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68
67 章>
물론 인질의 몸값을 거래하는 것은 강호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잠깐만.
상대는 정파의 검종을 대표하는 소검신(小劒神)이 아닌가?
정파인, 그것도 세력의 종주를 자처하는 자, 신(神)의 휘호를 일신에 새긴 강호의 절대자가 인질을 볼모로 값을 흥정해 온다?
아마도 무림의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일 터였다.
당연히 사천회의 총사 진서한은 상대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소검신께서는 본의(本意)를 말씀해 주시지요.”
다소 언짢아진 듯한 조휘의 표정.
“진짜 팔려고 왔습니다만.”
“으음…….”
진서한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소검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체 그 값을 얼마나 치러야 하는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무려 ‘사패황’의 신변을 살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허면 그 값을 먼저 제시해 주셔야…….”
또다시 미간을 찌푸리는 조휘.
현대나 강호나 ‘제시충’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건가.
“뭐 현물로 받는 건 좀 그렇고 이권(利權)으로 하죠.”
진서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저 소검신이 강서를 집어삼키는 과정, 그 모든 정보들을 빠짐없이 살펴 온 그로서는 소검신이 말한 ‘이권’이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뜻이 함축되어 있는지 결코 모르지 않았다.
“설마하니 호남의 땅이라도 요구할 작정이시오?”
소검신이 강서에 진출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엄청난 규모의 땅을 매입했던 일.
더구나 그 땅을 소검신에게 무상 증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저 흑천대살이었다.
물론 저 냉막한 악귀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던 건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 그의 잔혹한 성격상, 조가대상회가 알짜로 일궈 낸 상권을 후일 강제로 빼앗으려 했을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소검신이라는 엄청난 변수를 간과했던 것이겠지만.
그렇게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인데 무슨 사천회가 바보도 아니고 흑천련과 똑같은 방식으로 당할 것 같으냐?
조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진서한의 날카로운 눈빛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이 제가 무슨 도둑놈도 아니고.”
“…….”
어쩜 사람이 저리도 뻔뻔할 수가?
흑천련을 집어삼킨 조가대상회, 아니 소검신의 악랄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면목이 드러난 일이었지만, 의념지도를 구사하는 절대경 무인의 창고털이란 무림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략이었다.
더욱이 정벌이 먼저가 아닌, 교활하게 상권으로부터 침투하는 방식은 결코 강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조가대상회가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상품으로 하여금 적을 길들여 버린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종속되게 만드는 물건.
그만큼 조가대상회의 물건들이란 기이한 마력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그런 귀한 것을 더러 문물(文物) 혹은 문화(文化)라고 부른다.
진서한의 눈에 조휘는 단순한 무인이나 상인 따위가 아니었다.
새로운 문물을 태동시킨 천재 중의 천재.
물론 드넓은 중원에는 엄청난 무공과 끝에 다다른 학식을 지닌 기인이사들이 모래와 같이 많다지만 신문물, 문명의 흐름을 일궈 낸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존재는 미욱한 고대의 중원인들에게 농업을 가르쳤다는 신농(神農), 최초로 대륙을 통일하고 새로운 법제와 도량으로 중원을 하나로 묶은 시황제(始皇帝) 정도가 전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조휘를 향한 진서한의 두려움과 경이는 범인들과는 궤가 다른 것이었다.
“워,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오.”
조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연신 닦아내는 진서한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천회는 필시 저희 강서에 진출하고 싶으시죠? 강서 땅 어디든 허락해 드리죠. 분타를 세워도 좋고 상단을 투입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저희 조가대상회의 상품들을 매입할 권리도 드리죠.”
“……그게 무슨?”
“단, 사천회가 유통하는 모든 포목류와 비단의 전매권을 요구합니다.”
“뭐, 뭣이!”
포목류는 그렇다 치더라도 무려 비단의 ‘전매권’이라니?
사천회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호남성과 강소성.
특히 중원 최대의 명주 생산지 소주(蘇州)로부터 막대한 양의 비단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 강남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동력이었다.
이를 들은 사황이 노발대발했다.
“저 미친 망둥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냐!”
“가격은 기존 거래가에서 오 할을 더 쳐 드리죠.”
“뭐, 뭐라? 오 할?”
비단 한 필의 가격은 계절과 작황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시장에서 은자 네 냥에 수렴한다.
허면 지금 소검신은 최소 예닐곱 냥 이상으로 비단 한 필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인데, 이는 조가대상회의 수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결코 수익을 실현시킬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렇게 비싸게 비단을 매입해 준 대가로 강서의 이권 또한 나눠 준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해가 날 수 없는 천상의 유혹이었다.
이런 달콤한 제의를 거부한다면 바보나 마찬가지인 것!
하지만 그가 말한 비단의 독점권(獨占權), 즉 전매권이 진서한을 계속 거슬리게 했다.
전매권이란, 행사하는 이의 의지에 따라 시장을 고사, 혹은 파괴 수준까지 치닫게 하는 무서운 권한.
“한 필에 일곱 냥씩 비단을 매입한다라…… 결코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이오. 도대체 그렇게 비싸게 매입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당신들이 우리 조가대상회의 일을 생각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사황이 비릿하게 웃었다.
“소검신이 아니라 호구 새끼였군. 총사, 본인이 자처해서 흑천대살을 헌납하고 비단을 고가에 매입해 준다는데 생각할 것이 무어가 있는가? 게다가 본 회의 강서 진출까지 돕겠다지 않는가?”
표면적으로는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진서한은 저 소검신의 언행을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분명 뭔가 다른 수가 있을 텐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으니 속만 답답해 미칠 지경.
좀 더 대화를 지속하여 상대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소검신 그대라면 얼마든지 비단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우리 회에서 찾는단 말이오?”
“문제는 물량이죠. 일반 시전에서 매입할 수 있는 비단의 양이란 한정적. 좀 더 비싸게 매입하더라도 장기적, 안정적으로 매입할 수 있는 거래처가 필요할 뿐입니다만.”
진서한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그 양을 알기나 아시오? 함부로 본 회가 유통하는 비단의 전매권을 운운하다니. 아무리 조가대상회가 날로 융성해지고 있다지만 그대들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오.”
피식 웃고 마는 조휘.
내가 바본가?
사천회가 중원에서 유통되는 모든 비단의 삼분지 일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찾아왔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왔는데 저런 순수한 질문이라니?
“당가의 세가주께서도 철광석의 전매권을 허락하실 때 당신과 똑같은 말을 하시더군요. 하지만 뭐 결과는 당신이 아는 그대로지.”
진득하게 입술을 깨무는 진서한.
조휘의 말대로 적어도 강남 일대의 모든 철(鐵)들은 조가대상회를 거치지 않고서 유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조가대상회의 영향력이 너무 강력해져서, 이제는 관부를 넘어 황실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음…….”
허나 진서한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소검신의 의도를 알아차릴 길이 없었다.
그 비싼 가격으로 그만한 양을 매입해서 도대체 어떻게 되판단 말인가?
적어도 이 중원에서는 그런 비싼 가격으로 되팔 곳이 없었다.
그때, 진서한의 뇌리를 전광석화처럼 스치는 생각 하나!
“서, 설마 당신?”
예의 익살스런 미소를 숨기지 않는 조휘를 응시하며 진서한은 그제야 확신하는 눈치였다.
“비, 비단길이라니……!”
비단길을 확보하는 것은 소주의 비단 유통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는 사천회조차 불가능했던 일.
그것은 황제의 권력으로 허가해 준 상단, 즉 대륙 단위에서 노는 상단이 아니라면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하에 비단길을 확보한 상단은 단 두 곳, 천화상단과 만금상단뿐이었다.
“저, 정말 소검신 그대가 비단길을 확보했단 말이오?”
“굳이 제가 우리 조가대상회의 일을 말씀드릴 필요까진 없을 거 같습니다만.”
일견 부정하는 듯한 묘한 어투의 언사였지만 비단길을 확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비싼 가격으로 매입할 이유가 없는 터.
이는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
진서한은 난감한 얼굴로 사천회의 지존 사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회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심 가볍게 놀라는 사황.
총사 진서한이 자신에게 결정을 미루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이는 그의 깊은 지혜로도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한참이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사황이 무거운 음성을 토해 냈다.
“기존 거래가에 칠 할을 더 얹어 준다면 본 좌가 결심하도록 하지.”
의외로 조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막상 상대가 흔쾌히 자신의 협상 조건을 수용하니 더욱 찝찝한 마음이 되어 얼굴을 구기는 사황.
“구 할!”
중원의 비단이 비단길을 건너 서역에 당도하면 그 가격은 최하 열 배 이상 치솟았다.
동방의 비단과 후추를 향한 서역인의 사랑은 그만큼 지고했던 것.
그래도 조휘는 명색이 사패황이라는 놈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꼴이 같잖았다.
“거 사황(邪皇)이라는 작자가…….”
물론 구 할이라고 해도 아직은 기존 거래가의 두 배를 넘지 않는 선.
결국 조휘는 유통에 소요되는 금액과 이문을 꼼꼼히 계산하더니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구 할? 좋아! 수락하도록 하죠. 대신 이 이상 흥정은 불가합니다.”
“정파의 샌님답지 않게 호쾌한 사내군. 좋아. 본 좌 역시 그대의 제의를 수락하겠다.”
협상이 유수처럼 타결되자 조휘는 흡족한 마음이 되어 흑천대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잔혹한 놈을 다른 손을 빌려 처리할 수 있는 상황도 그렇고, 이를 빌미로 엄청난 이문을 벌어들일 사업의 독점권까지 얻었다.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다 보았나?
“저놈은 물론 처형하시겠죠?”
“물론이다. 오늘 밤 본 회(會)의 모든 수하들이 보는 자리에서 곧바로 처결할 것이다. 그간 저놈 때문에 본 회가 입은 손해를 생각하면…….”
뿌드득-
선명히 들려오는 사황이 이 가는 소리.
그런 그의 살기란 얼마나 선연한지 보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한데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흑천대살이 차츰 꿈틀거리더니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사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장천…….”
이 와중에도 감히 자신의 본명을 운운하는 흑천대살.
“이경진, 네놈이 진정 미쳤구나!”
차앙-
그러나 이어진 흑천대살의 음성에 사황은 빼어 들던 검을 그대로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장천아, 딸년이 보고 싶지 않으냐?”
“뭐, 뭣이?”
사황이 흑천대살을 극도로 증오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중화라 불렸던 자신의 딸이 그 때문에 실종되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
“크으으…… 네놈이 애지중지하는 사중화(邪中花)는 살아 있다. 은신처는 오직 본 좌밖에 모르지.”
힘겹게 운신하여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흑천대살.
곧 그의 두 눈에 사이한 잿빛 기운이 강림했다.
“소검신. 네놈이 본 좌를 사천회로 데려온 것은 가장 멍청한 선택이었다. 네놈을 속이느라 진이 다 빠지더군. 사실 몇 번이고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
조휘가 묵묵히 침묵하고만 있자, 흑천대살이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사황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놈들을 모두 죽여라. 허면 네놈의 딸년이 있는 장원의 위치를 알려 주지.”
진가희가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조휘 오빠는 좀 미친 것 같아. 어떻게 이것까지 예상할 수 있어?”
당황해하는 흑천대살.
“뭐, 뭐라는 거냐 네년!”
진가희가 사황을 불쌍하다는 듯 바라본다.
“사중화 독고린은 나도 알아. 나의 동기였거든.”
흑천대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중화를 데려오자마자 혀를 잘라 버렸는데 저년이 어찌 그걸?
진득한 눈으로 의문을 드러내고 있는 사황에게로 진가희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쏟아 냈다.
“저 잿더미 새끼는 당신의 딸 사중화를 오래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지. 중양절의 시전놀이패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중화를 납치하라고 시킨 자는 다름 아닌 저 잿더미 새끼야.”
“뭐라……?”
추측만 하고 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허나 현실은 생각보다 더욱 잔혹했다.
“동녀를 즐기는 저놈의 소문은 다들 알고 있잖아? 당연히 흑천련의 동화각(童花閣)도 익히 알고 있겠지?”
진가희가 씨익 웃으며 흑천대살을 쳐다봤다.
“저 잿더미 새끼가 사중화를 취하고 목 졸라 죽인 날, 흑천련에는 축제가 벌어졌어. 아마도 그때가 저 잿더미 놈 인생에서 최고의 날이었을걸?”
조휘가 야접에서 취한 정보를 진가희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더라면 진가희는 평생 그녀를 무설이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여쁘고 고왔으나 혀가 잘린 채 들어와 무설(無舌)이라 불렸던 아이.
늘 무심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체구도 다부졌고 그 눈빛도 독하기 짝이 없어서 동기들이 필시 강호의 여식일 것이라며 수군거렸었다.
동화각에 처음 들어온 아이들은 최소 이레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기력을 회복시킨 후, 흑천대살의 취향에 맞게 몸단장을 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데 무설은 동화각에서 역사상 가장 빨리 흑천대살의 선택을 받은 아이이자 가장 잔혹하게 죽은 아이였다.
흉측하게 길게 빼어 문 혀.
수차례 난자당한 얼굴.
당시에 진가희는 그런 흑천대살의 잔혹함에 치를 떨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짙은 의문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흑천대살이 칼로 아이의 얼굴을 난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
진가희의 기억에 무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여아의 비명을 들으며 쾌락을 즐기는 놈이 어째서 그토록 어여쁜 아이의 혀를 잘랐을까? 우리는 모두 궁금해했었지. 이제서야 모두 이해가 돼. 사황의 딸임을 숨기려 했던 거야.”
“크으으으……!”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흑천대살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사황의 얼굴이란 가히 흉신악살에 다름이 아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만큼 가공할 살기가 그에게서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겠지? 말해라! 내 딸이 있는 곳이 어디란 말이냐!”
진가희가 조소를 머금었다.
“잿더미는 어느 순간부터 동화각을 폐지했어. 우리끼리야 뭐 결국 고자가 됐다느니 마음을 고쳐먹었다느니 왕왕 말들이 많았지만 설마 개가 똥을 끊겠어?”
조휘도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저놈이 동화각을 폐지한 시점은 흑천련이 세력을 확장하여 관부와 결탁한 때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죠. 외부의 눈을 의식한 겁니다. 관부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어야 하는데 버젓이 동화각 같은 변태 소굴을 운영한다? 그러다 만약 실체가 드러난다면? 그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조휘가 품 안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 들었다.
“저 새끼는 무슨 흑천련이 망하는 걸 예상이라도 했나? 비밀리에 마련해 놓은 장원과 안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휴…… 어쨌든 역시 개는 똥을 끊지 못하더군요.”
조휘가 그 지도를 그대로 사황에게 건넸다.
“그 지도에 붉은 점으로 표기해 놓은 곳이 바로 저놈의 또 다른 동화각이죠.”
“그럼 여기에!”
조휘가 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됐지만 무설은 그 이후로 행적이 끊겼습니다. 모든 정보를 취합해 봤을 때 무설과 사중화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구 할 이상입니다.”
사황은 여전히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흑천대살을 응시했다.
“진정 네놈이 린아(璘兒)의 혀를 잘랐느냐?”
“…….”
“진정 네놈이 겁간하고 목 졸라 죽였느냐? 진정 그 고운 얼굴을 칼로 난자하고 불태웠느냐?”
흑천대살의 두 눈에 어린 사이한 잿빛 기운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허탈한 기색이 스치다 금세 악독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이제 와서 네놈이 어쩔 테냐! 네놈이 본 련(聯)더러 사파의 수치 운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모든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사황은 오히려 그 표정이 색깔을 잃어버렸다.
그의 눈빛 역시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무정(無情) 그 자체였다.
“네놈은 본 좌가 손수 오체분시(五體分屍)해 주겠다. 네놈의 그 흉측한 하물을 뜯어 잘근잘근 씹어 먹어 주마.”
흑천대살은 살기를 포기한 듯 두 눈을 내려감은 채 꾹 하고 입을 닫고 있었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난 조휘.
“흑천련이 왜 사파의 수치죠?”
이내 사황은 종주의 위엄이 가득한 음성으로 흑천대살을 향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종언(終言)하듯 말했다.
“사파의 검(劒)이란 힘없는 자들의 설움. 세상을 향해 외쳐 대는 한 맺힌 절규다. 사파가 금도(禁道)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이상이나 협의 따위가 세상의 모든 한 맺힌 자들을 구제해 주지 못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으음.”
이내 사황은 흑천대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허나 저놈의 흑천련에는 온통 추악한 탐욕만이 그득할 뿐 한 맺힌 자들의 절규와 설움 따위란 없다. 저놈들은 그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뒷골목 왈패 무리에 불과하다.”
조휘는 그런 사황에게서 세상을 향해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그의 말이 모두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공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조휘에게 정사(正邪)란 단지 생각이 다른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일 뿐.
그렇게 정통의 사파 냄새가 물씬 나는 사천회.
온갖 탐욕으로 얼룩져 있던 흑천련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들려오는 풍문에서는 사황의 악행이란 그야말로 인간임을 포기할 지경.
악행만을 일삼아 온 악랄한 거두(巨頭) 그 자체인 이름이었다.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 되는 건가?
조휘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거래도 성사되었고 의문도 모두 해소되었으니 어서 계약서나 작성합시다!”
“아니지. 짚고 넘어갈 게 하나 더 있지.”
순간 사황이 강비우를 쳐다보며 진득한 눈빛을 발했다.
“네놈은 강호(江湖)가 무슨 장난 같으냐?”
“…….”
강비우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사황이 천천히 검을 빼어 들었다.
스르릉-
“비록 구배지례는 없었다고는 하나 너는 이 사황의 무공을 사사했으니 본 좌의 기명제자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네놈은 사천회의 밀사검주. 너를 죽기 살기로 따르는 검대의 수하들은 도대체 어떡할 작정이냐?”
“…….”
“사내라면 응당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거늘 아무리 무공에 미쳤기로서니 어찌 정파에 속할 수 있단 말이냐?”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갈! 검을 논하고 와도 된다고 했지 언제 본 좌가 조가대상회의 휘하로 들어가라 했느냐!”
사황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조휘는 양심에 찔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고수가 탐난다고 해도 강비우가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분명 사황의 입장에서 강비우는 천하의 개새끼가 아닌가?
“저의 강호는 검(劒)입니다. 사천회가 아닙니다. 그 밀사검주란 자리도 사실 억지로 제게 떠넘긴 직책이 아닙니까.”
사황은 강비우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야말로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자신의 억척스러운 지난날을 떠올려 보니 강비우가 조가대상회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 더욱 열불이 터졌다.
이건 분명 선을 넘은 행위.
“좋다. 본 좌의 강호와 네놈의 강호가 서로 다르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길밖에 없구나.”
사황은 사파를 대표하는 사패황의 일인.
흑천련주보다도 윗줄의 초극고수였으며 그야말로 살아 있는 사파의 전설 그 자체인 이름이었다.
그런 엄청난 경지의 무인이 생사대결을 청해 옴에도 강비우는 두려워하거나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희열로 물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강비우의 전신으로부터 음유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금도 연신 사황이 뿜어 대고 있는 그 유명한 천사진기(天邪眞氣)와 한 치의 다름없는 동일한 기운이었다.
자신의 피부를 저릿하게 자극해 오는 강렬한 진기의 파장을 느끼며 사황은 가볍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
과연 무공에 관한 자질에 한해서는 강비우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의 무공이 발전하는 속도는 자신이 본 그 어떤 천재와도 비교를 불허했다.
허나 그래 봤자 아직은 화경.
무극(無極)을 넘어 무량(無量)을 바라보고 절대지경의 자신에 비한다면 아직 강비우의 경지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진정한 천사검(天邪劒)의 현신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칠 듯이 뜁니다.”
“네 너를 취할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수하들의 본보기로 삼겠다.”
그렇게 사황이 막강한 기세를 끌어올리며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려는 그때.
“사황, 소검신이 장난입니까?”
사황이 갑자기 또 무슨 개풀 뜯는 소리냐며 역정을 내려다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의념지도가 봄볕에 사그라지는 눈처럼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
그것은 명백한 우위, 아니 현격한 우위의 무혼(武魂)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는 현상.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의념지도가 산산이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조휘의 무혼을 살펴 그 경지를 가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허나 상대의 경지는커녕 무혼의 성질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것은 음유하고 부드러운 기운도 폭급하고 잔인한 기운도 아니었다.
뭐라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성질의 무혼.
자신이 아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경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천지만물 자연과 교감하는 경지, 즉 천지교태(天地交泰).
강호의 식자들은 무혼 특유의 기질이 오히려 평범해지는 그런 경지를 소위 자연경이라 불렀다.
“처, 천지교태? 설마 자연경을 이룩했단 말인가!”
“어 그건 아닌데…… 뭐 좀 비슷하긴 하죠.”
씨익 웃는 조휘.
“각자의 뜻을 패도(覇道)로 증명하려 들다니! 과연 명불허전 사파답게 호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고집도 부릴 때 부려야죠.”
“부릴 때?”
“마음만 먹으면 사천회의 이만 병력을 홀로 전멸시킬 수 있는 무인을 앞에 두고도 서로의 패도를 증명하려 들다니 만용(蠻勇)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뭐, 뭐라고!”
사황이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뿜어 댔다.
사천회의 종주를 앞에 두고도 감히 만부부당(萬夫不當)을 운운하다니!
아무리 봐도 조휘는 비리비리한 청년의 모습만 하고 있을 뿐이기에, 조휘의 언행에서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절대 검을 거두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강비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 우스운 꼴이 될 뻔했소.”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황.
이 무슨 황당한 행동이란 말인가?
검밖에 모르는 저 무식한 강비우가 두려움 가득 물든 표정으로 초극검수와의 대결을 포기한다고?
그야말로 사황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강비우가 사황의 검을 쳐다보며 무심히 권유했다.
“소검신은 단 일검(一劒)으로 포양호를 지울 수 있는 무인입니다. 그만 착검하시지요.”
포양호는 마치 바다처럼 드넓다 하여 소해(小海)라는 또 다른 별칭을 지닌 그야말로 대호(大湖)다.
그런 엄청난 호수를 단 일검으로 지운다?
사황은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참 편하군요. 힘 센 놈이 대장이라는 게 사파의 법도라면 그 법(法) 제가 가지겠습니다.”
조휘의 입장에서 온갖 명분과 수 싸움으로 골몰해야 하는 정파보다는 사파의 단순함이 훨씬 편했다.
쿠구구구구구구-
계곡 전체가 묵직한 진동에 휩싸인다.
처음으로 조휘의 무혼, 그 진면목을 접한 사황은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일단 강비우 저 사내는 십 년간 내가 갖겠습니다. 그 후에 보내 드리죠.”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강비우는 벽곡단 사료(?)만 주면 곧 죽어도 조가대상회에 붙어 있을 사상 최고의 가성비를 지닌 무인.
조휘로서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사황이 황당한 표정으로 뭐라 항변하려는 찰나, 조휘의 매서운 눈초리가 총사 진서한을 향했다.
“빨리 계약서나 쓰자고요. 세세한 초안까지 잡으려면 갈 길이 먼데 그렇게 계속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겁니까?”
진서한이 어색한 표정으로 연신 사황의 눈치만 살피자 조휘가 버럭 짜증을 냈다.
“거 강남(江南)의 절반이나 경영하시는 분들이 왜 그렇게들 새가슴이실까?”
미친!
지금 저놈이 협상 자리에 올리려 하는 것은 무려 사천회가 유통하는 모든 비단의 전매권이다.
그런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을 무슨 절간에 향 피우듯 쉬운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놈이로구나.”
지금까지의 모든 푸닥거리를 기이한 눈빛으로 지켜만 보고 있던 사파의 절대자 천괴(天怪)가 드디어 본인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지닌 영력이란 영계 존자들의 관심을 끌 정도.
존자들께서 팔무좌의 최정상이요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하검성 단천양을 보고도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점은 조휘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천괴가 사황을 엄하게 꾸짖었다.
“일견 언행이 괴팍하고 행실 또한 가볍기 그지없으나 저놈의 그런 모든 행동은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이런 미혹에 동요해서 손해만 입는다면 네놈이 어찌 종주(宗主)를 자처할 수 있겠느냐.”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들은 꾸지람이라 반발심이 생길 만도 하건만 놀랍게도 사황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조휘는 사천회에 서 천괴(天怪)라는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을 단박에 유추할 수 있었다.
이자가 사천회의 실질적인 절대자!
그것이 조휘의 날 선 판단이었다.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 칭찬으로 듣죠.”
씨익.
천괴가 조휘의 익살스런 미소를 부드럽게 웃으며 받아 주었다.
“네놈의 경지가 실로 놀랍구나. 지닌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이런 영격(靈格)이라니.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이구나.”
상대의 영력을 가늠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존재력이 인간을 초월했음을 방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그 지경이 되고도 아직까지 사람의 육신을 뒤집어쓰고 있다니요? 오히려 제 쪽이 더 놀랍습니다만.”
천괴가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한다.
자신의 오롯한 경지를 ‘그 지경’이라 말해 버리니 어감이 묘해진 것이다.
확실히 실로 무서운 입담을 지닌 놈이었다.
“날 때부터 말하는 법을 배운다고 해도 네놈의 요설을 능가하진 못할 것이다.”
“하하, 이거 계속 칭찬만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한마디도 안 진다.
상대의 심기를 자극하는 격장지계는 예로부터 가장 단순한 전략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강력한 효과를 지닌 전략이기도 하다.
천괴는 은근히 화가 끓어올랐으나 결코 이를 드러내진 않았다.
이런 애송이의 교활한 입심에 휘둘리기에는 자신이 지나온 세월의 깊이가 너무 깊었다.
“한 품목에 대한 전매권은 단순히 단가로 협상될 일이 아니다.”
조휘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무려 비단의 전매권인데. 절 상도도 모르는 놈 취급하십니까? 제가 단순히 단가만 구 할 이상으로 매입하겠다는 제의만 했습니까? 분명 사천회의 강서 진출을 돕겠다는 제안도 함께 했을 텐데요.”
“부족하다.”
뭔가를 더 얹어 달라는 뜻.
조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도 저희 조가대상회의 외문 앞에는 물건을 팔아 달라는 상인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할 겁니다. 매일같이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북적거리죠.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 조가대상회의 물건들이 그리 만만하지 않아요.”
천괴가 예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 네놈의 모든 제안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가장 커다란 변수가 있지.”
“아니 무슨 변수요?”
천괴의 눈빛이 더욱 깊은 현기를 발했다.
“바로 너다. 네놈이 버젓이 살아 있는 이상 모든 협상과 제안은 무효하다. 그러므로 본 좌는 이번 거래에 네놈의 목숨을 요구한다.”
“이 노망난 늙은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촤아아아악!
진가희가 길게 빼어 든 혈강편으로 바닥을 후려치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진가희가 사파의 절대자를 향해 노망난 늙은이 운운하자 장내의 모든 사천회 무사들이 대노하며 무기를 빼어 들었으나 천괴의 느릿한 손짓에 의해 모두 제지되었다.
조휘 역시 떠오른 감정 하나 없이 무심한 얼굴이었다.
“이유나 들어 보죠.”
진가희를 한 차례 냉랭하게 응시하던 천괴가 다시 조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네놈은 상인(商人)을 자처하면서, 동시에 무림 세력의 종주(宗主)의 외향을 취하고 있지 않느냐?”
달리 말해 천괴의 속뜻은 상인의 약속은 믿을 수 있지만 무림 종주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것.
하기야 강호의 역사 이래 무림 세력 간에 맺어진 협약이 깨어졌던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그중 가장 빈도가 잦았던 곳은 북해와 남만.
특히 야수궁(野獸宮)에게 불가침의 맹약이란 그저 종이 쪼가리였다.
그렇다고 중원은 깨끗한가?
결코 아니었다.
맹약을 깨고 정파의 영역을 침공한 철혈사자문(鐵血獅子門).
반대로 사파를 침공했던 백도검종회(白道劒宗會).
힘의 격차를 현격하게 벌렸다고 판단되면 전 세대가 맺은 맹약이란 그저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욕망이란 속성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특히 힘을 숭앙하는 무인(武)들의 강호에서는 한낱 글귀보다 주먹이 더 앞서는 법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다르다.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생존이 불가능한 직업.
천괴는 그 점을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다.
역시 살아온 세월이 깊은 만큼 그 혜안 역시 보통이 아니다.
이게 바로 노인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조휘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싯팔, 사람에게 목숨이 제일 중요한데 그걸 내놓으라고 하면 그게 거래요?”
피식 웃는 천괴.
“제 입으로 본 회의 이만 병력 몰살을 운운한 놈이 그 낯짝 한번 두껍구나. 수틀리면 모든 판을 뒤집어엎겠다는 전형적인 무골(武骨)임을 네놈 스스로가 증명한 셈. 그런 네놈이 살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맹약도 의미 없다.”
말꼬투리 한번 오지게 잡혔다.
조휘는 천괴의 논리를 논파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입심으로 제압하지 못한 상대가 없었거늘!
오늘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쉽게 물러난다면 조휘가 소검신이 될 수 있었겠는가.
조휘는 자신이 지닌 패(牌)가 얼마나 강력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야, 가희야. 짐 싸라. 저 잿더미 놈도 다시 기절시켜.”
“응! 알겠어요!”
조휘가 망설임 없이 홱 하니 뒤돌아서자 지독히 당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황이었다.
“기, 기다려라!”
그에게 흑천대살이란 자신의 딸을 처참하게 살해한 불구대천의 원수.
그런 원한을 갚을 길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무효. 이번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하죠. 무슨 말이 통해야 말이지.”
사황이 피눈물을 삼키며 천괴 앞에 서서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태상(太上)이시여…….”
저 흑천대살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 천괴라고 다를 리 있겠는가?
“음…….”
하지만 저 교활한 소검신과 거래를 했다간 분명 흑천련 꼴이 날 것 같았다.
흑천련은 결코 호락호락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조가대상회와 잘못 맺은 협정 하나로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다.
천괴가 그런 사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예의를 차렸다.
“회주. 저놈은 단순한 무인도, 교활한 상인도 아니오. 저놈은 세상을 제 품에 안고 천천히 길들이는 놈이오. 흑천련의 종말을 살폈다면 회주께서도 그 일을 모르지 않을 것 아니오?”
흑천련이 패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패착은 그들 스스로가 조가대상회의 선진적인 문물에 종속당했다는 것이었다.
흑천련이 소검신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침공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은 조가대상회가 갑작스럽게 거래를 중지해 버렸기 때문.
소검신의 엄청난 무위를 운운하기도 전에, 이미 흑천련은 조가대상회의 문물에 마음을 뺏겨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이 무서운 것은 무공의 경지보다 저놈이 지닌 물건들의 마력 때문이오. 이를 현명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강호는 저놈 손에서 놀아날 것이외다.”
그때, 조휘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호탕하게 웃고 있는 소검신.
그 웃음소리가 마치 승리자의 광소처럼 들려와 천괴와 사황은 심기가 심히 불편했다.
“왜 웃는 것이냐!”
눈앞에서 생사대적을 보내는 심정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저렇게 속을 뒤집는 광소라니!
그렇게 사황이 진득한 살기를 발하자 조휘가 여전히 익살스런 미소가 그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우리 조가대상회의 문화를 단순한 물건 운운하는 꼴이 우스워서.”
“문화?”
조휘가 사황과 천괴의 주위로 수도 없이 도열해 있는 수하들을 일일이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평소 흑청수(黑淸水)와 한빙주(寒氷酒)를 즐기시지 않는 분?”
“뭐, 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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