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09
108화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날짜를 잡는 건 이상할 것 같다고 하지 않았었니?]“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이럴 줄 알았으면 영국에 남아 있을 걸 그랬네….]어머니는 약혼하겠다는 나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에 남아있을 때 치르지 그랬냐며 타박했다.
분명 손녀 자랑을 하고 다니는 윤 교수 때문이 아닐까. 수원이가 딸바보인 것처럼 윤 교수도 손녀 바보였으니….
“내 집에서 진행하지 않고 메건의 할아버지 집에서 진행할 거예요.”
[그래? 엄마가 뭐 챙겨야 할 것은 없고?]“챙길 건 없는데, 약혼식에 건네줄 반지는 같이 골라 줘요. 이런 거 보는 눈이 없어서 고르질 못하겠네.”
[그런 점은 네 아빠랑 똑같네….]어머니는 뜬금없이 잊고 살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전화기에서 들려 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어간다. 이 오랜 시간 동안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는데, 오랜 침묵을 깨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닮은 점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다. 나는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닮지 않기 위해 큰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나들하고 같이 넘어오세요. 윤 교수님 쪽에는 제가 연락드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응, 그래. 잘 챙겨 먹고. 다른 것보다 몸 건강한 게 우선인 거 알지?]“네.”
마지막에는 걱정하는 말을 하는 어머니의 말에 평소같이 알아서 잘 챙기고 있다는 말 대신, 짧게 네라고 대답해야 했다.
번갯불에 콩 볶듯 진행된 이번 일은 사실 홧김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했다.
“아직 결혼은 무리인 것 같고 이참에 약혼이라도 할래요?”
“…없어.”
“네? 잘 안 들려요.”
“어이가 없다고요. 무슨 남자가 무드도 없이 그렇게 프러포즈를 해요?”
쫓기는 것 같은 마음에 조금은 서둘러서 말했던 것이 메건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주머니에 들어 있는 반지를 꺼내면서 말했던 것도 아니기에, 약혼식을 제대로 보란 듯이 치러 주겠다는 말을 하며 처음으로 메건을 안았던 어젯밤.
“아우 쪽팔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맴도는 어젯밤 메건과 나누었던 한인 타운에서의 대화가 나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들리는 음악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
“여기 보세요! 자 찍습니다, 하나둘!”
펑!
사진 기사가 다가와 메건과 나의 사진을 찍으며 온갖 포즈를 요구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이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 사람들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오늘같이 좋은 날에 그냥 넘어가지 꼭 그렇게 해야 해?”
나의 약혼식 때문에 미국에서 넘어온 크리스와 회사 사람들. 에릭은 공연이 잡혀 있어 갑작스럽게 잡힌 약혼식에 올 수가 없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참석하기로 했다.
덕분에 한국 스타일의 웨딩 화보를 남기려고 하는 나와 메건의 곁에는 시에스타를 비롯한 회사 사람들이 구경하는 중.
그 바깥에는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휴대폰에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야! 진짜였네. 이정현 경이 결혼한다!”
“이 멍청아! 약혼이라고. 결혼은 5월에 한다고 했잖아.”
“그래 약혼. 그런데 진짜 멋있다. 이렇게 성에서 지낼 거 아냐. 여기 성도 신부 쪽 집안 성이라며?”
“그것보다 저 드레스 봐봐, 너무 기품 있잖아. 저게 백 년도 넘은 드레스래.”
멀리 떨어져 있는 커플의 대화가 작게 귀에 들려 오면서 부담감이 배가되었다. 멋있는 포즈라도 취해 주고 싶었지만, 그런 포즈가 어울리는 몸이 아니라고.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야….”
“동양인에게 원숭이라고 하면 인종 차별인 거 알지? 그걸 본인한테 하는 거야?”
“젠장…. 나도 동양인이라고. 동양인이 동양인한테 하는 건 인종 차별이 아니잖아!”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버럭 했지만, 크리스의 표정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참던 크리스가 말했다.
“나도 내년에는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결혼하기 무섭네. 그 세상일에 관심 하나 없던 사람이 이렇게 막 소리를 치고 말이야.”
“결혼식은 진짜 조용하게 할 거야. 딱 가족들만 모여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런던이 아닌 랭커스터 공작가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랭커스터 성.
커다란 성의 대부분은 관광지가 되어 시간별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랭커스터가의 사람들이 지내는 별관 같은 느낌의 건물은 아직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 약혼은 랭커스터 가문의 내성에서 치러지지만, 웨딩 화보를 남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관광지가 되어 버린 외부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결혼식은 더 성대하게 해야죠!”
“…어서 오세요, 알버트 경. 아니 이제는 할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버트가 나와 크리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서도 그렇고 알버트도 그렇고 정말 어디에서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놀랄 기운도 없고.
“허허. 이정현 경에게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하지만 결혼식을 가족끼리만 하겠다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오히려 폐하께 말씀드려서 버킹엄궁에 전 국민을 모아 놓고 싶을 정도니까요!”
“그건 좀 참아 주세요. 지금 이렇게 사진 찍히는 것도 저에게는 너무 버겁거든요.”
랭커스터는 런던에서 몇 시간이나 와야 하는 조금은 외진 곳임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 런던에서 결혼식을 진행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켜볼지 감도 오질 않았다.
“메건이 입고 있는 저 드레스 말입니다. 제 반려자가 결혼식에 입었던 드레스입니다. 그녀 역시도 자신의 할머니에게 물려받았죠. 적어도 150년의 역사가 담긴 드레스입니다.”
“그런 드레스를 결혼식이 아니라 약혼식에 입히시는 건가요? 조금 아까울 것 같은데….”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메건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요. 제가 입어 달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뜬금없는 정보에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감사드립니다. 알버트 경.”
알버트의 말에 메건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순백의 드레스라고 불리는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조금은 베이지색처럼 보이는 기품 있는 드레스.
치마는 화려하게 레이스로 여러 층이 쌓여 있는 것 같았고, 상체는 몸매를 드러낼 수 있도록 달라붙어 쇄골이 드러나는 부분까지 가려 주었다.
머리 위에는 땅까지 닿는 하얀색 면사포가 고정된 화관을 쓰고 있는 아름다운 메건의 모습.
정말 다시 봐도 현실 같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여자와 약혼을 진행한다는 것만으로도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침 좀 닦지 그래?”
“…무슨 침을 흘렸다고 그래.”
아이의 손을 잡고 약혼식에 참석한 수원. 메건을 정신없이 쳐다보다 수원이 말을 거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혹시나 정말 침을 흘렸나 하는 마음에 손을 입가에 가져가 봤지만 침 같은 건 느껴지질 않았다.
“아빠. 저기 공주님 있어요!”
“그래그래. 지유야, 저기 예쁜 공주님이 여기 있는 못생긴 삼촌이랑 결혼한대.”
“약혼이라고….”
“약혼만 하고 결혼은 안 할 거냐?”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드레스를 입은 메건을 가리키며 공주라고 말하는 수원의 딸 지유를 바라볼 때, 전처럼 부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귀여운 딸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수원은 안쪽에 미리 자리를 잡은 런던 필하모닉 교향악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런던 필하모닉은 왜 다 온 거야?”
“내가 불렀어. 곡 연주 좀 해 달라고.”
“진짜 돈 엄청나게 들이는구나. 약혼식에 교향악단을 부르고 말이야.”
“그런 거 아냐. 이번에 협연하기로 한 곡이 있거든. 약혼식에서 연주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수고비는 당연히 줘야지.”
“또 곡 썼어? 너 진짜 엄청나다. 리메이크 앨범에도 새로운 교향곡 써서 넣었었잖아. 그 앨범 발매한 지 지금 2년도 안 지났다고.”
지금 설명하기에는 조금 귀찮은데 수원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최근에는 머릿속에서 나오는 음악들을 적당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었는데, 이번에는 멈출 수가 없더라고.”
한국을 떠나면서 들려 왔던 대부분의 음악은 내가 적당히 제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려 왔지만, 이번에 들려온 곡은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으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불가항력이었다. 마치 고등학생 시절에 불면증을 겪던 때처럼.
“그럼 이번에 만든 곡도 앨범으로 발매하는 거야?”
“이미 제목도 지었어. 발매는 유니버설에서 유통까지 해 줄 거고.”
“네가 제목을?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제목까지 지었대.”
“그렇게 됐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더라. 그 제목이 아니면 안 된다는 느낌이 왔고.”
제목이 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꼭 그 제목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런던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아닌 리처드가 공식적으로 마지막 지휘를 맡게 된 나의 새로운 곡.
이번 약혼식에서 첫 발표를 하고 다음 주에는 스튜디오 녹음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정현 경 준비가 되었습니다. 자리해 주시지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서. 수원아, 그러면 자리에 앉아 있어. 나는 가 볼게.”
“그래. 조금 이따가 보자.”
아서에게 이끌려 간 곳에는 메건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내성까지 이어진 이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 길가에 놓인 의자들에 앉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단상까지 가면, 오늘 약혼식이 끝이 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수십 미터의 거리를 걸으면 될 뿐이니까.
“왔어요?”
“아, 네….”
밝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메건.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자,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외성과 내성의 경계를 가로 짓는 돌로 만들어진 문 앞에 둘이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 조금은 그럴싸한 느낌이 아닐까.
“아버지가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버님의 얼굴은 본 적도 없네요.”
“저도 몇 년에 한 번씩 볼 수 있을 정도예요. 워낙 바쁘신 분이라….”
어머님의 얼굴은 약혼식을 진행하며 본 적이 있지만, 아버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 잊고 있었는데 메건이 깨닫게 해주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하객들이 모여 있을 내성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댕 댕-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뒤에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
그 뒤를 이어 화려한 선율을 수놓는 현악기들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온다.
“슬슬 들어가 볼까요?”
“네. 넘어지지 않게 제 손 잘 잡아 주셔야 해요.”
메건은 나를 보며 밝게 웃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하얀색 레이스로 수 놓인 장갑으로 감싼 손을 잡고, 하객들이 기다리고 있을 내성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랭커스터 성안에 울려 퍼지는 ‘메건의 결혼식’ 멜로디에 맞춰 한 걸음씩.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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