의 위명이란 가히 황제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어 조휘는 조가대상회의 무사들을 불러 정문 앞의 인파들을 해산시켰다.
지극히 손익만 따졌다면 인파들을 해산시키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사마세가가 손수 조가대상회에 찾아와 백기 투항하는 장면은 분명 좋은 그림이니까.
하지만 자꾸만 그렇게 무군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었기에 조휘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의 전면에 도착한 조휘는 묵묵히 무군이 내리길 기다렸다.
차 한 잔 마실 정도가 지나자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내려왔다.
다소 초췌해 보이는 안색이었으나 그가 지닌 본래의 외모가 워낙 출중한 탓인지 마치 그가 있는 자리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호오.’
소룡대연회로부터 지금까지의 강호행을 통해 조휘는 무수한 후기지수들을 만나 왔지만, 그중에서도 사마중의 외모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절세미남 한설백과 대등할 정도.
과연 천하제일가의 장자.
그 심성도 마치 고요한 호수와 같아 무인에게 좀처럼 붙지 않는 군(君)의 휘호를 그 일신에 새긴 자였다.
그런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항복의 의미인 새하얀 무명옷.
조휘는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굴욕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맹과 함께 뒤에서 조가대상회를 향해 음험한 공작을 부렸으니 당연한 결과다.
-끄응…….
-빌어먹을…….
사마 존자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영계의 구석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반면 조가의 선조들은 하나같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 실로 보기 좋은 풍경이로구나.
-허허, 날도 우중충한 것이 딱 구경하기 좋은 날씨다.
-백기 투항을 하는 놈이 왜 저리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단 말이냐?
-어서 무릎을 꿇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란 말이다!
조휘가 작게 한숨을 터뜨렸다.
이건 뭐 정말 BJ라도 된 기분이다.
저기 시청자님들 구독과 좋아요는 좀 박고 주절주절 떠드시든가.
“사마세가의 사마중(司馬中)이오.”
“조가대상회의 조휘(曹輝)입니다.”
한 차례 포권을 마친 후 진득하게 조휘를 바라보는 무군 사마중.
“나는 오늘, 조가대상회를 도모한 가문의 행동에 유감을 표시하러 왔소이다.”
말을 끝낸 그의 가늘게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내심 실소를 머금는 조휘.
그가 구사한 단어들이 조금 묘했다.
‘도모’가 아니라 ‘음해’ 혹은 ‘공작’이라 말했어야 했다.
백기를 들고 왔다면 당연히 ‘유감’이 아니라 ‘사죄’가 맞을 것이다.
그가 가문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저 한마디 문장을 얼마나 고민했을지 역력한 모습.
아마도 마차 안에서 저 말을 죽도록 연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휘는 굳이 그의 그런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별 유쾌한 상황은 아닐 테니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런 조휘의 배려에도 무군은 가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분명 가문의 의사를 전달했으니 이만 가 보겠소.”
“오랜 야행(夜行)에 휘하와 말들이 상당히 지쳤을 텐데 여독은 풀고 가시죠?”
사마중은 마치 속내를 들킨 사람마냥 흠칫거렸다.
이자가 수개월 동안의 야행을 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설마 그동안 미행이라도 해 왔단 말인가?
“야, 야행은 무슨. 그런 일 없소이다.”
조휘가 피식 웃으며 사마세가 마차를 몰고 있는 말들에게 다가갔다.
“말들의 동공이 탁하네요. 오랫동안 어둠 속을 거닐다 갑자기 햇빛을 보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죠.”
조휘는 상인이다.
게다가 운차(雲車) 시리즈를 판매하는 상인.
당연히 좋은 말의 구입은 조휘가 가장 신경 써서 해 온 것들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밀수에 활용되어 온 짐말은 조휘가 가장 꺼려하는 종류의 말.
한번 어둠에 적응한 짐말은 결국은 햇빛에 적응하지 못해 방향 감각을 잃고 사고를 일으켰다.
“어쨌든 돌아가겠소.”
조가대상회에 한시라도 있기 싫다는 듯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는 사마중의 귓가로 다시 조휘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흠. 겉으로는 개파대전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 놓고서 뒤로는 맹과 함께 협잡(挾雜)했다는 것이 강호에 드러나 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이, 이자가 감히!”
감히 천하제일가의 행사더러 협잡이라 말하다니!
허나 조휘는 여전히 익살스런 미소만 띨 뿐이었다.
“그러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며칠 푹 쉬고 가라니까. 또 무슨 뒤가 구린 일이라도 꾸미시나.”
묵고 가지 않는다면 사마세가가 벌였던 짓을 만천하에 까발리겠다는 명백한 협박!
“그 위세와 패기 한번 대담하군. 감히 맹과 천하제일가를 상대로 그런 협박을 일삼다니.”
“뭐 그렇게 들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잘 알아서 판단하시고.”
썩은 쌀이라도 씹은 것마냥 사마중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조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가대상회 내부로 들어가 버렸다.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천화 담희.
사마세가의 무군(武君)은 단 한 번도 강호에 그 무위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적어도 화산소룡 청운소와 동수(同手) 아니 분명 그 이상의 경지로 짐작되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다.
아무리 소검신이라지만 무신의 유지를 잇는 천하제일가의 소가주를 저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건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를 따르시지요.”
무군을 보좌하던 사마세가의 부총사가 조용히 다그치자 사마중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요. 단 하루만 묵겠소.”
무군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 하루라는 결심이 ‘평생’으로 이어질 것을.
그렇게 사마세가와 천화상단의 일행이 동시에 조가대상회로 입성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