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x001화
“이번 2020년도의 우승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심사위원인 줄리앙 판 데 발레가, 콩쿠르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이 먹고 자며 연습했던 뮤직 샤펠 앞에 서서 우승자를 발표하려 하고 있었다.
“성악 부문, 우승 이정현!”
마이크에 대고 크게 소리치며 발표하는 줄리앙 위원의 말을 들었음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번 우승 발표의 주인공, 이정현.
그는 자신의 결과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단 한 가지, 자신의 누나인 이정희가 우승하느냐 못하느냐. 그것만이 정현의 관심사였다. 주변의 환호에 혹시나 다른 발표를 듣지 못하게 될까 봐 정현은 양 귀를 두 손으로 막고 환호성이 작아지기를 기다렸다.
“이어서 피아노!”
심장이 펌프질하는 것이 느껴진다. 정현은 양손을 귀에서 떼고 심사위원의 입에 집중했다. 이번 한 번이다. 한 번만 제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를….
“이정희!”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꿈에서도 그리던 큰누나의 우승!
눈앞이 흐려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정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 높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 앞에 두 주먹을 갖다 대고 외쳤다.
“자유다! 으아아아아아아!”
눈에 맺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온갖 메이저 콩쿠르의 단골 우승으로 이미 클래식의 슈퍼스타가 되어 있던 정현의 주변은 전 세계의 기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끊이지 않고 터지는 수백 개의 플래시 불빛이 정현을 향해 있었다.
눈이 부셔 앞을 볼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원하던 결과가 나왔으니까.
전 세계의 미디어는 기네스북에 해당하는 항목이 있었다면 그곳에 오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록을 만들어 낸, 모든 메이저 콩쿠르 우승자 이정현에 대한 기사를 앞다투어 실었다.
정현에게 찾아온 17세의 봄. 전 세계는 이미 이정현이라는 이름에 열광하고 있었다.
***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스튜디오 ‘현’.
이곳에서 일하는 인기 웹툰 작가 ‘현’은, 웹투니아에 연재할 이번 에피소드의 펜화를 마무리 지었다.
“좋아, 여기에서 딱 은퇴 선언을 하는 거지!”
“언니! 말로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보니까 더 괜찮은 것 같아요!”
“당연하지. 이게 누구 이야긴데.”
“에이, 언니는 말하지 말고 그림만 그려야 해. 맨날 이상하게 말하잖아요.”
“뭐라고? 야! 너 혼나 볼래?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채색이나 해. 특히, 내 동생 얼굴.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해 줘.”
“뉘예뉘예~”
‘현’은 그림 파일을 어시스턴트에게 넘겨주며 큰소리를 쳤다. 이번에 연재하기로 계약한 작품의 제목은 .
이번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곡가의 장비들이라든지, 그 외 여러 가지 전후 사정들.
세상에 알려진 최고의 음악천재, 이정현. 자랑스러운 동생이 바라보는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서 조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 겪었던 아픔들까지도 세상에 꺼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니까. 그가 괴로워했던 시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감춰졌던 어두운 면까지도 정현을 위해 모두 밝힐 것이다. 정화는 이 웹툰을 정현을 위해 기획했다.
콘티를 확인하던 어시스턴트가 물었다.
“이게 정말 그때 있었던 이야기라는 거죠?”
“맞아.”
“와,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지? 너무 힘드셨겠다…. 정현 님 이다음에는 어땠어요?”
“우리 현이는 말이야….”
인기 웹툰 작가 ‘현’, 이정화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생인 정현을 떠올릴 때마다 행복한 느낌이 들어, 그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지치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정현에 관해 이야기하는 정화의 눈에서, 마치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
창문을 통해 들어온 강렬한 햇빛. 이 사이로, 먼지가 내려앉는 것이 보이는 대강당 2층 구석의 커다란 동아리방.
딩~ 디딩~
누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주워온, 한때는 버려졌던 헤진 소파 위에 누워 랩톱의 화면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 이정현.
그리고 정현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옆에 앉은 유재욱은 기타 현을 튕겨 소리를 낸다.
“야, 어때? 소리 죽이지 않냐?”
“미친놈… 이펙터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앰프에는 꽂고 그런 소리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어쿠스틱도 아니고 일렉 기탄데 소리가 죽이는지 살리는지 어떻게 알아.”
“…점심시간에는 관악반 연습에 방해된다고 앰프 쓰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선생님이….”
둘이 함께 주말 내내 종로의 낙원상가를 뒤져가며 찾아낸, 조금은 싼 중고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현을 한번 스트로크할 때마다 저 헛소리를 지껄인다.
하지만, 그 유명한 지미 헨드릭스나 에릭 클랩튼이 사용했던 바로 그 기타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라는 것.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타 소리의 표준이랄까? 물론 그 사람들이 썼던 픽업을 똑같이 만들려면 수천만 원이 들어갈 테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니 재욱이 들고 있는 건, 스트라토캐스터 ‘향’이 첨가된 기타라고 볼 수 있겠다. 게맛살에 게의 ‘향’ 만 추가된 것처럼 말이지. 소리는 완전 다른데 이름은 같으니까.
그런 정현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재욱은 새로 산 기타를 품에 안고 눈에서 꿀을 떨구며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 기타의 넥을 어루만진다.
[Fender]그 상징적인 글씨가 필기체로 박혀 있는 그 부분을.
“바스켓 케이스도 칠 줄 모르는 게 왜 펜더를 산 거야?”
“커트 코베인(밴드 너바나의 리더이자 보컬 & 기타리스트. 27살에 자살)도 스트라토캐스터를 썼다고!”
유명인이 사용한 제품을 사용하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에 낙원상가를 뒤졌던 그 개고생이 생각난 정현은 왠지 심통이 나서 재욱에게 독설을 날렸다.
재욱은 파워 코드만 스트로크로 치면 될 정도로 쉽다고 소문난 그린데이의 Basket Case조차도 틀리는 초보 중의 초보였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재욱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2학년인 지금은 1년이 조금 넘어간 시점.
모든 악기가 그렇지만, 배우기 시작하고 적어도 5년 이상은 되어야 어느 정도 칠 줄 아는구나! 라는 소리를 듣는다. 정말 천재가 아니고서야 1년 가지고는, 아니 웬만한 천재라 하더라도 1년은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리지 악기라는 건.
“지랄, 그거 쓴다고 다 커트 코베인 되냐. 연습이나 해.”
“맨날 ‘연습이나 해~’ 지는 연습도 안 하면서….”
“나 은퇴했다니까~ 꼬우면 너도 기타 팔고 하든지. 은. 퇴.”
정현의 말투를 따라 하며 구시렁대는 재욱을 뒤로하고 정현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랩톱에 손을 얹었다. 공식적으로는 밴드의 보컬이지만 정현은 악기 같은 건 하나도 모르니까 연습 같은 건 할 수가 없다. 밴드부 부장이라 동아리방에 나와서 항상 빈둥대는 게 전부.
하지만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음악을 듣고 자라서, 사는 데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식만 가득 차 있다.
필요 없는 음악에 관한 지식만 한가득. 원한 적도 없는데 언제 이렇게 많은 것들이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었을까.
공부를 이렇게 잘했으면 좋으련만… 뭐, 됐다.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야지.
어찌 되었든, 이제 다시는 음악을 하지 않으리라.
고등학교 2학년의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무렵 동아리방에서 정현은 다시는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마음먹었던 고등학교 1학년 5월의 행복했던 날을 떠올렸다.
***
“싫습니다.”
음악 선생인 화성태는 놀란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교 음대에 추천서를 써 준다고 말을 했음에도 학생이 거부했으니까 말이다.
“왜? 음대에 가려는 거 아니었나?”
안다. 내 목소리는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음색’이라 부르는 그것이 환상적이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
“음대에 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는 뭉뚱그려 대답했다.
그래서 화성태는 더 답답해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학생은 누가 봐도 음대에 가야 하는 학생이었으니까. 실용음악과가 아닌, 성악과를 간다면 전 세계 누가 오더라도 밀리지 않을 수준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테지.
나도 알고 있다.
변성기가 끝났던 중학교 1학년부터 줄기차게 들어 왔던 소리니까.
남들이 합창할 때, 나는 남들과 섞일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기에 독창을 했다. 그리고 그 독창으로 콩쿠르에서 수도 없이 많은 대상과 최우수상을 받았다.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내가 ‘카운터테너’부터 바리톤과 베이스까지 아우르는 음역을 지녔다는 걸 알았다. 거기에 독특한 음색은 덤. 많은 사람은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라고 평했다.
그걸 알려 주신 분은 어머니의 친구이자 X알 친구인 김수원의 어머니.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라고 알려진 한국 대학교의 성악과 교수.
독보적.
나는 이미 누군가의 추천서 같은 것 없이도 음대라면 전 세계 최고의 대학교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성과를 낸 그런 학생이다. 뭐, 이미 모든 메이저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군대도 안 가는 몸이니까….
작년 5월에 벨기에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을 했을 때는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귀화 요청까지 있었다. 특히 영국은 귀화 조건으로 작위와 왕실 명예 훈장까지 제안했다.
이 음악 선생은 그런 내게 숟가락이라도 얹고 자신의 이름에 명예라는 조미료를 뿌리고 싶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음대 말고 가고 싶은 학과는 있나?”
체념하기에는 조금 이르다는 느낌이었지만, 나의 주장이 완고했기에 조금은 굽혀서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음대 말고는 갈 곳이 없어 보이는 이 학생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그리고 그 주장에 틈이 보인다면 파고들어 갈 자세까지 취하는 것이 보였다.
“컴퓨터 공학과에 갈 겁니다.”
꼭 컴퓨터 공학과를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음대만 아니라면.
“컴퓨터 공학과?”
“예.”
“…그래, 알았다.”
당연하게도 대학교의 지원은 학생이 한다. 선생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추천 정도. 추천장을 수천수만 장을 쓰더라도, 아무리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더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학과에 가지는 않는다는 거다.
물론 관련된 분야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지 않는다면, 국제 콩쿠르를 우승하며 획득한 예술 체육요원 자격을 박탈하고 군대에 현역으로 보낸다고 듣긴 했지만 말이다.
예술 체육요원으로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를 판정하는 것은 조금 복잡하다. 중요한 건 대학 학과만으로 그 자격을 박탈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배움의 단계’라는 것과 콩쿠르의 성과는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학교에서 배운 음악으로 대회에 나간 것도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낸 성과에 0.1mg도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뭐 실제로도 음대에 갈 생각이 없기도 하고 말이지.
그는 등을 돌려 내 시야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이 일로 인해 중간고사에서 음악의 성적을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상관없다. 내가 예술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일반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까.
나는 이제 은퇴하고 평범하게 살기로 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는 항상 음악 소리가 들렸다.
국립 관현악단의 계약직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때문이었겠지.
그는 교향악단의 콘서트마스터는커녕, 정식 계약도 하지 못한 말석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간혹 연주회의 곡 선정에 따라 심포니 오케스트라급(70~120명 정도의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는 악단)이 아닌 체임버 오케스트라급(30~50명 정도가 연주하는 아담한 사이즈의 관현악단)의 연주회가 열린다면, 아버지는 무대에 올라갈 수도 없었다.
올라갈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았으니까.
주말에는 학생들의 레슨도 해야 했다. 말석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나오는 연주 급여는 정말 밥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나왔다.
하지만 국립 관현악단의 주 무대인 예술의 전당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야 했다.
그렇게 서초동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곳에서 월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국립 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자리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금전적으로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신기루와도 같은.
지금 생각해 보면 초,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학원을 열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지 않았을까?
하지만 슬프게도 아버지는 그 신기루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발로 내려올 용기가 없었다.
그 자리에 단 하루라도 더 앉아 있고 싶은 마음에 레슨이 없는 날에는 오히려 더 많은 개인 연습을 하곤 했다.
나는 나날이 피폐해져만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절대로 아버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거라 결심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피아니스트 지망생인 8살 많은 큰누나와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와 5살 많은 작은누나.
이 집안에서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이상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이 싫었다. 어머니가 그리는 그림은 내가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볼 수도 있었지만, 음악은 방문을 굳게 닫아도 계속 귀에 들려와 거슬렸다.
듣고 싶지 않아도 온종일 들려 오는 음악 소리에 집 밖으로 나가서 노는 것이 더 좋았다.
항상 악에 받쳐 연습에 연습만 거듭하는 아버지가 싫었다.
하지만 타고난 환경 탓일까? 음악적인 재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었나 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수도 없이 많은 음악을 들으며 자라왔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더더욱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다. 나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따위를 만져 본 적이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음악을 한다는 아버지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차 쇠약해져 갔으니까.
퀭한 눈과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빛. 나중에는 목소리마저 갈라져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적어도 그날까지는 말이지.
아버지가 국립 관현악단에서 쫓겨난 것에 비관하여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했던 그 폭풍이 몰아쳤던 6학년 겨울까지도, 나는 스스로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안의 수입이 반 토막 나면서 집세를 내기가 어려워지자, 가장 먼저 어머니의 직업이 바뀌었다. 동화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보험 외판원으로. 성과급으로 단기간에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보험 외판원으로 급하게 돈을 벌어야 했다. 음대에 다니는 큰누나의 학비와, 곧 고3이 되는 미대 지망생인 작은누나의 학원비. 그리고 집세까지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매일 개인 연습만 하는 대학생이었던 큰누나가 돈을 벌기 위해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인 레슨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큰누나는 피아노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개인 레슨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국내 최고의 음대를 다닌다는 타이틀이 아르바이트치고는 많은 돈을 안겨 주면서 생활이 조금 편해졌지만, 그로 인해 개인 연습 시간을 빼앗기고 집안의 재정적인 부담을 안게 되면서 ‘최고의 피아니스트’와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개인 연습 없이 콩쿠르에 나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혼란의 폭풍이 몰아치던 겨울,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변성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부터 국내 성악 콩쿠르와 세계 콩쿠르 가릴 것 없이 씹어먹기 시작했지. 18세 이하 주니어 콩쿠르부터 일반 콩쿠르까지 말이다.
그렇게 음악을 싫어하던 내가 왜 성악을 시작했냐고?
돈 때문이다.
대회 우승을 하면 돈이 들어왔으니까.
게다가 나는 운이 좋았다. 적어도 남들이 심사위원들을 돈으로 매수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학생 대회라는 이름이 붙으면 상금보다 쓸데없는 상품이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 학생 대회마저도 나에게는 필요했다.
하위 콩쿠르에 우승해야 상위 콩쿠르에 진출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위 콩쿠르는 상금이 더 컸고. 상금보다 공연 수익, 공연 수익보다 실황 앨범 수익이 더 컸다.
규모가 작건 크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나갈 수 있는 모든 콩쿠르에 나갔다.
국제 대회는 한국대 교수이신 친구의 어머니가 추천서를 써 주셨고, 국제 대회를 몇 번인가 우승하고 나서부터는 국내 대회의 운영 위원회에서 형평성에 맞지 않은 출전이라며 참가 신청을 거절했다.
다른 학부모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쳤다고 했던가. 국제 대회 우승을 몇 번 했었던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는 참가 신청을 할 때마다 울먹이며 ‘접수 거절을 할 수밖에 없어서 너무 죄송하다’는 협회 이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친구의 어머니는 서류상 나를 사사한 선생님 및 추천한 자격이 인정되어 50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종신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받은 콩쿠르 상금과 갈라쇼, 음반 수익을 모아 서초동을 벗어나 양재동에 집을 살 수 있었다. 그게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에 나는 큰누나에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서 국제 콩쿠르를 우승하고 나 대신 집안의 가장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너무 힘들다고 말이지.
누나는 개인 레슨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전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8살이나 어리지만, 집안에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 준 막냇동생을 위해서.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미 나는 집안의 금전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생계형 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음대와 미대의 등록금이 문과나 이과보다 비싸다는 걸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알 수 있었다. 누나들의 대학교 학비를 내가 내주어야 했으니까.
지겨워.
음악이 지겨웠다. 수도 없이 많은 콩쿠르에 나서며 불러야만 했던 레퍼런스들.
가곡, 성악곡 가릴 것 없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불렀다. 지겨워서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만 했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들이 다시 꿈을 잃어야 했으니까.
그때는 집 안에 불을 켜 놓더라도 어둡게 느껴졌다. 매일매일 우울했다. 콩쿠르의 갈라쇼에서 그 우울한 감정을 실어 가곡을 불렀더니 그 공연의 실황 앨범이 클래식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까지 성악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뭐 예고에 있는 선생들이 나보다 잘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잘 가르칠 거라는 기대는 이미 없었다. 대학교수였던 친구의 어머니조차 나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이 나를 어떻게 가르칠 건데?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5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던 날. 나는 울었다.
그때까지 우승했던 수많은 콩쿠르에서도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던 나였지만,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내가 가장이라는 부담에서 해방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우승 상금은 2020년 기준 2만 5천 유로. 한화로 약 3천 400만 원. 세금 떼고 뭐 떼고 하면 남는 돈이 누나와 나의 상금을 합쳐서 5,000만 원. 거기에 우승자 갈라쇼에 붙는 초청 비용과 공연 실황 앨범에 붙는 소득까지 합하면 대략 몇억은 넘으리라.
위상 높은 국제 대회치고는 상금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내가 수십 개가 넘는 메이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모인 돈은 꽤 컸다.
물론 상금보다는 갈라쇼의 공연 수익과 실황 앨범의 판매 수익이 훨씬 더 컸지만, 그 돈들이 콩쿠르 우승에서 비롯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내가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더는 콩쿠르로 돈을 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콩쿠르 일정 때문에 학교에 나가지 못한 날들이 나간 날보다 많지만, 콩쿠르는 학교에서 체험 학습 기간으로 인정해 주었기에 결석 처리되는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출석에 여유가 없었기에 오리지널 음반 취입 같은 거로 부가 수입을 노려볼 수도 없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나는 성악가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돈이나 명예 같은 거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니었다.
“자유다!”
우승자 명단에서 누나의 이름을 보았을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 전 세계의 신문 1면과 TV 뉴스에 보도되었다. 이후 내 이름이 올라오는 기사에 항상 박히는 흑역사가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 돈을 벌어다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퇴를 하면 더는 미디어에 노출될 일이 없을 테고.
큰누나는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국내 대회 우승자로 자격을 얻어 나갔던 쇼팽 콩쿠르에 예선 탈락,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도 예선 탈락을 할 정도로 국제 대회에서 운이 없었기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가 애매했었다.
그런데 대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나와 함께 나갔던 콩쿠르에서 큰누나가 우승해 버린 것이다. 연습하던 누나의 옆에서 내가 쉴 새 없이 했던 푸념 섞인 잔소리가 도움이 되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가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이지, 이제는 더는 나갈 수 있는 국제 대회도 없었는데….
나는 그렇게 원하던 인문계 고등학생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동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고, 작은누나는 대학교에서 편안하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큰누나는 피아니스트로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큰누나가 가장이니까.
그렇게 우리 가족들은 다시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내가 원하는 꿈에 맞게 평범하게 살 거라고 말이지.
그리고 이제는 음악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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