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81
80 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조휘가 철검을 탄 채로 그대로 대회의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조휘가 대회의장으로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한설백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로 대석빙고를 나왔다는 의미, 즉 폐관을 끝냈다는 뜻.
“형님?”
절대빙인이 되기 전까진 죽어도 폐관을 끝내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했던 한설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아직 그의 경지는 화경(化境).
그런 조휘의 의문을 읽었는지 한설백이 담담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년빙정이 아무리 천하에 다시없을 보물이라고는 하나 절대(絶大)라는 것은 단순히 보물을 취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더군.”
“음…….”
그것은 맞는 말이다.
차라리 강호를 주유하며 많은 것을 경험해 보는 편이 오히려 경지에 이르는 데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허면…….”
“걱정하지 마라. 석 달은 너끈히 쓸 수 있을 만큼의 얼음을 대석빙고에 가득 채워 놓고 왔으니까.”
조휘가 그제야 안도하며 한설백과 계속 담소를 이어 가고 있을 때, 그의 동료들이 속속들이 대회의장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제갈운이 조휘에게 다가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무림맹도가 백만을 넘어섰다.”
백만?
맹이 달마진경을 공표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이십만이 늘어 백만을 돌파하다니!
이건 너무나 비상식적인 속도다.
조휘가 뭔가를 짐작한 듯 눈을 빛냈다.
“달마진경의 정수(精髓)를 깨우친 맹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나 보네.”
대답은 남궁장호가 했다.
“놀라지 마라. 갓 입맹한 삼류 무사들 중 몇몇이 단숨에 지고한 법력을 구사했다.”
불세출의 도인들에게서나 목격되었던 신비의 힘 법력(法力)을 일개 삼류 무사들이 발휘했다고?
“목격된 신위로 미뤄 볼 때, 그들의 힘은 능히 화경에 비견될 수 있다는군.”
“도대체 얼마나?”
“당장은 수백 명 수준이다. 앞으로 훨씬 늘어나겠지.”
화경 이상의 법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사가 수백 명이나 늘어났다고?
강호의 일로만 따진다고 해도 세력의 판도가 바뀔 만한 일이다.
“그런 소문이 천하로 퍼지자 맹도 십만이 늘어나는 데 고작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이 추세면 아마도 강북의 무인들 전체가 입맹할 것이다.”
“아니, 결국 강남인들도 북상하기 시작할 거야.”
“강남까지?”
강남인들을 달리 말하면 사파(邪派)다.
맹이 그런 사파인들을 받아 줄 리가 없는 것이다.
“억측이다. 맹은 사마외도 무리들의 입맹을 결코 허락하지 않아.”
“아니. 모두 받아 줄 거다.”
“뭐라고?”
사파인들을 향한 정파인들의 배타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남궁장호였다.
하지만 천하에 명석한 두뇌를 지닌 조휘가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정도라면 반드시 그 근거가 있을 터.
제갈운이 한껏 긴장한 얼굴로 조휘에게 물었다.
“달마진경을 사파의 무사들에게 뿌려 대면서까지 맹이 하고자 하는 게 뭐야?”
“섭식(攝食).”
조휘는 금천존신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동료들에게 간략히 무림맹의, 아니 달마의 의도를 모두 설명해 주었다.
“미, 미친! 말도 안 돼!”
“그럴 수가!”
마치 강호의 종말처럼 여겨지는 엄청난 재앙을 조휘의 입으로부터 확인하자 동료들은 하나같이 경악에 경악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신좌니 달마니 하는 강호의 비밀을 들어 본 적이 없는 한설백이 가장 놀라고 있었다.
“천하에 그런 위험한 존재가…….”
그것은 북해인들이 겪었던 새외대전 따위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규모의 재앙이었다.
그런 조휘의 주장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조차 힘들 지경.
“하급 맹도들 중에서 팔무좌 수준의 절대경이 출현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 아무래도 강제로 사람들을 가둬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을 강제로 가둔다고?”
조휘가 품 안의 장부를 꺼냈다.
“강서성주와 안휘성주를 만나 백성들의 호수(戶數)를 살피고 오는 길이다. 안휘와 강서의 모든 백성들과 조가대상회의 직원들, 거기에 남궁, 사마, 당가의 고수들과 그 방계까지 모두 합해 보니 대략…….”
모두가 긴장하며 조휘의 입만 살핀다.
“그것만으로도 오백만 명이다.”
고작 안휘와 강서만을 살펴 그 수를 헤아렸음에도 오백만 명을 가볍게 넘어 버리다니!
조휘를 도와 천하인을 구원하려는 남궁장호의 대의(大義)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 여유가 겨우 백만 명 남짓이라니!”
조휘가 쓰게 웃었다.
“그마저도 장삼봉 진인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어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는 조휘.
“그리고 소개할 사람이 있다.”
우우우우웅-
기이한 공명음과 함께 공간이 찢어지자, 한 사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리우며 나타난다.
온몸에 작열하는 금광을 드리우며 허공에 현신한 자.
그 아득한 경지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절대적인 존재감이 사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든 의문들이 조휘를 향하자.
“인사해. 난 그냥 ‘황금이’라 부르기로 했다.”
황금이(?)가 이제는 잦아든 금광을 떨쳐 내며 조휘의 전면에 다가오더니 그대로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신(臣) 금천(金天), 이렇게 현세에서 주군을 뵈오니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황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낱 인간으로 태어나 고귀한 좌(座)에 오르는 광경을 직접 눈앞에서 목도한 금천존신.
그 후 그는 신좌에게 직접 하사받은 존신(尊神)의 휘호를 망설임 없이 버렸다.
그것은 신좌를 통하지 않고도 좌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을 목격했기에 내린 결단.
또한 적어도 소검신은 모든 사안에 대하여 가감 없이 진실했다.
그의 가벼운 언행 사이에서도 깊은 철학과 신념이 느껴졌다.
특히나 인간의 필멸(必滅)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
그런 그의 시각은 가히 정수리가 꿰뚫리는 듯한 충격이요 신선한 영혼의 울림이었다.
그렇게 소검신과 함께한 삼천 년.
자신의 많은 것이, 아니 모든 것이 바뀐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천지를 드리우는 의념의 파동력(波動力).
회수하고 남은 의념의 잔존만으로도 천하를 모두 집어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저 위대한 존재, 소검신으로부터 배운 진정한 극의념계(極意念界)였다.
“꺄아아아악!”
조휘를 쫓아 대회의장으로 들어서다 그런 금천을 발견한 홍예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금천을 보자마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홍예.
이내 의문 가득한 조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왜 그러지?”
“그, 그자잖아요!”
“그자?”
홍예가 자신의 머리칼을 들추었다.
마치 머리를 통째로 움켜쥔 듯한 시뻘건 손자국.
그것은 흡정요개술(吸精妖開術)이라는 법술로 추정되는 흔적이었다.
“본 녀의 기억을……!”
“음.”
그제야 조휘도 생각난 듯 묘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홍예의 기억을 훔친 자가 너였냐?”
“그저 신(臣)의 미욱한 시절에 벌인 행위이옵니다.”
조휘가 매섭게 금천을 노려보다 다시 무심히 입을 열었다.
“무슨 정보가 필요했던 거냐.”
“원도(原道)의 흔적을 찾고 있었사옵니다.”
“장삼봉? 왜지?”
“모르옵니다. 그저 그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또 그 대답이냐.”
이 황금이 놈을 추궁할 때면 언제나 그 끝은 ‘모릅니다. 그저 그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만 반복될 뿐이었다.
도무지 자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 같으니!
이젠 그가 천 년 이상 살아온 고귀한 영력을 지닌 존재가 맞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남궁장호가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조휘를 향해 조심스레 묻는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
조휘가 시리도록 투명해진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육존신의 네 번째.”
“육존신(六尊神)?”
“달마, 아니 신좌의 네 번째 실험체이자 그의 제자다. 금천존신이라 불렸던 이지.”
차아아앙!
남궁장호가 쩍 벌어진 입으로 경악하며 검을 빼 들었다.
한껏 긴장하며 엄정하게 기수식 자세를 취한 그가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중원을 멸망으로 이끌던 자의 휘하가 아니냐! 어찌 이런 자를!”
“개과천선했으니 용서해 줘. 어쨌든 이제 내게 속한 ‘존속’이니까.”
“존속……?”
조휘가 아무리 세력의 종주라고 해도 부하를 칭할 때 ‘수하’ 혹은 ‘휘하’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부모나 선대가 아닌 이상 아무리 부하라 할지라도 함부로 존속(尊屬)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금천의 반응이 기이하다.
오히려 희열에 몸을 떨며 자신을 존속이라 칭해 준 조휘를 향해 오체투지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존재께서 본 신을 그토록 귀히 여기고 계셨다니 일생의 홍복으로 여기겠사옵니다. 제 영혼이 사멸하는 그날까지 더욱 충심으로 모시겠사옵니다.”
가히 자신의 영혼까지 바칠 기세!
그것은 단 한 점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 존속으로서의 완벽한 낮춤이었다.
아무리 무림이 약육강식의 세계라지만 이 정도 굴종은 과해도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그런 금천을 바라보며 남궁장호는 그가 마치 신을 추앙하는 신도처럼 느껴졌다.
남궁장호가 더욱 의혹의 눈초리로 조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네놈은 이런 엄청난 자를 무슨 수로 포섭한 것이냐?”
오체투지한 채로 남궁장호를 올려다보며 그 눈빛에 기이한 열기를 발하고 있는 금천.
“신, 더 이상은 지켜보기가 힘드옵니다. 감히 불멸의 신성(神性)을 이룩하시어 위대한 우주의 율법으로 좌가 되시…….”
“닥쳐. 그 입 찢어 버리기 전에.”
조휘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다.
자신은 결코 그 빌어먹을 좌가 아니었다.
가장 큰 증거로, 자신이 지금 이렇게 중원에 존재하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우주의 율법에 따르면, 불멸의 신성을 이룩하여 좌에 오른 존재는 혼세일계에 그 위력을 행사할 수 없는 머나먼 차원으로 그 존재력이 격리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렇게 자신은 멀쩡히 중원에 돌아왔다.
공허의 주계를 관장하는 ‘미지의 힘’이 어찌하여 자신의 이름을 석판에 새겼는지는 몰라도, 다른 차원으로 격리되지 않은 점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결코 좌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모두 그렇게 생각할까?
-휘아야.
더없이 자애롭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검신 사부의 영음은 여느 때보다 사뭇 따뜻했다.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다.
그런 사부의 더없이 따뜻한 음성에도, 조휘는 결코 냉랭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를 중심으로 공명(共鳴)하는 천하(天下)를 진정…….
“그만, 그만하십시오.”
당사자인 자신이 왜 모르겠는가.
풀 한 포기, 흩날리는 바람, 그야 말로 천하의 모든 생령(生靈)들의 의지가 자신과 공명하고 있었다.
가벼운 의지만 일으킨다면 그런 모든 생령들의 공명하는 파동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좌가 어찌하여 불과 물, 바람 따위로 제자들에게 현신할 수 있었는지 곧바로 이해될 정도로, 그것은 의념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또 다른 경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확실히 신좌와는 다르다.
이렇게 자신의 본체가 좌들의 세상이 아닌 이곳 중원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자신은 철저하게 종(種)이 다른 것이다.
-허면 휘아야. 우리의 각오도 부정할 셈이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만 깨물고 있는 조휘.
-직접 보아라! 돌아온 후로 너는 왜 한 번도 영계를 직시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이미……!
“사부님. 제발요.”
조휘는 결국 뚝뚝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신성(神性)이 된 자신의 존재력이 너무도 강력하여, 그 힘에 영향을 받은 영계가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귀암자와 천우자가 소멸까지 각오하며 막대한 영력을 법력으로 치환해 결계를 생성하였으나 그마저도 힘을 잃어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끝내 영계가 붕괴되어 소멸한다면 저 고귀한 고대의 영령들은 모두 사라질 터.
좌는 개뿔!
사랑하는 사부님과 선조님들, 질풍처럼 살다 간 강호의 대선배들이 저렇게도 사라져 가는데도 이렇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무력한 자신이 무슨 신(神)이며 좌(座)일 수 있단 말인가.
-휘아야. 진정 아직도 모르겠느냐.
속절없이 눈물만 흘러내릴 뿐 조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네 존속(尊屬)이 될 운명이었단다.
“사부님…… 어찌 그런 말씀을…….”
조영훈의 영혼으로 조휘의 몸에 환생했을 때, 마치 껌뻑이는 형광등처럼 어떤 미지의 지식들이 간헐적으로 점멸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었다.
검신 사부의 말대로, 존자들의 영혼과 존재력이 자신과 합일(合一)되는 것은 어쩌면 그때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 오랜 세월 닦아 온 지고한 영력이 결국은 자신에게 모두 전해져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의 본질은 소멸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오늘 우리의 종언(終焉)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된 숙명일 것이다.
그때, 마침내 영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존자들의 세계가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세상을 이루고 있던 붉은 천장이 마치 유리처럼 산산이 깨어지고 있을 때 으름장 같은 마신의 영언이 들려왔다.
-애송이!
애송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그런 마신 어른의 음성에는 걱정하는 마음과 자애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반드시 사람을 지키고 중원을 구해라! 물론 그 쳐 죽일 달마 놈도 없애 버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오는 와중에서도 조휘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당연히 그래야죠 누구의 명이신데요. 천하의 마신의 명이 아닙니까. 하하!”
-잊지 않고 우리 사마(司馬)를 돌봐 주어 감사하네. 결코 잊지 않겠네.
얼마 전 조휘는 사마세가와 그 방계들을 모두 지하 공동의 일원으로 맞이할 것을 천명했다.
이에 진심으로 조휘에게 고마워하는 무신의 영언이었다.
“평소 저를 그리 쪼잔한 놈으로 여기셨습니까.”
어찌 되었든 조휘는 사마씨와 오랜 세월 반목했던 조씨 혈족의 직계.
허나 그는 자신에게 닿은 인연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허허…….
천하를 위진했던 패왕(覇王), 조맹덕이 으스러져 가는 영계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애초에 신이 될 운명의 녀석에게 왕재(王才) 따위를 운운했다니 본 왕의 안목도 이제 썩을 대로 썩었구나.
조맹덕은 더없이 후련한 심정으로 어여쁜 후손을 향해 영언을 이어 갔다.
-왜 숨겼느냐?
조휘의 되물음.
“무엇을 말입니까?”
-간사한 놈. 관우의 후손을 추적해 달라는 본 왕의 부탁을 들어주다 저놈이 익덕(翼德)의 후손임을 알아채지 않았더냐.
장일룡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 조휘.
“어르신의 부탁이 장비(張飛)의 후손을 찾아 달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씁쓸한 어조로 이어지는 조맹덕의 영언.
-본 왕은 그에게도 참으로 몹쓸 짓을 하였다. 익덕의 후손들을 우리 조가처럼 후히 여기며 잘해 줄 것이라고 본 왕에게 약속해 줄 수 있겠느냐?
장일룡은 익덕의 후손이기 이전에 둘도 없는 자신의 친우다.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운장의 후손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실로 안타깝구나.
조휘가 담담히 말했다.
“어르신의 유지를 이어 가겠습니다.”
-그래. 드디어 작별이로군.
쿠쿠쿠쿠쿠쿠쿠-
부서진 영계가 급격하게 수축하고 있었다.
이제 존자들의 모든 기억과 영력은 조휘에게 흡수될 것이다.
악착같이 결계를 지키던 귀암자의 영체가 타다 만 재처럼 흩날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좌(座)이시여! 천상에 그 존귀한 이름을 새기셨다면 그 뜻을 이 몸에게 알려 줄 수 있겠소이까!
-그래! 나도 궁금하구나! 나도 그것만은 알고 가고 싶다!
조휘의 음울한 시선이 허공에 맺혀 무한한 창공을 가로지른다.
“부정(否定)하는 자(者).”
검신이 소멸되어 가는 자신의 육체를 악착같이 붙잡으며 한껏 의문을 드러냈다.
-무엇을 부정한단 말이더냐!
무심한 조휘의 입술이 다시 달싹거렸다.
“존재(存在)를 부정하는 자. 그것이 빌어먹을 제 신명(神名)입니다.”
* * *
더없이 자애로운 검신 사부와 조가 선조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상실감은 의외로 오래도록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났다.
이렇게 슬픔이라는 감정조차 무뎌진 것이, 초월적인 자신의 경지로부터 비롯된 일은 아닐까.
갈수록 사람의 인간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면, 아무리 드높은 경지를 이뤄 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스스로를 향한 분노, 그런 처연한 마음으로 조휘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자들의 지식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구술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는 삼신(三神)의 진정한 깨달음들.
스스로 군주가 되어 군벌을 일궈 내고 국가의 초석을 다진 패왕의 경험들.
고매한 법력을 구사하는 천도문의 모든 술법 체계와 도맥(道脈)의 오랜 비밀들.
엄혹한 지하상계의 생태계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비공(秘公)의 은밀한 지식들.
상상할 수도 없는 학문적 수양을 지니고도 어지러운 세태에 신음하며 절망했던 한 학사의 기구한 삶까지…….
그것은 마치 인간의 인류사를 통째로 축약한 듯한, 그야말로 놀라운 삶의 지식이요 대영웅들의 일대기였다.
머리가 통째로 으깨어지는 듯한 두통이 물밀듯이 밀려왔으나, 갑자기 지식의 총량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탓에 조휘는 연신 희열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존자들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내게서 살아 숨 쉰다.
그들이 지녔던 ‘사람의 열정’이, 이토록 뜨거우며 진한 향기로 내게 남아 있거늘 어찌 그들이 죽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조휘가 천천히 눈을 뜬다.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휘를 바라보며 모든 동료들은 일제히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과 같은 존재력에 기인한 놀라움이 아니었다.
인간 자체에서 풍겨 오는 지극히 현현(玄玄)한 기운.
더없이 오묘하다.
더없이 아득하다.
수백 년 적공(積功)을 쌓고 쌓아, 마침내 인간사를 초월한 깨달음을 이룩한 현자(賢者)처럼 느껴진다.
저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절대자(絶對者)라는 지고한 칭호로도, 감히 그의 본질을 형용하기 민망할 정도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남궁장호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조휘가 아니라 금천이었다.
“고대의 영들은 모두 소멸하였으나 우리 위대한 주(主)께 존속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리 소란 떨 것 없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잠깐, 잠깐만요.”
제갈운의 명석한 두뇌가 금천의 말에 담긴 진의를 곧바로 파악해 냈다.
“설마 의천혈옥의 존자들께서 모두 돌아가셨다는 의미인가요?”
“그렇다.”
그때.
조휘의 목에 매달려 있던 의천혈옥이 칙칙한 검은 빛을 띠더니 이내 푸석한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아아!”
털썩.
장일룡과 염상록, 강비우 등이 하나같이 처연한 표정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마신(魔神)은 자신들의 사부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자신들의 변화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은혜는 아무리 갚아도 모자란 것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다시 뵙지 못할 줄은…….”
“마신 어른…….”
남궁장호 역시 정사(正邪)를 떠나 그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 허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휘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 계신다.”
“무슨……?”
“그게 정말이냐?”
조휘가 다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꼬장꼬장하고 괴팍한 천하의 마신 어른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시겠냐?”
“휴…….”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조휘는 이내 물기로 가득한 눈이 되어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쉽지만 그분들이 다시 내 몸에 빙의할 수는 없다! 다만 결코 돌아가신 것은 아니니 그리 상심하지들은 마라!”
영령으로 살아 계시면서 강신할 수 없다는 조휘의 말에 남궁장호는 순간적으로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곰곰이 상념에 빠지더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제갈운도 가슴을 탕탕 쳤다.
“뜻이 전해진다면!”
화답하는 장일룡과 한껏 웃는 염상록.
“결코 죽은 것이 아니우!”
“와하하하하!”
험난한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들답게, 그들이 추모하는 방식이란 나름의 우수와 호탕함이 있었다.
후인들의 마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상, 강호의 대영웅들은 결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어 조휘는, 달마진경의 진정한 정체와 신좌의 의도를 동료들에게 천천히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드러난 달마진경의 정체.
그것은, 중원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한 기물(器物)이었다.
“허면 그게 다 그 신좌라는 놈이 우리 사람들을 곱게 양념을 쳐서 먹겠다는 뜻이우?”
장일룡의 질문에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휘.
“그래. 아마 본인이 가장 섭식하기 쉬운 형태로 사람들의 본질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겠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떤 특수한 능력이 개화(開花)될 것이고 그게 바로 놈이 천하에 드리운 미끼다.”
그런 조휘의 설명을 모두 듣고 있던 제갈운이 한껏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런 내용을 강호에 공표해 본들, 믿을 자들은 아무도 없겠군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장호.
“강호는 힘을 숭앙한다. 눈앞에 경지를 이뤄 줄 놀라운 매개(媒介)가 있는데 누가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 그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내삼협 어른들이나 다시 한 번 무신의 이름을 빌리는 건 어떻수?”
그것은 한 번씩 터지는 장일룡의 놀라운 심계였다.
조휘는 감쪽같이 무신(武神)으로 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천신과도 같은 무신의 신위를 다시 강호에 드러낸다면 이에 감읍할 강호인들은 무수히 많았다.
한데 이제 막 대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던 만박자 제갈유운이 굳은 얼굴로 대답하고 나섰다.
“아니 될 말이네.”
“만박자 선배님을 뵙습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만박자는 가벼운 손사래로 후배들의 예를 물린 후 더욱 침중하게 표정을 굳혔다.
조휘도 가볍게 예를 취했다.
“모두 들으셨습니까.”
“그렇네. 달마진경에 그토록 두려운 비밀이 있었다니 실로 기경할 일이로군.”
이어 대회의장으로 들어온 전 무황 청운진인도 그 얼굴에 수심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제갈운이 의문을 드러냈다.
“무신의 위상을 활용하지 말라는 건 어떤 연유 때문인지……?”
무황의 엄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림맹에 명분의 빌미를 내주는 것은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지.”
“명분이요?”
순간 조휘의 두 눈이 현현하게 빛났다.
“조가대상회가 무신의 위신을 빌어 달마진경을 기어코 마물(魔物)로 규정한다면 당장 소림부터 발칵 뒤집어지겠지. 위대한 보리달마가 남긴 전설적인 보물이 마물이라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선종 전체가 이교도(異敎徒)라는 뜻이다.”
“음…….”
“과연 소림 선종을 따르는 무수한 종파와 속가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보리달마를 숭앙하는 선종의 수많은 신도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어 조휘가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오랜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신성. 그것이 종교(宗敎)라는 집단의 마력이야. 결코 쉽게 깨어지지 않지.”
좌에 이르려는 이들이 왜 그토록 자신만의 교단을 갖길 노력했겠는가.
인간의 신실한 믿음이란 이토록 철옹성과도 같은 방패가 된다.
신좌가 달마진경을 세상에 뿌리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
그런 그가 조가대상회의 방해를 예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선종의 반발은 무당과 화산의 연대를 낳을 것이고, 그런 강력한 결속력은 결국 무림맹 전체를 대변하는 논리로 우뚝 서겠지. 그렇게 모아진 명분으로 우리 조가대상회를 압박한다면 강호는 정확히 양분(兩分)될 수밖에 없다.”
조휘의 대답에 남궁장호가 되물었다.
“강호의 반만이라도 달마진경의 마수에서 건져 낼 수 있다면,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조휘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 조가대상회가 양분된 강호, 즉 완벽히 강남(江南)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변질된다면 더 이상 우리의 영향력은 정파 세력을 아우를 수 없다.”
“음……!”
과연 가만 생각해 보니 강남은 전통적으로 사파의 권역이었다.
이제 막 정파 세력으로 발돋움한 조가대상회가 더 이상 강북에 영향력을 드리울 수 없게 된다면.
그리고 무림맹과 명분을 두고 격돌하는 모양새가 된다면.
결국 강호인들은 조가대상회를 사천회 따위와 동일시 여길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조가대상회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판매하는 물건들의 뛰어난 상품성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정파검종의 대영웅 검신의 적전제자라는 소검신의 강력한 명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내삼협과 무신의 명성이 더해져 무림맹의 입지를 더욱 협소하게 만들었기에 조가대상회가 천하에 위력을 떨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천년 소림 선종을 부정하며 무림맹의 강북과 정확히 명분으로 양분된다면 더 이상 조가대상회는 그런 위력을 떨칠 수 없게 되는 것.
“그래서 또다시 무신의 위상을 활용하는 건 지금으로선 최악의 패다.”
그런 조휘의 빈틈없는 논리를 지켜보는 만박자의 눈빛이 기이한 열기를 발하고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소검신은 도저히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심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오늘은 그때와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혜안(慧眼).
그것은 명석한 두뇌에서 오는 지략과는 별개다.
오랜 경험을 통해 기른 안목이 없다면, 저렇게 곧바로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저 젊은 영웅에게 무슨 일이 또 있었단 말인가.
만박자는 왠지 그런 조휘가 점점 불가해(不可解)의 존재로 멀어져 가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고심하던 제갈운이 답답한 심정으로 만박자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일을 도대체 어떻게 풀어 나가야 되겠습니까?”
“글쎄다…….”
그때, 장일룡이 조휘에게 물었다.
“그 달마진경을 찍어 내는 법보(法寶)를 우리가 없애 버리는 것이 어떻수?”
제갈운이 화들짝 놀라며 장일룡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일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저보다 단순 명쾌한 해답이 있을까?
아아,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짜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저 장일룡이다.
그래, 니가 제갈일룡 해라.
조휘가 금천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 법보를 누구에게 줬지?”
금천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무림맹의 총군사에게 주었사옵니다.”
“……제갈찬휘?”
총군사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만박자와 제갈운이 착잡해진 심정으로 또다시 쓴맛을 삼켰다.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신좌의 죄악에 자신들의 가문이 협조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자괴감의 시련이었다.
“그럼 맹의 군사부가 그 마물을 관리하고 있겠군.”
무황이 입을 열었다.
“맹 내의 모든 지낭(智囊)이 모여 있는 군사부일세. 허투루 보관하지는 않을 걸세.”
“뭐, 일단은 사자(使者)로 가 보는 거지요.”
조휘가 한차례 동료들을 훑어보다 결국 남궁장호와 시선이 얽혔다.
“나와 함께 맹으로 가는 건 남궁 형이 좋겠군.”
피식 웃는 남궁장호.
“본 가의 명성은 맹에 꽤 잘 먹히는 편이니까.”
이를 모두 지켜보던 사마중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천하에 사마(司馬)보다 더한 명성은 없다.”
조휘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철검에 올라탔다.
“그럼 둘 다 같이 가자고.”
* * *
무림맹(武林盟).
오랜 전통의 구파일방과 무수한 강호 세가들이 수호자로 있는 곳.
무황의 영도 아래 백만여 명에 이르는 맹도들이 강력한 명분으로 뭉쳐진 철혈 무인들의 성지.
무림맹은 그야말로 천하 무림을 대변하는 이름이자 정파 그 자체이며, 단일 세력으로는 가장 강력한 힘을 떨치는 무력 단체라 할 수 있었다.
산서성 태원을 가로지르는 대로의 중심에는, 거대한 사자상을 양옆으로 둔 육중한 철문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무림맹의 입구 사자군림문(獅子君臨門)이었다.
그런 사자군림문을 통과하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검(解劍)해야 하며, 가문과 사문을 밝히고 방문 목적과 용무를 객첩에 기록해야 했다.
만약 사파인이라면 내공을 봉인하는 봉심갑(封心匣)을 착용해야 했고, 약관에 이르지 못한 후기지수들 또한 유력 가문의 보증이 없다면 출입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는 발을 디딜 수 없는 곳.
천하를 아우르는 무림맹의 권위란 이토록 엄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자군림문은,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수많은 열혈 청년들의 꿈을 짓밟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지방의 명성이란 결코 통하지 않는다.
각자의 가문과 무관이 고향에서야 강대한 명성을 떨치겠지만 강호서열록의 현실이란 실로 차디찬 법.
평생의 자부심으로 여기던 자신의 가문이, 강호 서열의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하는 차가운 현실을 강호의 청춘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사자군림문의 공터 앞에서는 늘 실랑이가 벌어졌으며 시시때때로 신비로운 고수들의 도전 또한 맞이해야만 했다.
진천수호대주(震天守護隊主) 하륭(河隆).
그가 바로 사자군림문을 지키는 진천수호대의 대주이며 무림맹 전체를 통틀어 일백 위 내에 드는 초극의 고수였다.
부리부리한 호목을 빛내며 매섭게 사자군림문을 응시하는 그에게로 한 부하가 소리쳤다.
“대, 대주님!”
머나먼 창공을 바라보며 경악의 얼굴로 소리치고 있는 부하 대원을 응시하며 하륭은 눈살을 찌푸렸다.
“웬 호들갑이냐.”
부하 대원이 하늘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저기 보이는 저거 말입니다! 혹시 사람이 아닙니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흡!”
부하 대원의 시선을 쫓아 함께 하늘을 바라보던 하륭이 창백하게 얼굴을 굳혔다.
창공 위에 표표히 움직이는 희미한 점 하나.
처음에는 그저 철새 따위로 여겼으나 그야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의념의 파동이 사방 천지를 드리우고 있음을 느끼고서 대경실색한 것이다.
그런 창공의 희미한 점이 이내 점점 시야에 들어온다.
눈부시도록 강렬한 빛을 반사하고 있어 그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평생을 검수로 살아온 하륭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검(劒)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 어검비행(御劒飛行)……!”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하륭이 전 내공을 기도에 응축하더니 곧 강력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냈다.
“팔무좌급의 엄청난 고수다! 외원주님께 적의 급습을 알리고 이를 대비케 하라!”
평생을 사자군림문 수호에 임해 왔으나 팔무좌급의 무위를 보유한 고수가 무단으로 맹 내에 진입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전설의 어검비행이라니!
‘어검비행이라면 풍문으로만 듣던 그 소검신이란 말인가?’
그런 어검비행의 신비 고수를 전율하며 바라보는 하륭.
결코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과 같았던 사자군림문을 완전히 무력화하며 진입하는 그 광경에 그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임무는 임무!
곧 그가 대원들과 함께 질풍처럼 외원으로 내달렸다.
* * *
조휘의 시야에 아홉 마리의 용이 굽이쳐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용마루가 들어왔다.
무림맹의 외원에서 가장 크고 높다란 전각.
아마도 저 거대한 대전이 구파의 저력을 상징하는 구룡대전(九龍大殿)일 것이다.
“호오…… 이렇게 하늘에서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닌데.”
그 거대한 규모가 조가대상회와는 급이 틀리다.
그야말로 시야가 미치는 모든 곳에 걸려 있는 무림맹의 맹기(盟旗)!
마치 한 국가의 도성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과연 천하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는 무림맹다운 위용!
“외원의 모든 무력대가 모여 우리만 바라보고 있다.”
남궁장호가 한껏 진지한 어조로 그 얼굴에 수심을 드리우고 있었으나, 조휘의 허리로부터 이어진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그의 진지함은 왠지 모르게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남궁 형, 좀 추워 보인다?”
“무, 무슨 소리를! 오히려 땀이 나서 속곳이 흠뻑 젖었다!”
“땀이 아니라 다른 것이 지렸겠지.”
어검비행의 엄청난 속도로 인해 새파란 입술을 연신 파르르 떨고 있는 남궁장호가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인다.
물론 천하제일가문 중천수호가의 장자 사마중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슬슬 내원 쪽에서도 무사들이 모이고 있군.”
머리가 모두 뒤집어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저렇게 진지한 음성을 뱉어 대니 조휘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일단 그 머리부터 손질 좀 하지 그래?”
“음? 아! 내 건(巾)!”
단단히 동여맨 영웅건이 빠진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어검비행의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을 방불케 했다.
앞으로 다시는 조휘의 어검비행을 겪지 않고 싶을 정도.
다시 조휘가 물샐틈없이 모여드는 맹도들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많이 모일수록 좋지 뭐. 시선이 몰리면 몰릴수록 손해는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궁장호의 질문에 조휘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계속 깽판을 치다 보면 결국 무림맹의 총군사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어 남궁 형? 그자가 나오면 법보를 어디에 숨기고 있는지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아, 아니…….”
남궁장호는 뭐라 항변하려다 결국 입이 꾹 다물어지고 말았다.
보통 작전이란 것이 있지 않나?
이렇게 어검비행으로 시선을 모은 후 은밀히 자신들 중 하나가 잠입하여 탐색전을 벌이든지 하는.
한데 무슨 이렇게까지 수많은 맹도들을 모아 놓고서 대놓고 법보의 위치를 물어보겠다고?
그런 남궁장호의 황당함을 읽은 듯 조휘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실실 웃었다.
“멀리 돌아갈 필요가 있겠어? 남궁 형 이미 나는 만부부당이 가능하다고.”
만부부당(萬夫不當).
흔히 표현되는 말이었으나 실제로 만 명의 용력을 감당할 무인은 존재할 수 없었다.
말이 만 명이지 숫제 백 명만 돼도 일백 초를 동시에 감당하는 것과 마찬가지.
단순한 필설이 아닌 진실된 만부부당은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조휘의 진정한 경지를 모르는 남궁장호는 지금의 상황을 그리 녹록하게만 여길 수 없었다.
“저들은 일반 장정이 아닌 무림맹의 무사들이다! 또한 외원의 무사들만 해도 육만, 내원은 그 세 배에 이른다! 전서구를 띄워 주변 지부들의 무력대를 모두 복귀시킨다면 사흘 내로 수십만이 모이는 것이다! 네가 홀로 이 모든 병력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조휘.
“충분히.”
“뭐, 뭐라고? 미, 미친놈!”
그런 수십만이라는 병력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대문파의 장로급도 수도 없이 포진해 있을 것이고, 심지어 팔무좌들까지도 포함된 숫자.
절대경, 아니 자연경에 이른 무인이라고 한들, 죽이고 죽이다 제풀에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념의 총량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런 엄청난 만부부당이 가능하다면, 단 한 사람이 제국의 역량을 지닌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마중도 한껏 진지한 어조로 조휘를 향해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지금 그대의 신위가 무조(武祖)님에 비한다면 어느 정도지?”
무신(武神).
수 세기가 지나도록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해 온 강호의 신이자 새외대전으로부터 천하를 구한 대영웅.
“천양지차(天壤之差). 그야말로 까마득한 차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사마중.
“그런데도 저 모든 무인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조휘가 피식 웃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그 비교 우위에 상(上)은 내 쪽이다.”
“뭐, 뭣이!”
천하제일가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마중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망언!
“건방진! 네놈은 정녕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구나! 감히 위대한 무조 어른을 한 수 아래로 격하하는 오만함이라니! 같은 신의 휘호를 새기고 있다고 하여 네놈이……!”
“시끄럽다.”
조휘가 가타부타 대답 없이 지상으로 철검을 운행한다.
그렇게 구룡대전 앞, 너른 연무장의 중심에 도착한 조휘가 동료들을 내려놓고는 자신도 내려와 이내 철검을 회수했다.
소검신(小劒神)의 용모파기는 이미 천하에 유명하다.
당연히 그를 알아본 진천수호대주 하륭이 엄정하게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천하에 명성 높은 소검신을 뵙소. 한데 참으로 유감이오. 아무리 그대가 팔무좌의 고절한 고수라 하나 사자군림문의 법도를 깨서는 안 되는 것이었소.”
“법도?”
“법도는 맹령(盟令)을 대리하는 수단. 이를 부정하는 것은 무림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오늘부로 그대는 무림맹도들의 적이 되었다 그 말씀이외다.”
“하하!”
한 차례 싱그럽게 웃던 조휘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맹도들을 스윽 하고 훑어보았다.
“그럼 이제 난 어찌 되는 거지요? 그대들의 적(敵)이 되었으니 추살되는 겁니까?”
황당하다는 듯한 하륭의 눈빛.
“맹은 그런 야만적인 집단이 아니오. 그대의 신변을 구속하고 계율원으로 압송한 후, 절차와 법도에 따라 엄중히 죄를 물어 해당하는 형(刑)을 내릴 것이오.”
조휘가 피식 웃었다.
“이상한 노릇이군.”
조휘가 연신 의미 모를 미소로 실실거리자 하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조휘.
“뭔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무슨……?”
“형(刑)을 운운하기 전에 당신들은 이 소검신을 구속할 능력이 없잖습니까?”
그런 조휘의 도발에 모든 무림맹 무사들의 눈빛이 강렬함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어검비행의 신위를 지닌 절대적인 경지의 검수.
그가 단단히 마음먹고 도주하기를 작정한다면 그를 구속할 어떤 수단도 없는 것이다.
“무릇 권력이란, 그에 상응하는 힘이 전제되어야 하는 법. 하지만 당신들의 힘은 이 소검신에게 미치지 않으니 당연히 맹령에서 자유로워야 하지 않나.”
조휘를 둘러싼 맹도들이 하나같이 크게 놀라며 경악하고 있었다.
소검신은 농담처럼 흘리듯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그의 말속에 함의된 뜻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지금 저 소검신은 무림맹의 한가운데 서서, 맹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천명한 것이다.
오랜 강호의 역사 속에서 저리도 오만한 선언을 한 존재는 오직 천마(天魔)뿐이었다.
“가, 감히!”
“사마외도다! 소검신이 맹을 부정하는 사마외도를 천명했다!”
그런 맹도들의 반응에 조휘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순간.
소검신이 서 있는 주변이 이상하게 변했다.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으나 맹도들은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의 주변에 서린 풍경이 기이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왜곡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허나, 지금 그런 소검신의 주변에 서 있는 화경(化境) 이상의 고수들은 느끼는 감각들이 사뭇 달랐다.
남궁장호는 그대로 선 채 굳어졌다.
“이, 이게 무슨……!”
사마중은 차라리 주저앉아 버린다.
“도, 도대체가!”
구구구구구구구……!
세상이 세차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지의 무언가가, 그의 의념과 어울리며 마치 기쁘게 울듯 화답하고 있었다.
위대한 자연경의 경지를 직접 목도할 수 있는 가문에서 자라 왔으나, 그런 사마중에게도 이런 생경한 느낌이나 감각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그때.
스스스스스스-
세상이 검어졌다.
쉴 새 없이 내리쬐고 있던 강렬한 태양빛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천하가 암흑천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봐. 무사.”
하륭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한 점의 달빛조차 없는 이런 칠흑 같은 어둠이란 그로서는 평생 처음 경험하는 신비.
악착같이 안법을 일으키며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하륭이 발악하듯 외친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오!”
조휘의 시리도록 차가운 음성이 너른 연무장을 휘감았다.
“총군사를 데려와. 모두 죽여 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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