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24
123화
아무래도 나는 중세 시대부터 영국이라는 나라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당연히 오만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것처럼 권력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 조금 갖고 있다고 더 갖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투자계의 큰손들이라고 해도 어떻게 보면 그냥 한량들이네요. 할 일 없어서 놀러 나온.”
“귀족의 의무를 다한다면 모두 괜찮습니다.”
의무는 또 뭐야. 귀족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혹시 나도 작위를 받으면 무언가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다지 받고 싶지 않은데….
“나라가 위험할 때 가장 앞에 나서는 것이 귀족의 의무니까 위험해지기 전까지는 의무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노는 한량이랑 다를 바가 없죠.”
“어허, 메건. 그렇게 말하면 이정현 경이 귀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으시겠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100년이 넘도록 위험에 처한 일이 없어서 지금 저 사람들 중에는 의무 같은 걸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요.”
위험하기 전까지는 해야 하는 것이 없다니 오히려 좋아.
나는 또 뭔가 대단한 것을 의무로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위험해졌을 때 가장 앞에 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 언제 위험이 닥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쓸 것이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험험. 아무튼 이들은 대부분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약 같은 불법적인 것에 손을 대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 따라올 수 있으니, 음악이나 영화를 보면서 술이나 고급 시가를 즐기는 것이지요.”
“그러면 암투 같은 건요? 영화를 보면 자주 나오곤 하던데.”
“귀족 사회의 암투라면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합니다. 뭐 예전처럼 결투를 하거나 죽고 죽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업체의 소유권을 다투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알버트의 눈빛이 아련해지며 옛날이야기를 손자에게 해 주는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설마 결투를 했다고 하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건가 지금?
솔직히 이 사람들이 나를 먹잇감으로 볼 수 있다는 말에서 암투나 권력 다툼 같은 것을 떠올렸던 것이 사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아닌 순수한 연예인을 바라보는 팬의 시각이라면 그럭저럭 버틸 만할 것 같은데.
나는 알버트와 대화를 마치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 커다란 홀 안에 보이던 사람들의 시선들이 그때처럼 위압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저 눈빛이 시기나 질투가 아니라 팬심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면 귀여운 시선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저랑 같이 춤 한 번 추시죠.”
“추, 춤?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는데요.”
“이런 건 원래 남자가 리드해야 했다고요. 그렇지만 요즘 시대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리드할게요.”
가슴이 파인 매력적인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메건이 윙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 홀의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인파 사이로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춰 보는 춤.
귀에 익은 현악 5중주의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브람스의 우아한 선율을 앞세운 .
첼로를 손으로 튕겨 만들어 낸 리듬 위에 바이올린의 활이 멜로디를 얹는 구조를 갖는 왈츠는 짧고 쉬운 곡이었다.
느린 멜로디가 반복되기만 하는, 악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이 주로 배우는 곡.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연주하는 곡들은 대부분 내가 알고 있겠지만, 빠른 곡이었다면 리듬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
곡이 시작되는 멜로디가 들려 와 메건과 마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 손을 마주 잡아 보지만, 춤을 추는 것과 음악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윽!”
“미안해요….”
“보통은 여자들이 남자의 발을 밟는데….”
“치마에 가려져 발이 안 보였거든요 미안해요 정말….”
낮은음에서 시작되어 높은음으로 넘어갔다 다시 낮은 음으로 내려오는 반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곡이었다. 그런 단순한 반복 구조에서 첫 멜로디의 음이 변화하기 전부터 나는 발을 밟아 버렸던 것이다.
앞으로 들려올 곡의 멜로디를 모두 알고 있지만 스텝을 밟아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
박자에 맞춰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며 메건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내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홀 안의 다른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을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말이지.
그렇게 메건의 발을 서너 번을 더 밟고 나서야 짧은 왈츠가 끝이 났다.
“승마 레슨 말고 댄스 레슨도 넣어야겠네요. 이래서야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추자고 말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세요.”
“부끄럽네요….”
웃음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 메건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기분 나빠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선생님께는 깍듯이 대해야 하는 것 알죠?”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나요?”
“지금 그 선생님과 함께 계시잖아요. 이래 봬도 네 살 때부터 춤을 배워 왔다구요.”
“아, 메건이 가르쳐 준다는 거구나.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솔직히 내가 춤을 이렇게 못 출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리듬감과 멜로디 감을 갖고 있다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춤을 출 때는 멜로디가 전혀 귀에 들려 오지 않았다.
메건은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얇은 허리 위에 작은 주먹을 올려 자신감이 넘치는 자세를 하며, 자신이 직접 가르쳐 줄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신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모습.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다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춤을 추며 파김치가 되어 버린 나는 더 이상 춤을 추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홀의 중앙에서 벗어나 외곽에 있는 테이블로 돌아오자 알버트가 말을 꺼냈다.
“파티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이정현 경. 제가 파트너를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알버트 경…. 시범 한번 보여 주세요.”
“레이디 메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으… 닭살….”
알버트는 60세가 넘는 평생을 귀족으로만 살아온 사람. 가벼운 말 한마디로 메건에게 춤을 청하며 내미는 손에 기품이 느껴졌다.
물론 그 손을 맞잡는 메건은 그리 썩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나는 알버트의 중후한 목소리를 참 좋아하는데 메건은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느낌과는 완전 상반되는 느낌이었지만, 둘의 춤은 결코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영국의 파티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선율.
왈츠의 뒤를 이어 흘러나온 음악이 바로 탱고였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의 아름답고 우아한 선율로 시작해서 반전 있는 강렬한 멜로디로 변하는 탱고의 고전 카를로스 가르델의 ‘Por una Cabeza’.
빠라바라 빠밤~
부드럽게 내리긋는 활에서 피어나는 음악이 춤을 추기 전에 마주 보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감쌌다.
시선을 마주치며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리듬을 타며 화려한 움직임으로 수놓았다.
따단 딴딴-
피아노의 격동적인 반전 멜로디가 들려 와야 하는 부분에서 첼로 줄을 손으로 튕기며 만드는 음도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현악 5중주라 반전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베이스를 연주하고 나서 활을 손에 쥐고 그 손가락으로 튕겨내는 전환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아무래도 첼리스트의 실력이 상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전체를 바이올린이 이끌어가는 곡임에도 첼로의 음이 곡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반전 이후에 화려하게 바뀌는 탱고음에 사람들은 더욱 격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춤을 췄다.
그들의 움직임은 긴 치마를 입어 춤을 추기에는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인식을 모두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파티 장소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들과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모습만 눈에 담아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파트너를 빼앗기셨군요.”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서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라고 보기에는 허스키한 처음이고 남성의 목소리라고 보기에는 고음이 될 것 같은 목소리.
“빼앗겼다기보다는 제가 춤을 춰 본 적이 없어서 시범을 보여 주시는 겁니다.”
“천하의 이정현 경이 춤을 춰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반가워요, 저는 리버풀의 메르디스라고 해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레이디 메르디스.”
나이는 40 정도 되었을까. 고혹적인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짙은 버건디 드레스를 입고 머리 위에도 역시 같은 색의 레이스 장식을 달고 있었다.
머리 장식 사이로 보이는 연한 갈색 머리가 의외로 잘 어울리는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나보고 싶다고 알버트 경을 졸라도 연락조차 하게 해 주질 않았는데 이제서야 만나 보네요.”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무슨 일로…?”
나의 물음에 손에 쥔 와인잔에서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메르디스는 그녀의 자극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악가를 만나고 싶은 이유는 하나뿐이죠. 음악. 다른 이유가 있을 필요가 있나요?”
“개인의 의뢰를 받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만…?”
“음악 제작에 대한 의뢰가 아니에요. 저도 부탁받은 게 있어서 말이죠.”
“부탁이요?”
이게 영국에서 상류층을 만나게 되면 한국 사람의 피가 끓는 부분이다.
본론부터 이야기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을 길게 늘이고 돌려 이야기하는 걸 참 좋아한다. 고급 영어를 구사한다고 하는 영국 상류층은 이게 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BBC에 보이콧을 하셨다죠?”
“BBC 관계자셨나요…?”
내가 만든 회사에서 유통하는 음악들은 모두 유니버설 UK를 통해 서비스가 되지만, BBC 1 라이브 라운지 사건 이후로 모두 막아 놓은 상태.
지금도 에릭과 시에스타의 곡이 빌보드 차트와 UK 차트 모두 상단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저작권 보호 신청으로 틀지를 못해서 풀어 달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났다.
“관계자라…. 그것보다는 조금 복잡한 관계예요.”
“제가 BBC에 보이콧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만….”
경계심이 피어났다. 알버트의 말 대로라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회사원들이 아니라 대부분은 회사의 소유주.
하지만 BBC는 공영 방송으로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에, 소유주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방송국이니까.
대체 누구길래 공영 방송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때 현악 5중주가 연주하던 음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는 메건과 알버트가 눈에 들어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메건과 다르게 여전히 차분한 특유의 분위기로 걸어오는 알버트.
알버트는 메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메르디스 후작 부인.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버트 경. 오랜만에 뵙네요. 연락을 해도 통 받지를 않으셔서 바쁜가 했더니 이렇게 파티에도 나오시고….”
“후작 부인을 뵙습니다.”
“메건도 많이 컸네요.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아직 숙녀가 되기 전이었는데 말이죠.”
화기애애하다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눈에서 경계의 눈빛을 쏘아대고 있는 모습에서 썩 좋은 사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서 홀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내게 메건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메르디스가 BBC에게 걸어놓은 제약을 풀어달라고 하는 이유를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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