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70
169화
“여왕 폐하가….”
“…….”
윌리엄 5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2차 대전 이후 8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연방을 다스려온 전 여왕의 승하 소식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건강이 악화된 이후 장남인 찰스 왕세자가 섭정에 들어섰었고, 왕의 자리를 손자인 윌리엄 5세에게 넘겨준 이후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버킹엄궁을 떠나 윈저성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들었었다.
조금 전까지 메건과 함께 스키장의 눈밭을 구르며 즐거움을 느끼다 호텔 방에 들어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았지만, 충격적인 소식에 런던으로 향해야 했다.
나와 메건이 그저 영국 국적만 갖고 있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작위를 갖고 있었고 메건 역시 작위 상속자였기에 당연한 일.
런던을 향하는 비행기에서 악보를 넘길 때와 기사 작위를 받을 때 보았던 여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미 100살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꽤나 정정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지.
한 시간 오십 분가량이 걸려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자, 공항 앞에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서가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정현 경.”
“오랜만이네요, 아서. 잘 지내고 계셨나요?”
아서가 준비해 준 차를 타고 저택에 돌아오자, 집에는 주인인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알버트.
“할아버지!”
“오오, 메건…. 어서 오십시오, 이정현 경.”
“알버트 경….”
알버트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마자 전화로 받았던 소식이 꿈이라거나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입헌 군주제도의 영국이었기에 군주에게 별달리 큰 권한은 없었지만, 수십 년간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던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착을 한 것이 새벽이었기에,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런던에 돌아온 첫날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기에 정원의 테이블에 나가 메건과 함께 앉아 있으니, 아서가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에서 밥을 먹었던 일은 꽤 오래전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 여기에서 만났던 날이 기억나네요.”
“그러게요. 바로 여기였는데.”
아침 식사로 나온 베이컨과 베이크드 빈을 그때도 먹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서, 나에게는 진한 차와 크로아상을 주게.”
“네, 알버트 경.”
조금 늦게 나오는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항상 알버트는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늦게 나오네.
“일찍 일어나셨군요. 이정현 경, 메건.”
“좋은 아침이네요, 알버트 경.”
“날씨가 좋아요, 할아버지.”
조금 늦게 나온 알버트 경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기사 작위를 받으시던 날 이후 처음 뵙는군요.”
등 뒤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중후한 목소리로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필립 씨!”
“오랜만입니다. 알버트 경이 내리신 심부름을 하느라 저도 해외에서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알버트의 비서라고 했었던 필립 오닐이었다. 프레스턴에서 런던에 오던 날 나를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그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는 만났던 것이 더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비서라더니 전혀 얼굴도 안 비추고 있었다 싶었는데, 해외 임무가 있었던 거였나.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에 해외 임무라니…. 하지만 군사적인 문제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어두운 표정의 알버트와는 다르게 필립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 위에 있을 페도라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눈에는 둥근 안경이 있었다.
“새벽에 돌아온 필립과 이야기를 하느라 식사 시간에 조금 늦었습니다.”
“장례식이 이틀 뒤로 결정이 되면서 해외에 있는 요원들을 모두 불러들여야 했거든요. 덕분에 꽤 많이 바빴습니다.”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며 알버트가 말을 했다. 그러면 그렇지 늦게 일어난 게 아니라 일찍 일어났지만 일을 하고 있던 거였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몇 년 전과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정현이 평화롭다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런던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그때, 이틀 뒤 진행될 것이라 필립이 정현에게 말했던 여왕의 승하 소식이 대중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큰 별이 졌습니다.]버킹엄궁의 꼭대기에 걸려 있는 영국의 국기 유니언잭과 윈저 왕실의 상징인 로열 스탠다드가 반쯤 내려져서 게양된 화면을 보여 주며, 모든 뉴스에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국영 방송인 BBC에서는 정오에 약 1분가량 묵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정현처럼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수많은 귀족과 요원들 그리고 타국의 수장들에게는 하루 먼저 알리며, 그들이 런던으로 향하는 것에 큰 제약이 없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장례식이 이틀 뒤에 진행된다고 대중에게 알려지자, 각국의 순례 행렬은 길게 이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을 향한 비행기는 모두 매진이 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지금은 버킹엄궁이 아닌 윈저성에 머무르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선왕이었지만, 각국의 순례자들은 모두 버킹엄궁의 철창 앞에 추모를 위한 꽃다발을 가져다 놓았다.
영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국가들의 수장들은 그들의 일정을 모두 취소하며, 한 시대를 지배한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런던에 모였다.
그렇지만 커먼웰스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는 조금 색이 달랐다.
“왕실에 대한 상징성이 너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윌리엄 5세는 선왕에 비해 너무 인기가 없어요.”
영연방이라고도 불리는 커먼웰스에 속한 나라들은 전 세계 4분의 1인 54개국.
공식적으로 연합 왕국에 속해 있는 국가는 고작해야 열여섯 나라밖에 되질 않았지만, 외부에는 커먼웰스의 모든 나라가 영국의 속국인 것처럼 알려진 것을 우려하는 수장들은 지금이라도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연결점은 과거와는 달리 영국의 속국의 개념이 아닌 경제적인 부분이 더 컸지만, 여왕이 없는 커먼웰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더 컸다.
대다수가 2차 대전 이전에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영국의 대표인 윌리엄 5세가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겠지만, 그는 선왕의 곁을 지키느라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소립니까? 커먼웰스를 해체하자고 말하는 거요? 나갈 거면 나가시오. 호주는 남아 있을 테니.”
국민 대부분의 뿌리가 영국일 만큼, 영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 호주와 뉴질랜드는 역사 깊은 커먼웰스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버텼다.
“외부의 시선을 그렇게 걱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다고 알려진 인도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커먼웰스로 인한 이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커먼웰스에 수출입 혜택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에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애초에 유럽 연합처럼 가까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왕의 생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여전히 국가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는 영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열네 개 국가와 인도.
그리고 그저 경제적인 효과만을 바라보고 가입한 나라들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정현이 느끼고 있는 평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
런던 필하모닉은 바빴다.
이틀 뒤로 알려진 선왕의 장례식에 참가하여 연주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리처드 브라운은 상임 지휘자에서 은퇴하여 왕립 음악원의 수장이 되었지만, 이번 장례식에 오랜만에 지휘를 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이 곡이 연주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시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호상 아니겠습니까. 자택인 윈저성의 침대에서 눈을 감으셨으니 말입니다.”
“연습 시작 전에 잠시 묵념하고 시작하도록 합시다.”
예정에 없던 연습실을 찾아 정현이 만들어 놓은 총보를 펼치며, 각종 지시들을 눈에 넣고 있던 리처드와 런던 필하모닉 멤버들.
이들은 이틀 뒤로 다가온 선왕의 장례식에 연주할 장송곡을 위해 영혼을 갈아 넣듯 연습에 매진했다.
“흐흑….”
한참 동안 악보대로 연습을 하던 이들 중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많이 울어 두세요. 하지만 연주를 하면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처음 선왕의 앞에서 이 곡을 선보이는 자리에서도 연주를 했었던 이들이었지만, 감정이 격해지자 자신들이 연주하는 멜로디에 흔들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이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던 연습실에 연습이 재개된 것은 10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감정을 모두 토해낸 이들이 들려 주는 연주는 조금 전에 연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애달팠다. 그렇지만 다시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연습을 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렇게 장례식을 앞둔 런던은 혼란스러웠다.
***
오랜만에 제복을 입어야 했다.
공식적인 국가 행사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아서는 사용인을 몇 명 불러 내가 걸친 검붉은 재킷의 단추를 채우고 금색 밧줄을 걸어 주었다.
“살이 조금 찌셨군요.”
“…그런 말 하지 말아 주세요. 아서가 말하면 또 살 빼야 한다는 압박이 생긴다고요.”
아서는 나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일을 그만두셨다고 들었는데, 런던에서 여유롭게 사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한국에 돌아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일을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죠.”
제복이라는 것은 쓸데없이 입기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어, 입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와 아서의 대화도 길어졌다.
내 말을 끝으로 아서는 옷 입는 것을 마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입고 저택의 로비로 나가자 메건과 알버트가 보였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현관문을 열어 문 앞에 대기 중이었던 차에 올라탔다.
항상 집을 나서는 길에 큰소리로 인사를 하던 사용인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 영국이라는 나라가 슬픔에 잠기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에 타고 장례식이 거행될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에 다니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아무래도 도로를 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인트 폴에 다다르자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기다란 추모 행렬.
그들을 바라보면서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큰 별이 떨어졌다.
여왕이 나를 바라보며 해 주었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차를 마시던 그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대엥-
귓가에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 와 고개를 돌려 성당 쪽을 바라보았다.
성당 앞에 자리 잡은 런던 필하모닉과 그 단원들을 향해 돌아서 있는 리처드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종소리가 끝난 뒤 연주를 시작할 것이다. 종소리는 장례식이 시작되는 알람이었으니.
기나긴 트럼펫 소리로 시작될 테지.
빠아아아아아아-
내가 만들었던 악보에 그려 넣었던 도입부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시작됐네요.”
“네?”
터터텅-
그 뒤를 이어 가볍게 두드리는 팀파니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귓가에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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