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75
174화
영화의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건이 보러 가자는 영화들 중에 블록버스터 영화는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작업한 영화들 위주로 보러 가자는 말을 하는 편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단역이면서 연기로 눈길을 끄는 사람 한 명 덕에 스토리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몇 개월 전에 내 사인을 받아 가서 한창 이슈가 되었던 제랄딘이 영화에 나왔던 것이었다.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에서 보여 주는 주, 조연 배우들의 이름들이 나올 때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에, 출연하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시작하고 나니 조연에 버금가는 단역이었던 것.
신기하네. 뭐 그래 배우가 될 수도 있지.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왜 그래요?”
영화를 보고 나서 멍하니 있던 내게 메건이 말을 걸었다.
“아, 아니에요. 가죠.”
“음악은 어땠어요? 지난번보다는 괜찮았죠?”
젠장. 제랄딘의 연기에 집중하느라 음악을 주의 깊게 듣질 못해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
메건이 작업한 음악일 텐데 여기에서 솔직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지?
“좋았어요.”
내 머릿속에서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터져 나온 방언.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좋았다.
“흐응~? 진짜예요?”
“그럼요!”
“믿어 줄게요. 이번엔.”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하는 메건. 역시 눈치 9단인 만큼 내가 자신이 만든 음악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 버렸다.
처음에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음에 영화를 볼 때는 음악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영화는 크게 흥행했다. 미국의 블록버스터가 인기가 많은 영국에서 한 달이 채 되질 않아서, 손익 분기점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면 굉장히 흥행한 편.
게다가 등장했던 배우들 중에 신예가 꽤 많았었는데, 그들 역시 엄청나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인기를 얻었다.
단역으로 등장했던 제랄딘 역시 뛰어난 연기로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이미지를 알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의 게스트는 얼마 전 뛰어난 연기로 큰 화제를 모았던 분이죠. 제랄딘 그린입니다!] [안녕하세요. 얼마 전 우리들의 여름에서 주인공의 동생 역할을 맡았던 제랄딘 그린입니다. 반갑습니다.]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토크쇼에 나올 정도면 엄청나게 성공한 거지.
“응?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그럴 거예요. 만난 적이 있으니까.”
“우리가 같이 만난 사람이라구요? 누구지…?”
제랄딘의 존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메건. 몇 달 전에 벌어진 사인에 대한 이슈가 옅어지며 그대로 기억에서 지워 버린 듯하다.
머리를 잡고 혼자서 고민하는 메건의 모습이 귀여워 나는 말해 주지 않기로 했다.
“누군지 말 좀 해 주면 안 돼요?”
어지간하면 이렇게 말을 하지 않는 메건이 답답했는지 나에게 물어볼 정도라니.
메건이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그때에도 토크쇼는 멈추지 않았다.
[제랄딘이라…. 최근에는 많이 쓰이지 않는 이름인데 말이죠. 혹시 가명을 쓸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확실히 중세 시대에 가까운 이름이다. 엘리자베스의 경우에는 여왕의 이름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이름임에도 즐겨 썼었지만, 요즘에 쓰이는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스타일리시하지는 않았으니까.
엥? 나?
제랄딘의 입에서 나의 이름이 나오자 메건의 눈초리가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판사님 저는 결백합니다!
의심하는 눈초리에 나는 억울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TV 속의 토크쇼 MC가 대신해 주었으니까.
[이정현 경이라구요? 그와 무슨 관계이신지…?]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활기차고 도발적인 말투로 진행하던 MC의 말투가 조심스럽게 바뀐다.
[예전에 이정현 경 사인 경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 주인공이거든요.] [사인을 팔아서 15만 파운드를 벌었다고 하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구요?!]제랄딘의 고백에 MC는 자리에서 튕겨져 나오듯 펄쩍 뛰며 놀랐다.
어이 PD 양반. 녹화 방송인데 이런 건 편집할 수도 있잖아. 진행자가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나가면 어쩌자는 거냐고.
[이정현 경이 제게 사인을 해 주실 때, 거기에는 ‘제랄딘에게’ 라는 말을 써 주셨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최소한 제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러 주신 거니까.] [오…. 그런 숨겨진 사연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연기력이 출중한 신예 배우라고만 생각했거든요.]제랄딘의 입에서 흘러나온 솔직한 대답.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는지, MC는 경매에서 받았던 돈에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경매에서 얻으신 돈은 어디에 사용하신 건가요?] [그 돈으로 연기 학원을 다닐 수 있었어요. 물론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이지만 만약 사인을 팔지 않았다면, 영화에는 다른 사람이 나왔겠죠. 오디션에 지원할 자격도 얻지 못했을 테니까요.]나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방송의 분위기는 밝았는데, 내 이름과 돈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며 조금 무거워졌다.
토크쇼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지만,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이정현 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제랄딘?] [이정현 경에게 받은 사인으로 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다시 만나 뵈어 사인을 받을 수 있다면 다시는 팔지 않을게요.]TV 화면 속에서 활짝 웃으며 말하는 제랄딘. 겨우 사인 한 장으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줄이야.
영화배우로 데뷔를 했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있구나.
저 이야기를 들으니 어렸을 때 보았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리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동화 속의 공주들.
왕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저렇게 혼자서 성공하는 공주의 이야기도 재밌을 것 같다.
저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멀리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의 소리가 들렸다.
슈퍼 페스티벌 이후 처음으로 떠오르는 음악이었다.
예전처럼 모든 악기들의 소리들로 들려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의 악기로 들려 오는 멜로디.
그 멜로디가 들려 오는 것을 알아챈 순간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수원이가 그랬던가?
영감이 떠오르는 건 한두 마디의 멜로디뿐이라고. 음악을 만드는 건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라는 이야기.
나는 멜로디를 더 잘 듣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저 말이 그렇게 좋아요…? 다른 여자가 고맙다고 하는 게?”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귓가에 들려 오는 메건의 목소리에 당황해서 황급히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배우에 대해 기억도 안 난다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무슨 말이에요.”
“그렇게 흐뭇하게 웃을 정도로 좋은 일이었냐는 말이에요…. 저런 예쁜 아가씨가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말을 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내가 옆에 있잖아요.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럴 수가 있어요.”
메건이 뭔가 굉장히 크게 오해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토크쇼가 끝난 뒤 한참 동안 메건을 달래 주어야 했다.
그래 수원아. 이게 유부남이구나…. 이제야 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동안 놀려서 미안했다.
***
빈 필하모닉 측은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교향악단이었기에, 연주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연주에 쓰이는 시간은 공연 시간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공연을 위해 연습을 하는 시간도 계산되어야 한다.
그 말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위해서 그만큼의 연습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
지금도 쉴 틈이 없었지만, 빈 필하모닉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페터는 종이 뭉치를 손에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는 중이었다.
2년이나 지나간 계약. 기간의 제약 없이 다음 곡의 발표를 빈 필하모닉과 함께하겠다는 이정현과 만들었던 계약서를 만지작거리던 페터.
그 다음 곡이라는 불확실한 계약 사항이 문제였을까.
신곡에 대한 이야기는 계약일 이후 그 어디에서도 들리질 않았다.
매일매일 계약서만 만지작거리는 페터를 향해 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그러게 아직 없네.”
워낙에 곡을 만드는 속도가 빠르다고 소문이 났던 이정현이었기에, 어쩌면 신년 음악회에서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신년 음악회라는 이름의 공연이 두 번이나 진행되는 동안 이정현에게서 그 어떤 연락도 받을 수가 없었던 것.
페터의 한숨이 조금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완료되는 기간이 없는 계약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 계약 사항에 대한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해서 모든 국민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Brrrrrr-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유선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한참 동안 깊은 한숨을 토해내던 바로 그때였다.
휴대폰이 보급된 이후 업무의 대부분을 휴대폰으로 처리했기에, 사실상 비서실 혹은 내선 통화만 해 왔던 유선 전화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벨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외부에서 걸려 온 전화라는 뜻이었기에, 사무총장실은 약간의 긴장감에 뒤덮였다.
대부분 외부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정부 쪽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정부에서 예술계에 제공하는 보조금에 대한 문제일까 싶은 마음에 페터는 조심스럽게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 세요?”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빈 필하모닉의 사무총장님이신가요?]뜬금없이 걸려 온 전화에서 사무총장을 찾았다. 당연히 직통으로 사무총장실에 걸었는데 왜 물어보는 것일까 생각했던 페터.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답변을 했다.
“제가 빈 필하모닉의 사무총장 페터 반 데르크입니다. 실례지만 전화를 거신 분은 누구신가요?”
[저는 이정현입니다. 오랜만이네요.]2년 만에 들어 본 목소리였기에 누구인지 알아채기도 어려웠지만, 이정현이라는 목소리에 페터는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혹시라도 계약을 파기하자는 이야기를 꺼낼까 싶어 초조했다. 이미 대대적으로 홍보에 들어갔던 내용이라 지금 와서 파기한다면 자신들이 입을 손실이 엄청났으니까.
“아, 네.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전화를 거셨는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전화를 통해 들려 온 정현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페터는 긴장하며 들려 올 질문을 기다렸다.
그 밝은 분위기로 계약을 파기하자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은 잠시 뒤에 들려 온 정현의 목소리에 완전히 잊혀져야 했다.
[혹시 동화 좋아하세요?]정현의 질문에 벙찐 페터.
‘이건 대체 무슨 의미로 하는 질문이지? 동화라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페터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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