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77
176화
프로그레스 바가 트랙을 훑으며 컴퓨터의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링 스피커에서 멜로디를 토해낸다.
가벼운 바이올린의 선율로 시작되는 음악. 사용한 악기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두 가지.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악기들.
문제는 사용한 악기가 아니었다.
멜로디가 들려 오는 것과 동시에 메건의 눈앞에 초원이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신고 있던 구두가 사라지고 잔디 위에 맨발로 올라선 자신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멀리까지 보이는 초원의 끝자락에 걸쳐진 숲이 보이고, 몸이 제멋대로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
숲속을 향해 걸어가는 길은 작고 아담하다.
누군가가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가 잔디들은 이미 누워 있었기에, 자신은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했다.
머리로는 겨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상쾌한 여름의 풀 냄새가 느껴졌다.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 숲의 안쪽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간 메건, 눈앞의 커다란 나무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려는 그때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보였다.
“이거 뭐지…?”
88개의 건반을 사용하는 피아노와 4개의 현을 사용해 음을 표현하는 바이올린. 이 두 가지 악기로 만들어진 음악들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라 왔다.
마우스로 화면을 내려 트랙들을 확인했다.
빽빽하게 쌓여 있는 악기 리스트에 보이는 것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단 두 가지뿐.
평소에 정현이 드럼 같은 퍼커션 계열을 가장 먼저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메건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그가 만들었던 곡들과는 전혀 다른 구성.
마치 빨려가듯 몰두하게 되는 멜로디와 그로 인해 눈앞에 보였던 풍경.
자신이 맡았던 여름의 상쾌한 풀 내음마저도 방금 전에 느꼈건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하얀색 회벽에 놓인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미쳤어, 어떻게 이런 곡을….”
영화 음악을 하는 메건은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영화 촬영이 되어 있는 필름을 확인하고 그 위에 배경 음악을 덧붙여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 영화 음악의 본질.
그런데 방금 자신이 들었던 곡은 완전히 그것과는 반대였다.
‘음악이 장면을 이렇게 또렷하게 보여 주다니….’
슈베르트의 처럼 어슴푸레하게 장면을 연상시키는 곡들은 여럿 있었다. 정현이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졌던 곡 역시 추위를 연상시켰다.
그렇지만 이렇게 확연하게 보여 주는 음악은 처음 느껴보았다.
외투를 걸치지 않아서일까. 메건은 온몸에 돋아난 소름이 느껴졌다.
컴퓨터가 혼자 잠들 때까지, 메건의 시선은 한참 동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모니터 안의 프로그레스 바를 향했다.
***
“흐아아암.”
요즘에는 자도 자도 피곤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잠은 잘 수록 는다고 했던 말은 진짜였던 것 같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우씨, 이제는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일어나자마자 옆에서 말을 거는 아서 때문에 진짜 심장 마비에 걸리는 줄 알았다.
“사모님께서 깨우지 말고 지켜보라고 말씀하셔서,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응? 메건이 그런 말을 했다구요?”
왜지? 나를 지켜보라니. 그리고 지켜보라고 말을 한다고 굳이 자고 있는 침대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저씨는 젊을 때 자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인기척을 너무 잘 지운다니까.
침대에 앉아 잡다한 생각을 하는 그때 아서는 재촉하듯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제가 금방 내려갈게요.”
침대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게을러지고 싶지는 않다. 안 그래도 움직임이 적어서 다시 살찌는 것 같거든.
두꺼운 이불을 걷어 내자 겨울의 찬 공기가 느껴진다. 한국처럼 뼈에 스미는 추위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라디에이터 하나로 버티는 건 무리였겠지.
침대 아래에 벗어 두었던 실내화를 신고 내려가 식당에 들어갔다.
“이게 뭐예요…?”
“점심 식사입니다.”
식탁에 한 근은 되어 보이는 두꺼운 스테이크, 밥 한 공기는 되어 보이는 메쉬드 포테이토와 롤빵 두 개가 올라간 접시가 놓여 있었다.
“사람이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드실 만큼 드시면 됩니다. 식탁 위에 올라가 있다고 모두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만약에 식탁 위에 있다고 모두 먹어야 한다면, 무한 리필 고깃집들은 모두 망했을 테지.
꼬르륵-
내 배에서 나온 소리가 아서와 단둘이 있는 식당 안에 울려 퍼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음식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배 속에서 어서 빨리 먹으라며 아우성을 쳤다.
접시의 양쪽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고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두툼한 고기였던 만큼 입안 가득 들어와 씹는 것에 한참이나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리고 그 고기의 덩어리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제서야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던 배 속이 조용해졌다.
“지난번 기억나시죠. 병원에 갔던 날. 그날을 떠올리며 일부러 많은 양을 준비했습니다.”
“아…. 고마워요.”
한 입 두 입. 손이 가는 대로 입에 넣었다.
이 저택의 요리사는 식자재를 꽤 고급스러운 것만 사용하기 때문에, 육질도 부드러운 편이라 몇 번 씹지 않아도 쉽게 목으로 넘길 수가 있었다.
첫 끼부터 고기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게다가 메쉬드 포테이토가 살짝 달콤한 느낌이라 짭짤한 스테이크와 대비되어 더 잘 들어가는 느낌.
이걸 어떻게 다 먹냐고 생각했던 거대한 스테이크와 메쉬드 포테이토를 모두 먹자 접시 위에는 두 개의 빵만 남았다.
“배가 많이 고프셨나 봅니다.”
“그, 그런가 보네요.”
“원래 머리를 쓰는 일이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많은 열량을 소모합니다. 배가 고프신 것이 당연하죠. 지난번도 같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것을 먹었다고 비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져다줄까 물어보는 것 같은 아서의 말에, 접시 옆에 놓여있던 컵의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빵을 바라보았다.
이것까지 다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지가 않은 상태.
평소에는 라면 두 개도 힘들어하던 나인데, 이렇게 많이 들어간다고?
빵을 입에 넣었다.
잼도 버터도 발리지 않은 빵이 입에 들어오자, 달콤한 기운이 입안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 기생충이라도 있는 것 아냐?
결국 두 개의 주먹만 한 빵까지 다 먹어 버렸다.
“저기, 아서.”
“네, 이정현 경.”
“…후식은 뭐죠?”
“…….”
***
쿠르르르릉!
3.9L 8기통 엔진이 뿜어내는 소리가 들려 온다.
사실 차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메건에게 선물해 주면서 알게 된 스펙이었다.
아무튼 메건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온다. 집 안에서도 들을 수 있는 우렁찬 엔진 소리.
저택의 입구부터 현관까지 천천히 다가오는 엔진 소리에 나는 컴퓨터 앞을 벗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 엔진음이 사라졌다. 시동을 끈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었다.
덜컥-
“어서 와요 메건.”
“…다녀왔어요.”
메건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메건은 이렇지 않았다. 언제나 나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으니까. 내가 힘들 때는 항상 나를 바라보며 힘을 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왜 그래요?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메건은 나를 지나쳐 2층으로 연결된 계단에 올랐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혹시 바람이라도 피우는 것 아냐?
의심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좋은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지.
지난 몇 달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을 뿐이었다.
메건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려다 계단의 아래에 멈춰 섰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이 느껴진다. 평소에 감정의 동요가 일어날 만한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인지, 이런 일에도 크게 반응을 하는 것이다.
계단의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작업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작업실의 문을 열고 다시 의자에 앉아 밝아지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손을 대면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작업한 노트들을 바라보았다.
현악 5중주에 피아노를 곁들인 가벼운 음악. 소품이라고 말을 하기에는 조금 긴 곡.
마우스에 손을 얹었지만, 노트를 찍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이 느껴지니 도무지 손을 움직이지 않는다.
“아, 몰라. 좀 쉴까?”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 위에 몸을 뉘었다. 평소 같으면 TV 리모컨을 손에 잡고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재밌는 것이 없나 하고 있겠지.
그런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이런 적이 있었나?
등받이용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발소리가 들려 온다. 집 안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용인들이 곧 퇴근을 할 시간이라 조금은 분주한 느낌.
하지만 도무지 내일 보자고 웃으며 그들을 보내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풀썩-
기다란 소파 옆에 있는 1인용 안락의자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나는 쿠션에서 얼굴을 빼내어 누구인지 확인했다.
메건. 지금 내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은 그 주인공이 앉아 있었다.
나는 메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똑같이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는 얼굴.
사람이 어떻게 변….
“저, 고백할 게 있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혼을 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항상 가벼운 미소를 지어 주던 얼굴에 진 그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세요. 들을 준비 됐으니까.”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출근하기 전에 바람을 피웠단 말이에요?! 어떻게? 누구랑? 이 집에 드나드는 남자라곤 나와 아서밖에 없는데.”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바람이라뇨?”
메건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지며 나에게 되물었다. 바람이 아니었나? 내가 너무 앞서간 건가?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메건이 나를 쳐다보지 못하길래 혹시 바람을 피운 건가 해서….”
“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미안합니다.”
이럴 때는 빠른 사과가 답이다.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메건의 입에서 나올 말을 차단해야 했다.
“제가 하려던 말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작업하신 걸 몰래 들었다는 거예요.”
“음? 그게 왜요? 들어 볼 수도 있지.”
별것도 아닌 일에 고백이라고 해서 당황했잖아.
“그런데 예전에 만드셨던 곡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건….”
더 이상 내 머릿속에서는 완성된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렴풋하게 들려 오는 한줄기의 멜로디를 잡아서 이리저리 살을 붙여 보았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메건이 지금까지 들어 보았던 나의 음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예전과 비교했을 때는 좋지 않다는 말을 하더라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든 방법이 달랐거든요. 그래서 그런 걸 꺼예요.”
“어쩐지…. 완전히 다르더라구요. 저는 전에 만드신 곡들보다 훨씬 좋았어요!”
“그렇겠죠…. 당연히 안 좋…. 네?”
“지금까지 만드셨던 곡들보다 더 좋았다구요!”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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