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80
79 章>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는 금천존신.
그는 혼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겨우 다잡으며 악착같이 머나먼 시계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톱니바퀴가 돌아간 정도를 살펴보니 지나온 시간은 이제 고작 이백 년.
그 이백 년이 그에게는 그야말로 이만 년(二萬年) 같은 시간이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천 년이 넘는 세월!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오롯이 존재해 오며, 인간의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초월한 그야말로 존신(尊神)으로 불려 마땅한 몸이었다.
중원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무공에 통달했으며, 갈고닦은 정신력 또한 선계의 도사들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크르르르르…….”
그런데, 이렇게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절로 나오고 있었다.
저기 투명한 공간의 벽에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소검신을 쳐다만 보면, 그런 천 년 수양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며 한낱 사나운 날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팔천이백이십육 전(戰).
팔천이백이십육 패(敗).
이것이 바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오직 짐승처럼 분노로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놈의 무학적 자산은 가히 상상을 불허했다.
남궁(南宮), 당가(唐家), 소림(少林), 무당(武當), 화산(華山), 개방(丐幇).
물론 저러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 따위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런 무공들을 펼치는 주체가 소검신이라는 것.
게다가 늘 최종적으로 닥쳐오는 삼신(三神)의 융합절기란……!
그 엄청난 의념의 압력에, 자신의 영체가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두부처럼 으깨어져 몇 번이고 소멸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물론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은 결코 창조자와 같은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진실로 창조자라면 개미처럼 하찮게 여겨질, 그야말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을 이렇게까지 괴롭히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그가 승부고 뭐고 몰래 암살하고 싶은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때.
“가만, 그러고 보니 말이야.”
흠칫!
몰래 운신하여 조휘를 암습하려던 금천존신이 기겁을 하여 자세를 고쳐 잡았다.
“뭐, 뭐냐!”
“어라? 이 새끼 이거 악독한 표정 좀 보소? 혹시 아예 안 되니까 치사하게 내가 잠든 틈을 노리는 거냐? 그래도 존신(尊神)인데 에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냐! 모함이다!”
“아님 말고.”
조휘가 다시 퍼질러 누우며 장방형 공간 밖의 허공을 무료하게 응시했다.
“그…… 통천 놈 말이지. 그놈이 내게 했던 말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무슨……?”
비록 함께 신좌의 실험체였으며 제자였지만 서로 간의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가끔 수십 년 만에 한 번씩 회동하긴 했으나 그저 가벼운 정보 교류에 그칠 뿐, 그마저도 원도(原道)와 귀암(鬼暗)이 사라진 이후로는 몇 번 모이지도 않았던 것.
“당신이 아는 좌와 그놈이 말하던 좌와는 뭔가 결이 달라. 그놈은 분명 선택의 순간에 이르러 굳이 좌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했거든.”
“뭐, 뭐라?”
“그놈은 당신과는 철학이 완전히 달랐어. 그놈은 좌에 올라 우주적 존재가 되어 본들 기다리고 있는 건 끝없는 허무뿐이라 했거든.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의지를 필멸자들에게 투사하여 관찰하는 것. 변태같이 희희낙락거리는 게 전부라는 거지.”
“신성 모독이다!”
대저 좌란 무엇인가?
인간의 격으로는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성(神聖)이다.
필멸자의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영원불멸의 절대성을 거머쥔 위대한 존재들을 감히 누가 함부로 폄하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랬다니까? 본인은 그렇게 허무하게 시간만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 남아 모든 인간을 유희삼기로 했데.”
“감히!”
금천존신은 진실로 분노한 듯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허나 조휘의 음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당신들의 사부 달마, 아니 신좌를 판단하는 것도 그놈만은 달랐어. 신좌가 자신에게 사기를 쳤다 생각하더라고.”
“사, 사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금천존신의 표정.
“당신들을 만나기 전부터 달마는 이미 좌에 오른 상태였데. 결국 당신들에게 했던 모든 실험은 좌에 오르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거지.”
“마, 말도 안 된다! 그럼 그 무수한 실험들은 도대체 왜……?”
“신좌가 중원 세상에 강림(降臨)하기 위해 벌인 실험이라는 거지.”
“궤, 궤변이다!”
소스라친 표정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지만 그런 금천존신의 어지러운 눈빛에는 적잖은 동요가 드러나 있었다.
그분의 분노를 사 가면서까지 암암리에 교단을 만들어 스스로 존재력을 강화했던 것이 과연 그래서였단 말인가!
하지만 위대한 그분께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들을 속였다고 해서 흠이 될 수는 없는 일.
이미 자신은 그분의 종복(從僕)이 되기를 오래전에 다짐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조휘의 음성에 금천존신의 정신은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가장 궁금한 건 말이지. 자신의 비밀에 가장 근접해 있는, 또한 가장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는 제자를 왜 화신으로 삼았냐는 거다.”
“화, 화신?”
“어, 화신.”
“그놈이 그분의 화신이라고?”
조휘가 더없이 무료하다는 듯 퉁명스레 대답했다.
“싯팔 속고만 살았냐? 내가 그 신좌 놈하고 직접 대화까지 했다니까?”
“그대가 그분의 신언(神言)을 직접 들었다고?”
“뭐 인간의 언어로 표현조차 어려운 이름들만 주구장창 말하고 도망가긴 했지만 틀림없이 그놈이었지.”
“미, 미친! 마, 말도 안 돼!”
화신(化身)이라 함은 좌에 이른 존재들이 자신의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수단이었다.
허면 그 화신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물과 불, 바람으로 현신하시어 내리는 그분의 명령을 가장 충실히 수행해 온 것은 오직 종복을 자처한 자신뿐이니까.
소검신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도대체 그분의 뭐란 말인가?
조휘가 한심하다는 듯이 금천존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제자가 그 음흉한 신좌 놈의 화신이 된 것이 그리 질투가 날 일이야? 그게 무슨 충격이나 된다고 그리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나는…….”
“도대체 신좌 놈이 당신에게 뭘 약속해 줬지? 뭐 인간 세상의 재산이나 명예 따위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고…… 있다면 딱 하나 영원불멸뿐인데? 보아하니 하도 수명을 초월해서 이제 그 목숨도 얼마 남지도 않아 보이구만. 혹 좌에 이르는 방법을 약속받은 건가?”
야차처럼 구겨지는 금천존신의 얼굴.
귀신같은 놈!
“병신, 차라리 날 신으로 받들지 그래?”
“그게 무슨?”
피식 웃어 버리는 조휘.
“난 느낄 수 있어.”
조휘가 다시 머나먼 허공의 시계탑을 응시한다.
“법천뢰의 무량대수와 같은 재앙 중에서 오직 이곳 ‘공허(空虛)의 주계(主界)’만이 유일한 해답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법천뢰가 진법이라면 여기가 유일한 생문(生門)이라는 거지.”
조휘가 떠나갈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하! 좌의 격(格)에 이르는 길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몰라보냐?”
그의 손이 시계탑의 맨 하단 부분에 자리한 거대한 석판을 가리킨다.
“저기에 적혀 있는 이름들이 정말로 안 보이냐?”
조휘가 가리킨 석판.
그곳에는 좌의 격을 성취한 무수한 존재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금천존신은 이번에도 석판의 글귀를 읽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그 뜻은 전달되나 인간의 언어로 읽을 수는 없는 기묘한 수많은 이름들.
공허의 주계를 처음 경험했을 때는 드러나 있지 않았으나, 금천존신과 함께 들어온 지금에서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석판에 수도 없이 새겨져 있는 이름들이었으나 그 하나하나마다 절대적인 신성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렇다.”
그런 금천존신의 반응에 그제야 조휘가 진지하게 두뇌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과 함께 이 공허의 주계에 도착한 이상, 그에게도 우주적 율법에 의해 동일한 인과율이 적용되었다는 의미다.
한데 공허의 속박에 관한 인과율의 언급이나, 이미 이곳을 다녀간 좌(座)들의 이름이 그에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거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나와 함께 이곳에 들어온 이상 당신도 동일한 인과율을 적용받는다는 건데 왜 저 탑은 당신에게만 비밀스러운 거지? 우주적 법칙이라는 게 그리 변덕스러울 수도 있나?”
“선택에 관한 문제일 것 같군.”
“선택?”
금천존신의 표정은 일견 잔잔해 보였지만 분명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두려움이 스치고 있었다.
“그대가 주장한 바대로, 이곳이 좌에 오르는 최종 관문인 법천뢰의 유일한 생문(生門)이라면 그 생문이 허락하고 선택한 자는 오직 그대뿐이라는 뜻이다. 그럼 지금의 모든 현상이 바르게 설명되지.”
“음…….”
말하면서도 우울해진 듯 그의 눈빛은 의미 모를 공허함으로 그득했다.
“이미 그대는 좌이거나 혹은 최후의 한 발자국만 남은 예비된 존재라는 뜻이다.”
“내가 이미 좌라고?”
좌가 아니고서야 지금 이게 모두 설명될 수 있는 일인가?
천 년 이상 존재력을 갈고닦아 온 자신을 한낱 의념만으로 어린아이 다루듯 줘 패고 있는 존재가 바로 소검신이었다.
“이런 제기랄!”
한편 조휘는 곧바로 육두문자를 뱉어 내고 있었다.
영계의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좌에 이르면 신좌를 상대하는 것이 보다 수월해질 것이 분명하거늘, 자신더러 좌라고 칭하는 것이 왜 이렇게 소름이 돋을 만큼 싫은 걸까.
이상하게도 그런 금천존신의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었다.
마치 뱃속의 모든 더러움이 한꺼번에 구역질로 치미는 느낌.
확실한 것은, 이런 역겨운 감정부터 치미는 것으로 보아 자신은 결코 좌가 아닐 거라는 점이다.
조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랄 마. 아니야. 난 좌 따위가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따위?”
금천존신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극도의 황당함이었다.
중원 대륙을 평정하여 천하 만백성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쥐었던 위대한 시황제조차 한 떨기 불로초를 찾기 위해 그토록 평생을 찾아 헤맸었다.
그런 생로병사, 인간의 굴레를 모두 벗어던지며 비로소 우주적 법칙으로부터 완전한 영생불멸의 자격을 부여받는 경지가 바로 좌(座)!
금천존신은 그런 초월자의 경지를 감히 ‘따위’라고 말할 수 있는 조휘에게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었다.
지금 이곳 공허의 주계가 무량대수에 가까운 법천뢰의 유일한 생문이라면, 반드시 이를 관장하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두렵지도 않은가?”
“뭘 무서워해야 되는데?”
극도로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금천존신.
“그대 말대로 이곳이 좌에 오르는 최후의 관문이라면 이를 관장하는 이가 반드시 존재할 터. 그대는 그런 초월적인 존재의 주시(注視)도 아랑곳하지 않는단 말인가?”
조휘가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 아니 좌의 시험대에서 그런 좌를 부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진정 그대는…….”
금천존신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금방 허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소검신은 좌가 될 생각이 하나도 없는 자가 아닌가?
좌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애초에 두려워할 인사가 아닌 것이다.
금천존신의 허탈한 시선이 다시 광활한 우주를 향한다.
불타듯 이글거리는 무수한 성광(星光)들.
그 격이 저 위대한 별들의 존재력에 비할 수 있다 하여 따로 성좌(星座)라고도 불리는 초월적인 경지.
그야말로 평생을 헤매어 온 이름이요,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비원이었다.
그런 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이렇게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고 비참했다.
한 인간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오로지 위대한 존재의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좌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이 공허의 주계, 마지막 좌의 관문을 몰랐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나긴 인생, 천 년이 넘도록 모질게 이어져 온 자신의 삶이 단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으니까.
더욱이 그런 위대한 좌의 길을 발끝에 차이는 돌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소검신을 바라보는 그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얼레? 뭐야 그런 표정은? 갑자기 멘탈이 박살 난 거 같은데.”
“닥쳐라…….”
그렇게, 좌에 이르는 방법의 실체를 마주한 금천존신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당장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달마가 아무리 신좌라고 해도 이 무량한 법천뢰의 재앙을 예측하거나 조종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좌에 이르게 해 준다는 그의 약속은 기만(欺瞞)이었던 것.
“그래,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속고 속이고, 또 당하고 복수하고. 그러니까 이제 말해 봐. 달마진경은 왜 뿌렸지?”
금천존신은 단호하게 입을 다물다가 지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피식 실소가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어차피 남은 이천팔백 년 동안 고문에 가깝게 죽도록 처맞을 것이 뻔한데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을 지킬 수 있다는 장담도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막상 대답해 주려고 하니 자신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분의 강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짐작만 할 뿐,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강림(降臨)?”
금천존신의 입에서 최악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조휘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하게 변했다.
“단순한 무공 비급이 아니었던 거냐?”
“뭔가 오해하고 있군. 달마진경은 무공이나 사상과 같은 어떤 지식이 함유된 서책이 아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아니 경(經)이라며?
보통 경이라는 고상한 글귀가 포함된 보물이라면 사상이나 철학, 비법, 이론과 같은 것이 집대성된 경서(經書)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잠깐, 당신은 달마진경을 익혔어?”
“그분께서 진경의 열람을 내게 허락하신 적은 없다.”
“뭐?”
아니 그럼 제자에게조차 보여 주지 않은 경서를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말인가?
“직접 보는 것이 빠르겠군.”
이어 금천존신이 자신의 가사(袈裟)를 뒤지더니 품에서 기묘한 뭔가를 꺼내 조휘에게 들이밀었다.
“이, 이게 뭐지?”
무림이라는 세계에 떨어진 이후, 조휘가 지금처럼 놀란 적은 단연코 없었다.
금천존신이 내민 것을 그야말로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집어 드는 조휘.
“이건 반도체 칩(chip)이잖아?”
“이상한 언어로 칭하는군. 그대가 말한 그런 이상한 것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바로 달마진경이다.”
“아오! 뭐라는 거냐!”
아무리 살펴봐도 현대인에게만큼은 너무도 익숙한 모양의 반도체 칩이다.
한데, 하부에 장착되는 전극들의 생김새가 흔히 아는 모양이 아니었다.
반도체 칩의 하부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미세한 침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결착 형태의 반도체 칩은 자신이 살아온 현대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만……?”
이것이 정말 경서(經書)라고?
경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
아무런 IT 기반이 없는 중원 세상에 이런 고차원적인 반도체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단 하나 가능하다면 그것은 뉴럴링크(Neuralink).
인간 두뇌의 수많은 신경 시냅스에 직접 소자를 연결하여 무수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최첨단의 과학 기술.
하지만 그런 엄청난 기술은 자신이 살던 현대 세상에서도 구현되지 않는 첨단이었다.
막 웨어러블이 태동하던 시기이긴 했으나 그보다 훨씬 상위의 개념인 뉴럴링크라니!
그것은 현대인 출신인 자신으로서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첨단의 과학 기술이었기에 이토록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조휘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다시 금천존신에게 질문했다.
“이거…… 혹시 머리 어딘가에 붙이는 건가?”
금천존신은 조휘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그걸 그대가 어찌……?”
“와 씨.”
그렇게 심증이 확실시되자 도대체 이 달마라는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휘는 더욱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건 너무 반칙이 아닌가?
뉴럴링크라는 미래의 첨단 기술을 강호 전체에 뿌릴 생각을 하다니!
기껏 해 봐야 콜라, 햄버거, 자전거, 현가장치, 택배, 아파트 따위나 구현해 낸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담한 시도였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막 미래까지 건너갔다 오고 그런 놈인 건가?
“이런 걸 무림맹에 몇 개나 뿌렸지?”
“개수는 의미 없다.”
“뭐?”
“달마진경을 생산할 수 있는 법보를 주었다.”
“뭐, 뭐라고?”
조휘는 또다시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의 지식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법보(法寶)라 부르는 것이지, 그것은 분명 최첨단 미래 기술의 3D프린터, 혹은 세포처럼 분열할 수 있는 나노머신의 일종일 것이다.
“와…….”
조휘는 처음으로 달마를 향한 경외심이 생겼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그런 엄청난 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다면 차라리 인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
그렇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조휘가 갑자기 반도체 칩을 자신의 머리 쪽에 가져다 댔다.
“장착해 봐도 되는 거지? 어디에 붙이는 거냐?”
순간 금천존신의 얼굴이 극도의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죽고 싶다면 그리하라!”
“죽어?”
의문으로 꺾이는 조휘의 고개.
“그것이 가능했다면 난 이미 수도 없이 진경을 탐했을 것이다!”
“설마 시도해 보지도 않은 거냐?”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뉴럴링크 반도체를 머리에 장착하는데 무슨 놈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이지?
“우리 여섯 제자들이 무슨 바보란 말인가? 달마진경을 해금(解禁)하려는 시도는 통천(通天)이 가장 집착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험체들 중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걸 머리에 붙이면 어떻게 되는데?”
금천존신이 단호하게 외쳤다.
“실혼!”
그 말에 조휘는 더없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실혼(失魂)이라면 영혼을 잃는다는 뜻.
반도체 따위로 영혼이 사라질 리는 없으니 실제로는 백치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달마의 의지가 허락해야 된다는 건 무슨 소리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거참 궁금해 미치겠네.
“무슨 짓이냐!”
“어디에 붙이면 되는 거냐고.”
저 미친 소검신이 그런 엄청난 경고를 듣고도 다시 머리칼을 들추며 달마진경을 제 머리에 붙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 누구도 예외 없이 실혼인(失魂人)이 되었다! 그대는 내 말을 믿지 않을 셈인가?”
“닥치고 붙이는 위치나 말해.”
“미, 미간이다.”
조휘가 망설임 없이 반도체 칩을 미간에 가져다 장착한다.
잠시 끈적거리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마치 피부처럼 반도체 칩이 자신의 이마에 결착되었다.
무수히 많은 미세한 침들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느낌도 확연했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악-
뭔가, 다른 시야가 열린다.
그렇게 조휘의 시야 전면에 투명 무색한 창 형태가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휘가 황망하게 굳어졌다.
시야에 투명한 창이 드러나더니 갑자기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나타나자 조휘는 멘탈이 나가 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달마의 의지가 허락해야 하느니 했던 게 고작 패스워드 락(Password Lock)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 문장.
뭐?
사용자의 의식을 닫는다고?
말만 친절하지 실상은 백치로 만들어 죽이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신좌, 아니 달마 놈의 인성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뿌드득!
조휘가 악다물며 이를 갈았다.
“이딴 게 무슨 달마진경이야!”
그런데 그때 시야에 드러나 있던 투명한 창이 갑자기 붉은색으로 물들며 기묘한 경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스피리츄얼 파워(spiritual power)?
리빌드 프로그램(rebuild program)?
그제야 조휘는 뉴럴링크 칩에 적용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영혼의 개조, 혹은 재구성!
간단한 문구였으나 그 소름 돋는 정체에 그야말로 조휘는 온몸에 전율이 절로 일어났다.
그렇게 조휘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금천존신이 가득 호기심을 드러냈다.
“왜 그러는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한 채로 조휘가 악다구니를 썼다.
“이건 달마의 경서(經書) 따위가 아니야!”
“허면?”
상대의 의도가 너무 명백하고 노골적이라 사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영혼 혹은 영력의 재구성?
말만 그럴싸할 뿐, 사실상 이건 음식에 뿌리는 후추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인간의 영혼을 가장 섭식(攝食)하기 좋은 형태로 변환하려는 의도!
본인에게는 불순물과 같은 인간 본연의 사념들을 모조리 삭제하고 순수한 영적 에너지만 취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극대화하여 더욱 강렬해진 영혼을 취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수많은 인간의 영혼들을 본인에게 이로운 형태로 변환시켜 처먹겠다는 뜻!
그런 조휘의 설명을 모두 들은 금천존신조차도 깜짝 놀라 되묻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위대한 그분께서 강림하시려는 건 도탄에 빠진……!”
“야, 거기에 무슨 명분이나 신념 같은 거 가져다 붙이지 마라. 너부터 소멸시켜 버릴 테니까.”
금천존신도 인간이다.
인간성이 아무리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무수한 인명들의 영혼을 통째로 처먹겠다는 의도를 지닌 존재를 천 년 이상 모셔 왔다는 것은 그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분명 달마는 도탄에 빠진 인세를 구원하기 위함이니 하는 그런 꿀 바른 소리를 해 댔을 것이다.
점점 이를 가는 금천존신.
자신에게 신좌의 길을 열어 주겠다던 약속도, 혼란과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속세인(俗世人)들을 각성(覺醒)시켜 다른 좌(座)들을 견제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도 모두가 허상이요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런 거짓된 신념에 천 년 이상 놀아난 자신의 꼴이라니!
뿌득!
그런 금천존신의 분노를 살피던 조휘가 이죽거리며 그를 더욱 자극했다.
“그렇게 이를 갈아 봐야 이미 그자에게 당신은 그 효용 가치가 다한 것 같은데? 이 미친 뉴럴링크 칩…… 아니 달마진경을 찍어 내는 법보를 맹에 넘겨 버렸다며?”
“…….”
“내가 볼 때 그 법보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그의 오랜 대계(大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축포와 같은 거야. 그런 축포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이 당신이었고. 결국 불꽃이 찬란하게 터지기 시작했으니 이미 그놈의 머릿속에 당신은 없을 걸?”
“닥쳐라!”
“내기할까?”
그런 조휘의 이죽거림에 금천존신은 결국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내리깔고 말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조휘가 별안간 시야에 펼쳐진 투명한 창을 향해 윽박질렀다.
“어이, 그쪽 말대로 내가 더 이상 진행하기 싫다면 이 괴상한 패스워드 창부터 치워야 하지 않겠어?”
곧 조휘의 시야에 드러나 있던 투명한 창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그의 두뇌 속 무한에 가까운 신경 시냅스와 연결되어 있던 뉴럴링크도 한꺼번에 해제되며 이내 끈적끈적한 느낌만 남긴 채 툭 하고 칩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오 정말 느낌도 엿 같아.”
꽈직-
뉴럴링크 칩을 그대로 밟아 짓이겨 버린 조휘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음울해하고 있는 금천존신의 멘탈을 더욱 박살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탈탈 털릴 거면서 뭘 그리 악착같이 신비롭게 굴었냐? 애초에 협조만 잘했다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 다시 올 일은 없었잖아?”
“그만……!”
쉴 새 없이 성질을 긁어 대는 조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뱃속으로부터 치밀었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는 것을.
그렇게 화가 치밀다가도 한편으로 이미 좌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소검신에게 기대어, 영원불멸의 비밀을 갈구해 보려는 갈망이 무섭게 치솟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천존신은 더욱 처연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적에게조차 이런 굴종이라니!
약자의 수치를 모르는 이런 굴종의 마음이란 이미 자신의 영혼 깊이 새겨진 낙인(烙印)과도 같은 것이란 말인가!
결국 그런 수치심이,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금천존심의 자존감을 되찾게 해 주었다.
그렇게 한 사내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놓고서도 이미 조휘는 바깥세상을 향한 걱정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림맹이었단 말이지.”
물론 유일신을 믿는 절대존명 체제의 마교도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모든 교도들의 이마에 저런 칩을 밖아 넣는 것은 교주의 명령 하나면 끝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입장을 바꿔 만약 자신이었다고 해도 무림맹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무리 마교가 유일신을 철저하게 믿는 종교 집단이라고 하나 그 세력은 중원의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정파무림과는 비교도 되지 못했다.
물론 십만(十萬)이라는 어마어마한 교도를 확보한 집단이었으나, 반대로 보면 그 십만이라는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강(新疆)이라는 척박한 땅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계.
반면 무림맹은 맹도들의 수만 헤아린다 해도 팔십 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거기에 구파일방이 각자 거느리고 있는 속가문파, 수를 헤아리기 힘든 무관들, 해마다 늘어나는 빈객과 향화객, 이권으로 얽혀 있는 무수한 사업체 즉 표국 등을 다 합한다면 무림맹의 영향력이 아우르는 숫자는 수백만, 아니 천만 단위를 넘어갈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영향력과 권위를 앞세워 입맹하는 모든 맹도들에게 무림 최고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달마진경의 열람을 약조한다면?
멀리 볼 것도 없이 당장 일 년 내에 맹도들의 수가 수십 배로 불어날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저 뉴럴링크 칩의 시스템이 말하는 스피리츄얼 파워가 한계치까지 개방된 맹도들에게 어떤 이능(異能)이나 초능(超能)이 나타난다면?
맹도들이 그런 신위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장강 이북의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열광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에 무림맹으로 유입되는 맹도들의 수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될 것이 자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휘는 사무치는 불안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게 들불과 같이 일어난 중원 북부의 집단 움직임이 장강 이남으로 남하(南下)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심지어 그 엄청난 파문은 자신의 조가대상회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
이제 막 떨치기 시작한 조가대상회의 명성을 압도해 버리는 정파의 저력!
달마진경은 그야말로 중원 무림의 모든 흐름과 판도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와…… 진짜 노답이네.”
당장 몇 달 이내에 뉴럴링크 칩에 의해 엄청나게 증폭된 영력을 지닌 천만 단위의 사람들이 신좌의 먹잇감이 될 것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져 미칠 노릇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 무슨 신좌의 약점 같은 건 없냐?”
더욱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마는 금천존신.
“신(神)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답답한 마음에 영계의 존자 어르신들에게 자문을 구해 보려고 해도, 이상하게 공허의 주계만 들어오면 그런 영계와 완전히 단절이 되고 말았다.
“……나와 신좌를 비교하면 어때? 너는 알 거 아니야?”
달마의 오롯한 힘이라면 제자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금천존신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칼에 대답했다.
“비교가 무의미하다.”
“그 정도라고?”
“그가 가볍게 의지만 일으켜도 넌 소멸되겠지. 일초지적(一招之敵)이라는 말조차도 무색하다.”
“허…….”
그의 제자들인 육존신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는 이런 경지로도 그의 일초지적이 될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없군.”
“뭐가?”
금천존신이 한껏 기이한 눈초리를 빛내며 조휘를 직시했다.
“이곳이 좌의 최종 시험대라면, 저 탑의 시험을 통과하고 그와 같은 경지의 좌(座)가 되면 말끔하게 해결될 일이 아닌가?”
“에이 싯팔, 그건 죽기보다 싫다니까!”
더욱 답답함을 호소하는 금천존신.
“도대체 왜인가? 그것은 인간의 도정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초월(超越)이다. 필멸자의 도정을 완전히 끝내고 영원불멸의 우주적인 불멸자로서 오롯해진다. 불멸(不滅)이라는 그 단순한 단어에 함의(含意)된 엄청난 힘을 아직도 모르겠단 말인가?”
“…….”
“그 어떤 초월적인 위력의 힘도 그대에게 닿지 않는다는 의미다.”
“너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순간, 조휘의 얼굴이 지옥의 야차처럼 참혹하게 구겨졌다.
“애초에 우린 모두가 불멸자(不滅者)다! 우리에게 필멸자(必滅者)라는 굴레를 덧씌운 것은 그 빌어먹을 법칙일 뿐이라고!”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바보 같은 놈! 인간의 영혼은 원래부터 사라지지 않아! 다만 윤회를 반복할 뿐이지! 그런 인간에게 기억의 단절, 즉 ‘기망(記忘)의 율(律)’로 장난을 친 건 모두 ‘놈들’의 유희다!”
“뭐, 뭐라고!”
결코 생각해 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저 위대한 존재들이 인간들을 필멸자라 칭했기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럴싸하다.
단순히 육체의 수명이 다한다 하여 그것을 필멸(必滅)이라 말할 수 있을까?
쉴 새 없이 환생을 반복하는 인간의 윤회 역시 어찌 보면 불멸(不滅)일 것이다.
“육체의 소멸은 오히려 그들이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사람만의 축복이라고! 사람은 수많은 생을 반복하여 영혼의 기질을 단련할 수 있다! 그 미욱한 좌(座)들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한 무기를 지닌 셈이지!”
“아아!”
“우리 인간, 우리 사람 모두의 비원(悲願)이 있다면! 우리에게 ‘기망의 율’이라는 저주를 내린 그놈을 죽여 우리 사람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다!”
순간.
화아아아아아악!
조휘의 전신에 태양과도 같은 엄청난 광휘(光輝)가 서린다.
조휘는 전신에 드러나 작열하고 있는 광휘를 무심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이런 우주적 대비밀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지?
금천존신이 그런 조휘를 멍하니 응시하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아…… 아……!”
소검신에게서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자신이 평생토록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이상(理想)이요, 꿈(夢)이었으며, 비원(悲願)이었다.
이어 그의 잇새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비음.
“좌(座)…….”
조휘의 전신에 서린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광휘가 그대로 쑥 하고 뽑혀져 나가더니 이윽고 머나먼 탑(塔)을 향하기 시작한다.
광휘가 탑의 하단부 석판에 그대로 스며들자.
하나의 존귀한 이름이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의 발음 체계로는 읽을 수 없는, 오직 조휘의 의식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 * *
“흐음…….”
일야만략화접 홍예는 소검신이 내어 준 붉은 수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대재앙이 일어나기 전 폭풍 전야와 같은 당금의 강호에서 더 이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미지의 고수들이 활동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또 실제로 그들의 힘에 이용당하기도 이미 여러 차례.
흑왕부에서 보았던 조휘의 상상 밖의 신위는 무척 충격적이었으나, 한편으로 홍예에게는 새로운 희망이기도 했다.
야접에 위기가 닥칠 시 소검신에게 보호받는 것을 한 차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조가대상회의 하부 조직이 되어 생존을 도모하는 편이 더욱 현명한 판단이라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자신의 판단이 지옥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행동이 될지, 재앙 속에서 야접을 구원해 줄 동아줄이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뭐…… 이제 지붕 수리는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네.”
스스로도 황당했는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는 홍예.
이 와중에도 수리비가 굳었다는 얄팍한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장사꾼인 건가.
“야, 너 뭐야?”
“호오 여기 있었네.”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백화린과 진가희.
야접의 모든 정보 자산들을 통째로 조가대상회에 들고 방문한 홍예를 부회장 제갈운은 버선발로 환영했지만 불행하게도 조가대상회의 여인들은 아니었다.
진가희는 홍예가 꼭 쥐고 있는 붉은 수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 그래도 희멀건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굳혔다.
“아무리 봐도 그건 조휘 오빠 장포 자락에 매달려 있던 수실 같은데? 너 뭐야?”
아니꼬운 표정으로 연신 의심의 눈초리를 빛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진가희를 향해 홍예는 따뜻하게 웃어 보이며 예를 차렸다.
“흑천련에 훌륭한 여류 고수가 있다더니 그게 바로 당신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독매홍이라는 별호는 기이하다 생각했어요. 차라리 목련이라면 모를까.”
“뭐, 뭐야.”
먼저 내가 욕을 쳤는데 친근하게 미소 지으며 예를 보인다고?
그것도 새뽀얀(?) 자신의 얼굴을 칭찬하는 듯 목련이라 부르면서?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여인들의 서열 정리란 이토록 단칼에 이뤄지는 법.
그제야 진가희는 흡족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호호, 그래. 그러렴.”
“네 언니!”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화린이 한심하다는 듯 진가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순진한 년. 네년은 어찌 된 게 그놈의 정표(情表)를 눈앞에서 보고도 병신같이 희멀겋게 처웃냐.”
“네 언니?”
“어휴 답답한 년. 보고도 몰라? 천하의 소검신이 막 아무 년한테나 저런 정표를 건네는 놈이야? 사내가 여인에게 정표를 내어 주는 게 뭘 의미하겠어?”
“아악! 씨발!”
진가희의 머릿속에 상상도 하기 싫은 장면이 떠오른다.
여인의 새하얀 다리 사이, 이부자리에 맺힌 새빨간 선혈.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여인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미래를 약속하는 사내.
상기되어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사내의 정표를 받아 드는 찌, 찢어 죽일 년!
“이런 개 썅! 너 오빠랑 잤냐?”
“오, 오해예요!”
백화린이 피식 웃으며 조소했다.
“오해는 무슨 놈의 오해. 그놈에게 둘째 부인이라도 약속받은 거겠지.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천하의 야접을 통째로 바치겠어?”
“아, 아니라니까요!”
“닥쳐 샹년아. 이게 어디서 혀를 놀려? 나도 아직 못 먹은 놈을 중간에서 꿀꺽해? 참으로 요사스러운 년이네.”
“머, 먹다뇨! 제가 뭘……?”
“안 되겠다 넌. 그냥 맞고 시작하자. 야, 잡아.”
“네 언니!”
진가희가 홍예에게 다가가 채찍으로 그녀의 팔다리를 묶어 구속하려 들자, 처마 밑 그림자에서 은밀히 은신하고 있던 그녀의 수신호위 야월혼(夜月魂)이 스르르 신형을 드러냈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소.”
“어맛! 깜짝이야!”
기다란 반월도를 손에 든 웬 칙칙한 귀신 같은 놈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니 백화린이 한껏 긴장으로 굳어졌다.
“뭔가 뒤통수가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그게 당신이었어.”
화경에 이른 자신의 감각권 내에서도 기척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경지가 자신보다 상위라는 뜻.
더욱이 이 정도 수준의 고도로 정제된 살기는 출도한 이후 처음 경험하는 종류였다.
“지존의 몸에서 손을 떼시오.”
진가희도 상대에게서 범상치 않음을 느낀 듯 채찍을 풀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호위 하나는 기똥찬 놈으로 구했네? 하여간 불여우처럼 음기로 가득 찬 년들은 항상 이렇게 사내를 끼고 다녀요. 나도 여인이지만 내가 이래서 여자를 못 믿는다니까?”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논리죠?”
대체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왜 불여우 같은 행동이 되는 건지, 또 왜 같은 여자로서의 신뢰를 깨는 행동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상대의 무논리에는 도무지 막힘이란 없었다.
“하? 잘 봐봐. 언니가 예뻐 안 예뻐?”
저 사파의 무시무시한 악녀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으름장을 놓는다.
대체 누가 그녀의 면전에서 못생겼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뭐 실제로도 아리따운 얼굴이기도 했다.
“……예쁘시네요.”
“그치? 이런 나도 평생 호위 없이 다녔어! 그런데 네가 뭔데 저런 잘생긴 자의 호위를 받고 있냐고! 이게 다 네년이 암내 폴폴 풍기면서 다니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니 제가 무슨 암내를…….”
그때, 갑자기 하늘 위 상공 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쯧쯧, 어떻게 넌 그런 아무 말 대잔치를 그렇게 뻔뻔한 표정으로 할 수 있는 거냐.”
진가희의 얼굴이 화색으로 만연했다.
철검 위에 서서 오연히 팔짱을 끼고 있는 조휘를 발견한 것이다.
“조휘 오빠!”
하지만 그런 반가움도 잠시 금세 진가희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해 갔다.
곧 그녀가 홍예를 삿대질하며 고함쳤다.
“오빠! 이년이랑 잤어? 안 잤어?”
“너넨 왜 항상 상상이 그쪽으로만 치우치냐?”
그런 조휘의 반응에 백화린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잤네. 잤어.”
조휘가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백화린의 시선을 외면하다 이윽고 홍예와 야월혼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슨 의미지?”
일야만략화접을 호위하는 야월혼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일로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지존을 호위하는 수신 호위의 무공수위를 철저하고 비밀스럽게 관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지존의 수신 호위란 절체절명의 순간을 대비한 최후의 패였기 때문이다.
그런 최종 병기가 여인들의 실랑이 따위의 가벼운 사안에 몸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 조가대상회를 더 이상 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
조휘의 궁금증은 그런 야월혼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야접의 모든 정보 자산을 제갈 부회장님께 일임했어요.”
“운(雲)이한테?”
“네.”
신중히 생각에 잠겨 있던 조휘가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런 판단을 내린 건지는 알 것 같은데. 한 세력의 휘하가 된다는 건 득도 있는 반면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 모르진 않을 테고. 충분히 고민은 하셨고?”
“생존보다 더한 득(得)이 있나요?”
피식 웃어 버리는 조휘.
“그 정도 각오면 뭐.”
곧 그가 두 팔을 너르게 벌리며 활짝 웃었다.
“환영한다.”
그런 조휘의 살가운 반응에 백화린이 진가희의 귓가로 속삭인다.
“저것 봐 저것 봐. 잤다니까?”
“어, 언니!”
귀신들은 다 뭐 하나.
저년들 안 잡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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