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69
68 章>
조휘가 씨익 웃으며 품 안의 장부를 꺼내 들었다.
“이야, 거 많이들도 자시네. 이 정도면 강북(江北)으로 가는 양과 비슷한걸? 합비에서 유통되는 양을 넘어서는데?”
휘둥그레 뜬 눈으로 멍하게 굳어져 있는 사황에게로 조휘가 마치 선고하듯 입을 열고 있었다.
“호남(湖南)이라고 뭐 별수 있겠어? 문화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 그게 무슨?”
“강호에 우리 조가대상회의 휘하 상단만 존재합니까? 우리로부터 매입한 물건들은 암시장으로도 어마어마한 양이 흘러들어 가죠.”
연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천회의 수하들을 살피는 조휘.
“포양호와 인접한 호남은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시장이 된 지 오랩니다. 당장 내가 아는 호남의 밀점포(密店鋪)만 해도 스무 곳이 넘어요. 비록 비싸긴 해도 정가의 두세 배 값만 치르면 어디든지 조가대상회의 문화를 맛볼 수 있죠. 어? 저거 시커먼 게 꼭 흑청수 얼룩 같은데?”
조휘가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한 사내가 식겁을 하며 자신의 옷깃을 손으로 가렸다.
“아,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사황.
“이 새끼들이……!”
이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황에 의해 난데없는 소지품 검사(?)가 시작됐다.
“천위사사(天位邪使)와 그 휘하들은 지금 당장 저놈들의 속곳과 주머니를 털어라!”
장내에 시립해 있던 수하들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하게 굳어진다.
갑자기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자신들의 회주는 조가대상회를 도래할 적(敵)으로 상정하고 낭인들까지 규합하고 있었던 마당이다.
이 와중에 조가대상회의 물건을 소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회주에게 들킨다면?
이는 분명 적에게 이로움을 내준 행위로, 흉험하기 짝이 없는 회칙에 의해 처벌받을 것이 확실시되는 사안이었다.
“헛! 아, 안 돼!”
“사, 살려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비명과 동시에 그대로 엎어져 부복하고 있는 사천회의 수하들.
속곳에 은밀하게 숨겨 놓은 한빙주 술병.
아껴 먹다가 소중하게 종이에 싸 놓은 육겹면포.
아직도 시원한 냉기를 유지하고 있는 흑청수 호리병.
수하들의 품에서 조가대상회의 물건들이 그야말로 수도 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허탈한 광경에 아연실색한 얼굴로 멍하니 굳어져 버린 총사 진서한.
잿빛 수염을 연신 푸들푸들 떨며 억지로 노기를 참아 내고 있는 사천회주 사황.
거기에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린 천괴까지!
조휘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흐뭇한 얼굴로 뒷짐을 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 문화는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예의 익살로 물든 그의 미소.
“이제 내 제안의 진정한 의도를 알겠습니까. 나는 그저 음지(陰地)에서 비싸게 사 먹는 당신 수하들의 주머니 사정을 헤아리고 싶었던 거라고. 와 저걸 다 암시장에서? 도대체 얼마야? 한빙주 한 병에 월봉 다 털어야겠네?”
천괴는 너무도 허탈하여 진기마저 흐트러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자신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모두 끝이었다.
수하들에게 아무리 회칙이니 강령이니 내밀어 봤자, 이미 몸과 마음이 원하여 깊숙이 받아들인 문물을 억제할 수는 없을 터.
자고로 인간의 먹고 마시자 하는 욕구란 막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 얼굴에 익살스러운 태를 지운 채 무심한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고 있는 소검신.
천괴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인세의 피조물을 바라보는 전능자(全能者)같이 느껴졌다.
그에게 지금의 소란은 모두 자신이 펼쳐 놓은 문물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문화가 적(敵)의 마음마저 빼앗고 이토록 자중지란을 일으킬 정도이니, 그가 느낄 정신적 포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천괴의 눈에 비친 소검신은 명백한 승리자.
그때 조휘가 천괴를 진득이 응시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삼 할.”
“…….”
당초에 합의했던 비단의 전매 가격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처음에 그가 제시한 금액보다도 이 할이나 적은 금액.
진서한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큼 후려칠 수는 없소이다!”
“그럼 서로 그만 질척대도록 하죠. 협상 결렬! 깔끔한 게 가장 좋으니까. 가희야 빨리 기절시켜라!”
“응! 오빠!”
이미 의념과 진기가 거의 소진되어 축 늘어져 있던 흑천대살.
그가 자신의 목덜미를 후려치려는 진가희를 흐릿한 동공으로 쳐다보고 있을 그때.
“기다려라!”
사황이 거친 일갈과 함께 전광석화와 같이 보법을 밟아 조휘의 전면에 섰다.
조휘의 무심한 동공이 그를 향한다.
“거참…… 또 뭐죠?”
“받아들이겠다! 삼 할!”
비명을 지르는 진서한.
“아, 안 됩니다 회주님!”
물론 진서한도 회주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생사대적을 놓치기 싫은 심정도 있겠지만 이미 자신의 수하들, 아니 호남(湖南) 전체가 조가대상회의 문물에 잠식되었다면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인정하기는 죽기보다 싫겠지만 차라리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조가대상회의 물건들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게 더욱 유리하다는 것이 회주의 판단.
수하들의 주머니 사정이라도 가볍게 해 주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이라 여긴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소검신이라는 미친놈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거였다.
지금까지야 그나마 사천회의 눈치를 살펴 호남의 암시장에 직접 물건을 유통시키진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수틀려 돌아간다면?
상단을 거치지 않으니 그의 수익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질 터.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의 회주는 최소 반년은 앓아누울 것이다.
진서한의 그런 생각은 조휘의 입을 통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이왕지사 일이 틀어진 마당에 직접 밀상주(密商主)들에게 물건을 대 보려고 했는데 그것참 아쉽네요. 이렇게 갈고리로 은자를 쓸어 담는 사업을 포기해야만 하다니.”
사황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삼 할! 전매권도 주겠다! 본 회의 포양호 진출을 돕겠다는 말은 틀림없는 진심이겠지?”
“거참 속고만 사셨나? 당연하죠.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사황으로서는 왠지 지옥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듯한 오한이 치밀었지만 지금으로선 그의 말을 믿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때 천괴의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린 흑천련이 어떻게 패망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싱긋 웃는 조휘.
“갑자기 물건의 유통을 막는 게 걱정되시겠지만, 사천회가 흑천련처럼 뒤에서 꿍꿍이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부분은 계약서에 명시해 드리죠.”
“좋다. 지금부터 맹약에 관한 모든 일은 총사와 함께 상의하라.”
그렇게 총사 진서한과 소검신의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맹약 체결서의 각 조항마다 수많은 언쟁이 오고 갔다.
서로 각자 세력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무수한 명분과 논리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무수한 논박을 지켜보며 천괴는 진심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논쟁의 대부분을 소검신이 승리했기 때문.
천괴는 사도 제일의 명석한 두뇌를 지녔다는 진서한이 이처럼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강호(江湖)는 이제 저놈을 중심으로 돌아가겠구나.’
왜 항상 저런 천재 놈들은 정파에서만 출현하는 건가!
사황이 아끼는 저 밀사검주란 아해도 천재긴 했으나 그것은 무공에 한정된 재능이었다.
하지만 저 소검신이란 놈은 아예 종(種)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다.
사람이라면 응당 허술한 면 하나 정도는 있게 마련인데 저 건방져 보이는 낯짝까지 전술 같아 보일 지경이니…….
“어느 정도 초안이 완성되었네요.”
마치 엄청난 고생이라도 한 듯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조휘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이리 가져와 보라.”
사황의 명령에 총사 진서한이 공손히 초안을 바친다.
“이…… 이……!”
초안을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사황은 차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걸 지금 협정이랍시고……!”
총사 진서한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대죄를 청했다.
“사천회 총사 진서한.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회주께 귀향을 청하고자 합니다.”
책임을 지고 총사직을 내려놓겠다는 진서한의 갑작스런 행동에 사황은 더욱 열불이 터져 나왔다.
천괴의 엄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사를 탓할 생각은 없네. 일어나시게.”
천괴가 다시 조휘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래, 뜻을 모두 이뤘으니 이제는 좀 시원한가.”
“시원하기는요. 오히려 섭섭하죠. 정말 많이 양보했는데.”
협정 초안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사황의 안면이 더욱 거칠게 구겨졌다.
싯팔! 이게 양보라고?
양보를 안 했다면 도대체 네놈은 어느 정도까지 이기적일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사황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직 초안일 뿐 서로 인장을 찍어 효력이 발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미친놈이 수틀려서 이 초안마저도 뜯어고치려 든다면 더욱 손해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언행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저 흑천대살 놈을 손에 넣기 전에는 더욱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흐음. 비록 아쉽지만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본디 거래라는 것이 서로 남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정말 어디에서 거친 돌이라도 구해 와 저 희멀건 놈의 면상을 갈아 버리고 싶다.
그렇게 조휘가 조가대상회의 인장을 품에서 꺼내 초안에 찍자 사황이 살벌한 눈빛으로 흑천대살을 가리켰다.
“이제 저놈은 내가 가져도 되는 건가?”
“가희야 뭐 하냐. 잿더미놈 인계해 드려라.”
“응!”
촤아아아!
영활한 뱀처럼 뻗어 나간 진가희의 혈강편이 그대로 흑천대살의 전신을 구속한다.
이어 비루한 짐승마냥 처량하게 질질 끌려가는 흑천대살.
정파의 팔무좌와 비견되는 사패황의 일인이자 세력을 통할하는 종주(宗主)의 최후치고는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당장 저 찢어 죽일 놈을 지하뇌옥에 가둬라!”
순식간에 사천회의 만찬 신세로 전락하게 된 흑천대살.
진가희는 그런 잿더미의 최후를 바라보며 그 옛날 어여쁜 아이들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세상에서 사그라진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들.
언젠가부터 용마루 위에 서서 바라본 하늘에는, 부모님의 얼굴보다 그 아이들의 얼굴이 더욱 많이 떠올랐다.
소용아, 은령아, 희윤아…….
그리고 제일 불쌍한 우리 무설아.
‘얘들아, 이젠 편히 쉬어.’
생의 내내 품고 있었던 진가희의 한(限)은, 그렇게 대미(大尾)를 맺고 있었다.
“저는 조가대상회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중하게 포권하며 돌아서는 조휘를 불러 세운 이는 다름 아닌 천괴.
“아직 본 좌의 볼일은 끝나지 않았다.”
조휘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뒤돌아섰다.
“또 왜요. 협상은 분명 깔끔하게 마무리됐습니다만.”
“네놈의 무위를 확인하고 싶다.”
“하?”
뜬금없는 대무 신청이라!
진가희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노인네!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피식 웃어 버리는 천괴.
“대무(對武)로 이 구질구질한 삶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거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지.”
조휘가 그 얼굴에 난처함을 가득 그렸다.
“안 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절대지경의 의념지도로는 그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최소 절대경의 끝자락.
과거 화산에서의 자하검성 단천양과 거의 비등한 경지다.
만약 그가 이룩한 경지가 자연경의 초입이라면 삼신융합절기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를 제압할 수 없을 것.
문제는 자신이 그런 삼신융합절기를 상시적으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블랙홀(?)을 발휘했을 당시의 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떠올린다고 해도 같은 위력의 검공이 출현할지는 미지수였다.
무인이 완성되지 못한 무공을 실전에 발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조휘로서는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발휘한다고 해도 그 엄청난 파괴력을 스스로가 감당할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저 천괴가 받아 내지 못한다면 사천회의 총단은 물론이요 이 악록산(岳麓山) 전체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천하의 소검신이 내빼는 것이냐?”
조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게…… 자신이 없어요. 자신이.”
“자신이 없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천괴의 표정.
소검신은 그 전설적인 검신의 적전제자이며, 동시에 세력의 종주이자 신의 휘호마저 일신에 새긴,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검수로 평가받는 자다.
그런 자치고 지나치게 나약한 웅심(雄心)이 아닌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죽이지 않고 이길 자신이 없다는 건데.”
“뭐, 뭐라?”
그럼 그렇지 이 미친 놈!
저 소검신, 아니 소악마 놈의 입은 그런 나약한 소리 따위나 내뱉을 주둥이가 아니었다.
천괴의 전신에서 무한한 힘이 솟구쳤다.
“감히!”
쿠구구구구구구—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거력이 그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순수한 내가진기의 수준으로만 따진다면 조휘가 겪어 본 그 어떤 무인보다 막강했다.
도대체 얼마만큼 수련을 해야 인간의 몸으로 저만한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와 씨!”
끝이라 여길 때면 어김없이 천괴의 강맹한 파동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었다.
아니 이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힘인가?
이건 뭐 천우자의 법술에서나 느껴 볼 힘의 파동이다.
사패황?
얼어 죽을!
저 사황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질 판국이다.
이런 자가 사패황보다 명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 말이 되나?
사천회조차 이러할진대 소림과 무당에는 또 얼마나?
소림과 무당에도 세속과의 인연을 끊은 채 평생을 산중에서 도와 불경을 닦는 고승과 도인들이 무수히 많다 들었다.
그것은 화산도 마찬가지!
과연 강호에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조휘는 새삼 강호의 저력이 무서워졌다.
“보아라.”
천괴로부터 유형화된 기(氣)가 그야말로 사천회 총단 전체를 드리우고 있었다.
“인외지경(人外之境)이라 자부하는 본 좌에게 그토록 오만한 망발을 일삼았으니, 네놈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경지를 내보여야 할 것이다.”
조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노인네들이란.”
왼쪽 눈에서 타오르는 자색 귀화.
오른쪽 눈에서 피어오른 백색 광휘.
조휘의 신형이 섬전처럼 깜빡였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 강비우.
까앙!
까가강!
그가 느낄 수 있었던 건 허공에 수놓아진 엄청난 수의 섬전과 불꽃들, 그리고 쇳소리의 공명음뿐이었다.
가히 인간의 시계(視界)로 좇을 수도 없는 속도.
이게 정말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들의 공방(攻防)이란 말인가?
속도에 치중한다면 그 위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상식임에도, 강호의 절대자들이 벌이는 대결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일 합 일 합 부딪치며 섬전이 일 때마다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맹위를 떨친다.
그런 충격파에 의해 전각이고 뭐고 죄다 박살 나고 짓이겨지고 있었다.
무인들이라고 멀쩡할 수 있겠는가.
이미 사천회의 수뇌들은 서둘러 한곳으로 모여 합격진으로 버티고 있었다.
화경에 이른 자들조차 내가진기를 연결해 합격진으로 버티지 않는다면 충격파에 의해 내부가 갈가리 찢길 정도이니 그 위력은 새삼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때 강비우의 뇌리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의문 하나.
왜 나는 멀쩡한 것인가?
옆을 둘러보니 진가희와 염상록 쪽도 평안하다.
소름이 끼친 듯 다시 홱 하니 공방이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강비우.
설마 저토록 무시무시한 대결을 벌이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미치는 충격파를 본인의 의념으로 상쇄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지, 진짜 미친놈이다!
순간 공방에 균열이 일어나며 조휘와 천괴가 각자 물러나 대치한다.
스스스스-
수십 개의 신형이 미끄러지는 듯한 환상과 함께 이내 천괴가 그 오롯한 모습을 드러냈다.
사도 제일 보법이라는 환사유령보(幻邪幽靈步)였다.
눈살을 찌푸리는 천괴.
“고작 이게 소검신(小劒神)이라고?”
강호인들이 신이라는 휘호로 조휘를 치켜세웠을 때는 다 그에 합당한 이유와 신위가 증명되었다는 뜻.
허나 천괴로서는 너무나도 실망이었다.
“하물며 이 천괴를 상대하면서 여유를 부려?”
의념지기를 나눠 후방의 동료를 살피는 조휘의 행동 때문에 천괴는 솟구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이 천괴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한데 막상 조휘는 그런 의도가 단 한 치도 없었다.
‘엄청나다!’
조휘가 계속 탐색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상대의 검법이 너무도 오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혹감.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그 어떤 검식(劒式)과도 본질적으로 뭔가가 달랐다.
검천전능지체를 운용하여 바라봐도 마찬가지.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그 어떤 움직임에도 값이 있었다.
하지만 천괴의 검에는 값이 없었다.
존재하는 결과란 오직 확률(確率).
검천전능지체는 그의 움직임에서 백터값을 찾지 못하고 오직 확률만 토해 내고 있었다.
이는 상대의 검이 무한한 변수(變數)로 이뤄진 검이라는 뜻.
이런 경우는 조휘가 처음 경험하는 일로 그가 당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환검의 정수, 그 화려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화산의 매화검법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건 마치 무신 어른의 무해(無解) 같지 않은가?
조휘가 경탄으로 얼룩진 심정으로 침중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검법이죠?’
검신 어른 또한 그 음성에 한껏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다.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검식이구나. 대단한 검의 종사다. 난해함은 아미의 난피풍검법(亂披風劒法)을 능가하고 표홀함 역시 능히 매화검법의 위에 있다. 거기에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劒)보다 더한 단단함과 태극혜검의 포용력까지 더해졌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펼쳤던 초식은 진실로 충격적이었소이다. 본 좌 역시 그의 마지막 초식에서 모든 팔대마가(八大魔家)를 보았소.
-이건 마치…….
천하의 모든 무공이 합일(合一)된 느낌.
고래로부터 삼신(三神)들이 이러한 느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신좌의 유산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건 사람의 일생(一生)으로 가능한 무공이 아니오!
-허어! 허면?
조휘의 두 눈이 가늘게 찢어지며 매서운 빛을 발했다.
“신좌의 끄나풀이라 이거지?”
조휘의 기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강대하긴 했으나 살기란 없었는데 지금은 막대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신좌?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뭐라고?”
신좌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좌’라는 단어를 맹목적으로 신성시 여긴다는 것.
한데 천괴는 그런 신의 이름을 대했음에도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그의 행동이 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처음에 삼신(三神)이 그랬듯, 본인의 검에 담긴 무리가 신좌의 유산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노인장, 검종의 사문을 밝혀 주시죠.”
감히 새까만 강호의 후배 놈이 까마득한 전대의 노고수에게 사문을 밝히라니?
사황이 합격진을 풀며 불같은 노성을 토해 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본 회의 태상께 사문을 운운하는가!”
조휘가 피식 웃었다.
“무림맹주로부터 검신(劒神)님의 적전제자임을 공증받은 나한테 지금 배분을 따지자는 건가?”
“뭣!”
사실 조휘는 연배 때문에 강호의 노고수들을 존중해 온 거지 제대로 배분을 내세웠다면 거침없이 행동을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허나 사황은 지지 않았다.
“무림맹이 강호 모두를 아우를 수 없다! 수백 년 전에 죽어 귀신이 된 검신 놈의 적전제자라니 대관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본 회는 인정할 수 없다!”
-저놈이!
감히 위대한 검신에게 저런 망발이라니 명불허전 사파 놈 아니랄까 봐!
“허면 당신이 말해 줘 봐. 저 노인장의 검! 사파의 어느 검종이지?”
“이놈이!”
“당신이나 나나 같은 세력의 종주인데 이것도 무례야?”
하지만 사실 이 일은 사황으로서도 평소에 지독히 궁금했던 사안이었다.
본디 천괴는 사파의 명문 검종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 지 단 오 년 만에 단숨에 화경의 경지를 이루고 나타났다.
그전까지는 낭인 시장을 떠돌던 일개 낭인에 불과했기에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
허나 그가 익힌 독문검법이란 그야말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인미답의 경지였다.
정파의 검종들보다 깊으면서도 마검(魔劒)을 능가하는 패도지검.
그런 천괴를 기억하는 정파의 전대 고수들은 한때 그의 신비한 검법더러 검신과 비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강호의 패자로 평생을 군림할 수 있었음에도 사천회를 채 십 년도 경영하지 않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의 심중을 헤아린 자는 사천회 내에서조차 아무도 없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를 기억하는 정파인들에게는 대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검총이나 석판의 도해는 아니야.’
천괴의 검은 오히려 삼신의 그것보다도 더욱 완성도가 높은 느낌이었다.
검총을 남긴 신좌는 당시에도 검법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천마삼검의 석판도 마찬가지.
조휘는 천괴의 검이 마치 그런 오랜 연구를 모두 마친 신좌의 검법처럼 느껴졌다.
검천전능지체로 바라본 상대의 궤적이 모두 확률값으로만 나타난다?
이는 변수가 무한에 근접했단 뜻이며 동시에 상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천괴가 오롯한 자연경에 이르렀다면 자신은 이렇게 서 있을 수조차 없을 터.
조휘가 깊은 눈으로 천괴를 응시했다.
“노인장.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당신의 검법…… 출처를 밝혀 줘.”
다시금 노성을 터뜨리는 사황.
“얼마나 중한 일이길래 생사대결 중에 상대의 내력을 묻는단 말이냐! 네놈은 지금 강호의 금도를 깨려는 것이다!”
“당신은 좀 빠져. 진짜 심각한 상황이니까.”
궁금하기는 강비우도 마찬가지였다.
천괴라는 아득한 전대고수가 지금까지 실존해 있었다는 것은 사천회의 이인자였던 자신으로서도 모르고 있었던 일.
“회주께서 언제 정파의 명분과 예법을 따지셨다고 그리 화를 내십니까. 검식의 도해를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사문을 알고 싶다는 건데 무슨 역정을 그리 내시는지요.”
“이놈!”
사황이 뒤집어진 눈으로 발작하려 들자 천괴가 나직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그만하라.”
천괴가 느릿하게 검을 거두며 다시 조휘를 응시했다.
“혹 네놈은 천외(天外)의 심중을 알고 있는 것이냐?”
천외의 행사?
이 너른 강호를 재패하는 것조차 일생을 걸어도 모자랄 일인데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강비우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조휘도 검을 거두며 침중하게 얼굴을 굳혔다.
“천외의 심중이라…… 과연 노인장은 뭔가 알고는 있는 것 같군. 자리를 옮깁시다.”
조휘가 신법을 밟아 홀연히 사라지자 천괴 역시 엄정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밟았다.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산중의 골짜기.
조휘가 먼저 한 바위 위에 아무렇게 걸터앉았다.
“이제 말해 봐요.”
그때 조휘의 감각권에 막강한 의형지도가 감지되었다.
상대가 자신의 모든 의념을 동원해 의념의 장막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내 조휘와 천괴가 서 있는 공간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자 그의 묵직한, 한편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토해져 나왔다.
“난 그의 노예였다.”
“노예? 그?”
조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천괴의 얼굴이 더욱 음울해졌다.
“그의 정체는 나도 모른다. 그는 그저 나를 실험했지.”
“실험? 무슨 실험이죠?”
“과거에는 그에게서 성공적으로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나를 단지 놔준 것이다. 어쩌면 그것조차 그자의 실험일지도 모르지.”
점점 의문만 늘어 가는 느낌.
“아니 그러니까 어떤 놈이냐고요.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체구는? 생긴 건?”
그런 조휘의 질문에 허탈한 표정으로 웃고 마는 천괴.
“노부는 그의 형상(形象)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 언제나 들려온 것은 목소리였지.”
“목소리?”
아오!
무슨 스무고개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당시 그곳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파의 쟁쟁한 후기지수들, 이름 모를 새외인들, 심지어 천마성의 젊은 마인들도 있었지. 그들 또한 나처럼 수많은 실험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 나처럼 도망가진 않았지.”
“잠깐만, 잠깐만요.”
조휘의 심중에 뭔가 감이 잡혔다.
천하의 기재들을 모아 비밀리에 무공을 실험한다?
“하나만! 하나만 기억해 내 주시죠!”
“무엇을?”
조휘가 의문으로 가득한 천괴의 두 눈을 강렬하게 마주 바라보았다.
“그곳에 제갈(諸葛)가의 후기지수들도 있었습니까?”
난 또 뭐라고.
천괴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곳에는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가장 많았다. 당연히 오대세가도 있었지.”
“오대세가? 그럼 구파일방도?”
“그렇다.”
순간, 조휘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의 실험’이라는 것이 끝난다면? 그 후기지수들은 어떻게 되죠? 무슨 임무에 투입됩니까?”
“나는 도망쳤기에 모른다.”
그 순간.
쩌저저저적!
소름 돋는 파괴음과 함께 천괴가 펼쳐 놓은 의념의 장막이 깨어지고 있었다.
조휘가 위쪽을 바라보자 마치 세상이 균열되는 듯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천괴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
엄청난 타격을 받은 천괴가 칠공(七孔)으로 피를 흘리며 씹어뱉듯 처절한 신음을 삼켰다.
“으음…… 결국 왔군.”
조휘가 균열하는 공간을 쳐다보며 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익숙한 느낌.
“육존신!”
조휘의 전신에서 활화산과 같은 거력이 피어올랐다.
강호의 절대자로서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천괴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지옥 같았던 당시의 오 년.
목소리 외에는 단 한 번도 진면목을 보지 못했지만 천괴는 상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긴 생애에 비춰 보면 그야말로 짧은 시간에 불과했으나 그 어떤 기억보다도 선연하게 남아 있는 그때.
어떤 감정도 없는 무채색의 목소리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알려 주던 바로 ‘그’라는 것을.
그런 ‘그’가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상공에 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되 전혀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 자.
결국 천괴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애써 잊고 살아왔을 뿐, 자신은 결코 그때로부터 한 발자국도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으음…….”
조휘는 그의 엄청난 존재력에 답답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영압(靈壓).
허나 그런 육존신의 어마어마한 존재력에 고통받는 와중에서도 조휘는 그 마음이 확신으로 물들었다.
상대에게서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는 마치 무생물과 같아서, 일말의 감정도 한 치의 마음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허무 그 자체.
자신에게서 도망쳤던 금천종, 자신에 의해 소멸된 휘영존신, 그리고 영계 속의 귀암존신이 모두 그러했다.
그것이 바로 신좌의 능력을 이어받은 자들의 공통점.
삼라만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결과로, 인간 본연의 기질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조휘에게 너무나 중요한 단서였다. 앞으로 신좌의 추종자들을 분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휘영존신이 빛이요 귀암존신이 어둠이었다면, 또 다른 육존신으로 추정되는 눈앞의 상대에게는 휘황찬란한 빛살도 구유의 칠흑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무(無).
가장 황당한 것은 분명 그의 몸이 투명하지도 않는데 태양빛이 그대로 투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저런 현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순간 조휘는 귀암존신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형상을 말하는 거라면 그는 무엇으로도 화(化)할 수 있다. 흔한 나무가 될 수도 있고 발에 채는 돌이 될 수도 있지.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은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를 물(水)로 대했으니까.
-그것은 둔갑술(遁甲術)과 같은 법력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물 그 자체였다. 오롯한 영음으로 내게 말을 건네 왔지. 그에게 형상이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귀암존신과 천괴가 했던 말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금 저 무채색의 존재는 신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존재들, 즉 육존신(六尊神)이 아니라 신좌 본체란 말인가?
더욱이 귀암존신도 자신을 신좌의 실험체 운운했고 천괴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을 실험의 노예라 말했다.
조휘가 영계의 존자들에게 물었다.
‘저자가 신좌(神座)입니까?’
귀암존신, 아니 이제는 귀암자(鬼暗子)로 돌아온 그가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아니다. 영압이 느껴지지 않느냐.
‘예? 그게 무슨……?’
-영압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영(靈)을 지녔다는 뜻이다. 신이 된 자에게 인간의 영력 따위가 존재할 리 없지 않느냐. 흠…… 한데 알 수 없구나.
함께 신좌에게 가르침을 받은 육존신이라면 단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조휘에게 알려 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귀암자의 반응을 봐서는 그로서도 아직 상대를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때, 조휘의 감각권으로부터 전해 오는 엄청난 영력의 파동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대신 그의 무심한 시선이 조휘를 향했다.
온통 검은자로 물든 그의 동공.
조휘는 등골이 오싹하여 절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잠깐! 이, 이게 무슨!
귀암자의 동요하고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휘가 서둘러 그런 그의 의중을 살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방금 놈의 존재력이 변했다……! 이건 시, 신(神)이다! 놈은 신좌(神座)야!
“뭐, 뭐라고요?”
조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허나 그의 여전히 무심한 검은자위는 조휘가 차고 있는 의천혈옥을 향해 있었다.
“도망치고 도망친 곳이 고작 그런 곳이란 말인가.”
곧 그의 검은자위가 창대하게 펼쳐진 하늘을 향한다.
“좌(座)에 이른 존재에게 공간의 장애란 없다. 그 간단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니. 귀암(鬼暗)이여, 진실로 어리석구나.”
귀암자는 상대의 음색과 어투로 인해 지극히 당황하고 있었다.
-너는!
“그렇다. 나는 진실로 하늘을 통달하였다.”
하늘과 통하는 자(通天)!
-통천주!
그는 가장 먼저 신좌의 제자가 된 인간으로서 육존신 중에서도 그 존재력이 으뜸이었던 자였다.
한데, 귀암자가 알고 있는 통천존신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로 전광석화처럼 하나의 가설이 스쳤다.
-설마 네놈이 정녕!
좌(座)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신좌밖에 몰랐다.
그런 신좌조차도 오랜 세월 동안 육존신을 실험하며 갖은 노력을 다한 것이다.
한데 저 천괴의 증언!
그의 증언대로라면 통천존신도 신좌를 흉내 냈다는 뜻이었다.
그 역시 수많은 강호의 후기지수들로 하여금 실험을 반복하여 좌에 이르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말인가?
한데 왜?
본인도 오롯한 좌가 되어 다른 좌들과 함께 우주를 아우를 것이지 왜 이토록 인간들의 세상에 관여하는 것인가?
“선택의 순간, 나는 굳이 좌에 오르지 않았다.”
뭐라?
좌(座)의 영원불멸을 포기했다고?
육존신들이 일생토록 좌를 갈망했던 이유는 신좌를 향한 흠모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영원불멸의 절대성을 향한 끝없는 욕망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영원불멸의 삶, 그 오롯한 가치를 포기할 만한 뭔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네놈은 모른다. 끝내 오롯이 탄생한 좌들이 그렇게 우주적 존재가 되어 본들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을 이어 갈 수밖에 없는지.”
통천존신의 무의미한 시선이 머나먼 창공을 가르고 또 갈랐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는 허무로 점철된, 그저 공허하고도 비참한 삶의 연속선.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롯한 의지의 파편을 필멸자에게 투사하여 그것을 관찰하며 희희낙락하는 유희의 삶이 전부다. 나는 차라리 혼세일계에 남아 모든 인간을 내 의지로 유희 삼기로 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신좌는……! 그는……!
통천존신에게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귀암자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 뿐이었다.
“어리석은 귀암이여. 이제야 깨달았느냐. 그는 이미 필멸자들의 세계에 관여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우리에게 물과 불, 바람으로 나타나 그 뜻을 전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혼세일계에 본체를 현신할 수 없다. 좌란 그런 것이다.”
-허면 우리들에게 했던 그 무수한 실험은 뭐란 말이냐!
“귀암, 이 우둔한 자여. 그대의 어리석음이란 도무지 끝이 없구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귀암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관절 반대라니?
설마!
“그렇다 우둔한 귀암이여. 그는 우리와 인연이 닿기 전부터 이미 좌에 오른 자였다. 그가 우리에게 했던 모든 것은, 좌에 오르기 위함이 아닌 오히려 이 혼세일계에 스스로를 현신시키기 위한 실험. 기실 우리는 신좌의 강림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조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림(降臨)? 아니 신이 된 놈이 고작 인간들의 세상에 와서 뭘 하겠다고?”
통천존신의 검은자위가 더욱 짙은 어둠을 발했다.
“인간은 영력이든 무혼이든 스스로 노력하여 자신의 존재력을 강화할 수 있다. 필멸자의 최대 강점이지. 하나 영생불멸의 ‘저주’를 받아들인 좌들은 다르다.”
조휘가 한없이 진중한 얼굴이 되어 통천존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좌에 이르러 영원불멸의 신성이 된 자는 오직 필멸자의 흠모와 존경, 우러름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영혼을 지닌 필멸자의 믿음과 추종을 받지 않고서는 존재력을 강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격이 된 원시천존이 인간들에게 도교를 전파한 이유가 무엇인 거 같은가.”
묵묵히 통천존신의 말을 듣고 있던 조휘의 안색이 순간 핼쑥해졌다.
“설마 그럼!”
“그렇다. 좌에 오른 신좌의 또 다른 이명은 불존(佛尊). 그는 이 중원을 달마(達磨)를 추종하는 승려와 인간들로 가득 채웠다. 그는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으며 스스로의 신성을 강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인간들을 실험하여 이 혼세일계에 다시 강림하려는 자.”
그가 좌(座)의 비밀을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엄청난 정보들을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말해 주는 의도가 무엇인지 조휘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통천존신이 조휘의 목에 걸린 의천혈옥을 가리켰다.
“그대 역시 달마가 인간이었을 때 그의 세 제자였던 자들의 공동전인인 셈. 신좌에 오른 달마의 여섯 제자를 대표하는 나와 틀림없는 동류(同流)다.”
통천존신의 갑작스런 호감.
곧 그가 스스로 두 팔을 너르게 벌렸다.
“내 세상으로 오라.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리니, 내 너와 모든 유희를 함께하겠다.”
이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천괴.
저 절대적인 존재가 분명 자신을 징치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전혀 궤가 다른,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천외의 심중을 가감 없이 밝히고 있었다.
중원의 인간사에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단 말인가?
한낱 필부로서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천외(天外)의 도정이었다.
이건 강호의 일이 아니라 천외의 세상.
한데, 저 소검신은 뭔가?
그는 이미 저런 엄청난 존재들과 그 격(格)을 함께하고 있단 말인가?
저런 엄청난 존재와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세상에 겁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분명 황제든 영웅이든 세상의 그 무엇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소검신은 그에게 강렬한 적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조휘.
“너무 그럴싸해서 순간 속을 뻔했잖아 이 새끼야.”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는 척, 마치 둘도 없는 동류인 척 다가오는 놈들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분명 진실과 거짓을 반씩 섞어 그럴싸하게 꾸몄을 것이다.
“이 새끼가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중원의 역사도 모르는 놈인 줄 알아?”
조휘의 갖은 욕설에도 통천존신은 입을 굳게 닫고 침묵만 유지하고 있을 뿐.
“귀암자 어른으로부터 네놈의 성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넌 육존신 중 탐욕이 가장 많았어. 그런 놈이 과연 신좌의 길을 포기했을까?”
조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맞춰 볼까? 너는 아마도 육존신 중 신좌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자겠지? 그 옛날 통천교가 발호했을 때 그들의 교세 확장 속도는 기존의 중원 선종(禪宗)과 도교(道敎)를 아득히 능가하는 것이었지.”
-과연! 그거다!
조휘의 생각을 읽은 듯 귀암자도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순 바보 아닌가? 신좌의 영원불멸을 포기하고 인간의 유희를 선택했으면 통천교도 진즉에 없앴었어야지. 신도들을 그만큼이나 확보한 주제에 뭐? 좌에 오를 생각이 없다고 미친놈아?”
통천교(通天敎).
지금도 은밀히 퍼져 나가고 있는 통천교들의 교리는 너무도 위험하고 급진적이어서 당대의 황실도 긴장하고 있는 엄청난 사안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활동하여 쉽게 본진과 배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야, 통천교의 신은 살아 있는 활신(活神)이라매? 칭호도 엄청 많더라? 천태활신, 천지전능 그리고……풉!”
조휘가 피식 웃으며 곧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작명 센스 봐라 싯팔. 진짜 어이가 없는 놈이네. 뭐? 천괘통수(天卦通數)?”
하늘의 점괘와 수에 통달한 자.
“넌 임마 칭호부터 통수야. 반드시 뒤통수를 칠 놈이지. 신도들을 수십만 명씩이나 확보해 놓고 그렇게 차근차근 신좌에 오를 준비에 여념이 없는 놈이 뭐? 유희? 유희이이이이?”
조휘의 두 눈에 익살스런 섬광이 번뜩였다.
“당신 아직 신좌에 오르는 방법 못 찾았지?”
무림에 떨어진 현대인 10
BUKDU NEO ORIENTAL FANTASY STORY
청루연 신무협 장편소설
지은이ㆍ청루연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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