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11
110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내 전화번호는 꽤 보안이 잘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미친 듯이 접근하던 기자들조차 내 번호는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아내어 직접 전화를 한 것일까?
[울프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하.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가요? 유럽 클래식 연합에서 이정현 씨를 모시고 싶어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이 거지 같은 울프 놈들. 내 전화번호를 외부에 공개를 해 버렸네?
하도 외부 사람이 접촉하려는 일이 많아서 웬만하면 내 전화번호가 아닌 회사 번호를 공개하는 편이었는데, 울프 쪽에서 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전화번호를 공개해 버렸다.
나중에 두고 보자. 제대로 항의해 줘야지.
“아, 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연말에 있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특별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교도 연휴 기간에는 쉬지 않으십니까?]“크리스마스 기간은 가족들하고 보내는 기간이잖아요….”
영국뿐만이 아니라 서구권 나라들 대부분이 가장 큰 명절로 여기는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연인과 보내는 시기라고 여기는 한국과는 다르게 가족들과 보내는 기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2월 23일을 기점으로 약 2주간의 휴가가 시작된다. 이 시기를 보통 홀리데이 기간이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의 회사가 휴무에 들어가고 학생들도 방학으로 여기는 편.
2주라는 시간은 조금 길지만,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한국의 설날이나 추석처럼 여겨졌다.
내가 미쳤냐, 그런 기간에 일을 하게. 그런 기간까지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벌어 두었다.
[험험.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정현 씨의 곡들을 듣기 위해 많은 분이 가족을 동반하여 방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만…?]“아뇨. 저는 제 가족들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좋겠네요.”
[이익…!]“그러면 끊겠습니다. 좋은 연말 되시길….”
연휴 기간이 한 달도 채 남질 않았는데 이제 와서 섭외하려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질 않았지만, 솔직히 어디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쉬고 싶은 생각이었다.
남들 다 쉴 때 일하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나는 지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섭외한다며 부를 이유가 전혀 없잖아. 내가 간다고 해서 크게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한 전화였다.
“전화번호부터 바꿔야지….”
“헛! 교수님 전화번호 바꾸시게요?”
“네, 이상한 데에서 전화가 와서 기분이 나쁘네요.”
“어디에서 왔는데요? 뭐래요?”
알렉산드라는 전화번호를 바꾸겠다는 나의 말에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말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있던 경호원이 갑자기 일어나 나에게 말했다.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자리를 비우지는 말아주십시오.”
“아, 네.”
그는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였고, 항상 무뚝뚝했지만 나를 조용히 잘 챙겨 주던 그에게 그런 음색을 처음 들어 보아서 그런지 어색했다. 그저 알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날려 버린 것은 알렉산드라였다.
“아! 맞다! 교수님. 2학년에서 쇼팽 콩쿠르 예선 2차를 통과한 학생이 있대요! 교수님 수업 듣는다던데요?”
“그래요?”
그런 건 별로 관심 없다. 누가 콩쿠르를 통과하건 말건 내가 알 게 뭐야. 내가 거기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름이 뭐라더라…. 아! 에이드리언! 에이드리언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같은 학년이 아니라서 성은 잘 모르겠지만.”
“잘됐네요. 쇼팽 콩쿠르는 상위 입상을 하지 않고 예선 통과만 하더라도 꽤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니까.”
“관심 좀 가져 주세요!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생이잖아요!”
“예이, 예이.”
열을 올리는 알렉산드라의 말에 나는 오히려 진이 빠졌지만,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의 업적이라며 치켜세워 주려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알렉산드라가 쓰고 있는 각진 뿔테 안경 뒤에 숨어 있는 연녹색 눈빛이 반짝반짝하는 것이 보였다.
주인만 졸졸 쫓아다니는 저 강아지 같은 눈빛. 귀찮네, 정말.
***
“뭐라고 합니까? 바로 오겠다고 하죠?”
“제깟 놈이 유럽 클래식 연합이 부르는데 오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하하하.”
“아무리 바빠도 우리가 부르면 와야죠!”
“…….”
자신만만하게 이정현을 섭외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유럽 클래식 연합의 회장 로미오 몬테규. 그는 정현과의 전화 통화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것을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회의실 밖에서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다들 의기양양하게 유럽 클래식 연합을 치켜세우는 말들을 해 댔기 때문이다.
“하. 하.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고 로미오의 속은 타들어 갔다. 이정현을 섭외하지 못한 것이 알려지면 이들이 길길이 날뛰며,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유럽에서 클래식의 중심지가 아니라 여겨지는 이탈리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로미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쉽게 외울 수 있도록 개명도 하고, 독일에 이민까지 하며 꾸준한 활동을 하며 쌓아 왔던 명성들로 올라온 유럽 클래식 연합의 꼭대기였다.
그 연합의 회장이 실제로 큰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세계 클래식의 중심의 우두머리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는 없지!’
눈앞에 보이는 동료인 척하는 경쟁자들을 바라보며, 로미오 몬테규의 눈이 타올랐다.
***
2033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가 벌써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학교는 2주간 아무런 수업도 없었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면 이정현 경.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십시오.”
“네! 연휴 끝내고 뵙겠습니다.”
그렇게 아서와 사용인들도 모두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떠나고 경호원과 둘이 남은 저택.
항상 북적이는 것 같던 분위기의 집이었는데, 모두가 떠나 버리니 휑한 느낌이 들었다.
“경호원 씨는 휴가 안 가세요?”
“안 갑니다.”
“가셔도 괜찮아요. 저 집에서 나갈 생각도 없으니까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예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갈 곳이 없습니다.”
경호원은 내게 이름도 말해 주지 않을 정도로 대화에서 자신의 여러 가지 정보들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크리스마스에 갈 곳이 없다는 말에는 쓸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랑 같이 보내요. 저도 갈 곳 없으니까.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여기처럼 큰 명절 같은 게 아니거든요.”
“네.”
하지만 경호원과 함께 있는 것은 전혀 재미가 없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같이 놀아 주지도 않았으니까.
지이이이이-
초인종이 울렸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내 옆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보이질 않았다.
와, 저 몸놀림 진짜 대박이네…. 눈 깜박할 사이에 거실 소파에서 사라졌다.
인터컴으로 보이는 영상으로 누구인지 파악했는지 경호원이 거실로 돌아와 말했다.
“이정현 경. 메건 양이 오셨습니다.”
“메건이 왔다고요? 가족들이랑 보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왔지?”
당연히 크리스마스에는 랭커스터로 이동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나를 찾아올 줄이야.
현관으로 마중을 나갔다. 아서가 없으니 생각보다 불편한 게 많았다.
가장 먼저 건물의 뒤편에 있는 정원과 맞닿아 있는 거실에서 현관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산타모니카의 집에서 보냈기에, 이 저택의 거대함을 느낄 수가 없었는데 말이지.
새삼스레 혼자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큰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거 청소하는 사람이 죽어나겠네….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 1층에 있는 각종 방을 지나 현관에 도착했다.
아무리 왕이 쓰던 집이라고 하더라도 집 크기가 너무한 거 아닌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현관문을 열자, 메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저 왔어요!”
“잘 왔어요. 안 그래도 저 혼자 있어서 쓸쓸했거든요.”
“…저도 있었습니다만….”
평소에는 없는 사람처럼 자기표현을 안 하던 경호원이 끼어들었다. 메건에게는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요, 없는 사람 취급해서….
집에 들어온 메건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거실에 있는 소파 위에 내려놓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뒤에 있던 나를 향해 말했다.
“장을 한번 봐 와야겠는데요. 먹을 건 많은데 이미 전부 조리가 된 상태라….”
“그러면 그거 데워 먹죠.”
“오늘은 제가 만들어 드리고 싶었단 말이에요.”
“아….”
그건 생각 못 했네. 아서가 음식 만들기 귀찮아하는 나를 위해, 레토르트 식품처럼 미리 조리해서 진공포장을 해 놓고 떠났다는 것도 몰랐지만 말이지.
그렇게 메건의 손에 이끌려 오랜만에 장을 보러 나왔다. 마스크를 하고 목도리까지 하며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무장을 한 채.
운전기사 아저씨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라 경호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마트로 향하는 길. 보이는 대부분의 상점은 셔터를 내려 놓은 상태였다.
“아니, 이 사람들은 장사 안 하나…?”
“홀리데이 기간인데 가족들과 보내야죠. 항상 장사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이런 때가 더 많이 팔 수 있는 기회 아니에요? 영국에서 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런 건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한국과는 다르게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기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이 시기에 상점들 대부분이 영업하지 않는 것.
이런 인식들이 한국인과는 아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는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라며, 설날이나 추석에도 가게를 여는 곳이 많았으니까.
“대형 마트로 가요. 재료 사다 맛있는 것 해 줄게요!”
“그래요. 대형 마트는 안 닫았겠죠.”
다행히도 문을 열어 놓은 대형 마트지만, 이곳에도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영업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출입구에 붙여 놓은 것이 보였다.
“다행이네요. 하루 이틀만 늦었으면 아무것도 못 살 뻔했어요!”
“하하. 얼마나 맛있는 걸 해 주려고 이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거예요?”
평소보다 높은 텐션으로 음식 재료를 고르는 메건의 뒤에서 카트를 끌어 따라갔다.
랩으로 포장된 식자재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이건 왜 비싸지?”
“비싸요? 그렇게 비싼 것 같지는 않은데?”
“똑같아 보이는데 옆에 있는 것보다 50펜스나 비싸잖아요.”
50펜스면 800원 정도. 좋은 집안 아가씨라 가격을 이렇게 따질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의외로 약간의 가격 차이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면 그냥 사도 되는 것 아닌가요? 큰 차이도 아닌 것 같은데.”
“…저 대학교 들어가면서 빌렸던 학자금도 아직 못 갚았다고요…. 이정현 경에게는 더 좋은 걸 사서 만들어 주고 싶지만, 조금이라도 아껴야 해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가격은 조금 저렴할지 몰라도 맛있을 테니까.”
“학자금을 빌렸어요? 부잣집이잖아요.”
“집이 부자지, 제가 부자인 건 아니니까요.”
그냥 부잣집 아가씨로만 보였던 이미지였기에 굉장히 의외였다. 메건은 고등학교 졸업한 뒤부터, 집에서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영국의 대학 제도는 3학기 3년. 총 9학기 동안 집에서 한 푼도 받지 않고 살았다는 것. 그리고 졸업 후에 그 돈을 할부로 갚는 중이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가요? 그게 보통인데요.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나라면 아무리 돈이 없어도 내 딸이 학자금을 빌리게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은데, 메건의 집은 돈이 엄청나게 많은 집안이면서도 돈을 안준다니…. 이게 바로 컬쳐 쇼크인가?
음식 재료들을 고르며 메건의 몰랐던 부분들을 많이 알게 되었던 그때.
타타타탁-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지켜보던 경호원이 갑자기 달려와서 조용히 내게 물었다.
“이정현 경, 혹시 크리스마스 공연으로 베를린에 방문하기로 한 적이 있으십니까?”
“네? 제가 거길 왜 가요. 그런 적 없어요.”
“내일부터 3일간, 베를린에서 이정현 경의 이름을 걸고 공연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름을 걸고 공연을 한다고?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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