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72
171화
계약을 했던 것이 일 년이 지나가도록 연락이 없어서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일.
바로 빈 필하모닉과의 협업.
미리 정해 두었던 계약 완료 시기는 없었다. 교향곡이라는 것이 대중음악처럼 빠르게 만들어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계약의 완료 시기 같은 건 정해 두질 않았었다.
다만 다음에 만드는 곡은 빈 필하모닉과 초연을 한다라는 것 한 가지.
클래식에서 초연은 굉장히 중요하다. 음악의 기본 이미지를 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초연으로 만들어지는 앨범이 가장 많이 팔리기 때문이다.
초연 이후에 편곡이나 해석을 다르게 연주하는 앨범들이 나오더라도, 가장 먼저 나온 앨범에 비해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문제는 1년이 지나 버린 그 일을 이제서야 떠올렸다는 것.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빈 필하고 협연하고 싶어서 난리일 텐데 그걸 잊고 계셨던 거에요?”
“…그럴 수도 있죠.”
세계에서 손꼽히는 클래식 오케스트라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빚을 갚아야 하는 빚쟁이 같은 인상일 뿐인걸.
원래 돈을 빌린 사람보다 빌려준 사람이 더 잘 기억하는 법이거든.
수원이는 몰라도 어머니에게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식당에서 벗어나 거실의 소파에 누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
전화기를 통해 들려 오는 신호음이 귓가에 들린다. 그러고 보니 신호음이 들렸었나 안 들렸었나…. 그런 건 기억이 나질 않네.
[응, 아들~]“나인 건 어떻게 알았대요? 국제 전환데.”
[영국에서 전화 거는 건 아들이랑 메건밖에 없는데, 당연히 알지.]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셔서 그런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네….]묘한 느낌의 대답. 괜찮아졌다고 말하면 굉장히 좋아하실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미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왜지?
어머니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 거실의 소파에 누워 한참을 생각했지만, 왜 그런 건지 이유를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그냥 물어볼 걸 그랬나.
타닥타닥-
아서가 벽난로에 불을 붙이자,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 소리. 이래서 사람들이 불멍불멍하는 건가.
아…. 저 모닥불 사이에 고구마 넣고 싶다.
내일부터는 할 일이 없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한 가지는 이뤘네.
돈 많은 백수. 넘쳐나는 게 시간이다.
건물주가 되어 월세만 받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건물을 몇 개나 갖고 있으니까. 물론, 세를 내준 것은 아니라서 월세가 들어오지는 않지만.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여행을 하려고 했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이 되어서 지금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가는 것도 이상할 것 같다.
겨우 몇 주 전에 CEO를 모두 임명해 놨으니까. 한 달도 안 됐는데 네 자리 내놔 라고 말하긴 좀 그렇잖아?
게다가 이걸 회복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혹시라도 내 안의 내가 변덕을 부리면 또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어린 나의 손을 잡고 멀어지던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이제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은 침대에 가서 주무시죠.”
“담요 좀 가져다주세요. 여기가 따뜻해서 좋아요.”
“방에서 사모님이 기다리십니다.”
“…알았어요, 간다구요.”
내가 홀몸이 아니라는 걸 깜박했구나. 뜨끈뜨끈한 불기운이 느껴져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지만, 아서의 말이 나를 방으로 내몰았다.
***
뉴욕의 브로드웨이처럼 수많은 극장이 줄지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런던 역시 많은 극장들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그의 희곡이 가장 많이 무대에 올라간 지역이기도 하니까.
“오늘은 좀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프레드, 제가 언제 더럽게 청소를 한 적이 있나요. 항상 깨끗하게 하는데.”
“알지, 알아. 그런데 오늘은 더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이야.”
리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런던으로 온 제랄딘.
그녀는 아직 극장을 청소하는 청소부 신세였지만, 언젠가는 무대에 올라가 다른 배우들처럼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누가 오나요?”
자신이 일하는 극장 맘마미아를 운영하는 프레드가 이렇게 신경을 쓰며 말을 한다는 건, 오늘 누군가가 여기에 방문할 거라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제랄딘은 프레드를 향해 물어보았다.
“이정현 경이 오시거든.”
“헙…!”
음악계의 신성이라고 불리는 이정현이 해외에 나갔다고 들었던 것이 1년 전의 이야기. 그런데 그가 영국에 돌아왔다는 것도 몰랐는데, 자신이 일하는 극장을 방문한다는 이야기에 제랄딘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 사람은 음악가잖아요. 연극을 보러 올 이유가 있나요?”
“아니, 그러면 은행원은 은행만 가야 하니? 음악 한다고 음악원이나 콘서트홀만 가는 건 아니라고.”
“하긴, 그렇겠네요.”
프레드의 설명에 제랄딘은 납득할 수 있었다.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모두 펍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유명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극장가라고는 하지만, 이정현을 보았던 것은 신문과 TV를 제외하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듣기로는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다고 들었었는데, 우리 극장에 온다고? 신기하네….’
조금 신경을 써서 청소를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무리 깨끗하게 신경을 써서 한다고 하더라도, 낡은 건물이 새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제랄딘은 이정현이 자신이 일하는 극장에 온다는 것만으로 흥분해서 구석구석 평소보다 열심히 청소를 했다.
빗자루질을 하고 물걸레가 들어 있는 양동이를 들고나와 닦으며, 머릿속의 상상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오~ 미스 제랄딘~ 당신의 연기는 최고였어요~”
물걸레에 달려 있는 기다란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이정현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 상상 속에서 자신은 주연으로 연기를 하고,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의 무대 인사를 이정현이 맞아 주었다.
“흐흥~ 매일 듣는 말이지만 이정현 경이 말해 주니 조금 색다르네요. 칭찬 고마워요.”
청소가 잘되어 가는지 확인하러 다시 돌아왔던 프레드는 그런 제랄딘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
“연극이요…?”
“네, 예약해 뒀었거든요.”
나는 태어나서 제대로 된 연극이라는 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 때 아이들이 연기하는 것 말고는 말이지.
며칠 전에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가 되어서 걱정이라고 메건에게 말을 했더니, 요즘에는 내가 심심하지 않게 해 주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오늘은 뭘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메건이 뜬금없이 연극에 대한 말을 꺼냈다.
“연극 같은 걸 본 적이 없는데, 괜찮겠죠?”
“한 번도 없다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학교 다닐 때 한 번씩은 다 무대 연기를 해 보지 않나요?”
“하하하하….”
“저는 무대에서 나무 2를 가장 많이 했었어요.”
생긴 것만 보면 공주 역할을 해야 할 것처럼 생긴 메건이 나무 2라니. 그러면 주연을 맡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예쁘게 생긴 거야.
그러고 보니, 중세 시대였으면 진짜 공주였을 수도 있겠다. 랭커스터 가문이 왕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니까.
“공주나 기사 역할은 안 해 봤어요?”
“연기에 관심이 없어도 참여해야 했었거든요…. 주연은 보통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이 했죠.”
“그렇구나.”
“오늘 볼 연극은 저도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메건의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하는 것을 보며 웃을 챙겨입었다.
“재밌었으면 좋겠네요.”
***
“이정현 경!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메건과 함께 차에서 내린 곳은 런던 레스터 스퀘어 부근에 있는 작은 극장 앞.
커다란 극장들도 즐비한 곳이었지만, 메건이 예약해 놓은 연극이 상연하는 곳이었다.
내가 연극을 보러 오기로 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눈앞에 달려드는 많은 기자들은 대부분 경호원들에게 막혀서 다가올 수 없었지만, 간간이 마이크나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 두고 소리를 치며 경호원 사이로 손을 뻗는 기자들이 있었다.
내가 살짝 주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메건이 작게 속삭였다.
“제가 극장에 예약할 때 말해 뒀어요. 갑자기 방문하면 혹시나 불편할까 싶어서. 그런데 이렇게 기자들까지 몰려올 줄은 몰랐네요….”
“뭐 그럴 수 있죠.”
극장의 관계자가 내가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흘린 모양이었다.
지금 이렇게 극장 앞을 가로막은 기자들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할 수 없이 한마디라도 해야 했다.
“극장에 오는 게 연극을 보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변에 있는 큰 극장이 아닌 이 극장에 방문해 주신 이유는 뭡니까?”
“메건이 추천했거든요. 재미있을 거라고. 질문할 것 없으시면 저는 이만 극장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서.”
티켓도 본 적이 없어서 언제인지도 몰랐지만,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다 극장에 들어가 앉아 볼 수도 없을 테니까.
경호원이 만들어 준 길을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들려 오는 목소리.
“이정현 경! 이정현 경!”
목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낡은 외투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나이는 대충 20대 초반 정도일까. 대충 묶은 것 같은 연한 갈색 머리에 녹색에 가까운 눈동자와 붉은 입술.
외모만 보았을 때는 꽤나 예쁘게 생긴 외모였지만, 입고 있는 옷이 정말 너무 낡아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왜 저렇게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네?”
내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자, 마치 대답해 줄 줄은 몰랐다는 듯 조금 전까지 그렇게 큰 목소리로 불렀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황하는 여자.
“저…. 사인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종이와 펜은 갖고 계신가요?”
나의 말에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여자는 ‘죄송합니다, 잠시만요’라고 말을 하며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이상한 여자네….”
“푸훗. 이상하긴 하네요.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종이와 펜이 없다니.”
살짝 고민이 됐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사라진 여자를 기다렸다가 사인을 해 주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연극이 시작되는 것을 기다릴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메건이 화장실을 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로비에 경호원들과 남게 되었다.
이러면 마치 내가 사인을 해 주기 위해서 기다린 것 같잖아.
여자들이 화장실에 가면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건지…. 메건이 사라진 화장실만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탁탁탁탁!
“기다려 주셔서, 감, 감사합니다! 여기 종이랑 펜이요!”
기다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고 오해한 여자는 재빠르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네?! 제 이름이요?”
“네. 제 이름을 써 드리는 게 사인인데, 제 이름을 물어볼 리는 없잖아요? 하하하.”
“제, 제랄딘! G E R…”
나는 재빨리 종이 위에 ‘제랄딘에게’라는 말을 붙이며 사인을 마무리하고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제랄딘이라는 여자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밝은 얼굴로 내가 건네준 종이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90도로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여자.
나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해 준 사인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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