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27
026화
[이번 역은 프레스턴, 프레스턴.]영국의 기차에서 나오는 방송은 굉장히 불친절하다. 두세 번 반복해서 말해 주는 한국의 대중교통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스피커가 오래되었는지 소리가 뭉개져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이렇다 보니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나오는 방송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수원이 고개를 돌리니 정희가 보였다.
“이번 역이야. 두고 가는 거 없나 잘 챙기고.”
“응.”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온 지 세 시간 정도. 들어 본 적도 없는 프레스턴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물론 기차를 타고 오는 길에 검색해 보긴 했다. 적어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기차에서 내리면서 본 기차역은 분명 지상에 있는 역이었음에도 오래된 건물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플랫폼의 지붕 사이를 가르고 내리는 오후의 햇빛이 쏟아지고, 4개의 플랫폼마다 올라가는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다.
서울역의 기차역이 플랫폼마다 길게 위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처럼 디지털 느낌이라면, 빨간색 벽돌로 만들어진 외벽과 계단을 가진 프레스턴역의 계단은 아날로그 그 자체였다.
그리고 3층에 가까운 높이까지 이어진 기차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계단을 오르며, 수원은 운동을 하지 않았던 자신이 미워졌다.
낯선 땅, 낯선 공기, 낯선 풍경 그리고 낯선 사람들.
여행이라는 것과 낯설다는 것이 생각보다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어 더 많은 체력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런던도 그렇지만 여기도 진짜 오래된 것 같네요. 서울역 구 역사에서 기차 타는 느낌이에요.”
혼잣말 같은 감상이었지만, 답변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서울역 같은 소리 하네. 너 태어났을 때 거기 박물관 됐는데.”
비록 그 답변이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역을 빠져나와 길게 이어진 인도를 따라 큰 길가로 나가,니 왼쪽 건너편에 넓은 초원이 보였다.
‘이게 외국 시골이구나….’
인도를 채운 보도블록이 가지런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깨진 곳도 보였고.
‘여행용 가방이 있었다면 엄청 불편하지 않았을까? 바퀴들이 걸릴 때마다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수원이 생각할 때 쯤.
“이쪽이야.”
자신을 부르는 정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쪽의 깨어진 보도블록을 보면서 생각에 빠져 있던 수원을 두고, 정희와 정화는 오른쪽 길로 가고 있었다.
“같이 가요!”
오른쪽 길을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 전까지 보던 시골 풍경과는 180도 다른 상가들이 나왔다.
차가 두 대는 여유 있게 지나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보도블록이 깔린 길의 양옆으로 2, 3층 정도의 상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이국적.
이 이국적인 상가의 행렬 사이로 수원에게도 익숙한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눈에 띄었다.
“와, 얘네는 개발을 무슨 선 긋고 하나 봐요. 저쪽은 완전 시골 풍경인데 여기는 또 아니네.”
처음 와 보는 도시의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소감을 말하고 있으려니, 이 씨 자매들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너 진짜 서울 촌놈이다. 너 같은 애를 서울 촌놈이라고 하지. 아, 요즘에는 아닌가? 예전에는 드라마 보면 서울 촌놈이라는 말 많이 나왔었는데.”
깔깔거리는 웃음과 함께 놀려 대는 정화.
“이건 한국도 똑같아, 수원아. 사람 사는 쪽은 개발하고 아닌 쪽은 개발하지 않는 거지. 서울 외곽도 개발 안 된 곳은 시골 같아.”
논리적으로 돌려치는 정희.
이 둘이 때리는 원 투 콤보에 살짝 무안한 느낌이 들어 그냥 입을 다물고 따라가자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린 수원은 얌전히 말없이 뒤를 따르기로 했다.
이들의 뒤를 따라가기를 5분이 지나 도착한 커피숍에서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깐 전화하고 올게.”
정희가 자리를 비우고 테이블에는 정화와 수원 둘만 남게 되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정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시선은 휴대폰을 향했다가 밖을 바라보기를 반복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주문했던 음료수가 나왔다고 점원이 말을 했다. 수원이 쟁반에 놓인 석 잔의 음료수를 가져왔을 때는, 전화하러 나갔던 정희가 돌아와 있었다.
수원은 아무 말 없이 가져온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 모인 셋은,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원 역시 시간이 갈수록 떨려오는 다리가 느껴졌다.
“다리 떨지 마. 복 나가.”
정적을 깨는 정화의 말에 정신을 차린 수원의 다리가 멈추었을 때쯤, 커피숍으로 단발머리에 연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어려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여자는 커피숍 안에 앉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수원의 일행이 앉아 있는 쪽을 향해 걸어와 말했다.
“Excuse me. (실례하겠습니다.)”
일행 가운데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정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여자는, 카운터로 걸어가 음료수를 주문하고 돌아와 비어 있던 수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I’m Christine, Christine Rogers. Call me Chris. (저는 크리스틴, 크리스틴 로저스예요. 크리스라고 불러 주세요.)”
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은 크리스는 자신의 음료수가 나올 때까지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정화와 수원이 그렇게 느낀 것은, 음료수가 나온 뒤 정희가 크리스의 말을 통역해 주었기 때문이다.
“현이를 만난 건 3년 전이래.”
크리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자기가 일하는 가게에 자주 밥을 먹으러 와서 인사를 하고 지내게 되었고.”
정희가 통역해 주는 이야기는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3년 전에 자신이 일하고 있는 가게에 밥을 먹으러 손님으로 왔던 정현과 알게 되어,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게에서 주웠던 휴대폰 주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정화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크리스는 한글로 설정되어 있던 휴대폰 글자를 읽지 못해 그림만 보고 연락처 아이콘을 눌렀고, 그 연락처 목록에 나온 번호 중 하나를 눌러 전화를 걸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수원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정화가 뜬금없이 ‘정현이 영국에 있다더라.’라고 했을 때만 해도 정현에게 무슨 일이 생겨 급하게 연락을 받았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 사고가 생겼다거나 큰일이 벌어지는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살짝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긴장감이 풀렸다. 지금까지 움츠러들었던 몸의 근육들이 가볍게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정화의 입이 열리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현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봐봐.”
그 말을 들은 수원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살짝 흥미로워진 얼굴로 크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과 높다란 코. 갈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
어디를 봐도 자신들의 모습과 다른 외국인인 이 사람과 정현은 어떤 사이일지 궁금했다.
“응, 정희 누나 한번 물어만 봐봐. 혹시 모르잖아. 여자친구 같은 걸지도.”
정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 역시 궁금했는지 질문을 해주었다.
“No, We just friend. Well, We don’t know each other as much as that much. (아뇨, 우리는 그냥 친구예요. 우리는 그 정도로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해요.)”
다른 건 몰라도 No 하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수원과 정화는 금세 식어 버린 흥미처럼 식어 버린 커피를 마셨다.
“수원이는 애 아빤데, 현이는 여자친구도 없나 봐.”
정화가 피식 웃으며 실망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크리스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심각했던 테이블의 분위기가 크리스의 웃음으로 누그러졌다.
크리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고 그 말을 정희가 웃으며 통역해 주었다.
“실망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대. 자기가 노력해 보겠대.”
모든 것을 다 좋아 보이게 만드는 따사로운 늦겨울의 햇살이 사라질 때쯤, 넷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어둡고 차갑게만 느껴졌던 영국이라는 나라가 커피숍에 들어갈 때보다는 조금 더 따듯하고 밝게 느껴졌다. 해가 이미 졌음에도.
***
어두운 길에 가로등 불이 켜졌다. 옅게 깔리는 입김이 아직은 겨울인 것을 알려 주었다.
점포의 셔터를 내리는 곳이 몇 군데 보여 수원은 ‘그렇게 늦은 시간이었나’ 하며 시계를 확인했지만 이제 겨우 저녁 7시. 그는 이 어색한 광경에 피식하며 작게 웃었다.
“한국이면 지금 딱 손님 몰릴 시간인데. 그쵸?”
“그러게. 우리가 치킨 먹은 시간이 8시인가 9시인가 그랬을 텐데.”
한국인들이 퇴근해서 직장의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향할 때, 이들 역시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향하는 것은 같지만 직종의 차이가 느껴지질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정화 누나는 무슨 일 해요? 이렇게 평일에 갑자기 해외에 나와도 되는 거예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화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대답이 들려 왔다.
“뭐 그냥 사는 거지.”
얼버무리며 넘어가는 그녀를 정희가 소리치게 했다.
“만화 그려. 웹툰.”
“언니!”
“왜? 뭐가 어때서? 난 네가 그린 만화 좋아해.”
정희는 가볍게 웃어넘겼고 정화는 당황했지만, 수원에게는 정말 의외의 소식이었다.
“그렇구나! 어디에서 연재하는데요?”
“지금은 쉬는 중이야.”
정화는 가볍게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모두 하하 호호 웃으며 깔깔대던 분위기는 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정희의 입술이 움찔거리며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던 그 순간.
“말하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조용히 읊조리듯 들려 온 목소리가 입을 다물게 했다. 이 대화를 듣지 못한 크리스만 이곳에 대한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통역해 줄 사람이 입을 열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현을 매일 볼 수 있다고 했던 펍이 보였다.
3층짜리 건물에 위치한 펍. 거리가 어두워 정확한 색은 보이질 않았지만 1층을 청록색으로 둘러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록색 바탕에 분홍색에 가까운 하얀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눈에 띄게 만들어 놓은 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에릭 클랩튼의 ‘체인지 더 월드 (Change the world)’가 노래와 어울리는 잔잔한 크기의 소리로 흐르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 수 없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 잔잔한 음악은, 이 시끄러운 펍 안에 울려 퍼지고 있는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자연스럽게 섞여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서 흘러나와야 할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소리가 흘러나오는 자리의 끄트머리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친구가 바텐더와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그리웠던 친구의 웃음소리였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