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9
9 章>
한 사람만 더 탔을 뿐인데 마차 안은 비좁아 터져졌고 마차의 속도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제갈운의 못마땅한 시선이 남궁장호를 향했다.
“갓 입문했으면 아직 직책도 없는 말단 무사 아닌가요? 왜 이자를 마차에 태워 주는 거죠?”
누굴 약 올리나?
자신도 그러고 싶다.
저 빌어먹을 이상한 취향의 여동생만 아니라면.
남궁장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제갈운이 장일룡을 째려본다.
“거 체력도 좋아 보이는데 걸어오시죠?”
“그다지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에이 무슨 그런 실없는 농담을.”
남궁소소가 제갈운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아무리 말단 무사라지만 경력을 쳐줘야죠. 무려 녹림대왕의 대제자셨던 호걸을 허투루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조휘는 황당했다.
잠시만. 당신 정파 아니야?
막 그렇게 사파의 후기지수를 치켜세워 줘도 되는 건가?
“그나저나 장 소협은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어이쿠? 호구조사까지?
“모두 일곱이요. 우리 아버지가 힘깨나 쓰지.”
제갈운이 문득 궁금한 얼굴을 한다.
“……둘째가 설마 이룡(二龍)?”
“제법 눈치가 있군. 막내도 칠룡이지.”
조휘가 혀를 내둘렀다.
장일룡, 장이룡, 장삼룡, 장사룡?
이건 필시 이름을 짓기 귀찮아서다.
와, 저놈 부모님도 만만치 않게 무식하네.
아? 유전인가?
남궁소소의 얼굴이 더욱 호기심으로 물든다.
“와! 칠룡이라면 모두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닌데? 셋째는 딸이야.”
“그래도 용(龍)?”
“아니. 여자는 봉(鳳)이지. 그래서 셋째만 장삼봉(張三鳳)이라구.”
“푸웁!”
입술을 말아 오므린 채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태가 역력한 남궁장호.
얼마나 필사적인지 그의 온몸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눈 떴지?”
“그런 거 같은데요?”
아직도 웃음의 포인트를 찾지 못한 화서명이 감탄하며 물었다.
“열일곱인 당신이 장자(長子)라면 도대체 몇 년에 하나씩 낳으셨단 소리요?”
“음…… 일이 년?”
“와씨.”
조휘의 짙은 감탄!
이건 뭐 거의 출산 머신이구만.
그래서 중국의 인구가 그렇게 많은 거였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제갈운의 궁금증.
“그나저나 우릴 왜 덮친 거죠? 무슨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아, 뭘 좀 부탁하려고 했지.”
“부탁?”
장일룡이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인다.
“소룡대연회에 너무 가 보고 싶었어. 하지만 내 신분으로는 아무리 머릴 굴려 봐도 방법이 없더라구.”
소룡대연회는 정파의 축제다.
당연히 녹림도의 신분으로는 절대 참여할 수 없는 터.
“고작 그런 목적으로 채기를?”
“그, 그건 미안.”
조휘는 그런 장일룡의 패기에 몸서리를 쳤다.
와 진짜 직진 일변도인 새끼네.
세상을 너처럼 뇌 없이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화서명이 서열 정리를 시도한다.
“일단은 그대가 남궁세가의 입문 무사를 자처하고 있고, 만약 연배도 열일곱이 진실이라면 모두를 향한 하대(下待)는 이제 멈춰야 하지 않겠소? 아직도 그대는 강호의 예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파인 같소이다.”
듣고 보니 화서명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장일룡의 하대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그도 그럴 것이 저 얼굴을 도저히 자신들보다 어리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간계의 노안이 아닌 것이다.
“……다들 몇 살이신데요?”
제갈운이 대답했다.
“소소 소저를 제외하면 당신보다 어린 사람은 이곳에 없네요.”
장일룡이 순진한 얼굴로 웃는다.
“알겠어요, 형님들. 난 이제 정파인이니까. 헤헤.”
조휘는 팔뚝에 좌르르 돋아난 소름을 느끼며 억지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형?”
“하, 하지 마시죠!”
장일룡이 이제 남궁장호를 쳐다본다.
“남궁 형?”
부르르 몸을 떨며 검집을 움켜잡는 남궁장호.
“한마디만 더 했다간 그 입에 검을 쑤셔 넣어 주마.”
“제갈 형?”
부적을 꺼낸 제갈운.
“하, 하지 마!”
유일하게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 사람은 남궁소소.
“일룡 오빠!”
“응. 동생.”
조휘가 갑자기 품에서 장부를 꺼내 정리하기 시작하자 제갈운도 갑자기 수를 읊으며 역법의 공부를 이어 갔다.
* * *
어느덧 남궁세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서안(西安)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도.
그간 몇몇 협곡을 지나면서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제갈운이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해 낼 수 있었다.
장일룡을 영입(?)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과연 녹림대왕의 대제자 자리는 도박으로 딴 것이 아니었다.
웬만한 잔챙이들은 그 외모만으로 제압해 버렸고 제법 위맹한 사파의 거두들과 시비가 붙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장일룡이 이름 몇 번 읊으니 모두 프리패스.
그처럼 귀찮은 시비를 대부분 그가 해결해 버렸으니 고된 여정 길이 될 뻔했던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으아앗! 이젠 정말 씻고 싶다!”
남궁소소의 간절한 외침.
모든 일행이 보름을 넘게 씻지를 못했으니 마차 안의 퀴퀴한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다 왔어요. 곧 일차 집결장소에 도착할 거예요.”
제갈운의 대답에 조휘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일차 집결 장소요?”
“화산파가 아무리 대파(大派)라지만 갑자기 사람이 몰리면 그들로서도 부담스럽지요. 일단 우리 오대세가는 화일객잔에 모여서 객첩(客牒)을 기다리기로 했으니 곧 이 관도에서 다른 세가의 세가기(世家旗)도 보일 겁니다.”
마차의 창밖을 살피던 화서명이 말했다.
“벌써 보입니다만…….”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누런 깃발에 현무(玄武)라…… 팽가네요.”
하북팽가.
그 어떤 문파보다 힘을 숭앙하는 도객(刀客)들의 성지.
소림외공과 비견되는 절륜한 외공인 그들의 패왕공(覇王功)은 강호일절이었다.
제갈세가의 성향과 정확히 대칭점에 서 있는 자들.
제갈운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으으…… 저 뇌 없는 근육 놈들과 또다시 어울려야 되다니…….”
반면 장일룡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와! 저 형님들 뭡니까? 우리 대산(大山)에서도 저만한 사람들은 보기가 쉽지가 않은데!”
저 우락부락한 몸들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거나하게 씨름 한판 어울려 보고 싶은 장일룡이었다.
무극도왕(無極刀王)의 맏아들 신도왕(新刀王) 팽각(彭覺)이 온몸의 근육을 씰룩이며 자신의 몸을 점검하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소가주로서 맞이하는 두 번째 소룡대연회.
적어도 후기지수들의 세계에서 만큼은 검(劒) 일색인 강호의 판도를 바꾸고자 와신상담 쓸개를 핥으며 칼을 벼려 왔다.
남자는 힘이요, 즉 칼(刀)이다.
고대의 원시강호, 아니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들이 처음으로 만든 무기는 분명 검이 아니라 칼이었다.
칼과 검을 말할 때 왜 도검류(刀劒流)라 부르는지 아는가? 이렇듯 칼의 역사가 더 깊기 때문이다.
무슨 나약한 여인네도 아니고 사내새끼란 것들이 검을 들고 콕콕 찔러 대는 그 모습이란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변초(變招)니 허초(虛招)니 하는 것들은 모두 나약한 자들이나 기대는 얄팍한 수단이자 위안일 뿐.
무릇 사내라면 온 힘으로 호쾌하게 일 합에 베어 재껴야 한다.
남자의 용력(勇力)이란 그렇게 써야만 하는 것이다.
강호에 일도양단(一刀兩斷)이란 말은 있어도 일검양단(一劒兩斷)이란 말은 없다.
이렇듯 검이란 한낱 창(槍)의 아류일 뿐, 호쾌한 사내들이 쓰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옛 성현들께서도 아셨던 것이다.
칼을 들고 검수(劍手)에게 진다는 것은 단지 힘이 모자라서다.
변초니 허초니 그런 얄팍한 술수에 눈이 현혹되었으니 수양이 모자랐던 것이다.
‘삼 년 전, 내가 그놈에게 진 것은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산소룡 청운소.
치사하게 검으로 온통 붉은 꽃비나 뿌려 대며 눈을 현혹시키는 그놈.
지가 무슨 화화공자(花花公子)냐?
이번에야말로 그놈을 힘으로 제압할 때.
힘이 곧 진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자신의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는 이제 아무나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더욱이 시뻘겋게 달군 사철(沙鐵)에 온몸을 담구며 단련해 온 그 인고의 세월을 생각하면 자신의 육체는 한낱 검 따위에게 찢길 수가 없었다.
기껏 상처 나 봐야 생채기 수준일 터.
적어도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자신의 패왕공은 틀림없이 구성(九成)의 경지를 이룰 것이리라.
이렇듯 이제 화산도 무섭지 않은데 남궁 따위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만하게 초식명에 제왕이니 창천이니를 달고 있지만 그래 봤자 검.
힘없는 자들이 부리는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다.
“크큭! 제깟 남궁 놈들이…… 음?”
저 멀리서 마차를 끌고 오는 일단의 무리들. 선두마차의 깃대에 달려 있는 것은 분명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세가기였다.
한데 걸어오고 있는 자들 중에서 믿을 수 없는 모습의 사내가 하나 있었다.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
‘남궁(南宮)?’
그가 걸치고 있는 무복은 틀림없는 남궁세가의 입문 무사들이 즐겨 입는 청의 무복.
하지만 그의 육중하고 강건한 육체를 버틸 수 없었는지 팔뚝과 허벅지부분부터 찢겨 없어진 모습이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맹수 같은 사내.
또한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거대하고 긴 창(槍)이다.
창과 칼은 가장 오래된 경쟁자.
그렇게 팽각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에 저런 사내다운 자가 있었다니!’
과연 남궁이라 이건가?
역시 결코 녹록한 놈들이 아니다.
하지만 질 수 없다.
갑자기 팽각이 자신의 가슴 근육을 씰룩거리며 근엄한 얼굴을 했다.
몸을 단련한 자들끼리의 경쟁의식!
비록 저 남궁의 거한이 진정한 사내라고 해도, 팽가의 사내가 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곧이어 들려온 상대의 외침에 팽각이 석상처럼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 거 몸 좀 되는 양반! 나와 팔씨름이나 한판 해 봅시다!”
‘……팔씨름?’
순간 팽각의 두 눈이 강렬한 투쟁심으로 불탔다.
“내공 없이?”
거대한 남궁 사내, 장일룡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내공을 쓰면 당신의 팔이 아작 날 텐데?”
“개소리!”
투쾅!
전광석화처럼 도를 뽑아 관도 옆의 육중한 나무 하나를 베어 낸 팽각.
와직! 우지끈!
팽각이 매끈한 단면의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나무에 먼저 다가가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와라! 애송이!”
“거 호쾌하군! 좋아!”
마주 앉은 장일룡이 누런 이를 씨익 드러내며 육중한 팔을 그루터기에 올렸다.
질 수 없다는 듯 팽각도 거칠게 그의 손을 마주 잡는다.
“단판?”
“뭔 애새끼들도 아니고 삼세 판 할 거요?”
“과연 사내로군!”
그러자 팽가의 근육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우와앗! 승부다!”
“팔씨름이다!”
그렇게 말끔하게 뇌를 비운 사내들의 축제가 벌어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조휘.
“……도대체 왜 저러는 거죠?”
제갈운이 피식 웃는다.
“뭐, 팽가가 팽가 한 거죠. 원래 저래요.”
물론 두 눈이 하트로 변한 채 그 광경을 발그레한 얼굴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멋져……!”
그런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남궁장호.
“……먼저 객잔으로 가 있겠다.”
조휘가 만류했다.
“그래도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 결과는 보고 갑시다.”
“……알겠소.”
어느덧 승부는 정점으로 치달아 있었다.
“흐으으으읍!”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팽각의 육중한 팔! 얼굴의 핏대란 핏대는 죄다 불룩 튀어나온 것이 전력을 다하는 것이 분명했다.
부들부들!
이를 꽈득 깨물며 기를 쓰고 힘을 주고 있는 장일룡 쪽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는 대산(大山)의 쟁쟁한 거한들 중에서도 이만한 사내를 보기란 쉽지가 않아서 오히려 즐거웠다.
“하아아아압!”
장일룡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승부가 조금씩 기울어 가자 팽각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진다.
아직도 상대에게 이만한 힘이 남아 있는 것에 탄복하는 것도 잠시, 팽각의 단전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벽력신공(霹靂神功).
쿵!
“우와왓! 역시 우리 소가주님이다!”
“신도왕! 신도왕!”
팽각을 연신 연호하는 함성 속에서 장일룡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에잇 싯팔! 내공 썼잖아! 거 그렇게 안 봤는데 치사하네!”
팽가의 근육 사내들이 모두 팽각을 쳐다본다.
“그게 사실이우?”
“소가주? 정말?”
마치 영혼을 잃은 듯한 우울한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팽각.
“와 나! 실망이우!”
“허참!”
휑하니 몸을 돌려 하나둘씩 사라지는 팽가의 후기지수들.
같은 식구들에게조차 버림받은 팽각이 장일룡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한 판만 더…… 아, 안 되겠지?”
뭔 화산의 청운소와 붙어 보기도 전에 팽각이 무려 ‘힘’으로 졌다.
그 충격이란 그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갈운이 무슨 괴물을 보는 것처럼 장일룡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신도왕을 힘으로 제압하다니? 사람새낀가?’
용력만 따진다면 신도왕 팽각의 용력은 후기지수들 중 으뜸이다.
도대체 녹림대왕이란 자가 어떻게 단련시켰으면 저런 괴물이 인간계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저놈은 그 무식한 놈의 후예구나.
검신과 동시대에 도황(刀皇)이란 자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자.
-강호의 문파들 중에서 외공을 더 중요시하는 곳은 드물지. 저들이 바로 그들 중 하나다.
조휘는 궁금했다.
‘외공이 내공보다 더 중요한 겁니까?’
-먼저 몸을 만들고 안을 채우느냐, 안을 채운 후 몸을 만드느냐. 거기에 정답은 없다. 무학에 있어서 외공이 먼저냐, 내공이 먼저냐는 오랜 논쟁거리지.
‘아……!’
-중요한 것은 ‘균형’이지 내외공의 선후가 아니다. 집착은 편협을 낳고 고집은 아집을 낳지. 저들이 소림을 넘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소림의 외공은 강호일절이지만 내공 역시 게을리하지 않지. 무엇보다…….
검신 어르신의 음성이 한껏 단호해졌다.
-저들의 가장 큰 문제는 검에 대한 열등감, 그로 인해 생긴 칼(刀)을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에 있다. 그런 비틀린 마음으로 대성을 이루기에는 무학이란 것이 그리 녹록하지가 않지.
검신이 독문병기를 검으로 정한 것은 자신의 의지를 가장 잘 발현해 줄 무기를 선택한 것일 뿐, 검이 최고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간 무림의 무학종사들은 하나같이 틀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깨달음이란 끊임없는 의심의 바다이자 지독한 자기모순이며 관념의 파괴.
그 고독한 무예의 길을 홀로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검신이었다.
맑고 평온한 마음으로도 버티기 힘든 그 길을, 비틀리고 편협한 마음으로 대성한다? 검신의 입장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휘도 나름대로 들은 것이 있어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렇다면 강호에 떠도는 백일창(百日槍), 천일도(千日刀), 만일검(萬日劒) 역시 근거 없는 소리란 말입니까?’
창을 익히는 것은 백 일이면 족하고 도를 익히는 것은 천 일이면 족하지만 검을 익히는 데는 만 일의 고련이 필요하다는 강호의 격언.
-창을 익히는 데 백 일만 걸리겠느냐? 촉(蜀)의 익덕은 평생을 장팔사모와 동고동락했다. 그가 검을 들고 있었다 한들 위(魏)의 장수들이 장판교를 뚫을 수 있었겠느냐?
‘아!’
그 말에 조휘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무인의 역량이라는 것이, 익힌 무기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검신 어르신이 검이 아니라 도를 들고 있었다면 도신(刀神)으로 불렸을 거라는 뜻이었다.
-검이 장점이 많은 병기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오직 검만이 만병지왕(萬兵之王)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편협이다.
-강호에 검문(劒門)이 많은 것은 중원무학이 내지르고 휘두르는 권장술로부터 발전했기 때문이다. 칼(刀)은 권장술의 투로(鬪路)를 연장하기에는 부적합한 병기. 오직 검만이 권장술의 모든 투로를 연장하기에 적합하지.
뭐야? 그럼 결국 검이 짱이란 소리 아닌가?
-허허…… 말이 그렇게 되나?
그럼 그렇지!
검의 조종이자 신이라 불리는 무인께서 검을 최고라 믿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니다. 원시 무림에 짐승의 움직임 따위를 흉내 내다 발전한 권장술이 훨씬 많아서였을 뿐. 만약 권장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활이나 당기고 있었겠지. 활(弓)은 권장술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 수단이었다.
검신의 논리는 명확했다.
-무당의 개파조사 장삼봉이 스스로 창안한 태극권의 발전된 형태를, 왜 검으로 녹여 태극혜검(太極慧劒)을 탄생시켰겠느냐? 태극혜도(太極慧刀)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칼로써는 태극권의 투로를 발휘할 길이 없었던 터.
태극권에는 팔꿈치로 적을 격타하는 요란주(拗鸞肘)라는 수법이 있다.
이는 병기에 적용하면 내지르고 찌르는 동작인데 도식(刀式)은 이처럼 찌르는 동작이 어울리지 않는다.
-오롯이 검만이 만병지왕이 될 수는 없으나, 중원무학의 문화적 특성상 현재로서는 만병지왕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게다.
조휘가 그제야 이해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만이 최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원의 문화이자 유행이라는 의미였다.
하기야 섬나라 왜(倭)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도(刀)다.
그럼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자들이 수두룩했다.
“만병지왕이라…….”
순간, 그런 조휘의 읊조림을 들은 팽각의 귀가 꿈틀거린다.
그로서는 제일 싫어하는 문장이 귀에 들려온 것이다.
죽일 듯이 조휘를 끈덕지게 바라보는 팽각.
“네놈도 그 나약한 검을 최고로 믿나 보지?”
팽각의 살벌하게 구겨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남궁장호의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놈의 말은 모두 무시하시오.”
팽각이 거칠게 주먹을 말아 쥐며 눈을 부라린다.
“굳이 화산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나? 삼 년 전 못다 한 승부. 여기서 결판내지?”
남궁장호가 피식 웃었다.
“본 세가의 ‘입문 무사’에게도 진 놈이 뭔 패기로 내게 도전하는 거냐.”
남궁장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또다시 우울한 얼굴이 된 팽각.
제갈운이 힘내라는 듯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준다.
“인생이란 게 원래 그렇게 굴곡도 있고 고난도 있고 그런 법이죠. 힘내요. 팽 소협.”
“치워라! 제갈 마귀!”
거칠게 제갈운의 손을 뿌리치는 팽각.
삼 년 전, 저놈의 마수에 걸려 장장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구궁환마진(九宮幻魔陣)에 빠져 허우적거렸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당장 저 제갈 놈의 대가리를 찍어 버리고 싶은 팽각이었다.
연신 서로 으르렁대는 오대세가의 소가주들.
이들은 이미 소싯적부터 서로 교류해 왔다.
명목이야 비슷한 나이대의 후기지수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였지만, 사실은 자존심 강한 가문 어르신들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야 호기심에 서로 친하게 말도 섞고 같이 놀고 했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자신들이 가문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독한 경쟁의식 속에서 서로 애증의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문득 제갈운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가(唐家)는 왜 보이지 않는 거죠?”
팽각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객잔에 묶겠다며 벌써 지나갔다.”
지독한 폐쇄성을 지닌 당가의 특성이 또 한 번 드러난 순간이었다.
제갈운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세가야 본디 두문불출하니 이번에도 참여 안 할 테고…… 그럼 다 모인 거네요? 출발하죠.”
남궁장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 * *
산이 험해 봐야 다 거기서 거길 거라고 생각했던 조휘에게 화산(華山)이란 그런 생각을 말끔히 지울 수 있게 해 주는 악산 중의 악산이었다.
만장단애니 천혜의 협곡이니 하는 표현을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접해 보니 이건 뭐.
자연을 향해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그저 찬탄만 하게 될 뿐이었다.
발만 한번 헛디디기라도 하는 날에는 곧바로 만장 밑 구름 속으로 처박힐 터.
절벽을 휘감아 굽이쳐 오르는 그런 좁은 소로(小路)가 끝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높은 곳에 문파를 세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다.
물자 수송이나 인적 교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문파의 위치가 아닌가?
설마 아무도 오지 마란 건가?
방어만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최적의 위치긴 하다.
“거 형씨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좀 업어 드릴까?”
장일룡의 그런 도발(?)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팽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숨을 멈추며 근육을 씰룩인다.
“힘들긴 뭐가 힘들다고! 오히려 내 쪽에서 업어 주지!”
“하핫! 이 정도쯤이야 가벼운 산책일 뿐이요!”
열일곱 평생을 산에서 살아온 장일룡이다.
산에 관한 경험이라면 산적 출신인 장일룡 쪽이 훨씬 많았다.
“하아하아……! 다음 소룡대연회는 반드시 오대세가에서 열렸으면 좋겠어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궁소소. 그런 그녀에게 화서명이 재빨리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소저! 업히시오!”
“뭐래.”
그렇게 남궁소소가 휑하니 지나가 버리자 제갈운이 얼른 올라탔다.
“갑시다!”
“내, 내리시오!”
제갈운이 아랑곳하지 않고 찰거머리처럼 화서명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남녀차별하지 마시죠! 출발!”
“이익!”
그 모습을 남궁장호가 한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약한 놈들.”
그 한마디를 남기고 갑자기 경공을 일으켜 저만치 앞서가는 남궁장호.
팽각이 이를 꽈득 깨물며 자세를 여몄다.
“좋아! 승부다!”
휘릭!
팽각이 맹렬히 경신법을 일으켜 남궁장호를 뒤따라가자.
“크하하하! 질 수 없지!”
장일룡의 육중한 몸이 포탄처럼 쏘아진다.
* * *
화산(華山).
자그마한 산문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낡은 편액.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그 대단한 명성과는 다르게, 화산파의 첫 인상은 수수하고 단출한 편이다.
어찌 보면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후…….”
조휘가 거친 호흡을 겨우 가다듬으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다.
절벽을 따라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
저 거뭇거뭇한 길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몸서리가 처진다.
쟁쟁한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은 결코 발을 허투루 놀리지 않았다.
그런 무인들과 함께 이곳까지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
만약 검신 어르신을 만나기 전의 허약한 몸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리라.
주위를 살펴보니 남궁장호와 팽각, 장일룡이 저 멀리 나무 그늘에서 가부좌를 튼 채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전력을 다했는지 그들의 의복은 온통 땀으로 흥건했다. 운기로 인해 그들의 몸에는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무량수불. 오대세가의 소협들이구려. 먼 길 오시느라 참으로 고생하셨소.”
어느덧 나직이 도호를 외우며 나타난 노도사.
산뜻한 백의도포를 입은 그 모습이 마치 학처럼 고고하다.
어깨 위의 붉은 매화 문양.
허리에 찬 검에 달린 매화 수실.
화산이 자랑하는 그 유명한 매화검수(梅花劒手)다.
제갈운이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무림 말학 제갈 모. 화산의 선배님을 뵙습니다.”
화산의 노도사가 흐뭇하게 웃었다.
“낯익은 얼굴이구려. 삼 년 전의 소룡대연회를 경험한 자라면 어찌 소제갈을 몰라볼 수 있겠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오. 여독을 풀기에 화산은 제법 괜찮은 곳이라오.”
“예. 선배님.”
어느덧 운기를 마친 남궁장호와 팽각도 화산의 대선배와 인사를 마치고 한 명씩 산문에 올랐다.
모두 객잔에서 받은 객첩을 노도사에게 건넸다.
남궁과 제갈, 팽가의 후기지수들은 붉은 매화 문양 다섯 개가 그려진 오매화(五梅花) 객첩을 지니고 있었다.
오매화는 최고 등급의 객첩으로 그 유명한 화산의 암향매화전(暗香梅花殿)에서 묵을 수 있는 특권의 상징이었다.
남궁세가의 빈객 신분인 조휘도 오매화 객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화서명뿐이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삼매화(三梅花) 객첩.
화씨검문은 오대세가의 명성에 비하면 많은 모자람이 있었다.
그만 유일하게 다른 객당으로 배치되어 일행과 헤어지게 된 것이다.
강호는 이처럼 차디차다.
배경과 명성에 따라 철저하게 계급이 나뉘는 곳인 것이다.
그렇게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산문을 넘어 당도하자 화산의 공기가 바로 바뀌었다.
항상 함께 있었기 때문에 피부로 와닿지 않았을 뿐, 오대세가의 명성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조휘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청년들의 포권 세례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묵묵히 청년 무사들의 인사를 받아 주는 남궁장호의 얼굴에는 명문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제갈운도 팽각도 더 이상 장난스럽지가 않았다.
조휘가 슬그머니 뒤로 빠져나와 대화산(大華山)을 둘러보았다.
화산의 내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산문의 단출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화산의 전각들이 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품이 있고 고요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웅장하다.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들 사이로 드러난 그 첨각(尖角)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분명 인공적인 건물들인데도 화산의 정취와 아름다움을 결코 해치지 않았다.
마치 한 폭의 유려한 그림 같은 풍경.
왠지 조휘는 화산이 추구하는 무도(武道)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매화는 메마른 혹한을 지나 가장 먼저 한 떨기 피어나 봄을 알리지. 참으로 여전하구나. 암향매화(暗香梅花)여.
검신 어르신의 경이에 찬 목소리.
그에게도 화산은 각별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인 듯하다.
“크! 이 정취 보소! 호리병 하나 허리에 차고 지붕 위에 올라서면 술에 취하는지 정취에 취하는지 모를 지경이겠구만.”
감탄한 표정으로 가슴 근육을 씰룩이며 화산파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는 장일룡.
“열일곱에 술을?”
조휘의 질문에 장일룡이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장부 나이 열일곱이면 화주(火酒) 정도야 웃으며 마실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장일룡이 그 독한 화주를 술독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상상을 해 보는 조휘.
과연 산적은 산적이다.
너무 잘 어울린다.
“그런데 형님은 정체가 뭐요? 남궁세가를 비호하길래 남궁의 인물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소?”
갑작스런 ‘형님’ 공격에 등줄기가 축축해진 조휘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냥 상인입니다.”
“상인?”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장일룡.
“장사꾼이란 말이요? 뭘 파는 거요? 호오! 그렇다면 돈이 무지 많겠수?”
“…….”
조휘가 대꾸하기도 싫은 듯 찌푸린 얼굴로 다시 화산의 전경을 바라보자 장일룡이 배를 쓸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휴, 하루 종일 산만 탔더니 배고파 죽겠네. 여기 음식도 늦게 나오겠지? 뭔 굽고 삶고 튀기고 강호의 요리란 게 그리도 복잡하단 말이오?”
넉넉하게 살아온 세가의 후기지수들이었기에 그들은 아무거나 먹지를 않았다.
세가의 숙수가 함께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풍진노숙을 하더라도 제법 갖춰 먹었던 것.
그렇게 매 끼니때마다 불을 피워 요리를 해 대니 남다른 식성을 지닌 장일룡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고로 음식이란 고깃덩이 하나 턱하니 뼈 채로 불에 구워 한입 베어 물면 그만인 것을 뭘 그리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소.”
과연 무식한 산적새끼로다.
아니 잠깐만?
순간적으로 번뜩이며 든 생각.
조휘는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했는지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대 요식업의 첨단이 무엇이었던가?
패스트푸드(fast food).
적정한 수준의 맛을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빨리 내어놓는 것.
이 간단하고 스마트한 생각으로 세계의 요식업을 하나의 상호로 덮어 버린 회사 맥도날드.
현대인이라는 놈이 이걸 잊고 있었다니 그 한심함에 어이가 달아날 지경이다.
합비의 수많은 객잔을 돌며 중원 요리들의 레시피나 구하고 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미칠 노릇이었다.
왜 병신같이 단짠이니 뭐니 중원의 요리만 발전시키려고 했을까?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현대의 레시피로 꽉 차 있는데.
게다가 패스트푸드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딜리버리 사업에 더욱 어울리지 않는가?
“하아…….”
자, 이제 생각해 보자.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밀가루, 소량의 소금, 그리고 이스트다.
밀은 흔하게 구할 수 있으니 패스.
소금도 그리 많은 양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스트?
이건 효모, 즉 누룩이다.
술을 만드는 곳이라면 중원 천지에 누룩을 쓰지 않는 곳은 없다. 지천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진 고기?
물론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다.
상추? 케찹?
악마의 열매라 불렸던 토마토를 탐험가 코르테스가 중남미에서 유럽으로 가져오는 것이 16세기경이니 아직 없겠지.
하지만 대체할 소스가 너무나 많다.
물론 케찹의 독특한 맛을 완전히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풍미를 지닌 향신료들이 중원에는 너무나 많았다.
분명 몇 차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햄버거를 구현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발상을 전환하니 설탕의 대체제도 금방 떠올려진다.
엿기름, 즉 조청이다.
조청을 햇빛에 말려 빻아서 가루로 만들면 충분히 설탕처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핫도그, 호떡, 떡볶이 등 온갖 패스트푸드가 조휘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한데, 과연 조휘가 현대에서 누렸던 것이 패스트푸드만 있을까?
조휘가 장일룡의 크고 우람한 근육들을 바라보다 씨익 웃었다.
“저와 사업 하나 해 보시겠습니까?”
호기심 잔뜩 어린 눈으로 조휘를 바라보는 장일룡.
“사업? 장사 말이우?”
조휘가 자신이 지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마치 다단계 회사에 친구를 끌어들이는 그런 느낌!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리죠. 결코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뭐 알겠수! 난 이제 정파인이니까! 정정당당하게 돈 벌 수 있으니까! 하하하!”
와나 이 뇌 깨끗한 새끼.
이런 단순한 놈들만 세상에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조휘가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풀지 않으며 품에서 장부를 꺼내 들었다.
“여기…… 이게 그 근로계약서라는 건데…….”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뜬 얼굴로 계약서를 받아 드는 청뇌(淸腦) 장일룡.
“오오! 계약서!”
칼 들고 협박이나 해 봤지 이런 깨끗한(?) 방식으로 돈을 벌게 되는 건 처음이다.
“뭐 별다른 건 없고 중요한 건 월봉이겠죠. 은자 오십 냥 어떻습니까?”
휘둥그레 뜨여진 장일룡의 두 눈.
“월봉이 오, 오십 냥?”
재수 없으면 달포에 은자 삼십 냥의 매출(?)도 올리지 못하는 산채도 수두룩한데 한 사람의 월봉으로 오십 냥?
이게 정말 실화인가 싶은 장일룡의 표정이다.
“형님! 정말 오십 냥을 월봉으로 준단 말이오?”
“두말하면 잔소리죠. 저는 절대 허튼 소리 안 합니다.”
갑작스러운 호의를 받게 되면 누구나 의심의 마음을 품게 된다.
“난 이제 당당한 정파인이오! 혹시 뭐 사람을 죽이거나 그런 일을 시키는 건 아니겠지?”
장일룡의 미심쩍은 얼굴.
이에 조휘는 또다시 예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냥 서 있는다? 그런 일도 있단 말이우?”
“하하! 천천히 가시죠.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때 저 멀리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화산소룡이다!”
“강호제일 신성(新星)이다!”
절도 있게 열을 지어 걸어오고 있는 화산의 젊은 도사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조휘가 내심 감탄을 연발했다.
‘와!’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남궁의 검수들이 묵직한 바위 같은 느낌이라면 저들은 수수하지만 화려한 느낌이 든다.
수수하지만 화려하다?
그 무슨 모순된 표현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느껴지는 바가 그랬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새하얀 도복.
검병에 새겨진 매화 문양을 제외하고는 흔하디흔한 철검.
그 모습들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나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그들의 안색이나 혈색이었는데 평범한 사람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밝고 화사하다.
굳이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풍기는 생명력의 아우라가 틀리다고나 할까?
-저들의 매화기공은 따로 매화생공(梅花生功)이라 불리기도 하지. 인간 본연의 생명력, 즉 선천지기를 단련하는 기공법은 무당의 태청심법과 더불어 매화기공이 유일하다. 참으로 대단한 심법이라 할 수 있지.
‘제가 익히고 있는 검천대신공보다도 대단한 겁니까?’
검신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침묵한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조휘가 그저 한심할 뿐.
화산파 일행의 가장 선두에서 걸어오고 있던 청년 도사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남궁장호도 마주 포권했다.
“과연 화산소룡이오. 더욱 헌앙해지셨소이다.”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남궁장호.
“오히려 제 쪽에서 더 감탄하게 됩니다. 기도가 남달라지셨습니다. 제법 진전이 있었군요.”
남궁장호가 입술을 질끈 짓씹었다.
바로 저거다!
놈의 저런 말투가 너무 싫다!
예를 다하고 있는 척하지만 뭔가 고고하게 위에서 깔아 보는 그런 느낌.
왜 이자에게 그토록 맹렬한 투쟁심이 일어났는지 삼 년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네놈도 사람이구나!’
인간의 심성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해충, 오만(傲慢).
지금 저놈은 그 위험하고도 깊은 늪에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호제일의 신성이라 불리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으니 어깨가 으쓱거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터.
남궁장호는 확신했다.
무공이라면 몰라도 내적 성장은 자신이 월등하다.
가문의 어른들이 말하시길, 졸렬하고 오만한 마음으로는 절대 대성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남궁장호의 눈에도 보이는 것을 검신이라고 눈치 채지 못할까?
-지닌 재능은 하늘 끝에 닿았으나 검(劒)에 취해 버린 놈이구나. 위험하도다.
검신의 짙은 우려.
마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저런 경우다.
누군가 서둘러 다잡아 주지 않으면 지닌바 재능도 다 발휘하지 못하고 검의 마력에 빠져 검마(劒魔)가 될 녀석이었다.
-도대체 화산의 도사놈들은 뭘 하고 있는 게냐? 내 저놈을 꼭 밟아야겠느니.
‘어, 어르신!’
사색이 된 조휘의 얼굴.
뭘 또 밟아요!
제발 그만 좀 하시죠!
이 몸은 제 몸입니다만?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강호에 커다란 재앙을 일으킬 녀석이로다.
검신의 눈에 청운소는 극약 처방이 필요한 놈이었다.
바닥의 바닥까지 쳐 본 인간은 결코 그 삶이 헛될 수가 없었다.
처참해진 마음을 다잡고 그 바닥에서 기어 나올 수만 있다면 적어도 마(魔)가 될 녀석은 아니니까.
“올해는 각파에서 내건 상품의 규모가 대단하니 꼭 좋은 성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소룡대연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후기지수들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은 우승 상품들이었다.
삼 년 전 청운소는 가장 큰 상품이 걸려 있었던 비무대회를 우승했다.
그가 차지한 것은 무당의 자소단(紫霄丹). 소림의 대환단과 비견되는 강호 최고의 영약을 상품으로 하사받은 것이다.
어느새 제갈운이 다가와 화산소룡을 향해 포권했다.
“청운소 소협. 반갑습니다. 삼 년 만이군요.”
청운소가 빙그레 웃는다.
“소제갈을 뵙는 것은 언제나 영광이지요. 이번에도 인중지보 신기제갈(人中之寶 神技諸葛)의 명성을 꼭 이어 가길 바랍니다.”
마치 스스로 더 우위에 서 있는 듯한 교묘한 어투다.
제갈운은 남궁장호와는 다르게 훨씬 직설적이었다.
“천하제일 화산의 입장에서는 오대세가도 뭐 별거 아니죠? 구파의 권위의식이란 것은 역시 여전하군요. 참 대단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장호의 속이 시원해졌다.
같은 오대세가의 입장에서 경쟁할 때는 밉상도 그런 밉상이 없지만, 등을 맞대고 구파를 상대할 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오해십니다. ‘신기제갈의 무림맹’이라 불리는 판국에 감히 누가 제갈가의 이름 앞에 권위를 논할 수 있겠는지요. 기분 나쁘게 들리셨다면 사과하지요.”
아! 사과마저 기분이 나쁘다!
그렇게 제갈운이 비릿해진 얼굴로 뭐라 대꾸를 하려던 찰나.
“크하하! 꽃비나 뿌려 대는 부실한 사내놈이 입심만 늘었구나!”
온몸으로 ‘수컷이란 이 정도는 돼야지!’라고 말하며 나타난 사내.
그간 키워 온 가슴 근육을 연신 씰룩거리는 팽각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려 버리는 청운소.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던 남궁소소가 궁장을 펼치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청 소협. 그런데 그 대단한 금번 소룡대연회의 상품이 무엇인가요?”
정혼자를 바라보는 남궁소소의 얼굴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저 선대의 유지일 뿐 그녀는 결코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렇게 여리여리한(?) 사내는 결코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었다.
청운소의 감정 없는 눈이 남궁소소를 향했다. 그 역시 이미 삼 년 전에 그녀와 합의를 끝냈다.
둘 다 문파의 어른들에게 통보만 남은 상황.
주변의 모두가 청운소를 응시한다.
상품이 궁금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
“칠채사린단과 묵공신보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삼 년 전 본 파의 장문인께서 다음 소룡대연회의 상품으로 걸겠다고 공언하셨으니까요.”
금년의 소룡대연회가 이렇게 뜨거운 것은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하제일인 자하검성(紫霞劒聖) 단천양이 다음 대회의 상품을 삼 년 전에 이미 내놓았기 때문이다.
칠채사린단은 대환단이나 자소단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대단한 영약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엄청난 것은 묵공신보.
묵공신보는 칠십 년 전 천하 십대 고수였던 묵검공(墨劒公)의 진신무공이 담겨 있는 비급이었다.
이런 엄청난 상품을 내걸었기에 화산이 금년 소룡대연회의 주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태양신검(太陽神劒)과 만년빙정(萬年氷精)이 추가되었습니다.”
웅성웅성.
후기지수들의 동요는 꽤나 컸다.
태양신검과 만년빙정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그만큼 컸던 탓이다.
한 후기지수가 목청을 높였다.
“그것들은 모두 새외대전 이후 모습을 감춘 기물들 아닙니까?”
새외대전(塞外大戰).
무림역사에 삼대혈겁 중 하나로 남아 있는 그 이름에 모두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과거 태양신궁, 북해빙궁, 남만야수궁을 주축으로 한 새외무림이 중원 강호를 침공했었다.
파죽지세로 강호를 유린하던 그들을 가장 먼저 막아선 것은 구대문파가 아니라 사마천세라는 단 한 명의 무인이었다.
절대(絶大)라는 단어가 그보다 잘 어울릴까?
그는 단신으로 새외무림과 싸워 이겼다.
강호 역사상 그런 신과 같은 역량을 보여 준 무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무.
주먹을 떨치면 산악이 무너졌고 발길질 한 번에 용암이 솟구쳤다.
무림 역사상 신(神)의 휘호를 자신의 별호에 새긴 무인은 단 세 명뿐.
그렇게 사마천세(司馬天世)는 그들 중 하나인 무신(武神)이 되었다.
“맞습니다. 태양신검과 만년빙정은 각각 태양신궁과 북해빙궁의 보물이지요.”
제갈운이 눈을 빛냈다.
“혹시……?”
청운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태양신검과 만년빙정은 무신의 가문에서 내걸어 주셨습니다.”
무신의 가문?
그건 사마세가를 뜻함이 아닌가?
그 순간 조휘의 머릿속에서 여러 어르신들의 동요 어린 음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거친 상욕과 비난, 야유와 조소.
조휘는 이제 익숙해진 듯 담담한 얼굴로 장내를 살필 뿐이었다.
“그럼 사마세가도 이번 소룡대연회에 참가하는 겁니까?”
한 후기지수의 질문에 장내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같이 정적에 휩싸였다.
공식적인 천하제일이 화산이라면, 비공식으로는 사마세가다. 무신의 후예라는 이름의 무게가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사마세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을 멈췄다.
그런 자들이 갑자기 소룡대연회를 후원하며 전면에 나선 것이다.
“아닙니다. 사마세가는 여전히 참여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
그럼 그렇지.
본인들이 내건 상품을 곧바로 회수해 간다면 강호의 비웃음을 사게 될 터.
참가만 한다면 그들이 우승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청운소가 그렇게 안도하는 후기지수들을 향해 내심 조소를 머금었다.
그냥 웃겼다.
어차피 저들은 태양신검이나 만년빙정을 차지할 수가 없다.
저토록 사마(司馬)를 두려워하는 것들이, 화산(華山)은 넘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들려오는 차가운 음성.
“이제야 알겠군요.”
청운소의 의아한 시선이 조휘를 향했다.
“화산의 정심한 도가무공을 익힌 자에게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편협과 오만. 이 도가의 성지에서 마(魔)라는 놈이 그렇게 쉽게 자라나선 안 되는 겁니다.”
청 소협.
이거 내 대사가 아니외다.
나도 협박에 못 이겨서 이러는 거요.
여차저차해서 이 어른이 회까닥하는 날에는 내 몸을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오.
그럼 소협은 복날에 개 맞듯이 맞을 텐데 그것보단 낫지 않겠소?
이제 나도 모르겠소.
“마신(魔神)의 인연이 화산에 닿은 것이군요.”
화산의 장문제자 청운소의 눈에 보랏빛 기운이 일렁인 그 순간.
화산파 후기지수들의 기세도 일변했다.
강호에 마신이라 불렸던 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자하마신(紫霞魔神).
그 저주받을 이름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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