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genius who hates music RAW novel - Chapter 30
029화
정현은 지난번에 크리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들 가잖아. 다른 곳으로.’
그리고 그 말을 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쓸쓸한 옆모습도.
이 도시의 젊은 청년들은 모두 도시를 떠났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곁을 떠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떠나는 사람을 붙잡으려 시도해 보기도 했겠지.
그러다가 자신의 시도가 거절당하고, 거부당하는 과정에서 무기력함을 느꼈을 거다.
그래서 남겨질 자신은 쓸쓸하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차마 여기에 남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크리스는 왜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 이곳에 남았을까?
크리스는 자신과 똑같이 혼자였다.
크리스는 한국 사람들이 영국인이라고 말하면 떠올릴 금발을 가진 여자아이는 아니다. 커다란 눈에 커다란 쌍꺼풀을 갖고 있지만 파란 눈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뚝한 코에 빨간 입술을 갖고 있지만 눈 밑에 주근깨가 보이는 그런 여자아이다.
남자들이 자주 물어볼 때 인형처럼 예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매력적인 여자아이다.
이 동네에 자리를 잡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던 아주 착한 아이다.
몇 살일까? 정현은 크리스의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 동네는 나이를 물어보면 실례라고 생각하는 곳이라, 나이 같은 건 물어보기가 좀 애매하다.
아마도 정현보다 여섯 일곱 살은 어리지 않을까? 아직 서양인들의 외모만으로 나이를 판단하는 건 어렵다. 어떤 사람은 교복을 입었는데, 애가 서넛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자신의 1호 팬임을 자청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현의 편이라 말해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편이 한 명도 없던 낯선 땅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그런 크리스를 떠올리자 밝고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녀를 닮은 그런 음악이.
정현의 발걸음이 2층에 만들어 둔 작업실로 향했다.
***
“어이~ 리!”
냉동식품 전문점인 아이슬란드에서, 저녁에 먹을 피자를 고르는 중이었다.
“여어, 켈리. 여긴 웬일이야? 넌 냉동식품 안 먹잖아.”
여기에는 의외로 냉동식품을 안 먹는 사람이 많았다. 방부제를 걱정한다나. 솔직히 그런 걸 걱정하기에는 걱정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 그거 들었어?”
시골은 소문이 참 빠르다.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데 오늘 아침에 벌어진 일을, 점심에는 이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뭘 들어? 왜 무슨 일 있어?”
켈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크리스틴 있잖아. 팔이 부러졌다던데?”
이런 작은 일이 모두 뉴스거리다. 옆집의 아이도 나의 아이처럼 관심을 두는 곳.
“크리스가? 어쩌다 부러졌대?”
“그 있잖아, 그 누구더라, 유치장 단골손님.”
“콘라드?”
“응, 그놈 패거리들이 길에서 크리스틴을 밀었는데 밀쳐진 곳이 안 좋았나 봐.”
주정뱅이 콘라드는 이 마을 양아치들의 우두머리였다. 어차피 대여섯 명뿐이라 큰 조직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크리스를 보러 가야 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 다음에 내가 맥주 한잔 살게.”
“기네스!”
“그래. 기네스.”
***
“별일 아니야, 그냥 건물 모서리에 부딪혔을 뿐이야.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크리스는 왼팔에 하얀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자식이!”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가 확 땅겨지는 걸 느꼈다.
“안 돼! 화내지 마! 내가 밤에 나왔던 게 잘못이야.”
크리스가 사는 상가는 저녁 6시만 되어도 사람이 없는 곳이다. 밤에 양아치들의 소굴이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
“너… 이번 주 집세는 낼 수 있어?”
크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쪽의 문화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저축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봐야지.
벌어들이는 돈에서 집세와 생활비를 빼면 진짜 남는 게 없다. 매주 집세를 내고 나서 남은 돈이 많은 사람은 스테이크에 맥주를 마시고, 적은 사람은 감자튀김에 맥주를 마신다.
더 없는 사람은 안주 없이 맥주를 마시지.
크리스는 파트 타임으로 로스의 펍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팔이 부러진 사람이 어떻게 펍에서 무거운 맥주잔을 나를 수 있을까.
정현의 머릿속에 수원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업자를 등록하고 가명으로 활동하라는 말.
그 말이 떠오르자 크리스와 자신에게 둘 다 이득이 될 방법이 생각났다.
“가자, 따라와.”
그녀는 따라오라는 정현의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 나왔다.
크리스를 데려간 곳은 이곳에 단 하나뿐인 변호사 사무소.
“상담을 좀 받으려고 하는데요.”
정현이 접수대의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그래요? 어? 크리스 너 팔이 왜 그래?”
아주머니는 정현과 대화를 하다 말고, 정현의 뒤에 있던 크리스를 보더니 소리쳤다.
그녀는 이 마을의 아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동네 어르신들은 전부 예뻐했으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
“넘어져서 다쳤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돌리 아줌마,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에 가까운 아주머니의 이름이 돌리였다. 인형(Doll)처럼 예쁘게 자라라는 이름인 걸로 아는데, 거기에서 살짝 언밸런스가 느껴진다.
이 돌리 아주머니는 마치 자신의 손녀를 보듯 크리스를 대했다.
“댁이 가해자요?”
정현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험악했다.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니에요, 아줌마. 리는 좋은 사람이에요.”
크리스가 양손을 들어 아니라고 크게 어필해 봤지만 믿어 주질 않아서, 그 뒤로도 크리스가 한참이나 돌리 아줌마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 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뭣 때문에 왔다고?”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원하는 걸 말할 수가 있었다.
“변호사님 상담 좀 받으려고요.”
“아,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얘야, 스티브! 스티브!”
돌리 아줌마가 크게 소리를 치자, 안쪽 방에서 남자가 나왔다.
“아, 소리치지 말고 전화를 하시라니까. 그 앞에 설치해 드렸잖아요.”
“전화하면 돈 나가!”
“이건 내선 전화라 돈을 주고 통화하는 게 아니라고요. 지난번에 설명해 드렸잖아요. 엄마.”
변호사는 돌리 아줌마의 아들이었다.
방에서 나온 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 스티브라는 이름의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에서 한국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흠흠.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사무실에 도착하고 30분이 지나서야 변호사와의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스티브가 통성명도 없이 말을 했다.
“크리스의 팔 때문에 오신 겁니까?”
“아뇨.”
영국에서는 회사를 만들 때 구청이나 세무서를 가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와 이야기해야 한다. 집을 살 때도 변호사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
“회사를 만들고 싶어서요.”
“회사요? 어디, 맨체스터에서?”
여기에서 만드는 사람은 없나 보다. 인구가 적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여기에서.”
“그렇군요, 성함이…?”
“이정현입니다. 이가 성이고요. 리라고 불러 주세요.”
스티브가 책상 위에 놓인 노트에 쓱쓱 이름을 적는다.
“업종은요?”
어떤 회사인가. 뭐라고 해야 할까? 업종 분류가 어떻게 되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정현이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있자, 스티브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 회사를 만드실 거냐는 겁니다. 굳이 법정 분류를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얹힌 게 내려가듯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음악을 만들어서 팔 겁니다.”
“음악?”
“네, 음악이요.”
“흠흠, 그렇군요.”
스티브는 다시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두꺼워 보이는 책을 책장에서 꺼내 펼쳐서 읽어 보곤,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면 크리스는 여기에 왜 온 겁니까?”
역시 스티브도 이 동네 사람이다.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겠지. 시골 주민들은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바로바로 물어보는 참견쟁이들만 사는 곳이 여기다.
정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장이 크리스거든요.”
“네에?!”
“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변호사 사무실에 따라 들어왔던 크리스까지 놀라면서, 비명이 터져나가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돌리 아줌마는 문을 열고 방 안을 둘러보며 외쳤다.
“뭐야! 무슨 일이냐! 스티브! 크리스!”
“아! 엄마! 전화 쓰시라니까요!”
“돈 나가!”
회사를 만들 때 필요한 서류는 몇 개 없었지만,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사업장이다.
정현은 상담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면서, 어떤 건물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리, 내가 사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묻지 않던 크리스가 소심하게 의문을 담아 물었다.
“너 돈 없잖아. 이곳에서 풀타임으로 고용할 곳도 없고.”
“으응…. 그렇긴 하지만 리는 목수잖아.”
정현은 크리스를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널 매니저로 고용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돼.”
“…매니저…?”
정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다시 이었다.
“마이클 잭슨, 에드 시런, 로버트 드 니로.”
“응? 갑자기 왜 그런 사람들 이름을 꺼내는 거야?”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크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통점을 생각해내기 위해서였다. 정현은 대답이 없는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슈퍼스타야. 슈퍼스타는 직접 일을 관리하지 않아. 매니저가 관리하지. 그리고 내 매니저는 크리스가 되는 거야.”
커다란 눈동자가 더 커지며 정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은 앞으로 걸었다. 여태까지 걸어 왔던 것처럼.
***
얼마 후 한국의 JHJ 토탈 뮤직 회의실.
“당기는 게 없다니까요.”
유지현은 음원들을 모두 살펴봤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처음에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했을 때만 해도, 데뷔를 하게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만 하며 살 줄 알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음악을 들어 주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요구가 다르고, 자신 역시 달랐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요구를 하나로 합치고 싶었다. 너무 높아져 버린 자신의 이름값에 맞는 그런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지현 씨…. 한 번만 더 살펴보자, 응?”
“아니, 지현이가 싫다고 하잖아. 혁진아. 억지를 쓸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걸 들고 와야지. 없다는데 없는 게 생기니?”
새 앨범의 제작이 지지부진해 달려 온, 체리 엔터 사장 박재경까지 끼어들어 회의실은 시장통 같았다.
“누나, 여기 비즈니스 장소다. 우리 같이 호프집 와서 맥주 마시는 거 아니에요. 체리 엔터 박재경 사장님.”
“우리가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로 부르는 사이는 아니잖아.”
다급해진 정혁진은 주위를 둘러보다 김수원을 향해 말했다.
“김 팀장아, 진짜 없냐? 너 곡 쓴다고 일주일 동안 휴가도 갔다 왔잖아….”
수원은 어이가 없었다. 일주일의 휴가를 받았지만, 한국에 돌아왔던 6일 차에 바로 출근을 했던 탓이다.
“일주일 아니고 5박 6일입니다. 선배님.”
“그래그래, 이번 일 끝나면 휴가 2주일 줄게. 없냐? 없어?”
수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혁진과 지현을 번갈아 보곤 말을 했다.
“있어요…. 있는데….”
혁진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현은 기대감이 무너져서인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직 계약이 안 됐어요.”
혁진은 의아했다. JHJ 토탈 뮤직은 전문 작곡가들의 집단이다. 즉, 외부에서 끌어오는 음원이 아닌, 자체 제작을 주로 하는 회사라는 소리다.
그런데 계약 이야기를 꺼냈다는 말은 외부의 작곡가라는 소리였다.
“어디 사람인데? 체리는 아닐 거고 딴 회사에 있는 건 공식 루트 통해야 하니까, 네가 계약 이야기는 안 했을 거 아냐.”
그때, 수원의 전화가 진동했다. 살짝 신경이 쓰여서 통화 거부를 누르려고 화면을 보는 순간, 발신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수원은 고개를 들어 혁진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될지도 모르겠네요. 계약.”
음악이 싫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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