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66
65 章>
푹 꺼진 두 눈.
핼쑥해진 얼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
영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얼굴로 힘없이 붓을 휘갈기고 있는 남궁장호는 그렇게 피폐해져 있었다.
현대나 중원이나 수학이 더러운 것은 매한가지!
“아니 이걸 못 맞혀? 정파 제일 후기지수라며? 개뿔이!”
남궁장호의 답안지를 살피며 연신 꼬장꼬장한 음성으로 일갈하는 조휘의 표정은 마치 신림동 사립 학원의 강사를 방불케 했다.
남궁장호 역시 명가의 후손이기에 기초적인 산법을 배우긴 했지만, 조휘의 산법이란 그야말로 다른 차원의 개념투성이!
“아, 아니 이게 중원의 산법이 맞긴 한 건가?”
“그래서? 포기할 거야?”
이를 뿌득 가는 남궁장호.
“제왕가(帝王家)의 검수에게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예의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조휘.
남궁장호를 조련(?)하기란 정말 너무 쉬웠다.
그때, 조휘의 집무실 문이 덜컥 열리며 장일룡이 들어왔다.
“형님! 제갈운 형님께서 돌아오셨수다!”
“호오, 정말?”
맹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그가 떠난 것은 거의 반년 전.
조휘는 그가 왠지 간단한 사안을 들고 온 것 같진 않았다.
“가자.”
“예 형님!”
조휘가 길을 나서다 남궁장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거 다 풀기 전에는 명상 수련 금지야. 갔다 와서 반드시 확인할 거니까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놈! 나를 어찌 보는 것이냐! 제왕가의 검수에게……!”
“어서 가자고.”
그렇게 조휘가 장일룡의 안내를 받아 조가대상회의 정문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화려한 봉황기(鳳凰旗)를 매단 마차가 이미 여러 대 도착해 있었는데, 그것은 제갈운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광경이었다.
놀랍게도 선두의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리고 있는 이는 무림맹을 통치하는 절대자, 무황이었다.
“음? 무황님?”
조휘는 금방 의구심이 일어났다.
무황의 행차라면 무림맹을 상징하는 맹기(盟旗)가 걸려 있어야 정상.
한데 맹기는커녕 맹의 호위무사들조차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무황에 이어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노년인은, 조휘로서도 처음 보는 인사였으나 단아한 학창의, 화려한 봉황금선, 특히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금빛 깃털로 인해 그의 위계를 단숨에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갈 가주? 아니 제갈명현은 중년이라고 들었는데?’
저 금빛 깃털은 틀림없는 제갈봉황가의 가주를 상징하는 장식.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최소 칠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
“설마…….”
조휘는 당대가 아니라면 전대의 가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박자……?”
만박자(萬博子) 제갈유운.
강호풍운록이라는 희대의 기서를 편찬해 강호를 일대 파란으로 몰아넣은 희대의 기인.
그의 붓질 한 번에 한 가문이 추락하기도 영웅이 탄생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강호 최고의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강호의 수많은 사내들을 덕질로 헐떡이게 만드는 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형인 조혁도 그들 중 하나.
순수한 명성의 높낮이로만 따진다면 팔무좌를 가볍게 능가하는 존재.
살아 있는 강호의 전설, 그 자체인 자였다.
그의 학문적 성취와 식견이란 황제조차도 조언을 구할 만큼 지고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제갈(諸葛) 그 자체인 자, 살아 있는 강호의 전설이었다.
당대의 제갈세가가 무림맹의 요직을 두루 맡으며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모두가 그가 뿌린 토양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무림의 신비라 할 수 있는 그가 강호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천하가 뒤집어질 판국인데 그 장소가 하필 조가대상회라니?
분명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어 제갈운이 그런 할아버지를 수행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자.
조휘가 섬전과도 같은 신법을 일으켜 그들의 전면에 다가갔다.
“무림 말학 조휘. 강호의 대선배님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한껏 정중하며 기품 있는 포권.
촤락!
만박자 제갈유운이 봉황금선을 고아하게 펼치며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검신이라…….”
아직 만박자는 소검신 조휘를 강호풍운록의 인명편에 등재하지 않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만박자의 시선이란 마치 폐부까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시리도록 투명했다.
저런 건 무공 따위의 기도가 아니었다.
이자는 현자(賢者)다.
장난스럽게 운운하던 그 현자타임의 현자가 아니라 진정한 현자.
그렇게 조휘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담담히 받으며 천천히 예를 풀었다.
조휘의 시선이 제갈운을 향해 드리워졌다.
“제갈 부회장님. 이게 다 무슨 일이죠? 무황님과 만박자께서 행차하신다면 미리 전서구를 통해 알려…….”
“내가 막았네.”
대답은 무황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맹은 장악되었네.”
조휘의 표정이 멍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잠잠했던 맹이 도대체 누구에게 장악이 되었단 말인가?
제갈운의 슬픈 눈.
“이미 무림맹은 총군사님의 것이 되었어요. 거기에 우리 가주님께서도…….”
이어진 무황의 음성.
“총군사 제갈찬휘. 그가 제갈가의 가주인 제갈명현을 새로운 무황으로 추대했네.”
황당하게 굳어져 버린 조휘.
“아니 그런 엄청난 반란을 무림맹의 장로들이 동의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순간 무황의 얼굴에 허탈한 빛이 스친다.
“만장일치로 의결되었네.”
무림맹이라는 세력의 단단함은, 의외로 수많은 문파들의 연맹체라는 성격에서 나온다.
보통 연맹체라면 구조적으로 통치력이나 조직성이 취약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특정 기득권의 독주(獨走)를 막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조직체는 없었다.
무림맹이 안건을 의결하는 방법은 만장일치제.
이는 연맹체의 특성상 강력한 명분과 설득력이 뒤따르지 않는 이상 통과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당금의 정파무림에서 무황(武皇)의 권위란 절대적이다 못해 신성시될 정도.
비록 자하검성에 비해 한 수 모자람이 있겠으나 천하제일을 다투는 그 무공의 경지는 물론이요, 더욱이 그의 치세 동안 정파무림은 전례 없는 평화를 구가해 왔다.
게다가 그는 쪼그라져 있던 무림맹의 권역을 장강 이북 전체로 확장시켰으며, 과거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던 사파의 삼패천(三覇天)을 이제는 동시에 상대해도 될 만큼 무림맹을 강력한 세력으로 탈바꿈시킨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전설적인 맹의 종주(宗主)가 만장일치로 탄핵되었다는 것을 조휘를 비롯한 동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남궁장호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참혹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니, 어찌 무황님께서…….”
단체로 미혼독을 들이마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 무황님을 내칠 수가 있단 말인가?
무황은 남궁세가의 창천검협과 더불어 장일룡이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정파명숙이었다.
“소림의 그 땡중들도 동의를 했단 말이우?”
소림(少林).
강호에 그 어떤 환란이 몰아쳐도 언제나 천년 거송처럼 굳건히 중심을 잡아 주는, 그야말로 정파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문파다.
제갈운의 얼굴에 허탈한 빛이 스친다.
“총군사의 발의(發議)에 가장 먼저 인장을 찍은 사람이 공공 그자예요.”
“그 공공대사가?”
살아 있는 부처님 화석, 활불(活佛)이라 불리며 수많은 강호 동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공공대사가 탄핵안에 가장 먼저 도장을 찍었다?
그 공의의 화신과도 같은 강호의 명숙이 정말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지만 조휘는 다른 문제가 더 시급했다.
“그럼 우리 막대한 돈줄……! 아, 아니 검총은 어떻게 되는 거죠? 설마 맹주 하나 바뀐다고 맹과 맺은 협의가 틀어지는 것은 아니겠죠?”
이 와중에 조가대상회의 사업장부터 챙기고 나서자 동료들조차도 한심한 눈으로 조휘를 바라본다.
“형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수?”
“야 이 미친놈아! 무황께서 이리되신 마당에 지금 그게 할 말이냐?”
조휘가 오히려 버럭 성을 냈다.
“이 사람들이? 조가대상회 칠천 명 직원들의 한 달 월봉이 얼만 줄은 알기나 알고?”
“하…….”
남궁장호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조휘를 대신해 무황을 향해 예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조휘를 수도 없이 겪은 터라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차례 씩씩거리던 조휘가 힐끔 제갈운을 응시했다.
“괜찮겠습니까?”
“네? 무슨……?”
물빛처럼 투명한 조휘의 두 눈.
“당신이 여기에 있어도 괜찮냐는 말입니다. 이미 제갈세가 전체가 무황의 반대편에 선 듯한데.”
“아…….”
조휘는 사태의 핵심을 짚어 내고 있었다.
무림맹의 핵심 요직을 두루 장악하고 있는 제갈세가가 적극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지 않고서야 오늘의 그림은 결코 완성될 수가 없는 터.
대답은 제갈운이 아니라 만박자 제갈유운이 대신했다.
“허허…… 그대가 보다시피 무황의 곁에 선 제갈(諸葛)은 이 힘없는 노인과 우리 운(雲)이가 전부라네.”
그럼에도 여전히 무심한 조휘의 표정.
제갈세가 내부의 인물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총군사 제갈찬휘만큼은 진심 어린 충심으로 무황을 보필해 온 인물. 적어도 조휘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그런 총군사가 이번 사태의 주동자라니.
모든 일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조휘가 만박자를 무심히 응시했다.
“왜죠? 이토록 무리해서 맹주 자리를 탐낼 만큼 신기제갈에게 무슨 절박한 문제라도 있었나요?”
무림맹의 모든 원로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갈이 비록 오대세가의 일익(一翼)이긴 하나, 구파일방의 모든 비원을 들어줄 만큼 막대한 재력과 이권을 지닌 세가는 아니었다.
만박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강호에서 신기제갈이라 칭송받는 본가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오랜 열등감이 있어 왔네.”
“열등감이요?”
“이인자의 굴레. 언제나 대영웅의 등만 바라보며 계책을 내고 뒤처리만 해 온 모사(謀士)의 열등감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네. 역사를 주도하고 만들어 가는 이는 언제나 영웅들이었지. 본 가에는 그런 영웅이 되고 싶어 했던 아이들이 늘 있어 왔네.”
“음…….”
만박자가 천천히 허공을 응시한다.
“아들은 아비가 가장 잘 아는 법. 명현(明賢)이는 언제나 영웅이 되고 싶어 했지.”
“그럼 제갈 가주가 이 모든 일의 실질적인 주동자란 말입니까?”
제갈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아버지께서는 비록 야망이 있는 분이지만 절대 명분과 도의를 저버릴 분이 아니세요. 분명 아버지를 자극한 자가 있을 거예요.”
“그게 누굽니까?”
“그게…….”
제갈운이 어벌쩡하자 만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찬휘 녀석이 이 모든 짓을 벌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일종의 농담같이 느껴질 정도라네. 짐작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문제야.”
신기에 이른 계략을 지녔다는 제갈세가의, 더구나 강호의 현자라 불리는 만박자라면 그 신산지계(神算之計)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런 현자라고 해도 진정한 적의 실체를 알 길이 없는 이상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파(九派)는 그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결코 녹록한 집단이 아닐세. 사마외도를 상대했던 지난 과거를 제외한다면 그들이 일시에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
만박자의 투명한 눈빛이 일순 무황을 향했다.
“저 청년에게 모든 해답이 있다는 말의 뜻을 이제는 말해 주시오 무황.”
나한테 모든 해답이 있다?
조휘의 황당한 얼굴이 이내 무황을 향했다.
“저희 조가대상회까지 불원천리 달려온 여러 명숙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무슨 신도 아니고 수개월 전부터 산서(山西)에서 일어난 일들을 제가 어찌 꿰고 있겠습니까?”
그런 조휘를 향해 무황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일전에 자네가 말했던 신좌(神座) 말일세.”
“신좌요?”
“이 일은 그자와 무관하지 않아 보이네.”
비로소 신좌라는 이름이 강호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은막의 단어가 여러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오랜 강호의 역사에 지금이 처음일 터였다.
“그런 초월적인 자의 힘이 개입된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일투성이네. 공공(空空)을 본 좌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는 터. 그는 그 어떤 승려보다도 불법무진(佛法無盡)의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 이건 그런 사람이 할 행동이 결코 아니라네.”
강호인들은 지금의 무황처럼 소림을 향해 무한한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었지만 조휘만큼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선종의 창시자 달마가 이 세상에 전례 없는 악마라는 것을 오직 자신만은 알고 있고 있는 것이다.
“그건 무황께서 땡중들의 음흉한 속내를 몰라서 하는 소리죠. 공공이니 허공이니 해도 법명만 고상할 뿐 실상은 속이 시꺼먼 놈들로 천지입니다.”
“어허, 무례하도다!”
그저 빙긋이 웃고 있는 무황과는 달리, 조휘의 이런 면모를 처음 접해 보는 만박자는 연신 노기를 터뜨리고 있었다.
지극한 예가 담긴 남궁장호의 진중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신좌(神座)를 무황께서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맹의 비고에 천조 대협(天照大俠)께서 남기신 일기가 있었지. 천조 대협은 오래도록 신좌를 추적해 온 맹의 유일한 맹주셨다네.”
조휘가 입을 열었다.
“무황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분명 있으시겠죠.”
“그렇네. 지금 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마치 성화교(聖火敎)를 천마신교(天魔神敎)로 탈바꿈시킨 그 옛날 천마의 방식과 비슷하다네. 팔대마가를 은밀히 뒤에서 모조리 흡수하고 명령 체계를 일원화한 후 교도들을 세뇌하여 천마를 신성시하게 만드는 그런 독주의 전조가 맹의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네. 천조 대협은 당시의 천마가 신좌의 추종자라 단언하고 계셨지.”
조휘가 묘한 표정으로 굳어 있자 그의 머릿속에서 마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내가 아니다! 그는 천마삼검(天魔三劒)의 석판을 남긴 초대 천마, 즉 신좌 본인이다!
조휘가 의문을 보탰다.
“옛 마교에서 일어났던 일이 맹에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고요?”
“이걸 보세요.”
제갈운이 건넨 것은 새로 추대된 무황, 즉 제갈명현에 대한 낯부끄러울 정도의 칭송으로 가득한 서찰이었다.
“그건 각지의 문파들로 보낸 취임통지서네. 뿐만 아니라 마치 신화처럼 꾸며진 신임 무황의 생애가 산서 일대로부터 퍼지고 있지. 음…… 그 일은 자네와도 무관하지 않군.”
“예? 제가 무관하지 않다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무황이 피식 웃었다.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나 보군. 자네가 강서를 정벌하고 흑천련을 몰아낸 것은 모두 신임 무황의 명령으로 일어난 일이었네. 자네는 신임 무황의 심복 중의 심복이지.”
“뭐, 뭐라고요?”
조휘를 포함한 동료들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어쨌든 무림맹의 군사들도 함께한 토벌 아니겠는가?”
“아니 천룡전위대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전부 조휘 형님이 한 건데!”
무황은 기가 차다는 듯한 조휘 일행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여부가 무어가 중요하겠나? 그 소문은 이제 각지의 설꾼들에 의해 중원 전체로 뻗어 나가겠지.”
이내 조휘는 진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이나 골몰하던 그가 천천히 눈을 반개했다.
“일단 야접을 만나고 와야겠어요.”
“야접? 정보가 필요한 것이라면 엄연히 우리 정파에도 개방(丐幇)이 있네만.”
조휘가 피식 웃었다.
“거지들은 그 여자의 절반도 못 따라가니 그런 말씀일랑 넣어 두세요.”
“으음…….”
한데 그때.
두두두두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질풍처럼 경공을 시전해 장내에 도착한 이가 있었다.
우두커니 선 채로 강렬한 눈빛을 무황에게 발산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사천회의 밀사검주 강비우.
그의 입가에 벽곡단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폐관을 하다 말고 그대로 뛰어온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강자!’
추측할 수 없는 기도.
그야말로 사천회주를 가볍게 능가한다.
강비우는 이런 엄청난 강자를 놓칠 사나이가 아니었다.
“한 수 부탁드려도 되겠소이까?”
차아앙!
“건방진!”
“감히 무황님께!”
제갈 일행을 호위하던 무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빼어 들고 진득한 살기를 발하자.
조휘가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모로 가로저었다.
“아 저 폐관충 진짜…….”
무황의 검 대신 남궁장호의 창천검이 강비우에게 날아들었다.
“미친놈! 제발 정도껏 좀 해라!”
“오오, 이게 바로 제왕의 검인가?”
그렇게 갑자기 조가대상회의 정문 앞에서 포권충 대 폐관충의 비무가 펼쳐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만박자.
“활기차서 보기는 좋구나.”
무황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젊음이란 언제나 세상의 희망이 아니겠소?”
젊음이란 세상의 희망이라.
그런 무황의 찬가(讚歌)를 들으며 만박자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젊음은 순수의 또 다른 이름.
절절한 욕망에 때 묻지 않은 진심이며, 세태의 풍파에 휩쓸리지 않는 열정이다.
인간의 삶이란 욕망으로 펼쳐진 바다.
그래서 노욕(老慾)은 추한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허나 무황과 만박자라고 어찌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던 때가 없었겠는가.
단지 그 시절은 너무나도 머나먼 추억으로 남아 있어 이토록 가슴이 시릴 뿐이었다.
“어찌 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오.”
또다시 무황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온다.
“새로운 무황…… 어찌 보면 당연한 세월의 흐름이 아니겠소이까? 늙은이가 되어 뒷방으로 물러나는 것은 인간사의 섭리이거늘, 한데 나는 왜 이토록 분개하고 있단 말이오. 어리석다. 참 어리석다.”
“틀렸소 무황.”
만박자의 시선이 천천히 허공을 가른다.
“삼라만상은 이치로 움직이오. 강호의, 우리 정파의 이치란 도의(道義). 무황께서는 도의를 저버린 용렬한 맹주로 남고 싶소?”
“용렬한 맹주라…….”
“새로운 태양이 저 구름을 걷고 스스로 빛을 내었다면, 그런 곧은 이치와 함께 나타났다면, 그대의 도태는 실로 합당하다 할 수 있소. 허나…….”
일순 강렬해진 만박자의 안광.
“그들은 구름을 찢었소. 찢고 발기어 드러낸 그 빛마저도 천하를 속이는 암광(暗光)이외다. 오래도록 무림의 권좌를 지켜 온 그대가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징치할 수 있단 말이오?”
한데 무황이 단호한 시선으로 조휘를 가리켰다.
“소검신(小劒神).”
“그게 무슨……?”
다소 당황한 듯한 만박자의 표정.
“저들을 자세히 살펴보시오.”
서로를 힐난하며 유치한 언쟁들이 오고 가는 그들의 광경이란 그저 어리석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만박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젊고 순수하나 철이 없음이외다.”
푸근하게 웃는 무황.
“그 철없는 아이들이 모여 강호 상계의 사분지 일을 먹어 치웠소이다. 그 철없는 아이들이 흑천련을 몰아내고 이 너른 강서 땅을 정파의 세력으로 편입시켰소. 우리가 남쪽으로부터 포양호의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했겠소?”
“…….”
“이는 단순히 요행이나 천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외다.”
날카롭게 빛나는 무황의 두 눈.
“흑(黑)과 백(白), 물(水)과 기름(油), 유사 이래 정사(正邪)란 그토록 서로 머나먼 이름이외다. 하나 저 젊은이들의 면면을 보시오.”
이내 침잠하는 무황의 안광.
“오대세가(五大世家)의 후기지수들과 새외(塞外)를 대표하는 북해의 후손들, 거기에 강남 흑천련의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있소. 이게 단순히 우연인 것 같소?”
“으음…….”
만박자가 침중한 신음만 내뱉으며 침묵하자 무황의 두 눈이 강비우를 가리켰다.
“게다가 새로 나타난 저놈의 내가기공은 사황(邪皇)의 천사진기(天邪眞氣). 이는 저놈이 사천회의 후계자라는 뜻이외다.”
만박자가 진득한 의문을 드러낸다.
“단순히 사람들을 융화할 수 있는 능력이, 종주라는 자질의 전부가 될 순 없지 않소?”
“허허! 단순하다? 그 단순한 융화력을 발휘하지 못해서 우리 정사(正邪)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반목하고 있단 말이오?”
“허어, 그건…….”
“내 비록 서책을 가까이 하는 인사는 되지 못하나 당신의 강호풍운록은 빠짐없이 읽어 보았소. 허나 그 어떤 곳에도 정사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소이다. 그런 걸 해낸 영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소.”
“…….”
“나도 처음에는 저놈이 싫었소. 무례하고 약삭빠른 놈이지. 더욱이 그 심계와 귀계도 음험하기 짝이 없어 무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전수전 다 굴러먹은 장사치에 가깝소이다.”
순간, 무황의 얼굴에 짙게 그늘이 졌다.
“한데,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은자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저놈에게 그 모든 것이란 욕망보다는 수단이었소이다.”
“수단?”
“만박자의 두 눈에는 저 철옹성이 보이지 않으시오?”
“무슨 말씀이시오?”
“일견 욕망으로 가득한 장사치처럼 보이나 그는 모든 것을 지키고 있소. 가족, 여인, 동료들과 수하들, 수천여 명의 조가대상회, 그들 모두의 삶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놈이지. 게다가…….”
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는 무황.
“저놈은 천하마저 지키려는 놈이외다.”
“처, 천하(天下)?”
천하란 하늘 아래 모든 땅.
그 광대무변한 단어에는 단순히 강호(江湖)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광오한 문장을 언급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황이, 만박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무황은 저 소검신에게 모든 것을 걸겠소. 이 모자란 늙은이의 모든 수완과 능력을 저놈에게 보탤 것이오. 나는 오늘 만박자, 그대에게 내 뜻에 동참해 줄 것을 강요하고자 하외다.”
“허어 무황!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무황이 다시 조휘를 응시했다.
“그대의 붓으로 저놈을 고금 이래 제일가는 영웅으로 만들어 주시오. 더 커다란 뜻이 저놈에게 모일 수 있도록, 이 조가대상회가 새로운 무림맹(武林盟)이 될 수 있도록, 그대의 도움이 실로 절실하외다.”
“새로운 무림맹? 설마 그대는 정파를 둘로 쪼개겠다는 말이오?”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황이 가장 막으려 했던 상황이었다.
소검신을 향한 강북검수들의 동요.
한데 오히려 자신 스스로가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만박자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모양새다.
우습기만 하였다.
이래서 인생사란 새옹지마(塞翁之馬).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복마전이란, 팔순에 이른 자신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지금 그로서는 이것이 할 수 있는 자신의 최선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만박자여. 그대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제갈(諸葛)이라 믿고 있소?”
만박자 제갈유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코 아니외다! 모종의 음모가 있음이 분명하오!”
“그렇소. 우린 적의 실체를 모름이외다. 허면 이런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무엇이오?”
“껍질과 낱알을 구분…… 음…….”
무황이 어찌하여 새로운 무림맹을 운운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된 만박자였다.
“모두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소.”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자들로만 구성된 또 하나의 무림맹.
하나 그는 자신이 아니라 저 어린 청년의 이름을 새로운 기치로 삼자고 한다.
“이 내가 깃발이 된다면 그건 또 다른 무림맹에 지나지 않소. 허나 소검신의 깃발이라면 실로 새롭지. 그건 새로운 무림맹이오. 그래서 이 무황은…….”
그 순간.
털썩.
“아, 아니 무황! 어서 일어나시오!”
무황은 진중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담담히 만박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오늘부로 무황이라는 속명을 버리고 청운(靑雲)으로 돌아가겠소. 이 모든 일은 오직 그대의 의지에 달려 있음이니 이 무황의 마지막 청을 받아 주겠소?”
무황, 아니 무당의 청운진인은 이런 자신의 대계를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자는 오직 만박자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강호풍운록(江湖風雲錄)의 위력이란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었다.
갑자기 청운진인이 무릎을 꿇자 조휘와 제갈운이 동시에 벼락같이 짓쳐 와 무황을 일으켜 세운다.
“아니 보는 눈도 많은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황님!”
청운진인이 조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제는 날 무황이라 부르지 말거라.”
“예?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죠? 설마 맹주 자리 뺏겼다고 삐치신 겁니까?”
“고얀 놈.”
청운진인의 두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네놈의 경지가 이미 이 청운을 앞질렀거늘 감히 시치미를 뗄 작정이냐?”
황당하다는 듯한 만박자의 시선.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내 의념으로 저놈의 무혼을 훑지 못한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오. 이놈은 이미 우리들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조리 들었을 것이외다.”
소검신의 위명이 아무리 천하를 진동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무황이다.
자하검성과 천하제일을 다툰다는 무황.
저 나이에 그런 무황을 앞지른 무위라니?
만박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런 건 싫어요.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청운진인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
“천하의 동도들을 모아 놓고 개파대전을 벌여 세력의 종주를 자처한 놈이 이제 와서 명예욕이 없다고 말할 참이냐?”
조휘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완전히 다른 문제죠. 무황 어른님의 말대로라면 저는 거대한 정파무림의 새로운 종주가 되어야 합니다.”
“무력(武力)의 모자람은 조가대상회로서는 늘 아쉬운 일이 아니었던가?”
조휘가 버럭 성을 냈다.
“와 정말 뻔뻔하시네? 절 바보로 아세요? 새로운 무림맹이 상단? 가당키나 합니까? ‘조가대상회’라는 정체성을 송두리째 없애려고 하시면서 끝까지 모른 척하시네.”
움찔.
그렇다.
청운진인이 구상하는 새로운 무림맹은 결코 상단으로 남을 수 없었다.
강북 검종들의 고고한 자존심이란 하늘을 찌른다. 한데 어찌 ‘조가대상회’라는 품에 귀속될 수 있겠는가.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 하였다. 천하의 대의(大義)가 네 녀석에게 모이고 있거늘 어찌 작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드느냐?”
“와! 작은 것? 자아악으은 것?”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는 조휘.
“조가대상회는 이 중원에서 저의 모든 인생을 증거합니다! 비록 돈을 벌기 위해서였으나 조가대상회는 이 중원에 새로운 문물을 꽃피워 냈습니다!”
부드러운 서스펜션을 적용한 운차 시리즈.
콜라와 햄버거의 중원 버전인 흑청수와 육겹면포.
북해의 뛰어난 가죽 재봉 기술과 현대의 지식이 어우러진 라이더재킷.
현대의 택배와 배달업이 접목된 조가통운 역시 안휘와 강서 일대의 표물 사업을 완전히 다른 시장으로 개척했고.
조가양조장의 설화신주와 한빙주 역시 중원 남방의 주류 문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제 곧 모든 공법의 점검을 마치고 첫 삽이 떠질 십 층 전각(十層殿閣), 즉 주상복합단지란 중원의 주거 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꿀 것이었다.
이걸 모두 포기하라고?
조가대상회의 전 직원, 그 모든 삶들의 열정이 녹아 있는 일터를 버리라고?
조휘는 그런 열정의 증거를 감히 소탐(小貪)이라 말하는 청운진인에게 검이라도 빼 들 기세였다.
“웃기지 마시죠! 무황 어른은 세력의 종주가 되는 대신 단전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검을 포기할 수 있으세요?”
눈살을 찌푸리는 청운진인.
“한낱 재산과 무인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단전을 어찌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내게!”
조휘의 얼굴이 야차처럼 구겨져 있었다.
“이 조휘에게 조가대상회란 단전(丹田)과 검(劒) 이상입니다.”
평생토록 고고한 무인으로 살아온 청운진인으로서는 한낱 상단을 저토록 아끼는 소검신을 평생을 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기이한 눈빛의 만박자.
특이하다.
저 소검신이라는 젊은 후기지수는 확실히 모든 것이 특이했다.
일견 여타의 상인처럼 얄팍해 보인다.
기득권을 놓치기 싫은 듯한 몸부림.
허나 그는 그런 얄팍한 입으로 저토록 광오하게 문화(文化)를 꽃피워 냈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대관절 문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문명의 진보다.
중원 대륙의 모든 삶들이 녹아난 흔적이요, 천하인들의 생태(生態)다.
그 어떤 대학자나 현인, 심지어 역사에 남은 황제들조차도 감히 문화라는 단어를 입에 담진 못했다.
한데 저 소검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스스로 피워 낸 문화라고 말하고 있다.
이윽고 만박자의 현현한 눈빛이 조휘에게 향했다.
“소검신. 젊은이.”
조휘는 여전히 강렬한 안광을 빛내며 만박자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의 이상(理想)은 무엇인가?”
조휘가 묵묵히 자신의 철검을 바라보며, 검에 마음을 담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살아가고(生), 뉘우치며(懺),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입니다(進).”
그런 조휘의 솔직한 대답에 만박자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허허……!”
천하의 그 어떤 정파의 검수가 저토록 노골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보통 저 나이 때는 으레 겉멋이 가득하여 휘황찬란한 각오를 드러내게 마련이거늘.
만박자가 슬며시 청운진인을 응시했다.
“그를 강호풍운록 영웅(英雄)편 가장 맨 앞자리에 등재하겠소.”
그렇게 청운진인과 만박자는 조가대상회의 별원에서 묵게 되었다.
문제는 전 무림맹주 일행을 모실 만한 적절한 장소가 전 흑천련주의 별원과 지척이라는 것이었다.
별원의 중심에서 가부좌를 튼 채 명상하고 있던 흑천대살은 곧바로 청운진인의 강대한 기도를 감지했다.
저 오묘한 태극신공(太極神功)의 기운을 그가 어찌 몰라볼 수 있겠는가.
당금의 강호에서 저토록 무한한 태극신공의 기운을 지닌 자는 오직 무황 청운진인밖에 없을 터였다.
‘무황(武皇)…….’
정파무림의 절대적인 상징과도 같은 그가 개파대전 이후 또다시 조가대상회에 그 신위를 드러냈다.
“음…….”
침중한 흑천대살의 신음성.
조가대상회와 무림맹이 이토록 서로 긴밀하다면 사실상 강서 수복의 염원은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운진인도 흑천대살을 발견한 듯 그 얼굴에 만연했던 여유를 지운 채 냉랭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천살검귀(天殺劒鬼).”
뿌득.
자신의 소싯적 별호를 불러 대는 무황의 나직한 목소리에 흑천대살은 이를 갈았다.
저 빌어먹을 늙은이는 그때로부터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천살검귀 타령이다.
무공만큼이나 능구렁이 같은 심계로 이름이 높은 무황.
이런 허술한 격장지계에 넘어가는 건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청운도사.”
무황이 진인(眞人)의 휘호를 일신에 새긴 지도 벌써 반 갑자가 흘렀다.
그런 고명한 도인에게 도사 운운하는 흑천대살 역시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청운진인이 가늘게 미간을 좁히다 다시 유수와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포로 신세가 되겠다기에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신수가 훤한 것을 보니 본 도의 괜한 기우였군.”
“포, 포로……!”
“왜? 아닌가?”
흑천대살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본 좌는 스스로 이곳에 거(居)하고 있는 것이다!”
“허면 지금 당장 구금(拘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게. 그대로 이 별원을 빠져나가 보게나. 그놈이 잘도 가만있겠군.”
흑천대살이 스스로의 의지로 조가대상회의 별원에 남아 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소검신이 금방 흑천련 잔당의 구심점이 될 자신을 놓아줄 리 만무.
그의 엄청난 경지를 처절하게 목도하고 경험한 흑천대살로서는 쉬이 몸을 내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발톱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리는 은자(隱者)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면 어서 이곳에서 내빼 보란 말일세.”
흑천대살이 이를 꽈득 깨물며 청운진인의 시선을 외면했다.
“흥! 정파무림의 고고한 무황이라는 자가 고작 적에게 모욕을 주고자 이곳에 찾아왔단 말인가?”
“적(敵)이라…….”
순간 무황은 우스워졌다.
소검신에 의해 세력을 잃은 흑천대살이나 믿었던 자들에게 맹주 자리를 뺏긴 자신이나 그 참담한 처지란 매한가지.
한데 그 와중에도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이런 꼴같잖은 작태라니.
청운진인이 그런 허탈한 심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흑천대살에게 다가가 털썩 마주 앉았다.
그렇게 무황이 갑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흑천대살이 식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 후 수도(手刀)를 펼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뭐, 뭐냐! 지금 해보자는 건가!”
“술이나 한 병 가져오시게. 마두(魔頭).”
“뭐라?”
그렇게 흑천대살은 으르렁거리면서도 상대의 의념을 끊임없이 살피고 있었다.
한데 무황 청운진인에게는 정말로 한 줌의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본 좌와 한잔하겠다고?”
“보시다시피.”
“허!”
술잔을 함께 기울이자니?
무황과의 술자리란 평소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소싯적 그와 마주했던 곳은 언제나 피비린내 그득한 전장의 중심.
저 음흉한 노도(老道)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건 어리석은 만용이다.
겉으로는 쉴 새 없이 명분과 협의 운운하면서도 그 뱃속에 온갖 탐욕을 감춘 놈들이 바로 정파 명숙이란 자들이었다.
무황이 일순 씁쓸한 얼굴을 했다.
“대체 사파의 무뢰배들은 어찌하여 늘 그렇게 모가 났는가?”
“뭐라?”
“무황으로 불렸던 이 내가 설마하니 고작 포로가 된 적에게까지 살심을 품겠냐는 말이네.”
“…….”
딴에는 좋은 뜻으로 건넨 말이겠으나 흑천대살의 자존심을 후벼 파고 있는 것은 여전했다.
“나는 향내 풍겨 대는 도사 나부랭이들과는 대작하지 않으니 이만 물러가라!”
“이제 나는 그대가 궁금하이.”
“뭐라고?”
청운진인의 두 눈이 금방 우수에 물들었다.
“사파의 거두라는 그대는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 아니라 이처럼 나와 같은 사람일세. 마땅히 그 마음에 양심이 있을 것이며 선한 본성이 있을진대…… 도대체 왜 그랬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청운진인의 동공.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토록 무자비하게 무고한 자들을 살육할 수 있었나? 그런 무도(無道)한 마음으로 어떻게 절대경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 무릇 무인의 무도란 뜻(意)을 함의하지 않는다면…….”
“하하! 무고한 자?”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 가는 흑천대살의 두 눈.
저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도의 회안(灰眼).
이어 그의 수도가 그대로 허공을 휙 하고 할퀴었다.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살의가 담겨 있는 음험한 손놀림.
“본 좌의 손에 죽어 나간 고수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무고한 자였지?”
무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가 멸문시킨 정파의 문파만 다섯 곳.
단심방(斷心幇).
숭의검문(崇義劒門).
송무장(松武莊).
강남영웅회(江南英雄會).
마지막으로 모산곡(茅山谷).
그가 강서성을 도모한 방식은 너무나 잔혹하고 무도해서 정파인이라면 한결같이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 모산곡주 단용성을 죽이고 그의 제자들을 모조리 도륙했던 흑천대살의 잔인함이란 지금까지도 정파인들의 머릿속에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그의 처지는 그런 인과응보로써 오히려 모자란 감이 있는 것이다.
“단심방주 철 대협, 숭의검문주 이 대협, 송무장주 유 대협, 모산곡주 단 대협…… 당시 그들 모두가 대협이라는 고매한 칭호로 불려 왔네. 평생을 협의로 살아온 무인들이란 말일세. 모두가 강호의 동량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사들일진대 어찌 무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릿하게 비틀어지는 흑천대살의 입매.
“단심방의 철가 놈은 석성(石城) 일대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놈이었다. 그놈의 허락 없이는 좌판 하나 깔 수 없는 것이 그 시절 석성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숭의검문주? 그놈은 재능 있는 제자들을 선점하겠다는 빌미로 정남(定南) 일대의 갈 곳 없는 떠돌이 고아들을 사실상 인신매매를 해 온 놈이 아닌가?”
아니, 그걸 저렇게 해석한다고?
무황 청운진인은 그 옛날 단심방주와 숭의검문주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고매한 인품과 호협한 기개를 지닌 단심방주는 수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대협객이었다.
장사를 시작한 상인들이 그에게 하례를 가는 것은 축원을 받기 위함이요 예를 보이는 것이지 결코 장사의 허락 따위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또한 갈 곳 없는 떠돌이 고아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거두어 훈육했던 것은 숭의검문주의 오랜 선행이었다.
개중에 자질을 보이는 아이들을 문파의 동량으로 거두어 제자로 삼는 것은 오히려 그의 너른 포용력을 증거하는 셈.
한데 어찌 그런 선행을 인신매매라고 모욕을 준단 말인가?
“……강남회주 하후세? 가장 악랄한 놈이 아닌가? 그놈은 악안(樂安), 남풍(南風), 길안(吉安), 태화(吉安)를 모두 점령하고 그곳의 문파들을 강제로 자신의 휘하로 삼은 패도 그 자체인 자다.”
“허…….”
그런 흑천대살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후세 역시 마땅히 영웅으로 불려야 하는 무인이었다.
잔인무도한 왈패 조직에 의해 신음하던 상인들을 해방시키고 흑도문파들의 위세에 짓눌려 봉문하고 있던 문파와 무관들을 독려하여 강남에 정의를 바로 세우려던 대영웅.
때문에 그가 힘차게 치켜세운 깃발더러 정파의 모든 명숙들이 강남영웅회라 칭송했던 것이다.
청운진인의 두 눈이 고고한 현기로 빛난다.
“그대의 말대로 그들이 상계를 장악하고 인신매매를 일삼으며 패도를 걸었다고 치세. 허면 그대의 모든 행동이 살겁이 아니라 단죄란 말인가?”
“당연하다.”
“허면 다시 묻지.”
청운진인의 얼굴이 단호함으로 물들어 간다.
“그들을 징치하고 차지한 이 강서를 그대는 어찌하여 지옥도로 전락시켰나?”
“지옥도?”
“부정할 셈인가? 여인들을 납치해 유곽과 홍등가로 밀어 넣고, 살수를 양성해 청부살인을 일삼았으며, 수많은 가장들의 가산을 모두 도박장에서 탕진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성인군자 납셨군.”
“성인군자?”
“어리석은 무당의 도사야. 인간 세상은 원래부터 지옥이었다. 저 빌어먹을 소검신이 강서의 모든 기루와 유곽, 도박장을 없앴다지? 허나 정말로 그런 소검신의 뜻이 이 강서를 평정한 것 같으냐? 어림없다 도사야.”
음침한 눈을 빛내는 흑천대살.
“여인을 탐하는 본성, 한탕 크게 벌이고자 하는 야망, 경쟁자를 없애고 싶은 살심이 진정 인간의 세상에서 사라질 성싶으냐?”
이내 너른 포양호의 전경을 응시하는 흑천대살.
“내 눈에는 훤히 보이는구나. 너는 보이지 않느냐? 도처에 숨어든 저 무수한 마를?”
“마(魔)……?”
청운진인의 되물음에 흑천대살이 피식거리며 조롱했다.
“큭큭, 지금도 포양호의 어딘가에는 투견장이 벌어졌을 것이다. 어떤 지하 밀실에는 은밀한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겠지. 여각으로 위장하고 있는 매음굴도 사방 천지에 널렸을 것이다. 살인청부? 정말 없을 것 같으냐?”
“하여 그대는 그 모든 것을 일부러 방치한 것인가?”
“방치가 아니라 군림이다. 인간의 완악한 본성을 짓누르면 반드시 어디선가 다른 부작용으로 부풀어 오른다. 하나 나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되 일정 수준으로 통제했다. 오히려 이 흑천대살로 인해 이 포양호에 질서가 생겨났다.”
이쯤 되니 청운진인은 스스로 확신할 수 있었다.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명분도 합리화할 수 있는 자.
악인(惡人)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저토록 비틀려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무도(無道)요 악인이다.
“소검신의 포로라 본 도가 예를 차려야 함이 마땅하거늘.”
청운진인의 얼굴이 단호함으로 물들어 간다.
“허나 행악을 단죄함에 있어 어찌 예만 앞세우겠는가.”
스르르릉-
한 자루 송문고검이 고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검신의 중심에 선명하게 새겨진 태극 문양.
“자고로 무도(武道)가 세인들의 숭앙을 받는 것은 일신의 무(武)로써 세상의 행악을 단죄하여 협(俠)을 행하기 때문이네. 허나 그대에게는 오로지 진득한 욕망과 합리화의 요설뿐 그 어디에도 협이 없구나.”
흑천대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잿더미처럼 흩날린다.
“그저 예전처럼 칼춤 한번 벌이자는 걸 고상하게도 말하는구나!”
한데 그 순간.
“남궁 형 말이 맞아.”
흑천대살이 극고의 보법을 밟아 뒤로 빠지다 우두커니 멈춰 섰다.
이내 서둘러 하늘을 올려다보는 흑천대살.
별원의 상공에는 철검 위에 올라탄 소검신이 두둥실 떠 있었다.
뿌득!
“소검신!”
흑천대살이 이를 갈며 조휘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뒷덜미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내가 물렀었어. 사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사형이 없어져 가는 추세거든. 당연히 이 시대상에 맞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놈! 무슨 소리냐!”
조휘가 피식 웃었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라는 건가.”
“무, 무슨?”
순간 조휘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점멸(點滅)되더니 이내 흑천대살의 전면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안녕? 걸레 새끼야?”
조휘도 모르지 않았다.
인간사란 결코 이상으로만 따질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하지만 조휘는 그 현실이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내의 성욕이 주체할 수 없는 것은 본능적인 야성(野性)이니 여인을 탐하는 것을 사회가 눈감아 버린다면 강간마를 벌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야망과 질투가 인간의 내제된 악한 심성이니 그걸 죄다 인정해 주자고?
사시사철 땀 흘려 노력하여 얻은 한 줌의 곡식이, 한탕주의 도박으로 얻은 금화 꾸러미보다 더 가치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
철없는 이상론은 조휘도 지극히 싫어했으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확증편향(確證偏向).
흑천대살은 전형적인 확증편향의 가치관을 지닌 자였다.
본인의 주관적 의지와 선입관에 유리한 증거와 사실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자.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인간이란 뜻이다.
“어이 걸레.”
조휘가 철검을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거다. 대답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 죽일 거야. 불만 없지? 너는 군림(君臨)을 신봉하는 인간이니까. 나는 현재 네놈의 위에 군림하는 자다.”
흑천대살의 두 눈에 서린 회회살천절예의 잿빛 기운이 더욱 뚜렷해졌다.
“놈! 내가 가만히 죽어 줄 것 같으냐!”
조휘는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걸레야, 이 새끼야. 넌 반년 전의 나조차 이기지 못했다. 네놈도 절대경이라면 눈이 있을 것 아니야? 지금 내 의념의 절대치를 측정할 순 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흑천대살.
그가 극고의 긴장감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고 있는 것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상대의 말대로 아무런 의념도 읽히지 않는 상황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념이 상대의 의념 장막을 단 한 치도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치로 따진다면 적어도 다섯 배 이상은 강해진 거 같은데. 이래도 내가 걸레 네놈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닌가?”
“……괴물 같은 놈!”
결국 흑천대살은 소검신이 천명한 군림(君臨)을, 쓰린 감정을 억누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질문 들어간다.”
조휘의 얼굴에 일순 서늘함이 감돌았다.
“흑천대살에게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고 들었지. 어 알아. 절강 대양산(大洋山) 자락 중턱에 아주 은밀한 장원이 하나 있더군. 네놈의 수하들이 그래도 의리는 있어. 제때에 피신을 잘 시켰더라고.”
“이, 이놈!”
그야말로 소름이 돋았다.
비로소 흑천대살은 조휘에게 어찌하여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저런 세세한 것까지 모두 꿰고 있다면 놈이 다루는 정보의 양이 도대체 얼마나 된다는 소린가?
“자, 그럼 이제 본론이야. 일단 내가 정파라는 생각은 버려. 걸레 너도 잘 알지?”
“…….”
수많은 강호인들이 소검신을 정파검종(正派劒宗)의 화신처럼 여기고 있지만 흑천대살에게만큼은 그야말로 개소리였다.
소검신이 흑천련의 영역을 먹어 치운 방식이란 오히려 사파인인 자신보다 더욱 치밀하고 간교했다.
“지금 나는 제법 쓸 만한 살수들을 물색해 의뢰를 맡길 거야. 물론 목표물은 걸레 네놈 가족이지. 네 아내와 두 아들은 깔끔하게 죽여 줄게. 하지만 네 딸은 가장 악랄한 포양호의 포주(抱主)에게 넘기지.”
확증편향을 깨부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가 애써 무시하고 있는 객관성.
그 객관성을 주관성으로 바꿔 주면 된다.
“자, 이제 말해 봐.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완악한 본성 때문에 청부살인, 인신매매, 매음굴은 막을 수 없으니 어느 정도 방조하자? 나는 지금 네놈 위에 군림하는 자. 군림하는 자의 행위란 질서의 또 다른 이름이니 정당하다? 내 행위에 네놈의 똑같은 잣대를 기대해도 되나?”
악독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흑천대살을 향해, 조휘는 마치 형(形)을 내리는 집행자처럼 선고했다.
“똑같은 잣대를 보인다면 널 죽이진 않겠다. 그 의지와 기상에 진정성이 있다는 소리니까. 네놈의 가치관이라고 인정해 주지. 단, 이쪽도 뱉은 말이 있는데 그 진정성에 답은 해야 하지 않을까?”
뿌드득.
흑천대살이 살기를 품으며 이를 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조휘의 뜻은 양자택일(兩者擇一).
흑천대살이 스스로의 가치관을 증명한다면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가족들이 죽고 사창가에 팔려 가게 된다.
반면, 자신의 가치관이 어리석은 아집(我執)이었음을 실토한다면 가족을 살릴 순 있지만 자신은 죽게 된다.
자존심을 선택해도 소중한 가족을 선택해도 모두가 불행한 결말이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청운진인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쯧쯔…….”
살다 살다 사파의 절대자에게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날이 올 줄이야!
지금까지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자였으나 막상 저렇게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모습을 보게 되자 불쌍하게 느껴진 것.
한편, 전에도 느꼈지만 소검신의 놀라운 심계에 그야말로 소름이 다 돋았다.
그는 마치, 어찌하면 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그것만을 연구한 자 같았다.
보통의 사람이란, 상대와 자신의 가치관이 다르다면 역으로 논파하려고만 들지, 저렇게 상대의 논리 속을 파고들어 함정을 파는 발상 따위는 결코 쉬이 할 수 없었다.
소검신의 적이 된다는 것이란 저토록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본 좌는…… 본 좌는……!”
쉴 새 없이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계책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는 흑천대살이었으나, 소검신의 강력한 논리의 벽에 부딪혀 그야말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처량한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조휘.
조휘는 내심 이해할 수 없었다.
경외심 가득 물든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운진인이나 저토록 당혹하고 있는 흑천대살이나.
이게 무슨 고명한 심계씩이나 되나?
‘네 가족이 당했어 봐라.’ 드립은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구.
“본 좌는…….”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듯한 흑천대살.
백팔번뇌란 저런 것인가.
“인간의 타락과 잔학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거다. 그 잔학성에 본인의 가족 혹은 자기 자신을 대입해 보면 곧바로 답이 나오는데 그런 멍청한 논리를 지금까지 신봉해 왔단 말이야?”
힘의 논리를 평생 추종해 온 자.
군림의 패도를 스스로 정당화했던 자.
그런 흑천대살에게 비로소 뇌 정지의 시간이 왔다.
평생의 가치관이 무너진 인간.
그런 자의 정신이 온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날 죽여라…… 아, 아니다. 자비를 베풀어 모두를 살려 줄 순 없는 건가…….”
횡설수설.
흑천대살의 넋 나간 음성에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처연함이 느껴졌다.
허나 소검신의 이어지는 말에 그는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미치셨어요 걸레님? 내가 너냐? 죄 없는 네놈 가족을 왜 죽이냐? 그냥 해 본 소리지.”
“…….”
애초부터 완벽히 계획된 유린이요 농락이었다.
차라리 칼침 한 방 깊숙이 맞는 것이 낫지, 이런 살벌한 정신 공격은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법이다.
“으으으……!”
극고의 분노가 치민 듯 흑천대살의 잿빛 눈동자가 혈안(血眼)으로 변해 갔다. 안구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간 것이다.
얼굴에 저리도 압력이 몰릴 수 있다니!
“쯧쯧, 그런 나약한 정신으로 무슨 사파의 절대자를 해 드시겠다고. 패드립이라도 쳤으면 울화통에 곧바로 뒈져 나가시겠네.”
“크아아아아! 죽여 버리겠다!”
“내 말이!”
쩌저적!
분명 사람과 사람이 부딪친 것이 분명한데, 무슨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 채로 사지를 경련하며 부르르 떨고 있는 흑천대살.
청운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개골을 쪼갠 건가?”
“아, 조절한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조휘가 검을 역수로 잡고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흑천대살의 머리에 찍어 버린 것.
검을 저렇게 쓰는 검수가 있다니?
참 다른 의미로 난놈은 난놈이었다.
“그나마 즉사가 아니라니 다행이로군.”
“걸레는 빨아도 걸레잖아요.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그건 또 어느 지방의 고언(古言)인가?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격언이네.”
조휘가 씨익 웃었다.
“먼 동쪽 어느 나라의 격언입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로군.”
조휘가 짱돌 맞은 개구리마냥 대(大)자로 나자빠져 부르르 경련하고 있는 흑천대살을 향해 철검을 드리웠다.
“남궁 형의 말이 맞았어요. 애초에 살려 둘 가치가 없는 자. 갱생의 여지란 없었던 거죠.”
인정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청운진인.
“악인 한 명의 목숨을 취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구명할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검을 뽑는 것이 바로 협객이라네.”
“예.”
츠츠츠츠-
조휘의 의념이 구동되자 이내 날카로운 예기가 철검에 맺혔다.
그때, 멀리서 소란을 들은 만박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제갈운과 함께 나타났다. 잔뜩 흥미로운 표정의 강비우도 그 일행에 끼어 있었다.
“안 되네! 그를 죽여선 안 돼!”
조휘보다도 청운진인의 물음이 더 빨랐다.
“이자가 누군지 모르겠소?”
“알고 있소! 흑천련의 종주 흑천대살 아니오!”
“한데 어찌?”
청운진인의 기억 속에 만박자는 그 누구보다도 악인을 경멸하는 자였다.
“그는 소검신의 위대함, 그 증거요!”
“음?”
만박자가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후…… 가장 무서운 역사란, 실체가 없는 전설 따위가 아니라 사실이 증명된 역사이오. 이왕 구금한 마당이니 그를 휘하로 삼는 것이 가장 좋소. 만약 수하로 다룰 수 없다면 차선으로 내공을 전폐하고 사지근맥을 잘라 비동에 구금. 강호명숙들에게 이를 공증하고 소검신의 업적을 천하동도들에게 알리는 것이오.”
“음…….”
만박자가 조휘를 응시했다.
“이는 새로운 무림맹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흑천련 종주의 구금은 정파인들의 사기와 소검신의 명성에도 반드시 도움이 되네.”
조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공 전폐, 사지근맥 절단 운운하는 만박자를 바라보며 역시 저 양반도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청운진인의 생각은 달랐다.
“과연 그럴듯하오. 허나 그런 일은 반드시 사파인들의 결집을 부추기는 법이오. 도덕적으로도 찝찝하외다. 그 옛날 정파인들이 북해의 마녀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 수백 년간 식자(識者)들의 비판을 받아 왔지 않소?”
만박자는 단호했다.
“소검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은 다름 아닌 무황께서 한 것이오. 반드시 취할 것이 있다면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법. 선택이란 본디 모두를 아우를 수 없소.”
내내 듣고만 있던 조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네요.”
“좋은 방법?”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짓고 있는 만박자를 향해 조휘가 싱긋 웃어 보였다.
“죽일 수 없다면 살려 주면 되잖습니까? 대신 사천회로 이자를 보내 주죠. 물론 우리가 보내 주는 게 아니라 탈출한 것 꾸미고요.”
“사, 사천회?”
조휘가 강비우를 쳐다봤다.
“흑천련이 발호하기 전 원래 강서는 정파와 사천회가 반반씩 먹고 있던 곳이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 사천회주는 흑천련이라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고 들었는데. 야, 틀렸냐?”
강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천대살은 사황특무대장이었던 사황의 아들을 죽였다. 그것도 전투로 죽인 것이 아니라 비무장 특사로 방문했던 그를 죽였지.”
“어. 그거 유명한 일화잖아.”
“당신이 사황에게 흑천대살을 인도한다면 반드시 수많은 선물을 보내올 거다.”
흑천련이 안휘를 도모하려 시도할 당시 가까운 사천회를 놔두고 왜 녹림과 손을 잡았을까?
사천회와 흑천련은 같은 사파 세력이었지만 오히려 정파보다 더욱 증오하는 관계였다.
무림맹이 그토록 승승장구하는 데도 서로 한 치의 협력도 나누지 않은 자들.
오히려 흑천련의 크고 작은 분쟁은 무림맹보다도 사천회와의 경계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죽이고 싶지만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다? 그럼 적의 손으로 죽여야죠. 그리고 사황의 성격상 회(會)의 사기를 위해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공개 처형할 확률이 높죠.”
“음…….”
조휘가 씨익 웃는다.
“전 사황에게 한 통의 서찰만 보내면 끝입니다. 그 공개 처형 자리에서 소검신을 한 줄만 언급해 달라. 허면 적어도 삼 년은 상호 불가침을 약속하겠다.”
만박자의 등줄기에 소름이 좌르르 돋아났다.
“이럼 제 역사의 실체는 증명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와.
그냥 네가 악마 해라.
무황과 만박자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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