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7
7 章>
남궁성찬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야 본 노를 찾아오시다니. 가주께서 정무에 바쁘셨나 보오.”
평소 좀처럼 밖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남궁수였지만, 미미하게 떨리는 손끝과 동요하는 기색이 가득한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
연신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
사흘 전 불쑥 찾아온 백부가 내민 것은 논검을 복기하고 해석해 놓은 오십여 장 분량의 논검 기록.
정무에 지쳐 잠시 잊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모두 읽어 봤다.
삼재검(三才劒).
흔하디흔한 삼류 검법.
그러나 논검 기록 속의 삼재검은 전혀 다른 검법이었다.
아니, 검법 자체는 다를 게 없었으나, 공수의 변환 그 적재적소 운용이 차원이 달랐다.
이화접목.
사량발천근.
비틀고 막고 비끼고 내려치고 쳐 올리고 찌르는 그 간결한 삼재검의 동작들이 이렇게 고절한 무리(武理)처럼 작동한다?
누구나 말은 쉽게 한다.
철저한 기본기가 바탕이 될 때 비로소 한 사람의 무학이 완성된다고.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인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기본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하다.
명문세가의 무공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매일같이 마음을 정갈히 하고 내공을 단련한다.
실전에 대비해 늘 안광을 날카롭게 벼리고 청각을 민감하게 열어 감각을 점검한다.
최적의 투로(鬪路)를 찾기 위해 명상에 게을러서도 안 되며, 실제의 대련을 통해 반드시 이를 확인한다.
자신의 육체를 끊임없이 관조하여 기혈을 단련하고 부족해진 근맥이 있다면 이를 가다듬는다.
내기를 폭발시키는 시점을 연구하고 초식에 쓸모없는 동작이 있다면 이를 정제하며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바로잡는다.
이처럼 명문세가의 무공이란 늘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修身)이다.
제왕검형.
창궁무애검.
그렇게 매일같이 한 초식 한 초식을 갈고닦으며 평생을 매진해 온 자신조차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이 검의 길.
과연 무학에 완벽이란 것이 있을까?
그것은 한 인간의 일생으로는 결코 감당하기 힘든 경지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논검 기록 속의 삼재검은 지금까지 자신이 본 유일무이한 완벽(完璧)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생경한 감정.
강호의 일곱 절대자, 칠무좌의 일인인 창천검협 남궁수.
그런 그에게도 이 논검 기록의 삼재검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일생을 살면서 이처럼 하나의 완벽한 무공을 단연코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완벽(完璧)이라는 단어가 주는 절대성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화산(華山)입니까?”
으스러지도록 꽉 깨문 입술.
남궁수는 칠무좌의 제일좌, 화산의 자하검성(紫霞劒聖)을 떠올렸다.
당대의 천하제일인.
같은 절대의 경지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자.
그가 아니라면 천하의 그 누가 삼재검으로 이만한 조화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아니외다. 가주.”
남궁수의 두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남궁성찬이 흐뭇하게 웃었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니 가주께서도 그저 거기서 뭔가를 얻을 수 있길 바라오.”
말을 끝낸 그가 곧 내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창천의 기운이 그의 눈을 가득 적신다.
얼굴에 놀람이 스친 것도 잠시 곧 남궁수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대공을 경하드립니다. 백부님.”
그들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논검 기록이, 검의 조종(祖宗)이자 신(神)의 흔적이라는 것을.
* * *
만약 안휘에 남궁세가가 없었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화씨검문은 그 위세가 대단한 문파였다.
그들의 독문검법인 도화십일검(桃花十一劒)은 화산의 이름 높은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곧잘 비교될 정도로 대단한 검법이었다.
그들의 뿌리는 전설의 도화도(桃花島).
그 명성 하나만으로도 강호에서의 입지를 다지기에는 충분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씨검문의 문주 화이강 대협이 갑작스럽게 괴질에 걸려 급사한 후로 화씨검문은 쇠락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인 화서명은 가문을 이끌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무공의 자질을 떠나 인성이 결여된 인간이었다.
화씨검문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쉬쉬하고는 있지만 합비에서의 화서명의 평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객잔과 기루에 외상을 깔아 놓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문의 위세를 이용해 양민들의 돈을 떼먹거나 심지어 여인들을 희롱하는 일도 잦았다.
합비의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칭하는 그의 별호는 화씨견자(華氏犬子).
그의 아버지인 화이강 대협은 인품이 호협하고 사람 좋기 그지없는 호걸이었으나, 그런 아버지의 십분지 일도 따라가지 못하는 개망나니라는 뜻이었다.
“호오! 제갈세가의 영웅들이 이곳에 다 계셨구려?”
객잔의 구석에서 애써 화서명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제갈세가의 제자들이 똥 씹은 얼굴로 굳어 버렸다.
화씨검문이라는 후광만 없었다면 상대도 하기 싫은 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인사를 건네 오는데 화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제갈세가의 제갈운이 마뜩치 않은 얼굴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소협. 그간 잘 지내셨죠?”
“아니 이게 누구요? 소제갈(小諸葛) 제갈운 소협이 아니시오?”
누가 봐도 과장된 표정과 몸짓.
자신이 제갈세가의 쟁쟁한 제자들과 친분 있는 사이라는 것을 주위에 과시하는 듯한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때, 객잔의 주렴을 걷고 일단의 청년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청색비단의 영웅건.
화려한 수실의 요대.
그들이 허리에 찬 모든 검의 손잡이에 박혀져 있는 진한 청색의 벽옥(碧玉).
그들은 다름 아닌 대남궁세가가 자랑하는 후기지수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늠름한 청년이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위압감이 드는 강렬한 안광.
스물을 갓 넘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가슴 어름에는 청색 수실의 커다란 용(龍)이 새겨져 있었다.
청룡의 표식이 의관에 새겨졌다는 것은 그가 곧 창천검수(蒼天劒手)라는 뜻.
남궁세가에서 갓 스무 살의 검수가 창천검수의 위(位)에 오른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소검주(小劒主)!”
그는 남궁세가주 남궁수의 첫째 아들이자, 이미 안휘에서 ‘소검주’라 불리며 명성이 자자한 남궁장호.
남궁세가는 물론 합비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장차 가주가 되어 세가의 미래를 이끌 재목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합비가 자랑하는 안휘제일 후기지수.
객잔의 이층에서 그런 그를 바라보던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이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은 곧 열릴 소룡대연회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사내.
이번에도 화서명이 눈치 없이 나섰다.
하지만 그가 관심 가지는 대상은 남궁장호가 아니었다.
“소저!”
일층을 향해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는 화서명.
그런 화서명을 발견한 남궁소소의 고운 아미가 와락 찌푸려진다.
“어떻게 날이 가면 갈수록 이렇게 예뻐지신단 말이오?”
화서명이 사람 좋은 얼굴로 푸근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건네 왔지만 남궁소소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오랜만이네요.”
화서명의 행동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남궁장호가 얼음장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경박한 것은 여전하구나.”
“하하! 장호 형님!”
화서명이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일행을 번갈아 훑으며 말했다.
“소검주와 소제갈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과연 소룡대연회라 이겁니까?”
남궁장호가 듣기도 싫다는 듯 질끈 눈을 감았다.
가문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결코 함께하지 않을 자들과의 동행이었다.
도대체 가문의 어르신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들과 함께 섬서행(陝西)을 명하신 걸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화서명은 차치하고서라도, 저 제갈세가의 서귀(書鬼)들과는 절대로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한낱 붓 따위로 아버지의 위명을 깎아내리기에 혈안인 놈들이다.
강호풍운록의 만박자를 생각하면 곧바로 발검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남궁장호가 곧바로 일층 한켠의 자리에 앉자,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들도 차례대로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착석한 후 남궁장호는 무심한 음성을 다시 내뱉었다.
물론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앉아 있는 이층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요기만 해결하고 곧바로 출발하지.”
남궁소소는 사내들의 이런 묘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으로 기분을 달래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녀가 점소이들이 분주히 지나다니고 있는 주방 입구를 쳐다보다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조휘 소협?”
객잔의 점주와 연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는 분명 조휘였다.
“아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아니, 이놈이? 원하길 뭘 원해? 내가 왜 내 밑천을 네놈에게 알려 줘야 되냐고!”
연신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점주.
처음에는 비싼 요리를 잔뜩 시킨 손님이라 호감이 생겨 질문에 이것저것 대답해 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꾸만 ‘가장 잘나가는 요리가 뭐냐’, ‘식재료는 어디서 공급을 받냐’, ‘하루에 재고는 얼마나 생기냐’, ‘실력 있는 주방장들은 어떻게 수급했냐’, ‘점원들의 월봉은 얼마냐’ 등등 민감한 질문들만 해 댔다.
이 정도에서 눈치를 채지 못하면 바보다.
이 어린 녀석이 객잔을 열려는 것이다.
보나마나 돈 좀 만지는 상단의 자제일 것이리라.
조휘는 조휘대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객잔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시장 조사차 여러 객잔을 돌고 있는데, 아무리 점주들을 꼬드겨 봐도 원하는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조가철방은 이미 아버지가 깔아 놓은 것이 있어서 사업을 확장하기 쉬웠지만 객잔은 전혀 다른 영역의 사업.
아무런 노하우나 사전 정보 없이 뛰어들 수는 없었기에 조휘는 그야말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또 누군가가 객잔의 주렴을 거칠게 걷으며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헉헉! 아우! 내 의제!”
조휘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정재 형님?”
그는 바로 화룡상단의 셋째 공자 상관비였다.
얼굴에 반가움이 떠오른 것도 잠시, 상관비가 원독 어린 표정으로 품에서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의제!”
그가 내민 것은 안휘철방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서찰.
조휘는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이 총관의 일처리 속도는 끝내준다.
“내가 얼마나 의제를 찾아 헤맸는 줄 아는가!”
상관비는 서찰을 받자마자 철방부터 달려갔지만, 그 빌어먹을 총관이란 놈은 조휘의 행선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께 허락을 구하고 상단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조휘를 수소문했다.
마침내 조휘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청년이 합비의 모든 객잔을 돌며 괴행(?)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오늘 이렇게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일언반구 없이 갑자기 거래부터 끊겠다니? 이게 정말 의! 제! 의 진심이란 말인가?”
유난히 ‘의제’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상관비.
“그게……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굳어 버린 상관비.
곧 그가 버럭 노성을 내질렀다.
“경쟁 관계의 상단이라 할지라도 이런 경우는 없었네! 어떻게 달포에 천오백 냥을 거래하던 상단에 협상의 기회조차 한 번 주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의제와 나는 의형제로 맺어진 사이 아닌가?”
그러나 조휘의 두 눈은 물빛처럼 투명할 뿐이다.
“저 역시 형님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하셔야죠.”
“의제!”
“또 제가 마치 기회를 드리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는데, 제가 얼마나 기회를 드렸습니까? 만날 때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만날 때마다 조휘는 다른 상단의 구애를 넌지시 언급하며 거래가를 조정하려고 했으니까.
“저와의 거래를 통해 한 달에 형님께서 벌어들이는 이문이 자그마치 금자 백이십 냥입니다. 금자 백이십 냥이 얼마나 큰돈인지는 상인인 형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잖아요?”
순간 상관비는 소름이 돋았다.
안휘철방을 통해 벌어들이는 자신의 이문을 조휘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일 거래처로 그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은 화룡상단의 수많은 거래처들 중에서 안휘철방뿐이었다.
“의형제?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어느 아우가 형에게 한 달에 금자 백이십 냥을 일방적으로 계속 헌납합니까? 그런 관계는 형제가 아니라 왈패나 산적 간의 거래…… 즉 상납 같습니다만?”
그래도 상관비는 억울했다.
곧 그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래도 내가 의제에게 안정적으로 주괴를 공급해 주기 위해 얼마나…… 헉?”
갑자기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검 모양의 패(牌).
패의 중심에 선명하게 양각된 창천(蒼天)이라는 글씨.
조휘가 내민 것은 틀림없는 창천검패였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 상관비.
‘아…….’
저 검패는 안휘제일상단을 다투는 자신의 화룡상단에도 없는 것.
창천검패면 이 안휘에서 철광석을 구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제야 상관비는 깨닫는다.
다시는 자신의 의제와 ‘거래’라는 관계로 묶일 수 없다는 것을.
그만큼 창천검패를 지녔다는 것은 이 안휘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조휘가 내민 창천검패를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객잔의 점주.
“아이고 공자님! 제가 몰라 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음?”
조휘가 어색한 얼굴로 굳어 있는 그때.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본가의 검패를 지니고 있는 거지?”
어느새 조휘의 곁으로 다가온 엄청난 기도의 청년.
그는 바로 소검주 남궁장호였다.
‘와…….’
영웅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키가 크고 잘생겼다거나 체구가 다부지다거나 하는 그런 상투적인 묘사로 표현될 수가 없었다.
이건 뭐 인간의 아우라가 틀리다.
이게 바로 무림인의 ‘기도’라는 건가?
조휘는 내심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남궁장호의 첫인상이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조휘가 정중히 포권했다.
“저는 조가…… 아니 안휘철방의 조휘라고 합니다.”
“……안휘철방?”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남궁장호.
들어 본 적이 있나 싶어 고민하는 태가 역력하다.
철방이라면 대장간이다.
쇠붙이나 두드리는 자들에게 창천검패? 사칭하는 자인가?
불과 이 년 전에도 가짜 창천검패로 온갖 사기를 쳐서 합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자가 있었다.
“검패를 내게 보여라!”
그때, 남궁소소가 서둘러 다가와 남궁장호의 팔을 붙잡는다.
“오라버니! 이 창천검패는 틀림없이 본 세가가 발허한 것이에요. 이미 조휘 소협은 본 세가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시랍니다.”
남궁장호가 마뜩찮은 얼굴로 조휘를 훑으며 대답했다.
“……유명?”
남궁소소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라버니는 어제 폐관에서 출관하셨으니 모르는 게 당연해요. 나중에 창천담로원…… 아니 단주님들만 뵈어도 알 수 있을 거예요.”
남궁장호가 조휘를 향한 시선을 풀지 않으며 다시 의문을 표했다.
“본 세가에 대단한 명검이라도 바친 건가?”
오빠의 식상한 상상력에 터져 버린 남궁소소.
“호호! 그런 것이 아니에요. 소협은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랍니다.”
“무공?”
남궁장호의 눈빛이 달라진다.
타는 듯한 열기.
곧 그가 기감을 최대로 끌어올려 조휘를 탐색했다.
그런데, 내력은 물론이고 벼려진 기운도 없다.
무공을 익혔다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남궁소소가 허튼 소리나 할 사람은 아니다.
남궁장호는 자신의 안목이 잘못되었나 싶어 계속 조휘를 살피고 있었지만 무공의 흔적이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병장기를 익혔다면 당연히 거칠어야 할 검결지도 깨끗했고, 안광(眼光)도 벼려지지 않았다.
무인과 일반인의 가장 다른 점이라면 안광이다. 무인은 가장 먼저 ‘보는 법’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휘는 그 어떤 외공(外功)도 익히지 않았다.
또한 조휘는 이미 내공의 가속자.
전신이 단전화되어 내력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조휘와 같은 경지를 이룬 자가 아니라면 절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남궁장호는 확신했다.
“지금 나와 장난하는 것이냐? 이 자는 결코 무인이 아니다.”
“아니, 오라버니 그게…….”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긴 한데 남궁소소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조휘가 진신실력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할아버지와의 논검을 모두 이긴걸요?”
“큰할아버지를?”
남궁소소가 저렇게 친밀하게 큰할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창천검선(蒼天劒仙).
가주이신 아버지만 제외한다면 남궁세가에서 가장 강력한 검수라 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런 어르신과 논검에서 이겼다고?
남궁장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논검은 실전의 한 방편이다.
검을 쥔 흔적도 없는 놈이 무슨 논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르신이 일반인과 논검을 벌였다는 자체도 놀라울 판국인데 지셨다니?
“수십 차례 논검을 하셨지만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하셨다고 하던데요?”
“뭣?”
“그리고 큰할아버지께서 소협을 무기명제자로 삼으셨어요. 아무리 무기명제자라지만 항렬이 있는데 계속 소협께 그런 하대는 좀…….”
“제, 제자?”
황당함이 극에 이른 표정.
하지만 남궁장호는 곧 얼굴에서 황당함을 지워 냈다.
“무공 한 자락 익히지 못한 놈이 본가의 어른이란 말이냐?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본가로 가서 확인해 보시든가요.”
“시끄럽다!”
뾰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는 남궁소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조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검패의 진위 여부는 남궁소소 소저께서 확인해 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조휘.
남궁장호와는 왠지 엮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
게다가 화룡상단의 상관비와도 계속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다.
연신 눈치를 살피고 있던 상관비가 이때다 싶어 남궁장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일전에 먼발치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소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화룡상단의…….”
하지만 남궁장호는 상관비를 향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멈춰라!”
내공이 실린 일갈.
그 압박감에 조휘가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또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창천검패는 본가의 모든 명성을 대리한다. 네놈은 내가 모르는 검패의 주인. 이는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남궁소소 소저께서 이미 검패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주셨지 않습니까?”
남궁장호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나는 지금 본 세가의 가주령을 대리하는 터! 내게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을 했다.
남궁장호가 소검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사실 창천검패의 진위 여부를 가린다는 것은 핑계였다.
일반인 따위가 논검으로 세가의 초극 검수를 이겼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불신. 결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재밌는 놈이구나. 한 사람의 검수로 모자람이 없다. 저 나이에 결코 쉬이 이룰 수 없는 경지다.
머릿속에서 잔잔히 울려 퍼지는 검신 어르신의 음성.
조휘가 묘한 얼굴을 했다.
검신 어르신이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호감을 표현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밟는 맛이 있겠어.
네?
잘못 들었습니다?
-네놈 세계의 말로 ‘참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더냐?
차, 참교육이요?
아니 어르신!
여기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밟았(?)다가는 분명 온갖 성가신 일이 생길 게…….
-시끄럽다. 저놈이 원하는 대로 상대해 주거라.
하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조휘가 하는 수 없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남궁장호의 요구는 간단했다.
“논검!”
조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검신 어르신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내 말을 그대로 전하라. 절대 사족은 섞지 말고.
조휘가 잠시 동안 검신 어르신의 음성을 모두 듣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남궁의 검은 중검(重劒)이자 정검(靜劒)인데, 왜 소검주께서는 쾌(快)와 예(藝)에 몰두하십니까?”
“뭐, 뭣?”
몹시 놀란 기색이 역력한 남궁장호의 눈동자.
조휘가 남궁장호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소검주께서는 틀림없이 점(點)의 무학을 단련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눈을 단련하지 마십시오. 검수가 안공(眼功)을 단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시계(視界)를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네, 네놈이 뭘 안다고!”
“점의 무학은 힘을 폭발하는 그 시점, 그 감각이 천부적이어야만 합니다. 강호에 지법(指法)의 고수가 드문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자질도 자질이지만 점의 무학은 결코 남궁의 검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이 새끼가 자신의 자질을 논하고 있는 건가?
게다가 남궁의 검이 뭐 어째?
항시 냉철한 기도를 자랑하던 남궁장호였지만 지금은 이성이 달아날 지경이다.
“당장 그 요사스러운 입을……!”
“부정하실 요량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발검(拔劒)에 집착하면 팔이 그 모양이 되는 겁니까?”
남궁장호가 속내를 들킨 것마냥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내, 내 팔이 어떻다는 것이냐?”
“우수(右手)가 더 길지 않습니까? 게다가 어깨 부근이 볼록한 것이 운문혈(雲門穴)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군요. 발검에 집착하는 검수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조휘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남궁장호의 팔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오른팔이 살짝 길었다.
오른쪽 어깨의 수실 무늬 역시 약간 위로 올라가 있었다.
“세월의 풍상에도 바스라지지 않고 오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바위의 혼.”
갑작스럽게 뭔가를 읊어 대는 조휘.
‘부변암절(不變巖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굳어 버린 남궁장호.
“천하를 굽어보고 삼라만상을 포용하며 혼탁한 세상을 응징하는 거룡의 길.”
조휘의 잔잔한 음성이 계속되자 남궁장호의 두 눈이 점점 홀린 듯이 반개한다.
‘용비응도(龍飛應道)…….’
조휘의 음성이 조금씩 고양된다.
“격렬하지만 삿되지 않으며 천하를 짓누르다가도 만악(萬岳)을 포용하는 하늘의 본질!”
‘제왕창천(帝王蒼天)……!’
갑자기 조휘가 추상같이 꾸짖는다.
“제왕의 도는 삿된 길로 돌아가지 않는 정(淨)이다! 천하를 오시하지만 자애롭게 포용하는 푸르디푸른 하늘(蒼天)이다! 이백 년 남궁가의 검 그 어디에 사특한 쾌(快)와 잡스러운 예(藝)가 있느냐!”
돌연 조휘가 혼비백산하며 입을 굳게 다문다.
‘조, 좆됐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검신 어르신의 말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말해 버렸다.
어, 어쩌지?
혹시 처맞는 거 아니야?
눈치 없는 상관비의 음성만이 조용히 장내를 휘감는다.
“사백 년인데…….”
남궁세가에 입문하는 검수라면 기본 검공을 익히기 전에 반드시 암송해야 하는 구결이 있다.
창천결(蒼天決).
그것은 무공이라기보다는 세가의 검수로서의 정신을 닦기 위한 하나의 구결이다.
세가의 모든 검공의 기초가 되는 기본 중의 기본.
술에 취한 세가의 입문 무사들이 자랑스레 암송하며 저잣거리를 활보할 정도로 흔하게 알려진 남궁세가의 입문구결.
조휘라는 자는 단순히 그 구결을 읊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궁장호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관통당하는 듯한 격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남궁세가의 소검주라 불리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제왕의 도(道), 창천의 푸르름을 닮아야 할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 마음가짐을 조휘라는 자가 일깨워 준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집착했던 것이.
그의 빠름(快)에 닿을 수 없었다.
수십, 수백 개의 검화(劒化).
그 매화의 빗속에서 일순이나마 절망했다.
화산소룡 청운소.
비슷한 나이에 똑같은 검을 들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내.
그와 함께 육대신룡(六大新龍)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그의 신위는 천외천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보다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결코 그를 넘어섰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공평한 법.
그 역시 성장했을 테니까.
막연히 그의 검속(劒速)을 따라잡으려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예민해지고 거칠어지며 표독해졌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결코 인정하기 싫었던 것.
그래, 그건 두려움이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감정.
그렇게 남궁장호는,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조휘라고 했소?”
남궁소소를 비롯한 세가의 후기지수들 모두가 경악의 얼굴을 했다.
공대(恭待).
그의 무거운 음성은 틀림없는 공대였다.
한 대 때릴(?)까 싶어 자라목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던 조휘가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남궁장호가 피식 웃는다.
“마치 아버지처럼 나를 꾸짖는구려.”
“아…… 그게…….”
정중하게 포권하는 남궁장호.
“이 남궁장호. 그리 보는 눈이 없는 놈이 아니오. 더 이상 그대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소.”
단지 자신을 한 번 살핀 것만으로도, 삿된 길에 빠진 자신의 검을, 그 옹졸했던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리숙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었지만 상대는 감히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고수가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 대단한 화산소룡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어르신의 제자라 할 만하다.
“본디 항렬을 따지자면 사승의 예를 다해야 마땅하나, 미력하나마 소가주의 위(位)를 맡고 있으니 공대밖에 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오.”
더없이 정중한 음성.
예를 취하는 모습만 봐도, 그간 닦아 온 그의 수련이 얼마나 엄정했을지 미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크! 여윽시 정파 클라스! 진짜 쩐다……!’
조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도명가(正道名家)라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사내.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남궁세가의 소가주처럼 자존심 강한 사내라면 더더욱.
한데 보라!
허리를 굽히면서도 당당하고 사승의 예를 거부하면서도 비겁하지 않았다.
조휘는 그가 정말 멋있었다.
치우침 없는 그 모습이.
“하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르신께서 반강제로 하신 일이라…… 소저께서도 마음 쓰지 마십시오.”
조휘도 강호세가의 엄격한 규범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민주사회를 경험했던 자신에게는 너무도 어색한 규범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상관비로서는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검주 남궁장호가 누군가?
무려 남궁세가의 소가주다, 소가주.
화룡상단의 셋째 아들인 자신조차도, 그저 먼발치에서 한 번 바라본 것이 그와 가진 접점의 전부.
무공을 모르는 터라 무슨 말을 주고받은 것인지 상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분위기상 남궁장호가 조휘에게 탄복했고, 이제는 탄복을 넘어 호감마저 느끼고 있는 태가 역력했다.
자신의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 주지 않던 그 대단한 남궁장호가.
이제는 마치 조휘가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면? 전략을 바꿀 때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휘의 ‘의형’ 상관비라고 합니다!”
다시는 조휘와 ‘거래’라는 관계로 묶일 수 없다면, 그와의 친분이라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심산!
실로 끈질긴 상인의 얄팍한 처세술!
남궁장호가 ‘의형’이라는 그의 말에 잠시 관심을 가지는 듯했으나.
“하하! ‘화룡상단’의 셋째 아들이기도 하지요!”
마치 홍보라도 하는 양 유난히 화룡상단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 보는 상관비에게서 금방 시선을 거둔다.
호감으로 가득한 남궁장호의 시선이 어느덧 조휘에게로 가 있었던 것.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사치들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보아 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도 한 잔 나누시겠소?”
“영광입니다. 차보다는 술로 하지요.”
“좋소!”
그렇게 조휘가 먼저 호쾌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상관비는 본전이라도 뽑겠다는 듯 조휘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자, 잠깐! 그럼 이거라도 좀 해 주게.”
상관비가 내민 것은 화룡상단의 매입 장부.
조휘의 두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형님, 대강 좀 하십시오, 대강 좀. 화룡상단의 산법수들은 월봉도 안 받습니까?”
“……헤헤. 의제가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더 빠르지 않은가?”
상관비는 언젠가 조휘의 엄청난 계산 실력을 접한 후, 귀찮을 정도로 장부의 계산을 부탁해 왔다.
“후…… 죄송합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남궁장호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오. 볼일 보시오.”
그런 남궁장호를 향해 적당히 예를 취하더니 곧 조휘가 매입 장부를 읊기 시작했다.
“연마 사백팔십 근, 결웅초 이천육백오십 근, 막초갈 칠백구십 근, 천세모 팔백이십 근, 피견사 삼천이백 필, 견포 삼백십 필…….”
그렇게 조휘는 반각 동안 대충 여든 개 정도의 품목을 천천히 훑더니, 품에서 목탄을 꺼내 장부 한편에 슥슥 계산식을 적었다.
곧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계산을 마쳤다.
“매입 장부에 적힌 여든 두 개의 품목이 전부라면 총 매입가 사천팔백칠십세 냥이네요.”
“사천팔백칠십세 냥?”
“네.”
“고, 고맙네. 의제.”
조휘의 두 눈이 또다시 가늘게 찢어졌다.
“이번 달 포목 매입이 꽤 많습니다? 새로운 거래처라도 뚫은 모양입니다만? 아니면 어디 수요가 좀 생겼나요?”
상관비의 얼굴이 일순 경계의 빛으로 물든다.
“어허! 요즘같이 시세가 쌀 때 미리 매입해 두는 것뿐이네!”
“이봐요, 이봐. 이래서 형님은 뼛속까지 상인이라니까요? 본인 밑천은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탐욕만 가득하니 제가 형님하고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하! 그럼 다음에 또 봄세!”
화급히 사라져 버리는 상관비.
조휘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그때.
-마, 말도 안 돼!
객잔의 이층에서 벌떡 일어나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일층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한껏 청력을 끌어올려 듣고 있던 소제갈 제갈운이었다.
남궁장호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조휘를 안내했다.
“이제 자리에 가십시다.”
“아, 예.”
이층을 슬쩍 쳐다보고 있던 조휘가 자리에 앉자, 객잔의 계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쾅쾅쾅쾅!
제갈운이 미친 듯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전광석화처럼 조휘에게 다가온 제갈운.
“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죠? 왜? 어째서?”
당혹스러움이 가득 담긴 질문.
‘하아…… 얜 또 뭐냐……?’
조휘가 뭐라 말대꾸를 하려던 찰나.
“각기 다른 무게의 품목만 여든 두 개! 그 양도 자그마치 육만여 근과 삼만여 필이 넘었죠! 도대체 어떻게 그런 암산이 가능하죠? 그대는 산신(算神)인가요?”
놀람을 넘어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제갈운.
기문진법(奇門陳法)과 역리(易理), 천문(天門), 토목기관지술(土木機關之術) 등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대부분의 재주들은 산법에 기반하고 있다.
때문에 제갈세가의 제자들은 학문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산법부터 먼저 배운다.
그만큼 제갈세가가 가장 중요시하는 학문이라는 뜻.
이 중원천지에 제갈세가만큼 수를 파고들고 산법에 몰두하는 집단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기어 다닐 때부터 산목(算木)을 가지고 놀며 수를 익혔던 제갈운.
천재들의 소굴이라는 제갈세가에서조차 공명의 환생이라며 소제갈로 칭송받는 그다.
그런 그로서도 조휘의 산법 속도는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무슨 산법을 쓴 것이죠? 격자산법? 주산? 아니, 산기(算機)가 없었으니 당연히 아니겠죠! 필산술(筆算術)의 일종이겠죠? 계척필법? 역측오략?”
뭐래, 싯팔! 그런 게 아니라고!
제갈운의 뜨거운 시선을 암담한 얼굴로 피하기만 하는 조휘.
학자로서 그의 탐구열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설명만 할 수 있다면 솔직히 대답해 주고 싶다.
하지만 현대의 수학을 도대체 무슨 수로 설명하지?
현대의 수학과 중원세계 산법 간의 가장 큰 간극은 바로 제로(0)의 개념.
수학의 역사에서 제로의 발견이란 인간이 불을 발명한 것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이 중원세계에서 제로를 표현하는 단어는 무(無) 혹은 공(空).
제로(0)를 수학적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중원 산법에서의 수(數)란 현대에서처럼 숫자의 조합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객체다.
아직 이 세계 인간들은 제로(0)와 음수(-)를 수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수학적 발견은 적어도 천 년은 지나서야 보편화될 것이다.
이 수학적 차이는 엄청난 비효율을 낳는다.
수를 모두 객체로 인식하고 있다 보니 서로 다른 열에 개수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암산하기 전에 각 열에 대한 덧셈과 곱셈을 설명한 각주가 있어야 했다.
그 각주가 없으면 계산식을 자신밖에 알아보지 못했고, 이는 타인의 검산이 불가능하다는 뜻.
이렇다 보니 현대 수학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의 비효율적인 계산이 되는 것이다.
반면 현대의 사칙연산식은 엄청나게 간단하다. 분수나 소수까지 필요한 계산도 아니었다.
계산할 품목이 많아 식이 조금 다양해진다 해도, 다항식이나 인수분해 정도만 할 줄 아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계산할 수 있는 정도다. 굳이 방정식까지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 간단한 것을 무슨 대단한 초능력인 양 받아들이는 제갈운을 바라보고 있자니 조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문명의 차이가 주는 충격이 그토록 지대하단 말인가?
계척필법? 역측오략?
물론 조휘도 알고 있었다.
이름만 거창할 뿐 지극히 비효율적인 계산법.
수많은 한자로 덧칠된 이 총관의 장부를 볼 때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조휘는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다섯의 수에 공(空)을 곱하면 무슨 수가 되는지 아십니까?”
무림에 떨어진 현대인 2
BUKDU NEO ORIENTAL FANTASY STORY
청루연 신무협 장편소설
지은이ㆍ청루연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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