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03
102화
“이분이 뭐라고 하는 거야?”
어머니와 윤 교수는 비교적 쉽게 아서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작은누나는 알아듣지 못해 나에게 물었다.
진짜 신기한 게 영어 한마디도 못 하면서 무슨 배짱으로 해외에 나올 생각을 하는 건지….
“여자친구랑 여자친구의 할아버지가 오셨대.”
“어머! 정말?”
누나는 갑자기 가방을 열어 화장품을 손에 들며 나에게 물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야?”
“…….”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 주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인네가 왔다는데 화장을 왜 고치려고 하는 거야. 정말 뜬금없네.
나는 복도를 따라 현관까지 나가 둘을 맞이했다. 이전에는 응접실이나 거실에서 기다렸다면 이제는 먼저 나가서 맞아야 하는 입장이 된 것에 차이가 조금 느껴진다.
“좋은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정현 경.”
“미안해요. 말릴 수가 없었어요. 제 말은 전혀 들을 생각도 안 하시더라고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버트 경.”
보통은 딸이나 손녀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그런 놈팡이에 내 딸은 못 준다!’라는 게 국룰 아니었나. 이 아저씨는 그런 눈치가 전혀 없이, 너무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런던에서 왕립 음악원의 교수가 되실 거라고 하는데, 당연히 제가 축하를 해 드려야죠.”
“아, 그쪽이었나요?”
“그러면 어떤 이야기라고 생각하셨는지…?”
교수직 임용에 대한 이야기였구나. 나는 메건과 사귀게 된 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줄 알고, 혹시 알버트가 너무 기뻐하면 메건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완전 헛다리 짚었다.
그런데 이런 거로 직접 방문까지 해서 축하해 준다는 건 조금 이해가 되질 않는데?
“아닙니다. 아직 수락하지는 않았어요.”
“이런, 리처드. 이 친구가 저에게 거짓말을 했군요.”
“거짓말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가족들이 와있어서 그걸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오! 가. 족. 들. 이 와 계시다고요?”
이 아저씨 연기력이 눈에 띄게 부족하다. 아무래도 다 알고 온 것 같은 눈치인데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있는 사람 중에 누가 스파이인 거냐. 아서야? 아니면 사용인들 모두 스파이인 건가? 의심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서를 포함해 무려 스무 명의 사람들이 이 집 안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분이 응접실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험험. 이정현 경의 가족분들을 만나 뵙는 날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 알지 못했습니다.”
알버트. 티 나는 연기 그만 하세요.
그러고 보니 옷도 평소보다 신경을 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인 건가?
그나저나 사귄 지 이틀 만에 양쪽 집안의 사람들이 만나네…. 이러다가 헤어지면 어쩌려고 벌써 속도를 높이시는지….
메건의 할아버지가 왔다고 이야기하자 어머니와 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오는 것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현이 엄마 김지숙입니다.”
“저는 정현이 엄마의 친구 윤주란입니다.”
“저는 누나인 이정화예요.”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창백한 것에 가까웠던 메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히려 알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헛기침을 하며 인사를 했다.
“제 쪽에서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메건의 할아버지인 알버트 랭커스터입니다. 편하게 알버트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메건 랭커스터입니다.”
그저 고개만 까딱하는 인사가 아니라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어머니와 똑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이렇게 보니 기품이 넘치는 게 귀족은 귀족이구나 싶은 움직임을 보이는 두 조손.
사용인들이 가져다준 차와 비스킷들을 소파의 사이에 있는 티 테이블에 놓아두고 나가자, 알버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결혼 같은 것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정현 경이 워낙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질 않으셔서요.”
“…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것은 일부러 숨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의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메건의 아버지는 만나 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항상 할아버지랑 둘만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메건에게 물어보았다.
“메건의 부모님은요? 오실 거면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쁘셔서요. 저도 얼굴 보기가 어려워요. 어머니는 집에 계세요. 밖에 돌아다니는 걸 안 좋아하셔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하는 양쪽 집안의 어른들. 영어를 못 하는 누나는 간간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 건지 물어보며, 이곳의 분위기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화기애애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교수직을 수락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사 일도 이제는 기본 틀은 다 잡아 놓은 상태라 제가 신경 쓸 일이 많지 않기도 하고요.”
“다행입니다. 혹시나 LA로 가시게 된다면 메건을 보기 위해 매번 비행기를 타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을 것 같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LA로 오신다니?”
“연인이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니, 메건이 따라갔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런던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직접 이야기하시라고! 자꾸 돌려서 이야기하지 마시고.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한테 사과해!
한글이 아닌 영어로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마치 판타지 소설책에 나오는 음유시인처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돌려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런 현상은 상류층으로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
에릭이나 크리스와 이야기할 때는 정말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내놓고 하는 편이었지만, 알버트나 리처드와 이야기를 할 때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알아먹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당분간은 런던에 남아 있을 예정입니다. 이미 회사에도 이야기해 두었고요. 회사 일은 런던에 있는 사무실에서 처리할 겁니다.”
런던이 본사라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 사무실 달랑 하나에 직원도 몇 명 없었다. 다만 유럽 쪽의 저작권 문제 같은 것들이 있어서 유니버설 UK와 함께 그것들을 처리해야 했었다.
“저희 메건도 지금은 작곡 쪽의 일을 하고 있으니, 많은 가르침 주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할, 할아버지…!”
“제가 뭘 가르칠 게 있나요. 그런데 학교를 졸업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어떤 음악을 하고 계신가요?”
작곡과를 다니던 학생부터 줄곧 봐왔지만, 지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물어볼 걸 하는 후회가 잠깐 들기는 했지만, 또 까먹기 전에 물어봐야지.
“영, 영화 음악을 하고 있어요.”
“영화! 매력적이지만 어려운 길을 택하셨네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의외의 선택. 영화 음악은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도 대중음악 쪽에 손을 대는 편이 더 많았으니까.
이것은 아무래도 금전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쪽은 촬영 기간이나 개봉 일을 선택하는 것에도 아주 많은 조건들이 따르기에, 아무래도 대중음악과 비교해 정산이 늦고 금액도 적을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영화가 흥행한다고 하더라도 음악까지 인기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저작권 수익을 노리는 대중음악에 비해 기본 수임료를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니었고, 간혹 매절 판매를 요구하는 곳도 적지 않게 있었다.
“영화를 워낙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때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이 아이가 어릴 적에 영화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8mm 카메라도 사 주었었는데,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예술원이 아닌 음악원에 들어가더군요.”
그 이야기를 하며 알버트는 조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영화를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감독이 배우보다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배우가 도망갈지도….
“저는 우리 현이가 음악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질 못했어요. 어렸을 때는 그렇게 음악을 싫어했었거든요. 집에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게 싫다고 항상 밖에 나가 놀았었죠.”
“호오, 그건 정말 의외의 이야기로군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어머니의 말에 알버트는 깊은 관심을 드러냈고, 메건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뜬금없이 시작된 상견례 분위기. 어머니는 정말 특별할 것 하나도 없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정말 소설처럼 드라마틱하게 풀어놓으셨다.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아서에 의해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대화 무드가 끊어진 시간은 저녁 일곱 시 무렵.
“큰누나 상견례를 할 때도 이러셨어?”
“아니, 그때는 말 한마디 안 하던데…?”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은 누나에게 큰누나의 상견례 자리에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지 물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그저 이제 명절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될 것 같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더 압박감이 느껴진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친 식사 시간이 끝나자 어느새 시간은 밤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이 늦어 저희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초대해 드린 적은 없지만….
“저기…. 할아버님이 말씀하시길 저를 위해 런던에 남아 주시기로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아…. 별말씀을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는데? 어디에서 이야기가 와전된 거냐 이건.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알버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가족들과 상의한 결과 교수직을 수락하는 것에 무게를 실어 주었기에, 나는 리처드에게 전화해서 수락을 했다.
게다가 막 사귀기 시작한 메건을 두고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좋은 결정을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로써 영국 음악계는 더 큰 발전을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너무 거창하게 이야기하시는 것 같은데요.”
과연 곡 한두 개를 더 만든다고 해서 클래식계의 중심이 영국으로 넘어올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클래식의 중심은 독일의 베를린과 오스트리아의 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상황이었으니까.
[거창하다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클래식계의 중심에서 영국은 벗어나 있는걸요. 이정현 경이 있어 주신다면, 왕립 음악원을 중심으로 영국이 클래식계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겁니다.]리처드는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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