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13
112화
메건의 손에 이끌려 오게 된 랭커스터. 성의 입구부터 심어진 나무들과 현관문까지, 모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을 누군가가 벌써 빗자루로 한차례 쓸어 낸 듯 깨끗했고, 앙상한 나무들과 상록수들이 뒤섞여 성의 현관문까지 이어진 길.
나무들 위에 각종 장식과 별, 그리고 반짝거리는 전구들이 뒤덮고 있는 모습에서 전기세가 걱정되는 건 나뿐일까.
현관문에도 솔방울과 붉은색 구슬들이 잔뜩 붙은 작은 화환이 붙어 있었다. 돌담으로 만들어진 성의 입구부터 커다란 현관까지 어디를 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배어 있었다.
“저희 왔어요!”
큰소리를 치며 들어가는 메건의 뒤를 따라 들어간 현관문을 지나 바로 보이는 로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에서 무슨 큰 파티라도 하는 거예요?”
“아뇨? 파티가 아니라 가족 모임이잖아요. 그렇지만 올해는 조금 힘을 주셨네요. 아마 이정현 경이 온다고 했기 때문일 거예요.”
온 집 안을 쇼핑몰의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꾸미려면 대체 몇 명이 필요한 걸까. 랭커스터가의 성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그런 쪽이 더 걱정되었다.
나보고 하라 시켰다면 힘들다고 그만둘 것 같을 정도로 꾸며져 있었으니.
집 안 곳곳이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정현 경.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버트 경. 하마터면 혼자 집에서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뻔했어요.”
알버트는 로비까지 나와서 나를 반겨 주었다.
미소를 지으며 알버트의 말에 대답해 보았지만,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나는 솔직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분홍색 장미꽃이 수 놓인 붉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0이 다 되어가는 백발노인이 정열적인 붉은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알버트의 눈은 웃음을 참느라 자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처럼 붉게 바뀌었을 나의 얼굴보다, 자신을 찾지 않았다며 삐친 척을 하는 메건을 향해 있었다.
“할아버지, 저는 안 보이시나 봐요?”
“원, 이정현 경은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처음이지 않니. 이 정도는 이해해 주려무나. 당연히 우리 예쁜 손녀도 보이지.”
“알았어요. 올해는 좀 화려하게 꾸며 놓으셨네요?”
메건은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며 자연스러운 손길로 외투를 벗어 사용인에게 건넨 뒤, 알버트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나의 외투까지 가져간 사용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두 손에는 조금 전 알버트가 입고 있던 붉은 스웨터를 들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이정현 경을 위해 작은 사모님이 만드신 스웨터입니다.”
작은 사모님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아마도 메건의 어머니겠지.
“…설마 조금 전 알버트 경이 입었던 그 옷과는 다른 거겠죠…?”
“같은 겁니다.”
아주 약간의 동요도 없이 같은 옷이라고 말을 해 주는 메이드.
순간 ‘이거 유니폼인가? 이 집에 있으려면 이 옷을 꼭 입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입구부터 보였던 몇 명의 사람 중에 알버트 말고 이 옷을 입은 사람은 기억나질 않았다.
두 손으로 옷을 들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뒤로 커다란 액자 안에 보이는 그림은 붉은색의 장미꽃이 보였다.
그리고 메이드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 가문은 그 가문을 상징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붉은색이 우리 랭커스터 가문을 상징하는 색이고, 붉은 꽃은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입니다.”
꿀꺽.
“가문의 문장이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영국의 귀족 가문은 모두 문장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 가문의 문장이 무엇인지는 몰랐던 것이 그 이유.
사슴이라든가 사자나 독수리 같은 것은 보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장미라니.
그러고 보니 중세 시대의 영국에는 장미 전쟁이라는 게 있었다고 했던가. 그 전쟁의 이름이 장미 전쟁으로 붙었던 것이 가문의 상징이 장미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알버트가 이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이해되었다. 이런 말을 듣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실례가 되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붉은 옷을 입고 계세요? 라든가 꽃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네요? 같은 말을 했겠지.
그랬다면 중세 시대처럼 우리 가문을 무시한 것이냐! 라며 장갑을 던진다든가….
내 머릿속의 상상력이 제멋대로 폭주하는 것을 메이드가 넘겨준 스웨터의 감촉이 두 손에 느껴져 멈출 수 있었다.
캐시미어 같은 고급 실을 사용해서 만든 스웨터인지 보기보다 감촉이 정말 부드러웠다.
“셔츠 위에 입어 주시면 됩니다.”
그 짧은 말을 남기고 메이드는 사라졌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알버트와 커플룩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네….
메이드가 말한 대로 셔츠 위에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고 입은 스웨터는 몸에 꼭 맞춘 듯 잘 맞았다. 마치 줄자로 몸의 치수를 모두 잰 것처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인지 옷을 입자마다 다시 나타난 메이드. 그녀는 내 손에 들고 있던 카디건을 받아 챙기더니 감정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입니다.”
“아, 네….”
이 붉은 스웨터를 입으니 뭔가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따라오라고 말하는 메이드를 따라 도착하니 나처럼 붉은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다.
알버트와 메건 그리고 메건의 부모님까지.
다행히도 알버트와 둘만 입는 커플룩이었다면 부끄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단둘이 입은 것은 아니었다.
“너무 잘 어울리네요! 이 옷은 우리 가족들끼리만 입는 옷이에요. 패밀리룩이죠!”
“옷이 딱 맞네요. 감사합니다, 랭커스터 부인.”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반겨 주는 메건이었지만, 옷을 만들어 준 것이 그녀의 어머니라고 했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머 별말씀을요. 아버님의 비서인 필립이 사이즈 표를 가져다 주어서 다른 분들의 것과 함께 만들었답니다. 다행히 잘 어울리네요.”
“아, 필립.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잊고 있었네요.”
프레스턴에서 런던으로 올라오고 나서 맞춤옷을 가져다 준 이후로 본 적이 없는 그 필립.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사는 거지?
“이 옷은 우리 랭커스터 가문의 상징 같은 겁니다. 옛날 선조들이 입었던 옷은 제복이었지만, 요즘 제복을 입을 일은 많이 없어서 스웨터로 개량을 했죠.”
“이정현 경도 우리 가문의 옷을 입을 것이 아니라, 가문의 문장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버님?”
가문의 문장이라니…. 가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게 너무 가혹한 주문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왼쪽 가슴에 자수로 새겨진 붉은 장미 문양을 다시 한번 보았다.
“아닙니다. 가문의 문장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아니면, 저희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가족이 될 사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상징이라니. 한국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서, 어떤 것을 상징으로 삼을지 떠오르지도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이정현 경.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네?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지…?”
“이정현 경이 런던에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과 말입니다.”
“경제적 효과요?”
메건의 아버지가 꺼낸 이야기는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런던에 돌아와서 지낸 시간이 지난 3월부터 9개월은 되었던 것 같은데, 그런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최근 많은 경제학자들이 런던에서 발생하는 관광 수입의 많은 부분이 이정현 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1년간 음악 관광을 오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었는데 그것을 ‘이정현 효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애초에 그런 걸 한 사람이 만들 수가 있는 거였나요?”
너무 규모가 크다. 내가 혼자서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 내 이름을 붙였다는 것에 조금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라고 하더군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죠.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큰 것 같은데….”
“유럽 연합에서 영국이 빠진 뒤 줄어가기만 하던 관광 수입이, 이정현 경이 런던 필하모닉과 신곡을 발표한 후부터 늘어나기 시작했거든요.”
메건의 아버지, 대니얼은 그 ‘이정현 효과’를 이야기하며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약혼식에서 처음 보았던 메건의 아버지는 굉장히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대화를 많이 해 보지는 못했었는데, 이렇게 가족 모임 자리에서 만나 보니 그렇게 무뚝뚝하지만은 않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머리가 금발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잘생긴 제임스 본드 같은 느낌?
이 집안의 사람들이 전부 미남 미녀라는 것이 새삼스럽지만 와닿았다.
그런 미남 미녀 네 명이 나만 바라보며,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크리스마스이브….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이정현과의 연락을 지속해서 시도하던 로미오의 비서는 그렇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번호를 바꿨는지 전화를 걸어도 없는 번호라는 말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에잇! 차를 준비해. 런던으로 간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런던으로 가시겠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 전화를 안 받는데.”
로미오는 홧김에 런던으로 가려 했지만 크리스마스이브 당일에 운행하는 비행기표를 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귀향 열차표를 설날이나 추석 당일에 끊는 것과 같은 일이었으니까.
“남아 있는 표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내가 직접 전화까지 했는데 사진 한 장 못쓰게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냐?”
비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모시는 회장은 이정현의 사진을 당연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베를린의 번화가 쿠담 거리에 있는 작은 사무실은 로미오가 내지르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 때문에, 쿠담 거리 다른 곳의 화기애애한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와는 상반된 거친 기운이 휘몰아쳤다.
로미오는 이정현의 사진을 사용하면 런던의 그 효과처럼 꾸준하게 공연 티켓이 팔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더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것에 분노했다.
“어떻게 해서든 소송만은 막아야 해! 이미 예산이 모자란다고!”
“…이정현이 소송 취하를 해 줄까요? 지금까지 해 온 수많은 소송에서 합의했던 기록도 없는데 말이죠.”
답답한 공기로 가득 채워졌던 사무실의 분위기에 숨이 막혀가는 비서가 참지 못하고 로미오에게 한마디를 했다.
이번 공연으로 부족한 운영비를 공연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 충당하려 했었지만, 이번 연휴가 끝이 나면 법원에 출석해야 하는 상황.
그 소송의 결과에 따라 이익금을 모두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미오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어떻게든 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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