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88
87 章>
저 괴물 같은 거대한 동체를 도대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육체의 산(山).
어찌 인간의 몸이 저토록 거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가진헌 대장군은 제국의 장수답게 곧바로 저 무식한 거체(巨體)가 지닐 전장에서의 효용성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저만한 거인이 다루는 병기라!
단 일 합(一合)에 적진의 보병 군단이 횡으로 와해된다.
기병단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무리 용맹한 전마(戰馬)라 할지라도 저런 거인이 펼치는 무위 앞에서는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비처럼 쏟아지는 궁병들의 화살 세례 속에서도 살가죽만 잠시 따끔거릴 뿐 전장을 휘젓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적군의 공성추(攻城錐)나 발석거(發石車) 따위도 가벼운 발길질에 모조리 고물이 될 터였다.
전장의 거대한 괴물.
그야말로 전신(戰神)!
허나 가진헌은 조휘의 대답에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벼, 병졸이라고?”
“예.”
장수도 아닌 병졸이라니?
저런 전장의 거신을 하나가 아닌, 수백수천을 거느릴 수 있다고?
조휘가 태연자약하게 남궁장호를 쳐다봤다.
“저 거인은 남궁세가의 소검주입니다. 달마진경의 정수를 각성한 상태죠.”
“달마진경의 정수!”
“예. 물론 모두가 저런 뛰어난 각성 형태를 이룩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예를 익힌 자들일수록 보다 전투적인 형태로 각성할 공산이 크지요.”
“그렇다면!”
조휘가 가진헌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대장군께서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평생을 군마와 병기를 다뤄 온 병졸들이라면 그 잠재력이 범인을 훨씬 능가할 것입니다.”
눈앞에서 전신의 위용을 대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 급하겠는가.
가진헌이 결심이 선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달마진경이란 것을 내게 주게! 어서!”
이렇게 쉽게 결정을?
조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뉴럴링크 칩이 가득 들어 있는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일단 병단 하나 정도만…….”
“무슨 소릴! 다 내어 주시게! 사천장군부의 모든 병졸들에게 지급할 것이네!”
“전부를요?”
고지식한 장수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너무 어렵게 생각했나?
설마하니 가진헌이 사천장군부의 모든 병력이 무장할 뉴럴링크 칩을 요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조휘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각성자는 점진적, 연쇄적으로 나타나야 그 충격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한 집단에게 갑자기 지나친 힘이 주어지는 것은 위험했다.
무엇보다 사천장군부와 지척인 당가타(唐家陀)가 걱정스러웠다.
“모든 신병기는 시험 운용이 필요합니다. 순차대로 가시죠. 일단 병단 하나 정도에 지급할 양부터 드리겠습니다.”
“흠…….”
가진헌이 일리가 있다는 듯 흥분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도록 하지. 황궁을 향한 그대의 충정을 내 결코 잊지 않겠네.”
내심 조소를 머금는 조휘.
저 가진헌이 사천장군부를 태장군부(太將軍部)로 승격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뇌물을 뿌려 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조휘였다.
그런 권력의 노예가 나라를 향한 충정(忠情)을 운운하다니 실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천장군부의 병졸들을 각성자 집단으로 변모시킨 후 그가 곧바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관전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조휘가 뉴럴링크 칩을 백여 개 정도를 꺼내 그에게 건넨 후 곧장 포권지례를 했다.
“장군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럼…….”
가진헌과 육응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검을 타고 사라져 가는 조휘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 * *
조휘가 각 지방의 장군부를 모두 순회하고 돌아온 지 정확히 달포 후, 조가대상회에 전서구가 무수히 날아들었다.
이제 어엿한 조가대상회의 정보 조직이 된 야접.
일야만략화접 홍예는 각지에서 날아온 전서구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다 뭐야?”
변고는 드물기에 변고(變故)라 불린다.
중원의 정보를 다뤄 온 야접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변고가 쏟아진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휘릭-
엄청난 경공으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온 홍예는 곧장 조휘의 처소를 향해 달려갔다.
언젠가부터 조휘는 간부들과의 회합조차 중지한 채 군사(軍師)로 새롭게 승차한 소제갈과 함께 처소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지 그의 동료들과 간부들이 하나같이 궁금해했지만 그들은 결코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허나 이번 일은 자신의 선에서 처리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조휘 공자!”
차 한 모금 마실 시간이 흐르자 처소의 창문이 열렸다.
조휘가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홍예를 쳐다봤다.
“분명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에요!”
조휘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제갈운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야?”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홍예.
“명화대장군이 스스로 제위에 올라 한중왕이 되었어요! 또한 그는 현재 병력을 당가타로 진군시키고 있어요!”
“한중왕(漢中王)?”
허, 유 현덕 흉내를 내 보겠다는 건가?
“뿐만 아니에요! 호북장군부의 방극 장군도 무한왕(武漢王)을 자처했어요! 그의 병력도 무당산으로 향하고 있어요!”
조휘와 제갈운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피식거리고 있었다.
나라를 향한 충정을 운운하던 장수들이 어찌 이리도 한결같이 거병할 수 있단 말인가?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장군들이 조휘는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을 흥미롭게 만든 소식은 딱 거기까지.
“또 이건 좀 더 심각해요! 난주인들이 모두 죽었어요!”
“난주(蘭州)?”
난주라면 감숙성이 성도가 아닌가?
한데 모두 죽었다니?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난주인들이 다 죽었다고? 대체 어떻게? 벌써 전쟁이라도 일어난 거야?”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목격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뭐라고?”
“난주 전체가 북해(北海)처럼 변했대요! 사방에 소스라치는 한기만 감돌 뿐 흔한 핏자국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또…….”
“잠깐! 한기라고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제갈운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조휘를 바라본다.
“설마……?”
물질계에서 사람의 영혼이 대량으로 사라지면 순간적으로 자연의 법칙이 왜곡된다.
그 넓은 난주가 삽시간에 한기로 뒤덮여 북해처럼 변했다면?
방원 수만 장(丈)을 드리운 소스라치는 한기는 전형적인 섭식의 증상이었다.
그 어떤 성좌들보다 빨리 움직여 인간의 영혼을 대량으로 섭식할 존재라.
“틈. 그놈이다.”
부서져라 이를 깨무는 조휘.
수확하는 틈새 놈이 움직였다면 성좌들의 강림도 머지않았다는 뜻.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아직 중원인들은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도 각성하지 못했다.
“난주 일대에 야접의 모든 정보 자산을 투입해 머리 없이 돌아다니는 시체를 찾아!”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는다는 듯 홍예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머리 없이 돌아다니는 시체?”
제갈운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무조건 찾아야 돼요! 최대한 빨리!”
머리 없이 돌아다니는 시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수확하는 틈새의 화신(化身)이었다.
물론 놈의 본체는 아니었지만 그런 화신을 막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빨리! 어서 가!”
“아, 알겠어요!”
홍예가 경공을 펼쳐 사라지자 조휘가 진득한 눈빛으로 제갈운을 응시했다.
“믿겠다.”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운.
이제 조휘는 다시는 조가대상회에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부터 그야말로 우주적인 존재들을 대적해야 했다.
지난 달포 동안 그와 나눈 엄청난 계획과 전략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자신의 손에 중원 문명의 존속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잘할 수 있을 거다. 너는 내가 아는 최고의 전략가다.”
애써 농담을 뱉어 보는 제갈운.
“일룡이보다도 더?”
“그놈은 너무 간헐적이야.”
조휘가 검에 올라타며 그렇게 소검신(小劒神)으로 화할 때.
“잠깐만요! 잠깐만요 가가!”
어느새 소리 없이 조휘의 처소로 다가온 한설현이 옷깃을 매만지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한 소저…….”
조휘는 측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미래를 약속한 후 언제나 차분한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려 준 한설현이었다.
허나 조휘는 환생의 기억들을 되찾아 신적인 자신의 자아를 모두 회복한 상태.
남녀 간의 애끓는 감정이란 조휘의 것이었지, ‘존재를 부정하는 자’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를 대하는 감정이 희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제 중원(中原)은 성좌대전의 전장이 될 터.
이번 생의 대전이 끝난 후 다시 조휘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아니 무엇보다 그녀가 살아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그녀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오히려 독(毒).
차라리, 잠시 지나가는 아픔이, 그녀를 위한 길일 것이다.
“대체 왜 절…….”
한설현은 어지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차마 다음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혼약일은 이미 속절없이 지나가 버렸다.
그와 함께 후원을 거닐어 본 것이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조휘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예.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순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한설현.
“전 인간이 아닙니다.”
한설현도 이미 조휘의 동료들을 통해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중원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수호신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뿐인 내 남자.
“사기꾼.”
조휘는 이를 깨문 채로 표독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설현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외면했다.
“제가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요.”
어색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제갈운이 불현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미친놈! 그럼 안 돌아오려고? 한 소저를 이렇게 울려 놓고?”
제갈운이 웃으며 다가가 조휘의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와서 꼭 조가복합천상루(曹家複合天上樓)를 함께 완성하자고.”
뜨거운 제갈운의 음성에 조휘가 피식 웃었다.
“꼭대기 층은 이 조가대상회의 회장 거다.”
“하나는 꼭 비워 놓지.”
순간 조휘는 감정의 격류를 느꼈다.
환생을 수도 없이 겪어 인간의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초월자가 된다 해도.
인간의 욕념과 투쟁이 모두 무가치해 보인다 해도.
이렇듯 생을 겪으면 겪을수록 누구보다도 인간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의 생(生).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기보단 한없이 조휘에 가까웠다.
조휘가 묵묵히 걸어가 한설현의 두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한설현의 맑은 동공에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이 비친다.
그녀의 시선을 좇아 함께 하늘을 바라보니, 과연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날이었다.
* * *
구름 위로 한참 솟구친 첨봉(尖峯)들의 높이를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로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듯한 새하얀 설원의 세계였다.
중원에서 가장 높은 곳, 대천산(天山).
이곳이, 조가대상회를 떠난 조휘가 가장 먼저 달려온 곳이었다.
휘우우우우-
조휘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설풍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물빛처럼 투명한 두 눈이 향하고 있는 곳은 저 새하얀 창공 너머의 심우주.
이곳에서 그는 성좌들의 기척을 감지하기 위해 보름 가까이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별의 운행만 느껴질 뿐 감각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군…….’
과거의 성좌대전 때와 똑같은 양상이었다.
놈들은 결코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찢어 죽일 틈새 놈이, 수많은 인간들의 영혼을 수확하며 난리 통을 피울 때가 돼서야 무수한 성좌들이 나타날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먼저 모습을 드러내 봐야 ‘존재를 부정하는 자’에게 모든 시간이 부정되는, 그야말로 소멸에 가까운 타격만 입게 될 테니까.
그때.
“허허…….”
갑자기 여느 노인의 허허로운 목소리가 조휘의 귓전을 적셨다.
조휘가 가볍게 놀란 얼굴로 음성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누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행색의 초로(初老).
하나 이 극한의 첨봉은, 저렇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노인이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물며 저 터무니없는 차림새는 또 뭐란 말인가?
두꺼운 솜옷을 몇 겹이나 둘러도 시원찮을 판국에 저런 가벼운 마의(麻衣)와 허름한 지팡이 하나라니.
이곳은 지구의 지붕이라는 천산의 최고봉. 인간의 손길이 결코 미칠 수 없는 장소였다.
“진정 놀랍도다. 일신에 품고 있는 기운을 감히 추측조차 할 수가 없구나. 대체 이 천산에 언제부터 그대와 같은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황당해진 조휘의 두 눈.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되묻고 싶은 말이었다.
조휘는 노인의 전신에 서린 무위를 잠시 가늠해 보다가 그야말로 기경을 했다.
그의 경지가 자연경의 수준을 한참이나 초월하여 반신(半神)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의 장구한 역사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삼신(三神)보다도 오히려 더 상위의 경지!
육존신조차 이 노인에게는 비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무수한 환생 속에서도 오직 무(武)로써 저만한 경지에 이른 자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처음에는 그가 좌(座)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
충분히 그에 준하는 존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영력의 기질을 살펴보니 신적인 기질이 아니었다.
조휘가 존재를 부정하는 자로서의 권위를 드러냈다.
“오히려 내 쪽에서 할 말이군. 유구(悠久)한 시간 동안 사람을 살펴 왔으나 감히 단언컨대 당신 이상의 사람을 보지 못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지?”
조휘는 노인의 무혼이 지닌 성질을 통해 그의 출신을 유추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무혼은 초월에 초월을 거듭한 끝에 완전한 무색(無色)이 된 상태였다.
“허허……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고약한 인사로군.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어디 나만 할까.”
노인의 신형이 천천히 미끄러지며 조휘에게 근접했다.
신기한 물건을 보는 양 노인의 시선은 연신 조휘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당최 믿을 수 없도다. 대자연의 섭리조차 그대 앞에선 미약한 물줄기에 불과하구나. 하나 이토록 사방으로 미치는 그대의 힘은 염동(念動)이 아닌가? 어찌 무인의 의념이 이런 조화까지 부릴 수 있는고? 이토록 궁구하는 마음에 꼭 답을 내려 주시게.”
조휘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엄하게 변했다.
상대가 인외지경에 이른 대단한 무인이라고 하나 중원의 절멸이라는 재앙을 마주하고 있는 이상 스무고개 따위를 할 시간은 없었다.
“예의가 없는 자로군. 꺼져라.”
날벼락 같은 조휘의 축객령에 노인이 두 눈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꽤 신선했다.
천산 일대의 백성들은 자신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 내며 엎드렸다.
이미 자신은 수백 년 전부터 천산의 신령(神靈)과 같은 존재.
무엇보다 상대에게 뭐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조차 난감했다. 자신에게 인간의 이름 같은 건 정말로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다시 무신경한 얼굴로 머나먼 창공을 응시하는 조휘.
노인은 조휘의 그런 모습에 더욱 기가 찼다.
경악으로 얼룩져 가는 노인의 얼굴.
“설마…… 자네…… 천상의 천기(天氣)가 읽힌단 말인가……?”
조휘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생각은 없으니 그만 꺼지라고 했다.”
“허, 허허허!”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노인.
“과연 무도를 걷는 자들에게 손속을 겨루는 것 외에 무슨 인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후웅!
조휘는 한풍을 가르며 자신에게 짓쳐 들고 있는 노인의 지팡이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력을 올곧게 느끼고도 감히 싸움을 걸어오다니!
“미친 노마로군.”
파앙!
조휘가 자신의 지팡이를 가볍게 역수(逆手)로 잡아 버리자 노인이 더욱 크게 놀랐다.
“감히……!”
지극히 가벼운 한 수처럼 보였으나 지팡이에 담아낸 거력은 족히 수천만 근(斤).
그 증거로, 조휘가 딛고 있던 첨봉의 바닥이 엄청난 충격파로 인해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지지직!
고요한 천산에 거대한 재앙이 일어났다.
막대한 충격파가 첨봉의 꼭대기를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거대한 빙산(氷山) 전체를 휘감아 버린 것이다.
쿠쿠쿠쿠쿠쿠쿠-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나 온 천산을 휘감는대도, 조휘는 그저 검을 띄워 올라탄 채로 무심히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는 날 자극하지 마라. 죽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계속할 건가?”
“뭣이? 죽여?”
노인의 표정은 더 이상 허허롭지 못했다.
잔뜩 일그러진 표독한 얼굴로 진득이 조휘를 노려보던 노인이 갑자기 쌍욕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계속 오냐오냐해 주니까 내가 병신으로 보이느냐? 살다 살다 너 같이 돼먹지 못한 인간 말종은 처음이구나! 오냐! 내 오늘 너를 잘근잘근 다져 육고기로 만들어 주마!”
“……미친놈인가?”
노인의 때 아닌 태세 전환에 지극히 당황해하는 조휘.
쉴 새 없이 차지게 뱉어 내는 욕설의 운율이 여간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뭐? 미, 미친놈?”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조휘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우우웅-
천산의 상공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수없이 많은 점(點)들!
그렇게,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의 천하공공도(天下空空道)가 노인을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흥! 조잡스럽긴!”
노인이 마주 출수하자 훈풍처럼 일어난 작은 소용돌이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허나 그것은 작은 바람 따위가 아니었다.
쿠콰콰콰콰콰콰!
저 작은 점들은, 하나하나가 순간적으로 공간까지 집어삼키는 위력을 지닌 검신의 천하공공도.
한데 난데없이 일어난 돌풍에 휘감기더니 그대로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조휘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자신의 공격이 의념을 다루는 수준의 무인들에게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상대는 자연경을 초월하여 진정한 입신지경을 이룩한 자.
입신지경에 이른 자에게 있어 공(空)의 의념을 파훼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이깟 잡기로 이 몸과 싸울 셈이냐?”
천하공공도가 잡기(雜技)라니!
검신 어른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것이다.
“무식하군.”
조휘는 똑똑히 보았다.
노인이 펼쳐 낸 바람은 작게 일어난 돌풍처럼 보였으나 그야말로 무진장(無盡藏)의 풍(風).
의념으로 펼쳐 낸 이상 천하공공도는 우주 공간의 블랙홀처럼 무한한 특이점을 지닐 수가 없었다.
단번에 그런 약점을 파악한 노인은 점들이 빨아들일 수 있는 한계까지 풍(風)의 기운을 처먹인 것이다.
그래서 천하공공도가 모두 와해되어 버린 것.
물론 천하공공도가 지닌 공(空)의 속성을 단숨에 파악하고, 그 한계까지 풍의 기운을 공급하는 능력이란 오직 자연경을 초월한 이 노인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지극히 단순 무식한 파훼법이었으나 무엇보다 효과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흐음…….”
문제는 노인이 바람을 일으킨 수법이었다. 자연지기를 운용하는 방법이 무(武)의 방식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조휘가 이내 그 표정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런 특이한 자연지기의 발현법(發現法)이 무엇인지 마침내 떠오른 것이다.
“요인(妖人)인가?”
“뭐, 뭐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마저 떨어뜨린 채 경악하고 있었다.
요인이라니!
이 땅 위에 요괴(妖怪)를 그렇게 부르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요인이란 말 그대로 요괴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단어니까.
머나먼 상고, 아니 상고(上古)라는 말로 부를 수도 없는 머나먼 과거의 시대.
요인과 인간이 공존했던 그 시절의 사람들만이 요괴가 인간종에게서 갈라져 나온 종(種)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단한 둔갑술(遁甲術)이다. 감히 내 눈으로 하여금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다니. 무엇보다 요인이여.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
“가, 감사하다고?”
조휘의 동공이 이내 착잡한 빛으로 물들었다.
“너희를 해악(害惡)으로 여겼던 것은 진실로 나의 실수였다. 너희에게 인간성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도 나의 실수였다.”
“뭐라는 거냐 대체!”
조휘가 더없이 음울한 눈빛으로 자신의 두 손을 응시했다.
“너희들의 영산을 내 손으로 없애고 얼마나 오랜 시간 후회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지. 지금 당장 너희 족속에게 목숨으로 속죄하고 싶지만 인간의 절멸을 막기 위해 그럴 수 없음을 용서하라.”
“여, 영산(靈山)?”
노인의 두 눈이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영산적멸(靈山寂滅)의 재앙!
만 년 이상 지속돼 온 요인족의 삶은 그때 완전히 절멸했다.
더 이상 영산의 영기를 생흡(生吸)할 수 없었던 요인들은 광기에 휩싸여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다 처형당하거나 일부는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하세계에서의 삶은 더욱 지옥이었다.
영험한 영기 대신 음기로 가득한 지기(地氣)를 먹다 보니 더욱 광기로 물든 괴물로 변하여 서로가 서로를 먹는 참혹한 지경을 마주한 것이다.
“그게 너였다고……?”
천천히 노인의 둔갑술이 풀린다.
사자의 갈퀴와 같은 거친 털이 그의 온몸에서 돋아났고, 무쇠와 같은 근육이 돌출하여 그의 마의를 완전히 찢어 놓았다.
그 모습이 실로 흉흉하고 무시무시했다.
조휘가 깊이 탄식했다.
“원족(猿族)의 요인(妖人)이여. 원한을 미룰 수는 없겠는가? 또다시 요인의 피를 내 손에 묻히는 것은 죽기보다 싫구나.”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두 눈을 감아 버리는 조휘.
감히 인간을 사랑하다니!
인간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해 온 자신의 모든 악행이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
자신은 충분히 악(惡).
인간에게 절멸의 운명만 거둬 낼 수만 있다면 언제든 자의로 소멸하고 싶었다.
그때.
쿠쿠쿠쿠쿠쿠쿠-
천산 전체가 진동한다.
이름 모를 원족의 요인이, 자신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서, 설마?”
둔갑술을 거두며 마침내 드러난 원족의 진정한 존재력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조휘는 그의 존재력이 초월적인 것임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좌(星座)!”
그랬다.
눈앞의 원족은 스스로 종(種)의 한계를 뛰어넘고 격(格)을 이룬 존재.
“나 혼자다!”
흉흉한 살의를 가득 드러낸 채로 원족이 말했다.
“그 많은 요인들 중에서 살아남은 건 오직 나 혼자란 말이다!”
쿠콰콰콰콰!
성좌, 제천대성(齊天大聖)이 조휘를 향해 흉포하게 짓쳐 들었다.
그 지옥과도 같았던 영산적멸의 주체가 눈앞의 이 인간이라니!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의를 담아 퍼부은 그런 자신의 공격을, 상대는 허망하리만치 가볍게 막아 내고 있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상대의 엄청난 존재감에, 어쩌면 자신과 같은 좌(座)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허나 무한한 요력의 적공 끝에 마침내 좌에 이른 자신의 공격을 이처럼 아이 다루듯 할 수 있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무슨 거창한 방법도 아니다.
무심한 표정으로 그가 펼치고 있는 것은 단지 얇고 투명한 한 줌의 장막뿐이었다.
의념의 장막.
인간의 무공으로 펼쳐 낸 저 단순한 방어막을 도무지 떨쳐 낼 도리가 없었다.
‘고작 인간의 염동(念動) 따위가 어떻게 수없이 요력을 초월해 온 내 힘을 막아 낼 수 있는 거지?’
제천대성으로서는 조휘가 펼치고 있는 의념을 초월한 극의념계(極意念界)를 결코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해라.”
한 차례 한숨을 쉬던 조휘가 충격파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천산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조휘의 모습에 제천대성의 두 눈에 활화산과 같은 분노가 드러났다.
이 천산은 요인들의 영산(靈山)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무가치한 산.
이런 하찮은 산이 부서지는 것도 저렇게 안타까워하는 자가 그렇게 무참히 영산을 파괴했단 말인가?
자신의 영혼에 화인처럼 새겨져 있는 영산적멸(靈山寂滅)의 대재앙.
미지의 거력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영산은 그 후로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조휘의 물빛처럼 투명해진 두 눈이 미증유의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제천대성에게 향했다.
“그리도 화가 나느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재차 손속을 펼치려는 제천대성에게 또다시 조휘의 무심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영산을 없앤 것이 나의 악업이라면 너희들의 악업은 무엇이냐?”
“감히!”
“너희들이 요괴라 불리게 된 것까지도 내 탓으로 돌릴 참이냐.”
영산의 영기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타락한 요인들.
그들은 속세에 나와 인간들을 살육하고 그 정혈을 취하여 점점 더 가공할 요력을 발휘했다.
조휘로서는 점점 천하를 혼탁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결국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
“겁(劫)이란 살아가는 륜(輪). 너희들은 스스로 겁의 굴레를 더럽혔으며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너희 요인들은 인간들에 의해 절멸했을 것이다.”
“흥! 고작 인간들 따위가!”
“따위?”
조휘가 잔인하게 비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하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 감히 인간을 하찮게 여긴단 말이냐?”
“네놈은 나처럼 이름을 받은 좌(座)다! 인간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
조휘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제천대성을 재차 응시했다.
“허면 넌 왜 이렇게 불같은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거지? 너 역시 이미 요인의 굴레를 벗어나 신성한 격을 이룬 좌이지 않느냐.”
“그, 그건……!”
조휘가 단호한 표정으로 제천대성의 말을 잘랐다.
“네가 요인임을 잊지 않듯, 나 역시 모든 인간의 역사를 영원토록 증거하며 살아갈 것이다.”
“…….”
“또한 너 역시 우주의 무수한 성좌들과는 달리, 나처럼 출신 종족을 어여삐 여기며 수호(守護)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느냐? 이는 비록 갈래는 달라졌으나 네놈도 인간이라는 뜻.”
“내가 인간이라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지극히 당황해하고 있는 제천대성.
“네게 묻겠다. 출신 종족을 아끼고 수호하는 다른 성좌들을 또 본 적이 있느냐?”
조휘를 대하는 제천대성의 태도가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었다.
“다른 성좌들을 본 적은 없다.”
“음?”
그러고 보니 의문이었다.
눈앞의 이 원족 요인은 분명히 격에 올라 성좌가 된 존재.
당연히 차원의 벽을 넘어 이 중원에 본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 자신과 같은 환생자가 아니라면 결코 넘을 수 없는 우주의 법칙.
설마 ‘그’가 벌써 법칙의 문을 부쉈단 말인가?
“언제부터 이 천산에 있었지?”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얼마나?”
“수천 년이 넘었다.”
“뭐라?”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 중원 세상에 존재해 왔다고?
적어도 그 격이, 성좌에 걸맞은 진실된 격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그러고 보니 조휘는 지금까지 자신의 환생의 여정에서 이 원족 요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네게 이름을 준 자가 누구냐?”
제천대성의 얼굴에 강렬한 의혹이 떠올랐다.
“이름을 받고 좌에 올랐으면서도 어찌 그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이냐?”
“안다고?”
창조자의 반열에 있는 위대한 존재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진실된 정체를 성좌들에게 밝힌 적이 없었다.
한데도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여 좌의 격을 허락한 존재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조휘가 극도로 엄혹한 얼굴이 되어 제천대성을 다시 바라본다.
“설마 신(神)…… 아니 천제를 본 것이냐?”
이 중원 문명권에서 최고의 격을 지닌 신이란 천제(天帝)다.
“역시 알고 있구나. 그분은 스스로 가장 드높은 곳에 존재하는 자. 제천대성은 그런 천제님께 직접 부여받은 이름이다.”
“미친놈.”
신?
모든 하위 종들에게 갖은 형상의 신으로 나타나는 그놈은 사실 ‘이름 짓는 환영’이었다.
거짓 성좌들을 양산하여 그들에게 흠모와 칭송을 받아 옴으로써 자신의 세력과 존재력을 유지하는, 그야말로 성좌들 중에서도 가장 추잡스런 존재.
그 은밀한 사기에 이 불쌍한 원족 요인도 희생된 것이었다.
이름 짓는 환영의 특기는 당연하게도 환영(幻影).
신의 이적과 같은 기적을, 그는 온갖 황홀한 환영으로 구현해 낼 수 있었다.
나직이 한숨을 쉬던 조휘가 그런 모든 사실들을 제천대성에게 말해 주었고.
이내 제천대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강렬한 의문을 드러냈다.
“캬아아아악! 그, 그 모든 게 단지 거짓된 환영이라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어찌 그토록 황홀하고 엄청난 경험이 단지 환영일 수 있단 말이냐!”
이름 짓는 환영은 비록 성좌들의 세계에서 추악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지만 사실 존재력만 따진다면 최상위 서열의 성좌였다.
단적인 예로, 제천대성이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기 전까진 조휘조차도 그를 성좌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놈이 대단한 것은 현실과 가상을 절묘하게 섞어 만드는 이 무시무시한 환영 때문이었다.
그가 지닌 환영의 속성이란 이처럼 존재력조차 속일 수 있다는 것.
“어쩐지 무지막지해 보이는 공격에 비해 부실하기 짝이 없더라니.”
문제는 한번 상대에게 인식된 환영은 쉽게 깨어진다는 점이다.
조휘가 존재력을 펼쳐 금방 제천대성에게 드리우자.
츠츠츠츠츠-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환영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기 시작한다.
“어? 어?”
현실과 가상을 섞어 구현해 낸 그럴싸한 환영이 모조리 사라진다.
제천대성은 자신의 본질을 증폭하던 어떤 미지의 힘이 모두 사라졌음을 느껴야만 했다.
조휘는 드러난 그의 본질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나직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실로 대단한 요력이다.”
과연 최후로 살아남은 요인답게, 환영이 모두 걷힌 후에도 제천대성의 요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수천 년 동안 요력을 적공한 존재답게 적어도 삼신(三神)의 수준은 가뿐히 능가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요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격을 이룬 자신의 경지가 설마하니 가짜였다니.
모든 것을 잃은 처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내리깔고 있는 제천대성.
그런 그의 귓전으로 조휘의 익살 섞인 음성이 스며들었다.
“아까운 게냐?”
“아깝지! 그렇게 꼭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조휘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뜻밖의 제안을 제천대성에게 건넸다.
“내 직접 요인들의 영산을 복원해 주겠다. 또한 그런 가짜 힘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력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지.”
“여, 영산을! 요인들의 영산을 돌려준다고?”
“왜? 불가능할 것 같으냐?”
“…….”
눈앞의 상대는 자신의 수천 년 적공이 담긴 요력을 의념의 장막 하나로 막아 내는 괴물이자 진정한 성좌.
상대가 진실로 신의 힘을 발휘하는 성좌라면, 영산을 다시 돌려준다는 말이 단순한 허언처럼 들려오진 않았다.
“원숭아.”
“옙?”
상대의 손에 자신의 앞발(?)이 공손히 포개어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제천대성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그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조휘의 표정이 다시 예의 익살로 물들었다.
“원족은 이 내가 가장 아끼던 요인족이었다. 당연히 복종하는 근성이 영혼에까지 새겨져 있겠지.”
“캬아악! 다, 닥쳐라 이놈!”
“원숭아.”
“옙? 아악!”
제천대성이 자신의 발(?)을 잘라 낼 듯 스스로 요력의 검을 발휘하자.
“너희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 다오. 네가 그토록 힘을 소원한다면 내 반드시 너를 천하무적으로 만들어 주겠다.”
“천하무적(天下無敵)? 흥! 이미 지금도 나는 천하무적이다!”
“그래?”
그 순간, 마치 천산의 하늘 전체를 잠식할 듯한 막강한 극의념계의 힘이 제천대성을 향해 압박해 가고 있었다.
“아, 아니 당신만 빼고!”
극의념계를 통해 발휘되던 조휘의 모든 존재력이 제천대성이 아니라 이내 천상(天上)을 향해 넓게 드리워졌다.
“너의 고명한 요력으로 할 일이 있다. 네가 나와 함께 이 중원 땅에 드리운 불길한 암운(暗雲)을 막아 내고 끝내 인간들을 구해 낸다면 내 이번 생의 남은 삶은 요인(妖人)을 위해 한번 살아 볼 참이다.”
“미친! 이 제천대성이 인간들을 구한다고?”
생각만으로 소름이 돋는다는 듯 제천대성이 발작적으로 소리치자.
“원숭아.”
“옙? 하…….”
‘원숭아’라는 단어만 귓전으로 들려올 때면 왜 조건 반사처럼 앞발부터 튀어 나가는 걸까.
자신의 앞발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제천대성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도대체 뭘 해 줄 건데요.”
조휘가 자신의 손에 앞발을 포개고 있는 제천대성을 자애롭게 쓰다듬는다.
“이걸 이마에 씌워 본다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음?”
조휘가 품에서 꺼낸 것은 웬 작은 금속 쪼가리.
제천대성이 괜히 불길해져 슬며시 앞발을 뺀다.
“그게 뭔데요. 뭐 하는 건데요.”
조휘가 음흉하게 웃으며 금고아를 씌우는 삼장법사처럼 제천대성에게 다가간다.
“금방 끝날 거다.”
“아, 아니 그게 도대체 뭐냐고!”
“아프지도 않을 거야.”
조휘가 우악스럽게 제천대성의 머리채를 쥐자.
“아악 이것 놔! 놔라고!”
결국 이마에 뉴럴링크 칩이 박혀 버린 제천대성은 엄청난 괴성을 연신 질러 댔다.
“캬아아아아악!”
요인은 비록 종(種)의 분화를 맞이하여 인간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으나 과거 원시 고대 때는 분명 인간과 동류였다.
그러므로, 이 원족 요인에게도 뉴럴링크 칩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조휘의 예상은 과연 적중했다.
화아아아악-
이질적인 초감각이 개화(開花)된다.
뉴럴링크 칩은 제천대성이 지닌 유전 형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유전자를 선택하여 유전 정보를 새롭게 강화했다.
“끅!”
제천대성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꺾으며 허연 동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극한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초감각에 의해 알 수 없는 전능감(全能感)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캬아아아아아!”
꾸르르르릉!
사자후, 아니 원후(猿吼)일까.
갑작스런 전능감에 터뜨린 제천대성의 괴성이 천산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우득-
뿌드드득-
재구성을 맞이한 제천대성의 육신.
기존의 푸석하고 빳빳한 털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연한 금빛을 머금은 윤기 나는 털들이 새롭게 돋아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두 눈에 작열하듯 자리 잡은 금빛 안광.
몸집 역시 두 배 이상 불어났고 온몸의 근육들도 더욱 팽팽해져 건강미를 과시했다.
이건 마치 강력한 원숭이 괴수를 보는 것 같다!
“원숭아.”
텁!
조휘는 적어도 두세 배는 커진 것 같은 제천대성의 앞발을 흡족한 얼굴로 만지고 있었다.
“아 썅.”
스스로에게 거친 상욕을 퍼부으며 앞발을 회수한 제천대성이 이내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 제천대성을 바라보고 있던 조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함께 웃었다.
단순히 몸집만 커진 금빛 원숭이가 아니다.
그의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는 요력은 조휘조차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강력했으니까.
“뭐가 달라진 거 같으냐?”
“아니…….”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차마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제천대성.
자신의 전신에 들끓고 있는 진화된 요력이란 평소 발휘하던 성질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대체 같은 수준의 요력으로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건지 제천대성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험해 봐도 되겠지?”
역시 보통 패도적인 놈이 아니다.
이제 웬만한 성좌들은 이 성질 더러운 원숭이를 얕봤다가 피똥을 싸게 될 것이다.
“좋을 대로.”
조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천대성의 요력이 날아들었다.
“호오.”
콰쾅!
콰콰콰콰콰콰-
극의념계로 펼친 조휘의 의념 장막이 보기 좋게 우그러지며 금방 파괴되어 버렸다.
신이 난 제천대성이 더욱 요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두 눈이 완연한 금광으로 휩싸였다.
부우우우웅-
태양만큼 눈부신 금광이 사방으로 작열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위력의 요력이 순식간에 사방 수천 장으로 미치자 새하얀 천산의 눈이 모두 기화되어 막대한 규모의 수증기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그런 수증기 구름 속에서 조휘의 신형이 불쑥 튀어 올랐다.
“좋군!”
명불허전 중원의 대검종(大劒宗), 소검신이 현신했다.
극의념계로 펼쳐 낸 그의 검이란, 역사상 그 어떤 중원의 검수도 펼쳐 내지 못한 천상의 검법이었다.
붉은 매화 꽃잎으로 물든 천산.
그런 천향밀밀(千香密密) 속에서 뇌전과 함께 나타난 푸른 용이 하늘로 승천하니, 그것이 바로 창궁무애검법의 최후 초식 뇌룡검천절대세(雷龍劒天絶代勢).
절대의 뇌력을 머금은 푸른 용은 이내 천지조화를 부려 천하절대검령(天下絶大劒靈)의 위력을 떨치다, 구유의 검이 되어 천마멸겁무(天魔滅劫舞)로 화한다.
구유 속에서 흉포한 이를 드러낸 천마의 검은 천산을, 아니 천하를 수천수만 조각으로 찢어 놓았다.
콰콰콰콰콰콰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천대성이 힘없이 두 팔을 늘어뜨렸다.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 나약한 감정조차 들지 않는다.
차라리 절대성을 향한 하나의 경이(驚異).
그는 한낱 여섯 자 반 치의 검으로써 천지를 운행하며 삼라만상의 조화를 부리는 진실된 검(劒)의 신(神)이었다.
무한한 힘으로 진화한 자신의 요력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지다니.
제천대성이 전의를 상실한 모습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조휘가 온화한 얼굴로 극의념계를 거두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될 수 있지?”
제천대성의 당돌한 물음에 조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느냐?”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가로젓는 제천대성.
“아니.”
제천대성이 조휘의 검을 통해 느낀 격차는 단순한 힘의 위력이 아닌 시간의 벽(壁)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조휘와 자신 사이에 엄청난 세월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허나 자신 역시 수천 년간 요력을 닦아 온 요인.
기나긴 생애를 살아가는 요인에 비해 인간의 삶이란 찰나 같은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산 거지?”
그것은 조휘로서도 계산할 수가 없었다.
모든 환생혼의 세월을 다 합한다면 적어도 만 년 이상이 될 테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의 생애 전부는 또 아니었다.
“적어도 너의 열 배는 될 테지.”
“뭐, 뭐라고?”
완벽한 패배다.
지나온 세월부터 경험의 깊이까지 자신은 저 인간 출신 성좌의 그 어떤 것도 넘어설 수 없었다.
“쳇, 그러니까 나더러 네 수하가 되라는 거냐?”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네 자유다.”
“그럼 요표(妖表)를 줘.”
당돌한 제천대성의 요구.
조휘는 그제야 이 원숭이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표란, 인간 세상의 정표에 비유할 수 있으나 조금은 의미가 달랐다.
정표가 사모하는 연인 간에 주고받는 연정의 증거라면, 요표는 요인들 사이에서 목숨보다도 중요한 약속과 신뢰의 상징이었다.
“당연히 줘야지.”
흐뭇하게 웃으며 품에서 예의 ‘갓박스’를 꺼낸 조휘가 명령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물질이 뭐지?”
-반(反)물질입니다.
조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을 잘못했군. 정정한다. 네가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강도를 지닌 물질을 말해 다오.”
-알와이텐(RY-10)이라는 물질입니다.
“알와이텐?”
조휘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 이내 희색이 만연해졌다.
“알 야리 박사!”
중동이 배출한 인류의 영웅이자 아인슈타인의 아성에 도전했던 미래 세계의 천재 과학자 알 야리.
그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우주의 모든 물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 이론을 완성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한 이론 물리학자였다.
그는 나노 역학(Nanomechanics)을 통해 탄생시킨 무수한 물질을 발표했는데, 그중에서도 RY-10은 그의 말년에 이르러 성취한 최고의 결과물, 그야말로 인류의 기적과 같은 위업이었다.
RY-10의 막강한 내구성을 바탕으로 인류는 마침내 성간 이동이 가능해졌다.
“지금 만들 수 있나?”
이어 갓박스의 하부에서 환상처럼 일어난 빛무리.
그렇게 천산 일대를 한참이나 스캐닝하던 갓박스가 불가의 의사를 표시해 왔다.
-적합한 재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음…… 역시 남하(南下)해야겠군.”
-그렇습니다. 바닷물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원소가 녹아 있습니다.
“바로 가지.”
조휘가 검을 타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친 속도로 남하하자, 제천대성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요인들의 가장 뛰어난 특기 중의 하나가 무공술(舞空術).
요인들은 선천적으로 요력을 타고나기에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허공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날 때부터 수련해 온 자신의 무공술보다도 더욱 빠르게 하늘을 누빌 수 있다니!
하지만 지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은 제천대성이었다.
“끼아아아아아!”
제천대성이 강렬한 괴성을 지르자 이내 찬란한 금광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야말로 전력으로 요력을 발휘한 것이다.
터엉!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하며 생긴 굉음이 천산의 하늘에 길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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