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91
90 章>
변생(變生)이 일어나는 순간, 인간이라는 종족의 지위와 특성을 단숨에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환생을 통해 이룩해 온 모든 존재력이 사라진다.
그 말인즉, 인간종에게서 더 이상 성좌의 출현이 불가능해진다는 뜻.
“인간이 환생을 통하지 않고 존재력을 닦는 방법은 무공(武功)과 도술(道術)이 효율적이다. 정해진 수명을 초월하기에 가장 유용한 방법이지.”
조휘의 말에 모든 동료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가 이 중원 시대를 선택하여 환생한 가장 큰 이유.
삼신(三神)의 유산이 기반되지 않았더라면 조휘는 결코 다시 각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초미래 세계의 유전 공학으로도 수명을 초월하는 것은 가능하지. 하지만 그 세계는 이미 변생의 율이 적용된 세상이라 환생이 무의미해.”
그때.
우우우우우우우-
마치 음울한 전주곡과 같은 거대한 울림이 광활한 천공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마치 벌떼가 우는 소리 같기도, 고통에 신음하는 군중들의 곡소리 같기도 했다.
“싯다르타!”
쩍 벌어진 균열의 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감들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비명과 같은 단천양의 외침에 조휘가 알고 있다는 듯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익숙하고도 불길한 광경.
이내 조휘가 서서히 존재력을 끌어올리자, 단천양의 얼굴이 극도의 전율로 물들었다.
“세, 세상에!”
그것은 자신이 알던 싯다르타가 아니었다.
적어도 존재력이 당시의 싯다르타보다 세 배는 넘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 후로 얼마나 더 환생을 해 온 것이오! 싯다르타!’
마침내 다다른 성좌대전의 서막!
츠츠츠츠츠츠츠-
무수한 성좌들이 일거에 균열의 틈으로 모여든다.
성좌들이 자신들의 차원계를 떠나 하위 종들의 물질계를 침범하는 것은 ‘법칙’이 허용하지 않은 일.
당연히 온 우주의 영혼들이 공포로, 저주로 그 이름들을 웅얼거리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도사들의 주술과 같은 웅얼거림이 자신들의 천하(天下)에 울려 퍼지자 조휘의 동료들이 극도로 동요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크으윽!”
온 우주의 저주와 통곡이 드리우는 그 공포(恐怖)와 귀기(鬼氣)란 직접 겪어 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
그 두려움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제갈운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궁장호는 역시 제왕가의 후손답게 침착하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어 그는 거대화된 자신의 몸에 맞게 특수 제작된 거검(巨劒)을 부서져라 부여잡더니 균열을 향해 포탄처럼 튕겨져 나갔다.
“남궁 형! 멈춰!”
조휘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균열을 덮친 남궁장호가 그대로 거검을 치켜든다.
콰콰콰콰콰콰-
거검을 통해 남궁장호의 막대한 의념이 토해져 나온다.
의념의 절대량만 따진다면 절대경 그 이상!
거기에 거인의 신력(神力)까지 더해졌으니, 마치 고대 신화 속의 거신족을 실제로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
조휘를 제외한다면 당대의 천하에서 저 거인화된 남궁장호의 제왕검형(帝王劒形)을 막아 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존재하겠는가?
스칵!
남궁장호가 제왕검형의 전이식 제왕지세(帝王之勢)를 연속적으로 펼쳐 내자 군집된 의형검강(意形劒罡) 다발이 수도 없이 균열을 향해 짓쳐 들었다.
“뭐, 뭐야!”
염상록이 눈을 뻐끔거리며 당황했다.
한눈에 봐도 막강한 위력의 의형검강 다발.
한데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터져 나와도 모자랄 판국에 아무런 소음도 없이 잦아들고 말았다.
마치 명주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남궁장호의 막강한 의형검강 다발들이 그대로 균열에 스르르 스며든 것이다.
“물리적인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조휘의 외침에 결국 남궁장호 거검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균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긴 온 우주의 성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차원 균열이 그리 쉽게 파괴된다면 그것도 웃긴 것이리라.
그 순간.
우주로부터 전해지던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광활한 상공.
길게 세로로 찢어진 거대한 균열에서 우주적 존재들, 그 무시무시한 성좌들이 하나둘씩 거신(巨身)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남궁장호의 거대한 동체가 비틀거렸다.
그것은 온 마음과 영혼이 무저갱의 나락 속으로 끝없이 낙하하는 듯한 지독한 공포.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으스러질 것만 같다.
남궁장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전율로 온몸을 떨었다.
-이런……!
남궁장호의 음울한 시선이 거검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향했다.
덜덜덜.
적을 앞에 둔 검수가 검병(劒秉)을 잡은 손을 떤다는 것은 검수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그런 무너지는 감정이란 조휘의 다른 동료들도, 조가대상회의 봉공들과 원로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의 절반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무림맹주로 살며 천하를 굽어보던 무황조차도 창백한 얼굴로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무황의 동공이, 거대한 균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성좌들의 면면을 훑고 있었다.
“허……!”
온갖 형이상적인 형태의 성좌들.
물론 개중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의 성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도저히 생명체로 볼 수 없는 형태의 성좌들이었다.
그 무수한 성좌들 중의 선두에,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두 성좌들이 있었다.
끈적한 유백색 고름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핏빛 눈알(目).
검은 불꽃을 온몸에 두른 거대한 괴물.
조휘의 동료들은 하늘에 거대한 눈알이 덩그러니 떠 있는 그 모습과, 끝도 없이 뻗어 있는 기다란 몸집의 용(龍)과 같은 괴물을 바라보며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 그 둘은 광활한 존재감을 드리우며 천천히 조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싯다르타, 이번에도 그때와 다르지 않소.”
“그래.”
서서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성좌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조휘.
이내 조휘의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린다.
“그 재수 없는 눈깔은 여전하군.”
거대한 핏빛 눈알은 마치 반갑다는 듯 부르르 동체를 떨며 엄청난 유백색 고름을 사방으로 뿌려 댔다.
-조, 존재를 부정하는 자여! 잠시! 이 ‘주시하는 눈’에게 잠시만 시간을 달라!
핏빛 눈알, 즉 주시하는 눈의 몸짓은 반가움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극한 두려움과 공포!
조휘의 동료들이 성좌들을 바라보며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그들이 ‘존재를 부정하는 자’를 접하며 느끼는 감정 역시 동일했다.
존재를 부정하는 자 앞에서 성좌들의 수나 존재력의 강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의지만 일으키면 곧바로 이곳의 모든 성좌가 무(無)로 화(化)하게 된다.
“말하라.”
조휘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성좌들은 겨우 안도하며 의지를 드러냈다.
-그대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조휘가 묵묵히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시작되었겠군.”
아니나 다를까.
제천대성이 머나먼 북쪽 하늘에서 클라우드 그릴러, 아니 근두운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텁!
지상으로 내려온 제천대성의 몰골이란 처참함 그 자체.
“크윽! 주인! 나로선 역부족이었다! 천요력(天妖力)에 가깝게 진화한 내 요력으로도 그 머리도 없는 놈을 막지 못했어! 도대체 그놈은 누구지?”
조휘는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제천대성이 수확하는 틈새와 전투를 벌이고도 살아 돌아올 확률이란 한없는 제로에 가깝다.
그놈은 자신을 제외한다면 우주의 그 어떤 성좌들보다도 강력하다.
찢어져라 입술을 깨무는 조휘.
제천대성을 도주하게 내버려 둔 의도는 명확하다.
“놈의 전언(傳言)을 가지고 왔겠군.”
“주, 주인! 어떻게 알았지?”
조휘의 무심하고도 고독한 시선이 제천대성을 향했다.
“그놈의 전언이 무엇이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하는 제천대성.
“이미 천만(千萬)을 먹었다.”
순간, 조휘의 전신으로부터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력이 피어올랐다.
-조, 존재를 부정하는 자여!
-오오오오!
거대한 균열 아래 끝도 없이 진영을 갖추기 시작한 성좌들이 하나같이 조휘를 경원(敬遠)한다.
조휘와 마주 바라보고 있던 거룡(巨龍)이 흐느끼듯 육중한 날개를 파르르 떨며 몸을 낮추고 있었다.
-존재를 부정하는 자여! 난 느낄 수 있다! 놈의 수확 주머니는 비워지지 않았다! 그놈이 먹은 인간종의 영혼들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협상하자! 거래하자!
또다시 비웃음을 머금는 조휘의 입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깜찍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군. 난 네놈들이 이미 틈새 놈과 수확 주머니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머저리 같은 놈들. 놈이 정말로 인간종의 영육(靈肉)을 너희들과 함께 나눌 것 같으냐?”
조휘가 서서히 닫히고 있는 차원 균열을 공허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하지.”
순간, 조휘의 전신에서 태양빛과 같은 광휘(光輝)가 터져 나왔다.
화아아아아악!
거대한 핏빛 눈알, ‘주시하는 눈’이 그대로 사라진다.
-아, 안 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룡을 무심히 쳐다보는 조휘.
“일단 네놈들은 이제 성좌계(聖座界)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다시 거대한 동체를 부르르 떠는 거룡.
차원 균열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주시하는 눈’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대체 그 사실을 존재를 부정하는 자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자, 이제 협박 차롄가.”
-무슨……?
온갖 의문이 가득 섞여 있는 거룡의 눈빛을, 조휘는 우습다는 듯 피식 웃으며 외면했다.
“잘 가라.”
퍼억!
거룡의 거대한 머리가 수박 깨지듯 터져 나갔고.
그 처참한 파편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무렵, 그렇게 거룡의 머리가 터져 나간 자리에 기다란 가로 선이 길게 찢어지며 곧 틈이 벌어졌다.
-후으아……!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기괴한 목소리.
조휘의 얼굴이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틈새 안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력을 숨기고 있는 ‘수확하는 틈새’와의 조우.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부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제 머리가 터져 나갈 것도 모르고, 수확 주머니를 공유하겠다는 네놈의 말을 덜컥 믿어 버리다니.”
물론 불멸자라 소멸당하진 않겠지만, 머리를 잃었으니 본래의 존재력을 회복하는 데 족히 수천 년은 걸릴 것이다.
-오랜만이군.
조휘가 으스러져라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언령(言靈)을 끊임없이 추적해 보았지만 역시 놈의 본체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놈의 저 언령까지도 거짓.
이어 조휘의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역시 완벽하군. 수확 주머니를 공유하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통해 무수한 성좌들의 몸에 네 ‘틈새’를 심어 놓았겠지. 나는 네놈을 찾다가 시간을 다 보낼 테고.”
-…….
“그렇게 내가 정신없이 성좌들을 추적하고 있을 때, 네놈은 다른 곳의 틈새를 활용해 인간들의 영육을 먹어 치우겠지.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너는 이제 성좌들의 차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물질계를 떠도는 이상 네놈이 아무리 인간들의 영육을 먹어 치워 본들 창조자들에 의해 소거(消去)될 것이다.”
-예상대로군.
“뭘?”
-그대는 시간을 다스리는 자. 이미 이 모든 상황을 한 번 겪어 본 것인가.
조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틈새는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지금 이 시간대에, 이 공간에 그대가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모두 실패했다는 뜻.
거룡의 목 위로 드러난 기다란 틈새가 마치 사람의 웃음처럼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그대는 단 한 번도 나의 본체를 찾지 못한 것이다.
수확하는 틈새의 말에 반박하기도 싫었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저 미친놈의 본체를 찾는 것이 가능했다면 지금까지의 무수한 성좌대전이 모두 자신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네놈이 이긴 것도 아니지.”
차원 균열을 다시 생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를, 사절(使節)들 사이에 성좌들이 숨겨 놓은 것은 허를 찌르는 한 수였다.
하지만 조휘는 무한히 반복해 온 성좌대전 속에서 그런 ‘주시하는 눈’의 역할을 완벽히 파악해 냈다.
그의 존재력을 무(無)로 돌리면 성좌 무리들은 무조건 자신과 협상할 수밖에 없다.
하위 종족이 살아가는 물질계에서 아무리 존재력을 상승시켜 본들 성좌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었으니까.
여기까지가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결론 내린 최선의 상황.
-날 찾지 못하는 이상 그대는 무한히 이 전쟁을 반복해야만 한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이 의미 없는 전쟁을 대체 언제까지 이어 갈 작정이지?
수확하는 틈새가 어깨를 떨며 낄낄거렸다.
-물질계에 성좌들이 이만큼이나 침입했으니 곧 창조자들의 중재가 시작되겠군. 그래! 결국 우리와 그대는 서로 ‘거래’를 할 수밖에 없겠구나.
“…….”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틈새 놈의 계략과 지혜란 결코 자신 못지않았다.
문득 조휘의 무심한 시선이 광활한 천공을 향한다.
선연히 느껴진다.
서서히 내려오는 장엄한 기운, 창조자들의 존재감을.
이제 곧 창조자들은 양측 간의 협상을 제안할 것이고, 그 협상이란 결국 또다시 인간종이 ‘변생(變生)의 율(律)’을 받아들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이 인간종의 절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
하지만 자신이 이번에도 제안을 거부한다면?
협상이 깨지는 그 즉시 수확하는 틈새가 곧바로 숨어들어 지상의 모든 인간들의 영육을 먹어 치울 것이고, 결국 ‘물(水)의 절멸’ 때처럼 지하 공동에 피신해 있는 소수의 인간들만 남아 겨우 문명을 이어 가게 될 것이다.
제안을 승낙한다면?
‘기망(記忘)의 율(律)’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종 전체에 ‘변생의 율’의 법칙이 스며든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환생은 완전히 무의미해지며 다시금 인간은 ‘필멸(必滅)’의 굴레 속에서 나약한 하위 종족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영세토록 성좌들의 놀잇감과 유희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기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론적으로는 자신의 패배.
지금까지 조휘는 이 영원한 딜레마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
“싯다르타.”
자신을 부르고 있는 단천양의 어두운 얼굴을 살핀 조휘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칼리마.”
수확하는 틈새의 본체를 찾는 단 하나의 완벽한 계획이 있다.
성좌대전, 이 참혹한 절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지금까지의 수없는 책사들이 조언하고 강권했지만 결코 실행할 수 없었던 방법.
진가희, 아니 여와도 핏빛 천요력을 머금은 채 조휘에게 다가왔다.
“누아.”
“그만. 듣기 싫다.”
“해야만 해요.”
“…….”
순간 조휘가 뿜어내던 존재력이 모두 분노의 기질로 바뀐다.
“내 손으로 인간들을 모두 무(無)로 돌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 성좌대전이 무슨 의미가 있지?”
가로로 길게 찢어진 수확하는 틈새의 선(線)이 흥미로운 곡선을 그렸다.
-호오……?
수확하는 틈새는 조휘의 말에 담긴 진의를 단숨에 파악해 냈다.
이 행성의 모든 인간들의 존재력을 일일이 한 번씩 부정(否定)해 보는 것.
지금 저 존재를 부정하는 자의 책사들은 그것이 자신의 본체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확실하면서도 깔끔해. 그 방법은 틀리지 않아. 하지만 어쩌지? 성좌들마저 일거에 무(無)로 돌릴 수 있는 우주 최강의 존재력을 지닌 그대다. 그런 그대의 존재력을 직격으로 쬐는 순간 어쩌면 인간들은 환생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할지도. 하하! 결국 그대의 손으로 인간종이 멸종의 운명을 맞이하는 건가!
조휘는 수확하는 틈새의 본체를 찾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세월 동안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살펴 왔다.
마지막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존재를 부정하는 자신의 힘을 투사해 보는 것.
그러나 그리한다면, 지금까지 절멸의 재앙을 막기 위한 자신의 처절한 몸부림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한데 그때.
-오오오오……!
-위대한 자의 존재력이……?
끝도 없이 천공에 도열해 있는 성좌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거대한 조휘의 존재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
성좌들은 이 엄청난 성좌 군단 앞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조휘의 의도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수확하는 틈새의 진한 의문.
그 역시 당황한 듯, 조휘의 의도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싯다르타…….”
“누아…….”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단천양과 진가희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조휘(曹輝).
이번에도 그는 스스로를 희생해 인간들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어 조휘의 입에서 놀라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날 먹어라. 틈새.”
한눈에 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수확하는 틈새.
-뭐, 뭐라고?
조휘가 예의 씨익 웃는다.
“내 영육(靈肉)과 존재력을 섭식한다면 네놈은 과연 어떤 존재가 될까?”
-…….
“환생자 집단인 인간들을 모두 섭식한다면 당연히 네놈의 존재력은 어마어마해지겠지. 하지만 너라면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모두 먹는 것과 나를 먹는 것의 차이를.”
그것은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존재를 부정하는 자.
시간을 다루는 유일한 성좌인 그는 얼마나 오래 존재력을 닦아왔는지 상상조차 불가능한 존재였다.
무한존자(無限存者).
성좌의 지위로서 활동하나 실질적으로는 창조자의 반열에 이른 존재.
이 무수한 성좌 군단을 앞에 두고도 홀로 협상을 운운할 수 있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절대자.
-……정말 널 먹게 해 주겠다고?
“그래. 망설이지 말고 먹어라.”
“싯다르타여.”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조휘는 또다시 인간들의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좌가 성좌를 섭식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조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한다. 성좌는 불멸(不滅).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상할 순 없지.”
말없이 묵묵하게 듣고만 있는 수확하는 틈새에게로 조휘가 선언하듯 외쳤다.
“하지만 지금 난 이 자리에 있다.”
-설마 그 말은……?
조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이미 네놈에게 수도 없이 먹혀 본 상태지.”
-오오……!
수확하는 틈새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성좌가 성좌를 섭식할 수 없는 이유는 불멸자들끼리 존재력이 섞이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 말인즉 자신이 ‘존재를 부정하는 자’의 존재력을 별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휘의 그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대 역시 불멸이라 다시 생(生)을 이어 갈 테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존재력을 상당 부분 잃을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왜?
조휘가 냉소했다.
“뭐 이번에도 수만 년 동안 공허 속에서 부유하며 모든 기억을 천천히 잃어 가겠지. 겨우 존재력을 회복하고 다시 환생한다고 해도 성좌로 다시 각성할 수 있을지는 역시 미지수다. 다시 무수한 생(生)을 통해 인과를 모아 돌아오는 수밖에.”
-…….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수확하는 틈새는 그야말로 전율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모든 존재력을 잃고 수만 년간 그 빌어먹을 공허(空虛) 속에서 부유한다니!
그런 긴 시간 동안 천천히 기억을 잃어 가는 고독이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조건이 있겠지?
조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호(加護). 네가 인간종의 수호신이 되어라. 네 성좌의 이름과 언령으로 이 자리에서 선언해야 할 것이다.”
-뭣이?
성좌에 이른 존재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며 맺은 언령은 결코 훼손되거나 효력을 잃을 수 없다.
즉, 인간종을 섭식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성좌들의 유희로부터 그들을 지켜 내야 할 판이다.
“싫어? 싫으면 지금 바로 저 성좌 군단들을 모두 무(無)로 돌리고. 뭐 네놈이 숨어들어서 인간들을 모두 먹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어차피 성좌계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이상 네놈의 운명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니.”
그 즉시 조휘의 무서움을 깨달은 수확하는 틈새.
지금의 상황은 저 ‘존재를 부정하는 자’가 스스로 수없이 생(生)을 반복하며 만들어 낸 최선의 결과.
그런 철저한 계획 앞에서 자신은 도저히 상대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
피식.
“상인(商人)의 기본이지. 상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건.”
그 말을 끝으로 굳게 입을 닫아 버린 조휘.
동료들은 그런 조휘의 고독한 눈빛을 바라보며 한없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의식만 남겨진 채 우주의 공허 속에서 수만 년을 떠돌아야 한다니.
그런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대체 조휘는 지금까지 얼마나 무수히 겪어 왔단 말인가?
과연 인간이란 저 위대한 성좌의 가호와 희생을 강요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종족인가?
지금 동료들이 조휘를 바라보며 느끼고 있는 감화(感化) 역시 과거의 사람들과 비슷했다.
오래전의 인간들도 그런 ‘존재를 부정하는 자’의 희생을 기리며 무수한 종교를 만들어 냈다.
“싯팔! 때려쳐! 홀로 고고하게 그렇게 뒈져 버린다고 누가 고맙게 생각할 것 같냐?”
츠캉!
염상록이 쌍겸을 길게 빼어 들며 떠나갈 듯 소리쳤다.
“좆까! 저 괴물에게 잘근잘근 씹어 먹히건 말건 그건 내 팔자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저 성좌 새끼들 모조리 죽여 버려!”
무황 역시 고색창연한 고검(古劒)을 고쳐 잡더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사파의 아해가 이 못난 늙은이에게 정문일침의 가르침을 내려 주는구나! 옳다! 참으로 옳다! 무인의 죽음은 스스로가 결정하는 법!”
장일룡이 당장이라도 육탄전을 벌일 기세로 웃통을 벗어 재꼈다.
“크허허헛!”
창천신검을 빼어 든 창천검협 남궁수.
“대남궁! 개진(開陣)!”
그 순간, 어느새 중원 각지에서 몰려든 각성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며 호응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적을 물리쳐라!
-대중원(中原)을 지켜라!
그야말로 인간종(人間種) 전체가 ‘사람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그들의 오랜 가호신인 여와(女媧)는 뜨거운 분루를 삼키며 전장의 전면에 나섰다.
누군가가 떠나갈 듯 소리쳤고.
“여와다! 삼황오제다!”
-우와아아아아아!
군집된 중원인들의 사기가 그대로 전장을 해일처럼 집어삼키며 성좌 군단들을 압박해 가자.
조휘가 슬픈 눈으로 여와를 바라보다 나직이 음성을 토해 냈다.
“시간이 없어. 빨리 결정해.”
그 순간.
기다랗게 찢어진 틈새에서 성좌의 언령(言靈)이 흘러나왔다.
* * *
쉴 새 없이 주문과 같은 언령을 쏟아 내는 수확하는 틈새.
그렇게 그가 오롯한 자신의 이름으로 인간종을 향한 가호(加護)의 뜻을 선언하자, 마치 화답하듯 천공에서 홀황의 광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주의 법칙을 상징하는 홀황의 광휘가 지상에 강림했다는 것은 모든 창조자들이 공증을 끝냈다는 뜻.
곧 수확하는 틈새의 기다란 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존재력이 쏟아져 나왔다.
-성좌들이여! 진군을 멈추어라!
순간, 중원의 각성자들과 일촉즉발의 격돌을 앞두고 있던 성좌 군단이 일제히 전투 의지를 거두었다.
조휘는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성좌들에게서 그들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만에 달하는 인간들의 영육을 먹어 치운 수확하는 틈새의 존재력이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능가하는 것이었다.
‘창조자들’과 ‘존재를 부정하는 자’를 제외한다면 성좌들의 차원에서 저만한 존재력을 과시한 이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어 모든 성좌들이 창공 아래 찬란히 빛나고 있는 홀황의 광휘를 바라보며 당혹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저들을 가호한다고?
-수확하는 틈새가 인간종의 수호신이 되었단 말인가?
성좌 진영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수확하는 틈새가 제공해 준 정보와 계획이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자신들의 차원 침입은 성공할 수 없었다.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인간종의 수호자를 자처, 그것도 성좌의 신명(神名)으로 선언해 버리다니!
자신들의 지도자가 순식간에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창조자에 근접한 존재력을 지닌 ‘존재를 부정하는 자’ 하나만으로도 벅찬 마당.
거기에 환생력(還生力)을 각성하여 사실상 불멸의 존재나 다름없는 인간들까지 합세한 상황이었다.
한데 그것으로 모자라 자신들의 지도자까지 인간 측에 붙어 버리다니!
설사 이긴다고 해도 예상되는 타격이 너무도 크다.
가장 최악은 ‘주시하는 눈’이 조휘에 의해 사실상 소멸되어 버렸다는 것.
설사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주시하는 눈이 없다면 다시 차원 균열을 생성할 수 없었기에 성좌계로 되돌아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은 이곳에서 억겁의 형벌 아래 놓일 것이 자명했다.
‘법칙’을 부정하는 것은 그만큼 창조자들의 노여움을 사는 행위.
결국 성좌 군단 측은 자신들의 패배를 자각하고서 하염없이 조휘만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존재를 부정하는 의지를 거두고 주시하는 눈을 원래의 형태로 소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능력.
그의 자비가 없다면 자신들은 이 우주의 구석진 성계에서 창조자들의 형벌만 기다리는 처연한 신세일 뿐인 것이다.
피식.
하지만 조휘는 그 빌어먹을 눈알을 다시 소환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성좌들을 향해 조소를 흘리던 조휘가 수확하는 틈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자신의 모든 힘을 해제했다.
상대가 스스로의 이름까지 걸며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자신이 화답할 차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고작 하위 종족에 불과한 인간종에게 무슨 가치가 있어 창조자들과 직접 협상까지 할 수 있는 우주적 존재가 이리도 스스로를 희생한단 말인가?
“그만 떠들고 어서 날 먹어라.”
그 말을 끝으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침묵해 버리는 조휘.
수확하는 틈새는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우주적 존재를 섭식할 기회가 정말로 자신에게 주어지다니!
그의 영육을 온전히 소화할 수만 있다면 자신 역시 차원과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자가 될 것이었다.
츠르르르르-
이윽고 틈이 벌어진다.
그 벌어진 틈 사이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기운이 흘러나오자 남궁장호가 기경을 하며 달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촤아아악!
-크아아악!
남궁장호의 거대한 동체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거칠게 튕겨져 나온다.
이미 조휘의 주위에는 가공할 기운을 풍기는 무형의 장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궁 형.”
남궁장호를 바라보는 조휘의 얼굴에는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남궁장호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진다.
-미친놈! 죽음이 장난이냐!
산 채로 영육(靈肉)이 찢겨 섭식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조휘였다.
그토록 인간들이 받게 될 고통을 두려워했으면서 왜 자신은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영육을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끝이 아니지 않느냐! 이 미친 짓을 언제까지 반복할 참이냐?
분명 저 바보 같은 놈은 인간들을 위해 몇 번이고 환생을 거듭하여 오늘처럼 스스로를 희생시킬 것이었다.
그의 전생과 얽혀 있던 진가희와 단천양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끝 모를 슬픔과 처연함으로 물들어 있는 그들의 표정.
“남궁 형.”
한데 조휘의 표정이 기묘하다.
오랫동안 조휘를 지켜봐 온 남궁장호는 그에게 뭔가 남은 수가 있음을 감각적으로 깨달았다.
저 녀석은 지금 포기하지 않았다.
-흥!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남궁장호가 휙 하니 물러가자.
벌어진 ‘틈’, 그 끔찍한 섭식(攝食)의 아가리가 조휘를 통째로 집어삼켰고.
그 순간 중원, 아니 세계가 정지되었다.
* * *
수확하는 틈새는 자신의 수확 주머니에 들어온 조휘를 몇 번이고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존재를 부정하는 자’의 존재력과 영육이 확실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그는 끝이었다.
설사 창조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역인 수확 주머니 속에 들어온 이상 하찮은 미물(微物)이나 마찬가지.
이제 이 우주적 존재의 영육을 소화하기만 하면 자신은 진정한 우주의 절대자, 스스로 세계와 차원을 창조할 수 있는 창조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었다.
-크하하하하하!
그렇게 수확하는 틈새가 희열에 몸을 떨며 기뻐하고 있을 때.
그의 수확 주머니 속에서 웬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빅-
-고유 염동 디지털화 완료, 염동 파동 증식 완료, 다중 코어 변이 완료, 확장된 염동 코어들을 모두 설정된 목표를 추적하는 데 활용합니다.
막 조휘의 영육을 찢어 삼키려던 수확하는 틈새가 극도로 당황했다.
갑자기 상대의 영혼과 의식이 수천, 수만 단위를 넘어 억(億) 단위로 쪼개지더니 자신의 모든 ‘살아 있는 틈’을 향해 뻗어 가기 시작한 것.
틈은 곧 출구요, 그 모든 출구들의 바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은 수확하는 틈새가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이 간사한 자가!
사념과 의식을 쪼개는 것은 성좌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러 영혼들에게 의식을 심어 화신(化身)으로 삼는 것이 성좌의 대표적인 권능이기 때문.
하지만 두세 개 정도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억(億) 단위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런 시도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영혼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
그렇게 엄청난 수로 쪼개어진 의식들을 모두 통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다시 의식이 합일(合一)된다고 해도 온전한 본래의 의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소멸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극한의 선택!
하지만 상대의 쪼개어진 의식들이 이내 자신의 수확 주머니와 연결된 모든 ‘틈’으로 뻗어 나가자.
-이, 이런!
수확하는 틈새는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상대가 그토록 무수한 의식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아, 안 돼!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반대로 자신의 모든 틈들이 역추적당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신의 ‘본체’를 들킬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의 본체가 드러난다는 것은 결국 이 기나긴 성좌대전에서 끝내 패배한다는 의미였다.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창조자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다루는 자.
다른 시간대에서의 자신은 틀림없이 그에게 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내가 당할 것 같은가!
결국 수확하는 틈새는 조휘의 추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수확 주머니를 희생시키기로 결심했다.
스스스스스스-
무저갱처럼 아득한 수확 주머니 내부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기 시작한다.
영육을 섭식(攝食)할 수 있는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확 주머니는 필수적이었다.
소화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육을 삼킬 경우 막대한 부작용이 초래되기 때문.
때문에 수확하는 틈새는 이 수확 주머니를 완성하기까지 수만 년 동안의 기나긴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야말로 제 살점을 도려내는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하지만 갓박스에 괜히 ‘갓(God)’이란 단어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휘의 무수한 생(生), 그 끝없는 반복 끝에 마침내 완성한 갓박스는 ‘존재를 부정하는 자’의 모든 노력과 의지, 안배가 담겨져 있었다.
-목표 염체의 무효화 시도를 확인. 염동 터널 가상화 온(on). 다중 코어 변이 최대 확장. 경고! 경고! 스피리츄얼 파워 부족! 에테르계 에너지 부족! 염동 가상화 시스템 유지 가능 시간 1분!
그렇게 기이한 에너지가 수확 주머니 전체에 깃들자.
-가, 간교한!
결국 수확하는 틈새는 화신(化身)의 자의식을 스스로 거두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의 본체로 되돌아간 것이다.
* * *
갓박스의 시스템이 보조해 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도박.
억 단위로 잘게 쪼개어진 의식이 다시 합일되는 그 고통이란 억겁에 가까운 생(生)을 살아온 조휘로서도 몸서리쳐질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휘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정신을 부여잡았고 마침내 시야를 회복할 수 있었다.
동공으로 천천히 번지는 빛살.
이내 그런 알록달록한 빛의 잔상들이 잦아들자 그의 투명한 동공에 한 ‘인간’의 모습이 맺혔다.
“넌!”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고 마는 조휘.
창살 아래 스며드는 동녘의 햇살 아래 천천히 드러난 그 얼굴은 바로.
“장삼봉……?”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차분하게 조휘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
그는 바로 도맥의 전설적인 시조이자 모든 도가의 신성인 장삼봉이었다.
“……당신이 본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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