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18
017화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한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사랑 말고도 국경이 없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더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찾기 쉬운 것은 음악이다.
책의 판매량이나 영화의 관객 수, TV 프로그램의 시청률 같은 객관적인 지표가 21세기의 음악에서는 음원 재생 횟수다.
흔히들 스트리밍 숫자를 말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서비스하는 유튜브나 스포티파이, 아이 뮤직 등 글로벌 서비스를 회사들을 통해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랭킹을 매길 수 있는 동시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TV 프로그램이나 책은 각 나라의 국민들이 원하는 취향이 굉장히 많이 갈리는 부분이기에 제외.
장르나 주제에 관련된 것들이 사회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지표를 보여 주는 것은 영화.
미국의 영화가 미국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하는 것은 전 세계의 박스 오피스 1위를 했다는 말과 다름이 없어진 지 오래.
하지만, 중동이나 중국을 비롯한 미국을 싫어하는 기타 여러 국가에서 미국 영화의 유입이 제한될 수 없기 때문에 예외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덩치가 작다. 영화처럼 화면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작은 이어폰만 있다면 어디서든 즐길 수가 있다.
특별히 특정 국가의 정부에 반감을 보이는 가수가 아닌 이상 한국에서 만든 것을 멀리 있는 국가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그리고 국가별 통계 수치와 전 세계 통계 수치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음악에도 국경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국경이 없고 생명력이 강한 음악의 장르는 다름 아닌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1년 정도의 인기를 끌고 사라지는 대중음악과는 다르게,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거장의 곡들이 수백 년 동안이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정현이 만든 곡들이 스트리밍 사이트에 서비스되기 시작한 것은, 휴가를 마치고 제주도에서 돌아온 정현의 이름으로 저작권 협회에 곡 등록을 마친 것과 동시에 이뤄졌다.
그의 이름이 붙은 곡들은 전 세계 스트리밍 사이트의 연주곡 부문에서 단숨에 순위권에 오를 수 있었다.
교향곡뿐만이 아니라 누나인 정희가 발매한 앨범의 독주곡과 학교 동아리 이름이 붙은 곡까지 순위에 올랐다.
정현 본인은 저작권 등록만 하면 된다고 했으면서 왜 실물 앨범이 필요하냐며 절대 반대했지만, 현재 정현이 만든 법인의 운영을 책임지는 윤주란 교수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초판 1만 장도 기어코 찍어냈다.
정현의 누나인 정희의 1천 장과는 차이가 컸지만, 이것이 정현이 현재 클래식 판에서 갖고 있는 이미지에 비례한다고 말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점에 상품을 올렸다.
물론 그 1만 장은 순식간에 품절되었지만, 원작자인 정현이 더 이상 발매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에 재발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앨범의 수익의 일정 부분을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분배하기로 했기에, 시향 측에서는 아쉬움을 토로하였으나 정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윤주란 교수는 정현의 곡 세 곡 중 성악곡을 제외한 두 곡을 로열티를 내며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어차피 시향 측에서 성악곡은 정현이 아니면 재현할 수 없는 곡이기에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정현의 가족들은 이렇게 좋은 일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제주도에 있을 때 불거져 나왔던 작은 기사 하나가, 넓은 호수에 던진 작은 돌멩이처럼 끝없는 파장을 만들었다.
발단은 한국의 3대 신문도 아닌 변방의 클래식 전문지에서 내놓은 기사.
애초에 클래식 잡지인 는 포털 사이트와의 보도 계약도 연예면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밀어주기 의혹 기사를 연예면에 쓴다는 것은 음악가들 모두에게 싸우자고 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원강현은 이정현 한 사람만을 저격하기 위해서 사회면에 어렵게 올렸다.
사회면에 올리기 위해 편집장을 설득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클래식의 구세주라며 떠받들어 주던, 의 입장을 철회하는 것도 당연했다.
[20대 청년들이 입대를 할 때 아직도 가슴에 와닿는다고 하는 노래가 있다. 바로 故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다.하지만 1986년에 발매하여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이 노래를 부른 故 김광석은 모두 기억하지만, 이 곡을 작곡하고 작사한 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을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진 그가 불후의 명곡이라고 여겨지는 이 곡까지 당연히 직접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전히 노동 계층의 운동권 노래로 익히 알려진 ‘일어나’와 같은 민중가요를 작곡한 김광석은 우리에게 자신이 부를 곡을 직접 쓰고 부른 가수로 알려져 있다. 그가 부른 모든 노래를 작곡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그를 그렇게 여겨지게 만들었다.
이처럼 ‘싱어송라이터’라는 재능이 훈장처럼 여겨지는 곳이 바로 대중음악계였다.
하지만 이 타이틀이 단순히 훈장일 수만은 없는 것은 ‘밀어주기’로 얼룩진 많은 사건들 때문이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위에 언급한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을 그럴 능력이 없는 스타들에게 붙여 주기 위해,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강탈하는 일이 아직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중략….]이렇게 대중음악계에 만연한 것으로 여겨진 ‘밀어주기’와 ‘가로채기’가 최근 클래식으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국내외에 수많은 팬을 보유한 클래식계의 유명인인 이모 씨는 최근 여러 곡을 저작권 협회에 등록하며 작곡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관계자의 제보에 의하면 그는 피아노를 만져 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피아노 독주곡을 만든 앨범을 발매한 것은 물론, 교향곡을 만들었다며 직접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독주곡과 교향곡에 앞서 저작권 협회에 가장 먼저 그의 이름으로 등록된 곡은 대중음악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 당시에는 편곡으로만 등록이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그가 가진 능력으로 곡들을 만들고 편곡해서 저작권 협회에 등록을 한 것일까?
피아노에 손가락 끝도 닿은 적이 없다는 사람이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하는 것이 가능할까?
본 기자가 20년 동안 이 자리에 앉아 글을 써 왔지만 그런 일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밀어주기’와 ‘가로채기’로 ‘싱어송라이터’가 되었던 수많은 스타들로 인해 대중음악계가 병들어 간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한 그들은 악기는 다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모 씨의 이름으로 발매한 곡을 만든 이는 누구인가?
이렇게 ‘밀어주기’로 만들어진 음악가가 죽어가는 음악계를 되살릴 수 있을까?
클래식을 대표하는 인사의 만행으로 인해 재능을 가진 많은 이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볼 것이 우려스럽다.
클래식 전문지 원강현 기자.]
사망한 지 20년이 넘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인 故 김광석으로 글을 열며 강한 어조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기사가 나온 당시에는 큰 파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정현의 공연 실황 앨범이 발매되고 앨범에 실린 곡들이 연주곡 차트를 점령하는 순간, 원강현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거대한 폭탄이 되어 음악계를 초토화시켰다.
원강현이 써 내려간 기사에 정현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폭탄은 음악계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강력한 펀치를 날리며 파장을 이어갔다.
또한 이 기사가 논란이 되자 그에 편승하려는 수많은 하이에나들이 나타났다.
이처럼 자극적인 단어까지 섞어 기사를 내는 것은 물론, 확실한 클릭 수 획득을 위한 이슈 몰이로 심하게는 실명을 거론하는 곳도 있었다.
확정되지 않은 일임에도 실명을 거론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들이 보기에 정현은 성악을 제외하면 다른 능력이 없으니 반박할 수 없다고 여긴 게 컸다.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찌라시 같은 기사라 여겨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정현과 윤주란 교수였지만, 이것이 실명까지 거론하며 눈덩이처럼 커지자 초기에 대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런 논란과는 반대로 음악적 수익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 누군가는 또 이것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해 수익을 번 것이라 여기며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었다.
정현이 볼 때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기사에 쓰인 대로 논란이 커질수록 정현의 정산금은 크게 쌓여 갔다.
이러한 가짜 기사에 실린 정황으로 인해 ‘이정현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모임’이라는 과거 다른 가수에 대한 의혹을 논란으로 끌어 갔던 것과 흡사한 단체까지 만들어졌다.
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고 하였던가.
기사를 접한 수많은 사람들은 정현에게 진실을 보여 달라 요구했고, 정현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재능 없이 다른 이의 저작물을 강탈한 강도가 되어 있었다.
결국 윤주란 교수가 직접 언론에 나서 반박했지만,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정현이 아닌 윤주란 교수를 내세우는 것으로 윤주란 교수까지 욕하며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방학이 끝나 학교에 나가야 했던 이정현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학교 앞에 몰려든 기자들은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지나는 학생들에게 반강압적으로 이정현의 이미지를 깎아내려는 질문에 답을 하기 바랐다.
정현 역시 기자 회견까지 열며 열심히 반박해 보았지만,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현은 억울했다.
자신이 만든 것을 아니라 주장하는 이에게 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자신이 하는 말 자체를 거짓이라 하는 이들에게 대응하느라 지쳐 갔다.
결국, 마지막으로 칼을 빼 들어야 했다.
“소송하죠. 소송할래요. 기자들, 악플러들 모조리 다.”
정현은 윤주란 교수와 장재열 변호사를 만나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나에 대해 기사를 썼던 언론사마다 손해 배상 100억과 1면 사과 및 정정 기사. 일간지는 한 달 게재, 월간지는 1년간. 악플러들에게는 댓글 하나당 천만 원씩과 무릎 꿇고 사과.”
“괜찮겠니, 정현아? 이렇게 사건이 커지면 오히려 너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질 거야.”
윤 교수의 말에 정현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에 대해 더 안 좋아질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윤주란 교수와 장재열 변호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정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이 사건에 관련된 정보, 사람 모두. 제가 공개할 수 있도록 소송해 주세요.”
전쟁이 시작되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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