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71
70 章>
“오오! 이것이!”
조가복합천상루(曹家複合天上樓)의 완성된 모형을 손에 든 채로, 마치 눈물을 흘릴 기세로 감동하고 있는 제갈운.
제갈운에게 모형을 가져다준 장인들 중에서도 제갈운과 함께 눈물짓는 자들이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역학(力學)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중원 세계에서, 십 층의 고층 전각을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도 없이 정교하게 계측하고 실험했지만 잘못된 설계 때문에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거나 하중의 장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를 수차례.
처음의 몇 번은 곧바로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 순조로웠으나, 문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모형의 붕괴였다.
그간 겪어 온 시행착오는 장인들을 수도 없이 절망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저 모형은 그런 지옥과 같았던 모든 세월의 보상!
그 감동이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업인의 성과.
그런 열정의 결과물은 때론 인생의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했다.
제갈운이 모형을 끌어안은 채로 연신 떨리는 목소리를 이어 갔다.
“정말 이번에는 모든 실험을 견뎠나요?”
장인들의 수석, 남천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모형의 무게에 열 배에 달하는 하중을 장장 두 달이 넘게 견뎌 냈습니다!”
“원인은 역시 지반(地盤) 그 자체였군요.”
모형을 완성하기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것은, 제갈운과 장인들이 모형의 설계에만 집착해 왔기 때문.
현대의 모든 건물들은 건물을 짓기 전에 기초부터 다진다.
허나 터를 닦는 수준에 그치는 중원의 건축법으로 십 층 이상의 고층 전각, 그것도 철골 구조의 건물을 올리려니 지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어쩌면 이것은 단 한 번도 십 층 이상의 철골 구조물을 세워 본 적이 없는 중원의 장인들로서는 당연한 시행착오였다.
“맞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새롭게 개발한 점웅토(粘雄土)로 지반을 다지니 버틸 수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무게의 수왕고를 모형의 꼭대기에 올려도 충분하더이다!”
수왕고(水王庫)는 조가복합천상루의 맨 꼭대기에 올라갈 거대한 수조를 칭하는 이름.
수왕고는 중원의 주거 문명을 혁신적으로 변모시킬 핵심 장치였다.
“열왕로(熱王爐)는요?”
열왕로는 현대 보일러의 중원식 이름.
“하하핫! 걱정 마십시오! 원 무게의 열 배를 견뎌 낸다 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순간 제갈운의 눈빛이 일변한다.
그렇게 그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자.
수석 남천일이 극도로 긴장하며 웃음기를 지워 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뭐라고 했죠?”
“그게…… 굳이 또다시 오랜 실험으로 헛된 재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이…….”
“제가 내린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왜 그 판단을 수석공님이 합니까? 제가 분명 뭐라고 말했습니까?”
“모든 구조물의 하중을 견뎌 내는…….”
“그래요. 저는 분명 ‘모든 하중’을 주문했습니다. 열왕로를 빼면 안 되죠. 수석공님의 확신하는 근거가 고작 소모형을 실험하고 나온 거라면 저에게 찾아오지 말았어야죠.”
제갈운은 실물 모형까지 완벽한 실험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천일이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고 있을 때 마침내 조휘가 당도했다.
“오오! 드디어 완성된 겁니까!”
제갈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아직입니다.”
* * *
“쩝쩝.”
공허에서 삼천 년을 보낼 때만 해도 물 한 모금, 바람 한 점만 느껴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많이 먹고도 여전히 배가 고파 젓가락질을 쉬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참으로 얄팍하고 가련한 존재 같다.
그래, 이렇게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는 거다.
이 간단한 자연의 섭리를 무려 삼천 년 동안이나 느끼지 못했다니.
자신이 미치지 않고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조휘는 새삼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대체…….”
정신없이 만찬을 즐기고 있는 조휘를 지켜보고 있던 제갈운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양의 음식을, 인간이 어찌 이토록 순식간에 섭취할 수 있단 말인가?
포만두 열두 접시, 오향장육 다섯 그릇, 심지어 저 커다란 그릇의 육계열탕은 몇 그릇째인지 셈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제갈운이 아는 조휘는 결코 대식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장일룡이나 남궁장호 쪽이 훨씬 대식가에 가까운 사내들.
조휘는 늘 소식(小食)에 가까운 식습관을 유지해 왔고, 무공이 경지에 이른 후로는 그런 작은 양의 끼니도 잘 챙겨 먹지 않는 인사였다.
때문에 허겁지겁 저토록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는 조휘의 모습이 더더욱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아귀(餓鬼)라도 씐 거예요?”
조휘가 한참이나 오물거리더니 겨우 삼키고는 여전히 밥풀과 기름기로 그득한 입가를 닦으며 제갈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도 삼천 년쯤 굶어 봐. 이렇게 되나 안 되나.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밥 먹는 데 불편하잖아.”
제갈운이 눈을 흘깃거렸다.
“그런데 왜 어제부터 반말이죠?”
“섭섭할까 봐. 서로 예예거리는 건 이제 부회장과 나밖에 없다고.”
문득 그러고 보니 이제 소검신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동료들에게 격의 없이 친우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한 살 더 많은데…….”
“와, 그래도 명색이 소제갈(小諸葛)인데 이렇게 쪼잔했었나? 난 종주잖아! 세력의 종주! 게다가 배분도 엄청나다고!”
“…….”
조휘가 숟가락을 놓으며 더욱 너스레를 떨었다.
“게다가 아까 전에 못 들었어? 내 나이는 지금 무려 삼천 살이 넘었다고. 아직도 못 믿는 거야? 응?”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죠. 그런 곳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잖아요. 내가 볼 때 지금 당신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에요.”
“와! 증인이 있다니까?”
“그 공허라는 곳을 그들과 함께 보냈나요?”
“그, 그건 아니지만.”
“됐어요. 관두죠.”
“와 진짜! 내가 이렇게 믿음을 주지 못했나? 게다가 당신 그 말투! 언제나 너무 여성스럽잖아? 오호, 혹시 남장인가? 확실히 당신 얼굴 너무 곱상해.”
게슴츠레 뜬 눈, 그런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아래위를 훑고 있는 조휘를 마주 바라보다 제갈운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풉! 소싯적 누님이랑 함께 동문수학해서 그런 건데요? 사내대장부를 함부로 여인 취급하면 곤란하죠. 뭐 확인해 보시든가.”
“됐어. 밥맛 다 떨어졌군.”
조휘가 심통 맞은 표정으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자 제갈운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조 소협, 괜찮은 거지?”
소검신도, 회장님도 아닌 조 소협이라…….
문득 조휘는 합비의 객잔에서 제갈운과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5×0=0도 몰랐던 주제에.
참 많이도 컸다.
“당신 말대로 이제 소검신은 강호의 절대자 중 하나야. 일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당신 하나만 바라보고 있어. 당신의 안위는 이제 당신 하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런 거 말고.”
조휘가 제갈운의 가슴을 시선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 있는 ‘마음’을 말해 봐.”
제갈운이 가는 한숨을 내쉬다 자리에 털썩 앉았다.
“친구를 걱정시키지 말라고. 회장 나리.”
역시 당신도 사람의 ‘불꽃’을 지녔구나.
조휘가 흡족한 듯 슬며시 마주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실물 모형의 실험은 언제 다 끝날 것 같냐?”
“두 달.”
조휘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길어. 달포로 줄여.”
“아니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명령이야. 회장의.”
“젠장! 빌어먹을!”
제갈운이 어울리지 않게 욕설을 내뱉자 조휘가 더욱 사악하게 웃었다.
“원래 직장 생활이라는 게 까라면 까는 거야. 월봉을 받는다는 게 다 그런 거라고.”
“하…….”
조휘가 뒷짐을 지며 처소 밖으로 나서다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놈?”
조휘의 두 눈이 초승달과 같은 만곡을 그렸다.
“소천화(小天華) 담희. 어? 그러고 보니 당신도 소제갈, 남궁 형도 소검주…… 요즘 후기지수들 사이에 소(小)를 붙이는 건 유행인 건가? 어? 젠장! 가만 보니 나도 소검신이잖아?”
제갈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소천화는 몰라도 남궁장호과 동급으로 묶인다는 것에 무척 기분이 상한 그였다.
* * *
“음!”
조가피혁공방(曹家皮革工房)을 둘러보며 연신 답답한 신음성만 토해 내는 사내는 바로 소천화 담희.
조가철방을 둘러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그의 정신을 붕괴시킬 만큼 충격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이곳에도 재봉장인(裁縫匠人)따위는 없었다.
커다란 가죽 원단을 펼쳐 원형(原形)의 틀에 맞추어 정교하게 재단하는 자들.
재단된 가죽들을 서로 꿰어 옷감의 기본 형태를 잡는 자들.
뜨겁게 달군 쇠붙이로 문양을 내는 자들과 각종 장식을 세공하는 자들, 가죽옷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각자의 도구로 정교하게 마감하는 자들까지.
마치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시간차도 없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그런 모든 공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무슨 예술 공연을 접하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장인(匠人)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문화 충격!
이름 높은 재봉 장인이, 하나의 완성된 옷을 짓기까지는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사흘은 걸리는 법.
한데 저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일각(一刻)마다 하나씩 완성되어 출하되고 있는 가죽옷, 그런 충격적인 장면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대관절 하루에 몇 벌이나 생산이 가능한 건지?
게다가 가죽의 질감, 화려한 장식 처리, 정교한 마감 등 오히려 일각마다 완성되는 조가피혁점의 가죽옷이 모든 면에서 훨씬 완성도가 높은 듯 보인다.
저런 생산성이라면 상품의 질과 단가에서 경쟁이 불가능하다.
기존 시장의 질서를 모조리 파괴하고 오로지 저 조가피혁점의 가죽옷만 정상에 설 것이다.
지금까지 담희는, 애써 조가대상회를 무시해 왔다.
안휘와 강서 일대에서 이름깨나 날린다고 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신생 상단이었다.
신생 상단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중원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절대자인 천화(天華)의 이름 앞에서는, 그야말로 달빛 앞의 반딧불에 불과한 것이다.
허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런 조가대상회의 평가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냈다.
오히려 그 마음이 극도의 두려움으로 물들어 갔다.
누구보다도 자신은 상인의 눈을 지녔다고 자부하기에, 이 조가대상회의 무서움이 더더욱 뼈저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미 조가대상회의 종주로 하여금 협력을 약속받은 마당.
이제 돌아가서 만금상단의 세력권을 흡수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임에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다.
최대한 이 모든 것을 눈에 담아 가야 했다.
그리고 이런 선진적인 체계를 천화상단에 적용해야만 앞으로 조가대상회와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인 아버지를 설득해야만 하는 가장 커다란 난관이 남아 있겠으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아버지를 설득해야만 했다.
“지낼 만해?”
“아이고 깜짝이야!”
담희가 화들짝 놀라며 뒤쪽을 살피자 그곳에는 빙그레 웃고 있는 조휘가 있었다.
“기척이라도 좀 내 주심이 어떻소이까!”
짜증스런 기색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담희에게로 예의 조휘의 익살스런 음성이 이어졌다.
“하루라도 빨리 상단으로 돌아가 조가대상회의 생산 체계를 적용시키고 싶어서 미치겠지? 꼬장꼬장한 아버지와 상단의 원로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벌써부터 막 가슴이 답답하지?”
“……헉!”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조휘의 질문에 죄를 지은 것마냥 담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소! 그저 호기심이 동해 둘러만 보고 있었을 뿐이외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지금 거기에 너무 깨알같이 새까맣게 적혀 있는데?”
“앗!”
그제야 정신없이 기록해 둔 장부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뒤로 숨기며 너스레를 떠는 담희.
“하핫! 소검신께서는 본인이 유가(儒家)에도 몸을 담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소이까? 그저 간간이 시나 한 편씩 끄적거렸을 뿐이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터.
“이 사람이 누굴 개호구로 보나. 만약 시(詩)가 아니면 당신의 그 손목 잘라도 되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하다 이내 담희가 거친 노성으로 일갈했다.
“뭐! 그래서 어쩔 참이요! 나는 단지 범의 소굴에 들어와 정신만 바짝 차렸을 뿐이외다!”
조휘가 다시 예의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누가 얄팍한 상인 아니랄까 봐 실로 뻔뻔하기 짝이 없구만.”
“…….”
이어 공방의 구석에 있는 가죽 더미 위로 올라가 철퍼덕 자리를 깔고 앉는 조휘.
“나와 내기 하나 할까?”
“무, 무슨 내기를 말이오?”
조휘의 얼굴이 더욱 의미심장한 빛을 발했다.
“과연 당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냐는 거지. 내가 보기에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거든.”
자존심이 상해 점점 구겨지는 담희의 얼굴.
자신이 누군가?
그 이름도 유명한 천화상단의 소천화.
아무리 아버지께서 고지식하다지만 작은 계열상 하나를 맡아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면 반드시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단순한 반복 작업 같지? 돌아가서 그저 본 대로만 따라 하면 다 될 것 같지?”
조휘가 다시 공방을 훑어보며 장중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저들이 그냥 일개 작업자들 같아? 여기저기서 아무나 모아 온다고 저런 질의 가죽옷이 탄생될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아니지. 저들은 모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각지의 유명한 재봉 장인이다. 그런 재봉 장인들에게 단순한 반복 작업을 시킨다는 것은 인생이 부정당하는 심정일 거야. 평생을 자부심으로 지켜 온 자신의 방식을 버리는 거라고.”
“…….”
“당신은 저런 장인의 혼들을 어떻게 설득할 거지? 자부심으로 지켜 온 각자의 방식을 어떻게 포기시킬 거지? 이런 간단한 것들도 해결되지 않고서 그 공방이 유지될 것 같아?”
“…….”
“게다가 저들은 각자 공정의 작업 난이도에 따라 월봉이 틀려. 단순한 육체노동의 양, 반복 작업에서 오는 피로도, 위험 부담의 정도 등 그 모두가 정교하게 월봉에 계산되어 있지. 저런 톱니바퀴와도 같은 생산 체계에서 서로의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각각 작업자들의 월봉, 그 공정한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이란 원래 그래.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지. 내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공정 여기저기서 온갖 고름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고. 당연히 그런 체계는 반드시 무너진다.”
조휘가 다시 예의 사악하게 웃으며 담희를 쳐다봤다.
“단순히 나는 사람들을 통솔하는 문제와 월봉의 체계만 짚었을 뿐이야. 첫 시작부터가 이래. 한데 당신이 보기에도 엄청난 저런 체계에 과연 이 한두 가지 문제만 있을까?”
“…….”
“작업에 소요되는 경비의 지출 권한은 누구에게 일임하지? 그 순간 작업자들 사이에서도 권력과 알력이 생긴다. 그에 합당한 사람은? 과연 이걸 작업자들한테 권한을 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부서를 두어 관리할 것인가? 여기는 또 충성도와 애사심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권력의 속성이란 것이 그래. 사용자 입장에서는 잘 쓰면 돈이고 못 쓰면 독인 거지. 더 말해 줄까?”
담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그만 됐소이다.”
담희가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마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 같다.
소검신 조휘.
이자는 단순히 무인이나 상인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세상이 아는 소검신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일이란 게 듣기 싫다고 피해지는 건 또 아니잖아?”
“아니, 이보시오…….”
폐부를 파고드는 듯한 조휘의 날카로운 언변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력 관리란 게 다 그런 거야. 공수 관리는 또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 몸이 갑자기 아프다, 처갓집 가야 한다, 집안의 기일(忌日)은 또 얼마나 잘 챙기시는지 아주 그냥 천하의 효자, 효녀들이 따로 없어요. 그렇게 빠지는 인원들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열이 넘어. 저런 톱니바퀴와 같은 협업 체계에서 열 명이나 빠져 버린다면? 나머지 장인들은 나오나 마나야. 이가 빠진 톱니바퀴가 돌아갈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그자들을 멀뚱멀뚱 놀게 할 거야? 아니면 모두 퇴근시켜?”
조휘가 두 눈에 불같은 쌍심지를 켰다.
“퇴근시켜 버리면 당장 그다음 날부터 그만두겠다고 아우성일걸? 허면 숙련도가 낮은 시답잖은 자들로 구멍을 메울 수밖에 없는데…… 이건 또 생산성에 문제가 생겨요. 자, 이제 당신이 말해 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야?”
담희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고작 그게 고민할 문제요? 애초에 상단에서 결원(缺員)을 허락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오? 한낱 일꾼들로 하여금 근무 일정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게 만든 체계부터가 문제이지 않소?”
어휴, 누가 미개한 토종 중원인 아니랄까 봐.
저 머릿속에 인권이나 노동 환경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을 리가 없지.
조휘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다 말했다.
“당신은 조가대상회가 단순히 빼어난 물건을 많이 찍어 낸다고 잘나가고 있는 것 같아?”
“갑자기 또 그건 무슨 소리요?”
조휘가 조가피혁공방의 외각 쪽에서 줄지어 짐을 옮기고 있는 쟁자수들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천화상단은 달포마다 충원되는 쟁자수들이 얼마나 되지?”
“으음…….”
짐을 나르는 쟁자수들은 일이 무척이나 고되고 처우도 박해 모든 상단의 일꾼들이 서로 꺼리는 보직이다.
때문에 쟁자수들은 틈틈이 무관을 다니면서 무공을 배워 표사로 전직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불혹(不惑:40세) 전에 그만두기가 대부분.
그나마 성실한 쟁자수들도 근육통과 고열에 시달리며 몸이 축나니 매일매일 나오기도 힘들었다.
하여 쟁자수들을 관리하는 것은 모든 상단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문제였다.
숙련된 쟁자수들이 빠지고 그 자리에 들어차는 건, 늘 두 눈만 뻐끔거리고 있는 새까만 신참.
허구한 날 결원되고 충원하기를 반복하니, 관리하는 입장에서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마 달포에 칠백 명은 가뿐히 넘을 것 같은데…… 아닌가?”
담희는 오금이 저렸다.
그 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미뤄 보아, 분명 이 사내는 천화상단을 제집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반면 우리 조가대상회는 달포에 열 명을 넘지 않아.”
뭐라고?
담희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상단을 조금이라도 경영해 본 자라면 결코 믿을 수 없는 말.
“아침부터 농이 지나치시구려.”
“우리 이 총관에게 확인해 봐도 돼. 친절히 근태 장부를 보여 주지.”
조휘가 싱긋 웃으며 다시 시선으로 조가피혁공방의 일꾼들을 훑는다.
“저 단단함을 보고도 조가대상회의 각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의 소천화라는 별호를 그만 내려놔야 하지 않겠어?”
조휘의 시선을 좇아 함께 조가피혁공방 내부를 바라보던 담희가 이내 가득 입술을 깨물며 발악하듯 조휘에게 되묻는다.
“그래서 이 소천화에게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요? 고작 내게 찾아온 목적이란 것이 소검신의 위세로 잘난 척이나 늘어놓는 것이 다란 말이오?”
조휘가 더욱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조가대상회의 분업(分業)식 경영 기법을 천화(天華)에 전수해 줄게.”
“뭐, 뭐라고!”
순간, 조휘가 엄정하게 얼굴을 굳혔다.
“어차피 우리 조가대상회도 생산 거점을 다변화할 때가 됐어. 물류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든.”
가만,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조가대상회의 생산 거점?
설마 이자가……!
“사실, 경영 기법이라는 건 상단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그걸 전수해 준다는 건 솔직히 너무 터무니없는 거라고.”
담희가 솟구치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불같은 노성을 발했다.
“닥치시오! 그 말은 천화가 생산하는 물건에 조가대상회의 표식을 찍자는 뜻이지 않소!”
담희의 말대로 조휘의 음흉한 속내는 바로 OEM, 즉 주문자 생산 방식이다.
조가대상회의 상품을 제조하도록 천화상단에 위탁하고, 그렇게 완성된 상품을 조가대상회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방식.
이는 현대의 초일류 기업이 생산성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하청 업체를 두는 전형적인 경영 기법이었다.
기실 조휘는, 천하에 이름 높은 천화상단을 고작 자신의 하청 업체로 부리려는 것이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는 거야. 정중히 제의를 드리지. 상품 가치의 일 할에 달하는 이익을 반드시 보장하겠어. 물론 원가는 제외. 그 정도만 먹어도 당신들에게는 엄청난 이익이라고. 더구나 본 회의 경영 기법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 할!”
거칠게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아차!’ 싶은 담희.
어떤 상인이라도 이익금부터 제시하면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다.
협상이 주는 긴장감, 원하는 가격을 쟁취했을 때의 그 성취감.
담희 역시 그런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곡예를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상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협상에 응하는 것 자체부터가 바보 같은 짓.
이는 상인의 본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조휘의 노림수였다.
“일 할 오 푼!”
“일 할 팔 푼!”
“일 할 육 푼!”
이미 상대의 의도에 말려들었다면 되도록 최대한의 이득을 보아야만 했다.
담희와 시선을 마주하며 맹렬히 기 싸움을 벌이던 조휘가 이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졌다 졌어. 일 할 칠 푼으로 하지.”
“좋소!”
호기롭게 대답하며 슬며시 미소 짓고 있는 담희.
본인이 승리한 것처럼 느끼겠으나 실상 조휘는 연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고작 일 할 칠 푼을 먹고 조가대상회의 생산 거점이 되겠다니!
이는 단순히 이익에만 결부된 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이 천하에 퍼진다면 조가대상회의 위상이 어찌 되겠는가?
그 무형의 가치까지 셈을 가늠해 보니 조휘는 마치 하늘을 나는 마음이었다.
아아, 소천화!
그는 매우 좋은 호구였다.
“그리고 그 문제도 매듭짓자고.”
“또 무엇을 말이오?”
조휘가 또다시 예의 사악하게 웃었다.
“만금상단의 세력권을 흡수하는 문제 말이야. 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지! 그리고 그 떡고물을 같이 먹을 생각도 버리겠다!”
순간 담희가 지극히 놀랐다.
“뭐, 뭐라고!”
비록 지금은 무너졌으나 만금상단은 천화상단과 함께 중원의 상계를 양분하고 있던 거대한 상단이다.
담희 역시 그런 거대한 만금상단의 상권을 적당히 나눠 먹자는 심정으로 소검신을 찾아온 것.
그렇지 않고서는 조가대상회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한데 놀랍게도 소검신은, 그 거대한 상권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천화를 돕겠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소검신의 황당한 심계인지 담희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조휘는 항상 떡밥을 먼저 뿌린다.
그렇게 상대의 마음에 혼란을 일으킨 후, 교묘한 언변으로 점점 이득을 취하는 전형적인 그의 심계.
“대신에 이거 먼저 찍자.”
조휘가 품에서 꺼낸 것은 일종의 약정서였다.
소천화의 이름으로, 반드시 천화상단의 비단길을 내어 줄 것을 약속받는 약정서.
물론 이 문제는 일전에 이미 소검신과 구두로 합의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때 역시, 소검신의 격장지계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게 호기를 부렸던 마당.
상대가 실권(實權)도 하나 없는 애송이 운운하는데 거기서 발끈하지 않을 사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담희는 몇 번이나 그 일을 후회했다.
비단길 문제는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인해 아버지께 닥칠 일이란, 황제에게 찾아가 조가대상회를 편들고 홍보하는 일일 것이리라.
“아니 그건…….”
그렇게 담희가 우물쭈물하자 조휘가 예의 비웃음을 머금었다.
“와, 이제 와서 다른 소릴 하겠다고? 막상 돌아가서 아버지와 원로를 설득하려니 쫄리시나 보네? 내가 이래서 실권 없는 애송이 소주(小主)들하고는 놀고 싶지가 않아. 여전히 이불에 오줌이나 지리는 애새끼들과 무슨 협상을 하냐고.”
“…….”
그때, 각 사업장을 시찰하던 장일룡이 조휘를 발견했다.
“어? 여기서 뭐 하시우 형님?”
조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난 꾀죄죄한 몰골의 장일룡을 바라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휴…… 일룡아.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소천화 담희 공자와 서로 대사를 논하던 중이 아니었수?”
조휘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다시 담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사(大事)는 무슨 얼어 죽을 대사. 상단의 일로 말 섞을 가치도 없다. 그냥 오줌싸개 애송이야.”
장일룡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다.
“아니 그럼 실권도 없이 여길 왜 왔단 말이우? 유람이나 하러 온 거요? 형님. 나도 저렇게 살뜰한 부모님 품에 안겨 애송이 풍류공자로 살고 싶수.”
피식 웃는 조휘.
“꼭 월봉 올려 달란 소리로 들린다?”
“흐흐, 형님 사실 요즘 씀씀이가 커져서 큰일이우.”
“안 돼. 올려 준 지 얼마나 됐다고.”
부들부들부들.
연신 몸을 떨며 멀어져 가는 조휘 일행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는 담희.
저 빌어먹을 소검신의 격장지계에 결코 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의 무너지는 자존심, 그 솟구치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거기 서! 기다리란 말이오!”
“응? 왜?”
서역(西域)의 왕국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중원 상단의 지배자인 천화상단조차 그들의 신뢰를 얻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꼴에 상인이랍시고 비단길을 탐내고 있다만, 제깟 놈이 거래해 봤자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무슨 심보인지 몰라도 무려 만금상단의 영역을 나누지 않겠다고?
소검신다운 패기였으나 반드시 후회할 것이리라.
“그 거래 약정하겠소!”
“오호? 진짜? 정말 아버지와 상단의 원로들을 설득할 수 있겠어?”
화를 내면 지는 거다.
담희가 그 얼굴에 득의의 미소를 그렸다.
“물론이외다. 만금의 영역을 탐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약정서에 명기해 주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 반드시 비단길을 그대에게 내어 주리다.”
“하하!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이 소검신이 말이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내는 아니라고! 봤냐? 과연 소천화라는 별호는 도박으로 딴 게 아니었어!”
장일룡이 호쾌하게 웃었다.
“핫핫핫! 단순한 애송이 풍류공자가 아니셨구려! 이 장 모! 방금 전의 발언을 사과하겠수다!”
담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음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휘와 장일룡을 살피더니 점점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하지만 조휘가 내민 약정서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천화상단의 비단길 사용을 허가받는 것.
더구나 만금상단의 영역을 넘보지 않겠다는 문장 역시 조가대상회의 선명한 인장으로 공증되어 있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눈을 씻고 살폈으나, 그렇게 아무리 살펴봐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약정서.
결국 소천화 담희는 그런 약정서에 소천화의 인장을 굳게 찍고 말았다.
조휘가 약정서를 받아 확인하더니 장일룡을 번쩍 안아 들며 뛸 듯이 기뻐했다.
“하하하하! 우린 이제 천하제일상단을 넘볼 수 있게 되었다!”
“허헛헛! 대단하시우 형님! 그 많은 비단을 서역의 귀족들에게 팔면 도대체 이문이 얼마나 될지 정말 상상도 되지 않수!”
“마, 많은 양?”
조휘가 굳은 얼굴의 담희를 향해 씨익 웃었다. 물론 그 전에 약정서부터 보물 다루듯 소중히 품에 갈무리했다.
“어, 사천회 알지?”
“사, 사천회?”
점점 그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하는 담희.
그의 뇌리에 이내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조휘가 품에서 또 다른 약정서 하나를 더 꺼냈다.
“보이지? 이게 바로 사천회가 유통하는 비단의 전매권이야.”
씨익.
조휘의 비릿한 미소를 바라보며 담희는 그야말로 선 채로 장승처럼 굳어 버렸다.
사천회.
강남(江南)이 생산하는 비단 물량을 팔 할 이상 거머쥔 집단.
시야를 넓혀 중원 대륙으로 확장했을 때도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단 물량은 삼 할 이상이었다.
‘그런 사천회의 전매권이라고?’
털썩.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는 담희.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 비단길은, 천화(天華)의 비단길이 아니라, 조가대상회(曹家大商會)의 비단길이라 불리게 되리란 것을.
그렇게 소천화 담희는 조휘에게 속곳까지 탈탈 털린 채로 천화상단을 향해 돌아갔다.
당연히 조휘는 당장 보름 후부터 물밀듯이 들어올 사천회의 비단을 떠올리니 하늘을 나는 심정이었다.
더구나 비단길 무역을 통해 당대의 서구권, 즉 책으로만 배워 왔던 중세 유럽 문명을 살필 절호의 기회였다.
어쩌면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휘는 묘한 흥분과 기대감으로 휩싸였다.
그런 조휘의 상념을 깨운 것은 이 총관이었다.
“회장님.”
“오호! 이 총관님!”
조가대상회의 창업 공신이며 자신이 가장 믿는 사내 이여송.
언제나 꼼꼼한 일 처리로 조가대상회의 살림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하고 있는 이 총관은 이제 대체가 불가능한 인사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소식은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이 총관도 기분 좋아 보이는 회장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 난처했던지 소식을 전하기를 망설이는 눈치.
조휘 역시 이 총관과 지내 온 세월이 얼만가.
그가 저렇게 우물쭈물하는 모습만 봐도, 그가 가져온 소식이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조휘였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뭐, 한두 번도 아니고 하하! 이번에는 어느 계열상에서 문제가 터진 거죠?”
“계열상이 아닙니다. 회장님.”
“음? 사업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서야 총관님께서 그리 인상을 쓰실 만한 일이 또 있습니까?”
조휘의 넉살을 받아 줄 법한데도 이 총관은 여전히 얼굴이 좋지 못했다.
“상단이 아니라 강호의 일입니다.”
“강호의 일?”
이 총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강호의 노고수들이 저희 조가대상회를 찾아왔습니다.”
“노고수들이요?”
노(老)라는 낱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는 조휘.
강호의 노고수들과 마주했을 때, 경험상 그다지 좋은 기억이 많지 않은 그였다.
“누가 찾아온 거죠?”
“총 세 사람입니다. 각자 별호를 밝혔으나 저의 안목으로는 살필 수 없었습니다. 모두 강호인명록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조휘가 황당하는 눈으로 되물었다.
“아니 별호도 없는 자들이라면 그냥 어중이떠중이 아닙니까?”
“그렇게 판단했다면 제가 이렇게 회장님을 찾아오진 않았겠지요.”
“그럼?”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이 총관의 두 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그 기도가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차려 입은 복식(服飾)이며 고고한 어투로 미뤄 봤을 때 소림과 무당, 화산으로 추정됩니다.”
“아니 그럼?”
강호인명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소림, 무당, 화산의 그것도 ‘노고수’라?
이는 필시 오래전에 은거한 무림의 원로들이라는 뜻.
“일단 가 보죠.”
“예 회장님.”
반각 후, 조휘가 이 총관과 함께 접객전으로 당도했을 때, 이미 그들은 등에 이고 온 봇짐을 풀어 헤친 채 너절하게 퍼질러 앉아 각자의 술병을 들이켜고 있었다.
“크으, 젠장맞을! 술맛이 무슨 독(毒) 같냐.”
“뭐? 지금 뭐라 했느냐? 본 승(僧)더러 좆같다고?”
거나하게 술을 쭉 들이켜던 도사가 태극 문양의 낡은 도관(道冠)을 고쳐 쓰며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게, 화산 도우(道友). 저 중놈의 귀가 드디어 맛이 갔어.”
매화 문양의 도관을 머리에 쓴 도인 역시 혀를 끌끌 찼다.
“십 년 전부터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청력이니 어련하겠소. 하기야 제승 선배는 이미 극락왕생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연배이지 않소.”
둘의 대화를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던 제승(制僧)이 그제야 흡족한 듯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미타불, 그래도 역시 화산 말코가 훨씬 됨됨이가 되었구나. 극락왕생을 빌어 줘서 고마우이. 본 승 역시 자네의 우화등선을 기원하겠네. 자 내 곡차도 한 잔 받게나!”
이를 지켜보던 조휘가 혀를 찼다.
극락왕생밖에 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 본 뜻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었다.
“아이고, 제승의 청죽주(靑竹酒)라면 사양하겠소이다.”
아주 오래전 강호의 사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제승이 빚어내는 청죽주를 결코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라!
소림의 웅혼한 내공으로 증류, 그렇게 빚어낸 제승의 술은 그야말로 마비산(痲痹酸)에 가까운 독주였다.
아무리 이름 높은 고수라 할지라도 내공으로 그 취기를 해소할 수 없을 정도.
무당의 노도사는, 무슨 중놈이 독하기로는 천하에 둘도 없을 독주를 즐기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쯧쯧, 중놈의 행실이 저러니 고매한 불존께서 손수 찾아오실 리가 있나? 중놈아, 네놈이 성불하지 못하는 것은 다 그 청죽주 때문이다.”
“닥쳐라! 무당말코야!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부리지 못하는 놈이 요설만 잔뜩 늘었구나!”
“어이쿠? 그놈의 귀는 제멋대로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것이냐?”
“이노옴!”
“흥! 음양태극(陰陽太極)이야말로 만물을 상징하는 일원(一元)이거늘, 비우고 비워 내기만 하는 중들의 공(空)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빼어난 도리다.”
“그래서? 그 대단한 태극의 양의(兩意)가 언제 본 사의 제석비공에 한 번이라도 우위를 점한 적이 있더냐?”
또다시 제승이 양 문파 간의 경쟁적인 역사를 운운하자 무당의 노도사가 술병을 거칠게 내던지며 노성을 내질렀다.
“이 썩어 문드러질 중놈이!”
“아이고 장 진인(張眞人)! 후대의 제자들이 모두 저 모양 저 꼴이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그 머나먼 선계에서도 이를 지켜보다 천불이 날 것이 분명한데 과연 도력이나 쌓을 수 있겠소이까! 아미타불!”
그런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조휘.
이건 또 무슨 버전의 노인정이지?
“무량수불…… 거 노형들께서는 체통을 좀 지켜 주시오. 후배가 지켜보고 있지 않소이까.”
“음?”
조휘를 발견한 제승이 술병을 내려놓고는 그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에 한껏 호기심을 그렸다.
“어허, 실로 기이한 노릇이구나! 채우고 또 채우기만 한 놈이 어찌 저런 무량한 의념을 지니게 되었을꼬?”
이내 가는 한숨과 함께 나직이 패드립(?)을 시전하는 제승.
“불존께서도 무심하시지. 당신의 가르침대로 평생을 비워 내고 비워 낸 제자에게는 그렇게 한 자락 깨달음조차 허락지 아니하시더니, 저런 욕심 많은 어린놈에게는 저리도 쉬이 경지를 내주신단 말인가. 대자대비(大慈大悲)는 개뿔이! 이제 안 믿어 그딴 거!”
이내 그가 자신이 걸치고 있던 낡은 황색 승포 자락을 내던지더니 냅다 대자로 누워 버렸다.
조휘가 황망해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 소림승들은 자신의 가사(袈裟)를 제 몸처럼 소중히 여긴다고 들었는데…….”
“이딴 천 쪼가리가 무슨 내 몸씩이나 된다고! 흐잉!”
토라진 제승을 뒤로하고 무당의 노도사가 나섰다.
“흐음…….”
곧 그가 조휘에게 다가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위아래를 훑더니 뜬금없이 조휘의 얼굴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청운(靑雲) 그놈이 말한 새로운 무림맹주가 바로 네놈이렸다?”
잠깐만.
청운 ‘그놈’이라고?
지금 설마 전 무림맹주인 무황의 도호 ‘청운’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가 말하는 청운이 무황이라면 도대체 이 노도사의 배분이 어느 정도란 말인가?
무황은 무림맹주이기 이전에 무당파에서도 진인에 이른 도사.
진인(眞人)이란 우화등선하여 선계에 이르러 선인이 되지 않는 이상, 사실상 도사로서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영예였다.
그런 위치에 있는 제자에게 이놈 저놈 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눈앞의 노도사가 무황보다 단순히 한두 배분 높은 것이 아니라는 뜻을 의미했다.
조휘가 조심스럽게 이 총관이 건네준 객첩의 명단을 확인했다.
‘제승(制僧)과 우검(憂劒)…… 협제(俠帝)?’
조휘의 머릿속에는 이백 년 내 거의 모든 고수들의 별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별호들.
가볍게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하나같이 절대경 이상의 기도를 흘리고 있는 노인들이라 결코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휘가 진중한 얼굴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노 선배님께서는 무황님의 기별을 받고 찾아오신 겁니까?”
무당의 도포자락을 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청운 그 고얀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조사님.”
조사(祖師)라면 보통은 개파조사를 떠올리겠으나 간혹은 그 쓰임이 다르다.
사부의 사부를 뜻하는 태사조(太師祖), 그 윗대를 칭하는 태태사조(太太師祖), 그 이상의 선대는 보통은 칭할 일이 없기에 모든 선대들을 통칭하는 데 쓰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항렬 차이가 최소 다섯 배분 많게는 그 이상이라는 뜻.
허면 눈앞의 이 노도사가 무슨 무당의 허(虛) 자배 정도 된단 말인가?
말도 안 돼!
허 자배는 새외대전 당시에 활동하던 무당의 제자들이다.
바로 사마세가가 봉문하던 그 시기!
허면 무신 어른과 동년배라는 뜻인데, 삼신(三神)의 경지를 이룬 무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그 정도로 수명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 절대경인데?’
절대경으로는 아무리 의념으로 버티고 버틴다 해도 백 년 남짓한 인간의 수명을 초월할 수 없다.
조휘가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무황을 쳐다보았다.
“조사님이라니 농담이시죠?”
아니 무슨!
제갈세가의 강호풍운록이 작성되기 이전의 강호인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고?
“소검신께서는 무당일우검의 전설을 듣지 못했는가?”
무당의 깊은 심산유곡에 남아, 평생토록 태극검공의 완성을 위해 홀로 정진해 온 자.
무당의 근심하는 한 자루의 검(武當一憂劒).
비록 무신의 신위에 가려져 있었으나, 새외대전에 나타난 그가 일검을 휘둘렀을 때 새외의 마인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에이…… 아니죠?”
무황의 꾹 닫힌 입.
그는 침묵으로 긍정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설마 저분도 화산대협제?”
화산대협제(華山大俠帝).
중원의 역사에서 그보다 더 활인검(活人劒)을 대표하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혼란스러운 전란의 시기, 새외대전에서 그는 단 한 명의 적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군 몰래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 풀어 주거나 중원의 사상으로 교화시키기도 했고 혹은 정착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 정파 측에서도 복수에 미쳐 도의와 협을 저버린 자들이 수도 없이 속출했던 마당.
후일 밝혀진 그의 미담은 그래서 더욱 가치를 발했던 것이다.
“법천대제승(法天大制僧)…….”
반대로 법천대제승은 지독히 엄격한 규율로 정파 진영을 다스렸던 승려였다.
어지러운 전란을 틈타 도리를 어기고 악행을 일삼은 자나 의리를 저버린 배신자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법천제승의 철선장(鐵禪杖)이 날아들었다.
그의 철선장 앞에서는 구파일방이나 삼류 방파나 모두가 평등.
후세의 사가들 중에서는 그의 그런 무차별적인 징치로 강력한 통제를 하지 않았더라면 정파 측이 새외대전을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 보는 자들도 상당했다.
지금 조휘는 그런 새외대전의 전설적인 영웅들, 그 역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더니 과연 그들이었구나. 어찌하여 저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단 말인고. 선재로다. 선재야.
무당일우검(武當一憂劒).
화산대협제(華山大俠帝).
법천대제승(法天大制僧).
수백 년 전, 무좌(武座)가 정립되기도 이전의 시기.
무신과 함께 새외대전의 혈겁으로부터 강호를 지킨 대영웅들, 우내삼협(宇內三俠)이 거짓말처럼 조가대상회에 현신한 것이다.
우내삼협의 주위로 아른거리고 있는 정기와 그윽한 잔향.
이는 그들의 경지가 천지의 기운과 교감하는 경지, 즉 천지교태라는 뜻이었다.
비록 완전하다 할 수는 없겠으나, 신좌의 유산을 접하지 않고서 자연경의 진입을 바라보고 있는 저들의 경지란 진정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서 조휘의 속마음을 잠시 말해 보자면, 그에게 큰 가르침을 베풀어 준 검신을 제외한다면 그런 삼신(三神)보다도 오히려 당대의 자하검성이나 이런 중원의 초극고수들에게 더욱 진한 존경의 마음이 일고 있었다.
삼신에게 닿은 신좌의 유산은 솔직히 너무 반칙 같은 느낌.
더욱이 달마의 제자들이 만든 세 영옥(靈玉) 역시 보패나 법보라 할 수 있는 기물이었기에, 이를 통해 얻은 능력이란 온전한 한 사람의 실력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이들은 다르다.
신좌나 그의 인연들로 말미암아 이룩한 힘이 아닌, 진실된 그들 본연의 노력과 재능으로 피어 낸 꽃!
처음에는 이런 점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허나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고 의념의 세계가 단단해지면 해질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내내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치솟았다.
검신 어른께서도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껴 왔기에 때때로 자괴감을 표시하셨고, 경지에 오른 후배를 만날 때면 그토록 기꺼워하셨던 것.
과연, 이번에도 검신 어른은 크게 감동하신 듯 탄성을 지르고 계셨다.
-허허! 속풍(俗風)으로 허술하게 본인을 낮추고 있으나 그야말로 감출 수 없는 소림혼이구나!
-그윽한 선도(仙道)의 내음만으로 내 마화가 반응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이들의 기나긴 인생, 그런 열정으로 피워 낸 경지도 좌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의 꽃’.
그것이 조휘가 저들의 저력을 단순히 무공으로만 평가하지 못하는 이유다.
무황이 가히 천군만마를 불러온 셈.
더불어 이제 조휘도 반쯤은 중원인이라 할 수 있었기에, 마치 역사책 속의 인물을 직접 보는 듯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무려 새외대전의 영웅들!
그런 전설 속의 우내삼협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휘의 동료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일행 중 가장 먼저 달려와 감동한 얼굴로 굳어 있는 이는 남궁장호.
코흘리개 시절부터 저들의 영웅담을 들으며 자라 왔다.
저들은 단순한 무인 이상이 아닌 영웅들!
사내라면, 그 마음에 열혈을 품고 있는 정파의 후기지수라면 이 세 영웅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학 후배…… 이 남궁 모…….”
떨려서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남궁장호의 모습이 마치 숫기 없는 아이 같아 보일 지경.
“좋은 검수가 될 아이로고.”
그런 무당일우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남궁장호는 더욱 감읍한 얼굴을 했다.
“가, 감사합니다!”
지극한 예로 화답하는 남궁장호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무당일우검이 다시 무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청운아. 먼저 우리 할 일부터 하자꾸나.”
“그리하겠습니다…….”
일순 우내삼협과 무황 사이에 이유 모를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무황이 조휘를 쳐다보며 무거운 음성을 토해 냈다.
“소검신.”
무황은 의도에 따라 상대 칭호를 달리 부르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사담을 청할 때는 조 소협.
상단의 일을 논할 때면 조 회장.
지금처럼 그가 자신을 소검신이라 불렀을 때는 어김없이 중대한 ‘강호의 일’을 상의해 왔다.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자네의 악혼녀와 그의 오라비를 불러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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