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29
028화
거실에서 눈을 뜬 것은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조금은 낯선 기분이 느껴졌다.
톡. 톡토도독.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적당한 리듬을 갖고 들려 오는 소리가, 오늘은 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어제 술도 마셨겠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현은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딱한 느낌의 통화 연결음이 수화기로 전해지다 에릭의 목소리로 바뀐다.
“에릭, 오늘은 일하기가 좀 힘들 것 같지?”
[일기 예보에서는 오후 2시까지 내릴 것 같대요.]“그래,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할래?”
영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월급이라는 개념이 없다. 사무직에는 보장된 연봉이 있겠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무조건 시간당 임금을 준다. 세금 신고도 시간으로 들어가고.
그래서 자신이 한 주 동안 일한 시간만큼 계산되어 주말에 돈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세도 매주 내거나 아니면 격주로 내게 되어있다.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최저 연봉에 대한 보장이 없는 현장 노동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현은 에릭에게 물어보았다. 짧은 시간이라도 일을 하겠느냐고.
[음…. 오늘 놀러 가도 돼요?]어제오늘, 무슨 날인가 보다. 자신의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8년간 집에 찾아왔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오늘 이 집 안에 머물고 있었다.
“점심에 와. 같이 밥이나 먹자.”
전화를 끊고 커피 머신 앞에 서서 캡슐을 하나 넣었다. 부엌의 한구석을 가볍게 울리는 커피 머신의 진동에, 커피가 내려지는 추출구 아래 놓은 머그잔이 춤을 춘다.
혹시나 떨어질까 하는 마음에 머그잔의 귀를 손으로 잡고 추출이 되기를 기다렸다.
크리스가 일어난 것은 오전 열 시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거실로 내려온 크리스에게 정현은 밀크티를 타주며 스콘을 두 개 꺼내 주었다.
“가는 거야?”
크리스가 물었다.
“어딜?”
크리스는 두 손으로 밀크티가 담긴 머그잔을 꼭 잡고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가잖아. 다른 곳으로.”
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딜 가, 여기가 내 집인데.”
“응.”
그녀는 스콘 두 개를 다 먹고 밀크티의 잔까지 비운 뒤, 왜인지 개운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누나들은 점심때나 되어야 일어날 것이다. 워낙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흐아아암.”
크리스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2층에서 수원이 하품하며 내려왔다.
“커피 한잔할래?”
“좋~ 지, 이제는 커피 안 사다 바쳐도 되나 보네.”
“언제는 사다 바쳤냐. 나중에 돈 다 줬잖아.”
정현이 캡슐을 커피 머신에 넣으며 다른 머그잔을 추출구 아래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드르르르르.
처음 이 집에 이사 오던 날, 사 왔던 커피 머신이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조금씩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고 있는데 뒤에서 수원이 말을 걸었다.
“망가진 거야?”
“하나 새로 사든가 해야지.”
“뭘 산다고?”
“응? 아냐. 아, 너 결혼했다며?”
“응. 3년 전에. 혼인 신고만 하고 식은 못 올렸어. 와이프 배가 불러서.”
“미친놈…. 나는 유치원 때부터 알아봤지. 네놈이 미쳤다는 걸.”
정현은 낄낄대며 새롭게 내린 커피잔을 수원에게 내밀었다. 비가 내리는 한적한 오전을 느끼며 둘은 커피를 마셨다.
“난 정현이 너 살아 있는 거 봤으니 됐다. 하고 싶은 말이 진짜 많았었는데….”
“말투가 무슨, 내가 네 아들도 아니고. 게다가 죽었으면 오히려 연락이 빨리 갔겠지. 장례식은 치러야 할 거 아냐. 그나저나 언제 갈 건데? 수원이 너는 그렇게 막 나와도 회사 안 잘리냐?”
누나들은 걱정도 되지 않았다. 큰누나야 뭐 프리랜서에 가까운 피아니스트. 작은누나는 뭐 하면서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요 녀석은 다르다.
애 아빠인 데다가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니까.
“나는 내일 가야 해. 지금 유지현 신규 앨범 때문에 아마 사장이 죽이려고 할걸.”
“앨범? 졸업 앨범? 앨범 이름이 사람 이름 같네. 유지현.”
“워낙 흔한 이름이잖아. 지현이라는 이름이.”
수원의 말에 정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지, 흔한 이름이지. 아마 유자 사촌 이름도 유지현일 거야.”
정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지현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유자! 크크크. 오랜만에 듣는다. 그러고 보니까 유자한테도 연락 안 한 지가 꽤 됐네.”
“가까이 살면 자주 해. 너나 유자나 친구 없잖아.”
“넌 많은 것처럼 말한다?”
옛날 생각에 한참을 웃고 있는데 수원이 말했다.
“아까 앨범 물었지?”
“응, 너 뭔 앨범 만든다며.”
수줍은 13살짜리 소녀가 그렇듯이 한참을 망설이다 수원은 말을 이었다.
“나 작곡해.”
응? 작곡?
“그래? 난 사장님 찾길래 회사원인 줄 알았는데?”
“음악 회사야. 요즘에는 꽤 있어. 예전에는 연예 기획사 소속으로 많이들 했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정현은 지금까지 수원이 음악을 그만두어서 회사원이 되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자신에게는 재능 같은 건 하나도 없어서, 취미로만 할 것이라 말했었다.
“난 너 음악 그만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음악을 왜 그만둬, 너보다는 좀 못하지만, 나 지금 엄청나게 잘나가는 작곡가야.”
수원은 활짝 웃으며 대답하곤, 정현이 없었던 시기의 자신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대학교, 군대 이야기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의 부인이나 아이의 이야기는 없었다.
보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자식 자랑만 하고 다니는 팔불출이 된다고 하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든 정현이 물었다.
“그럼 애는?”
수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수원이 대답했다.
“내 아이야.”
“그래?”
“응.”
“그래.”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캐묻는, 그런 건 정현의 취향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그때 말하겠지.
잠시 예전의 기억들과 지금의 괴리가, 대화를 산으로 가게 했다.
“아, 너 작곡한다고?”
“응, 야!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작곡가 밑에서 배운 거야.”
“그러냐.”
정현은 수원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2층에서 외장하드를 갖고 내려왔다.
정현이 집을 떠나 세계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들었던 음악들. 집을 나온 뒤 정말 많은 방황을 했다.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한두 번씩은 꼭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음악 소리가 머리에서 들렸었다.
거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만든 것들도 수백 곡은 되었다.
그것들을 모두 음원 소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략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만들었던 것들. 이곳에 머물며 즐거웠던 시간만큼이나 쌓여 갔던 추억들을 이 녀석에게 주는 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마 수원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버려졌을지도 모르니까.
“이거 너 가져.”
정현이 외장하드를 거실의 탁자 위에 올려놓자, 수원의 눈이 커진다.
“몇 갠지 세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열어 보고 괜찮은 거 있으면 쓰고.”
몇 개의 나라에 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곳에서 최소 한두 개는 나왔으니까 양이 꽤 될 거다.
게다가 여기에서 하루에 한 곡씩 펍에서 만들어 불러 보며 그중에 괜찮은 것들은 전부 음원으로 만들어 두었었다.
“야!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
김수원은 이런 녀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뭐 하나라도 빼앗아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단 한 번도 정현에게 사탕 하나라도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동생이 없는 정현에게, 동생 같은 녀석이었다.
“뭔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냐? 별거 아냐.”
내용물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수원은 외장하드를 보며 약간의 의심을 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했다.
“안에 든 게 뭔데?”
“일단 야동은 아니고….”
이걸 기대했던 것 같아서 말하면서 살짝 웃어 버렸다.
“내가 만든 음악들.”
수원의 눈이 미어캣처럼 커진다. 못생긴 얼굴이 실시간으로 못생겨지는 모습을 보았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든가, 마음에 안 들면 집에 가다가 버리든가.”
“이걸… 어떻게 버려…. 미친놈아!”
뒤에 이어진 수원의 말로는 정현의 음악이 아직 연주곡 차트에 가끔 등장한다고 했다. 또 지금 다시 등장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정현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마음이 그곳을 떠났고 몸이 그곳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사람들의 눈이 무서웠고, 가족들이 자신으로 인해 아파해서 도망쳤었다.
정현은 겁이 났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까 봐서.
대화하던 중에 수원이,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느낌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이러면 되겠다.”
“말을 끝까지 해, 중간에서 자르지 말고. 그게 얼마나 사람 피곤하게 하는지 아냐?”
정현이 툴툴거리자 수원은 정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렇게 보니까 양배추 인형 같기도 하고….
“그러면, 외국인으로 등록해서 이쪽 사업체랑 연결하면 되겠다고.”
“뭔 소리야, 그게?”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이놈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정현의 물음에 수원은 바로 대답했다.
“가명 쓰라고.”
정현이 어안이 벙벙해서 대답을 못하자, 수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정현에게 물었다.
“평생 안 돌아올 거냐?”
정현은 그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야, 정현아. 승자가 무대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거야. 권투 경기를 봐. 이긴 사람이 남아서 세리머니 하고 승자 인터뷰할 때 패자는 말 없이 사라지는 거거든. 음악 프로그램도 1등 하면 마지막에 앙코르 송을….”
“여기에 있을 거야. 지금 여기가 내 집이야.”
단호하게 선을 긋는 정현의 말에 수원은 이야기를 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현은 웃으며 말했다.
“놀러 와. 언제든.”
자신의 주방 아일랜드 테이블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는 정현의 표정은 밝았고 행복해 보였다.
한국을 떠날 때쯤 보였던 무기력한 모습의 그가 아니었다.
“그래. 맛있는 거나 많이 준비해 놔. 다음번에는 우리 지유랑 같이 올 테니까.”
수원은 정현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미소를 보여 주는 친구에게 돌아가자며 말을 거는 것이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비구름이 개며 해가 나오고 있었다.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
점심때가 되어서야 정현의 누나들이 일어났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잠이 엄청 많다는 것.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끌고 한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점심에 밥을 같이 먹자고 했던 에릭은, 집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집밖에서 입김만 내뿜다가 납치를 당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한식을 먹어야 했다.
혹시나 ‘한식을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불고기는 누구에게나 괜찮은 메뉴인 것 같았다.
식당에서 나와 후식을 먹으려는 생각에 근처 커피숍을 들어가 음료수를 주문하는데, 에릭이 정현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사부님, 어디… 가요?”
“가? 어딜?”
에릭은 자신의 등 뒤쪽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정현의 누나들과 수원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했다.
“저 사람들이….”
“가족들.”
“네, 사부님의 가족들이 사부님을 데려가려고 온 거 아니에요?”
얘는 또 어디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나 보다. 촌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다 보니, 한국하고 비슷한 점이 많았다.
동네의 온갖 것들에 관심을 두는 노친네들이 많고, 이 집 저 집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소문이 진짜 빨리 도는 것이다.
그래서 시골의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관심을 잘 두지 않는다. 떠날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현 역시도 5년이 지날 무렵까지는 나그네 취급을 당했었다.
아마도 어제 펍에서 정현과 작은누나가 만나는 모습을 본 사람 중에 누군가가, 정현이 떠날 것으로 보였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그렇기에 에릭도 이렇게 궁금해하는 것일 테지.
부모에게 버려진 에릭은 정현을 부모처럼 생각하니까.
19살인 내년에 시설에서 나오게 되면 정현과 함께 살기로 했었다. 그것 때문에도 걱정이 되겠지.
어쩌면 이런 소문을 낸 놈이 바텐더 로스일 수도 있고. 소문의 근원지는 대부분 로스니까.
정현은 경계심을 잔뜩 갖고 바라보고 있는 에릭을 향해 말했다.
“누나들이 놀러 온 거야. 휴가.”
“안 가는 거 맞죠?”
귀여운 강아지처럼 열을 올리며 재차 확인하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정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너 제대로 된 목수 되려면 5년 남았다니까? 내가 어딜 가더라도 너는 키우고 간다.”
그러고 나서야 에릭은 안심했는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정현을 데려가겠다며 소리를 치던 정화와 정희 그리고 수원은, 오래 머물 것 같았지만 의외로 바로 다음 날 돌아가야 했다.
이제는 다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겼다는 말과 같은 뜻이니까.
정희는 새로운 리사이틀과 협주를 위해서. 정화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웹툰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영국에 오느라 웹툰 연재 중인 웹투니아에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 버리는 바람에 사무실이 난리가 났다고 했다. 비축분이 바닥나 그림을 급하게 그려야 했기 때문이라나.
“갈게. 내가 말한 거 까먹지 마. 알았지?”
수원은 정현이 이쪽에서 회사를 차리면, 그가 준 외장하드에 있는 음악들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다고 했다.
정현이 본격적인 음악 작업을 시작하길 바랐다. 그리고 돌아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시 오겠다고 했다. 아이와 와이프를 데리고.
“몸 잘 챙기고, 항상 건강이 최고인 거 알지?”
“내가 무슨 애냐? 내일모레면 서른이야.”
정희와 정화는 맨체스터 국제공항의 출국장에 들어갈 때까지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들어갔다.
출국장의 문 앞에 서서 그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본 뒤에야 돌아설 수 있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닌 것 같으니.
“밥이나 먹으러 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맨체스터의 한인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먹어야겠다.
기지개를 켜고 공항 밖 주차장에 세워 두었던 차에 오르자, 2월의 끝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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